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이 변하여 못이 된 출애굽 구원잔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혼인잔치 (시편 114편)
바다야! 네가 도망침은 어떤 이유니?
(시 114:1, 개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시 114:2, 개역)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3, 개역)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시 114:4, 개역)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
(시 114:5, 개역)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시 114:6, 개역) 『너희 산들아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 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시 114:7, 개역)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시 114:8, 개역)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요 2:1, 개역)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개역)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개역)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 2:5, 개역)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 2:6, 개역)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7,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요 2:8, 개역)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요 2:9, 개역)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개역)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 2:11, 개역)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앞의 글에서 긍휼과 멸시가 한 세트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형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었고
동생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
이 에서와 야곱은 약속을 말하기 위한 한 세트로 등장하는 겁니다.
시편에서 왜 다윗은 출애굽을 왜 그렇게도 강조하는가?
곧 약속을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어린양의 피를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그것은 애굽과 이스라엘이 한 세트를 이룹니다.
눈치 채셨나요?
시편 114편에서 한 세트를 이루는 사물들이 등장합니다.
애굽과 이스라엘
반석과 우물 연못
차돌과 샘물입니다.
이것이 한 세트로써 동원이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딱딱한 애굽으로부터 나와야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 누울자리 보고 나오는게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에서 탈출하면 무조건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조건 출애굽을 외치는 겁니다.
그런데 빠져나올 애굽도 이제는 없다고 했습니다.
애굽이 없으니 탈출이라는 의미가 소용이 없는 무의미한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것에 목숨 건냥 외치고 있습니다.
누울자리 보고 나오는게 아니라 무조건 나오고 보니
그 이스라엘이 애굽이였던 겁니다.
그러니 다윗의 시선은 미래완료의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본 시선이였던 겁니다.
그 시선을 예수님이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되받아서 공명화 시키듯이
그 다윗의 시선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서
출애굽하자고 출이스라엘 하자고 외치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출교회 하자고
출 기독교 하자고
그럼 따지지요
기독교에서 나오면 어느 종교로 가냐고
누울 자리 있냐고
기독교에서 무조건 빠져 나와 보세요
그런 소리 나오나
이것이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인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기독교는 있어줘야 합니다.
복음과의 차이를 위해서 말이죠.
이스라엘을 말하기 위해서는 애굽을 계속해서 언급하는 이유인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애굽이 없는데도 자꾸 자꾸 미친 듯이 출애굽을 자꾸 이야기 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들 짜증내는 겁니다.
마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자꾸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외치는 예수님처럼 말이죠.
자 계속해서 한 세트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하나님 자신을 말하기 위해서 마귀를 동원하십니다.
그 마귀가 활동하는 무대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럼 그 인간으로부터 출인간 하자고 외치는 자가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자꾸 존재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존재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바로 기능인 이름입니다.
존재 없이도 활동하는 이름 말이죠.
그 이름이 바로 예수 라는 이름이요
이 이름은 인간과 한 세트를 구성하는 겁니다.
제가 마치 영지주의처럼 이분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분법 자체가 존재와 존재로 대립구조를 이루는 겁니다.
선의 존재와 악의 존재의 대립
그러나 그것은 둘다 존재이지 기능이 아닙니다.
존재 이전의 이름이 아니다는 거죠.
앞의 글에서 존스토트라는 신학자가
믿지 않아서 지옥갈 누나 때문에
지옥을 없애 버리듯이
존재는 언제든지 믿고픈 대로 바꾸어 버리는 겁니다.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인거죠.
그런 존재의 믿음은 믿고픈 것만 믿는 겁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듯이 말이죠.
그러나 기능은 존재 이전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기능이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약속이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된 약속인 겁니다.
아무리 기능이 이렇다 하더라도
존재는 이것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거부하는 막강한 적개심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구체화 시킨 구조가 바로 애굽입니다. 존재 입니다.
그런데 기능은 바로 애굽이라는 존재에서 딱딱한 존재에서 말랑 말랑한 기능이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 딱딱함이 허물어 지는 거죠.
결국 이스라엘은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 인 겁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이름만 붙잡고 나아가는 겁니다.
오늘 시편 114편이 상당히 시적인 의미로써
학문에서 가장 뛰어난 학문이 시학입니다.
철학 보다 우위에 두는 시학 노래 시문학 이다 말이죠.
(시 114:3, 새번역) 『바다는 그들을 보고 도망쳤고, 요단 강은 뒤로 물러났으며,』
(시 114:4, 새번역) 『산들은 숫양처럼 뛰놀고 언덕들도 새끼양처럼 뛰놀았다.』
(시 114:5, 새번역) 『바다야, 너는 어찌하여 도망을 쳤느냐? 요단 강아, 너는 어찌하여 뒤로 물러났느냐?』
(시 114:6, 새번역) 『산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숫양처럼 뛰놀았느냐? 언덕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새끼양처럼 뛰놀았느냐?』
(시 114:7, 새번역) 『온 땅아,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라.』
바다가 도망쳤다고 표현하고 있고
요단강이 뒤로 물러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 취급하듯이 발과 다리가 있는냥 도망치고 뒤로 물러갔다고 합니다.
산들은 뛰놀고 누구처럼? 숫양처럼
언덕들도 뛰놀고 누구처럼? 새끼 양처럼
이제는 아예 바다가 귀가 있는냥 호명하듯이 부릅니다.
바다야 라고
누구 누구야 라고 불러요 불러
바다야 내가 궁금한게 있는데
아까 바다는 이스라엘을 보고 도망쳤다고 했는데
바다야 너무 너무 궁금해 왜 너는 도망을 쳤니?
요즘 인기 있는 미우새 수홍이 어머니 말투로
바다야 너는 왜 저럴깡 왜 도망을 쳤을깡?
바다 뿐만 아니죠
요단강아 너는 왜 뒤로 물러갔을까앙?
가끔 교회 아이들 중에 부모가 이름을 요나단 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애들이 있던데
줄여서 요단으로 말이죠.
요단아 너는 왜 뒤로 물러 갔을깡?
결국 여기 바다와 강을 강한 존재로 다들 우상숭배하기 할 정도로
인간은 자기 존재 보다 쎄다고 여길정도로 강하다 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런 강한 신적인 존재 범신론적인 자연이라는 범접할수 없는 영역이
졸지에 웃싸스러울 정도로 도망치듯이 도망칠 때
개그콘서트 보듯이 여길정도로 황당할 꺼다 말이죠.
도대체 이스라엘이 뭔데 그 이스라엘의 분절이 유다가 뭔데
딱딱한 애굽에서 나오고
차돌에서 샘물 나오고
반석에서 못이 나오듯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느냐 말이죠.
강한 신적 존재
국가라는 짐승이라는 존재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름 뿐인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이 나오는데
강한 신적 존재가 바다 강 뿐만 아니라 또 나오죠.
(시 114:6, 새번역) 『산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숫양처럼 뛰놀았느냐? 언덕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새끼양처럼 뛰놀았느냐?』
산들아 너는 왜 뛰놀았을깡?
언덕들아 너희는 어찌 뛰었을깡?
즐거워서 뛰노는게 아니라
디스코 팡팡 처럼 땅이 벌벌 떨어서 들썩 들썩 뛰어놀래서 그렇다 말이죠.
주로 우상숭배하는 산당들이 산들에 언덕에 세워지잖아요.
이것은 애굽의 피라미드처럼 그들이 벌벌벌 떨었다는 표현이다 말이죠.
그 피라미드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게도 인간들이 강하게 세워고 싶어서
강한 돌들로 세운 탑이요 바벨탑이요 신전이요 구원의 탑인 부활의 탑인 하늘의 문을
언어 하나만 톡 하고 건드리니까
갑자기 다 흩어져 버리는 겁니다.
(창 11:1, 개역)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6,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 11:7, 개역)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9, 개역)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왜 흩어져버렸을깡?
왜 도망쳤을깡? 왜 뛰놀랐을깡?
왜 와르르 그 강한 존재라고 존재성을 부여한 그 부활의 탑들이 다 벌벌떨면서 다 무너졌을깡?
(시 114:7, 새번역) 『온 땅아,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라.』
그것은 바로 야곱의 하나님
누구 누구의 하나님 이라는
이름에 의해
존재는 이름으로 인해 곧 기능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는 겁니다.
존재 보다 앞선 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이것이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니 존재(육)와 이름(성령-기능)이 한 세트를 이루듯이
다윗은 이 애굽을 언급함으로써
바다를 요단강을 산들을 언덕들을
반석을 차돌을 언급함으로써
거기에서부터 빠져나오는 이름인 기능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빠져나오듯이
약속을 언급하는 겁니다.
제가 중학교를 불교 재단인 사립학교를 배치당해 다녔는데
1주일에 한번씩 종교수업이 있는데
불교 중에 밀교라는 교리인데
그냥 애들이 떠드는 시간인데 가끔 선생이 나타나서 수업을 해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형상을 갖추지 않는 마음으로 바로 추구한다고 밀교라고 하더라구요
불교 자체가 종교가 아니고
왜냐? 신을 안 믿으니까 오히려 신을 해체한 학문이니까
그 중에 밀교는 부처의 형상을 아예 없애버리니까 아예 불상 자체가 없다 말이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결국 존재의 형상이 없다고 해서
곧 마음으로 추구한다고 해서
과연 비존재인가?
인간 자체가 존재에서 벗어난적이 없는
아무리 존재 밖에서 추구한다고 우겨도
무자아를 추구해도
그 역시 자아라는 존재 속에서 추구하다 보니까
존재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비존재나 존재 밖에서 보는 시선 또는 기능을 추구한다고 우겨도
그렇게 상상력을 펼쳐보여도
그 역시나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으니까
언제든지 존재로 되돌아 오는 겁니다.
그러니 자력으로 인해 존재가 기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약속이 허락한 적이 없거든요.
유일하게 이스라엘만 허락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에게만 부었기 때문이다 말이죠.
이 이스라엘로부터 깨어짐을 당하는 차돌 반석 바다 요단강 산들 언덕들이라는 존재와 다를바 없는 겁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이스라엘이 등장헤서
나 라는 존재를 깨뜨려 주지 않는 이상
아무리 학문으로 또는 종교로 백날 해 봐도
의문의 제사만 반복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시는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자의 살과 피를 존재적으로 먹는 인간들만 겨우 나타날 뿐이지
성령을 받는 자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존재와 존재의 상관됨 뿐이지
관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죠.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마치 주인과 가정부의 만남 입니다.
그러나 기능은 남편과 아내의 만남인 신랑과 신부의 만남인 결혼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결혼이 졸지에 존재가 되어버리니까
이스라엘이 졸지에 애굽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관계성이 아니라
존재가 되어버리니까 자꾸 성전에서 두 사람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 처럼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 외에는 할 줄 모르는 겁니다.
기능은 오히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치는 세리에게서 나온다 말이죠.
앞의 글 긍휼과 멸시가 한 세트를 구성하는데
긍휼은 기능적으로 나타나고
멸시는 존재적으로 주장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조건과 조건의 만남이 존재적인 결혼이 되어버린 거죠.
그것을 깨는 것이 천국혼인잔치 입니다.
예수님의 첫 표적이 가나혼인잔치에서의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사건 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변사또가 잔치를 베풀때에 이도령이 시 한편을 읊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바다야 왜 너는 어찌하여 도망을 쳤니?
강들아 왜 너는 또 뒤로 물러났을깡?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이 벌벌벌 떨면서 다들 도망을 치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 표적이다는 겁니다.
누가 생각 납니까?
맞습니다.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모세가 표적을 행할때의 모습이다 말이죠.
다윗이 시편 114편을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유대인이 있는 어떤 곳이든 이 표적을 행하신다는 자체가
이제 출 인간 출 애굽 출 이스라엘 출 갈릴리 출 하자 액소더스 하자 라는
구원 잔치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혼인 잔치가
존재와 존재의 결혼인 혼인 잔치가
졸지에 천국 잔치인 아들을 위해 임금이 베푸는 혼인잔치로써
그 기능을
그 이름을
딱딱한 차돌에서 딱딱한 반석에서 물을 내듯이
다시 분절하여
그 물에서 다시 포도주로 변하는 기능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이 벌리는 혼인잔치인 구원잔치인 구원전쟁이다 말이죠.
존재가 벌리는 혼인잔치가 아니라 말이죠.
다윗은 아무도 전쟁하지 않는 그 전쟁이 종식이 된 평화로운 가운데서
애굽도 없고
원수도 없는데
왜 자꾸 출애굽을 언급하고
왜 자꾸 원수를 언급하고
자꾸 탈출하자 빠져나오자 라고
원수 갚아 달라고 자꾸 외치고
자기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서 빠져나오자고
누울자리도 안 보고 자꾸 출애굽을 외친다는 자체가
이미 망한 것을 봐 버렸고 (애굽화 된 이스라엘 = 존재론적인 이스라엘)
이미 승리한 완료를 봐버렸기에 (다윗의 집의 보좌인 다윗의 자손 = 곧 이름이라는 기능, 누구 누구의 하나님처럼 다윗의 자손)
다윗 지 혼자
자기 혼자 라고 표현할려고 하니까 왠지 다윗이 강해 보이니까
다윗을 무시하는 무능한 표현인 지 혼자 그대로 표현해 봅니다 ㅋㅋㅋ
다윗 지 혼자 고래 고래 외치는 겁니다. 출애굽 하자고
지 혼자만 심각해요
딴 사람은 관심도 없다 말이죠.
애굽이 있어야 뭐 귀를 기울일만 하죠
그런데 애굽도 없고
전쟁도 없고
주변의 국가도 가만히 있고
아니 왜 멀쩡한 하늘에 날벼락을 왜 자꾸 언급하냐 말이죠.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엘리야의 기도처럼 그런 행함이 있는 믿음처럼
다윗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무능한 외침을 혼자 외치는 겁니다.
바다야 왜 너는 도망쳤을까앙?
아니 언제적 이야기냐 말이죠.
그런데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다윗 지 혼자 실시간으로, 실제상황으로, 누리면서 지 혼자 외치는 겁니다.
야들아 출애굽하자 라고 혼자 외친다 말이죠.
니나 가라 하와이 ~~~
이 외침을
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외침을 참선지자들은 이어 받아 외치고
왜? 참선지자는 기능이고
반대로 이 비정상적인 말도 안되는 외침을
거짓선지자는 존재가 든든하게 있으니까 귀 기울이지 않을뿐더러
이런 외침을 이어받은 참선지자들을 백성의 여론을 모아 힘으로 막고 죽이기 까지 하더라 말이죠.
왜? 거짓선지자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만 사수하면 된다 말이죠.
아니 누가 든든하고 딱딱한 존재가 있는 판국에
저런 말도 안되는 기능의 외침을
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겠냐 말이죠.
광야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도 듣지도 쳐다보지도 않는 기능입니다.
광야의 기능은 이것 뿐입니다.
참선지자는 그래서 광야의 모습입니다.
들으라고 외치는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듣지 말라고 외치는 자요
광야의 소리
곧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왜? 기능이 그렇다 말아죠.
존재면 말이 달라지죠
존재의 함성은 어쩔수 없이 듣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리고 존재는 광야에서 안 외칩니다.
도시에서, 대로에서, 시장에서 외치지 ~~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다윗이 지금 외치는 외침을
다윗은 딴 사람들이 들으라고 외치는 소리가 아닌 겁니다.
듣지 못하도록
쳐다보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외침이다 말이죠.
그럴꺼 같으면 왜 외치냐 말이죠.
그러니 기능입니다.
곧 이름 입니다.
미래완료를 본 사람만 그냥 모여라 라는 식입니다.
교회란 존재가 아니기에 기능이기에 말이죠.
주의 이름으로 모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 땅의 이스라엘국가 라는 존재만 있으면 족하지?
그게 바로 거짓선지자의 존재 사수 이스라엘 사수죠.
그러나 참선지자는
우리는 그런 존재 필요 없어!
다윗의 가문의 보좌가 떠버렸거든요.
그 기능을 봐 버렸거든
즉 주의 이름이 떳따 말이죠.
주의 머리가 들리셨다 말이죠.
그의 뿔이 들렸다 말이죠.
벌벌벌 떨게 하는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버렸으니
난 타 죽어 마땅하구나
(사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1,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 6:12, 개역)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선지자가 졸지에 분절이 됩니다. 참과 거짓으로 말이죠.
그런데 정작 이사야 본인이 거짓선지자 였음을 보게 됩니다.
존재로 본 겁니다.
그런 차돌같은 반석같은 바다 같은 요단강같은 이사야가 도망치고 물러갈 곳이 없이
애굽처럼 쫄딱 망하게 되는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봐버렸넹
어쨌을까앙?
이제 주의 영광을 봐버렸으니 타 죽는 일만 남았구나
그런데 이런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부정을 제거하니까
차돌에서 샘물이 나듯이
반석에서 연못이 나오듯
딱딱한 이사야 에게서 기능이 나오는 겁니다.
이제 이사야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외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존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고(죽었다 살아난 이사야 나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누구누구의 하나님이라는 이름)
그야말로 돌삐 맞아 죽을 소리는 하는 겁니다.
마치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모습인
애굽에게 모세가 첫 번째 표적으로써 출애굽 전쟁 선포를 하듯이 말이죠.
이것이 최고의 잔치인 혼인잔치입니다.
아니 왜?
존재가 아닌 기능인데
그 기능의 내용이 뭔고 하니
약속이 뭔고 하니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겠다는 겁니다.
그냥 살과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살과 피입니다.
출애굽해서 급히 먹는 유월절 어린양의 살과 피 이듯이
모든 딱딱한 인간 곧 애굽을 뿌셔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다 이루었다고 외침으로써 먹고 마시는 살과 피입니다.
그러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을 마시면서
이 출애굽구원전쟁의 기능
하나님나라의 천국잔치의 음료를 마시는 겁니다.
자기들 입으로 더 나은 포도주 라고 합니다.
(요 2:10, 개역)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 2:11, 개역)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1:49, 개역)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5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개역)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2:1, 개역)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개역)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개역)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 2:5, 개역)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 2:6, 개역)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7,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요 2:8, 개역)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요 2:9, 개역)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개역)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 2:11, 개역)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2,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기능 앞에서는 존재는 그저 마땅히 타 죽어야 함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능 자체가 당위 자체가 이미 자신의 존재적인 죽음을 깔고 등장하기 때문에
존재로써 대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존재에서 벗어날수가 있냐 말이죠.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라는 기능으로 들이 닥치는데
영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어떻게 기능 곧 이름 에게 대항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영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존재라고 우기는 이 존재의 모순성만 들통날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전쟁이 감사할 뿐이다는 겁니다.
이것 보다 기쁜 것이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희년선포하는데 있어서 아무도 안 기뻐했다고 했죠?
예수님이 이사야의 글을 유대인 속에 외칠때에
아무도 안 기뻐합니다.
(눅 4:13, 개역)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 4:14,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개역)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기들이 그 말씀을 외우고 달달달 자신의 신체에 박아새겨도
문제는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허락 받고 하냐 말이죠. 검증 받았냐 말이죠.
기껏해야 문자를 겨우 읽을줄 아는 요셉의 아들 아니냐 말이죠.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1% 도 안된다 말이죠.
이것이 존재들의 반응입니다.
왜냐 예수님을 자기들처럼 존재론적으로 보거든요
그런데 기능은 이 말씀이 너희들 귀에 응했다고 아예 선언해 버립니다.
웃끼죠
왜냐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아무도 안 기뻐하고 아무도 안 감사하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구지 그런 이야기 안해도
평상시 그들이 늘 되내이던 말씀이니까 말이죠.
예수님 혼자 자기가 처음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냥 착각하니까
다들 늘상 듣는 소리인데 말이죠.
당연히 아무런 반응이 없죠
바로 이렇게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결국 존재의 외침으로만 듣기에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기능에 말려들어서
애초부터 너희 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희들은 먼저 발로 차 버렸다는 것을
알리바이를 형성케 해서
이방인에게 약속(기능)이 넘어가는 식입니다.
그래 그럴줄 알았어
왜 너희 귀에 안 응했을까앙?
너희가 발로 차 버렸거든
딱딱한 존재에게는 이 말랑 말랑한 복음이
줘도 못 먹을 정도로 존재에게는 복음이 무가치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도 인간들은 자기 존재에 유익되는 것만 그때 그때 골라서 믿을 뿐이다 말이죠.
복음의 기능에 동원이 되는 복음의 대상물이 아니라
존재는 반대로 자기 존재의 유익에 말씀을 대상물로 삼을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늘 이 시편 114편의 다윗의 외침은
존재에게는 그저 달달달 외울 꺼리 밖에 안된다 말이죠.
아무리 귀하게 여길 거야 라고 다짐해 본들
나의 존재에게는 무가치로 여겨질 뿐이다 말이죠.
남들은 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배신 안 할꺼다 웃끼지 마세요 장 지지게 됩니다.
그냥 존재임을 인정하시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망하시면 됩니다.
그런 딱딱한 존재인 내가 박살이 남으로써
차돌에서 샘물이 나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해서
예수님과 상관된 자가 되는 겁니다.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림으로써
내가 바로 저 자리에 매달려 죽어 마땅히 있어야 할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요 천국잔치가 되는 겁니다.
결국 천국은 존재가 아닙니다. 기능이요 약속입니다.
공간이 아니다 말이죠.
부동산 업자들이 이 천국까지도 다 장사속으로 이용할꺼다 말이죠.
너희 가운데 있는 천국이기에
기능인 겁니다.
나 라는 존재를 작살내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왜? 나를 애굽으로 여기고 바다로 여기고
산으로 여기고 차돌 반석으로 여기고
구멍을 빵빵 뚫어버리는
나 라는 존재를 깨뜨리고 도망치게 만드는
그래서 샘물 나게 하는 것이 혼인잔치로써의 천국이다는 겁니다.
그런 천국을 만나서 다윗이 완전히 박살이 나서
가루가 되어서 이렇게 기쁘게 외치는 겁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만나서 벌벌 떨게 되었다고
나 다윗도 바다처럼 요단강처럼
산처럼 언덕처럼
도망치도 물러나고 놀라 뛰어버리는
이 구원을 보고 두렵고 벌벌 떨림으로써 구원이라는 기능을
존재로써 고지곳대로 맞딱뜨려
애굽이 무너지듯이 내가 무너져서 보게된 약속이다는 겁니다.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노래를 아니 부를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이름없는 아이의 꺽으신 뼈로
즐거워 하는 다윗의 잔양입니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8, 새번역)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즐거워 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살과 피를 먹는게 아닙니다.
무조건입니다.
그것이 오늘 다윗의 시 114편 찬양입니다.
무조건 탈출입니다.
무조건 출애굽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복음입니다.
다들 무시하는 찬양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가장 심하고
교회가 가장 거부하는 시편 114편의 다윗의 찬양입니다.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의 권세에 굴복하라 그리고 핵소 고지 (0) | 2017.02.14 |
---|---|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시편 124편) (0) | 2017.02.11 |
긍휼과 멸시로 가르는 참성전(주의 이름) (시편 123편) (0) | 2017.02.03 |
잉태치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즐거운 어미가 되는가? (시편 113편) (0) | 2017.02.01 |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시편 112편) (0) | 2017.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