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죽어 주시옵소서 (건져주세요) (시편 90편)

 

주여! 제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9:31, 새번역)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세상에서 떠나가심' '죽으심'



(눅 9:20,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눅 9:21, 개역)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눅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9:23,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4,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5,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 9:26, 개역)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7,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 9:28,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개역)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개역)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개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개역)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개역)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4, 개역)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주세요 와 죽 주세요 가 다릅니다.

 

여 와 어 의 차이가 극과 극이지요.

주여! 제발 죽여주옵소서 가 아닙니다.

주여! 제발 죽어 주옵소서 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주여 제발 죽어 주옵소서 라고 외치는 자 없습니다.
이렇게 건방지게 기도하는 자는 없다 말이죠.
(물론 성경에만 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이 예수님을 미리 장사 치르지만
제자들은 돈 아깝다고 갑자기 가난한자 타령을 합니다.)

오히려 주여 제발 죽여 주옵소서 라고 외치는 자는 수두룩 할 뿐입니다.

 

그런데 잘못 봤나? 잘못 들었나 할 정도로
미세한 초미세의 차이로 밖에 안 보입니다만


정작 [여] 와 [어] 의 차이가

이 점 하나의 차이가

남과 님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는 ㅋㅋㅋㅋ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남이 되는 장난같은 인생사 ~~~~

 

천국과 지옥의 차이 이다는 거죠.

너무 오바 한다구요?

제가 오바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오늘 시편 90편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

 

여 와 어 가 마치 쌍둥이처럼 보입니다.

눈이 나쁘면 더더욱 구별이 안됩니다.

이 초미시적 차이를 인간이 무슨 수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인생은 가치 없다 말이죠.

그래서 모세는 오늘 시편 90편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풀과 같은 헛된 인생 속에서 어떻게 알아보겠느냐 라는 겁니다.
불가능 속의 불가능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의 생은 허무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

인생은 수 에 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비록 무가치한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는 인생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짧디 짧은 인생에서 유일한 가치를 발견할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몰고온 바로 주님의 은혜 곧 긍휼 불쌍히 여기심 이다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찾아내심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비록 그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을 지라도

주여! 저 개 맞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그 콩꼬물을 먹지 않습니까 라고

이 잃어버린 긍휼을 바라고 있고

이 아무것도 아닌 부스러기를 원하는

제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뭘해도 죄 밖에 안되기에

하나님의 진노 밖에 안되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모세가 BC 1500-1300년대 출생인데 학자들 마다 다 틀려서 정확히 모른다는 거죠.

다윗은 BC 1040년 쯤

 

즉 년도가 중요한게 아니라 제 말은 간극이 한 500년 쯤 된다는 거죠.

500년 만에 불쑥 나타나 다윗의 귀에 대 놓고

다윗아 다윗 너는 다윗의 자손이 대신 죽어야만 해

다윗 너 대신 죽으시는 다윗의 자손이 너를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건지시는 유일한 분이야 라고 말이죠.

 

이것이 다시 천년의 간극이 벌어져서

변화산에서 불쑥 나타나서

모세가 베드로의 귀에 대고

베드로야 예수님이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해

이것이 너를 사랑하는 증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모션을 취해서 어머니 귀에 대고 똑같이 해 봤다 말이죠.

 

이 허무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어제 댓글로 단 글처럼

 

가시떨기 나무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실하게 불 붙어서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진노를 외치는 것이 바로 모세였듯이

 

이 모세때의 사건 구원사건 긍휼의 사건 십자가 사건인 출애굽사건을 재현하는 겁니다.

 

정작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타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긍휼로써만

이 못난이 중에 못난이를 온유하심으로 살려주시고

 

정작 저 애굽 곧 원수들은

여호와의 불 근처에도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타죽어 버릴정도로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게 퍼부엇다 말이죠.

 

정작 나무에 불 붙은 가시나무는 타지도 않는데

불 근처에 오지도 않았고 불붙지도 않은 저들 원수

곧 하나님의 원수는 다 타버린

이 출애굽 사건
애굽의 10가지 재앙 사건

구원사건

하나님의 원수 심판 사건

그 속에서 건지시는 사건

유월절 어린양

난지 팔일만에 태어난 그 흠없는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양 고기를 급히 먹음으로써

 

주의 진노가 넘어간

패스 오브 데이

유월절

넘어간 날

여호와의 진노가 패쓰 넘어간 날

이것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는 겁니다.

마치 다니엘 세친구가 불 속에서 예수님과 춤 추듯이 말이죠.
불 바깥은 막 죽어 나가고, 불 속은 춤추고 ㅋㅋㅋ

 

그럼 모세는 죽은지 500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다윗의 귀에 이 말만 하고 사라지는 겁니다.

다윗아 다윗 너의 죄악을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시는 분은

다윗의 자손이 대신 죽는 것 뿐이야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을 대신해서 죽어주옵소서

제발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로써 하는 말은 이 말 밖에 없다 말이죠.

 

또 느닷없이 1000년 만에 나타나

합쳐서 1500년 만에 나타나

베드로 귀에 대고

베드로는 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

그러나 예수님은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베드로 너의 죄값을 대신 치르셔서

예수님 예수님 베드로를 대신해서 제발 죽어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주옵소서

그리고 제발 긍휼로써 건져주옵소서 라고

그 말만 하고 변화산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참 주님께서 죽은 모세까지 동원시켜시면서 까지

참 야무지게 십자가를 밝히 증거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에 몰입하시는 이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저주인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는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죄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도 안됩니다.

베드로도 안됩니다.

다윗도 안 됩니다.

 

오죽 다윗이 안되기 때문에

모세가 500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다윗 귓구멍에 대 놓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다윗의 귓 구멍에다가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해서 죽어 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모세 지도 백성의 원망을 들었지요

하나님은 다 죽여라고 하지요

중간에 낑겨서

하나님!! 주께서 저들을 다 죽이시면

동네 소문 참 잘 날겁니다.

이 백성이 제 백성입니까?

주님의 백성입니까?

그렇게 중간에서 주님의 긍휼을 양쪽으로 외치다가

본인 또한 하도 하도 많이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보니

그만 반석을 두 번 치다 보니 탈락 한 겁니다.

 

어머니께서 왜 탈락 시켰을까 참 이해가 안된다고 하시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하라 라는 뜻이다 말이죠.

모세도 탈락 시킬 정도로 하나님이 진노는 변함없다 말이죠.

그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

그 모세도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탈락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주의 긍휼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모세 본인도 그 진노 속에서 구원 받았듯이

다윗 귓구멍에

베드로 귀구멍에

우리들 귓구멍에 대고 외치는 겁니다.

 

불뱀에 물려 죽게된 나와 너희들아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바라 보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놓여 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라고

외치는 선지자 모세의 외침을 들으라고

모세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모세는 죽었습니까? 다시 살아난 겁니까?

예수 안에서 산 자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 라는 한 개인의 존재를 볼게 아니라

누구 와의 관계를 보자 말이죠.

그러면 죽었다 살았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모세가 가리키는 그 인물과의 관계를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오로지 십자가 곧 하나님의 진노로써 맺어진 관계인지

그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의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

주의 긍휼을 바라는 십자가만을 쳐다보는 관계인지

 

아니면 번제와 제사로만 맺을려고 하는 관계인지를 보자 라는 겁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다윗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조리 번제와 제사로 맺을려다가 모조리 실패한 자들이였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용서함을 받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이 십자가의 용서

곧 하나님의 진노에 충실했던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였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주여

저 모세도 개 맞습니다.

그러나 이 개 같은 모세도

탈락한 모세도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비로소 이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보고 이것을 기쁘게 증거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주여 저 예수님을 세 번 배신때린 베드로 맞습니다.

그러나 그 개같은 베드로도 주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심으로

마귀에게 잡혀도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주님이 물어주셔서 이렇게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 라는 아무것도 아닌 그 빈공터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무능한 빈공터에 충실하심으로 인한

십자가 사랑의 승리이다는 겁니다.

 

모세는 참으로 뻔뻔스럽게 등장합니다.

탈락한 주제에

뭐 잘했다고 외칠까요?

 

맞다 나 모세 탈락한 것 맞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하나님의 진노로 하나님의 저주로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에게도

주님의 긍휼은 부스러기처럼 이 개같은 자도 살려주셨다

 

자 이렇게 모세는 죽을수가 없는 겁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죽고 싶어도 죽을수가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신 그 사랑을 외쳐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이 십자가의 피 용서에 동원이 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허무한 풀 같은 인생 일지라도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용서 곧 다윗언약의 인애와 자비이고

비록 죽어 흙으로 돌아 갔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피 용서를 외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불쑥 나타나야만 하는 겁니다.

존재가 중요해서가 아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치기 위해서

십자가가 부르는 이상 우리를 일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죽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위해 그때 그때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입니까?

 

슬픔 속에서 희락을 외쳐야 하고

재 대신 화관을 씌운 주님의 긍휼을 노래해야 하고

근심 대신 찬양의 옷을 입혀 주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십자가가 배치시킨 그 사건에 놓여져서

주의 긍휼을 외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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