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와 큰 파도 (시편 93편)
(시 93: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시 93:2, 개역)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시 93:3, 개역)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시 93:4, 개역)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시 93:5, 개역)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시편 104편에서 미리 올린 내용이
물로 표현된 부분을 제가 불로 대신 표현해서 설명했습니다.
(시 104:9, 개역)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창조때의 그 물
즉 경계를 짖는 그 물
(창 1:9,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10, 개역)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뭍이라는 땅과 바다 라는 경계를 가르는 의미로써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신 배려로써 그 창조때의 그 물이라고 시편 104편에서 표현했는데
제가 불로써 저 나름대로 더 쉽게 설명한답시고 불로 표현했습니다.
분명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으면 불이 나무를 삼키듯이 타들어가서 그 어떤 경계로 허락지 않는다 말이죠.
경계선 말입니다.
그런데 가시떨기나무에 붙은 여호와의 불꽃은 경계선이 또렷하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적입니까? 과학적으로 백날 따져보세요. 비정상적이지. 믿음의 영역인 겁니다.
즉 가시떨기나무가 타들어가서 소진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봐 주신 인애와 자비의 제사였다는 겁니다.
아마 인간 같으면 인애와 자비가 아닌
번제와 제사를 통해서 벌써 소진되어버리는
의문의 반복이였다 말이죠.
그렇게 시편에서 출애굽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상 출애굽은 불 보다 물로써 더더욱 표현이 되는데
불이나 물이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 심판에서 벗어날자 없이
큰 파도에 휩쓸려 빠져 죽게 되고
불에 타들어가서 소멸이 되도록 되어 있는데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시 104:9, 개역)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7, 새번역) 『그러나 주님께서 한 번 꾸짖으시니 물이 도망 치고, 주님의 천둥소리에 물이 서둘러서 물러갑니다.』
(시 104:8, 새번역) 『물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주님께서 정하여 주신 그 자리로 흘러갑니다.』
(시 104:9, 새번역) 『주님은 경계를 정하여 놓고 물이 거기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물이 되돌아와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십니다.』
(시 104:10, 새번역)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시 104:11, 새번역)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그리고 이 물은 성령과 연관되어서 구약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세례입니다. 죽음을 통과한자
분명 죽음 속에 들어갔습니다.
홍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럼 죽어야 하는데 물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죽음이 먹혀 들지 않는다는 거죠.
이것이 신약에서는 실질적인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의 죽음이
즉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하나님이 되신 예수님에게 퍼 부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인간의 살인무기도 예수님에게 통하지 않고
먹혀들지 않고 오히려 더 좋게 하는 꼴인 더 나은 또렷함을 보여주더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시편 93편을 통해서 물이라는 죽음 곧 심판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내심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물 위에 운행하신다 말이죠.
즉 죽음인 심판 위에 운행하신다 말이죠.
그 하늘에 있던 보좌가 언제 보이느냐?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보좌가 보인다 말이죠.
물론 성령 받은 자에게만 해당 됩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물이라는 심판과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길 인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길 인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퍼부어서
큰 파도를 일으켜서 물 속에 빠져 죽게 하신후에
3일 만에 다시 살리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난 거죠?
하나님의 보좌가 그 큰 파도 위에 운행하심으로써
3일만 지나면 죽음이 그 경계를 넘어서 덮쳐버릴텐데
3일만에 다시 살려서 죽음이 그 경계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보좌가 큰 파도 위에서 운행하심을 봤을때에
그 보좌에 누가 앉아있는가 말이죠.
물론 당연히 하나님이 앉아 계시겠죠.
그런데 안 보입니다.
안 보이고
빈 보좌만이 있더라 말이죠.
그렇다 보니
이 보좌가 비어있는 빈공간으로 되어 있다 보니
호시탐탐 늘 그 자리를 탐내는 자를 보게 되더라 말이죠.
우리는 보좌의 배려로 인해 그것까지도 봐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마귀입니다만
가만히 보니 우리 또한 늘 그 자리를 탐해서 늘 호시탐탐 앉을려고 했던 모습을
마귀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그 모습이 바로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사건이고
베드로가 나도 예수님 따라 십자가에 죽겠습니다 라고 단언했던 순간에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책망받는 그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이런 지적은 아무나 못 받습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는 자만 이런 지적을 받는다 말이죠.
사생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깁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밀까부듯이 초정밀로 리얼하게 다 포착했습니다.
물증도 너무너무 많고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들이 한가득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결제만 있으면 베드로를 잡아 지옥으로 보내면 된다 말이죠.
여기에 그 어떤 누구도 반발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말이죠.
그런데 제가 늘 뭐라고 이 부분에서 언급했죠?
맞습니다. 예수님의 반칙
예수님의 불법저지르심 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묻고 따지는 것을 베드로에게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도저히 물을 수 없는 말을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이죠.
자 이렇게 됨으로써
물이 그 경계를 넘었다고 주장하는 마귀와
무슨 소리고 넘지 않았다고 빡빡 우기는 예수님
곧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 되어버린 겁니다.
주인 싸움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종의 싸움이 아닙니다.
치사하게 마귀는 늘 종인 즉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는 인간인
노예인 인간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죽음으로 겁주면서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마귀의 팔을 꺽으시면서
이제 고만해라 많이 가지고 놀았다 아이가
애들 가지고 놀때는 지났다
니가 가라 하와2 지옥 ~~~
이렇게 예수님이 마귀만을 상대로 일하신다 말이죠.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서 예수님을 꺽을려고 한다 말이죠.
마귀가 즉 유대인들이 돌삐를 들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한다 말이죠.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가지고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다 말이죠.
베드로를 가지고 마귀가 가진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다 말이죠.
별거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죄책감을 가질게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말이죠.
누구 보란 듯이 벌어진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사건이였다?
마귀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움을 당한다 말이죠.
우리는 매일 매일 큰파도에 빠져서 죽음이라는 사망에 넘기움을 당한다 말이죠.
그러면 누가 좋다고 마중나옵니까? 당연히 마귀가 좋다고 나올껍니다.
그때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나는 겁니다.
큰 파도 위에 말이죠.
출애굽때 홍해를 건너기 전에
다 죽게 되었다고 원망하잖아요
세 번 부인하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달리기 전에 말이죠.
그래서 원망함으로써 홍해를 건너기 커녕 죽음이 가로막고 있어서
다 여기서 죽게 되었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도 원망하고
죽음 앞에서 어쩔수 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말이죠.
아무리 막살지 않았다고 우겨도 그 순간 만큼은
모세 널 믿고 따라왔는데 이게 뭐냐 라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왔는데 약속은 개뿔이라고 우리는 다 죽게 되었다고 외칠 때
그렇게 죄가 저절로 적나라하게 다 터져나올때에
단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원망이 다 나오면 그때
홍해를 가르는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죽음 속에 어떻게 길이 생기냐 말이죠.
90년대에 이제 막 한참 신학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겨서 막 묻고 다닐때에
그 당시 한국은 이미 유럽에서 끝나버린 자유주의의 반박들이
늦게 논쟁 꺼리로 들어와서 마침 거의 끝나갈 무렵에 제가 처음 그런 정보를 접했다 말이죠.
신학자들이 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개혁주의든
홍해 자체를 고지 곳대로 보는 자들이 없다 라는 놀라운 사실 말입니다.
보수요 정통주의도 막상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냥 솔직하게 말도 안된다고 해야 하는데
그렇기에 믿음의 영역인데
성령의 영역인데
자꾸 논리로 인간의 지식으로 억지로 끌고갈려고 하더라 말이죠.
믿음이라는 것은 말이 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말이 안되는 영역이 믿음이다 말이죠.
오히려 논리와 이성이 이런 말도 안되는 비논리의 보충물로 작용되는 시다바리로 이용되더라 말이죠.
마귀! 보세요
얼마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제대로 밀까부듯이 빅데이터로 초정밀 조사를 해서
그 어떤 반박도 있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베드로를 잡아 왔다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그 어떤 누구도 구원 못하도록 제대로 잡았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한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더욱 더 낫도록 또렷하게 너끈히 넉넉히 구원하십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말이죠.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말입니다.
이성과 논리로 안 물었습니다.
그런거 일체 안 따집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물증과 수많은 증거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한마디
너 나를 사랑하니 ~~~
따 봉 ~~~~~~~~
졸지에 마귀가 예수님을 제대로 한방 먹이는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마귀를 입도 뻥끗 못하도록 그 어떤 반박을 못하게 한방 제대로 먹였다 말이죠.
여인아 너를 정죄해서 돌삐 들었던 자 어디 있니?
그러게요 하와2로 갔나 봐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묻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런데 마귀무리인 양탈무리의 권사모는 다시는 범죄치 말라고
문자 그대로 따와서 예수님 흉내를 내더라 말이죠.
인간을 장악해서 자기 밑의 수하에 둘려는 그 버릇이 여전하더라 말이죠.
막 가르칠려고 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은 그런적 없는데
그런 모호한 의문을 또 반복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자기들도 못 지키는 것을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왜 요구할까요?
여전히 돌삐 들겠다 는 심뽀 뿐인 겁니다.
그러니 그런자의 주장에 함께 하는 자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자꾸 선생질을 할려고 하더라 말이죠.
좀 많이 안다고
섬기는게 아니라 가르칠려고 하더라 말이죠.
다행히 그런 무리 속에 있는 자들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을 보면
살벌해요
살기가 넘쳐요
자기들이 가장 존경하는 목사를 제가 폄하하는 꼴을 못보겠다고
눈으로 레이져를 막 쏘더라 말이죠.
어쩔수 없어요 피해야 해요
자 이렇게 예수님은 저들이 퍼붓는 물 심판
죽음의 저주
큰 파도의 위협이 넘어오질 못하도록
경계를 그으시는데 그것이 바로
큰 파도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왜 하필 보좌가 큰 파도 위에 있는가?
심판은 정작 보좌에서 나와야 합니다.
땅이 요동한다고 했지요.
막 흔들어 대는 겁니다.
그때는 무조건 이유 없이 감사 뿐이다고 했죠.
왜? 비로소 모호한 것들이 그동안 속여왔던 것이 또렷함의 등장 때문에 물러가게 된다고
괜히 마귀가 율법을 쥐고서 심판한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보좌는 그 큰 파도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그어주더라 말이죠.
마귀가 보좌가 하는 일처럼 막 흔들어서 심판했는데
정작 보좌는 마귀를 배신 때리면서
마귀처럼 심판하는게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율법에 근거해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삐로 쳐죽이는게 아니라
오히려 정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구원이란 정말 정말 말도 안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삯꾼 목사와 그들의 교회는 구원을 말 되는 소리로 다 만들어서
결국은 돈을 목적으로 장사를 하는 강도의 소굴로 변했더라 말이죠.
사실은 변한게 아니라 원래 처음부터 강도의 소굴임이 드러난 거죠.
그것을 회복하겠데 ~~~
그래서 개혁주의가 유행하는 겁니다.
속지마세요. 손때세요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강도의 소굴로 열심히 만들어 놓으셨는데
왜 나서냐 말이죠.
나서다가 하다 하다 안되면 심심하면 자살해요 ~~
빚을 갚다 갚다 안되면 자살한다 말이죠.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지지 마세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음성 외에는 듣지 마세요.
주님은 그것 밖에 말씀 안하는데
이것이 창세기 처음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의 일관된 약속인데
왜 흐릿하고 의문의 반복인
마귀만이 묻고 따지는 것을
오늘날 목사나 장로나 교역자들이 막 묻고 따진다 말이죠.
마귀들입니다.
단 한놈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음성 외에는 듣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목사들이 없어요.
그저 양탈무리 권사모처럼 다시는 범죄치 말라 라고 또 남을 가르쳐들려고 한다 말이죠.
막살지 말라고 말이죠.
그런데 왜 지는 막사냐 말이죠.
제발 막 사세요 라고 말하는 놈이 없다 말이죠.
제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세요 라고 말하는 놈이 없다 말이죠.
마귀들입니다 마귀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 마귀들이라니깐요.
제 블로그 글 2개가 삭제조치 당했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가 보니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랜다고
경기도 어느 교회인데
목사놈이 돈 띠먹어서 교회가 두패로 나누어지는 가운데
서로 소송을 걸다가
아마 누가(순진한 청년부이겠죠) 제 블로그 글을 보고 물었던 모양인데
그것이 졸지에 거리끼는 내용이 마음에 꼿혔던 모양인 것 같더라 말이죠.
참 바쁘다 바뻐. 교회에서 돈 문제로 서로 소송하는 가운데서도
목사 티를 내겠다고 제 블로그 글을 삭제하는 것 보면
그 교회는 사실 교회가 아니죠 강도의 소굴이지요
이미 벌써 끝난거죠. 조금 더 탈탈 털려야 조용해지지
원하는 만큼 먹지 못하면 절대로 안 물러간다 말이죠.
참재미있게도 보좌는 정작 빈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보좌가 큰 파도 위에 운행할까요?
(창 1:2, 개역)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것은 비어있다는 것을 마귀가 보고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마귀가 자신을 드러내면서
보좌만이 실행하는 심판을
아무도 없는 보좌라는 이유로 마귀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심판하는
심판자 흉내를 내더라 말이죠.
마치 그 빈보좌는 무능한 임금처럼
모세의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처럼
졸지에 주님은 이 십자가의 지혜를 통해서
하만이 왕관을 쓰고 왕복을 입고
왕 흉내인 심판을 흉내 내다가
졸지에 죽으면 죽으리라를 확 물고 말았다 말이죠.
건드리지 말 것을 건드려 버렸구만잉
(더 6:8, 개역)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아무것도 아닌
비어있는 빈 보좌
텅텅 비어있다는 이유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보니
그만 그 자리에 앉아 버리는 바람에 쭐꾸덕 미끄러져 버리는 겁니다.
결국 빈보좌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우리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사이에
그 약속에
그 처음과 나중에
우리가 그 속에 있는 겁니다.
그 빈보좌이신 예수님의 오른편에 그 어떤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우리 곧 죄인들이 있습니다.
즉 건드릴수 없다는 말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건드리는 얼룩인 죄인들로써 있는 겁니다.
그럼 누가 건드려도 심판 받아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심판이 그 경계를 넘어와서 죄인을 덮쳐야 당연한데
오른팔 땜에
주의 보좌 때문에
무능하고 아무것도 아닌 그 무기력하게 보이는 십자가가
오히려 하만처럼 왕관을 쓰고 왕복을 입고 왕의 말을 타고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그 무능한 자를 죽일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달려 죽게 되는
그런 십자가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도록 텅텅 비어있었던 것을
먹임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저 자리에 미치도록 앉고 싶은
그 자리에 앉으면 왕관도 쓰고 왕복도 입고 왕의 말을 타고서
저 얼룩을 심판하는 그 재미가 쏠쏠 하다 말이죠.
바로 그 하만
그 마귀만을 상대로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세 번 부인 했었었었어야만 했다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야 했었었 다 말이죠.
그렇다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더하는 것은
또렷함이 아니라
또 의문의 반복이지요.
그것은 자기 존재감이 목적이지
보이지 않는 마귀만을 상대로 한게 처음부터 아니잖아요.
우리는 뭘 해도 마귀한테 잡혀올 수밖에 없는 짖 밖에 못한다 말이죠.
문제는 마귀가 아니라
문제는 항상 예수님입니다.
마귀도 묻고 오늘날 목사도 묻고 따지고
장로도 묻고 따지고
학교 선생도
직장 상사 동료 친구도 다들 묻고 따지고
심지어 나 자신도 묻고 따지는 그 질문
왜 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니 라고
다들 너도 나도 심판의 보좌에 앉아서 정죄할때에
그게 정상인데
지극히 정상인데
그렇게 큰 파도가 일어나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파도에
휩슬려 물에 빠져 죽어야 함이 마땅한데
정작 예수님은 아주 아주 비정상적으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음성으로 묻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자 이제 왜 하나님의 보좌가 큰 파도 위에 운행하시는 줄 아시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심판이 몰려와서 그 경계선을 넘어 덮쳐버렸을 때
너도 나도 달려들어서
돌삐들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을 심판하고자 합니다.
저 실로암 망대에서 깔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서 그렇죠?
즉 상대적으로 나는 안 깔려 죽었으니까 하나님의 저주는커녕 복받았다 라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 왈
그 다음 너 차례인데 우짜지?
그래서 그 다음 자기 차례 안되게 할려고
그 말을 한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괜히 말씀을 지키는 바람에
망대가 무녀져 깔려죽는 일이 나에게는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믿음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이다는 거죠.
제발 믿지 마세요.
참 앞의 글에서 갑자기 안보이던 것이 보였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귀신들린 나의 아들을 고치지 못하던데요
제발 스승인 당신은 고칠수 있기는 있나요?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4, 개역)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무엇이 보였냐 하면
내가 믿나이다 라고 해놓고서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하잖아요.
말이 앞 뒤가 안 맞잖아요
믿는다고 했는데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도와주이소 이래 나오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의 표현입니까?
안믿겨집니다. 믿음 주이소 아닙니까?
믿음의 영역이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을 부어달라고 하는 겁니다.
참 뻔뻔스럽지요.
(막 9:28, 개역)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조용히 묻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못 쫏아내나요?
자 위에서 믿나이다 믿으니까 믿음주이소 라고 하잖아요
말이 안되잖아요.
그 답이 위에 밑에 다 있습니다.
사람은 할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 말이죠.
난 안됩니다. 당신만은 되십니다 라는 거죠.
이 말을 더 쉽게 표현한 것이 바로
기도 외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기도? 그거 나도 할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
기도를 다들할 줄 안다고 본다 말이죠.
기도는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난 안됩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시잖아요 라는 겁니다.
이 단절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지
당신은 하시기 때문에 나도 이제 안되던 것이 되더라 라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마귀가? 하만이? 어떻게 물러갔나요?
무슨 수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수가 있나요?
물론 이 사건에서 위와 아래 구절에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이 내용이 있다 말이죠.
마귀가 묻고 따지는 식이면 의문의 반복이지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종인 인간을 가지고 놀 듯이
우리도 마귀를 가지고 놀게 된다고 착각하여
그렇게 묻고 따지게 되면
역시나 의문의 반복입니다.
마귀가 묻고 따지는 것이 아닌
예수님 예수님이 별세해 주세요 라고 뻔뻔스럽게 요청하는 겁니다.
이제 두 번 바위를 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할 필요는 없구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주여 십자가의 사건을 벌려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즉 죽으면 죽으리라
얼마나 무능하면 말이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만큼은 또렷하게 나타내소서 라고 말이죠.
그러니 죽으면 죽으리라
즉 우리는 맨날 예수님의 세 번 부인하다 마귀에게 잡힐 수밖에 없고
우리는 맨날 뭘해도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힐 수밖에 없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귀가 묻고 따지는 것에 자기도 자신에게 그렇게 묻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아니 왜 죽였어 아니 왜 세 번 부인했어 부인하지 말았어야지
왜 간음했니 이 못난 나여 라고 묻고 따질게 아니라
자학 자살할게 아니라
예수님 이런 못난 저를 용서하실렵니까?
무슨 소리냐 내가 사랑하는 자는 능히 사랑하고도 넉넉히 사랑할 것이다 라는
그 음성을 바라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맞고요
세 번 부인했습니다.
네 인정 합니다.
그런데 그 몇초전의 과거를 왜 예수님 당사자는 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지
자꾸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만 물으시는지?
이것이 보좌가 큰 파도 위에서 큰 파도를 꾸짖으시면서
베드로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주의 오른팔로 건지시는
오른팔의 기능을 자랑하시고자 하심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피 자랑하고 싶어서 벌리시는 주의 오른팔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갑자기 영화 기생수가 생각나네요 오른팔아 일어나라 ~~~
무조건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오른팔 승리를 나타내는 사건만이 발생하는 겁니다.
이것이 큰 파도 위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죽음 위에서 죽음 보다 더 크신 이 다는 겁니다.
그 분이 다른거 일체 안 묻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음성 뿐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것을 지나갔도다 보라 새 것이다고 일방적으로 편파 해석해 버리는 겁니다.
이런 반칙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무엇도
이 예수님의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음성을 막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끊을 자 없습니다.
마귀가 묻고 따지는 막살면 안되는데 왜 막살았냐 라고 묻는 그 물음에
정작 예수님은 그런거 일체 안 물으신다는 것
이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 속에 함께 하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마귀가 이 십자가의 용서인 무조건 이유 없이 불법적으로 편파 용서에
본격적으로 위협을 가하나
그런다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소냐
이미 넉넉히 이겼다는 겁니다.
이 음성 때문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음성 말입니다.
(롬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5, 개역)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개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9, 개역)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개역)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개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2,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개역)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개역)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개역)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개역)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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