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치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즐거운 어미가 되는가? (시편 113편)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는 예수님의 족보(세계)
(시 113:9, 개역)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 113: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13:2, 개역)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3, 개역)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4, 개역)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시 113:5,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시 113:6, 개역)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시 113:7, 개역)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시 113:8, 개역)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시 113:9, 개역)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히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1, 새번역)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비록 그는 늙고,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그는 생식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아브라함)가,……'』
(히 11:12, 새번역)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히 11:13,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개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29, 새번역) 『보아라,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 하고 사람들이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7,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 54:1』
(사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4:1, 새번역)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는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를 높여라.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믿음의 세계는 말도 안되는 소리만을 하고 있습니다.
참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인물 의미이지
인간의 종교심이라는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즉 다른 이의 이름으로써는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벌어지는 일이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집에서는
잉태치 못하는 여자가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유럽의 어떤 성당 아마 베드로 성당인줄로 아는데
그 베드로 성당 안의 베드로 돌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 돌상의 베드로 엄지발가락이 사람들이 그 기념비를 지나가면서
입맞춤을 하다 보니 다 달아서 엄지발가락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몰래 발가락을 갈아서 아이를 못 낳는 불임여성들이
그것을 갈아 어떻게? 물에 타서 마셨는지 몰라도
그런 이야기도 떠 돌더라 말이죠.
이것은 어느 무속 신앙에서든 다 있는 이야기입니다.
특별새벽기도와 다를 바 없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 불임여성들이 아이를 가질때에
이왕 뻔뻔 스러운 것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가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갈아 마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모르지요 지독한 여성이면 그런 것 까지 시도하겠지요.
그런데 아이가 아니라
본인 불임여성 본인이 아예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기를 과연 바랄까 말이죠.
그건 보통 뻔뻔스러움을 넘어서는 초과잉적인 뻔뻔이겠지요.
그저 한 가정의 여성으로써 닥친 문제인
불임만을 해결하기 위해
새벽기도를 드린다는지 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아예 당돌하게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 말이죠.
더 뻔뻔하게
기도하는 자신이 아예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말이죠.
그저 자기 코 앞에 닥친 문제만을 해결하기 바랄 뿐이지요.
그게 인간의 기도입니다만 성령의 기도는 아예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니 그런 문제는 오늘 말씀과는 무관한 겁니다.
인간의 찬양 말이죠.
그러나 성령의 기도 성령의 탄식 성령의 찬양이라면 오늘 말씀과 연결 됩니다.
해뜨는데 부터 해지는데 까지 주 이름 찬양 받으리
랄랄라 할렐루야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주 이름 찬양해
이제 부터 영원까지 주 이름을 찬송 할지로다
얼마나 기쁜 노래냐 말이죠.
하루종일 즐거움을 누릴 정도로 주의 이름이 그렇게 좋다 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좋으냐?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주의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창조사건을 누릴 정도로 말이죠.
여성이 잉태함으로써 창조자의 기쁨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다 잊어버릴정도로 생명 탄생의 기쁨을 창조자의 기쁨처처럼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해산함으로써 여자는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그럼 유관하게 만들고자 뻔뻔하게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기 위한 불임여성이 되자 라고 주장하면 되겠네?
먼저 불임 여성 아무나 못합니다.
잃어버림 당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잃어버림 안 당하는 인생이 되고파서
빨리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벌리는 것이 그런 짖 아니냐 말이죠.
결국 제가 말하고픈 것은
불임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믿음의 세계이다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잃어버림과 되찾음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 동원이 되는 것이지
고아 과부 나그네 그 자체는
즉 죄인이라는 조건은 인간이 그 어떤 의미에서도 맞출수가 없다는 겁니다.
잃어버림 자체도 불가능하지만 되찾음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이중불가능성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에서 이스라엘 많은 과부 중에서 도 아니요
이방여자 많은 과부 중에서도 아니요.
오로지 단 한 사람 이방 여자 과부 중에 사렙다 과부 여인 한 과부에게만
믿음이 나타났고
이스라엘 많은 문둥병자 에게 나타남도 아니요.
이방인의 많은 문둥병자 에게 나타남도 아니요
오로지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단 한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만 복음이 나타난 겁니다.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러니 과부 라는 조건을 갖추었다 손 치더라도
무관 합니다.
불임여성이라는 조건이
또는 죄인이라는 조건이 구원자의 등장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서로 죄인될려고
서로가 과부 될려고
서로가 불임여성 될려고 하겠지요.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이것 때문에 인간들이 분노하는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 곧 사단의 회가 그러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인 교회와 성당이 그러하지요.
아무리 조건을 갖추고자 해도 안 받아주는 불편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 쪽에서 갖출이 있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우연물입니다.
즉 예수님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상으로써의 과부 고아 죄인 불임여성인데
예수님과 무관하게 자기 자력으로 과부 고아 죄인 불임여성을 만들어 버리면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 오히려 거부당하는 식으로써
불임여성을 주님 쪽에서 세우게 되니
불임여성과 가짜 불임여성의 충돌이 벌어지게 되겠지요.
그러니 아예 그런 조건 갖출 생각하지 마시라 말입니다.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그래서 그 조건 갖추고자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킨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이 불임여성이 되어버린 겁니다. 한나처럼 말이죠.
그리고 브린나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식의 어미는 슬피 울게 되고
예수님은 죽임을 당해 아예 자신의 자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녀로 인해 즐거운 어미가 되는 겁니다.
결국 이런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죄인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구원자의 증상물이기에 구원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환자유지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환자가 중요해서 환자만을 부르러 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환자를 의사라는 기능의 증상물로써 언급하는 겁니다.
결국 의사되신 예수님은
왜 이런 증상물을 말씀하시는가?
바로 믿음의 세계는 곧 부활의 세계이자 십자가의 피 능력의 세계는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3일이라는 간극을 말하고 함이다는 겁니다.
이것 외에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시편 기자는 113편에서 여호와 같은 이가 누구랴 라고 인물을 언급하는 겁니다.
(시 113:5,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시 113:6, 개역)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시 113:7, 개역)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여호와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 스스로 낮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생한 증상물이
잉태치 못한 자가 즐거운 어미가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스스로 낮추심이 뭐냐 말이죠.
흔히 스스로 낮추심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희생의 의미로 해석하던데
그런 희생은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겁니다.
진짜 충분히 사랑이다면 희생이 아니라 에로스 곧 폭력적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희생은 두 패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는 책을 쓴 존 스토트 이던가요?
그 동안의 자신의 신학 논리에 의하면 자신의 누나가 지옥에 간 것이 부정할 수 없게 되니
결국 그 논리를 바꿔 버립니다.
바꾸어 버리다 보니 지옥을 없애 버리는 아주 솔직하기 짝이 없는 발상을 해버립니다.
지옥을 없애 버리면 적어도 예수를 믿지 않은 누나였지만
지옥에서 고통 받지는 않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누나를 더욱더 지옥의 더 고통스러움 속에 집어넣는 것 아니냐 말이죠.
아예 누나를 지옥에 보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 말이죠.
자신의 선함이 곧 악함인줄 모르는 겁니다.
오늘날 촛불 시위자들처럼 말이죠.
자신을 위해 그렇게 고생한 누나
아니면 자신이 너무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희생의 마음으로 기도한 그 기도가 아까워서
자신의 착한 마음이 선한 마음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까워서
지옥 까지 없애 버리는 그 기특하기 짝이 없는 마음
과거 미국의 유명 목사들이 갑자기 말빨이 강할때는 지옥을 그렇게 강조해서
협박성으로 예수 믿음을 강조하더니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니까
다들 지옥을 없애 버리는
더 이상 괴팍한 늙은이가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니
이게 무슨 지옥이 자기 마음대로 있다가 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자기 마음대로이더라 말이죠.
이 모든 것이 희생 개념으로써 봐서 그렇다 말이죠.
희생을 생각하면 할수록 폭력적인 모습을 다 제거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깡패짖입니다.
진짜 폭력이야 말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제대로 또렷하고 명료하게 갈라 버립니다.
갈라야 두 패로 갈라야 비로소 명확하게 되는데
두 패로 가르지 않게 되면 모호해져 버리는 겁니다.
모호한 것처럼 의문의 반복이 어디있냐 말이죠.
뭐 하나 속시원한 것 없이
답답하고
했던 것 또 하고 했던 것 또 하고
찝찝하고
뭐 하나 명확한 것이 없으면
과연 소화가 되겠냐 말이죠.
밝히 보이는 것 하나 없이 흐릿하게 보이면
얼마나 답답하냐 말이죠.
이게 바로 인간이다는 겁니다.
희생이라는 아가페로 대하겠다는 인간의 트릭입니다.
사랑이라는 에로스는 아예 인간에게 기대 조차도 하지않습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다 퍼줍니다.
(시 113:4, 개역)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시 113:5,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시 113:6, 개역)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시 113:7, 개역)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본문에 높다와 낮추다가 대조를 이룹니다.
즉 높다는 것이 그냥 높음에 머무르는 것은 높음이 아닙니다.
진짜 높은 초과잉적 높음은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인해서 높음이 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낮아질수 없는 높음은 높음이 아니다는 거죠.
이것은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그 어떤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조건을 갖추어라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 자체가 모든 인간을 다 낮추어버리고서
그 낮아짐에 뛰어들어서 높여버리는 겁니다.
즉 시편 123편 글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거기서도 긍휼과 멸시가 한 세트로 등장함에 있어서
긍휼이란 결국 잃어버림과 되찾음을 보여주는 주님 쪽에서의 의미이지
인간 쪽에서 갖출수가 없는 겁니다.
사랑은 인간 쪽에서 아예 없습니다.
율법은 사랑을 요구하지
지킴을 요구하지 않듯이
사랑이 없기에 죄 아래 갇혀 버린 자신을 발견케 하는 몽학선생인 겁니다.
결국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가 아니면 이 죄 아래 갇혀버린 자를
이 가난한 자를 높이시는 길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사랑이기에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까지 사랑하시느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마귀가 반발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마귀는 꿈쩍도 하지 않지요.
마귀가 유일하게 반발하는 짖만 골라서 하는 것은
에로스 사랑인 십자가 사랑의 폭력성 뿐입니다.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지
사랑은 죽음 같아서 시샘이 전쟁 같다고 합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아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아 8:6, 킹흠정)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무덤같이 잔인하니 그것의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아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아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아 8:6, 현대어)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아,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시새움 곧 시샘, 시기, 질투가 여호와의 불 같다 말이죠.
이게 무슨 놈의 아가페 입니까? 에로스 이지
아가페라고 주장하는 놈들은 유대인 곧 사단의 회들인 거지요.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트릭입니다.
부모 얼굴에 먹칠 하지 말라는
오이디푸스를 강요하는 거지요.
부모의 정치입니다.
국가도 종교도 그거 따라하는 희생강요인거죠.
강요된 선택
에로스는 오히려 그런 법에 의하면 불법자인 겁니다.
율법을 어김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높은 하늘 영광 버리고
죄인으로 옴에 있어서 이미 불법이고
모든 인간들이 그런 알수 없는 사랑에 속아서
(높은줄 알았는데 스스로 낮아져 버리니 다들 오해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못 알아먹도록 만든 것이 불법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불법 아니면 무슨 수로 마귀의 손에서 건져냅니까?
사랑이야 말로 법을 어기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스스로 낮아지지 않고서는
높아질 인간이 없는 겁니다.
십자가 상의 두 강도에게 찾아와서
감히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외치는 강도를
무슨 수로 높은 낙원에 집어넣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그 자리와 왔다는
그 자리에서 만났다는 그 자체가
그 십자가의 자리 자체가 바로 법을 뛰어넘는 사랑이다는 것을 봐 버렸기에
감히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발언을 한 쪽 강도는 서슴치 않고 내뱉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그 고백에 다른 한 쪽 강도가 비웃다가
예수님의 맞짱구 발언에 비로소 돌아버리는 겁니다.
오냐 오늘 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그야말로 미친소리를 옆에 듣고 있는 강도는
죽어가면서 까지 포기해 버린 모든 마음을 비로소 풀가동하면서
이 두 인물의 신랑과 신부됨에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겁니다.
모세와 구스 여인의 결혼에 반대하듯이 말이죠.
얼마나 또렷한 온유였으면
사랑이였으면 반발 하겠습니까?
아가페는 반발 안합니다.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세 번 시험 할 때
아가페의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도리어 마귀가 요청하는데
주님은 시험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랑 신부의 사랑이 아니면 마귀가 반발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주님은 자신의 잃어버린 신부를 찾고자 오신 겁니다.
오죽하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면서 찾아낸 신부이니 말이죠.
스스로 낮추시면서 까지 말이죠.
결국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 흘리심 때문에
잉테치 못하는 자가 즐거운 어미가 됨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혈통으로써의 자녀낳음이 아니라
아예 본인이 혈과 육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
불임 여성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낳은 자식이 되는 겁니다.
불가능한 자식으로써 우리는 태어난 겁니다.
결국 그렇게 태어난 자식이기에
믿음으로 자녀를 놓는 겁니다.
혈과 육으로 낳은 자식을 낳기 위한게 아니라 말이죠.
이것이 영광입니다.
육에서 육으로는 영광이 아닙니다.
잃어버림을 통해서 되찾는
주의 머리 드심
주의 뿔의 영원히 드심
주의 의를 들리우심 때문에
그 증상으로써 우리는 불임여성처럼 예수님처럼
믿음의 세계인 죽었다가 다시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세계를
아무것도 한 것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펼치시는 영광되심 곧 자기 영광의 자작극인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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