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부요함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편 104편)
(시 104: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시 104:1, 개역)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시 104:2, 개역)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시 104:3, 개역)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시 104:4, 개역)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 104:5, 개역)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시 104:6, 개역) 『옷으로 덮음 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시 104:7, 개역)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여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시 104:8, 개역)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시 104:9, 개역)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10, 개역)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시 104:11, 개역)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시 104:12, 개역)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시 104:13, 개역)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시 104:14, 개역)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 104:15, 개역)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 104:16, 개역)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시 104:17, 개역)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시 104:18, 개역)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시 104:19, 개역)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시 104:20, 개역)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시 104:21, 개역)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시 104:22, 개역)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시 104:23, 개역)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시 104: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5, 개역)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시 104:26, 개역)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시 104:27, 개역)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시 104:28, 개역)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시 104:29, 개역)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30, 개역)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31, 개역)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시 104:32, 개역)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시 104:33, 개역)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 104:34, 개역)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시 104:35, 개역)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마지막 구절에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고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고
그로 인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송축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마지막 구절 때문에 앞의 내용들이 나열이 되어 있는 겁니다.
막상 앞의 구절들은 다 좋은 의미 뿐인데
이 마지막 부분이 전복시키더라 말이죠.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부요함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즉 원수 타파입니다.
뉴스타파가 아니라 ㅋㅋ 원수 타파
그렇기 때문에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원수 갚는 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내(예수님) 숙제이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들 원수를 갚을때에 나의 개인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라는 핑계로
원수갚기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제가 촛불집회에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올렸는데
의외로 반발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라는 핑계를 대지 말고
일반인으로써 참여하든지 말든지 라는 취지인데
그럴 것 같으면 말라꼬 질문했겠냐 말이죠.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써 촛불집회 참여여부를 묻는 겁니다.
참 이상하죠
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각하고 싶어할까요?
대중들은 자기들 원수에 대한 앙갚기를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자기마음대로 하는데
너도 니 마음대로 하면 될 것을
구지 그리스도인으로써 참여냐 아니냐를 꼭 묻는다 말이죠.
촛불집회가 축제가 되고 페스티발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 제의 의식이다 말이죠.
지난 주에 영대병원 근처에서 살다 보니
갑자기 불꽃놀이를 밤에 터트리길래
하야 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촛불집회를 축제화 한다는 의미로 불꽃놀이로 하늘에 대고 펑펑 쏜 것이였습니다.
비폭력이니까 괜찮지 않느냐?
축제문화로써 자리잡았으니까 추억으로 삼기에도 좋지 않으냐?
그런데 왜 구지 눈치를 보면서 묻는지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이죠.
하고싶으면 하고 하기싫으면 안하면 그만인데
누가 기침을 하면 자연스럽게 같이 따라하는 식인데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지? 참여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마치 금모으기 운동처럼 일종의 운동이다 말이죠.
나중에는 다 후회를 하던데
왜 구지 이 이야기를 꺼내는고 하니
오늘 본문에서 창조자의 부요함이 넉넉하기 때문에
그 보충물로써 활동하는 것이 원수입니다.
그러니 원수가 활동한다는 것은 곧 주의 부요함이 넘친다고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원수가 뭡니까?
직접적으로 나에게 해를 가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렇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보면서
주님의 부요함을 느낄수 있다는 자체는
인간에게 사실상 있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신다 말이죠.
성령이 하신다 라는 말을 오해를 하기를
그러니까 개방적이다라고 보시는데
아닙니다.
성령이 하신다 말은 인간에게는 없다 라는 단절성이 깔린 겁니다.
그러니까 단절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방이 아니라 차단적으로 차별화 구별화 하기 때문에 사건화 되는 겁니다.
사건은 유독 누구에게만 특별히 보이도록 듣기도록 하시겠다는
일종의 반칙이요 부조리 이다는 거죠.
그 부조리가 누굽니까?
바로 오늘 찬양자 다윗입니다.
다윗이 원수로부터 쫏겨나면서 부르는 노래이겠습니까? (창조자의 부요함)
아니면 원수가 없이 평탄함과 고요함에서 부르는 노래이겠습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사단의 가시 곧 원수의 가시가 몸에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빼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합니다.
그런데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겁니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7, 새번역)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이 구절이 없음』
(고후 12:7, 공동)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후 12:7, 우리말) 『받은 계시들이 지극히 큰 것을 인해 나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나를 쳐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후 12:7, 한글킹) 『지극히 위대한 계시들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에 한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그가 나를 쳐서 자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7, 현대어) 『다만 이 말을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놀라운 경험 때문에 교만해질까봐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병은 사단의 사자가 되어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부족하지 않다. 넉넉하다. 부요하다는 겁니다.
은혜가 말이죠.
내 은혜가 네게 족한 자가 말라꼬 촛불집회를 하겠냐 말이죠.
불만이 있는 자만이 번제와 제사를 드리지
은혜가 족한자는 인애와 자비 뿐이다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소유가 넉넉하다든지
생활 곧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든지
몸이 건강하다든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데도 불구하고
주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원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요하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불가능함을 누리는 역설이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 같으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에 기록되었다는 거죠.
육신은 후패하고 있는데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다고 하니 말이죠.
완전히 정반대이다 말이죠.
자 그런 부요함은 결국 원수들이 괴롭힐때에 더더욱 빛나는데
그 원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 너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이다 말이죠.
멀쩡한 자들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니예요.
아주 아주 지극히 정상인이고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와 별반 다를바 없는 일반인이다 말이죠.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수의 구석을 찾을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주의 은혜가 왜 하필이면 나에게 부어질때에
그 때에 그들은 악령이 씌인 듯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여 발악을 한다 말이죠.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이유 없이 무조건 괴롭히더라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다 말이죠.
즉 이 말은 그들을 그때 자세히 살펴보면 이유 없다는 그것에 의해
아 나도 저들 원수들과 다를바 없는 원수요 가해자요 괴롭히는 자들이기는 매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왠 은혜인지
저들 속에서 빼내시니까
당연히 이제는 역전이 되어서 괴롭히는 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자가 된다는 거죠.
이 원리가 바로 주님의 부요함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제가 그 원수였군요.
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자 속에 나도 그 속에 있었던 원수였는데
정작 십자가의 부요함이 그 원수속에서 빼내다 보니
이제야 그 모습을 거울처럼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너가 저랬어 라고 말이죠.
자 이런식으로 원수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철학책 백날 들따 봐도 원수문제 해결하는 방법 없습니다.
죄문제 해결하는 방법
죽음문제 해결하는 방법 전혀 없어요.
그렇다고 철학책 안봐야 합니까?
나도 그런 사상으로 이미 가득차 있는데!
촛불집회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 답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마음은 거기 가 있는데 자꾸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명찰을 붙였다 땟다 하니까 그런거지
마음이 가 있으면 이미 간 거다 말이죠.
그것 가지고 누가 뭐하 하냐 말이죠.
내가 이미 원수인데 원수를 몰아내자 라고 해 본들
몰아냄을 당하는 원수 같았으면 애초부터 원수 아니였다 말이죠.
(시 104: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제목을 달던데
저는 그 반대로 주의 부요함에 제목을 담으로써
주의 하신 일 중에
어찌 그리 많은지요 그 많음 중에
원수를 세우셨다는 것에서 주의 부요함을 보자 라는 겁니다.
박그네 게이트 최순실 게이트 사건을 보면서
주의 부요함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안 보이니까 촛불을 들어서 몰아내자 라는 겁니까?
십자가의 부요함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말이죠.
여성들은 한국의 첫 여자대통령이다고 여성의 사회인권이 높아졌다고 지래 자의적인 해석을 했습니다.
또 누구는 부모 잃은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으로써 잘되기를 바랬고 말이죠.
다들 선한생각으로써 바라봤는데 알고보니
부모 말도 전혀 안듣는 무당에게 빠진 자라고 결론이 나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거다 말이죠.
여타저타 어찌되었든 자기 기대치가 무너져도 너무 무너지게 되니까
바꿔지기를 바래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나오는 겁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룟유다가 저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기대치에 안 맞으면 팔아버리는 겁니다.
물론 가룟유다의 배신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상 예수님의 배신이였다 말이죠.
나의 원수를 왜 안 갚느냐 에 대한 배신을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말이죠.
왜 이스라엘의 원수인 로마로부터 해방을 왜 안시키냐 말이죠.
왜 하나님의 원수를 갚지 않냐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갚았다 칩시다.
과연 찬양이 나올까요?
주의 부요함이 나올까요? 라는 점에 있습니다.
유대인이 왜 계시록에서 사단의 회 라고 나오는고 하니
십자가의 부요함을 쳐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원수 갚아 달라는 거죠.
즉 복음서에 나오는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여전히 예수님께 요구한다는 겁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치가 고작 그것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을 메시아의 기준으로써 유대인들은 요구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원수갚기가 일종의 마귀가 바랬던 바 이다는 겁니다.
엉뚱한 원수 잡아 놓고서 과연 찬양이 나오냐 말이죠.
제대로 된 원수가 아니면
괜히 원한만 만들어서
오히려 돌고 도는 매듭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더 뫼비우스의 띠처럼 더 꼬이는 거죠.
그러니 십자가의 부요함이 아니면
다른 키 열쇠는 없다는 겁니다.
원수 문제 평생 못 푸는 겁니다.
땅에서 매이니까 하늘에서 매듭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 16:19, 개역)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8: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3, 개역)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개역)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개역)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개역)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20, 개역)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21, 개역)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개역)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7, 개역)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8:15, 개역)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6, 개역)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마 18:17, 개역)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 18: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개역)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개역)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1, 개역)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3, 개역)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개역)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개역)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개역)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개역)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8, 개역)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개역)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개역)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개역)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 18:32, 개역)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개역)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개역)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 18:35, 개역)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이 마태복음 18장과 시편 104편을 나누면서
도대체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느냐 라는 베드로의 질문이 너무 너무 정당하고 보입니다.
그러니다 틀렸습니다.
양 99마리를 버리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는 목자의 비유 그 다음 내용입니다.
분명 처음 혼자 범죄한 형제에게 권면할 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라 라고 합니다.
(마 18:15, 새번역)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또는 '신도'』
단둘이만 상대해서 충고하라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듣지 않았다.
그러면 두 세사람이 가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니라
물증확보 라는 법적인 차원입니다.
나 분명 용서 전했다
두 세사람 증인 있다 봐라 라는 식입니다.
이게 무슨 용서입니까?
용서가 아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요?
맞습니다.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가 생각나지요.
(마 18:16, 현대어) 『그러나 만일 듣지 않거든 ㄹ)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모든 사실이 확증되도록 하라. (ㄹ. 70인역 신19:15)』
(고후 13:1, 현대어) 『[마지막 경고와 인사] 내가 여러분을 방문하려는 것이 이번으로 세번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이제 여러분을 방문하기에 앞서서 하는 세번째 경고입니다. 성경은 ㄱ) `어떤 악한 일이든지 두세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ㄱ. 신19:15)』
(딤전 5:19, 현대어) 『장로에 대한 불만을 고발하는 경우 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없이는 곧이듣지 마시오. (ㄴ. 70인역 신19:15)』
(신 19:15, 개역)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그 다음 3차에서는 두 세사람도 모잘라서 이제는 교회까지 동원하는 겁니다.
(마 18:17, 개역)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러니 처음에는 용서 그 다음 2차는 물증확보 용서하지 말라 3차는 더더욱 용서못하겠다는 겁니다.
자 이것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뜻이다는 겁니다.
두 세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우와 무섭죠
(마 18: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개역)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개역)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1, 개역) 『그 때에
바로 그때 우리를 대변해 주는 마음으로 베드로가 나서는 겁니다.
아 그럼 용서하기는 하는데 용서를 너무 많이 해 버리면 이 용서를 무시할테니까
용서를 몇 번까지 하라는 겁니까?
제 생각에는 7번이 적당할텐데 말이죠!!
라고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겁니다.
아 그런데 예수님은 또 다시 뒤짚어 버려 전복시키는 겁니다.
베드로 너가 말한 7번에 곱하기 70을 하라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용서 하라는 말인지? 용서하지 말라는 말인지?
일만달란트 비유랑 똑같은 결론이 나는 겁니다.
즉 너는 용서를 해석 못한다는 겁니다.
용서 하라꼬 해 놓고서는
용서 못하는 너다 라는 겁니다.
기껏 고작 용서를 해석한 꼬라지가 겨우 7번이다는 겁니다.
좀 더 나은 해석하면 8번 9번 10번 20번 30번
이 말은 너는 용서를 해석할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시편 104편이 그렇습니다. 실컷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끝은 원수진멸로 결론이 납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부요함이다고 합니다.
시편 104편을 달달 외운 어릴적부터 몸에 새겨버린 유대인이
이 시편 104편을 과연 해석 제대로 했냐 말이죠.
결과적으로 해석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였으니 말이죠.
예수님은 시편대로 행하셨는데 말입니다.
결국 시편은 예수님이 오셔야 해석이 됩니다.
그 이전에는 해석 못해요
예수님이 오셔도 해석 못하는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곧 우리들인데
무슨 수로 해석을 합니까?
인간은 십자가를 해석 못합니다.
용서도 해석 못해요
찬양도 해석 못합니다.
구원도 해석 못한다 말이죠.
그러니 죽음도 사망도 마귀도 원수도 해석 못한다 말이죠.
그러니 거꾸로 봐야 합니다.
저는 해석 못합니다 그러니 용서 할게 아니라 용서 받아야 할 판국입니다에서
졸지에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졸지에 열쇠가 되어서 다 풀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베드로의 7번 용서로 아무리 자물쇠를 열어도 열리기는커녕
더 꼬이는 겁니다. 매듭이 더 엉껴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라는 키 열쇠로 푸니까 다 풀리는 겁니다.
어떻게?
제가 7에 70번 용서 받아야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는 자에게만
이 매듭이 다 풀리는 겁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인데
남을 7번 용서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원수 짖이 아니고 무어냐 말이죠?
완악한 유대인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 곧 사단의 회와 다를바 무어냐 말이죠.
어머니께서 사마라인을 예수님이 억수로 챙기더라 라는 질문으로 인해
엄청나게 제가 힌트를 삼아서 안풀리던 의미들이 다 풀리더라 말이죠.
저번에는 재원씨가 죄수복을 입은 피발린 자에 대한 질문 덕분에
엄청나게 십자가의 부요함을 누렸는데 말이죠.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행음 곧 우상숭배 문제가 계속 몇 번을 고쳐써도
뭔가 표현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였는데
오늘 이 부분을 통해서 다 풀리는 것이다 말이죠.
원수는 원수인데
원수에 대한 원수로써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이것이 푸는 열쇠입니다.
곧 십자가의 부요함이다 말이죠.
이 십자가의 부요함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 아니면
사단의 깊은 것 곧 내 쪽에서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것이
바로 시편 104편을 도저히 풀수 없는 유대인이였다 말이죠.
아무리 어릴적부터 외워도 소용없다 말이죠.
해석 자체를 예수님에게 뻔뻔스럽게 맡겨야 하는데
자기 쪽에서 풀려고 하니 졸지에 예수님이 더 미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캬 기가막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것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촛불 집회 다섯 번으로 박그네를 용서해줄테니 하야 하라고 합니다.
7번 까지 해도 안내려오면 진짜로 화낼테다 라는 식입니다.
처음 한번부터 이미 화 났으면서 말이죠.
그러나 7에 70번 용서 받읍시다 라고 촛불집회 여는 자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써 촛불집회 참여하자 라고 해도
내용은 저들 사단의 회처럼
인간 쪽에서 용서를 해석하고자 하는 식이지
주여 제가 주님의 원수입니다. 용서 해 주십이요 라고 촛불집회 여는 자가 없다 말이죠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상한심령은 없다 말이죠.
그래서 섬유산업으로 부요한 두아디라 교회가 돈으면 뭐든지 열심을 내던 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열심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것 주님이 칭찬했지요
그러나 이세벨의 행음을 곧 우상숭배를 허용하고 있다고 책망 받는 겁니다.
이 탐심(우상숭배)가 뭘까요?
이들 두아디라 교회처럼 우리 또한 돈에 환장한 자 아니냐 말이죠.
용서를 해석 못하는 입장처럼
우리는 탐심 곧 우상숭배 조차도 해석 못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돈도 해석 못한다 말이죠. 돈을 못 넘어서는 겁니다.
죄를 못 넘어선다 말이죠.
이것 때문에 계시록공부를 몇 번을 고쳐섰는데 다시 적어야 할 판국인데
곧 원수 문제인데
정작 사마리아인들이 과거의 이세벨의 우상숭배가 들어옴으로써 사마리아교 곧 우상숭배교가 자리잡게 되었으니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을 당연히 철천지 원수로 취급할 수밖에 없잖아요.
오늘날 일제 잔재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매국노 친일파 들이 중요 요직을 다 잡은 것이 아직까지 내려와서
지금 이 순실게이트 그네게이트가 되어 사회전반에 뿌리내려서
체질적으로 적개심과 분노로써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이죠.
그럼 그거 해결 되면 과연 제대로 돌아가냐 말이죠.
그거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냐 말이죠.
더 꼬이는 겁니다. 더 매입니다.
돈 사랑 안할래 나는 우상숭배 안 할꺼야 나는 탐심 다시는 안 부릴꺼야? 소용없습니다.
더 매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십자가의 부요함을 보시면 됩니다.
그런 것들은 더 의문의 반복이 시작될텐데? 말이죠.
분명 친일파도 다 제거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내부에서 전혀 새로운 나쁜사마리아인이 등장하면 어떻게 하실려고?
아니 나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나쁜 그리스도인이 등장하면 어떻게 할려고?
또 개혁하자고 또 촛불 집회 할려고?
앞으로 등장할 대통령 또 마음에 안들멸 또 촛불? 언제까정? 어차피 반복인데???
땅에서 용서란 풀릴 리가 없습니다.
7번 남 용서 7번 촛불집회 백날해도 용서를 풀수가 없습니다.
포기하자 말이죠.
오히려 정작 내가 박그네 보다 더 나쁜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7에 70번 용서함을 받아야 할 입장에 놓인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 때
이것이 십자가의 부요함이 덮쳐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남을 7번 용서할까요? 8번 용서할까요 라는
용서를 해석하고자 하는 차원에 놓이다 보니 도리어 원수가 되는 꼴이다 말이죠.
원수를 원수가 용서하는 용서는 없다 말이죠.
그러니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도리어 원수로써 용서 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진 것 뿐이다는 겁니다.
백번 만번 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내가 하나님의 원수인 이방인이요 세리이다 라는 것을
그래서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원수 중에 원수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원수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아닌 자를 부르러 오신게 아니다 말이죠.
오로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그 사람에게만 오로지 십자가의 부요함이 넘치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마귀처럼 이 7에 70번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게 됩니다.
주님은 일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로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용서를 우리 인간 쪽에서 해석하는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해석 당함으로써
용서 받아야 할 원수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용서라는 고마운 심판이 아니였다면
십자가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했다 말이죠.
다윗은 이 십자가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고 우리가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고
주의 이름을 송축하고 있습니다.
그 불가능한 찬양을 넘치도록 부요하고 누리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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