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나타내는 출애굽전쟁 (시편 108편)
(시 57:8, 개역)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108:2, 개역)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주께로 정해졌으니 나는 주 찬양 하리라
깨어라 나의 영혼아 비파와 수금 들어라 이 새벽에 내가 찬양 하리라
(시 108:1, 개역) 『[다윗의 찬송 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 108:2, 개역)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가스펠이 생각나는 시편 108편인데
참으로 그때는 철딱서니 없게 이것이 무슨 의미인줄도 모르고 그저 신나서 노래 부르곤 했는데 말이죠.
미래완료를 표절 또는 빌려와서 과거 곧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찬양 곧 미래완료를 부르는 깨우는 땡기는 사건입니다.
또
내가 만민 중에 오 주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리 열방 중에서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돌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시 108:3, 개역)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시 108:4, 개역)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시 108:5,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노래도 생각나구요
그런데 오늘 읽다가 시편 108편 후반부를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고 할까
그런데 모순은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고 그렇게 말해 놓고
다윗은 정작 자기를 또 이스라엘을 구원을 해 달라고
구원자를 찬양하고 부르짖고 있다 말이죠.
원수 갚아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상합니다.
원수가 누가냐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아니 이스라엘 이라는 원수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출시켜 달라고 말이죠.
앞의 이스라엘은 애굽인 육적 이스라엘이고
뒤의 이스라엘은 그런 육으로 부터 탈출 당해버린 영적이스라엘 곧 새이스라엘 새피조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하나님의 원수이고 그런 다윗 자기자신에게서 다윗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앞의 다윗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의 구원을 요구하는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구원 그런 기적을 바라는 자이고
즉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헛된 구원에서 태어난 자이고
뒤의 다윗은 그런 다윗에게서 건짐을 받는 다윗인
요나의 표적 속에서 태어난 자가 다윗입니다.
바로 그런 이스라엘에게서 건짐받는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앞의 이스라엘은 번제와 제사만을 주장하고, 과거의 산물이고.
뒤의 이스라엘은 인애와 자비만을 바란다 말이죠. 미래완료의 산물입니다.
앞의 이스라엘은 성전 두 사람중 바리새인 곧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심 토색치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고
곧 율법의 네 배나 갚아라 이 나쁜놈을 당장 능지처참 하라 라고 외치는 다윗이고
뒤의 이스라엘은 성전의 두 사람 중 세리 곧 매국노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곧 그 나쁜놈이 너다 너 아뿔사 어찌할꼬 ~~~~~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고 상한심령을 외치는 요나의 표적을 외치는 다윗을 포기하는 다윗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캬 이거구나
결국 무엇이냐 하면 두가지 인데
물론 앞 부분에서도 언급했지 싶은데
또 최근에 촛불집회를 통해서도 느낀 것인데
하나는 찬양이란 미래를 표절하는 것이다 라는 것과 같은데 미래를 빌려오는 겁니다.
둘은 애굽이 그냥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런 국가시스템 자체도 일종의 구원장치인데 그 구원장치를 무너뜨리고 헛되게 하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결국 우상이든 모든 종교의 신이든 그것들이 일종의 피라미드처럼 부활장치인 구원사상처럼
구원장치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구원을 깨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왜 다른 나라 또는 비어있는 땅 다 내팽겨 치우고 굳이 최강대국에 여호와는 시비를 거시는가 하면
바로 이 사람의 구원은 헛되도다 라는 말씀을 이루고자 하는 십자가 사건 곧 출애굽사건이다는 거죠.
그 애굽 자체가 국가 자체가 하나의 구원의 장치로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장치로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그 인간의 구원장치를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집요하게 깨뜨립니다.
그 당시 최고의 국가 애굽을 깨뜨리면 다른 나라는 그 대표성인 애굽멸망으로 인해 같이 허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는 애굽이 곧 원수가 누구냐 이냐 말이죠? 이스라엘 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신것처럼 말이죠.
그럼 예수님 당시의 구원장치 종말론의 묵시문학이 꽃피는 구원장치는 곧 원수는? 로마? 유대인?
유대교이다는 겁니다. 유대교가 대표성이다는 거죠. 모든 구원장치의 ~~~
오죽하면 제자들이 바로 떠올린다 말이죠.
(시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9, 새번역) 『주님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쏟아집니다.』
(요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시 69:9』
(롬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시 69:9』
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는 구나
얼마나 그동안 풀리지 않아서 화자가 되어서 고민되었던 말씀이
바로 풀리는 겁니다.
인물의 등장 때문에 말이죠. 그 전에는 절대로 풀리지 않죠.
성소에 들어가니까 바로 풀렸다처럼 말이죠.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렇다고 이런 모순을 예수님(성소)이 겁내겠냐 말이죠.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데!!!
율법 지키기 라는 것은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은 오히려 의문에 의문을 꼬리를 물고서 밑도 끝도 없이 더할 뿐이죠. 왜 모순 되니까?
그러나 인애와 자비는 바로 이런 모순이 아니면 불륜이 아니면 해결하지 않는다 말이죠.
불의한 것에 충성치 않는데 어떻게 정결한 것을 맡기겠냐 말이죠.
인애 와 자비 곧 사랑은 철처하게 모순 보다 더 나은 모순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고 시기와 질투가 불 과 같다
사랑은 그야 말로 활활활 타올라야 사랑이다는 겁니다.
순식간에 산불이 번지듯이 말이죠.
다윗이 왜 과거의 애굽을 언급하면서 또 출애굽 또 구원사건을 왜 다시 재현하고자 하냐 말이죠?
인간 구원 장치인 이 이스라엘 자체 마저도 허물어 버리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불 지르러 왔다는 겁니다.
왜 이런 헛된 우상들 구원장치들 의문의 번재와 제사 장치들이
구원이 된다고 설치해 놓았냐 말이죠.
그거 순식간에 불질러 버리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구원과 연관됩니다.
돈벌고 직장다니고 장사하고 밥먹고 가정을 꾸미고
친구를 사겨도 그냥 안 사귑니다. 나의 구원에 유익되는 자와 사귀고
또 문화생활을 하고 특히 종교생활 등등
이 모든 것이 구원과 연관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구원이 헛되게 해 주는
고맙디 고마운 우상들입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이듯이 말이죠.
교회요? 탐심을 숭배하는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국가 장치 사회안전망 심지어 인간관계 가족관계
왜? 일하고 운동하고 건강관리하고 왜 그러겠냐 말이죠.
모조리 구원활동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왜 성화할려고 하냐 말이죠.
개혁주의자들이 왜 개혁을 부르짖냐 말이죠.
못살겠다는 겁니다.
다 죽는다는 거죠.
어떻게해서든 살길을 찾자 라는 겁니다.
결백증 환자들은 더러운 것에 못 삽니다.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말이죠.
그러니 사회 개혁 차원에서 춧불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외친다 말이죠.
더러운 인간 못 보겠다는 겁니다. 마치 자기들은 괜찮은 인간인냥 말이죠.
이런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열성에
이것을, 이 구원장치를,
헛되게 만들고자 하는 유일한 신은 여호와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곧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요.
이것이 과거 사건으로써 다윗이 외치는게 아니라
미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기에 외치는 겁니다.
이 십자가는 BC 1 년과 AD 1 년 사이에 태어난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미래완료가 소급이 되어서 지금도 터트려지는 사건이다는 거죠.
그러니 구원이 여전히 진행중이다는 겁니다.
구원 그 이후란 없어요.
시간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으로써 여전히 터지는 사건입니다.
마치 꽃봉오리가 가지를 계속 끊임없이 치면서 끊임없이 리좀화 되듯이 말이죠.
꽃이 피고 그 핀 꽃 끝에서 또 가지를 피어 또 꽃이 피고 마치 불처럼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을 우주 끝까지 펼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에 벌어진 사건의 역사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지금 현재 인간의 구원 장치 곧 교회도 될수 있고 절간도 성당도 국가 사회 조직집단 등등
그런 종교들인 유대교부터 시작해서 모든 종교를 다 헛되게 만드는 사건으로써 십자가 사건이다는 거죠.
자본주의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자본 신봉자들이니 같은 종교꾼들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의 구원 장치들을 헛되게 만드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에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듯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을 모조리 다 깨뜨리는 겁니다.
마치 구원도 안되는 것들이 구원 시켜줄수 있는냥 설치니까 말이죠.
곧 인간 구원을 깨는 겁니다.
인간 신체를 깨뜨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하는 것이 미리 미래의 승리를 미리 빌려와서 과거를 바꾸는 겁니다.
결국 국가나 민족이나
특히 예수님이 성전을 건드리실 때 마다 사람들이 그것만은 참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구원장치이다 말이죠.
자기의 구원이 날라갈 판국인데 화를 내지 않겠냐 말이죠.
왜 인애와 자비가 더 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의문의 제사인 번제와 제사를 인간은 구성할까?
그것은 구원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왜 예수님은 거부하시는고 하니
아니 구원자는 유일하게 예수님 뿐인데
구원을 준적도 없이 인간들이 미리 자신의 구원을 다 마련해 버렸다 말이죠.
구원자가 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다 구원을 받았데?
도대체 누가 줬냐 말이죠?
마귀가 준 거다 말이죠.
그러니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구원 장치가 일체 없는 자에게 구원자가 필요하지
구원 장치들이 많은 자에게 말라꼬 구원자가 필요하겠냐 말이죠.
그래서 너희 귀에 응했다고 하니까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좋고 좋은 구원장치가 새때까리인데
말라꼬 예수님의 희년 선포에 귀를 기울이겠냐 말이죠.
예수님이 총신 나왔겠냐 말이죠?
어디서 굴러온 뼛다귀 인데?
아 요셉의 아들이지 참!!
그 정도로 구원의 장치가 많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다 허물어 버리시면서 헛되다고 하신다 말이죠.
그럼 다윗은 이런 구원의 장치들 속에 아예 풍덩 잠겨 살면서
왜 애굽이 망한지가 언젠데
그 출애굽 사건을 왜 다시 언급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런 구원 장치들만 가득한
껍데기는 화려한데 정작 알맹이는 없는
그래서 이 구원장치가 헛되다 라고
다윗 자신을 포로된자 눈먼자 갇힌자로써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애굽 왕을 강퍅케 해서 여호와를 부르짖도록 했던 자작극의 여호와의 일하심처럼
지금 다윗은 자신이 처해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소위 요즘으로 치면 교회환경속에서
구원의 장치 속에서 여기서 부르짖는 겁니다.
주여 원수들로부터 건져주세요 라고
그럼 그 원수들은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고 무엇을 주장하느냐?
바로 이런 구원의 장치들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둥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고
드디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사울왕이
드디어 다윗이 범죄했다고 좋아라 하는 것처럼
바로 그런 사울왕의 시선에서의 구원장치들을 해석하는 시선이
사실상 이스라엘 전체에 깔려 있는 가운데
이 시편 108편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야 이거 진짜 살벌하기 짝이 없는 찬양이자
동시에
미래 완료를 미리 앞당겨 부르는 것이기에
지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조차도 날라가 버려도 상관 없을 정도로
미래완료가 소급되어 성취 되었다는 선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찬양은 미래를 땡겨버리는 겁니다.
심판을 미리 당기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당긴다 말이죠.
오죽하면 느닷없이 모세가 변화산에서 나타나
예수님 빨리 죽어 주세요.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을 미리 장사 치르는 향유를 붓는다 말이죠.
왜? 부활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이 인간의 구원이 헛됨을 보여주는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고자 미리 장사를 치른다 말이죠.
이것보다 비윤리적인게 어디있냐 말이죠.
오죽하면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자에게 안준다고 제자들이 버럭 화를 낸다 말이죠.
명예살인할 판국이다 말이죠.
명예살인보다 더 나은 살인이 미리 장사를 치르는 향유부은 여인의 행동을
복음이 증거되는 곳 마다 기념케 한다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은 미래를 미리 땡기는 겁니다.
죽음을 미리 확 땡긴다 말이죠.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 이삭 바치기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는 향유붓는 여인,
기생 라합의 거짓말 곧 나라와 민족과 가족을 배신하고 출애굽사건으로 간담이 녹은 여인
십자가 사건에 간담이 녹아 어찌할꼬 형제들아 어찌할꼬 어찌할꼬 했던 여인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새번역)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개역)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또 마지막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가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한 사건입니다. 그것도 3년 6개월 동안 말이죠.
이런 이상한 행동들은 참선지자 특히 에스겔 보세요 옆으로 몇 년 또 뒤짚어서 반대편 옆으로 몇 년.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 않고 이런 이상한 행동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가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내지 않자 저주를 하신것처럼 말이죠.
결국 행함이 있는 믿음은 끝을 미리/ 종말을 미리/ 심판을/ 십자가의 저주를/ 미리 확 앞당겨버리는 행동들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미래를 확 땡겨서 빌려와서 과거를 바꾸는 식입니다. 현재도 과거가 구성한 것이기에 과거이지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는 미래와 단절되어 있고 과거만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과거는 의문의 반복입니다.
미래만이 또렷한 밝히 보이는 실상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말이죠.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이 그래서 죽었다 말이죠. 과거에 매인 인간에 의해서 즉 번제와 제사를 반복하는 의문을 반복하는 자들에게 의해 죽임을 당한
미래를 사는 믿음으로 사는 자요 믿음으로 실상을 보이지 않는 완료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래서 인애와 자비로만 사는 자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이것이 인애와 자비인 것이고
번제와 제사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 108편은 새벽을 깨우듯이 비파를 깨우듯이
새벽아 새벽아 빨리 일어나라
예수님 예수님 빨리 일어나세요
풍랑이 우리를 삼킬려고 합니다.
비파야 빨리 승리가를 부르지 않고 뭐하니
빨리 뿌뿌뿌 승전가를 울려라 뭐하고 있니 잠에서 빨리 꺠렴 라고
새벽에 또는 아침에 는 바로 이런 주의 인자하심이
인애와 자비를 어서 깨라고
한영애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라는 노래와 족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새벽을 깨운다 말이죠.
새벽을 깨우리라로 인기를 얻은 김진홍목사와 정반대 개념이다 말이죠.
오히려 그 목사는 새벽 조차도 구원장치로 만들려고 한다 말이죠.
오히려 그 반대인데 말입니다.
그런 구원 장치를 깨부수는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보여주는데
오해려 그런 종교꾼들은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외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는 사람을 구원해 볼려고 안달이 나 있다 말이죠. 그런 의문의 제사를 반복한다 말죠. 최근에는 22억 횡령 고발사건에 휘말려 있던데 역시 돈에는 장사 없다 말이죠.
본인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렸어요.
뭐 또 뭐더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이 새벽을 민주주의 로 보고 있던데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독재는 닭모가지를 비틀을 필요가 없이
닭이 그렇게 말한 죄인을 위해서 세 번 울어야 오는 새벽이다 말이죠.
그는 역시나 새벽을 구원장치인 민주주의로 보고 있지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독재로 못보고 있다 말이죠.
자기가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의문의 반복인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구원장치이다는 거죠.
그런 민주주의는 헛된 것이지 실상이 아닙니다.
촛불집회를 보면 웃껴요 그 허구에 빠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다 종교성에 빠뜨려 죽이고 있다 말이죠.
세월호가 따로 없어요. 아이들을 다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있다 말이죠.
그래놓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 부모를 보면
우상에 빠진 자들이다 말이죠. 사람의 구원이 헛된 것을 모르고
그 허구 허상에 빠졌다 말이죠. 민주주의라는 허구 허상 말입니다.
즉 바로 그런 구원장치를 모조리 다 부셔버린 상태에서 다윗은 새벽을 노래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가운데서 다시 되찾는
앞의 글들에서 이것이 부활이다는 의미로 이야기 했고요
즉 부활이란 미래를 땡겨 버리는 겁니다. 미래 표절
부활 아닌 것은 과거만을 표절하는 거죠.
생명 아닌 것은 과거의 연장이고 말이죠.
그리고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은
바로 이 미래완료를 미리 땡기는 아침을 새벽을 미리 땡기고자
싸움붙이는 십자가 사건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불의함(십자가)에 충성하는 행함이다 말이죠.
이런 애굽과 같은 초강대국 곧 원수들에게 싸움을 붙이시는 붙이심의 전쟁
부지런히 부지런히 원수들에게 다윗을 붙이신다는 거죠.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 말이죠.
그런데 안 죽는
죽은자 같으나 살아 있는, 죽어도 다시 사는 자이다 말이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특히 오늘 나온 민족들은
(시 108:6, 개역)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시 108:7, 개역)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시 108:8, 개역)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시 108:9, 개역)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곧 땅들은 출애굽때에 홍해를 건너고 너무 기뻐서 저절로 찬양이 나오는데 미리암이 화답송까지 노래부르던 그 찬양내용에 나오는 민족들과 땅이다 말이죠.
(출 15: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 15:11, 개역)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2, 개역)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출 15:13, 개역)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 15:14, 개역)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출 15:15, 개역)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6, 개역)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출 15:17, 개역)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출 15:18, 개역)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 15:19, 개역)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출 15:20, 개역)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21, 개역)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출 15:1, 새번역) 『그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를 불러서 주님을 찬양하였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출 15:2, 새번역)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바로 이런 애굽의 사상 곧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시스템 민족조직이라는
구원장치들인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나타내고자
그들 보란 듯이
그들 보랍시고
펼쳐지는 구원이기에
구원을 깨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성전을 깨는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는 참성전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다윗은 이런 주변민족이라는 우상숭배자를 의도적으로 대조를 합니다.
그때의 출애굽 사건이 지금 펼쳐지는데 있어서 그 우상숭배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듯이
이스라엘 보란 듯이 펼쳐지는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교회 속의 교화
계시록 일곱교회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거짓선지자 이세벨을 쫏지 않는 교회 속의 교회
거짓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쫏지 않는 교회 속의 교회
그러니 다윗이 왜 이런 이야기를 왜 할까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실상이 아니라 허구이다는 겁니다
우리 또한 눈에 보이는 교회는 허구로 봐야 합니다.
교회 가지 말라
교회 짖지 말라 허구를 왜 짖냐 허물자가 아니라
허물어 버리면 헛되다 라는 것이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발가벗고 다니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러니 형식을 없애려고 하는게 아니라
이 허구라는 알려주시고자 하는 교육자료라고 보자 말이죠.
그러니 헛되기에 의미를 두지 말자 라는 겁니다.
실상은 따로 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참성전이 있다 라는 것에
기뻐하자 말이죠.
그래야 목사도 교인들도 교회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목사가 교회에 미친놈들이 많아요
그런 목사가 교인들 다 배려놓는데 교회에 미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말이죠.
곧 사람의 구원 장치에 미치도록 만드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번제와 제사에 미치도록 만드는 겁니다.
곧 돈에 미치도록 만든다 말이죠
가인의 제사는 불안하기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사랑이 흘러 흘러 넘쳐서가 아니라
불쌍히 여겨주심에
많이 탕감받아서 많이 사랑해서가 아닌
불안하기 때문에 뭘 자꾸 바칠려고 한다 말이죠.
그 의문을 무슨수로 마치게 하냐 말이죠.
무슨 수로 그 의문을 찢어버립니까?
그 배고픔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밤새도록 이어져서
새벽이 오지 않는겁니다.
아침에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가 오지 않는 겁니다.
새벽이 깨어나지 않는 겁니다.
새벽이 깨어나야 인자하심으로 오늘도 해가 뜨듯이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그런 의문의 법에 반복을 하는 짖을 밑도 끝이 없이 해도
해가 떴다는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새벽이 깨어났다는 자체가 말이죠.
그 새벽이
성탄절이라는 구원의 장치를 깨뜨리면서 새벽별로써 예수님이 오시는 겁니다.
뭘 해도 헛되고 사람의 구원이 헛되게 하시는
그 정도로 또렷하다는 것을 쳐다봤기에
아무리 이 땅이 지멋대로 돌아가도
이 땅의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신나게 미래를 누리면서 사는 겁니다.
우리의 과거
곧 죄를 무슨 수로 사함받고 고쳐주시겠습니까?
미래완료인 새벽이 고쳐주십니다.
이 새벽이라는 미래를 미리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허상으로 보고
실상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만을 보고 다윗은 노래 부릅니다.
여호와가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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