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시편 124편)

 


(시 124: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시 124:2, 개역)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시 124:3, 개역)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켯을 것이며』

(시 124:4, 개역) 『그 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며』

(시 124:5, 개역)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시 124:6, 개역)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시 124:7, 개역)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시 124:8, 개역)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1, 새번역)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

(시 124:2, 새번역)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시 124:3, 새번역)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시 124:4, 새번역)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시 124:5, 새번역)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시 124:6, 새번역) 『우리를 원수의 이에 찢길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여라.』

(시 124:7, 새번역)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

(시 124:8, 새번역)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마침 지난 주에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왜 왕을 주셨느냐 라는 점입니다.

 

제가 성전을 지으라고 해 놓고 성전을 부수는 주님이다고 하니까

왕 제도도 마찬가지 이더라 말이죠.

 


그것은 왕 제도 뿐만 아니라 성전 또는 심지어 율법도 그러합니다.

율법을 줘 놓고서는 지키라고 준게 아니다 말이죠.

지켜 버리면 골치 아파요

기능을 안 보고 존재가 되어버리니까 말이죠.


긍휼을 안 보고

즉 주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를 안 보고

자신이 율법을 대상으로 삼아 지켜버리기 때문에

멸시의 대상이 되는 줄 모르는 겁니다.

 

오늘 시편 124편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편 124편 본문을 보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입니다.

 

역시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 이 성전이 건물이나 공간적인게 아니다 라고 했지요.

기능입니다. 이름과 연관됩니다.

아무개의 이름이 아닌 오로지 주의 이름과 연관됩니다. 곧 기능입니다. 사건

 

무엇이 이상한고 하면

역시나 출애굽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있어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랑 과연 맞냐 라는 점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성전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천막 곧 텐트 곧 성막도 없었습니다.

출애굽 빠져나와서 시내산에서 십계명 받고

40년 동안 뺑뺑이 돌다가 받게 된 율법에서 성막이 등장하지

그 이전에는 없었다 말이죠.

 

그런데 성막도 아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이 출애굽이 연관성이 있냐 하는 점이

이상하게 눈에 띄였습니다.

 

왕제도를 주님께서 거부해 놓고서는 결국 왕 제도를 허락케 해놓고서

존재로써의 왕이 아닌

기능으로써의 왕이 누구인가 그 이름이 어떻게 불리우는 이름인가 로 연결이 되지만

인간의 왕은 그것에 관심이 없이 자기존재에 이스라엘 왕 다움과

율법과 말씀 지킴과 연관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성전 짖지 말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다윗이 떠돌이 같아 보여서

반드시 성전을 지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 이상 떠돌이로 만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고집을 꺽을수 없어서 성전을 허락하는데

결국 그 성전이 도리어 우상숭배의 온상이 된다 말이죠.

그렇지만 성전을 깸으로써 그 깨진 성전에서 무엇이 나온다?

앞의 글에서 반석에서 연못이 나오고

차돌에서 샘물이 나온다고 했듯이

그 깨어진 성전에서 참성전 되신 예수님이 나오더라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오야 합니까?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 말이죠

구지 애굽에 들어가지 말고

쌔고 쌘 땅에서 민족을 만들고 국가를 형성하는게 아니라

구지 그 당시 초강대국인 애굽에 탁란해서

빠져나올 때 출애굽시에 완전 박살을 내고서 나오더라 말이죠.

 

이것이 미리 복선처럼 깔려서 나온 사건이

족장시대때 아브라함의 여정 속에서 애굽족장에게 아내 사라를 넘겨버리는

죽을까 싶어서 아내를 팔아 버리는 포주처럼 행동했는데

도리어 애굽족장 민족을 초토화 시켜서 아내 사라가 나오더라 말이죠

 

정작 그 사라는 불임여성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순풍 여인들인 애굽족들의 태를 다 닫아버리더라 말이죠.

 

누가 봐도 저주의 여인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만민의 어미임을

졸지에 아내 덕분에 몇배나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되더라 말이죠.

 

이것은 마치 탕자 비유처럼 보입니다.

탕자의 기능은 마치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셔서 9명의 이스라엘 사람과 차이나게

단 한 사람의 사마리아 문둥병자의 기능이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 라는 이름의 개입으로써

차이가 생기듯이 말이죠.

 

태어나기도 전에 애굽은 미움받기로 작정이 되어있고

태어나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듯이 말이죠.

 

결국 의도적으로 이미 복선으로 이 애굽과 이스라엘을 한 세트로 구성하기 위한

긍휼과 멸시를 말하기 위한 기능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안 따먹고 생명나무를 먹는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생명나무 먹을 자격이 없는 자가 도리어

이스라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도리어

생명나무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증상물 증거물이 되고 증인이 되고

 

오히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기능을 미움받기로 작정된 모습으로 나타내더라 말이죠.


첫사랑인 무조건적인 용서를 도리어 발로차버리는 식으로 말이죠.

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유대인의 모임인 사단의 회 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존재에서, 딱딱한 존재에서, 기능으로 옮겨지는 이동은 불가능한데

이름의 개입 때문에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의 개입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이동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조차도 이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주변의 모든 민족이 다 존재이다 말이죠. 독자적이다 말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스라엘에게만 기능 곧 십자가의 용서 라는 첫사랑을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혈통이나 육으로 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예수님이 창에 찔린 그 허리에서 난 자들이다 말이죠.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난 멜기세덱 반차에서 태어났다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그의 머리 드심에서 그의 뿔이 들리심에서 난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조차도 유지 할수 없는 이 죄인으로써의 이스라엘 이라는 기능은

바로 이름 곧 구원자의 이름

의사의 이름 때문에

기꺼이 죄인 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날때부터 소경이 된 것이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상대적인 바리새인은 도리어 본다고 하니 존재라고 우기느 소경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고침을 받는 주의 이름의 기능을 알게 될텐데 말이죠.)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손 치더라고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바라보는 자인데

 

원수가 아닌 자가 어떻게 긍휼을 바라보겠냐 말이죠.

자신의 이를 자랑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오늘 시편 124편에서 놀라운 점은

다윗이 마치 자신의 세대에서 직접 격어보지 못한

그 과거의 출애굽 상황을

리얼 생방송 하듯이 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왕의 입에서

그 이빨에서 벗어나는 사건을 직접 겪었구요

그것을 출애굽의 사건과 연관 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이 말씀 지키겠다고 하는 순간에는

도저히 느낄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그 출애굽 사건을 지금 현재 직접 격고 있는냥 나열하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말씀 지켰다 라고

마치 성전에서 두 사람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는 둥

저 세리처럼 토색하는 삶을 살지 않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둥

그런 식으로 보고 있고

출애굽은 지금 현재 격고 있는 사건이 아니라

과거 조상들이 격었던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지금 현재 여호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오로지 외칠 것을 긍휼만 바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세리가 직접 현재 격고 있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직접 이 십자가 사건을 격고 있다면

이 시편 124편이 덮쳐진 겁니다.

 

그런데 직접 리얼 생방송 실제상황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한 발짝 떨어진 상황이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존재로써의 시편 124편으로 보일 겁니다.

나 존재 여기 있고

너 시편 124편 저기 있고

내가 너 시편 124편을 읽으면 나와 상관 있고

내가 너 시편 124편을 읽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고

이런 식으로 존재와 존재가 되어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기능은 곧 사건은 곧 이름은 주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의 개입은 뭔고 하니

이 시편 124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되는게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현재 그 출애굽의 상황을 격게 되고

지금 현재 그 십자가의 사건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외칠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이죠.

 

내가 말씀 지키는 나의 숙제가 전혀 없습니다.

진짜 실상은 주님의 숙제가 덮치는데 있어서

주님은 구원자이고

나는 죄인으로써

숙제가 없어서 좋은게 아니라

도리어 숙제를 한 놈들에게 살해위협을 당하는 입장에 놓여진 상황으로써

한 세트를 구성한다는 겁니다.

왜? 주의 이름 때문에

 

그러니 이 이스라엘 개념은 집단개념입니다.

개인 하나 하나가 모여서 이스라엘을 형성하는게 아닙니다.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늘 놓여진 상황은 사자 입 속에 들어가게 되는 일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가 들추어지면서 한 세트를 구성하는 겁니다.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자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자로 말이죠.

 

어떻게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가 없는데 어떻게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가 생기느냐 말이죠.

우발적으로 말입니다.

 

한기총에서 김종필 말대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 라고

교인들을 세뇌 시킨 것에 좌파들이 반발하고 있는데

(롬 13:1, 개역)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이 좌파들이 반발하는 것이 사실상 위의 있는 권세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하나님꼐로 난 것에 대한 반발이다 말이죠.

결국 왜 권세를 악인에게 허용하시느냐 에 대한 반발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이름 때문에

짐승을 짐승 답게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짐승을 구체화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런데 마치 독재를 향한 독립운동을 하는 바리새인처럼 또한 가룟유다처럼

오히려 또렷한 십자가에 밝혀지는 마귀라는 원수를 보는 예수님의 원수를 보는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원수 곧 인간 자신을 투사한 하나님의 원수 갚기로써

정당화 하는 마치 모세에게 이혼 증서를 요구하는 식으로

반발하는 모습으로써 역시나 권세를 추구하는

힘에는 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율법해석을 정당화 하더라 말이죠.

그러나 실상은 거룩한 율법을 정당화 하는게 변호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 거죠.
그렇게 율법을 이용하는 줄 알았는데
도리어 율법에 걸려드는 겁니다.
죄 아래 갇혀 있음을 낱낱히 드러나는 것이 율법해석을 그렇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기에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기능을 거부하게 되는 식이다 말이죠.

오로지 나 라는 존재

그것도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존재

더더욱 저 토색하는 나쁜 세리와 같지 않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 로써의

유대인이 도리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존재

딱딱한 존재

기능을 거부하는

죄인임을 거부하는 존재로써

좌파들은 위의 있는 권세에 대한 김종필의 엉터리 해석에 반발하여서

위의 있는 나쁜 권세에 반발하겠다는 겁니다.

웃끼는 것은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권세 노무현 권세를 허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김종필의 엉터리 해석이나

좋은 권세 노무현 권세는 수용하겠다는 해석이나

둘 다 악하기는 마찬가지 인 거다 말이죠.

어떤 권세이든 짐승을 만들기 위한 주님의 일하심 곧 기능에는 관심 없고

존재이니 존재로만 해석하는 겁니다.

이것이 의문의 반복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마침도 없이 밑고 끝도 없이 반복하는 흐릿하고 모호함입니다.

 

그러나 기능은 또렷합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야곱은 정작 허리가 부서짐으로써 그 부서진 허리에서 이스라엘이 나오고

곧 예수님이 나오고

그 예수님의 허리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더라 말이죠.

 

이것보다 또렷한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오늘 영화를 봤는데 컨택트 라는 제목의 접촉, 만남 이라는 뜻인 영화인데

이름이 한나 hannah 라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가

왜 내 이름은 한나죠 라고 묻는다 말이죠.

그것은 회문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을 하더라 겁니다.

 

회문이 뭔가 싶어서 검색을 해 보니

단어나 문장이 뒤에서 읽어도 앞에서 읽은 것과 같은것

예를들면 스위스 mom 처럼 말이죠.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같은 단어이다 말이죠.

 

인간 쪽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이름으로 접촉해 오시는 방식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다는 겁니다.

 

칭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 마친다 말이죠.

 

다른 이름으로는 죄사함이 없다 말이죠

 

오직 이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되더라 말이죠.

 

우리가 죄인이 되고 싶어서 죄인이라는 기능을 나타내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피 흘리심 때문이다는 겁니다.

 

물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지을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죄는 존재가 되고픈 겁니다.

엉터리로 죄인이라고 우긴 장로처럼

골프치는게 죄인이고 죄 짖는거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상대적인 기능이 없어요

상대적으로 난 의인입니다 라고 우기는 존재가 들추어지는 기능이 아닌 겁니다

오로지 주의 이름의 개입으로만 죄인이 되는데

독자적인 자신의 행동 여부로 골프 치면 죄인 된다는 식이다 말이죠.

 

십자가의 피 흘리신 분의 이름의 개입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말씀을 지키고 행함을 추구해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바리새인과

저 다윗과 같지 않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지 않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사울왕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악령이 씌인 겁니다.

제가 운 것에 대해서 꼬투리 잡아 몰아가던데

심지어 스파이 까지 보내서 정보를 캐내던데

마침 그 스파이가 묻는 말에 다 대답했지만

자기 듣고픈 말만 듣고

그 뒤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본문인데 자기 듣고픈 말만 듣고 가버려서

우와 주님이 일하시는 구나 라고 새삼느꼈다 말이죠.

저에게 환상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말이죠.

주의 도우심의 이름이 개입이 없었다면 말이죠.

차라리 엉터리 꼬투리 잡고서 계속 우려 먹으라 말이죠

그렇게 자기 존재를 더더욱 곤고히 하기 위해서

정보를 캐는 겁니다.

 

그렇게 악령이 씌인 존재

또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한 죄라는 존재 죄인 마귀

그런 마귀의 입에 아무리 잡아먹을려고 이빨로 씹어도 씹히지 않더라 말이죠.

 

그러니 존재로써의 죄인은 이빨로 남을 삼키고자

두루두루 돌아다니는 양을 탈을 쓴 늑대인 거죠.

사단의 회입니다.

 

(마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죽인 사단의 회 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단의 회에서 건져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이 십자가 사건이

이 출애굽 사건이

실제상황으로 덮쳐지지 않기 때문에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는 소리가 오히려 불편한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것에 거부함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것을 계속 주장하면서 반복하더라 말이죠.

 

과연 촛불시위를 하는 자들이

또는 맞불 집회 하는 자들이

십자가 사건이 실제상황으로 벌어져서 그런 시위를 하고 집회를 하는 것일까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집회 하는 겁니까?

아무리 모여도 개인이요 독자적일 뿐

집단이 아닙니다.

 

만약 집단이라면

태어나기도 전에 촛불시위하기로 작정된 자라야 한다 말이죠.

태어나기도 전에 맞불집회하기로 작정된 자라야 한다 말이죠.

 

그런 기능을 그들은 오히려 거부하고자 그런 집회를 열고 있으니

서로 서로가 촛불집회 참자가이든 맞불집회 참자가이든

남을 7번 용서하는 존재가 될려고 하지

서로 7번이네 8번이네 힘싸움 할 뿐이지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기능을 그 어떤 존재도 원치 않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름의 개입으로써만 나타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땡중처럼 분신자살하고

너만 자살하냐 나도 분신 자살한다고 맞불쪽도 자살하는 겁니다.

팽팽합니다. 어떤 누구도 지지 않습니다.

아예 1박 2일 시위를 하겠다는

정신병자 노릇을 하는 겁니다.

둘 다 똑같죠.

 

어떤 누구도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네 배나 갚아라 라고

그 아주 나쁜놈을 제대로 판결했다고 자부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써의 존재를 나타냈다 말이죠.

그런데 그 법이 자기 죄악을, 제대로 자신이 판결했다고 우기지만.

 

그런데 그 놈이 너야 너 라는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었을때에

과연 심판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 말이죠.

그건 심판 축에도 끼이질 않는 존재들 끼리의 장난에 불가하다는 겁니다.

 

진짜 심판은 십자가 입니다.

남을 7번 용서하고자 흘리는 피가 아니라

도리어 본인이 7에 70번 용서하고자 흘리는 피 이다는 겁니다.

 

심판자가 심판 받으면 이제 누가 심판 하냐 말이죠.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그런데 그게 진짜 심판 이다는 겁니다.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8, 새번역)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못하였다'』

(요 10:18, 공동)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요 10:18, 킹흠정)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요 10:18, 한글킹) 『아무도 생명을 내게서 빼앗을 자가 없으나 내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느니라. 나에게는 생명을 내어 놓을 권세도 있고, 또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노라. 이 계명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니라."고 하시니라.』

(요 10:18, 현대인) 『이 생명을 내게서 빼앗아 갈 자는 없지만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에게는 생명을 버릴 권한도 있고 다시 가질 권한도 있다. 이것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특권이다.'』

(요 10:18, 현대어)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내가 스스로 바칠 뿐이다. 나는 목숨을 바칠 권리와 능력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와 능력도 있다. 아버지께서 이 권리를 내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 기능을 받았다는 겁니다.

보통 인간의 심판 또는 재판관의 특징은

정작 자신은 재판에서 예외를 두고 한다 말이죠.

 

그게 존재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기능은 정반대입니다.

아예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니까

기능만 남게 되는데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다시 되찾는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인 기능이다는 겁니다.

 

회문이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진 존재는

이런 기능 곧 이름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접촉 할 수가 없어요

컨택트 할 수 없어요.

 

주님 쪽에서 개입하는 방식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은 보여 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요나의 표적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더라 말이죠.

어리석더라 말이죠.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다시 되찾는 그 기능에 있어서

존재는 강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나타내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떤 접촉을 다 차단해 버리니까 말이죠.

모조리 다 의문의 제사인 흐릿하고 모호함의 반복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렷한 십자가가 아니다는 겁니다.

십자가만 또렷하게 되니까

 

그것에 대한 시기와 반발인 겁니다

나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잖습니까? 라는

맏아들의 반발은

 

아버지의 편파해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는 말에 강한 반발인 겁니다.

 

사랑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것에

자신의 기능을 부어넣는 편파해석에

 

마귀들은 돌아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왜 마귀가 그렇게 어렵게 잡아왔겠냐 말이죠.

이 편파해석 이 불공정한 해석

이 말도 안되는 7에 70번의 부조리한 용서가 아니면

접촉 컨택트 할 수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또렷한 것은 십자가 라는 부조리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외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실제상황처럼 말이죠.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새 같은 자신이 직접 격은 사건을 말이죠.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오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우리 도움은 주의 이름

오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우리 도움은 주의 이름

 

인간의 접촉시도로써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름

그 이름만을 부른다는 것은

본인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뭘 해도 죄 뿐임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름이 개입해서 나오는 외침이다는 겁니다.

성전이라는 기능이

 

이렇게 이름이 벌리는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펼치는 겁니다.

 

사냥꾼이 있고 올무를 치고

사로잡혀서 이름을 부르게 되니

그 올무가 끊어지고

새 같이 벗어나는 해방 구원 사건이

바로 이 이름 때문에 매일 매일 벌어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수 라는 이름으로 벌리는 우리에게 접촉하시는 유일한 길이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 안 불렸으면 큰일 날뻔 했다는 겁니다.

지옥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인자가 장대 높이 들리심의 사건이 없었다면

불뱀에게 마귀에게 못 벗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사건을

미련하게 실제사건인냥 외칩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다는 듯이 말이죠.

 

자신이 지옥에서 건짐받았으니

아니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존재가 되어버린 기독교는 그런 외침을 불편하다 말이죠.

예배 제사를 반복해야

존재를 유지하는 돈을 모으기 바쁘지

 

뭐 실제상황인냥 지옥에서 방금 꺼냄을 받은자처럼 외치는 것도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교인들이 싫어한다 말이죠.

손님 다 끊긴다 말이죠.

 

매일 매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면

그거는 도심 중앙에서 매가폰 들고 외치는 전도한다고 외치는

민폐를 끼치는 자들이 아니냐 말이죠.

 

물론 그들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회문이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마치 남을 7번 용서해야 합니까 라는 존재의 사고방식이지

도리어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합니다 라는 기능이 아닙니다.

 

예수 라는 이름이 개입한

예수님 쪽에서 접촉한 사건이 아니라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제사인 존재의 반복일 뿐인거다 말이죠.

 

다윗의 이런 외침을 참선지자만이 바톤을 이어 받지

거짓선지자는 이어 받지를 못합니다.

존재로써의 이스라엘을 사수 할 뿐이고

 

참선지자는 오히려 기능만을 이스라엘이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바벨론 이라는 또 하나의 애굽 입속의 이빨 위에 놓여지게 됩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또렷하냐 말이죠.

 

그렇게 이스라엘의 기능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 쪽에서 벌리신 사건인

이름이 벌린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전에 들어가는 노래입니다.

공간이나 건물 부동산의 성전이 아닌

 

참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성전이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존재를 위한 성전이 아니다는 거죠.

철저한 기능인데 그 기능이 바로 기도하는 집 곧 무능하기에 주의 도움을 바라보는 겁니다.

독자적인 존재인데 어떻게 도움을 바라겠냐 말이죠.

무능하니까 바라보고 주의 도움 곧 주의 이름을 바라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능으로써의 참성전 속에 들어가는

또렷한 십자가 사건이 실제상황으로 벌어지는

관계성을 펼치는 겁니다.

 

다른 것은 외칠 것이 없습니다.

이것 밖에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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