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안되더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미 벌써 다 이루었도다 (시편 106)

 

7-8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언발란스, 모순이어야만 하는 구원 : 구원이라는 모순, 부조리, 불법 (너희 죄가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요)



(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9:24, 개역)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06: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6:2, 개역)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

(106:3, 개역)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06:4, 개역)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106:5, 개역)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업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106:6, 개역)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106:7, 개역)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106:8, 개역)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106:9, 개역)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106:10, 개역)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106:11, 개역)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106:12, 개역)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106:13, 개역)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06:14, 개역)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06:15, 개역)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106:16, 개역) 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

(106:17, 개역)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

(106:18, 개역) 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

(106:19, 개역)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106:20, 개역)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106:21, 개역)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106:22, 개역) 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

(106:23,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106:24, 개역) 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106:25, 개역)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106:26, 개역)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

(106:27, 개역) 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106:28, 개역)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106:29, 개역)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106:30, 개역)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106:31, 개역)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106:32, 개역)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106:33, 개역)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106:34, 개역) 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106:35, 개역)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106:36, 개역)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106:37, 개역)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106:38, 개역)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106:39, 개역) 저희는 그 행위로 더러워지며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106:40,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106:41, 개역)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106:42, 개역) 저희가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 수하에 복종케 되었도다

(106:43, 개역) 여호와께서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106:44, 개역)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106:45, 개역)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106:46, 개역)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106:47,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106:48, 개역)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앞의 시편 105편에서 출애굽을 다루었듯이

시편 106편도 출애굽을 다루고 있습니다.

차이점은 앞의 것은 구원역사이고 뒤의 106편은 그 구원이 구원받을만해서

구원 받을 자격이 마땅해서 준 것이 아닌

원망만 했을 뿐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안되더라 라는 것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뭘 해도 안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시편 106편의 상황도 역시나 출애굽을 펼치듯이 출이스라엘을 펼치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구원 받을 만한 조건이 그래도

그래도 조금이라도 염치 있으면 그래도 구원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들입니다.
누구 말 마따나 쪽팔려서 성화를 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합니다
.

 

바로 앞의 글 계시록에서도 일곱교회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제목을 부제로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일곱교회 라고 한 이유는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교회를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일곱교회 다운 구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주님의 자녀라면 ~~.

그것이 왜 엉터리인고 하니 그럼 머리되신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처음과 나중이 아니라

예수님은 처음에만 해당되고, 처음만 담당하시고

나중은 교회의 몫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 교회들의 주장입니다.
그래도 역시나 마무리를 교회가 참여 해야 한다고 말이죠.

 

즉 나그네가 아니다는 거죠.

 

고아인데 아버지 있는 자들 보다 더 나은 아버지가 있는 자들이 고아이고

과부인데 남편이 죽어 없는 자인데 남편 있는 여자들 보다 더 나은 남편이 있는 과부이고

나그네 이방인인데 토착백성인 임금이 있는 자 보다 더 나은 섬기는 임금이 있는 이방인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보다 더 나은 개같은 이방인을 섬기는 예수님이 임금 되시는 그런 이방인이다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나

지금 시편 106편에서 지적하시는 이스라엘이나(출이스라엘을 선언하는 시편 106)

착각을 하는 것이

아 그럼 첫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 처음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이지?
그래 그래 알았어 처음사랑 회복하면 될꺼 아이가
?

나그네였었는데 고아 과부 나그네인데 그것을 회복하라는 말이지

까짓꺼 회복하지 뭐


라는 식으로 오늘날 성화론자들과 그 당시 이스라엘이 이렇게 생각하더라 말이죠
.

오늘날 교회들이 다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상한갈대는 회복이 안됩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바람막이를 해주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뭘 해도 안되더라 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씀을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인이 안되면 그 어떤 인간도 안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 배치된 자들입니다.

그들이 안되면 우리도 역시나 안되는 겁니다.

 

자 그럼 끝났죠

영화 끝! 자리를 뜨고! 집으로 가자 말이죠.

그런데

안되는데

불가능한데 주님은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부제에서 제가 모순 부조리 불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캔들입니다.

 

안되던게, 불가능한데 그 불가능을 가능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되는 것은 여전히 안됩니다.
안되는데 주님 쪽에서 나를 가능하게 만들어서

원망치 않게끔 행하도록 해서 패쓰 시키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예수님 본인이 직접 불법을 행해서

이미 불합격난 성적표를 조작해서 합격으로 바꿔치기를 해버렸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숨어있던 마귀가 등장하고 들통이 납니다.
인간이 절대로 볼수도 상대도 할수 없는 마귀를 말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마귀는 예수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합니다.
마귀가 인간만을 상대로 하다가
예수님이 성적표를 조작하는데 있어서 비로소 발끈하고 예수님만을 향해 덤빈다 말이죠.

 

자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바로 이 차이를 오늘날 제대로 설명해 주는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돈만 쳐 먹는 삯꾼 목자들이다는 겁니다. 삯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놈들 말이죠.

 

모르니까 설명 못하는 겁니다. 육으로는 불가능하거든요.
물론 설명이 가능하면 복음이 아니지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만이 직접 일하시는 겁니다.

 

결국 저런 불법을 예수님이 저지를 일이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착한 예수를 만들어야 착한 교인들이 돈 내거든요.

불법을 저지르는 나쁜 예수를 말했다가는 장사 말아먹는다 말이죠.


서비스 엉망인 곳이 장사가 되겠냐 말이죠
.

그러니 이들에게서의 십자가는 일종의 서비스 혜택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저 죄 용서 해서 한번 리셋해서 처음의 깨끗한 상태로 포맷해주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은 항상 알파일 뿐이지

항상 나중은 아니다는 겁니다.
나중 이라는 오메가에 우리가 할 일이 염치 있다면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 해야함이 돈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밥줄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그 열심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오늘날 국회 의원들이 왜 열정적이겠습니까
?

국민을 섬기는데 열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돈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 되는 것에는 목숨을 걸고 열정적이지 않습니까
?

그러니 욕 얻어먹든 말든 국회의원을 계속 해 먹을려고 한다는 거죠.

국민을 섬기는데 지쳐서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라고 말하는 국회의원은 없습니다.

딴나라 당이나 덜민주 당이나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듯 해도

둘 다 국민들을 등쳐먹는 자들일 뿐이다 말이죠.
국민의 당이 아니라, 국민등쳐먹기 당이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각종 이스라엘 회복 독립운동 계파들이나(바리새인 등등)

그들이 적으로 삼고 있는 로마나(딴나라당과 세리 매국노 친로마, 친일파나)

둘 다 마귀들이다 말이죠.

 

이들로부터 나그네 곧 잃어버린 원인으로 만드셔서

이 잃어버린 양에게만 충성하시는 더 나은 섬기는 임금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벌어지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는 거죠.

구원사건인 출애굽 사건입니다.

왜 많고 많은 지역 다 내버려 두고

왜 하필이면 최강국 함 땅에 애굽 땅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냐 말이죠.

일부러 그 속에서 객이 되냐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까?

지역에 가서 주인 되면 되잖아요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 이시기 때문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 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사건이 말이죠.
역시나 십자가 사건도 인간 구원용이 아닌 예수님의 알파와 오메가 되심을 보여주기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무리 출애굽 해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안되어야 합니다.

되면 큰일 나요

자살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되면 큰 일 나요 자살한다니깐요.

자기가 성취해 버리면 나중에 그 성취한 것 까지 까먹어 버리면
감당이 불감당이다 말이죠.

오늘 또 누구 자살했던데

그런 식으로 자살해 버린다 말이죠.

그러니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발언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살을 권유하는 놈들이다니깐요.

 

이스라엘은 실패 해야 합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인 이유는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뀐게 아니라

여전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절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질러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살 하고 싶어도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하겠끔 만들고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토록 만드신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직접 책임 지시겠다는 겁니다.

안그러면 베드로 역시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가룟유다는 자살했고 베드로는 같은 죄를 지어도 주님 쪽에서 붙드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실패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리면

이것은 [약속한 성령]이 필요 없는 사람

오메가 역시 예수님이 아니게 되는 사람, 곧 베드로가 된다 말이죠.

이 위험한 짖을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저지르고 있다 말이죠.

마귀들입니다.

그런 위험한 짖에 더 나은 위험한 짖을 하는 자들이

성령 받은자로써 그들의 위험한 짖을 깽판 놓는 더 나은 위험한 짖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더 나은 위험한 짖이란 율법의 껍데기만을 지켜서 권력과 힘과 육의 자랑을 주장하는 성화론자들을 상대로 해서
진짜로 사랑을 보여줘버리게 됩니다. 그것도 우연히 성령이 덮쳐져서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밉상을 받게 되겠냐 말이죠.
믿는자들로 부터 받는 미움 말입니다.
즉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보여줘 놓고 그것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라고 했을때에
정작 사랑은 안보여줘놓고 율법 지켰다고 생색내는 성화론자들에게 적개심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식으로
성령의 소욕은 저들의 소욕에 의도적으로 침범한다 말이죠. 아무도 감히 바리새인에게 도전하는 자가 없었는데
성령은 겁도 없이 덤비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더 나은 위험한 일이다는 거죠.

아마 돌삐 맞아 죽을려고 환장한 자들이

바리새인에게 대드는 자들일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은 율법입니다. 법이다 말이죠.

그 법에 대들었던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잖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미친놈들인 성화론자들은 오늘날 법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마침 어머니랑 아침에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와즈다] 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보고 한 대화입니다.

몇년 전에 봤던 영화라서 말이죠.

이슬람권 여자 아이가 감히 감히 남자들만 탈수 있는 자전거를 타는데 있어서 주변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어머니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율법이 강하면 강할수록

율법의 정신인 이웃사랑 즉 이웃환대법 약자보호법이 강해질까요 아니면

고아가 된 여자아이 과부된 여인 창녀로 살아가는 여인 등등

이들 여인들이 더더욱 창녀로 팔려가고 몸을 팔지 않으면 고립시키고

창녀는 아예 개 돼지 취급해 버리는

이런 악순환이 더더욱 강해질까요?

오히려 등쳐먹을까요?

명예살인이라는 둥 등등이 법이 강해서 벌어진다 말이죠.

 

결국 법의 껍데기는 강해지지만

법의 진짜 취지인 사랑은 어차피 불가능 하기 때문에 미리 다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즉 귀히 여기지 않더라 말이죠.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자 그렇게 악순환이 되는 겁니다.

 

아프리카의 여성할례 문제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에 관여할 입장이 못 되지만

그 근본원인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어서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의 신 됨을 방해하는 짖들은 가만히 두질 않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명예살인, 또는 아프리카 여성 할례 등등의 문제는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겁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성화론자들이 성화를 주장하는 이유도

또 막살면 안된다고 하는 자들도 역시가 마찬가지이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들은 막살고 있거든요.

근본주의자들이 마치 자본주의를 악으로 규정하면서도
그 지도층들은 돈에 미쳐 있는 자본주의 숭배자들이듯이 말이죠.

 

그들에게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복음이라는 부조리

십자가 라는 스캔들을 들어볼수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능한 소리를 만들어야 결국 돈으로 빠져 버리는 식이다는 거죠.

 

참으로 성경 말씀은 놀랍게도

즉 예수님은 놀랍게도

돈을 마치 인물처럼 주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 제가 지금 동전을 쥐었다 칩시다.

동전이 발도 없고 팔도 없습니다.

얼굴도 없어요.

그런데 동전을 예수님은 주인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너무 정확하다는 겁니다.

즉 종은 그 어떤 권리가 없는 셈입니다. 곧 인간 말입니다.

오로지 주인에 의해 움직이는 노예이다는 겁니다.

 

그런 주인이 멀쩡히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주인이 등장했으니

 

얼마나 예수님 자신이 기가막히게 표현하셨느냐 말이죠.

즉 인간 상대 안한다는 겁니다.

인간을 장악하고 쥐락펴락 가지고 노는 주인만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 시편 106편에서

아무리 인간 곧 인간의 대표성인 이스라엘이 실패했고 거역했고 원망했다 손 치더라도

막살았다 치더라도 막살았다가 초점이 아니라

졸지에 새주인이 생겼다는 점에서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에

 

인간들은 설명을 못하니까

자꾸 엉터리를 집어넣더라 말이죠.

막살면 안된다는 둥

성화론을 주장한다는 둥

죄를 짖지 말라는 둥

여전히 개인 개인의 문제로 보게 해서

개인이 돈 내어야 하는 문제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저 호시 탐탐 돈 돈 돈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돈을 사랑하는 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번 만번 바리새인의 삶을 뜯어 보세요

근검 절약 마치 테레사 수녀처럼 온 동네 다니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굶주린 자를 위해서 먹을 것을 아낌없이 주는

이런 바리새인을 왜 돈을 사랑하는 자 라고 하셨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라는 노예를 보고 종을 보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돈이라는 그들의 주인을 보고 주인에 초점을 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테레사 수녀처럼 살면 뭐하냐 말이죠. 아비가 마귀인데

주인이 마귀인데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돈에 미쳐 삽니다. 돈 없으면 못 산다고 맨날 돈 달라고 기도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주님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본인이 우리들의 주인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돈이라는 주인과 싸우는 분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이 모순점을 저들은 설명을 못합니다.

당연하지요 마귀 자식이니까 말이죠.

 

탕자 보세요 돈에 미친놈 아닙니까

맏아들 보세요 아버지 말씀을 절대로 어기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은 모순되게 누구에게로 향했습니까?

이것은 탕자가 옳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 이야기인데

그래야 가짜 주인이 들통이 나는데

 

주인 이야기를 자꾸 종 이야기

노예 이야기를 하니까

가짜 주인이 들통이 나지 않는가운데

은근 슬쩍 넘어가더라 말이죠.

이것이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마귀들인 이유인 겁니다.

물론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자기 보다 못한

기존의 교회의 비리를 지적하고 있으니 우리가 정의롭다를 외치지만

바로 그것이 마귀인 이유라니깐요.

인간은 믄 짖을 해도 마귀 짖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그것 마저도 마귀짖으로 몰아버리면

자기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친일파 교회 보다 더 나쁜놈이라는 것을 밝혀지니까

그것을 무슨 수로 견딜수 있겠냐 말이죠.

가룟유다가 오로지 이스라엘의 독립 해방만을 꿈꿧다 말이죠.

거기에 예수님은 하등 도움이 안되었고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음을 알고 내부고발자가 된 것 아닙니까?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 할려고 말이죠.

 

주객 이 뒤 바뀐 겁니다.

예수님이 주인이고 인간은 종입니다.

예수님이 도둑으로 와서 집 주인을 묶어서 새간을 빼앗는 겁니다.

그래서 빼앗은 새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가룟유다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성화론자나 개혁주의 등등

자기들이 주인이고 졸지에 예수님은 시다바리로써

자신들의 좋은 뜻에 도움을 주는 종으로 취급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종노릇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 종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말이죠.

 

그 당시 당대의 최고의 율법실천가들을

말씀실천가들을 마귀로 취급했다는 사실

오늘날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필요 없이

예수님이라는 주인이 필요가 없이

성령도 종

예수님도 종

 

오로지 나의 옳은 뜻에 좋은 뜻에 밧데리처럼 보충해주는

종 취급해서 성령을 예수님을 운운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막살면 안된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그게 바른 소리 맞으니까 바른소리 하면 자기가 바른 인간이 된다고

 

그런데 아무리 바른 소리 해도 예수님은 그들의 주인이 누구이기에

저런 소리를 하느냐로 보시는 겁니다.

저들의 주인이 바로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다 설명이 되는 겁니다.

아 그래서 저들이 막살면 안되는 구나 라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인 행세 주체의식을 가지자 라고 마치 옳은 소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니 마귀의 종이기에 주인이 시킨대로 한 발언으로써 나왔다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십자가이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출애굽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시편 106편을 보면서 아 이래서 출애굽 사건이 벌어졌어야만 했구나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원망하지 말자

거역하지 말자 라고 마귀해석을 하는 겁니다.

안 그런 놈이 없는 겁니다.

다들 그렇게 시편 106편을 해석하더라 말이죠.

 

자 그럼 우리가 시편 106편을 알고

또 신약의 십자가 사건도 공부하고

그렇게 성경 지식 계시록까지 많이 공부해서 알아서

그 당시 출애굽 사건으로 타임머신 타고 들어갔다 칩시다.

 

자 그럼 원망 안 할 자신 있을까요?

이번 여름 대구가 39도에서 40 까지도 올라갔는데

올해 2016년 중동 사막은 평균이 56도가 되니까

자 공부했고

어떤 일이 다 벌어질 것 다 알고 해서

그 당시로 가 봅시다

과연 원망 안 할 자신 있냐 말이죠.

과연 막살지 않을 자신 있냐 말이죠.

 

즉 알아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제 말이 막 살자 라는 표현입니까?

이런 식이면 종들끼리, 노예들끼리의 논쟁일 뿐이다 말이죠.

물론 그것 또한 마귀가 바라는 점이니까 말이죠.

 

왜 예수님께서 다른 지역에 집어넣어서 나그네 가 안되게

객이 안되게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되게

멀쩡한 땅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원수의 중앙에

성전의 정중앙에

종으로 집어 넣으시냐 말이죠.

주인으로 살게 하시는게 아니라

왜 종으로 나그네로 말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보자 말이죠.

시편 106편을 먼저 기록하고서는 그 기록대로

출애굽기를 써 나가시는 겁니다.

 

물론 출애굽기도 이스라엘은 모르고 즉 안되고

시편 106편도 이스라엘은 안됩니다.

 

그럼 시편 106편이 쓰여지기 전에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 먼저 기록이 되고

그 기록된 대로 시편 106편의 사건이 벌어진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모조리 누구를 말하기 위한

종 이스라엘

나그네 이스라엘의 배치 입니까?

왜 일부러 함 땅에 객이 되게 하셨냐 말이죠.

 

주인 곧 알파와 오메가를 말하기 위한 주인이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실패 해야만 합니다.

뭘 해도 마귀짖 뿐이다는 것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정해서 인정이 아니라 실제로 사실로 마귀짖만 한다 말이죠.

뭘해도 안되요

 

안되는데

그 안되는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뀐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 되심 때문에

우리는 건방지게 이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을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이스라엘 실패 했고 원망했고 거역했고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실패한 이스라엘인 나

원망한 나

거역한 나

마귀짖만 하는 나

탕자짖만 하는 나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지킨 적이 없는 나

 

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 되심은 변함이 없이 일정하다 라는 겁니다.

미쁘시다 말이죠.

 

바로 여기서 일곱교회가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3일 만에 다시 하나님이 살리셔서 우리들의 주가 되게 하신

그 간극에서 나온 것이 일곱교회이지

 

성화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막살지 않아서 나온 것도 아니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어서 나온 것도 아닌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간극에서만 나온 것이 일곱교회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 원인 없는 결과를 그들은 주장을 못하니까

다른 곳에서 나온 교회를 주장하니까

막살면 안된다는 둥

거지나사로처럼 살아야 한다는 둥

이스라엘처럼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둥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둥

이런 마귀의 자식 다운 발언들을 겁도 없이

두려움없이 내 뱉어서

자기도 천국가지 않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가로막고 있다 말이죠.

이 모순은

이 십자가의 부조리 곧 스캔들은

신흥 이단들 이나 기존 정통 교단들이나 또는 개혁해야 한다고

더 깨끗해져야 한다고 무슨놈의 결백증 환자도 아니고 말이죠.

새로운 성화론집단들이든

 

다들 마귀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지혜를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겁니다.

 

1년에 딱 한번 고난 주간에?

나머지는 돈 버는 날

돈이 주인이 되는 교회들 뿐이다는 거죠.

 

그러니 교회에 아예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거든요.

종들을 봐봤자 거기서 거기입니다.

주인을 바로 보자 말이죠.

그러면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주인이 누구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세력이 누구인가를 봐야 한다 말이죠.

아무리 경건하고 아무리 바른 설교를 하고

아무리 바른 복음을 전해도

종을 볼게 아니라 똘마니를 볼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이죠.

 

당연히 주인이 시키는대로 발언할테니까

주인을 볼수 있다 말이죠.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은 뭘 해도 안 되기 때문에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이 주인이 아닌 자는

 

아직도

의문의 모호한 소리를 반복합니다,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긴장상태 라는 둥.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답게 행동해야, 교회가 교회 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이죠.

 

죄송하지만 그것도 다 실패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성령을 성화론자들이 이제 성령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율법 못 지키는 것이 가능해 졌다고 하더라 말이죠.

가만히 어떻게 율법 지키는가 보니

골라서 자기가 할 줄 아는 것만 지키더라 말이죠.

어린 성도는 낮은 단계

소위 목사 장로 전도사는 수준 높은 단계

참으로 보기에 민망하더라 말이죠.

아예 대 놓고 마귀짖을 하더라 말이죠.

 

모순의 간극

부조리

불륜

불법

스캔들

그 상태 그대로 놔두시지

그 간극을 그 부조리를 없앨 마음이 추호도 없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 알파와 오메가 이시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간극을 없앨려고 그 자리를 차지할려다가 미끄러져 쭐꾸덕 자빠지는 겁니다.

어딜 감히 사랑의 간극을 없애냐 말이죠.
스캔달을 왜 없애냐 말이죠. 더더욱 얼룩으로 남도록 하시는 겁니다. 거리끼는 십자가로 말입니다.

 

자 그럼 왜 시편 105편에서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함땅에 객으로 만드시고

즉 나그네

 

또 시편 106편에서 이스라엘을 안되게, 실패케, 원망케, 죄인 되게,

뭘해도 안되게 하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만 알파와 오메가 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종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를 아무리 먹어서 주인 인척 해도 말이죠.

그렇게 마귀를 거쳐서 처음과 나중 되심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유 없습니다.

 

이 원인 없는 결과에 예수님은 충실하신 겁니다.

 

나그네 된 이스라엘에 충실하심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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