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안되는 이스라엘, 뭘 해도 다 되는 예수님 (시편 106편)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4, 개역)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눅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시 106:43, 개역) 『여호와께서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시 106:44, 개역)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시 106:45, 개역)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시 106:46, 개역)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토요일 어머니께서 식사중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이나 괴팍한 모습이 없던데? 라고 말이죠.
아 그거요
안그래도 계시록 살펴보다가 그 의미를 알게 되었으니
내일 예배때 알려드릴께요 라고 했지요.
오늘 시편 106편에서
앞의 105편을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착고에 상하게 하고 쇠사슬에 매이게 했다는 겁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그렇게 착고에 상하게 하고 쇠사슬에 매이게 했듯이 말이죠.
즉 버렸다 죽였다 라는 거죠.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 하나님을 그렇게 취급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렇게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가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성령은 곧 너희가 죽인 예수를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를 만드시는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성령이다는 겁니다.
(행 5:30, 개역)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 5:31, 개역)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행 5:32, 개역)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결국 증인이란 그냥 증인이 아니라 이 구체적 보편성인 머릿돌에 의해
예수님을 버린 당사자들이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냥 의인이 아니라 더 이상 죄 안 짖는 의인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채로 빨간 특별사면 받은 자로써의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거죠.
사단의 얕은 것은 하나님의 깊은 것과 한 세트가 될 수가 없다 말이죠.
하나님의 깊은 것은 사단의 깊은 것과 한세트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죄수복을 입은채로 외쳐지는 예수님의 주 되심은 오로지 죄수복을 입은 증인으로 부터이지
의인복을 입은자들은 사단의 얕은 것만 아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역사는 그런 역사(번제와 제사, 의문의 반복)를 반복할 수 밖에 없지만
묵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시킴으로써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 만드는 반복의 역사이지만
묵시는 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곧 인애와 자비인 상하고 후패한 썩어 문드러진 마음입니다.
즉 역사가 못하는 것을 묵시는 한다는 거죠.
인애와 자비를 못해요
(시 106: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역사는 못한다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하십니다. 끝까지 참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말이죠.
(요 13:1, 개역)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내 끝사랑 내 첫사랑 끝까지 책임 지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묵시입니다.
백날 역사가 반복 되어도 때려죽어도 못하는 것을 묵시 되신 예수님은 하신다 말이죠.
마치 역사는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못 되는 식과 같습니다.
번제와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에 반하는 부정한 시체를 만질수 있냐 말이죠.
부정탄다 말이죠.
그러나 묵시 곧 사랑은 곧 묵시라는 인물은 합니다.
오히려 그에 반하기 때문에 더더욱 잘 하십니다.
인애와 자비 곧 인자하심은 저런 번제와 제사와 한 세트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연결점이 없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머릿돌 만드는데 보탬을 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버린돌로 취급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요셉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다윗입니다.
결국 다윗 조차도 요셉을 버리듯이 했다는 거죠.
형제들은 요셉을 버리는 일 외에 한 게 없어요.
우리가 그래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 외에는 한 게 없어요.
뭐 그래놓고 성화 하겠다고?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이름없는 아이까지 죽이는
아무리 살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눈물로 회개해도
그런 것으로 살릴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 사랑으로는 택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외부에서 오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그냥 죄인 중의 괴수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왠 용서인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곧 용서가 머릿돌이 되었다 말이죠.
평상시 법을 잘 지키는데 과연 용서가 머릿돌이 되겠습니까?
용서를 법적으로 7번이나 잘 지키는데?
사실상 법을 단 한 개도 제대로 지키는 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법을 역이용 한다 말이죠.
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법무장관 했던 김기춘 보세요
우리를 딱 그 모양이라니깐요.
그런 자에게 과연 용서가 쓸모 있겠냐 말이죠.
법을 이미 맛 봤는데
권력을 이미 맛 봤는데
용서 라는 약해 빠진 것을 누가 좋아라 하겠냐 말이죠.
쓸모 없다 말이죠.
무조건적인 용서는 개나 줘 버려 ~~~ 라고 한다 말이죠.
그래서 버렸다 말이죠.
요셉을 버리듯이 버렸습니다.
율법의 네배나 갚아라 라고
다윗도 우리도 용서를 버리고 힘 되는 법을 취했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다윗 본인이 그 꾀를 펼치다가
오히려 법에 걸려 들어서
그 법 앞에서 죽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용서로 용서하시니
이것이 머릿돌이 되니
이것이 솔로몬 왕의 구체적보편성 진리요 지혜요 용서이니
그 용서 개나 줘 버려 라고 했던 그 용서를
본인이 개가 되어서 도리어 용서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이제야 보편성이 되는 민낯으로 법 앞에 서게 되는 겁니다.
심판 앞에 설때에
오히려 심판이 아닌 긍휼이 오더라 말이죠.
법 보다 더 강한 용서를 비로소 보게 된 겁니다.
법이 가장 괴팍한줄 알았는데
용서는 시시한줄 알았는데
오히려 법 보다 더 무서운 괴팍스럽기 짝이 없는
진짜 공포가 바로 젖먹이 이듯이
진짜 공포의 괴팍함이 인애와 자비였다는 겁니다.
이것을 괴팍하다 라고 합니다.
그냥 괴팍이 아니라
반드시 짝을 이루는
저쪽의 괴팍함에 더 나은 괴팍함이다는 거죠.
결국 시편 105편은 다윗이 요셉 사건을 통해서
그 버림받은 돌이 어떻게 머릿돌이 되었는가에 대한 증인으로써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던 우리가
도리어 이 십자가가 무한 영광이다고 자랑해야 하는 증인으로써 서 있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 시편 106편의 다윗은
다윗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은 뭘 해도 안되더라 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뭘 해도 다 되더라 라는 거죠.
뭘 해도 안되더라.
뭘 해도 다 죄다.
설교도 죄요
전도도 죄요
기도도 죄요
봉사도 죄요
충성도 죄요
헌금도 죄요
예배도 죄요
찬양도 다 죄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안되더라 모조리 다 의문의 반복이더라 다 실패이다 라는 겁니다.
누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그 실패에 대한 화풀이 분노를 항상 타인에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의 제사를 안 받아주니까 아벨을 그 화풀이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다 말이죠.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시편 105편 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 쓸모 없다고 여긴 돌로 만드는 십자가 사건이다는 거죠.
보편적 지혜이자 진리는 인간에게 버림 받는 진리만이
구체적 보편적 진리이다는 겁니다.
왜? 버렸던 증거가 있거든요. 반대했고 싫어버린바 되었던 그 증거
예수님을 죽였던 증거가 있거든요.
그런데 살아나 버리니까
자신의 살인도 자신의 괴팍함도 우리의 완악함도 무용지물이 만들어 버리니까 구체적 보편성 진리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논리 그 어떤 무기로도 이길수 없더라
분명 죽여 버렸는데 그 죽음도 먹혀들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어머니께 괴팍하다 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장 두아디라 교회에
사단의 깊은 것을 모르는 자를 칭찬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이미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음행에 넘어간 자들을 염두하고서 그 상대적인 사단의 깊을 것을 모르는 자를 칭찬하는 기록입니다.
결국 교회에서는 이 두 패거리가 항상 충돌하도록 되어 있는데
사단의 얕은 것만 알고 사단의 깊은 것을 모르는 즉 하나님의 깊은 것을 모르는 자들이
교회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그런 교회 속에 숨겨놓은 교회
오늘 시편 106편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속에 남은 자로써 이스라엘
곧 다윗이지요.
이렇게 존재로써의 이스라엘 속에, 기능(당위)으로써의 이스라엘을 그 속에 숨겨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을 두 개로 분절 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괴팍함 이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애굽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펼치시는 더 나은 괴팍함이 여호와이다는 거죠.
기적을 배신하는 기적이 구체적 보편성인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듯이
기적을 괴팍하게 거부하는 기적이 요나의 표적이다는 거죠.
왜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며 괴팍하며 불 같다 말이죠.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즉 애굽을 일부러 강퍅케 해 놓고서는 더 강퍅한 사랑을 보라 라는 겁니다.
저 애굽의 강퍅함은 쨉도 안된다 라는 거죠.
에구 에구 그것도 강퍅함이냐?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강퍅한 우리들을 통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도록 만드셔서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그런 자로 용서해 버릴정도로 너끈한 사랑이 바로 괴팍한 사랑
누구 노래 말 따나 전쟁 같은 사랑이다는 거죠.
난 위험 하니 까악 ~~~~
사랑 보다 괴팍한 것이 없다 말이죠.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인간의 괴팍한 것 다 끌어 모아보라 말이죠.
에구 에구 그것도 괴팍한 거냐?
뭐 최순실 비리? 닭그네 게이트? 워터게이트 보다 더 한 게이트 라꼬요?
천만의 말씀!! 십자가 게이트, 십자가 부조리, 십자가 모순, 십자가 불의,
십자가 스캔들 에 비하면 쨉도 안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나 봐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다 용서해 주마
일만달란트 다 용서해 주마 라고
아주 배짱 두둑하고 그 어떤 허물도 다 덮어버리는 괴팍한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거 무시하면 다 조져 버리는 겁니다.
일만달란트 용서 받아도 용서 받은자 없게 만들어 버리는 괴팍한 용서이다는 거죠.
그 정도가 되어야 용서의 왕 아니냐 말이죠.
요즘 말로 깡패
음원 깡패
아무도 이길수 없다는 뜻에서의 깡패
최근 얼마전까지만 해도 신 이라고 표현했는데
뭐 직장의 신, 요리의 신, 노래의 신 뭐 등등
이제는 그것도 모잘라서 아예 더 자극적인 표현 ~~~ 깡패
즉 모든 시선을 다 빨아들인다는 블랙홀과 같다는 식이지요.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일려고 군사를 풀었는데
다 죽고
엘리야는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여호와를 원망할때에
주님은 깡패처럼 에구 에구 이세벨 군사가 그것도 군사냐 라고
겨우 그 몇 명 안되는 자들 땜에 한탄하냐 라고
엘리야에게 남은자 7천명을 보여주니까
울음 뚝 저절로 기쁨이 샘솟는 겁니다.
전복이 되는 겁니다.
7천명 깡패가 남은자로 남아 있다는 거죠.
이게 저들 괴팍함 보다 더 나은 괴팍함이다는 겁니다.
자극 보다 더한 자극, 깡패 보다 더한 깡패
기적을 배신할 정도로 더 한 기적
그것도 기적이냐고 쨉도 안된다고 말도 안되는 더 나은 기적인 요나의 표적을 말이죠.
에구 에구 남 용서 7번 하는 것 그것도 용서냐?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너나 7에 70번 용서 받으세요
이게 괴팍함이다는 거죠.
괜히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 말이죠.
인간들의 죄악과 강팍함 괴팍함을 예수님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겁니다.
뭐? 예수님을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괴팍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어찌할꼬?
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이정현이는 장지진다고 했는데
베드로도 장 지진다고 했지만 안지졌지만
이제 어찌할꼬?????
어쩌긴 뭐 어쩨요
뻔뻔스럽게 주님의 괴팍함이 그것도 예수님 세 번 부인한거냐? 라고
예수님 본인 쪽에서 넉넉하게 아예 그딴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우와 나의 괴팍함 보다 더 괴팍하네?
나의 괴팍함 보다 더 옳은 괴팍함이다 라는 겁니다. 다말 사건 보세요
시아버지 유다가 괴팍한 겁니까? 다말이 더 괴팍한 겁니까?
누구 괴팍함이 더 옳았냐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 가 말했죠
내가 졌다 그가 나 보다 옳았다 라고 말이죠.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고 외칩니다.
그것도 인간들아 그것도 죄악이냐고? 그것도 괴팍함이냐 라고?
적어도 괴팍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세 번씩이나 부인해도
그런 나를 7에 70번 용서하겠다는 그 용서깡패가 더 괴팍한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항상 한 세트로써 만드시는 겁니다.
얼마나 괴팍했으면 말이죠.
저번에 시편 106편 9월달에 미리 쓴 글에
http://crosslamb.tistory.com/1769
왜 다른 땅 다 내버려 두고
거기서 주인 노릇하면서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굳이 애굽땅
그 당시 최고의 권력 국가의 땅에 들어가서
왜 구지 노예로 사느냐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미국
아님 중국에 왜 이스라엘을 탁란 시킬까요?
그것은 딴 나라는 절대 안돼
오로지 이스라엘과 애굽이 한 세트가 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약속과 우상이 한 세트로
천국시민과 지옥시민이 한 세트로 구성되기 위함이다 말이죠.
은혜나무와 선악나무가 한 세트이듯
애굽 그것도 강국이냐고? 보이지 않는 천국과 족히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최대강국을 하루 아침에 몰락시켜 버리는 겁니다.
애굽왕 파라오를 강퍅케 해 놓고서는
그것도 강퍅이냐 라고 하시듯이 말이죠.
이것이 바로 더 나은 괴팍함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이 영광 앞에서는 그 어떤 깡패도 다 무릎 꿇는다는 거죠.
(출 7:3,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8, 개역)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결국 애굽왕의 강퍅케 됨과 하나님의 영광이 한 세트가 된 거죠.
예수님을 그냥 알수 없어요.
반드시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봐야지
안 그러면 바리새인과 똑같은 사고방식인 일치성 동일성에 빠진다 말이죠.
빛은 반드시 어두움과 한 세트로 봐야 이해가 된다 말이죠.
성령은 악령과
다윗은 사울과 한 세트
사울왕이 죽으면 다시 다윗은 애굽화 된 이스라엘과 한 세트가 되는 겁니다.
비언약은 언약과 한 세트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두 언약
곧 하갈과 자유하는 여자 사라와 한 세트를 이루듯
탕자와 맏아들 처럼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하는 것과 도리어 자기자신이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함이
한 세트로 구성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와 더 나은 아벨의 제사가 한 세트로 말이죠.
그러니 괴팍함이란 온유함과 한 세트를 구성하는데
그 온유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온유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겠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안 됩니다. 정 그러시면 저도 가겠습니다 라고 했을때에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망 듣는 것이 바로 괴팍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온유다 말이죠.
즉 괴팍 보다 더 나은 괴팍이어야 한다는 것이 온유입니다.
출애굽 사건때는 여호와의 영광이었듯이 말이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잖아요.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왜 이렇게 괴팍하게 두 패를 한 세트로 하느냐 말이죠.
너무 괴팍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니까
여인네들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보일때에
싹 돌아서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 말이죠.
인간미 넘치는 말씀은커녕 오히려 종말에서
나를 위해 눈물 흘리는 괴팍한 너희들을 지옥에서 건지고자
십자가라는 더 나은 괴팍함 즉 모든 허물을 덮고자 지시는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괴팍함을 지겠다는데 왜 우냐 말이죠.
이게 바로 싸가지 없는 마리아와 오늘 시편 106편에서의 이스라엘처럼
또는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음행처럼
또는 사단의 깊은 것처럼
자기 영역을 확대시키고
그런 것이 자랑이 되는 육의 자랑에
마침 어머니께서 그렇게 돈을 해먹어도 그것도 모잘라서 더 해먹을려고 밑도 끝도 없이 확장 시킬려고 하듯이
애굽이 그런 식인데 지금 이스라엘이 그런 식이니까
싸가지 없는 마리아와 확대 확장 하고자 분주하게 여러일을 하고 있는 마르다가 한 세트를 이루면서
이 싸가지 없는 마리아를 괴팍한 마르다 보다 더 괴팍한 마리아를 칭찬하시듯이
좋은 것을 택했다고 칭찬하신다 말이죠.
의문의 밑도 끝도 없는 반복이 아니라
(우상이란 결국 확대 확장인데 그것도 확대 확장이냐 라고 나오는 것이 사랑이라는 폭력)
명료하고 또렷한
의문 보다 더 괴팍한 또렷한 미래완료를 쳐다 보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이스라엘이 지금 의문의 반복을 할때에
이 또렷하고 명료한 십자가의 스캔들을 제시하는 겁니다.
비교해 보라 라는 거죠.
자 그러니 뭘 해도 다 되면 누가 쳐다 보겠습니까
뭘 해도 안되기 때문에
의문의 반복의 한계를 보게 되고
뭘 해도 다 되는 주님을 즉 긍휼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쳐다 보게 될 것입니다.
(시 106: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약한 것이 주의 강함입니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최순실 게이트 와 족히 비교도 안되는 십자가 게이트 스캔달
그것도 세 번 부인이냐? 그것도 죄냐? 그것도 용서냐?
십자가는 우리를 비웃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비웃어서 죽여버렸는데
그것도 살인이냐? 라고
이렇게 죽은 우리를 살리는 넉넉한 십자가
뭘 해도 안되는 인간에게
뭘 해도 다 되는 십자가는
그것도 죄냐 라고 모든 죄악을 다 짊어졌습니다.
몇 안되는 것으로 쩔쩔매고 몇 푼 안되는 것으로 화내고
최순실 닭그네 몇푼 훔쳤다고 230만이 모여서 촛불 집회 할 정도로
우리는 지극히 쫌생이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쫌생이냐 라고
자기가 대신 다 짊어지겠다고 하니
그냥 입이 떡 벌어질 뿐이지요.
이런 넉넉함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경악스럽습니다.
최순실 게이트 저리가라 할 정도로 쨉도 안됩니다.
십자가 게이트 스캔달은 충격적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삼일 만에 다시 살려 주가 되게 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구체적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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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책(말씀) 비록 버림받았으나 (시편 119편) (0) | 2016.12.17 |
착고에 상하고 쇠사슬에 매인 진리, 건축자들이 버린 진리 (시편 105편) (0) | 2016.12.05 |
버림받는 진리만이 진짜 진리(구체적 보편성) (시편 118편) (1) | 2016.12.04 |
과분한 주의 사랑이기에 모든 이방인도 주를 찬양케 하심 (시편 117편) (0) | 2016.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