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손으로 지을수 없는, 버림받은 돌(진리, 하나님), 머릿돌(예수님)이 되는 천국 집() 완성(새언약 완성) (시편 188)

 

 

(118: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2, 개역)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3, 개역)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4, 개역)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5, 개역)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118:6, 개역)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118:7, 개역)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8,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118:9,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118:10, 개역)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1, 개역)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2, 개역)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3, 개역)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118:14, 개역)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18:15, 개역)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118:16, 개역)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118:17, 개역)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118:18, 개역)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118:19, 개역)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18:21, 개역)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8:23, 개역)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4, 개역)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118:25, 개역)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118:26, 개역)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118:27, 개역)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118:28, 개역)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118:29,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 118:26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21:9, 공동) 그리고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 시편 118:25-26.

 

(21:42,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 118:22;23

(21:42, 공동)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 시편 118:22-23.

 

(23:39,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118:26

(23:39, 공동)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 입으로 찬양할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 시편 118:26.

 

(1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118:25; 26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여기에는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11:10, 새번역)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9, 공동) 그리고 앞서가는 사람들과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11:10, 공동)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 시편 118:25-26.

 

(12:10, 새번역)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 118:22; 23 또는 '모퉁이 돌'

(12:10, 공동)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 시편 118:22-23.

 

(13:35, 새번역)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118:26

(13:35, 공동)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 예레 22:5. 시편 118:26.

 

(19:38, 새번역)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 118:26

(19:38, 공동)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20:17,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 118:22 또는 '모퉁이 돌'

(20:17, 공동)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신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냐? / 시편 118:22.

 

(12:13, 새번역)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 '구원하여 주십시오!' 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찬양에서 쓰임 118:25; 26

(12:13, 공동)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 시편 118:25-26.

 

(4:11, 새번역)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 118:22

(4:11, 공동) 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 시편 118:22.

 

(13:6, 새번역)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 118:6; 7

(13:6, 공동)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편을 들어 도와주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누가 감히 나에게 손을 대랴!" / 시편 118:6.

 

(벧전 2:7, 새번역)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 118:22(칠십인역)

(벧전 2:7, 공동) 그러므로 이 돌이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며 / 시편 118:22.

 

 

인간이 집에 대한 집착 곧 공간이라는 집착은 곧 생존과 연관이 됩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즉 공간이 없다 국가가 없다 라는 것은

보호막이 없고 쉴 곳이 없고 이 추위에 바람막이 하나 없는

벌거벗겨진 상태와 같은 떠돌이요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가 되는

죽음의 상태 저주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또 몸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몸은 곧 공간이다 말이죠.

 

시리아 난민처럼 그 어떤 곳에서도 머물수 없는

유럽 국가 그 어떤 곳도 피난처가 되지 못하고

다들 쫏아내기 바쁩니다.

 

자 그렇다면 토지 공간 집 또는 천국 등등은 인간이 해석할수 없게 됩니다.

찬양을 아무리 인간이 소유하고 근접했다고 우겨도

해석 불가 이다고 했습니다. 단절이니까 말이죠.

그럼 토지 땅 공간 집 천국은 해석 불가이고

방금 위에서 언급한

고아 과부 나그네도 결국 해석불가입니다.

 

나는 고아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 맞지요?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고아는 예수님 뿐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많은 과부 중에 한 과부

많은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입니다.

즉 문둥병자라고 해서 개방이 되고서 연결이 되는게 아니라

문둥병자 중에 문둥병자로써 단절이 되고 차단이 되는 겁니다.

 

즉 인간 쪽에서 해석 한다는 자체가 허용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절성입니다.

오히려 단절성을 느낀 자가 오히려 주여 그저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침으로써

그런 자만이

주님이 해석을 부어주시는 겁니다. 곧 성령입니다.

성령은 단절에서 나온다는 거죠.

이것은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인데 어떻게 해석이 됩니까?

해석이 되어버리면 원인 있는 결과가 되어버리는데 말이죠.

 

해석불가입니다.

무슨 수로 해석합니까

가장 좋은 해석이라고 내놓으면

움직여버려서 틀리게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틀렸다고 여겼던 사마리아 철천지 원수와

매국노 친일파 세리 강도 죄인 문둥병자 실로암소경

등등이 이유 없이 맞도록 하는 움직이는 사랑이 무조건 옳게 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의도적으로 갖춘 것을 다 비켜가는 식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다 필연화 시키니까 말이죠.

그래서 모조리 다 우연화 시켜버리는 겁니다.

 

오늘 시편 118편에서 의인이 의의 문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의인이 되어서 의의 문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의의 문이 다가와서 의인으로 삼아버리니까 그렇게 된 거다 말이죠

무시험 합격처럼 말입니다.

 

(118:19, 개역)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18:21, 개역)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8:23, 개역)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의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갈수 없는

문 자체가 주도권이 있지

문에 들어가는 자가 주도권이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니 의의 문도 해석 불가요

의인도 해석 불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이 시편 118편을 보고 얼마나 외우고 얼마나 실천을 했겠냐 말이죠.

의인의 삶을 살았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그들은 못 들어가고

오히려 의인을 죽여버렸다 말이죠.

 

그 죽임당한 의인이 오히려 의의 문에 여호와의 문에 들어간다 말이죠.

죽여버리는데 성공해 버리면

못 들어가잖아요.

죽었으니까?

그런데 들어가더라 말이죠.

 

오히려 살았다고 우기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못 들어갑니다.

마치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보라고 했는데

고개 돌리는게 뭐가 어렵겠냐 말이죠.

그런데 못 돌리는 겁니다.

완악한 수건을 쓴 채로 무슨 수로 돌리겠습니까?

 

이상하게 못 돌리듯이

이상하게 살아있는 자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 쪽에서 이 문을 해석하는 자는 없게 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천국 곧 여호와의 집을 해석할 수 있는 자는 없게 되는 겁니다.

 

문 자체가

집 자체가

천국 자체가 와야 합니다.

 

문도 집도 천국도 모조리 다 인물 개념입니다.

의인만이 인물 개념이 아니라

 

의가 인물입니다.

의가 인물이고 다시 의인으로 인을 붙이게 되면

인물 중의 인물인 이중인물이 되는 겁니다.

 

여기 인물 중의 인물에 인간이 끼여들 구석이 없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외부에서 봐야지

 

내부에서 아무리 의를 추구하고 의인의 삶을 추구해도 모조리 이유 없이 거짓입니다.

 

정작 이 상황을 이 단절된 상황을 직시 못하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가 아니라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세리처럼 토색치 않았고

저런 인간들처럼 살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최순실 박그네처럼 살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감히 어느 안전에서 그딴거를 내 미냐 말이죠.

 

상황을 인식 못하는 겁니다.

그네 언니처럼 말이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주의 영광 앞에서 타 죽어야 마땅하구나

라는 죽어서 끊어져야 할 판국임을 모른다 말이죠.

 

이 시편 118편을 보면서

끊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합니다.

즉 끊어버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봐 버렸기에

주의 영광을 봐 버렸기에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할지어다 라고만 외친다 말이죠.

 

내 쪽에서의 의를 갖추어서가 아니라

그런 의도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 빼면

순금처럼 순의로움이 불순물이 다 빠져서 나와야 하는데

인간의 의를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빼니까

순금이 없어! 없어도 너무 없어!!

모조리 불순물이였다 말이죠. 모조리 다 가짜.

 

그래놓고 어디서 감히 성전 안에서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그것을 내미냐 말이죠.

그 자체가 배설물 똥덩어리 불순물인데

순금이 안 나와요

순의로움이 안 나온다 말이죠.

 

그렇다면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순금 그 자체

의 그 자체가 와야 한다 말이죠.

율법을 지켜서 순금이나 의로움을 갖추는 내부방식이 아닌

외부에서의 의 자체가 순금 자체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전에 부합되기 위한 의를 갖추는게 아니라

성전 자체가 오면 되는데

그 성전 자체가 의요 순금인 거룩 그 자체로써의 공간인 몸이다는 거죠.

 

그 몸을 그 성전을 우리는 버렸는데

그 몸이 머릿돌이 되는

누가 봐도 마땅한 모퉁이 돌이 되는 겁니다.

 

결국 요나의 표적이란 우리가 분명히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을때에

분명 버렸던 자신의 행위가 있었기에

머릿돌이 됨에 있어서 반박을 할수 없는

보편성 그 자체가 된다는 겁니다.

 

분명 내가 반대했던 자인데

지금은 찬성 할 수 밖에 없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이다는 거죠. 즉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또 분명

내가 불 속에 집어넣었는데

화형시켰는데

그 불 속에서 도리어 나를 구원하는

그 증거물

도장 도장끈 지팡이로써

구체적인 보편성을 이루는 겁니다.

나는 배신 했는데 그는 그 배신을 견디고 오히려 세 번 부인한 자를

사랑하더라 인자하심이 인애와 자비하심이 영원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그는 나 보다 옳았다 라는 겁니다. 그의 옳았음이 또렷한 보편적인 진리이다는 겁니다.

 

나 보다 즉 내부 보다

외부의 바깥에서 이 보편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라를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이루더라 말이죠.

 

결국 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곧 보편성을 이룰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유 없이 나는 죄인이다 말이죠.

사랑이 없이 행함으로 이룰려고 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애와 자비 곧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를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곧 구체적 보편성인 요나의 표적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무엇을 좋아하느냐 사단의 깊은 것

곧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이것이 육의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화론자들처럼

유대교 곧 완악한 자 즉 수건을 벗지 않는 자는

무엇에 목숨을 걸도록 되어 있는고 하니

육의 보편성에 목숨을 걸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괜히 육의 보편성이 아니라

괜히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괜히 이유 있는 결과,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이것만이 역사와 정통으로 형성 되기에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요

육이 육에게 먹혀드는 이유입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요나의 표적은 오로지 배신으로써 보편화 되는 겁니다.

나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수 없습니다.

나는 베드로처럼 대통령을 세 번 부인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보편성이 될 수가 없어요.

 

이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이 보편화 되어서

머리에 박혀 버렸잖아요.

그래서 인용했다 말이죠. 보편화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보편화 되는데

이것은 이정현 대표는 성령의 보편성인 성경말씀을

자기 유익에 따라 인용하다 보니 거꾸로 인용한 거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사고방식이요

유대교의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사단의 회입니다.

 

제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세요

내가 세 번 부인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세 번 부인한 베드로도 용서하셨다 라는 것이 더 중요한데

자기의 배신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뒤에 오는 더 큰 사랑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런 구체적 보편성을 다룬 성경 이야기가 대부분의 예수님 비유입니다.

천국 비유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가 그 대표적입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도 그 대표성입니다.

아니 전체 비유가 다 그러합니다.

 

오히려 절대로 보편화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가장 구체적으로 보편화 시키는 것이 비유이다 말이죠.

 

이것을 행함은 못해요

믿음은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은

오히려 거짓말처럼 보편화 될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가

오히려 참말 보다 더 보편화 되는 겁니다.

 

분명 모세는 애굽왕이 현상수배를 명했다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신약 히브리서 에서는 그것을 뒤짚어 버립니다.

두려워 하지 않고 광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사실 광야는 사막의 죽음이니까 그리로 도망친다는 자체가

이미 죽은거다 말이죠.

도망을 칠려면 도시로 사람들이 빠글 빠글한 도시 시장으로 가야지

누가 광야로 도망가냐 말이죠.

그 정도로 두려워서 가장 극단적인 생각을 한 것인데

이것을 신약에서는 믿음이라고 뒤짚어 씌워버립니다.

편파해석을 해버린다 말이죠.

부조리죠

이 부조리가 구체적 보편화가 되는 겁니다.

? 사랑이 벌리는 사건이니까 말이죠.


(118:6, 개역)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118:7, 개역)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8,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118:9,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118:10, 개역)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1, 개역)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2, 개역)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이 시편 118편의 부분이 마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 이미 이긴채로 보편화 되면서 증거되고 아무리 갈굴려고 해도 갈구지 못하는

 

(11:36, 개역)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11:37, 개역)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11:38, 개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2:1, 개역)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12:2, 개역)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3, 개역)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13:6, 공동)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편을 들어 도와주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누가 감히 나에게 손을 대랴!" / 시편 118:6.

 

(13:1, 개역)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13:2, 개역)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3, 개역)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13:4, 개역)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13:5, 개역)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허다한 증인이 말이죠.


또 마치 이사야의 임마누엘 정신의 원조처럼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다르다 나와 함께하신다 라는 주님은 내 편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실제로 구체적 보편화를 이루더라 말이죠.
어떻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수 있냐 말이죠.

육체의 법칙의 배반된다 말이죠.

그런데 이 배반이 보편화가 되는 겁니다.

고로 너의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것이

실제로 보편화 되더라 말이죠.

 

(7:14,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 칠십인역을 따름. , '젊은 여인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1:23, 개역)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23, 새번역)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7:14(칠십인역)

 

자 이렇게 믿음은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행함과 실천으로 또 인간의 믿음으로 형성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입니다.

 

성전 하나님의 집 여호와의 집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거부하는 성전

하나님의 집을 거부하는 성전

여호와의 집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집이다는 겁니다.

 

니 하나님을 거부하는 내 하나님이다(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라는 겁니다.

 

앞의 것은 인간의 손이 타는 겁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인간의 손을 탈수가 없습니다.

 

앞의 것은 번제와 제사를 원하고 인애와 자비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앞의 것은 행함을 원하고 믿음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믿음을 원하고 행함을 원치 않습니다.

 

할례와 무할례(마음판의 할례)

앞의 할례는 가능한 실천 할수 있는 할례이고

뒤의 할례는 불그낭한 행할수 없는 마음판의 할례인 겁니다.

 

건축자들이 지은 집은 건축자들의 손을 타야만 지을수 있는 집인데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 완성되는 집은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부정의 부정인거죠.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이다 말이죠.

집을 거부하는 집

몸을 거부하는 몸

 

이것이 천국이라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이하냐 말이죠.

비밀스럽다 라는 겁니다.

단절이요 차단이기에 비공개적인데

어떻게 이것이 개방성이냐 말이죠.

 

개방해 본들 어차피 또 의문으로 끝난다 말이죠.

남을 몇 번 용서할까요? 7번 까지 용서할까요? 얼마나 모호합니까?

그러나 770번 용서는 너무 너무 초과잉적으로 부요한 구체적인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이 다수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이다는 겁니다.

모호하고 의문의 것은 진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손이 포함이 되니까 말이죠.

전적인 외부로만 이루어지지

내가 참여할 방법이나, 관여해서 간섭할 문제가 아예 없다니깐요.

오히려 간섭하고 참여해 버리면

다 이루었다가 모호하게 작용되는 겁니다.

뭐야 지 혼자 다 이루고 난 하나도 이룬게 없고 뭐야 이렇게 되는 거죠.

 

단절로써만 바라봐야만 보편화 되는 겁니다.

배신으로만 봐야만 보편화 되는 겁니다.

부조리로 봐야만

스캔들 로만 봐야만

게이트로 봐야만 보편화 되는 겁니다.

 

뭘 해도 죄인이기에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미래완료를 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118편의 내용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자를

늑대 소굴에 집어넣습니다.

 

그럼 오로지 그 늑대소굴에서 외칠 것은

저는 광야에서 주님을 세 번(세가지 증거물이 담긴 법궤 안의 물건) 또는

열 번 원망한 죄인의 괴수일 뿐입니다 라고

법궤를 어깨에 매고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여리고성을 도는 겁니다.

 

다들 저게 무슨 구체적보편성이냐 라고 비웃다가

다들 죽임을 당한다 말이죠.

 

양사방으로 에워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보편화를 이루는 겁니다.

오히려 애워쌋음에도 불구하고 보편화 즉 진리를 이룰수가 없다 말이죠.

? 배신 곧 스캔들을, 부조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성 전투에서는

이 구체적 보편성을 이 우연적 보편성을

필연화 해서 다시 써먹고 재탕을 하는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아이성이 훨씬 숫자가 적다 싶어서 자기마음대로 들어가다가

제대로 당해 버린 겁니다.

힘이 진리라면 보편화가 되어야 하는데

힘이 진리가 아니다 말이죠.

제대로 배신 당한 겁니다.

 

자기유익을 땅기다가

결국 또 죽임을 당합니다.

 

전적으로 외부의 비웃음을 유발케 하고(여리고성 전투)

전적으로 내부의 거리끼는 불편함을 유발케 해서(아이성 전투)

이 둘 다 양발차기로써 거부하고 배신함으로써

그 배신의 과정을 거친 아니

이 배신 자체를 유발케 하는 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거죠.

요나의 표적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앞의 글에서 용서를 해석불가 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용서인데

일만달란트 용서 받은자도 감당이 불감당인 용서이기에

정작 용서 받은 자가 없게 되는 용서로써의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다들 이 일만달란트의 용서를 다 보편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일만달란트 구지 탕감을 받지 않아도 말이죠.

 

그런데 일만달란트 탕감 받은 그 당사자만 모르는

유대인 곧 하나님의 백성들만 모르는 용서

 

곧 오늘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 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대신 채웠습니까?

번제와 제사 이다는 겁니다.

 

사단의 깊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깊은 것은 바로 부조리 배신 스캔들인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봐도 십자가에서는 힘이 되는 믿음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하고 어리석은데

이상하게 마귀를 만나면 무조건 이유 없이 이기는 구체적인 보편성인 진리이다는 겁니다.

 

진리 아닌 진리 로써 말이죠.

 

지혜 아닌 지혜로써의 구체적인 보편성인 진리 곧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스캔들 지혜 부조리 지혜

불의한 지혜가 훨씬 지혜 보다 더 나은 지혜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가룟유다는 배신감을 느낀 겁니다.

속았다

유대의 해방을 위한 예수인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이스라엘 회복에는 예수님이 관심이 없는 겁니다.

 

오로지 십자가를 이룰려고 하는 것 뿐임에

전혀 현실성이 없는 모습에

팔아버리는 겁니다.

배신 당했으니 너도 배신 당해봐라 라꼬 말이죠.

 

인애와 자비 곧 인자하심이 안보인 겁니다.

긍휼히 여겨주심이 안 보이는 겁니다.

 

지금 시편 118편 찬양자는 바로 이런 가룟유다의 사고방식인 전체 이스라엘 속에서

인애와 자비를 외치는 겁니다.

 

이 인애와 자비에

토 토 토 토달지 말라 말이죠

인애와 자비에 토달면 전부 배 배 배반형 배반형 배신 배반형

 

십자가의 용서

곧 배반의 용서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 배반형이다는 겁니다.

부조리를 쳐다 보지 않는 것이 부조리이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보편성은 결국 이 배반을 이 반칙을 원치 않는 것을

들추어내면서 반칙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인 진리입니다.

진리 아닌 것을 진리는 들추어내면서 등장하는 진리이다는 거죠.

 

곧 진리 되신 예수님은 반드시 마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실체를 들추어내시면서 등장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 진리 곧 구체적 보편성 되신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장악한 숨은 마귀의 보편성을 들추어내면서

그 가짜진리와의 대조로써 그 차이를 이루시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차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느날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문뜩 들었던 생각인데

남자의 대립물로써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차이로써 여성이기에

 

남자의 반대편에 여자가 있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남자 반대편에 선 또 다른 남자로써의 여자가 아니라

대립물이 아닌 차이성으로써 앞뒤가 아닌 위 아래가 아닌

옆으로 세우면

차이로써 남자의 차이로써 여성이기에

남자의 차이로써 또 다른 남자로써의 여자가 아니라(앞 뒤, 위 아래가 아닌)

남자의 차이로써 더 나은 남자로써의 여성이기에

여자는 곧 진리이다 라는 주장을 하는 철학자의 주장을 힌트로 삼아서

 

진리는 비진리와의 대립물로써 등장하는게 하는게 아니라

옆으로 비진리 보다 더 나은 진리이기에

차이로써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니이다 라는 겁니다.

 

진리의 반대편에 거짓이 이라는 보편성에

더 나은 진리는

거짓 보다 더 나은 거짓으로써 구체적인 보편성인 십자가가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오른팔에 붙잡힌 자와

주의 발등상에 놓여진 원수와의

 

차이가

 

십자가가 벌리는 사건에 의해서 구별이 되는 겁니다.

 

다윗은 이 찬양을 통해서

더 나은 집

성전의 반대편에 선 성전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 보다 더 나은 차이로서의 성전이기에

도저히 믿고 싶어도 믿을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유대인, 니고데모)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

머릿돌이 구성이 되었기에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믿음 자체가 없는 안 믿는 자가 안믿고는 못배기는 믿음이 덮쳐진 겁니다.(이방인 사마리아 여인,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우물가의 여자)

 

니고데모의 대림물로써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라

그것은 곧 일치물이지요. 곧은 시간의 곧바로가 아니라 동일하다는 일치물이다는 거죠.

이중강조가 되는 거죠.

 

결국 구체적 보편성이란 대립물이 아닌 차이성으로써

니고데모의 차이성으로 사마리아 여인이기에

 

보편성에 더 나은 보편성으로써의 구체적 보편성이기에

대립물이 아니라 차이성이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더 나은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것을 포기 하지 않는 이상

더 나은 것이 왜 더 나은 이유를 알길이 없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더 낫고

원인 있는 결과이기에 더 나은 것을 볼 수 조차 없는 겁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즉 나 보다 옳아야 쳐다보게 되고

더 낫다 더 옳도다 가 성립이 됩니다.

차이죠

 

이 차이의 반복이 십자가 곧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진리이다 말이죠.

진리를 반복한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만을 반복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밝히 보이는 것이 없다 말이죠.

다른 것은 흐릿하고 모호한 것이다 말이죠.

마침이 없습니다. 의문의 반복인 거죠.

 

율법의 마침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말이죠.

율법의 배신이 사랑이다 말이죠.

율법에 의하면 다 죄아래 가두기 위함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찬양자는 인자하심만 영원하다고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찬양하는 겁니다.

 

성전의 두 사람중 한 사람은 이 더 나은 차이로써의 십자가만

인애와 자비만

십자가의 용서만

긍휼만 바라보듯이

 

번제와 제사가 가득하게 도배된 이스라엘 속에서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만 외치는 겁니다.

 

결국 누구 입니까?

여호와의 집이 누구입니까?

바로 의의 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인물로 모아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믿겠다고 하는 어떤 마음가짐이나 실천이 아니라

인물이다 라니깐요.

 

어떤 행동이 인물로 변이 되지 않잖아요?

어떤 행함이 어떤 믿음이 인물로 변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수 없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 말이죠.

남녀의 성적관계가 있어야 아들을 자식을 낳는데

이런 자연법칙을 거스릴수 없다 말이죠.

그것은 돌연변이 에게나 있는 일이다 말이죠.

돌연변이가 어떻게 보편화 됩니까?

그런데 어짜죠? 돌연변이 만이 종말에 살아남는

통과한다 말이죠.

여성성은 돌연변이로써 남자와의 차이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보편이라고 해서 다수성이 아니라

진리이다는 겁니다. 통과하고 이기고 옳았다 라는 겁니다.

 

옳은 것 보다 더 옳은 것

 

이것을 정작 다윗 본인이 당사자로써

 

금식

회개

눈물의 기도

 

보다 더 나은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선물을 통해서

 

진리로 나아가는 겁니다.

의의 문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여호와의 집에 나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겁니다.

 

?

 

더 나은 제사인 인애와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 보편성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음 곧 행함을 원치 않음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 (시편 118편)

곧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방식만이
인애와 자비이다.

버림받은 그 돌이 구체적인 보편성인 머릿돌이 된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사탄을 쫏아내었지 않았습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댓글
김대식 https://blog.aladin.co.kr/.../printP.../print_Review.aspx...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다 어렵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구체적 보편성’은 참 까다로운 개념이다. 일단 보편성universality, 특수성particularity, 단독성(개별성,특이성)singularity의 삼항조가 있다. 나는 가끔, 틀린 줄 알면서도 개념들을 짝 짓거나 줄 세우기 해버릴 때가 있다. 너무 복잡하니까, 이해를 위해 일단 가정을 하는 경우도 있고, 기억하기 위해 단순화해서 저장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면에서 본다면, ‘구체적 보편성’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 단독성? .. 정도로 가정하고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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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모세가 애굽의 왕좌 자리를 버려야 전복이 됨으로써 구체적 보편화가 되는 구원이 되는 겁니다.

만약 모세가 애굽왕자가 아닌 노동자 계급에서 혁명을 일으켰다면

백날 해도 애굽은 전복이 되지 않듯이 ~~~~

(히 11:24, 개역)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개역)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개역)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7, 개역)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 11:28, 개역)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히 11:29, 개역)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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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죄인3 

구체적 보편성이 보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특이성
, 곧 예외적인 것을 끌여들여야 한다죠?

머릿돌이 되기 위해 반대로 죽음을 당해야하는 아이러니

그러니 믿을 수 없고, 말도 안되는 얘기가 되는거죠

세상의 모든 것은 이 빗나가는 것에서 움직여진다는

좋아요 · 답글 달기 · 122일 오후 4:46

댓글

김대식

믿을수 없고 말도 안되지만

분명 건축자들이 버린것은 맞기는 맞는데
머릿돌이 된 것도 맞기는 맞아서
보편성에 반박할수가 없다는 거죠.

사도바울이 누구시죠? 라고 물으니까
너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는 표현 자체가

분명 내가 죽였는데 다시 살아났으니
도리어 자신의 행위가 배신이 된 겁니다.

이 배신의 과정을 거쳤기에 오히려 구체화 되고
보편이 되니(머릿돌)이 되니 반박을 못하게 되는

가장 핍박자가 가장 옹호자가 되어버린 의미가

구체적 보편성
말이 안되는데 말이 되고
도저히 믿을수 없는데 저절로 믿어지는 ~~~

(지젝이 레닌을 추켜세우는 이유 또한
맑스의 반대 했던 레닌이 도리어 맑스주의를 퍼트리는 보편화 시켰기에 레닌의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거죠. 이 배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구체적 보편성)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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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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