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심판) 속에서의 구원 (후패 속에서의 날로 새로움) (시편 102)

 

천사보다 더 못하지만 천사도 부러워하는 더 나은 ~~~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61:3, 새번역)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1:4, 개역)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2:6, 개역)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2:7, 개역)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2:8, 개역)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2:9, 개역)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2:1, 개역)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102:2, 개역)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02:3, 개역) 대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102:4, 개역)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

(102:5, 개역)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102:6, 개역)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102:7, 개역)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102:8, 개역)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102:9, 개역)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102:10, 개역)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102:11, 개역)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102:12, 개역)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02:13, 개역)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102:14, 개역)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102:15, 개역)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02:16, 개역)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02:17, 개역)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102:18, 개역)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102:19, 개역)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102:20, 개역)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102:21, 개역)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102:22, 개역)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102:23, 개역)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102:24, 개역)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102:25, 개역)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룰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102:26, 개역)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02:27, 개역)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102:28, 개역)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1:10, 새번역)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 102:25-27(칠십인역)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1, 개역)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2, 개역)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3,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4, 개역)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1:5, 개역)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1:6, 개역)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1:7, 개역)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1:8, 개역)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1:9, 개역)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1:10, 개역)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1, 개역)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12, 개역)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13, 개역)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14, 개역)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2:1, 개역)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2:2, 개역)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2:3, 개역)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2:4, 개역)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2:5, 개역)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2:6, 개역)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2:7, 개역)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2:8, 개역)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2:9, 개역)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2:10, 개역)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2:11, 개역)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2:12, 개역)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2:13, 개역)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2:14, 개역)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2:15, 개역)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2:16, 개역)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2:17, 개역)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2:18, 개역)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2:6, 새번역) 어떤 이가 성경 어딘가에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여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 8:4-6(칠십인역), '사람''사람의 아들'은 인류를 일컫는 것임

 

(8:4, 개역)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8:5, 개역)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8:6, 개역)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성경 구절을 이빠이 올려놨는데

자 이렇게 되면 짜증내는 사람들이 꼭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ㅋㅋㅋㅋ

 

천사와 고난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서 올려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마귀 또한 포함해서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마귀이니까 말이죠.

 

미리 결과를 이야기 하자면 천사 또는 마귀는 일단 고난이라는 의미를 모릅니다.

고난 이 될려면 천사 보다 못한 즉 영적인 존재 보다 못한 존재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고난이 성립이 됩니다.

 

참 억울하죠 천사라는 영적인 존재는 고통을 모르는데

영적인 존재가 아닌 존재는 고통을 아니까 말이죠.

인간 땜에 모든 피조물이 이 고통에 울부짖는다 말이죠.

 

아무튼 고난을 모르는 천사 보다 못하게 했다 라는 것은

고통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허무한 그 고통 속에 놓여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반전이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이

이 고난 속에 뛰어들어서

잠시 천사 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이 아름다운 이름의 기업을

천사들은 정작 못 누리는 반면에

고통을 알게 된 인간은 예수님 덕분에 이 기업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천사 보다 못한게 아니라 천사 보다 더 나은 입장이다는 겁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듯이

우리 성도는 오히려 이 고난이 기쁨이 되는 겁니다.

 

고난 속에서 희락을 누리고

잿더미 속에서 꽃반지를 끼는 탕자의 기쁨

근심 속에서 찬송을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버림 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하는 겁니다.

 

이 결과 곧 원인 없는 결과 때문에

이 잃어버린 원인 이라는 결과 때문에

찬양자는 고난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이 시편 102편은 참으로 희한합니다.

분명 슬픔과 고난 속에서의 처참함을 외치다가

갑자기 기쁨의 영원한 주의 일하심을 노래합니다.

즉 고난이 해소되거나 슬픔이 제거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배가 되는 겁니다.

 

즉 로마서 78장의 구조가 또 반복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노라 라고

 

그 어떤 연결점이 하나 없이 단절된 그 상태 그 대로인데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버려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리)이 못땐 점이 뭔고 하니

그 어떤 연결 점이 없는 것을 자꾸 연결시킬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 노력이 심히 크고도 크다 보니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 연결이 그만 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행함도 이제는 말빨이 먹혀 들지 않다 보니

그 연결점을 돈으로 이야기 해야 사람들에게 먹혀들게 되었다 말이죠.

 

진작좀 그 카지

괜히 행함을 이야기 하니까 이 시대에 먹혀드냐 말이죠.

처음부터 주인을 이야기 해야지 똘마니를 이야기 하면 되겠냐 말이죠.

 

어디까지나 보호자 싸움이니 말이죠.

 

우리 또한 우리의 주인을 지금 시편 102편 찬양자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시편 102편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점점점 자신의 주인을 이야기 하도록 놓여진 존재들이다는 겁니다.

거기에 상대적인 우리는 예수님을 이야기 하기 위해 놓여진 존재들이다는 거죠.

 

그 이유로 우리는 고난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고난을 참으면 구원시켜 줄게 라는 조건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미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구원이 넉넉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난 속에 집어 넣는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라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보면 시편 102편의 찬양자가 바로 그런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주의 이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일이다는 겁니다.

 

자 그러고보니 앞의 글에서

죽은 자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영광받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살았다고 우기니가 죽은자요

주여 저 죽은자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하는 자에게

주님은 산자의 하나님으로써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곧 부활이요 라는 의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살았다고 해본들 소용없습니다.

죽여놓고 시작하십니다.

저는 절대로 예수님 세 번 부인 안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습니다 라고

아무리 손에 장 지져도 소용없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만들어 놓고

주님 쪽에서 7천명 산자를 통해서 산자의 하나님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 말이죠.

죽는데 어떻게 산자의 산자는커녕 산자의 하나님 본인이 살아있게냐 말이죠.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에서는

육이 단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육에서는 믿음을 연결 시킬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이어지지 행함이나 육에서 이어질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탄생 곧 생명의 창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임신의 가능성에서 시작하지 않고

불임에서

죽은 태에서

시작하시는 겁니다.

죽은 태인데 어떻게 생명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냐 말이죠.

십자가 라는 죽은태에서 우리가 그 속의 아기로써 태어나냐 말이죠.

우리 또한 죽어야 함으로써 어떻게 태어나냐 말이죠.

어머니 뱃속에 어떻게 들어갔다 다시 나오냐 말이죠.

중생 곧 거듭남이란 이미 불가능을 말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니고데모에게는 불가능으로 단절로만 이야기 하던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는 그냥 아주 쉽게 이 불가능이 그냥 믿어지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내가 그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다 라고 말이죠.

 

유대인 곧 니고데모의 시선에서의 사마리아 여인은 죽은자입니다.

그 죽은 자가

예수님이라는 십자가 곧 죽은태에서 죽은자가 태어납니다.

 

불가능에서 불가능이 태어납니다.

 

정작 유대인 가능성인 니고데모에게서는 무슨 수로 거듭나는 중생

곧 어머니 뱃속에서 어떻게 들어갔다 나오지? 가 단절된채로 해결 될수 없는데

 

죽은자인 사마리아 여인에게서는 졸지에 과부의 새남편이

새로움 곧 날마다 새로움이 원인 없이 생겨버린 겁니다.

 

후패한 자에게 말이죠.

 

그러나 후패하지 않았다고 한 자에게는 날마다 새로움이 없는채

기존의 것으로 조물딱 조물딱 만지작 거리면서 구원을 탐하고 있더라 말이죠.

 

이것은 곧 주의 이름이 우주적으로 천사의 세계에 까지 확대시키는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왜 천사 보다 조금 못하게 지었냐 말이죠.

천사의 세계에 까지 심판 하시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결국 메이저 리그 게임판은 천사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마이너 리그에서 결판 지은 결과를 천사의 세계에 확대시킨 겁니다.

 

? 마이너 리그일까요?

천사는 고난을 알수 없거든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시고자

천사 보다 못한 존재로 그것도 인간 보다 더 못한

죄인의 존재로 오셨는지

천사의 세계 곧 마귀는 알길이 없다는 겁니다.

 

왜 고난을 받으시러 왔는지 알수 없다 말이죠.

 

바로 십자가의 승리

십자가 고난의 승리 때문에

우리는 이 마이너 리그의 게임판에서 결정된 승리가

메이저 리그로까지 원인 없는 결과로써 확대되는 것을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은 날로 날로 후패하지만 영은 날로 날로 새롭다 말이죠.

 

마귀의 세계는 날로 날로 후패하지만 예수님의 세계는 날로 날로 새롭다는 겁니다.

 

정작 마이너 리그에서는 예수님의 육체가 후패했고 마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말이죠.

이것이 메이저 리그인 우주에서 영의 세계에서는 거꾸로 뒤짚어진 결과로써 덮쳐진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고난 속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수가 없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예배때 본문을 읽다가 한 장 넘겼을 때

 

(88:5, 개역)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88:6, 개역)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

(88:7, 개역)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이 부분이 확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글에서는 반복이 된다 싶어서 넣지 않았는데

 

이 부분이 꼭 요나의 표적 사건과 똑같더라 말이죠.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지요.

 

주께서 나를 바다 깊은데 던지셨으며

큰 파도 물결 나를 둘러싸 난 살수 없었네

 

라는

 

요나의 기도 라는 가스펠이 떠오르더라 말이죠.

주구장창 부르다 보니 베여서 그런데 (주야장천이 바른말이다고 하네요)

 

주께서 나를 바다 깊은데 던지셨으며

큰 파도 물결 나를 둘러싸 난 살 수 없었네

 

나의 하나님 이 불쌍한 죄인 용서하소서

세상일로 불순종한 이 영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날 건지셨네

내 영혼이 주께 닿아 큰 구원의 은혜받았네

 

구원은 여호와께로 구원은 여호와께로

구원은 여호와께로 구원은 여호와께로

 

배드로를 일부러 물에 빠드려 죽게 만들어 놓고서는

죽여 놓고 다시 살리니까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지? 얼마나 낯설고 내가 알아냈던 예수가 다 소용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베드로의 세계 곧 육의 세계에 예수님을 끌어들이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세계에 베드로가 죽어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거죠.

 

그런데 유대인은 이 잃어버린 대의를 무시한 겁니다.

처음사랑 말이죠.

 

그러니 마귀의 세계는 이것을 알아도 결국 모르는 셈입니다.

고난 속에 들어갈수가 없으니 말이죠.

내가 영적인 존재인데 감히 어딜 저 미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에 왜 들어가

저주 받은 놈들이나 가는 곳에 왜 들어가야 하냐 말이야

참아서 들어가본들 발도 못 디디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참아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울어도 못하네

 

믿음이 아니면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니면

못 들어간다 말이죠.

이것이 천사의 세계 보다 더 나은

주의 아름다운 이름의 기업의 세계인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곧 제 3자의 개입입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가 개입해야 한다는 거죠.

그 분이 왜 천사 보다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왜 천사 보다 잠간 못하게 나타나셨냐 말이죠.

마귀는 절대 이해 못합니다. ? 이해할려고만 하니까

이해 안되는 믿음이 왜 개입하는지 모르는 이유인 겁니다.

믿음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말려들 수 밖에요

영이 말려듬으로 인해서

(육이야 뭐 마땅히 아비가 말려드니 자식도 말려들어야지요.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니까

함과 그의 자식 가나안은 결국 마귀의 영역으로 정복당해야 하는 전쟁대상이 되니까)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가 옳았구나

인간의 가장 높은 지혜보다 옳았구나를 확정 처음부터 확정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 인간의 지혜는 마귀로부터 부여받았으니까 당연히 지도록 되어 있는 보충물이니 말이죠.

 

자 이렇게 예수님은 메이저 리그까지 십자가의 승리를 확대시키는 겁니다.

우주까지

영의 세계에 까지

 

그러니 천사까지도 부리는 겁니다.

고난을 모르는 월등한 천사를

고난을 당하는 주제에 천사를 부려먹는다 말이죠.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믿음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말이죠.

 

그러니 찬양자는 고난 속에서 그 어떤 희망도 말할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앞뒤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무조건 여호와의 능하신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조건에 맞아서 찬양하는 인간의 얄퍅한 트릭이 아니라

이유 없이 그 어떤 조건이 맞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말이죠.

찬양이란 조건이 맞아야 부를수 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벙어리가 오히려 찬양한다는 것은

입이 있는 자의 노래를 거부하신다는 거죠.

 

즉 시온을 곧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미 벌써 새로운 시온 새로운 예루살렘을 다 넉넉히 이루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이 시편 102편을 노래하는 겁니다.

 

먼저 찬양을 부르고

먼저 승리를 외치고

전쟁에 들어가듯이

시편 102편을 부르고

십자가의 승리를 부르고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알고보니 예루살렘(시온)을 회복해 달라고 해던 그 시온은 마땅히 후패했었어야만 했고

시온 속에 시온

예루살렘 속에 예루살렘

교회 속에 교회가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곧 새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던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다는 거죠.

그래서 그 결과로 사건(증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미 감기가 장악했기에 감기는 눈에 안보이니까

장작한 그 결과로 증상이 콧물이라는 증상

머리 아프고 열나고 기쁨나고 가래 코막힘

감기의 증상이 나타나는 거다 말이죠.

 

그 증상으로

결과의 증상으로 시편 102편을 안 부르고 못배기는 겁니다.

 

고난이 와서 이 노래를 부를 조건이 되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미래완료가 와서

그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져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편 102편은 누가 완성하도록 되어 있습니까?

어디서?

시온에서 가 아닌

시온 속의 시온인

시온 속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료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시온이라는 껍데기는 후패하고

시온에서 벌어진 십자가의 사건은 날로 날로 새롭게 번져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확대 재생산 재영토가 되니까

시온이라는 특정공간이

십자가의 죽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이 시온이 된다 말이죠.

 

유대인의 제한된 시선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시선에서 보니

모든 곳이 주의 발등상이고

모든 장소가 십자가의 사건이 벌어지는 마당터가 되며

모든 곳이 십자가의 피가 흥건히 넘치는 곳이다는 겁니다.

 

마귀는 설자리가 없다 말이죠.

 

모든 곳이 주의 목전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숨을 곳이 어디있냐 말이죠

 

(1:8, 개역)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1:9, 개역)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1:10, 개역)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1, 개역)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12, 개역)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13, 개역)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14, 개역)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2:1, 개역)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심판 속에 놓여졌다면 마땅히 심판 받아라 말이죠.

어차피 옷은 낡아서 헤어지면 변한다 말이죠.

주께서 지은 모든 것이 그렇다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냐 말이죠.

이 긍휼 때문에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시온에서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그 십자가의 죽음에서 날로 날로 새로운 것을 보자 말이죠.

어차피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지만

심판 받아 마땅하고

육은 후패해야지만

그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노래하는 날로 날로 새로운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것은 천사들도 때려죽어도 못한다 말이죠.

 

육이 아니니까

후패 하지 않으니까

 

후패하면서까지 날로 날로 새로운 십자가의 사랑을 노래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들어와서 노래한다는 겁니다.

 

그 증상으로 오늘 시편 102편의 찬양자는

주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경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고난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주의 아름다운 이름을 노래할수 있는 찬양의 영광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자기의 아내만이 신부만이 남편을 찬양한다 말이죠.

? 이유 없어요

바로 이유 없는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용서 때문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부러웠으면 맏아들은 이것 때문에 넘어져 실족케 된다는 겁니다.

부러우면 지잖아요

 

살진소 금가락지 새신발에 그만 실족해 버린 겁니다.

 

세상도 못 견디고 마귀도 못 견뎌요

천사는 부러워 죽어요

 

바로 죄인 중의 괴수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 말이죠. 곧 찬양자 된 것 말입니다.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이것이 해학 곧 전복 곧 역설이다는 겁니다.

 

기쁨 곧 복음이다는 겁니다.

 

이미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그렇기에 고난도 심판도 멸망도

무화과 나무 잎이 마름도

성난 파도 덮침도

 

모조리 다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찬양하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감사하며 노래 합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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