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응할 때 까지 착고에 상하고 쇠사슬에 매였도다 (시편 105)

여호와의 팔이 나타날때까지 싫어버린 바 되고 질고를 지는도다

 


(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105: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105:2, 개역)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105:3, 개역)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05:4, 개역)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105:5, 개역)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105:6, 개역)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105:7, 개역)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105:8, 개역) 그는 그 언약 곧 천 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105:9, 개역)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5:10, 개역)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05:11, 개역)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05:12, 개역)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05:13, 개역)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05:14, 개역)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05:15, 개역)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05:16, 개역)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105:20, 개역)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105:21, 개역)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105:22, 개역)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105:23, 개역)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105:24, 개역)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105:25, 개역)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105:26, 개역)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105:27, 개역)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105:28, 개역)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105:29, 개역)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105:30, 개역)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105:3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105:32, 개역)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105:33, 개역)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105:34,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105:35, 개역)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105:36, 개역)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105:37, 개역)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105:38, 개역)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105:39, 개역)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105:40, 개역)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105:41, 개역)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105:42, 개역)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105:43, 개역)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105:44, 개역)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105:45, 개역)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볼 가치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심각하게 볼게 아닙니다.

아무리 타락했다고 난리를 쳐도 말이죠.

아무리 그런 것들이 중심인냥 설쳐대도 지나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중심이였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누구 중심으로 돌아갔습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약속을 담은 그릇들을 봐야 합니다.

곧 이름을 담은 항아리 중심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이스라엘 그릇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곧 시 공간이 아니라

역사 속의 역사인 묵시 계시 약속 언약입니다.

즉 시 공간을 초월하는 묵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묵시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보고 알게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다 말이죠.

 

(105:12, 개역)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05:13, 개역)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인간 속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니 왜요?

예수님 중심이기에 예수님이 바로 나그네 였다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왜 나그네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누히 강조 했습니다.

탕자는 다윗이 아니라고

탕자는 바로 예수님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불가능이요 해석불가이다는 겁니다.

 

그럼 상대적인 맏아들은? 당연히 사울왕이지요.

나중에는 다윗 왕 또한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인 맏아들 이다는 거죠.

 

다윗은 탕자가 아니무이다.

인간 속에서는 탕자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의도적으로 탕자 만들겠다고 하지 말라 말이죠.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 뿐입니다.

인간 속에서는 거지 나사로 없습니다.

 

괜히 따라하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자살합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바리새인일 뿐입니다.

맏아들일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밝혀진 가해자일 뿐이고

예수님만이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성경에서 나오는 나쁜놈을 피하고

좋은 놈을 선택할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박다윗 김솔로몬 최모세 이바울 정사무엘 윤마리아 등등으로 따라하지 마세요.

 

모르고 했다면 상관 없지만

동일시 하고자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누가 이름을 나쁜놈으로 짖겠냐 말이죠.

김가룟유다, 김사울왕, 김발람, 김하만,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짖는 자들도 있죠.

 

정예수, 김예수, 박예수, 최예수,

 

물론 한국에는 드물지만, 유대인에게는 많았습니다.

그 정도로 문자적으로 동일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말이죠.

 

그럼 대놓고 역시나 노골적으로

박마귀. 최마귀. 김마귀, 손사탄, 이사탄, 정사단 라고 짖는 자가 없듯이

 

인간 쪽에서는 어떤 것을 담는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름입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말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떤 분의 이름을 담고자

그 분의 이름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그릇이다는 겁니다.

 

탕자도 거지나사로도 인간 속에는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데

창조자가 자신의 모양대로 만든 의미들이 바로 탕자요 거지나사로입니다.

즉 나그네 이다는 겁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인간 속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란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말이죠.

즉 예수님 밖에 없다 말이죠.

역사 바깥의 인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들을 태어나게 해야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이들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105:20, 개역)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105:21, 개역)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105:22, 개역)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즉 요셉 중심이다는 겁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새이스라엘이 먼저 있었고

구약의 이스라엘이 소급이 되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새이스라엘은 누구로부터 고아 과부 나그네로 취급받습니까?

당연히 이스라엘이지요.

유대인 바리새인으로부터 너 누구 제자니 난 모세제자야 라고 거부시 당하는 겁니다.

변사또가 우리 스승이야 넌 이도령을 스승으로 둔 이도령 제자이지?

우리 하수 잖아 라고 말이죠.

그 정도로 어리석은 겁니다. 외모로 본 거죠. 육으로 본 겁니다.
예수님이 모세 보다 크다 라는 것을 모르기에 역사적으로, 행함으로, 육으로 본 겁니다.

자 이렇게 나그네 춘향이는 변사또로부터 객이 되는 겁니다.

그 간극이 점점점 멀어지는 겁니다.

점점 멀어지나봐 ~~~~~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나그네 취급 받았듯이 말입니다.

 

(105:23, 개역)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오늘 본문에 애굽에서 나그네가 되었다고 합니다.

애굽에 탁란 시켰는데

그 속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애굽에서 나그네가 안되도록 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간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 예수님을 담은 그릇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럼 예수님이라는 나그네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멀쩡하게 있던 애굽 속에 이스라엘을 탁란 시켜서

애굽 속에서 나그네가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럼 누가 주인이다? 애굽
상대적인 나그네의 대립을 보여주는 존재로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바로 이 주인을 겨냥한 십자가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그 주인을 결박시켜서 나그네를 빼내어오는 도둑은 누구다?

 

(105:23, 개역)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105:24, 개역)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105:25, 개역)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105:26, 개역)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105:27, 개역)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이것이 바로 약속이 벌리는 자작극인 약속 전쟁, 십자가 전쟁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얼마전에 한 2주 전에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시다가 이런 질문을 하셨다 말이죠.

요단강을 건넌 후에 이 땅을 다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말이죠.

그런데 왜 모세는 탈락했냐 라고

물론 저번에 말씀 드렸는데 또 물으시니까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산에서 불쑥 나타나서

제발 별세해 주세요 라고 묻고자 탈락한거다 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답변을 반복의 차원이였으니 짧게하고서는

제가 도리어 물었습니다.

아주 아주 충격적인 질문이였다 말이죠.

왜 약속의 땅은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는데 그 실과를 먹게 되고

약속의 땅이 아닌 땅은 심은대로 거두는 땀을 흘려서
그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라고 말이죠
.

그렇게 자극적인 질문을 통해서 제가 묻고 제가 답하고자 한 것이 바로

남의 땅에 들어가서 주인도 아닌데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주인 가나안 민족은 떡 줄 생각 조차도 없는데
요단강 건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 디디자 마자
이 땅 너거꺼다 라고 김칫국 먼저 마시게 하냐 말이죠.

그것은 바로 빼앗는 식으로 여호수아서는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야기 했다 말이죠
.

 

즉 빼앗음 이다는 겁니다.

 

남의 집에 가서 주인에게 이거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 내놔 라고 한다 말이죠.

일방적인 선언이죠

네 맞습니다. 이미 앞에서 봤던 장면이죠.

모세가 애굽왕 바로에게 내 백성 내놔라 했을때에

바로왕이 기가막혀 합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막 주겠니 라고 말이죠.

바로 그렇게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함으로써
약을 바짝 올려서 빼앗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 빼앗음과 오늘 나그네 라는 개념이 참 잘 어울리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나그네가 아닙니다.

인간 속에서는 나그네가 있을 수 없다 말이죠.

인간 이라는 자체에 묶여있는 교집합이기에

인간 아닌 자만이 나그네가 되지

인간이라면 나그네 개념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이하게도 나그네 라는 개념을 여호와로부터 부여 받는다 말이죠.

물론 이스라엘은 나중에 인간이기를 바랬지 나그네이기를 원치 않아서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처음 자리를 차 버린다 말이죠.

스스로 이 [잃어버린 원인] 이라는 자리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이스라엘 자리를 발로 차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닌

고아 가 아닌

과부 가 아닌

떳떳한 인간으로써

인간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오히려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하는 이스라엘로 변해버리지요.

(시 82: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시 82:2, 개역)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시 82:3, 개역)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시 82:4, 개역)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찌니라 하시는도다』

(시 82:5, 개역) 『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시 82:6, 개역)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 82:7, 개역)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시 82:8, 개역)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 9명은 그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동안 외로웠다 말이죠.

문둥병 때문에 끼이고 싶어도 끼일수가 없었다 말이죠.
왕따를 당했으니 이제는 문둥병이 다 나았으니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조직 속의 소속 자격이 생겼으니까 말이죠.
문둥병 탈락 나그네 탈락이 이제는 정상인 그리고 토착인이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

너도 가지 왜?

왜 남아 있니?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주의 영광이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겠냐 말이죠.

바로 여기가 천국인데 말입니다.
당신이 나의 천국인데 어디를 가냐 말이죠.

바로 천국은 인물이다 말이죠.

나의 죄를 씻는 분처럼 또렷한 분이 어디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원래 이스라엘은 나그네 였다 말이죠.

그런데 돌아온 자는 이방인 외에는 없었다 말입니다.

그 나머지 아홉명의 유대인은 이스라엘이 아니였다는 것을

소급해서 거꾸로 보여주는 겁니다.

새이스라엘 이방인 하나가 원래 이스라엘이였고

유대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먼저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었다 말이죠.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말이죠.

마치 약속의 땅을 빼앗는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참 제가 답변한 내용은 이겁니다.

 

어머니 잘 들으세요 충격적일 겁니다.

 

멀쩡하게 걸어가다가

여호수아가 곧 이스라엘이 일부러 꽝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부딧히는 겁니다.

자기가 부딧혀 놓고서 미안합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거꾸로

어 당신 왜 부딧히는 거야 라고 소위 요즘말로 깡패처럼

도로 사과해 라고 한다는 거죠.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집에 가서

이 땅 내놔라 라고 주인이 멀쩡히 있는데

그 주인을 결박해서 새간을 빼앗는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도둑 예수 라고 했잖아요.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바로 그때 이야기 했던 것이 오늘 나온다 말이죠.

 

나그네라면 상대적으로 저쪽의 주인 개념을 의식해서 나온 의미다는 겁니다.

그 주인에게 시비를 걸어서 주인을 결박한 후에

그 집의 새간을 다 빼앗는다는 의미에서

 

나그네 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애굽에 괜히 들어가서 포로로 객으로 잡혀 있다가
때가 되니까 우르르 빠져나오는 식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다는 겁니다.

나그네에 충실하다는 겁니다.

 

그럼 여호와 하나님 곧 예수님은 누구에게 성실하시다?

누구에게 충성하신다?

이 나그네 에게 성실하시다는 겁니다.

이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신 겁니다.

처음사랑 말입니다.

 

?

예수님 자신이 나그네의 기업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저쪽을 의식해서 말이죠. 저쪽 주인에게는 기업이 아니다는 거죠.

결국 무슨 말입니까?

저쪽 주인의 것을 빼앗겠다는 의미에서 기업이다는 겁니다.

 

난 기업이야 재산이야

너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을 장자야 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 라는 겁니다.

 

그래놓고 누구의 것을? 애굽의 것을

그리고 가나안 여부스까지 다 차지하고서 주는 겁니다.

이것이 약속의 땅의 의미이다는 거죠.

천국은 침노 당하나니 천국을 빼앗는 자의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 아버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떠도는 나그네였다는 겁니다.

 

(105: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105:2, 개역)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105:3, 개역)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05:4, 개역)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105:5, 개역)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이 분 때문에 나그네 였다는 겁니다.

나그네가 된 겁니다.

난 나그네 아닌데 어쩌지? 걱정 마세요 우리 시선의 나그네가 아니라

주님이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해석해 버린 나그네 이다는 겁니다.

 

이 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든 나그네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그네 외에는 감사를 못한다는 말이 되고

나그네 외에는 찬양을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기쁜소식을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겁니다.

자기들 교리와는 완전 정반대이니까 말이죠.

이단시 할 수 밖에 없죠.

이제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다.

자꾸 죄인 죄인

죄 죄 죄 그만 카라 라고 짜증을 낸다 말이죠.

 

이 분의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하시고자 나그네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신약으로 치면 죄인 중의 괴수 만들었다 말이죠.

2절 그를 노래하며 그를 노래하며 그의 기사를 말하기 위해 나그네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성화론자들은 반대하지요 극구 거부합니다.

그들은 나그네가 되면 안된다고 라고 하는 거죠.

바리새인과 다를바 없는 사고방식인 겁니다.

3절 그 성호를 자랑하라 성호 곧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찾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곧 구원전쟁인 출애굽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나그네 만이 부르는 이름인 거룩한 이름이다 말이죠.

이것이 신약에서는 유대인들이 절대로 자랑할 수 없는 이름이

이방인 우리에게서는 자랑이 되는 이름이 되었다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오히려 거리끼는 이름이였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이름이였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구원의 이름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이스라엘의 의미는 이렇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기업을 무를 자를 통해서 기업을 받는 겁니다.

그 유업을 얻은 겁니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는데

약속의 땅 기업을 얻었다 말이죠.

그것도 빼앗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두번도 아니고

과연 이스라엘이 원할까요?

혼자 똘아이처럼 인간들과 썩이지 않고 외계인처럼

이런 천박하게 싸움박질만 해서 노략한 그 전리품을 과연 원할까요? 깡패도 아니고 말이죠.

 

과연 이 나그네 됨을 원하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진짜 아비 없는 자식들 같다 말이죠.

분명 임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의 지시를 받은 것 같이

떼를 지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니 말입니다.

(분명 나그네라 함은 단절된 의미입니다. 그러나 정작 나그네로써

단절된 자로써

오히려 상호연결된 자를 외치도록 되어있는 관계개념이다는 거죠.

그럼 나그네는 누구를 보여줘야 합니까?

자신의 임금인 고엘 곧 기업 무를 자입니다.

나그네인데 빈털털인데 다들 비웃을 수밖에 없지요.

물론 이스라엘은 이 나그네 라는 잃어버린 대의에 실패합니다.

아니 실패 해야만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나그네 개념은 누구로 인해 완성되는고 하니

예수님입니다. 즉 나그네는 예수님 밖에 없다 라는 거죠,

고아 과부 나그네는 오히려 신약에서 처음자리를 버린 이스라엘로부터 거부시 당하는 존재가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임이 누가복음을 통해서 밝혀지는 겁니다
.


그러니 새이스라엘은 이방인이지 나그네였고

정작 유대인 이스라엘은 그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하는 자들이였던 겁니다.
졸지에 애굽의 역할을 했던 겁니다.

결국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이 단절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거부하는 식으로써

자신들은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한 셈이고

거기에 대한 확대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신 버림받는 단절인줄도 모르고

더더욱 단절 시키고자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실행시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단절은커녕 더더욱 연결 시켜주는 관계성을 보여주는

원인 없는 결과가 되고 만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아무 연고 없는 나그네를 도리어 더더욱 십자가의 사랑으로 끈끈하게 역어주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 그것도 넉넉하게 말이죠.

그러니 나그네 보다 더더욱 관계개념을 보여주는 의미는 없다 말이죠.

버림 받음 보다 더더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의미는 없다 라는 겁니다.)

 

(30:24, 개역)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30:25, 개역)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30:26, 개역)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30:27, 개역)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30:28, 개역)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30:27, 새번역) 임금은 없으나 떼를 지어 함께 나아가는 메뚜기와,


다른 나라들처럼 왕제도를 비롯해서

고급스러운 법과 문화 그리고

싸움도 없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사는 저 타국가를 부러워 할까요?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맨날 전쟁하고 맨날 죽이고

맨날 남의것 빼앗아서 기업을 물려 준다면

이런 전쟁의 신 여호와가 좋을까요?

 

다른 나라의 신, 평화의 신을 좋아할까요?

이미 강대국은 빼앗을 필요가 없이 저절로 바치더라 말이죠.

강도도 대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강도국가로써의 대강국이다 말이죠.

 

조그마한 도적떼거리가 아니라 말이죠.

떠돌이 신이 아니라 고착화 된 농경의 신을 더 선호하고 선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다윗 조차도 천막으로 맨날 접었다 폈다 라는 그런 하나님의 집이 싫고

자기 몸이 살고 있는 대궁궐집처럼

불편한 마음이 없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처럼

궁궐같은 벽돌 집에 하나님의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말이죠.

 

자기는 고급침대에서 살고

하나님은 텐트에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냐 말이죠.

몸 중심이니 말입니다.

 

저쪽 이방나라의 몸 중심이 훨씬 고급져 보이더라 말이죠.

 

아무리 성전을 짖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려도

기여이 짖고 말죠.

자기 손으로 못 지으면

자손들을 통해서라도 기여이 말입니다.

모든 재료들을 다 준비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

이 황금성전을 중심으로 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는 겁니다.

결국 살육이 벌어진다고 말려도

결국은 짖는다 말이죠.

성전을 말입니다.

 

그럼 주님은 당연히 그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두다 바로 인간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해서 나온 발상이다는 겁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것을 보고 따라한 것도 있듯이

결국 인간의 몸입니다.

 

그것을 끌여들여서 그 인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은

다른 몸이 있다는 겁니다.

딴 몸이 있기 때문에 허물어 져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나그네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싫어한다 말이죠.

지금 시리아 난민을 그 어떤 국가도 원치 않는다 말이죠.

그런데 너희가 처음에 바로 이런 난민이였다 말이죠.

시리아 난민들은 그럼 난민을 원할까요?

그들 또한 난민을 원치 않습니다.

몸 자체가 고착화된

그래서 그 몸에서 나온 신이 모든 신은 곧 인간의 몸에서 나온 농경신이다는 겁니다.

 

그럼 딴 몸에서 즉 나그네 몸에서 나온 신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그네는 예수님 뿐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당첨이 되어서

이 나그네가 되어서 그 나그네를 통해서만 활약하시는 구원의 여호와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부러 이 여호와를 말하기 위해서 찬양하기 위해서

나그네로써 애굽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은

악마가 벌려서 구출하는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마귀에게 시비를 걸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는 거죠.

 

그러니 말도 안되게 나그네 라는 가장 밑바닥으로 들어가서

역시나 말도 안되게 애굽의 아비가 되고 주관자가 되는 겁니다.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105:20, 개역)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105:21, 개역)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105:22, 개역)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105:23, 개역)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주관자가 되면 더더욱 자유롭게 되는게 아니라

더더욱 객이 된다 말이죠.

소동을 누구 쪽에서 일으키느냐 말이죠.

항상 예수님 쪽 아닙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소동을 일으키면 항상 인간의 몸은

즉 고착화된 인간의 몸은 싫어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결국 의도적으로 강퍅케 만들어서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105:25, 개역)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이것이 구원사건이다 말이죠. 십자가 사건

그러니 유대인에게서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일수 밖에요

졸지에 본인들이 출애굽한 민족이라고 우겨놓고

본인들이 졸지에 애굽처럼 행동해서 예수님을 죽인 셈이니까 말이죠.

결국 유대인들은 애굽인들처럼 이유 없이 무조건 예수님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유 없이 무조건 싫어하는 이유인 겁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목사에만 뿅 가는 겁니다.

뭐 눈에 보여야 좋아할 것 아니냐 말이죠.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겠다(고착화 된 몸)

최면을 걸어주면서 사람들을 좋게하는 입에 침발린 소리만 하는 목사가 있겠다.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부릅니까?

 

나그네가 아닌데

나그네가 될 수가 없는데

 

그러니 시편 105편에서 출애굽 사건이 다루어 지는 이유는

 

그래서 나그네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해체 시키는 겁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해서든 회복시켜 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거죠.

그 회복의 방해꾼이 글쎄 예수님이다 말이죠.

사마리아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친구로써 막사는

술꾼에 먹보에 죄인의 친구인 예수가 말이죠.

 

그 운동은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

이 운동의 방해꾼이 십자가 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정작 시편 105편도

그렇게 자꾸 출애굽을 반복하는 이유도

결국 시편에서 즉 다윗 당시에

출애굽 사건을 요청하는 겁니다.

그럼 애굽이 누구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이다는 거죠.

 

이것을 다시 요즘 식으로 말해볼까요?

뭐 어차피 제가 이단이니까 이단으로 밖에 볼 수밖에 없겠죠.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는 사건을 요청하는 겁니다.

결국 나그네다는 거죠.

그럼 애굽은 누굽니까?

오늘날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럼 모든 교회는 다 애굽이냐?

네 애굽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진짜 교회는 매일 매일 교회로부터 탈출하는 교회이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매일 매일 출교 당하는 교회

 

한 쪽은 고착화 된 것을 자랑하는 교회이고

처음자리인 나그네 됨 곧 관계성을 거부하는 교회이고

 

다른 한 쪽은 그런 고착화 된 교회로부터 나그네 취급받는 교회

 

이것이 성경에 그대로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한다 말이죠.

한 사람은 바리새인 인데 고착화 된 겁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 매국노 친일파인데 이상하게 진짜 나그네 다운 발언만 합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러니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이

출애굽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시편에서 다시 요청이 되고

 

십자가 사건이 복음서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바울서신 그 외의 신약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끊임없이 교회 내부에서 빠져나오는 사건으로써 발생하는 이유는

 

오로지 나그네와, 이 단절된 자를 충성하신

예수님 자신의 피 영광을 자랑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그네 된 다윗이

이스라엘 속에서 객이 된 다윗이

목숨 걸고 출애굽 사건을 요청하는 것은

 

이스라엘 속에서 나그네인 참이스라엘을 빼내시는 겁니다.

애굽에서 요셉이 착고에 차이고 쇠사슬에 몸이 매였다면

 

똑같이 다윗은 이스라엘(사울 패거리)에서 착고에 차이고 쇠사슬에 몸이 매인것이고

또 똑같이 예수님은 유대인(하나님의 백성이라는)에게서 착고에 차이고 쇠사슬에 몸이 매이는데

 

바로 그 분이 최종 승리자이다는 겁니다.

 

아니 착고에 차였는데

쇠사슬에 매였는데

오히려 가장 실패자인데

어떻게 최종적인 승리자이냐 말이죠.

 

소위 믿는자 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못 믿는 판국에

이 믿음의 문제를 오늘날 교회에게 억지로 믿도록 강요한다고 해서 믿겠냐 말이죠.

믿는척 하는 행함으로 때우면 그만들인게 인간들인데

 

나그네가 어떻게 주관자가 되느냐 말이죠.

그 갭이 너무 너무 큰데

그래서 다들 단절된 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자

그래서 마땅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예수를 싫어버린바 된 자로 취급했다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말이죠.

 

아무리 구원의 역사인 출애굽사건을 반복해도

십자가 사건을 반복해도

실제적으로 내 몸인 육체와 그리스도의 몸과 부딧히지 않는 이상

그 갭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는 겁니다.

 

다윗도 지도 몰랐겠징

자기 육체가 착고에 차이고 쇠사슬에 매여 보니

다른 몸을 비로소 인식했듯이

출애굽 사건

십자가 사건은

결국 몸과의 충돌인 겁니다.

 

왜 사도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겁니까?

기여이 육체에 사단의 가시를 박아 넣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자고치 못하게?

겸손하게 만들고자?

교만할까봐?

뭐가 그리 못 미더워서 그렇게 까지 하시느냐 하면

오히려 주님이 더 믿음 없어 보이지 않나요?

그게 아니라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정도로 애끼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을 또 오해하지 말고

누구 보란 듯이?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결국 나그네 라는 관계성은

상대적인 누가 보충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겁니까?

마귀 죠.

 

결국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것이지

우리 구원하고자 하시는 활동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질투요 죽음 보다 강하기에

마귀를 끌어들이는 이유인 겁니다.

 

그렇다면 나그네로써 여호와를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사를 만민에게 외치며

그를 노래하고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며 그의 이름으로 즐거워 하며

그의 능력을 구하며 그의 얼굴을 항상 뵈오기를 구하는 이유는

 

(105: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105:2, 개역)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105:3, 개역)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105:4, 개역)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누가 앞에서?

나그네가 아니다는 악한 마귀 세계에서 외치는 겁니다.

그야말로 한마디로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는 거죠.

 

난 못하는데? 어쩌죠?

못하든 하든 상관없이 이미 애굽에서 객이 되게 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에서 객이 되게 하시고

오늘날 주의 자녀를 교회에서 객이 되게 하신다 말이죠.

 

나의 행함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믿음 여부와 상관 없이

예수님의 믿음이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라는 것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써

더더욱 주의 이름을 찬양케 만드시는 겁니다.

 

이것이 나그네가 된 축복된 찬양자의 삶인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인

나그네를 자유케 하신 예수님이 말씀을 응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나그네(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신 겁니다.

그것을 시편 105편의 찬양자는 노래하는 겁니다.

 

(4:14,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4:15, 개역)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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