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의 주인!! 땡 탈락 (시편 92편)

 

안식일의 주인이 부르는 찬양

 


(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6:5, 개역)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12:8, 새번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6:5, 새번역)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의 주인 이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게 들리지 않나요?

아마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처음 들어본 낯선 표현일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무슨 뜻일까요?

안식일을 만든, 안식일을 재정 하신 장본인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 안식일의 주인이 직접 와야 할 정도이면

본을 보이고자 말이죠.

그 동안 안식일을 지킨다고 자부했던 인간들은

과연 제대로 안식일을 지켰다 안 지켰다?

안 지켰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거든요.

즉 인애와 자비를 원하지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그런데 웃끼는 것은 그럼 우리도 사랑으로 지키면 되잖아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사실상 대부분이였다 말이죠.

즉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더라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즉 사도바울은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다 라고 했는데

어찌된 심판인지

그리스도에게만 있어야 할 사랑이

졸지에 안식일 지키는 자라면 모조리 다 사랑이 있는 셈 치자 라는 식의

자기들끼리의 약속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약속에 서로가 들어갈려고 난리다 말이죠.

그 의문의 제사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데

그 원치 않는 곳에 서로 들어갈려고 말이죠.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바로 저 번제와 제사로만 사랑이 있는 것으로 치자 라고 약속한 그런 그룹에 가 버리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가 아닌데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번제와 제사 라는 의문의 모호한 것들이

자기들끼리 사랑 맞다 라고 치자 라고 서로 약속한 그 속에서

모든 교회들이 서로 들어갈려고 하느냐 말이죠.

제가 다녀 봤던 우리나라 최고의 성화론 교회

그것도 가장 수준 높은 성화론 교회를 보면 그렇더라 말이죠.

사랑은 없는데

놀랍게도 정은 억수로 많더라 말이죠. 인간 미

초코파이 정

그 정이 사랑으로 둔갑해서

그 정을 사수하는데 졸지에 인기스타가 되다 보니

안 속아 넘어가는 자들이 없더라 말이죠.

 

사도바울은 사랑이 없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거기서 복음이 출발하는데

난 사랑이 있습니다 로 출발을 하니까

엉터리 이더라 말이죠.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표현이 참 낯선 이유는

일단 안식일을 지키는자 입장에서는 일단 거부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만든 그 당사자가

직접 안식일을 지킨다 라는 의미는

법을 지은 당사자가 법에 저촉이 되는 상태가 되겠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드디어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나오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졸지에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된 것이다 말이죠.

 

찰리채플린 따라하기 대회에서

진짜 찰리 채플린이 직접 그 대회에 참가하면

졸지에 경쟁자가 또 한 명 늘어나게 된 셈이다 말이죠.

그리고 진짜 찰리 채플린은 1등은커녕 저 하위권에 맴돌았다 말이죠.

 

그럼 그 대회 자체가 어땠다?

엉터리 였다 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 대회 속에

안식일을 지은 그 당사자가 직접 그 대회에 참여했더니만

안식일을 지키기는커녕 어기는 자로써 판명이 나서

안식일에 비로소 이단으로 판명이 나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이 말이죠.

 

이것이 안식의 주인의 찬양이다는 겁니다.

 

참으로 얼마나 피리를 제대로 불렀으면

아무도 춤 추지 않냐 말이죠.

얼마나 제대로 애곡을 했으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냐 말이죠.

 

안식의 주인이 말이죠.

 

진짜 채플린이 얼마나 제대로 채플린 흉내를

즉 자기가 자기를 흉내 내는

 

하춘화가 자기 흉내 낼려고 김영철이의 하춘화 흉내내기를 다시 흉내 내면서 따라하는 겁니다.

 

그렇게 융통성 있게 하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텐데

 

괜히 하춘화가 김영철 흉내내지 않고

자기가 자기 모습을 그대로 해버리면

누가 웃겠냐 말이죠.

아무도 안 웃잖아요.

 

다 어차피 사기인데

여러분 이거 다 사기인줄 아시죠?

어차피 안식일 지키는 것 다 사기인데

그냥 같이 사기 치시면 될 것인데

안식일 주인은 융통성 없이

고지곳대로 진짜로 안식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니

 

땡 탈락

 

심사위원들은 그거 볼 것도 없이 그냥 땡 탈락 처리 해 버리는 겁니다.

 

참 제목을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안식일 주인의 찬양 보다

안식의 주인 땡 탈락 ㅋㅋㅋㅋ

 

참으로 웃을 일이 아니지요.

그 정도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자기 목숨 걸고

안식일을 노골적으로 어겨버리는 겁니다.

제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음을 보라고

제발 인애와 자비를 원함을 보라꼬

 

그러나 인간의 귓구멍은 절대로 듣지 않을려고 한다 말이죠.

이미 법에 자신의 신체인 몸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예수님의 몸이 이질적인 몸으로써 튕겨버리는 겁니다.

 

낯선 몸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성경 자체가 보증을 해준다 말이죠.

그러니 문자 그대로 따르면 된다 말이죠.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의 낯선 안식을 볼려고 하겠냐 말이죠.

아쉬운게 없는데

 

그 어떤 인간도 안식일 지키는 것 어렵지 않거든요.

교회 주일마다 다니면 된다 말이죠.

그래서 주일성수를 습관화 만들려고

자꾸 잔소리 꾼을 마련해 두는 겁니다.

모닝콜처럼 깨운다 말이죠.

 

몸에 습관화 되지 않은 사람은

안다니는 것이 습관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거지

그것을 훈련 시키도록 도우면 된다고

자꾸 보채는 겁니다.

 

자 여기에 정은 있어도 사랑이 어디 있냐 말이죠.

 

사랑이 될려면

사랑이가 사건을 의도적으로 터트려야 합니다.

안식일날 하필이면 자기 집 가축이 탈이 나서

그 가축을 구하고자 동물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안식일을 놓쳐 버리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전화가 오고 난리죠

왜 안오냐고

왜 안식일 안지키냐고

왜 주일성수 안하냐고

 

결국 애초부터 사랑으로 모인게 아니다는 겁니다.

정으로 모인 거지

이용해 먹을려고 모인거다 말이죠.

주일성수 안해서가 아니라

헌금을 왜 안했냐 라는 삥둘러서 하는 소리인 겁니다.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돈으로 보는 겁니다. 돈으로

 

요즘 의사들 그것도 산부인과 의사들이

아이를 낳는 사람이 적다 보니

한번 찾아오는 산모를

병원운영을 위해서

아예 뽑아먹을수 있는데 까지 다 뽑아먹겠다는 식으로

바가지를 씌운다는 겁니다.

그래야 간신히 병원 유지가 될수 있으니 말이죠.

 

그런 교회 참 교회가 아니라

그런 병원 안 걸리면 다행이고

그런 병원에 걸려들면 손해 보는 거죠.

인간 관계가 손익을 따지는 식이 된 겁니다.

처음 만나 악수할 때 이미 정보를 다 빨아들여서

어느 정도로 이용 가치가 있으냐를 보는 것이

인간의 얼굴과 얼굴의 만남이 되는 겁니다.

 

왜 다 아는 이야기를 불편하게 하느냐 하면

이 습관이 결국 예수님에게 까지 확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부처님? ? 하늘님? 옥황상제? 까지 다 확대확장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뭡니까?

예수든 하나님이든 누구든 하여튼 이용해 먹겠다는 겁니다.

 

안식일 지켰으니 복 달라

돈 달라 라는 거죠.

 

그 심뽀를 서로가 암묵적으로 해 왔고 서로간의 약속으로 다 되어 있는데

 

그 속에 졸지에 안식일 지키는 척 하기 대회에

졸지에 진짜 안식일 주인이 와 버린 겁니다.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에

진짜 채흘린이 참가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경쟁 할수 밖에요.

 

인간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사실상 예수님과의 경쟁인 겁니다.

누가 누가 더 잘 믿나 대회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은 뭡니까?

한마디로 강도의 소굴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성전에서 안식일 지키는게 아니라

성전 바깥에서 안식일을 지키니까

누가 성전에 들어갈려고 하겠냐 말이죠.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할 필요가 없이

성전 바깥에서 고침을 받는 판국에

졸지에 누가 헌금을 내겠냐 말이죠.

 

참 제대로 된 경쟁자

골치 아픈 경쟁자가 교회 운영을 다 망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싹을 미리 짤라 내어야지요.

 

얼마나 인간이 법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라는 겁니다.

즉 믿겠다. 지켰다. 법을 준수한다. 행한다. 실천한다 라는 것은

곧 살인의지이다는 겁니다.

저런 것들로 조직 속에서 소속인으로 살아갈려는 참으로 바람직한 자임을

그래서 소속감을 가지려고 하는데

만약 날 왕따 시키면 곤란해? 라는 겁니다.

그렇게 날 왕따 시키면 다 죽여버리겠어 라는 것이

전제로 깔린 상태에서의

법 지키기 이기 때문에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 지키기 라는 법에

율법 외에 한 의가 외부에서

새로운 안식을 지키는데

졸지에 성전에 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일날 하필이면 성전 가야하는 날

성전에 가는 사람 가로막고서

병을 고치더라 말이죠.

그럼 헌금은 누구에게 내느냐

안 내도 된다는 겁니다.

 

문둥병자에게는 조심스럽게 대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암행어서 출도요 라는 소식을

전하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는 누가 책임지고 고쳐야 한다?

대제세장 아닙니까?

그런데 못 고치는데

고치는 분이 나타났다 라고 전해라 ~~~~~
곧 간다고 전해라 ~~~

 

대제사장이 기뻐할까요? 아니면

문둥병자 고치는 대제사장 대회에서

아무도 못 고치는 가운데

누가 고치는 자가 나타났다면

경쟁자로 여길까요?

그 사람 땜에 직장을 잃게 될 판국인데????

 

자 이런 분명한 의문과 모호함과 흐릿함의 반복과

그런 습관들에 쩔어있는 인간 몸 중심의 의문의 제사 반복 속에서

 

졸지에 또렷함을 맛보게 된다면

그 사람은 환자로써

죄인으로써

나그네 고아 과부 로써

또 문둥병자로써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분을 만난 것에

말려도 말려도 기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말이죠.
너무 너무 또렷하기 떄문에 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졌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먼저 고쳤기 때문에

그 분이 나를 찬양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나오는 화답의 찬양이

오늘 시편 92편이라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누구 들으라꼬

 

예수님을 안식일 지키기 대회의 경쟁자들 들으랍시고

시편 92편에서는 하나님의 원수 라고 표현된 자들입니다.

즉 찬양이란 이 원수 문제를 해결되었을때의 의미 입니다.

그러니 원수가 밝혀지지 않으면 찬양이 아니다는 겁니다.

원수를 이긴 승리가 없다면 찬양이 아니무이다. 

 

결국 찬양이란 약올리기입니다.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겁니다.

호산나 찬양이

어린아이들이 참 찬양을 잘했더라가 핵심이 아니다는 겁니다.

누가 듣기 싫어했더라 가 핵심이다는 겁니다.

 

찬양은 전쟁 승리 찬가 이거든요.

그러니 이미 승리 했노라 라고 노래부르니

당연히 이 승리에 동참못하는 자만이 듣기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결국 찬양은 적 들으라꼬
하나님의 원수 들으라꼬

적을 약을 바짝 바짝 올릴려고

그 분냄이 터져나오라꼬

그 감추어진 살인의지가 돌출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찬양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주님이 직접 찬양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인자의 안식의 주인 됨입니다.

 

땡 탈락

즉 저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눈치 챘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경쟁자요 자신들이 살해 해야만 하는 아벨이라는 것을 말이죠.

 

결국 교회는 왜 가는 겁니까?

안식일은 왜 지키는 겁니까?

 

땡 탈락 당하라고 가는 겁니다.

아벨처럼 살해 당하라고 가는 겁니다.

살해 당하면 그럼 구원이가? 그러면 조건이 되는 거죠.
그 교회 속에 교회가 따로 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즉 인애와 자비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사랑 말입니다.
새성전을 못 보여주는 판국에 헌 성전을 허물어 본들 의미 없잖아요.
어차피 같은 의문의 성전일 뿐인데.

 

다들 얌전한데

천하의 순하고 착하고 순딩인 자들만이 모였는데

무슨 놈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겠냐 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안식일 지키기에 그렇게 철두철미한 자들인데

 

아참 얼마전에 영화를 봤는데

세 편을 봤는데 하나가 제목이 생각이 안나서 언급을 못했는데.

지금 막 생각났는데

위대한 계시 영어제목은 비젼이고 수녀의 삶을 다룬 영화고

또 하나는 신은 죽지 않았다 2 이고

1 편 도 몇 년전에 봤는데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 영화이고

또 하나가 바로 컨저링 2 인데

영국 기독교(천주교를 포함한)보다 미국 기독교(천주교)가 세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미국 제국주의를 과시하더라 말이죠.

 

이 세 편의 소위 기독교 영화가

사실은 기독 영화가 아니라

누가 누가 더 기독교를 잘 흉내 내는가 대회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 대회를 하는 마귀영화 라는 겁니다.

누가 더 인간의 편에 선 자들인가? 인간을 도와주는 인간의 편에 선 종교가 뭐냐 라는 겁니다.

 

이 세 편의 영화 속에서 사건을 터트리는 쪽이 마귀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안식의 주인이 말썽을 피우고 소란, 소동을 일으키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당사자이니까

누가 마귀냐 말이죠?

당연히 예수님이 마귀인 겁니다.

그래야 마귀가 마귀를 잡고자

예수님을 마귀로 뒤짚어 씌워 몰아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설쳐대는 식입니다.

 

그러니 안식의 주인 땡 탈락

안식의 주인은 마귀이기에 이단으로 몰아야 함

아벨을 경쟁자로써

가인은 자기 번제와 제사가 상납 받기 위해서라면

몰래 죽여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말이죠.

경쟁자 곧 가장 유력한 경쟁자를 말이죠.

저 놈만 사라지면 난 성공이고 저 놈이 있으면 난 실패할테니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니

마귀니
이단이니 등등 으로
몰아세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뒤짚어 씌워 살해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왜 안식일 이라는 율법이 왜 나왔을까요?

왜 만드셨을까요?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살인자이다 라는 것을

죄 아래 갇혔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절대로 이웃 안 죽입니다.

이미 확보한 자기 편을 왜 죽이냐 말이죠.

오로지 자기편이 될 수 없는 경쟁자만을 죽이는 겁니다.

 

예수 하나만 죽이기 위한 것으로써

율법이 만들어진 겁니다.

선악과 괜히 먹은 겁니다. 마귀 잡을려고 한 것을 왜 먹냐 말이죠.
율법을 괜히 지킨 겁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한 것을 왜 지키냐 말이죠.
그럼 안 지킬래!! 소용없습니다. 이미 유대인이라는 인간 대표성으로 게임 오바 입니다.
하나님 말씀 괜히 보고 괜히 실천하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님을 경쟁자로 죽이는 겁니다.
모조리 다 마귀 잡을려고 한 것인데 왜 쓸데 없이 말려드냐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잠재된 살해의지를 더더욱 커지게 되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그래서 등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쨉도 안되는 경쟁자를 만났기 때문에 말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지켰더라면 얼마나 기쁠까요?

예수님이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뽀뽀하고

발에 입맞추고

춤추고 노래하고 난리 났을 겁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졸지에 그 동안 어렵게 해왔던 자기숙제에

비교도 안될 정도의 숙제인

수학천재들만 풀수 있는 문제를 내버리니까

등 안돌릴 수가 없는 겁니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셈인 거죠.

지키기는 뭘 지켜

뭐 어릴적부터?

그럼 이 수학 문제 풀어봐

못 푸는 겁니다.

 

못 풀면 지옥입니다. 우짜죠?

 

그러나 단 한번도 율법 지킨 적이 없는 자, 곧 탕자에게는 그 문제에 답이 적혀 있더라 말이죠.
어 누가 내 문제지와 답안지에 답을 적었지? 난 못 풀어서 가만히 적지도 않았는데?

아니 어떻게 된 일이죠?

안식의 주인이 졸지에 자기를 고쳐 주더라 말이죠. 안식일날 말이죠.

답을 안식의 주인이 적어버린 답으로

무조건 패쓰 합격 하는 겁니다.

 

이런 반칙이 어디있나?

이것이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오로지 반칙을 원하는 이유인 겁니다.

 

반칙이 싫타구요?

그럼 수학문제 풀어 보시던가?

풀수 있는 문제를 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고치시지 않았겠죠.

 

결국 인간은 뭘 해도 엉터리이고 가짜이다

살인의지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거죠.

그 정도로 우리는 싫어했던 겁니다.

율법이 좋아서

율법에 감사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지 우리에게 없다는 겁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것을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아멘 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거부하더라 말이죠.

우리도 이웃사랑 실천했다 라고 자꾸 우기더라 말이죠,

 

사도도 안된다고 했는데

사도 보다 믿음이 더 좋아

 

아니 그런 믿음 가져서 뭐하게?

인간의 믿음은 어차피 복수심인데

살인의지인데

 

졸지에 안식일 지키기에 열심인데

안식의 주인을 나타나면 경쟁자로 죽일려고 달려들텐데?

 

성전 짖기에 열심인데

예수님 본인이 성전이다 라고 해 버리면

졸지에 다른 성전을 인정못하기 때문에 경쟁의 성전을 용납못해서 죽일려고 할텐데?

예수님은 자기가 성전이니까 빨리 너희 성전 허물어 라고 더 재촉을 할텐데?

화를 자꾸 돋꾸더라 말이죠.

 

무슨 수로 살인 안하고 배기겠냐 말이죠.

 

그래도 난 절대로 살인하지 않고 믿을 거야 라고 장담을 해도 소용없는 것이

 

이미 한 아담 안에서, 처음 아담에게로 부터 예수님은 죽은 겁니다.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어서 보신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처분에 맡기시면

놀랍게도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 왜 날 세 번 부인했냐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 나를 사랑하느냐 만 물으신다는 점에서

감사 아니하고는 못배긴다 말이죠.

 

그러면 그 자잴구재한 것들이

더 이상 심각하게 굴지 않는

그야말로 시시한 것들이더라 말입니다.

 

?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의문의 반복이 뭐가 심각하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또렷한 것인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러니 찬양자는 이 사랑을 노래하는 겁니다.

사랑을 받아본 자는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것과

또렷한 것의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여전히 모호한 것들을 반복하기 때문에

의문의 것을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자 말이죠.

 

그렇다고 또렷하고 명료한 십자가의 사랑을

저런 의문의 것들과 바꿀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안식일 주일성수 성화되기 교회 다니기 말씀지키기 이웃사랑실천 등등의

의문의 것들로 협박 공갈치는 놈들이 한둘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십자가는 또렷하다는 것에

저런 사기치는 것들에 족히 비교도 안되는 섬김을 받았다는 사실에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기뻐하시면 됩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저들에게 약을 바짝 올리는 사랑을 주시니 어쩔수 없습니다.

맞아 죽든 말든 기뻐서 피리 소리에, 희년 나팔소리에, 복음에 춤 출수 밖에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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