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고에 상한 진리, 쇠사슬에 매인 진리, 건축자들이 버린 진리 (시편 105편)
(시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다윗이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요약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단순한 역사가 아닌 역사를 넘어서는 묵시인 계시입니다. 시편 노래는 곧 계시입니다.)
곧 은혜 즉 인애하심과 자비하심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다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고 했을때에
이스라엘은 여기에 보탬이 된게 없다는 겁니다.
즉 다윗 또한 여기에 보탬이 된 적이 없다는 거죠.
오히려 요셉을 땅에 파묻어서 팔아버리는 형제들과 다를바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쓸모 없다고 버리는 돌로 예수님을 취급했습니다.
예수는 하야하라 쓸모 없다.
이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데 너 같은 쓸모없는 자가 메시아가 되면안된다
당장 퇴진 하라 ~~~~~
그런데 그 버린돌이어야 반드시 버린돌이어야 머릿돌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 본인도 이 상황을 격게 되는 겁니다.
버린 돌 취급받죠.
그런데 이것이 다윗에게 덮쳐진 예수님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하나의 그림자이요 실상은 예수님의 삶이 덮쳐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써 이스라엘로부터 버림 받습니다.
여기에 다윗으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선지자도 이스라엘로부터 버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05편과 마태복음 21장으로 했는데요.
(마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마태복음 21장은 예루살렘 입성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시니까 호산나 어린아이들이 찬양으로 소동이 벌어지죠. 9절
또 그 사이에 성전에서 비둘기 파는 상을 엎어버리시면서 강도의 소굴을 청소하시죠. 12절
또 무화과 나뭇잎을 저주하시고 말라 죽죠. 19절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실때에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라고 장로들 대제사장들과 논쟁이 벌어지죠. 23절
그리고 두 아들 비유 나오죠. 28절
그리고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너희 보다 먼저 들어간다 라고 비유하시면서, 31절
이어서 악한 농부의 비유를 하시는 겁니다.
(마 21:33, 현대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막12:1-12,눅20:9-19] 이제 이 비유를 들어라.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쳤다. 그러고는 포도즙을 짤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운 뒤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다른 나라로 갔다.』
오늘 이 비유가 시편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겁니다.
종말의 시선인데요.
먼저 앞서서 요셉을 보내었는데
그것이 그냥 보낸게 아니라
우리는 그를 싫어해서 땅에 파 묻어 죽였는데
잃어버렸다가 다시 살아난 요셉이 주가 되는 구체적 보편성 즉 진리
그냥 진리가 아닌 우리가 배신한 진리만이 진짜 진리이고
진짜 머릿돌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쓸모없고
집 우리가 생각한 집
우리가 생각한 몸
나의 몸과의 일치성이 없는 몸이라고 여겨서 버렸는데
그 버린 몸이 몸의 머리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의 주요 바로의 아비가 된다 말이죠.
(창 45:8, 개역)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공적으로는 유일한 자유자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유, 저들 애굽의 사상 조차도 결국 이 사상인데도 불구하고 안 믿어요, 거부합니다. 즉 거부하고 자기들 사상에 스스로 배신하는 증거죠.)
사적으로는 바로왕의 아비입니다. 이것은 바로왕의 아들이 되어버리면 제사장 또는 왕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파라오 왕의 아버지가 되어버리면 파라오가 무릎 꿇어야 할 대상물이 되어버린다 말이죠.이 얼마나 편파해석기록입니까?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주가 됩니까? 자손인데? 어떻게 주께서 내 주께가 되냐 말이죠.
유대성경박사들만 못 푸는게 아니라, 저들 애굽의 신들까지도 다스리시는 더 나은, 더 옳은, 차이 나는 주가 되어버리니까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머리이며 주 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안 믿고 거부하고 버리더라 말이죠.
그렇다고 머릿돌이 안되는 줄 아느냐 말이죠.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것이 진리이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이렇게 다윗이 요약하는 이유는
마치 이스라엘 역사 조차도 애굽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렇게 애굽으로 취급해도
애굽의 온 주가 요셉이듯이
너희들이 버린 요셉이 애굽의 온 주가 되듯
너희들이 버린 예수님이 바로 너희들의 온집의 주가 된다는 겁니다.
공적으로 그렇고
사적으로 그러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나?
사적으로는 더 심합니다.
사적으로는 파라오 왕의 아비가 된다 말이죠.
그럼 다윗이 사적으로 자기 자손으로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을 자기 자손이라고 하겠습니까? 주 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 주여 라고 합니다.
아니 자손인데!!
조상이 자손에게 주여???
행함의 법칙, 육의 법칙을 거스리는 믿음의 법칙입니다.
그야말로 반칙이요 부조리 이지요.
그러니 역사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나오는 발언이다 말이죠.
결국 자손인데 주가 된다는 것은 자손의 법칙 곧 혈통의 법칙을 깨뜨리는 배신을 통해서
오시는 자손만이 주가 되는 진리이다는 겁니다.
피라미드 식으로 예를들면
조상이 제일 꼭대기이고
자손은 밑바닥 하부구조이어야 하는데
그런 건축 피라미드인데
거꾸로 쓸모없다고 버린 돌
밑바닥 자손도 아냐 그냥 피라미드 구조에서 아예 벗어난 버린 돌이
조상의 위치 자라이지 제일 꼭대기 꼭지점에
그 버린돌이 머릿돌로써
족보의 원조로써 자리잡는다 말이죠.
이것이 육의 법칙에서 행함의 법칙에서 혈톨의 법칙에서 말이 되는 소리이겠냐 말이죠.
그런데 믿음의 법칙에서는 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 이다 말이죠.
까짓꺼 믿으면 되지? 그것도 행함이지요.
믿음의 법칙이라는 십자가 법칙만을 말하는 겁니다.
스캔달 게이트 법칙에서만 말 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그 주를 다윗은 쳐다보고서 이 시편 105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어머니께 이 구체적 보편성을 어떻게 설명했는고 하니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둘 다 엉터리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전부다 그런 속에
모세 혼자 애굽에서 외쳐야 하듯이 그리고 모세는 남은 인생 계속 배신만 당해야 하듯이
다윗은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치는 가운데서
나 홀로 집에 나 홀로 예수님을 외치듯이
예수님을 외치더라 말이죠.
당연히 싫어버린바 되죠. 이스라엘로 부터 말이죠. 가짜 하나님을 거짓선지자의 말에 다 장악당했는데.
버림받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신들 또한 버림받지 않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런데 버림받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다윗이 쳐다본다는 것은
다윗 자신 또한 이스라엘로부터 버림받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된다 말이죠.
그러면 구체적 보편성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버린돌이 머릿돌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구체적 보편성이 되는 머릿돌이 되더라 말이죠
오히려 보편성이라고 자부했던 이스라엘이 가짜로 드러나고
머릿돌도 되지 못하더라
성전이 허물어 지더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더라 라는 겁니다.
반석 위에 짖는 집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어떻게 주님이 세우셨는고 하니
바로 이 배신을 거쳐서 지었다 말이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십자가의 용서가 더 크심 앞에
그만 뿅 가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배신을 거쳐서 나온 구체적 보편성 곧 진리
곧 머릿돌이다는 겁니다.
이 머릿돌에
꼴에 옳다 정의다 의롭다 성화다 모조리 다 깨부셔 버리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따위 사상으로 꼬시냐 말이죠.
뭐 성화론? 개혁주의? 뭐 조직신학? 뭐 성경신학? 에라이 다 사기다 말이죠.
그런 것들은 의문의 반복이지 인애와 자비가 아니다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배신했기 때문에 인애와 자비이지
죄인이기에 의사 구원자가 필요하지
배신 안했으니 나 옳잖아요 라고 나오는 것은 의사가 필요없다는 겁니다.
이 일만달란트 용서를 높이기 위해서
일만달란트 용서 받은 자도 탈락
일만 달란트 용서 못 받은 자도 탈락
모조리 다 탈락 시키는 용서이다는 겁니다.
왜? 용서를 인간 쪽에서 해석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오로지 용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배신의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이 용서에 맞는 죄수복에 빨간 도장 특별사면을 자랑하는 자가 없어요.
다들 부끄러워서 죄수복을 얼른 벗어버리고
빨간 도장 특별사면 네모 쾅쾅쾅 빨리 벗어버리고
흰 옷으로 다들 거룩한 척 갈아 입고 있으니
누가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참여 하냐 말이죠.
성도란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부합되기 위해서
동원이 되어야 하는데
졸지에 자기의 의로움을 위해, 자기 구원받음을 위해 예수님의 피 흘리심 까지 동원시키더라 말이죠.
마치 중동의 아랍인들이 자기를 구원시켜 줄 신이라면 어떤 신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있지
이게 무슨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배신의 과정을 거친 겁니까?
배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보편성 곧 사랑을 다 이루었다는 것은
마귀만이 유독 반발하는 겁니다.
마귀가 이것만은 침범할 수가 없어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왜 아무리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어도
예수님 쪽에서 사랑하시겠다고 하셨으니까 말이죠.
에이 그럼 나도 예수님 세번 부인할래?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이제껏 그렇게 해 왔는데!!
이 싸움이 욥기에서 벌어지잖아요.
쉽게 말해서 마귀와 예수님과의 내기장기인데
가만히 있는 마귀를 끌여들여서 내기게임을 하는 겁니다.
뻔히 지는 게임을 마귀가 바보입니까 하게?
그런데 마귀가 이 십자가의 피 게임에 무조건 져야 하기 위해서
반드시 끌여들여서 귀가 솔깃하게 말려들도록 합니다.
그러니 차 포 때고 장기 하자 라는 거죠.
이길 승산이 있다고 여겨야 마귀가 참여할 것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를 그렇게 가시화 시키면서 욥기는 진행 됩니다.
마귀의 방법은 단순합니다. 복잡해도 결국 단순한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영화 곡성에서 다들 헷갈렸던 마지막 세 번째 마귀인 여자가
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면 안돼 안돼 안돼 돼 돼 돼 라는 식입니다.
세 번 부인하세요 제발
이미 마귀의 유혹에 이미 빠졌는데 뭘 세 번 부인 안해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절대로 가지마소잉
이 말 자체가 가라는 말입니다. 절대 가지말라는게 아니라
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가세요 제발
우리는 이 세 마리의 마귀를 이길 방법이 없어요.
괜히 마귀가 에이 주님이 지켜주는데 무슨 소용있냐고 게임 참여 안할랍니다 라고 했겠냐 말이죠.
마귀 말이 맞아요
마귀는 항상 맞는 말만 해요그러니까 선악적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마귀입니다.
주가 못 됩니다.
심판주가 못 됩니다.
맞는 말만 하지 배신을 거치지 못해요.
배신을 거친다는 말은 내 쪽에서의 배신이 아니라
내 쪽에서의 예수님 세 번이 아니라
그렇게 내가 예수님을 세 번 배신한 나를 잡아오는 그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배신이기에
배신을 거칠수가 없어요.
마귀 본인 당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배신인데?
마귀가 어떻게 자기를 자기 스스로 배신하는 그 배신을 거치겠습니까?
자기스스로도 배신을 거치지 못하지요?
예수님의 배신도 수용할수가 없지요.
안과 밖, 내부와 외부가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겁니다.
이런 마귀를 상대로 하시는 배신이다 말이죠. 이게 보편적 진리 곧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욥이 아니다 말이죠.
욥은 그저 미끼일 뿐이죠.
베드로는 그저 미끼 일 뿐입니다.
마귀가 덮썩 잡았다고 자부해야만 하는 월척 수제자 미끼일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배신을 거쳐야만 구체적 보편성이 되는 겁니다.
왜?
마귀는 무조건 지도록 되어 있고
십자가는 무조건 이기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이유 없어요 무조건 사랑이 이기고법은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을 아는 자는 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법의 틈을 노리는 자들 뿐입니다.
김기춘 보세요 다들 법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용하잖아요.
세상의 권력을 쥔 자들은 그 법을 배신할 수가 없어요.법으로 배 불리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결국 법이 아닌 사랑이번제와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가 무조건 이기도록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작용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자꾸 해 볼려는 자기가 자기를 손대는 꼼수가 어쩔수 피어오르는데
간단합니다.
마귀한데 잡혀 오면 됩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신나게 마귀는 우리를 잡아요.
그런데 왠 용서인지?
자 보세요 용서를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용서 받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남을 7번 8번 9번 용서했나요?
아니잖아요.
베드로야 너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곧 반석이다 라고 했을때에
베드로가 음부의 권세를 이겼나요?
단 한번도 이긴적이 없이 오히려 백전 백패 했다 말이죠.
그런데 그 말 자체가 배신을 하기 때문에
그 말씀 자체 그 말씀이 인물이기에
그 인물 자체가 배신자이기에
음부의 권세를 이겨서 베드로가 반석이 된게 아니라
베드로 자체가 그냥 반석이기에
아무리 음부의 권세를 못이기고
백날 져도
백전 백패 해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편파 판정 하시니까
심판 주가 못 되는 마귀가 반칙이다고 우겨서
예수님이 심판주로써 무시험 합격
음부의 권세에서 승리 했다고
편파 판정 곧 구체적 보편성(배신을 거쳐서) 만들어 버리니까
여기에 숨어있던 마귀가 반발 하고 견디지 못하고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바로 왕의 아비가 되고
애굽의 온 주가 된다는 것은
애굽에게만 파라오 왕에게만 해당 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심지어 지금 시편 105편을 외치고 있는 다윗 자신이
예수님을 우리야 장군을 죽이듯이 고의적으로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죄악인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은 너끈히 이겨내시고
너가 나를 사랑하냐 라고 세 번 묻듯이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선물을 베푸시는 겁니다.
이미 다윗 자체가 교회인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데
자기 스스로 음부의 권세를 이겨 볼려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다고 부자청년처럼 과시할 때
너가 그 율법의 네배나 갚아야 할 나쁜놈이다 라고 지적 받았을때처럼
율법 지킨다는 것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고 있는
음부의 권세에서 못 빠져나와서 등돌리고 근심하며 돌아서는 부자청년이다 말이죠.
그러니 제발 말씀 지키지 마세요.
말씀은 나의 대상물이 될 수 없어요.
인물인데
말씀을 일치성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대립물이기에
나는 이 말씀에 곧 인물에 옆에 있는 차이성으로써의 인물과 인물로 대하게 되는 관계성이다는 거죠.
이 관계성을 이 차이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표현이
저들 마귀들이 붙인 별명에 잘 드러납니다.
마귀가 부러워 배 아파 죽어요
예수 너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라고 말이죠.
얼마나 가깝고 가까우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했으면
마귀 자기가 최고의 피조물로써 가장 먼저 창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부가 되지 못한다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흘려 들은 그 계획에 반발해서
쿠테타를 일으켰듯이
도저히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옆에 설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자꾸 마귀 자기처럼 자꾸 대립물로써 일치성을 추구하게 하는데 있어서
정작 예수님은 우리 바로 옆에 인물로써 관계를 맺고자
먹기를 탐하는 먹보에 대식가에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 오셨다 라는 겁니다.
마귀로써는 절대로 따라 할수 없는
그랬다가는 더럽다고 지가 무슨 결백증 환자도 아니고 말이죠.
더러우면서도 더러움을 인정 못하는 마치 성화론자들처럼
절대로 배신 할수 없다고 자부하는데
오히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사랑함에 있어서
마귀는 돌아버리는 겁니다.
저 십자가의 용서만 없다면 자기가 이기는 게임인데 라고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그게 바로 자기 혼자 빼놓고서
이스라엘이 엉터리 하나님을 믿고 있는 가운데서
자기 혼자 딸랑 하나님이 아닌 배신자 예수님을 바로 보고서 외치는 것이 시편 105편이다는 겁니다.
즉 나 예수는 반드시 너희들 손에 버림바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된 예수로써 오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건짐 받은 자가 다윗이니까 말이죠.
거기에 베드로가 건짐을 받았으니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세 번의 질문에
방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서 도망쳤을때는 언제고
계집아이가 외쳤을때에
나 절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라고 내가 저 예수를 알면
내 손에 장 지진다 라고 방금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베드로를 마귀가 놓칠 리가 없잖아요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사랑은 외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잘 아십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은 베드로 자기가 외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옆에서 마귀가 밀까부듯이 고소하는 그 고발장에
도장을 찍지 않고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예수님이 옆에서
바로 옆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시면서 하신 기도 때문이다는 겁니다.
벌써 넘어졌음에도
누가 봐더 베드로는 벌써 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최종 결제자 예수님이 심판주로써 내가 안 넘어졌다고 하면 안 넘어진거야 라는
편파 판정
베신의 보편성 때문에
베드로는 자신 만만하게 외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냐고
그래서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인 것을 가지고
주님은 용서했는데
쓸데 없이 이스라엘 전체가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시비를 걸을때에
오히여 다윗은 이 배신의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이 요나의 표적을
배신의 진리로써 증거하는 겁니다.
누가 머릿돌이냐 라고 말이죠.
참 마 21장의 비유에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필이면 주인이 타국에 갔다 말이죠.
그래서 하인을 시켜 세를 받고자 했는데
죽여 버렸다 말이죠.
천국잔치 비유와 비슷하고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린 임금 비유 곧 천국비유
종말 비유 말이죠.
그래서 몇 번을 보내니까 다 죽이더라 말이죠.
그럼 주인이 아 그럼 아들을 보내면 이제는 말 듣겠지 하면서 아들을 보냈다 말이죠.
제가 이 부분이 어머니께 어머니 이게 과연 주인의 지혜 맞나요?
아니면 농부들의 꾀가 맞나요?
하인을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보내면
안죽이겠습니까? 아니면 상속자 이니까 아들을 죽이면
이 포도원 농장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누가 어리석고?
누가 지혜롭나요?
아무리 봐도 주인이 아들을 보낸다는 자체가 어리석지 않나요?
맞습니다 어리석고 상대적으로 악한 농부들의 꾀가 승리한다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낫다 라는 것은
구체적인 보편성으로써 인간의 지혜가 더 낫다고 자부하도록 만듬에 있어서
어리석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버림받는 돌로써만 오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머릿돌이 됨에 있어서
누구도 그 머릿돔 되도록 그 일에 참여했습니까?
우리는 모두다 악한 농부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자들이다 말이죠.
그런 우리의 지혜 보다 더 나은 지혜로써
배신의 역전의 용서
역설적인 용서를 펼치심으로써
그는 나 보다 옳았다가 되는 겁니다.
나의 대립물이나 일치물이 아니라
옆에 선 차이성으로써 나 보다 옳았다 라는 겁니다.
옆에선 이 차이성을 일상이라고 하는데
옆에 있는 이웃으로써 진리는 항상 바로 곁에 있는데
뭐 교회를 장소를 가야만 하고
그것도 주일이라는 시간에 맞추어야만 하고
이게 모두다 일치물로 만들고픈 대립물이 된다 말이죠.
그런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차이성으로써
바로 일상 속에서 바로 옆에 있는 먹보 대식가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
일상 속에 있는 것이 바로 구체적인 보편성인 진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욥기에서 마귀가 내기에 걸려들어서
욥이라는 인물을 미끼 물 듯이 덮썩 무는 것처럼
주인이 아들을 보내면 안 죽이겠지 라는 어리석은 지혜를 덮썩 물게 됨을써
왜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지
뻔히 듣기 싫은 소리를 코 앞에서
형들아 형들아 내가 꿈 꾸었는데
열 두 별들이 내게 절하고
열 두 볏집들이 내게 절하더라 라고
코 앞에 대고 시근 없이 자랑질 하고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야곱이 떼떼옷 색동옷을 입혀서
편파적인 사랑을 퍼부으니까
형제들 돌아버리는 거죠.
그래서 파 묻었다 말이죠.
파 묻었는데
죽여 버렸는데
요셉을 앞서서 보내셔서
착고에 상한 진리
쇠사슬에 매인 말씀
건축자들이 버린돌로써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이 어리석은 하나님의 지혜를 응하게 하고자
미리 앞서서 보냈다 말이죠.
심판 곧 종말을 대비하고자 말이죠.
식량 없고 기근이 닥치고
지옥이 덮쳐왔을때에
음부의 권세가 덮쳐왔을때에
무슨 수로 식량을 구하고
무슨 수로 살아남을수 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앞서서 보낸 그 요셉을 통해
앞서서 보낸 십자가에서 달린 예수님 덕분에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라 라는 그 예수님의 배신 때문에
우리는 종말이라는 심판에서
판결을 뒤엎어 버리고 판결문을 찢어버리시는 배신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건짐을 받는 겁니다.
자 무엇이 진리 입니까?
내가 말씀 지키고 행하고 실천하고 하는 진리일까요?
즉 심판에서 건짐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세 번 부인한
내가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이
나를 건지는
마귀로부터
음부의 권세로부터 이기는 예수님의 반칙 예수님의 배신일까요?
무엇이 진리이냐 라고 다윗은 참으로 뻔뻔스럽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지혜가
나 보다 너 보다 우리 보다 더 옳았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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