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 (시편 88)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7, 개역)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마 27:48,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마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마 27:50, 개역)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51,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개역)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 27:53, 개역)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 27:54, 개역)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요 9:1, 개역)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개역)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며칠 전에 누구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김대식

 

86일 오전 10:29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온갖 구원의 조건(원인)이라는 조건은 다 갖추었는데

정작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맏아들을 택한게 아니라

정반대로 탕자를 금가락지 살진소 새신발을 입히시니까

화가 나도 단단히 화가 나서 그만

미운 탕자 보다 그 미운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가 더 미워

짐승처럼 이빨을 갈게 됩니다.

 

탕자를 용서하심에 감사합니다.

저 못난 동생까지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저놈 천국 가면 내가 이를 갈겠다.

저놈이 가는 천국이라면 난 차라리 지옥 가겠다고 하다가

진짜로 지옥가게 되는 거겠죠.

 

이렇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원인]을 옹호하십니다.

99마리 유대인에게 가는게 아니라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에게 가시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은 이유입니다.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정작 유대인은 그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 속하지 않았다는 역설 ~~~

크아아악 ~~~

유대인은 자기 민족 외에는 없다 말이죠. 그런데 아니데
아니면 그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이 될수 없다 말이죠.
그 불가능 속에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그것도 유대인의 원수 중에 원수인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흑암의 백성이????

최고의 공포가 아닐수 없었던 거죠.

 

저 개같은 귀신들린 딸의 어미가 예수님이 그 토록 찾고 찾았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였다니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7:28,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잃어버린 원인] = 찌끄레기 = 잉여라는 빈공간(원인 없는 결과)만을 옹호하신다.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

 

p s

 

오히려 이 여인은 그 어떤 조건도 갖춘적이 없는

정반대의 허물 덩어리도 이런 허물 덩어리일수가 없을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이다.

 

과연 예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는

 

탕자로써의 이스라엘일까?

맏아들 로써의 이스라엘일까?

 

잃어버린 원인 = 즉 없는 원인에 충실하신 예수님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닌(원인 있는 결과)

요나의 표적(없는 원인)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으시다.

 

불가능성은 우리 쪽에서 믿거나 지키거나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누리는 겁니다. 이유 없이 ~~~~

 

초자아의 명령을 즐겨라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자꾸 말씀이 찾아와서 알려주니 그냥 저절로 알게 되고

저절로 믿게 되듯이 말이죠

 

마치 양과 염소의 비유처럼 ~~~

 

 

---

 

 

이스라엘이란 [잃어버린 원인]

즉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이스라엘을 [원인 있는 결과], [이유 있는 결과]으로 만들어 버려

졸지에 조건들을 다 갖추어버리는 겁니다.

 

부자청년도 조건을 따지면서 어릴적부터 지켜왔다는 둥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지금 당장 그 조건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소서)

(마 19:16, 개역)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개역)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개역)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개역)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개역)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3,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개역)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눅 18:23, 개역)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실로암 소경을 신학논쟁으로 가지고 장난감처럼 놀고 있는 바리새인들도

자꾸 본인들은 소경 아니다고 볼줄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니까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말이죠.

(요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또 탕자의 형 맏아들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말이죠.

(눅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또 성전의 두 사람의 기도 중에 한 사람인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놈처럼 토색치 않는다고

(눅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 이런 것들이 바로 인간이 만들어 조작해낸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조직이다는 겁니다. 신학교리인 셈이지요.
조건을 채워서 갖춘 교회라고 우기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 틈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없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곧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이스라엘을 찾아내시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탕자를 찾는 겁니다.

99마리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말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잇고 이어서 잇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과 단절된 완전 새로운 새이스라엘을 모으신다는 거죠.

 

오로지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나 나지않은

잃어버린 원인,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하나님께로 난 자 로써의 새이스라엘 말이죠.

 

곧 죽은자 말입니다.

(눅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살았다고 우기는 자가 아니라

죽은자 로써만 영광받으신다 말이죠.

 

왜 이 소경이 날때부터 소경이 되었는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라는 겁니다.

 


또 마침 재원씨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

 

201686일 오후 2:32

 

Q. 십자가에서 주께서 죽으실때 우리도 같이 죽었다는 말씀을 알고싶어요 그리고 우리가 직접 예수를 죽였다는 말씀도요

 

201686일 오후 4:42

 

A.
(
6:8,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6:5, 개역)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한 개인으로써 죽으신게 아니라

아담으로써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죽으심으로 인해 다 죽은 겁니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리고 예수님을 죽였을 때 유대인만 그 살인에 참여한게 아니라

이방인 곧 로마인도 참여했습니다.

결국 한 국가나 한 민족의 개개의 민족의 참여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대표성으로써 십자가의 죽음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모조리 모든 인간의 판대기로, 곧 한 묶음으로 보신다는 거죠.

 

이것은 곧 역설적이게도 희망이 됩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라는 2천년 전의 사건이

지금도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어서

살리는 영으로써의 사건 곧 십자가의 사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그 정도로 십자가의 용서는 우주적입니다.

그 조그마한 예루살렘 땅에서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은 사건으로써 벌어졌기에

시간과 공간과 인종 민족을 초월해서 지금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십자가의 피흘림의 용서입니다.


 

Q. 신직수씨가 궁금해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것이 맞는데 그것이 직접적으로 우리가 죽인것이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죽인것이냐 묻더라고요

 

A.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상관없이

성경말씀 자체가 일방적으로 한 묶음으로 묵어서 판단하신다는 겁니다.

 

마침 아침에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했는데

선악과가 어떻게 생겨먹은지를 지금 현재 우리는 알길이 없고


더 중요한 것을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냐고 말이죠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운 의미이지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길이 없다는 거죠

 

다만 그 증상은 있으니 말씀이 맞구나 라고 할 뿐이지요.

선악을 알 뿐이지

하나님과 같이 된 신적인 존재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왜 하나님은 그 선악을 먹는 것에 그렇게 경계를 하냐 하는 점이다는 겁니다.

마치 불안해 하듯이 말이죠.

따먹자 마자 부랴부랴 에덴동산을 땅에서 철거시켜 하늘로 이동시키고

화염방사기를 든 천사로 에덴동산 동쪽문을 차단하고

 

그런데 이것도 뒤에서 거꾸로 해석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마귀를 잡을려고 쳐놓은 올무였는데

왜 인간이 말려드냐 라는 거죠.

 

그렇지만 십자가로 인해서 마귀를 잡고자 한 것이 성취가 되었고

말려든 인간은 십자가로 인해서 사함을 받고

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인간은 마귀와 한 통속으로써 심판하시는 겁니다.

 

광야에서 모두다 불뱀에게 물리게 하고서는

장대높이 구리놋뱀을 쳐다보면 낫는다고 하니까

치 피 흥 쳐다본다고 나을 것 같으면 내 성을 갈겠다 라고 한 자는 성 갈았고

쳐다본 자는 낫게되는

말도 안되는 용서의 구원
(유대인들은 자꾸 말되는 구원, 쪽팔리지 않는 멋들어진 성화, 원인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조건을 갖추다가 사망)

곧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여주신거다 말이죠.
 

자 이런 입장에서 보면

나와 인간 개인의 입장과 상관 없이

선악과를 심어서 마귀만을 상대로 하였기에

 

내가 직접적으로 죽였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죽였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 다시 사시니까

중요한 것은 다시 살아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즉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마귀만을 상대로한 모든 일이였기에

내가 직접적으로 죽였든 간접적으로 죽였던 상관 없이

마귀를 심판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셔서 함께 주와 하느냐 라는 점입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느냐 라는 관계성이다는 점입니다.

 

처음 질문 자체가 관계에 관한 질문이였고 답변이였듯이

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주와 함께라면

직접적 간접적 이 모든 것이 상관없이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 동원이 된

 

마귀와 십자가의 사건이였다는 거죠.

 

두 소욕 충돌사건이다는 겁니다.

 

개인적은 부분 부분으로 볼게 아니라

전체로 보면 모든 것이 관계개념입니다.

 

고로 베드로의 개인적인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은 절대로 개인적인게 아닌거죠.

직접적인 것도 간접적인 것도 아닌

오히려 더 밀착적인 관계개념 친밀한 관계 개념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자

우리야장군을 죽인 사건

이름 없는 아이가 죽는 사건

이 모든 것이 다윗 개인만의 사건이 아닌

우리가 그 관계 속에서 놓여지는 사건인 겁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좁은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경험의 관계를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좋은말씀 고맙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의 십자가가 아닌 쓸데없는 신학적문제로 골몰하고는 합니다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십자가은혜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고마워요~

 

땡큐


201686일 오후 5:27에 읽음

 

--


 

자 이렇게 성경 속에 나온 인물들의 경험은 그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사건으로 등장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난 저런 사건의 경험이 없이 지금 나이가 80살이 넘어서 곧 죽게 되어 있는데요?

아닙니다. 죽는 것도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죽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성경 속의 사건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성경에서 벗어나는 삶을 사는 자는 없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이 죽은자 라는 잃어버린 원인, 즉 없는 원인으로써의 이스라엘은

그 어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예수님이 직접 만든 새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처음사랑이다는 거죠.

 

이 처음사랑을 예수님은 옹호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처음사랑을 예수님 혼자만 의미를 두신다는 거죠.

 

그래서 시편 88편에서 찬양자는

소시 때부터

즉 어릴적부터

날 때부터 자신은 죽은자와 같았다고 합니다.

 

(88:15, 개역)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즉 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자이다 라는 거죠.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5, 새번역) 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죽은 시체에게 기적을 베풀어 본들 소용없다는 겁니다.

살아있을 적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말이죠.

 

죽은자에게 기적을 베푼다고 해서 다시 살아 나냐 말이죠.

 

(88:10, 개역)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88:11, 개역)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88:12, 개역)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88:10, 새번역)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88:11, 새번역)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또는 '파멸'. , '아바돈'

(88:12, 새번역)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로지 죽은 자에게서만 영광받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 왜 죽은자에게 곧 시체에게 기적을 베풀란다 우짤래 라고 말이죠.

 

즉 이 말을

 

어머니께서 들으시고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입니다 고쳐주소서 라고 하면 소경아닌데 라는 말씀을 기억해서 이야기 하더라 말이죠.


그래 왜 소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일을 할란다 우짤래 ~~~~
 

네 바로 그겁니다.

주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즉 주여 저는 죽은자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자에게는 산자의 하나님이신데

주여 저는 살았습니다. 보세요 살아있는 조건들 여기 있잖아요! 라고 우기는 자에게는
죽은자로 취급하시기에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

 

(22:32, 개역)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12:27,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22:23, 개역)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2:24, 개역)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2:25, 개역)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2:26, 개역)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2:27, 개역)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2:28, 개역)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2: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22:30, 개역)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2:31, 개역)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22:32, 개역)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22:33, 개역)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인간들은 부활교리를 습득해서 이스라엘의 조건

천국가기 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자의 하나님을 따르는 모습이다는 거죠.

 

그러니 이들에게는 처음사랑이라는 [잃어버린 원인]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열매가 아니라

 

원인 있는 결과로써 열매를 갖추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을 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를 열매로써 그들 열매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내어놓으면

감사는커녕 죽일려고 달려든다는 점입니다.

 

바로 탕자를 내어놓으니까 비로소 본격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살인의지를 불태우게 되듯이 말이죠.

 

이 탕자 라는 원인 없는 결과

 

부활교리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부활교리 믿지 말고

내가 곧 부활임을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암요 부활 교리 믿는다니깐요.

믿숩니다 믿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말이죠.

 

왜 너 예수는 우리가 사랑하는 나사로를 사랑한다면서 왜 죽도록 내버려두었냐 라고 따지면서

저들은 울음꾼 노릇을 자처합니다.

그들의 눈물연기를 보시고 예수님은 우십니다.

 

내가 길이요 내가 진리요 내가 부활인데

 

도대체 어디서 부활을 찾아내었는지 부활 너무 너무 잘 믿고 있고

회개 너무 너무 잘 하고 있는 회개의 달인들이고

믿음 도대체 누구로 받았는지 너무 너무 잘 믿는 믿음의 달인들일 뿐이지만

 

정작 잃어버린 원인은 아니다는 겁니다.

 

내가 길인데

 

(예수) 곧 길

(예수) 곧 진리

(예수) 곧 부활

 

그런데 너희들은

 

내가 준 적도 없는 길을 걷고 있고

내가 준 적도 없는 진리를 믿고 있고

내가 준 적도 없는 부활을 하고 있으니

 

오빠 나사로는 살았는데 부활세계에 있는데

일찍 왔으면 안죽었을텐데 라고 하는 겁니다. 자꾸,

정작 본인들이 죽어 있는 줄 모른다는 거죠.

자꾸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면 고침받을텐데 말이죠.

 

(11:17, 개역)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1:18, 개역)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1:19, 개역)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1:20, 개역)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11:21, 개역)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1:22, 개역)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11:24, 개역)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2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개역)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7, 개역)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11:28, 개역)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11:29, 개역)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11:30, 개역)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11:31, 개역)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11:32, 개역)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11:33, 개역)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11:34, 개역)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개역)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개역)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개역)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개역)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개역)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1:45, 개역)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46, 개역)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11:47, 개역)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개역)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개역)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개역)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개역)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개역)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개역)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1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말이죠
.

도대체 그 엉터리를 누구에게 받았냐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냐 하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말씀에 부합되는 자들이 등장해서

실제적으로 행동을 보인다는 점에서

기록된 말씀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누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저들 곧 나로 말미암지 않는 자의 등장이 아니였다면

교회를 믿고

목사를 믿고

그딴 되도 않는 모호하고 흐릿한 것을 믿겠다고 우겼을텐데

그들의 등장 때문에

싸그리 모호한 것들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씀만 옳았음을 보게 되더라 말이죠.

 

(예수)가 곧 믿음이다 라고 하니까

문법 파괴라고 하지를 않나

정작 인간들은 믿음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음의 방법, 신앙의 조건을 운운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믿음이다는 것은 거부한채로 말입니다.
얼마나 거부를 하는지 막 짜증을 내어요
조건에 아무리 따져도 안 맞는데 자꾸 예수님이 믿음이다 라고 하니 막짜증내

 

그럼 성경말씀보고 내가 곧 부활이다 라는 말씀에는 문법 파괴라고 왜 말하지 않냐 말이죠.

그것은 성경에 문자로 적혀 있거든요

반박했다가는 자기들이 이단으로 몰릴까봐 그렇다 말이죠.
 

하여튼 그 말을 한 자는 한명인데 동의를 하는 놈이 더 나쁜놈이더라 말이죠.

한 두 놈이 아니야

한국 교회 대부분이더라 말이죠.

 

결국 오늘 시편 88편의 찬양자로

죽은자로써 놓이게 되니까

이것이 개인의 죽음

개인의 경험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바로 한테 묶어서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 곧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7:46, 새번역)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 22:1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묶여진다는 겁니다.

 

시편 88편에서도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묵묵부답입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대답 없는 너 김종서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힘없이 멈춰진 하얀손

싸늘히 식어가는 눈빛

작은 그 무엇도 해줄수가 없었던 나

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몇일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쉬는게 허무한듯 느껴질뿐

이제 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

 

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몇일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쉬는게 허무한듯 느껴질뿐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말이죠

없다 말이죠.

[없음]

 

[없음]이 바로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신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즉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산자이지

죽은자의 하나님 곧 원인 있는 결과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마귀는 자꾸 원인을 따지고 원인(조건)을 갖춘다고 했습니다.

 

살았다고, 소경아니다고, 본다고, 하니 못 보는 자요

소경이면 주님께서 고치실텐데 그 실로암 소경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산태의 하나님이 아니라 왜? 죽었기에

죽은태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 이삭이 나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부활의 하나님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약속의 세계요 믿음의 세계요 언약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그래서 찬양자는

곧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놓여지는 겁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나는 겁니다.

 

이 잃어버린 원인

잃어버린 사랑에 예수님은 목숨을 걸어서까지 충실하십니다.

 

자 이렇게 십자가가 또렷히 보이는데 과연 언놈이 꾀겠냐 말이죠.

 

죽은자를 통해서만 영광받으시는 이유입니다.

산 자는 필요가 없습니다.

 

죽여서 영광 받으시는 이유는

십자가를 밝히 보이시고자 함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