왜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감사찬양인가?(시편 116편)
(시 116: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시 116:2, 개역)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 116:3, 개역)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시 116:4, 개역)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5, 개역)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시 116:6, 개역)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 116:7, 개역)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 116:8, 개역)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시 116:9, 개역)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 116:10, 개역)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시 116:11, 개역)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시 116:12,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13, 개역)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시 116:14, 개역)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15, 개역)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시 116:16, 개역)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시 116:17, 개역)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 116:18, 개역)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시 116:19, 개역)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 정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
(고후 4:13, 공동)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 ㉠시편 116:10.』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시 116:10(칠십인역)』
보통 원수 개념을 하나님의 원수로 본 것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곧 유대교죠
모든 종교의 대표성이 유대교이니까
모든 인간의 원수 개념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항상 원수 갚을때에 하나님이라는 신을 들먹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바리새인과 정반대 입니다.
바로 그런 바리새인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를 드러내십니다.
알고보니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기적은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말이죠.
오늘 시편 116편을 보면서
많은 설교문을 살펴보니
원수 갚아달라는 불편한 감사찬양 보다
오늘 시편 116편은 그런 내용이 없이 감사찬양을 드리게 되니
보기에 편하다는 겁니다. 불편한 마음이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저는 그 반대로 봅니다.
그 원수를 갚아 주심에 대한 감사로써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 갚아달라는 앞의 시편의 기도에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심에 대한 감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갚음이 빠져서 불편하지 않고 편하다는게 아니라
원수 갚았으니까 속이 다 후련하다고 감사한다는 겁니다.
물론 나의, 개인의, 유대민족의,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이니 말이죠.
그런데 원수갚음이 빠져서
원수갚기가 있을때의 불편함이 이제는 사라져서
편하다 라고 해석하는 자들은
결국 유대교와 같이
예수님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그런점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을
바리새인 보란 듯이 용서하시니까
인간의 원수 개념을 뛰어넘어버리는 원수를 들고오니까 그런 겁니다.
한참 앞의 시편 글, 올린 글에서
시편 73편이네요
성소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원수 갚기 (시편 73편)
시편 2016.01.22 13:21
http://crosslamb.tistory.com/1687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원수는 막 살아도 죽을때까지도 심판도 안 받고
죽을때도 부유하게 고통없이 죽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지키는 자는 마치 심판 받는 듯이 살고
죽을때까지 한시도 고통 안당하는 날이 없을 정도로
죽을때까지도 고통스럽게 죽으니
도대체 하나님 살아계신 것 맞나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악인의 평탄함이 왜 이러냐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인이 잘 되는 꼴을 보니 실족케 되었다고 합니다.
(시 73: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4, 개역)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 73:5, 개역)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 73:6, 개역)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 73:7, 개역)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 73:8, 개역)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시 73:9, 개역)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10, 개역)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시 73:11, 개역)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 73:12, 개역)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시 73:13, 개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4, 개역)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5, 개역)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시 73:16, 개역)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말이죠 납득이 ~~~
그런데 그 도저히 풀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가
일소에 한순간 해소가 되는 겁니다.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오히려 그들의 잘됨이 잘됨이 아니라
지옥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불 속에 들어가서 보게 되니 전도되는 겁니다.
불 속이 살길이고
불 바깥이 죽을 길인 지옥의 모습이다는 거죠.
바로 그 성소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볼게 아니라(유대인,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원수갚기, 번제와 제사)
예수님의 원수를 보게 되는 겁니다.(요나의 표적, 나 같은 원수도 용서하십니까? 인애와 자비)
(시 116:1, 현대어) 『[죽음에서 건져 주시니 고마워라]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살려 달라 울부짖을 때마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주시며』
(시 116:2, 현대어) 『부르짖을 때마다 주께서는 내 소리에 귀기울여 주셨습니다.』
(시 116:3, 현대어) 『죽음의 사슬이 나를 얽어 매고 스올이 다가오는 공포에 사로잡혀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 칠 때』
(시 116:4, 현대어) 『여호와 이름 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살려 주소서. 이렇게 빌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를 보니 이미 벌써 구원했뿠다 라는 겁니다.
그 증상을 누리는 감사이다는 겁니다.
곧 주의 이름에만 영광 돌리는 찬양이다는 거죠.
그래서 감사의 희생제사를 어디서?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의 성전 뜰에서 드린다고 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셔야만 하실까요?
우리의 완악한 수건을 벗기고자
원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겠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소에서 원수가 밝혀지는 겁니다.
(시 116:17, 한글킹)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제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 116:18, 한글킹) 『내가 이제 그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들을 주께 갚으리니』
(시 116:19, 한글킹) 『오 예루살렘아, 주의 집의 뜰들 안, 곧 네 가운데서 갚으리라.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그러니 십자가는 부끄러운게 아니라
불편하기 짝이 없는게 아니라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영광이 되는 겁니다.
너무 너무 기뻐서 맨발로 달려나가서 뽀뽀하고 껴안고
그 앞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출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기쁨이 되는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성소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원수를 보았기 때문에
그 원수로부터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겁니다.
십자가만 알겠다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감히 꾈수 있겠냐고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말이죠.
한마디로 시편 116편은 출애굽사건을 통한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앞으로 닥칠 미래의 일이다는 겁니다.
미래완료로써 현재에 침노해서 현재를 재구성하고 있기에 그 증상을 누리는 겁니다.
믿음의 일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인간의 행함을 과거로 현재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번 금식했다는 둥, 저 친일파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둥, 친일파 세리가 곧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 유대인의 원수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성소 곧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십자가는
부끄럽거나 불편하거나 싫어버린바 된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닌
영광으로써
너무 너무 자랑스러워서
가문의 영광으로 대대손손 가보처럼 물려주고 물려주고 영원히 자랑스러워 하고픈
귀하디 귀한 보물
그 귀한 보배를 드러내고 싶어서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자랑스러운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고린도 후서 4장에서 다시 시편 116편 10절이 인용이 됩니다.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좀 쉽게 표현된 공동번역 곧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고후 4:7, 현대어) 『그러나 이 귀한 보물, 지금 우리들 속에 빛나고 있는 이 빛과 힘은 깨지기 쉬운 그릇, 곧 우리의 연약한 육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영광스러운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고후 4:8, 현대어) 『우리는 사면에서 닥치는 고통에 짓눌리지만 움츠러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에 당황할 때도 있지만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고후 4:9, 현대어)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얻어맞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려 나갑니다.』
(고후 4:10, 현대어) 『우리 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단히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4:11, 현대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나타내 보일 기회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4:12, 현대어)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후 4:13, 현대어) 『시편 기자가 ㄱ)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고, 그 믿는 것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ㄱ. 시116:10)』
(고후 4:14, 현대어)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해주실 것을 압니다.』
(고후 4:15, 현대어) 『우리의 이러한 고난은 모두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분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도 더해져서 주께서 더욱더 큰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고후 4:16, 현대어) 『[믿음의 생활]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겉사람은 시들어 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고후 4:17, 현대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고후 4:18, 현대어)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려움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고후 4:13, 공동)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 ㉠시편 116:10.』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시 116:10(칠십인역)』
내가 믿음으로 나아간다 라고 내가 주체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나를 증상물로 삼아 믿음이라는 주체를 나타내더라 말이죠.
마치 죄수 복에 예수님의 피가 묻어서
피를 자랑함에 있어서
다들 피는 못 보고 죄수복을 보고서
불편해 하듯이 말이죠.
그들은 과거 곧 행함을 보고
성령은 피를 자랑하는 믿음으로만 나아가는 겁니다.
성령의 전인 교회는 교회를 자랑하는게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한다 말이죠.
그러니 귀한 보배를 질그릇 곧 죄인 중의 괴수인 되도않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우리 몸에
장착이 되었으니 이 귀한 보배를 자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겁니다.
나는 그 믿음에 의해 질질 끌려다녀서 믿음의 세계가 이렇다를 목격하는 증인으로써
출애굽의 구원사건의 무조건적인 감사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유 없이 말이죠.
조건에 맞아서 감사하겠다는 것은 종교꾼들이고
조건에 맞는게 하나도 없기에
원인 없는 결과로써
철저한 모순 속에서 감사하는 겁니다.
(시 116:7, 현대어) 『여호와께서 그토록 잘해 주셨으니 나 이제 다시 평안하리라.』
(시 116:8, 현대어) 『혹시 죽지나 않을까 목숨 구해 주셨다. 혹시 울지나 않을까 눈물을 닦아 주셨다. 혹시 넘어지지나 않을까 다리를 붙들어 주셨다.』
(시 116:9, 현대어) 『나는 걸어가리라, 여호와 앞에서. 생명이 살아 숨쉬는 이 세상에서.』
(시 116:10, 현대어) 『나 굳건히 믿음 잃지 않으리라. 야, 이토록 비참하게 되었구나, 생각되어도』
(시 116:11, 현대어) 『누구하나 믿을 이 없구나, 생각들어 무서워 떨지라도』
(시 116:12, 현대어) 『그토록 잘해 주시니 그토록 아껴 주시니 여호와께 무엇으로 다 갚으랴.』
고린도 후서 4장에서
우리는 이 귀한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는데
졸지에 이 보배 땜시 핍박에 놓여지는 겁니다.
맞습니다. 귀한 보배 때문입니다.
질그릇은 깨어져야 귀한 보배가 더 드러난다 말이죠.
그래서 육체를 후패하지만 영은 날로 새롭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으면 후패해도 새롭다고 역설을 주장하냐 말이죠.
분명 육체는 죽음으로 향하는 직행열차를 탄것처럼 날로 날로 죽음의 상황이 덮쳐지는 가운데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는 하루 하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은 이 귀한 보배는 질그릇에서 갇혀서가 아닌 커다란 보배에 질그릇에 접붙임당해서
더더욱 반짝 반짝 빛나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 구원사건을 곧 믿음이 벌린 사건으로써 묘사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질그릇은 깨어져야 마땅하다 말이죠.
귀한 보배만 드러나면 질그릇의 역할은 끝난거다 말이죠.
(고후 4:8, 새번역)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고후 4:9, 새번역)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 4:10, 새번역)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 4:11, 새번역)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 4:12, 새번역)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시 116:10(칠십인역)』
(고후 4:14, 새번역)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0절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가 짊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일들이다는 거죠.
내가 믿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믿음이 그렇게 밀어붙이기에 나는 그 증상물로써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 곧 외부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내부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종교꾼들의 신앙이 아니라
그건 과거의 산물이고
내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나이다
시키는대로 했는데 왜 의문만 남습니까?
의문의 제사의 반복이고
믿음은 7천명이 땡기는 겁니다. 미래완료가 땡기기 때문에
과거를 따지지 않는다 말이죠.
과거의 행동이 옳았다고 여기면 여길수록 더욱더 억울해 하니까
시편 73편 기자처럼 악인이 잘 되는 꼴에 배가아파 실족하고 낙심해서 병까지 들 정도가 된다는 겁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차라리 나도 죽여주이소
이것은 과거에서 따지니
세상사람처럼 이 땅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겁니다.
미래완료가 곧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 라는 외침이
그의 음성이, 천국되신 예수님이,
성소가 되신 예수님이 땡겨주지 않기 때문에
7천명을 남겨두신 원인 없는 결과 땡겨주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지옥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7천명을 남겨두신 그 다 이루심이 땡겨주니까 믿음을 이유 없이 누리는 겁니다.
자 그럼
어떤 번역도 상관없이
어떤 시편 116편의 구절도 상관없이
비교해 보세요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고후 4:8, 새번역)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시 116:1, 현대어) 『[죽음에서 건져 주시니 고마워라]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살려 달라 울부짖을 때마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주시며』
(고후 4:9, 새번역)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시 116:2, 현대어) 『부르짖을 때마다 주께서는 내 소리에 귀기울여 주셨습니다.』
(고후 4:10, 새번역)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 116:3, 현대어) 『죽음의 사슬이 나를 얽어 매고 스올이 다가오는 공포에 사로잡혀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 칠 때』
(시 116:4, 현대어) 『여호와 이름 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살려 주소서. 이렇게 빌었습니다.』
(고후 4:11, 새번역)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 116:5, 현대어) 『여호와, 정의로우신 분. 다정스레 우리를 감싸 주시고 마음 써주시는 하나님. 안쓰러운 것 보시고 어쩔 줄 몰라 가슴 쓰려 하시는 분.』
(시 116:6, 현대어)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는 이를 지켜 주시는 분, 여호와 지친 이 몸 건져 주시도다.』
(고후 4:12, 새번역)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시 116:7, 현대어) 『여호와께서 그토록 잘해 주셨으니 나 이제 다시 평안하리라.』
(시 116:8, 현대어) 『혹시 죽지나 않을까 목숨 구해 주셨다. 혹시 울지나 않을까 눈물을 닦아 주셨다. 혹시 넘어지지나 않을까 다리를 붙들어 주셨다.』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시 116:10(칠십인역)』
(시 116:9, 현대어) 『나는 걸어가리라, 여호와 앞에서. 생명이 살아 숨쉬는 이 세상에서.』
(시 116:10, 현대어) 『나 굳건히 믿음 잃지 않으리라. 야, 이토록 비참하게 되었구나, 생각되어도』
(시 116:11, 현대어) 『누구하나 믿을 이 없구나, 생각들어 무서워 떨지라도』
(고후 4:14, 새번역)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고후 4:15, 새번역)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 116:12, 현대어) 『그토록 잘해 주시니 그토록 아껴 주시니 여호와께 무엇으로 다 갚으랴.』
(시 116:13, 현대어) 『이 몸 건져 주신 주님 고마워 여호와의 이름 부르며 감사의 술을 올리리라.
(고후 4:16,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고후 4:17, 새번역)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시 116:14, 현대어) 『온 백성 모여 있는 자리에서 주께 약속한 것 드리리라.』
(시 116:15, 현대어) 『얼마나 쓰라리시라. 주님의 백성 죽어 가는 것 바라보는 여호와의 가슴은.』
(시 116:16, 현대어) 『여호와여,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을 섬기던 여종의 자식입니다. 주께서 이 몸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고후 4:18, 새번역)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시 116:17, 현대어) 『주께 감사제물을 드리리이다. 주님의 이름 부르며 기도 올리리이다.』
(시 116:18, 현대어) 『여호와께 드리겠다 약속한 것 드리리이다. 주님의 온 백성 모인 자리에서 드리리이다.』
(시 116:19, 현대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집 뜰에서 드리리이다. 할렐루야.』
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성소 곧 예수님의 몸이 오기전까지는
원수 문제는 해결이 안되는 겁니다.
다들 하나님의 원수 개념으로써 하나님 핑계대면서
이 시편 116편을 인용해서 원수문제 해결해 달라고 우기지만
정작 예수님의 원수이고
그 예수님의 원수는 바로 하나님의 원수개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 핑계대고 있는 우리를 겨냥한
출애굽사건
십자가 사건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의 원수냐 라는 겁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의 원수인 다윗을
예수님은 예수님의 원수로 부터 다윗을 건져내시는 겁니다.
왜? 우리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써 원수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고 있으니까
엉터리 원수 개념이니 엉터리 구원 곧 엉뚱한 원수로 부터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
들통나게 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의 원수였음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십자가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싫어버린바 되지
절대로 영광스럽고 기뻐 자랑하는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에게 거리끼를 걸림돌이듯이
우리에게도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불편한 요소를 빼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의 숭고한 얼룩점이 된다 말이죠.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도
이놈의 얼룩 점 때문에 아름다운 그림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 정도로 거리끼는 걸림돌이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이 아름다운 말씀에서
졸지에 십자가가 얼룩점으로 작용하게 되니
자랑은커녕
뽑아 버리고 싶어 죽습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소유했다고 여긴 유대인에게는
십자가가 얼룩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즐길수가 없어요. 주이상스 할 수가 없다 말이죠. 향유 ~~~
그런데 우리 성도에게는 이 십자가가 무한영광이고 무조건적인 자랑꺼리이다는 거죠.
남들은 기겁할 정도로 싫어하는데
인자의 살과 피를 먹어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해도
기겁을 하면서 다들 등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나는 그런 식인종 같은 나쁜놈이 아니다는 거죠.
고급스러운 고상하고 기풍있는
예수님의 기적!! 병고침 오병이어 물위를 걸으심 등등을 보고는 따라가 줄수 있으나
그것은 믿어줄 수가 있으나
살과 피는 못 먹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겁니다. 못 따라 가겠다는 겁니다.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러나 뭘 해도 다 죄임을 아는 죄인은
어디에서도 인자의 살과 피 뿐이다는 것을 알기에
인자의 살과 피 손바닥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피할수 없는 살과 피의 손바닥이기에
주님이 여기 계시는데 어딜 가겠냐 말이죠.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개역)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곧 부정적인 이 죽음이 현실이기에
죽음으로 죽음을 돌파하는 구원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나의 죽음(내 눈물, 내 고통, 내 금식, 내 기도)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갚기이고
내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십자가)으로 죽음(사망의 권세)을 돌파하는 구원의 뿔이기에
예수님의 원수로써 내가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는 인애와 자비의 십자가 라는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가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믿음이 막 등떠밀어요
우리는 믿어봤자 다 엉터리이기에
믿어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진짜 믿음 되신 예수님이
진짜 죽음으로(우리의 죽음은 순 엉터리 죽음일 뿐인데, 정녕 죽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저주로)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십자가의능력으로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등떠밀어서 나아가 걸어가기 때문에
(고후 4:13, 공동)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 ㉠시편 116:10.』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시 116:10(칠십인역)』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듯이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가는 겁니다.
행함이 아닌
댓가가 아닌
조건이 아닌
과거를 따지는 과거의 산물이 아닌
이유 있음 원인 있음이 아닌
미래가 낳은 산물로써
믿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무조건 적으로 말이지요.
십자가의 그 영광이 아니 나타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왜? 이 부정한 십자가가 무조건 옳거든요.
즉 나는 무조건 틀렸거든요. 이유 없이 나는 무조건 무조건 틀린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할 뿐이지요.
나를 자랑할게 없어요. 십자가가 자랑스러워 십자가에서 탈탈탈 털려버렸기에
저 십자가만 옳았다고 외칠 뿐이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우리의 자랑꺼리인 그 감사의 십자가는
자신의 영광을 자신이 받고자 자신이 막 일들을 벌려 놓음에 있어서
그 결과물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우리는 막 누리게 되는 겁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십자가(마음판의 할례)를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아브라함이 말이죠.
그래서 시편 116편을 다윗이 기록하고 있다 말이죠.
그냥 다윗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다윗이 너무 너무 행복해서 말이죠.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감사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완료가
본향 천국이 막 땡겨서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받은 선물을 감사찬양하고 있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이 아니다면 나올수 없는 시편 116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얼마나 마귀적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116편 마저도 물론 시편 전체도 자기들의 힘으로 신앙으로 밀어붙여서 이룰려고 하니 말이죠.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원수문제가 풀린다 말이죠.
성소되신 예수님의 원수이지
나의 원수
유대인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
유대인의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원수인 로마와 이방인 다 사라지고
유대인 자신들의 원수들이 다 사라졌다 칩시다
과연 원수 문제 해결 된 것일까요?
정작 그렇게 외친 자신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원수문제는 그대로 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유대인사상)
예수님의 원수를 봐야지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당께요
그리고 그 원수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
그 구원을 높이 찬양하는 겁니다.
원수 문제 이미 벌써 해결했다고
구원의 뿔을 노래하고
성소 하나님의 성전 뜰에서 감사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원인 없는 결과로 미래완료를 누리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말이죠.
그러나 제사와 번제라는 조건을 따지는 완악한 유대인들과 같이
오늘날 종교인들은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그 의문의 짖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이 필요하지
이 성전을 헐라 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이라는 성소가 필요한게 아니다 말이죠.
저들은 이유 있는
원인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그에 대한 감사를 드리겠다는 완악함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수건을 벗지 않겠다는 심뽀 뿐입니다.
조건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설교도 다 조건을 따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성전을 헐라 가 절대로 나올수가 없다 말이죠.
조건을 헐라
번제와 제사를 헐라
이유 있는 감사를 헐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헐라 가 안되는 겁니다.
오히려 그것 절대 헐면 안된다 라는 거죠.
이게 무슨 감사입니까?
성전을 헐라는 곧 인간의 몸을 헐라입니다.
헐게 되면 그리스도의 몸이 보인다 말이죠.
물론 인간이 스스로 헐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법을 지킨 조건을 갖추겠다는 심뽀죠
그래서 주님이 허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서원제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드리겠다는 것인데
인간이 바치는 것 안 받습니다.
서원이란 주님 쪽에서 주시는 것
갖고 있니? 네 갖고 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그러니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마귀 보란 듯이
마귀만 싫어하는 짖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 잘 가지고 있니?
네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른 표적을 보여줄게 없어요
오로지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용서만
즉 다른 표현으로는
주의 이름만 영광돌리는 겁니다.
그러니 뭐든지 예가 되고 아니라 함이 없는 겁니다.
끝이 예 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예가 됩니다.
아니라 함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쳐해 있어도
주의 십자가의 용서만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육체는 날로 날로 후패하는 죽음 속으로 놓여지지만
그 죽음 속으로 놓여진 자체가
실패나 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영의 날로 날로 새로움을 드러내는 겁니다.
시소
시각장애인 연예인과
눈을 뜬 지체 장애인이
서로 맞바꾸는 겁니다.
육이 후패하면 영은 날로 새롭다 말이죠.
이것이 억울하거나
실패나
서러운게 아니라
본향이 있기에
새로운 몸이 따로 있기에
오히려 껍데기를 시원하게 벗기는
실체만 실상만 나타나고
의문의 것은 빨리 빨리 폐하기를 바라는 기쁨이 넘침입니다.
믿음이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겁니다.
말도 안되는 겁니다.
말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무이다.
그렇게 되면 믿고픈 것만 믿고
듣고픈 것만 듣는 식이 되는 겁니다.
철저한 단절이요 불가능성입니다.
도저히 믿을수 없는 불가능함이 벌어지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짖만 골라서 합니다.
우리는 벌써 포기해 버린 일을 말이죠.
그리고서는 다 이루시고
넉넉히 이긴 그것을 값없이 주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우리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고후 4장에서는 그 선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벌어지는 증상이다고 합니다.
시편 116편에서는 원수의 손에서 구원받은 감사찬양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인간이 싫어하는 짖을 골라서 할까요?
오로지 예수님 자기자신의 피 자랑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넉넉하게 이긴다는 그 믿음을
불도져처럼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 피 용서의 자랑에
우리는 졸지에 증인이 된 겁니다.
쪽박인줄 알았는데
대박입니다.
로또 저리가라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가는 지옥에서 벗어난 이 대박사건
얼마나 당당하면 이 십자가의 피를 밀어붙이겠습니까?
오죽하면 다 잊어버린 출애굽사건을 과거가 아닌 미래완료로써
다윗은 또 터트리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만 무한반복으로 말이죠.
교회 속이든
이스라엘 내부 속이든
바벨론 속이든
지옥 속이든
천국 속이든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이 십자가 대박사건을 터트리는 겁니다.
미치치 않고서는 도저히 기뻐할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에게 미친 자만이 감사하지
그렇지 않은 자는
조건을 따지는 일인 과거를 주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 와! 나 예수님에게 미쳤다
어쩌라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교회로 사기를 치냐고
당당하게 십자가의 피 용서를
의문의 제사에서 못 벗어나는 자들에게 외치십시오.
눈 뻘겋게 해서 달려들거 뻔합니다.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짭니까?
감사찬양이 흘러넘쳐서 주체를 할 수가 없는데
이 십자가의 사랑이 감당이 불감당인데
시편 116편을 찬양하는 찬양자는
이스라엘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야 말로 돌삐 맞아 죽을 일입니다.
에이 그건 오바다
그런다고 누가 죽이겠냐?
아무도 돌삐 안 들던데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돌삐 던졌다 말이죠.
시편 116편 달달 외운자들이 말입니다.
결국 자기들의 경쟁자였던 겁니다.
이런 원수성을 들추어내지 못하는 십자가라면
그런 예수님이란
그런 성소
그런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가짜 뜰입니다. 가짜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다.
이 암덩어리 들통당하지 않고 천국 갈뻔했다 말이죠.
그러면 당장 탈락일텐데 말입니다.
마귀는 그래서 이 십자가를 방해하는 겁니다.
어영 부영 심상치 않게 대충 대충 고치면서
평강 평강 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말이죠.
그러니 사기꾼이지요.
사기란 좋은 달콤한 말을 하는 거다 말이죠.
그래야 속여서 넘어갈 것 아니겠습니까?
삐딱한 소리에 누가 속습니까?
처음부터 듣기 싫어서
아무도 안 듣는데
그러나 원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십자가에
다윗은 감사하는 겁니다.
이 삐딱한 외침이 나 보다 옳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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