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길과 곧은 길(내가 곧 길, 진리, 생명, 부활이니 죽어도 살겠고) (시편 125편)
(요 1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1:2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시 125: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2, 개역)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3, 개역)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시 125:4, 개역)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시 125:5, 개역)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 125:1, 새번역)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시 125:2, 새번역)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
(시 125:3, 새번역) 『의인이 불의한 일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면, 의인이 분깃으로 받은 그 땅에서 악인이 그 권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시 125:4, 새번역)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 125:5, 새번역) 『주님, 비틀거리면서 굽은 길을 가는 자를 벌하실 때에, 악한 일을 하는 자도 함께 벌받게 해주십시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세례요한이 성령이 임해서 곧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주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자신의 기능이 동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 40:3, 개역)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사 40:4, 개역)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 45:2, 개역)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마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막 1:3, 개역)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즉 세례요한이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봐 달라고 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있기 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기능 자체가 주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기능을 발휘 하고 누락되는 식이지
존재를 우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 존재, 나 라는 존재. 세례 요한이라는 존재로 해석하는 자들의 특징은
세례요한이 참선지자 이다 라는 참선지자라는 존재로 해석하지
기능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그렇게 해석하는 본인의 존재를 기능으로써
누락됨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해석으로써
세례요한을 좋게 해석하면 자신도 좋은 존재로 봐 달라는 트릭 속임수가 담겨 있게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기능은 주의 길을 평탄케 한다는 겁니다.
즉 주의 길 자체가 협곡과 골짜기 높은산 낮은산 험악한 산이다 라는 것이 전제가 된 거죠.
그런데 이것은 악인의 길이 굽은 길 아니냐 말이죠.
(시 125:5, 개역)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럼 예수님이 이런 굽은 길을 가는 것이 예수님이 악하기 때문인가? 라는 말이 되는거 아니냐 말이죠.
물론 아니지요
왜 굽은 길을 가시느냐?
왜 죄인이 되느냐?
왜 곧은 길을 가시지 않느냐? 평탄한 길을 가시지 않느냐?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불쌍히 여기서 섬기시는 주의 기능 때문에 말이죠.
이 긍휼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구원이라는 탐심 먼저, 우상숭배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손 댈수 없는 구제불능이다는 겁니다.
(골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리고 사실 제목이 잘 못 되었습니다.
잘 못 되었다고 해서 수정해 바르게 해 본들 어차피 의문의 반복입니다.
잘 못 된 그대로 놔두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굽은 길의 상대적인 의미가 평탄한 길 곧은 길이라고 보는게 어쩔수 없는데
왜냐하면 차이로써의 길이기에 굽은 길과 곧은 길은 한 세트다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곧은 길이 없다는 겁니다.
평탄한 길이 없어요
만약에 여러분 중에 그런 길을 찾으신분 있다면 말해주세요 과연 그런 길이 있기는 있는지?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라고 했을때도 좁은 길은 없어요.
만약 있다면 어디인지 주소 알려주세요 없어요.
즉 예수님 그 자체가 십자가의 길로써 좁은 길이요 평탄한 길입니다.
결국 존재로써 그 길이 존재해 버리면
그렇게 되면 존재로써의 인간이 존재로써의 길 즉 곧은 존재의 길 또는 굽은 존재의 길로
존재가 걸어가는 식이 되는 거죠.
따로 따로 존재하던 것이 나의 강요된 선택에 의해서
어떤 길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좁은길 평탄한 길 십자가의 길로 동일시 여겨져서
결국 나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시다바리로 이용되는 길이니
그게 무슨 놈의 십자가의 길입니까? 사기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기능은 즉 존재 이전의 기능에서는 이것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물론 기능에서는 존재가 말이 안되지만
존재로써는 기능이 말이 안되겠지요.
서로 서로의 소욕이 달라서 서로의 입장에서는 서로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존재로써의 길이 아니라
존재로써의 세례요한 또는 예수님이 아니라
길이기에
곧은 길은 없고
평탄한 길은 없고
예수님 자체가 곧은 길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인 겁니다.
길이 곧 예수님이다 말이죠.
이것을 존재들은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다.
존재라는 우상화를 해야 말귀를 알아먹고
믿음으로 말하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자아라는 존재를 위한 말로 해 주어야 말귀 알아먹었다고 우기는 거죠.
좁은 깅 평탄한 길 십자가의 길은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인물 그 자체가 길입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길이다는 겁니다.
다른 이름은 길이 아닙니다.
결국 곧은 길을 예수님과 무관한 길로써 파악한 자는
우상의 길을 걷는 식이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길만 곧은 길이다 말이죠.
공간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를 위한 공간은 없다 말이죠.
기능으로써 공간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누락되는 공간이요 시간이기에
정작 묵시에 반납하는 식이겠지요. 면류관을 반납하는 24장로들의 기능처럼 말이죠.
면류관 반납한다는 그 기능 하나만 증거하기 위해 동원이 될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나타나지 않는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곧은 길은 없다.
평탄한 길은 없다
그럼 뭐냐?
아니 기능이기에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냐 로 이름을 말하고자 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평탄한 길 자체가 예수님이요
곧은 길 자체가 예수님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의 길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꽃길로 안 보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절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도록 하겠다는 베드로의 사람의 일은
당연히 마땅히 욕 먹어야 한다 말이죠.
예수님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요 곧은 길이요 평탄한 길인데
존재인 베드로가 생각하는 평탄한 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람의 일을 생각한 거다 말이죠.
자 그럼 세례요한은 그럼 왜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기능인가?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례요한이 그런 막중한 임무를 가진 존재라면
그 존재는 예수님이 끝까지 죽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요? 맞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드디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하는 그 초반부터
세례요한은 끌까지 살아남아서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는게 아니라
마치 왠 다이아 아 아 라는 보디가드의 노래 뮤직비디오처럼 대신 총을 맞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복음 시작 바로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리는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 마저도 뿔뿔히 흩어져 버리는
존재감은 하나도 없는
이게 무슨 놈의 평탄케 하는 거냐 말이죠.
주의 길을 평탄케 하기는커녕 하등 도움이 안 되더라 말이죠.
퍼뜩 퍼뜩 죽어버리니까 말입니다.
이게 무슨 주의 길을 예비하는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그것도 구약 이사야 서에서 예언이 되어 있는
예언이 되어 있다는 말은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대로
말씀에 기록된 대로 되어 있는 기능이다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것이 무슨놈의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거냐 말이죠.
첩경은 그대로 남아 있고
울퉁불퉁한 높은산 낮은산
불도져로 높은산 깍고
낮은산 움푹파인 웅덩이는 메꾸어버리는
다리미질 하듯이 쫘아악 평평하게 펴는 기능이 맞기는 맞냐 말이죠.
아니 잖아요.
그런데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의 생각에서는 세례요한이 살아남아서
주의 길을 평탄케 다리미질 하듯이 불도져로 밀어서 꼬불 꼬불 굽은 길울 펴는 것이 아니라
쫘악악 뻗은 곧은 길 요즘 유행하는 티비 프로그램처럼 꽃길로만 걷도록 하게 해야 하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땡 시작하자마자
땡 탈락 실패처럼 보이느냐 말이죠.
결국 존재로 보는 해석이 아닌 기능적으로 봐야할 입장에서는
세례요한은 방해꾼 밖에 안되기에 퍼뜩 퍼뜩 철수를 해 버리는 겁니다.
철수 안하겠다고 안 철수 해 버리면
나는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지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기능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퍼뜩 퍼뜩 철수해 버리는 식이다 말이죠.
왜 그래도 남아서 끝까지 예수님을 돕는게 낮지 않는가?
시작하자마자 땡 탈락 이라고 전국노래자랑에서 노래 부르기도 전에 땡 해 버리면
얼마나 무안하냐 말이죠. 존재감 제로
이런 굴욕이 어디 있냐 말이죠.
아니 그럴려고 엘리사벳 할머니 몸에서 임신되어 태어났냐 말이죠.
자괴감이 들지 않겠냐 말이죠.
아닙니다 이미 충분이 자기 역할 곧 기능을 다하고 누락되듯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우리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히려 빨리 예수님도 이런 죽임 당함으로써
길을 트여주고 있다 말이죠.
사실상 세례요한이 먼저 길을 띄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곧 평탄케 하는 길을
세례요한이 뒤 따라 가는 겁니다.
물론 시간은 역순이지요. 존재는 요 역순인데
기능에서는 예수님의 길은 그 노선을 이미 가는 기능이다는 것을
예수님의 편파해석으로 뒤짚어 씌워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으로 먼저 트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틔여준 것을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겁니다.
예수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다 말이죠.
완전 정반대의 해석입니다.
존재의 해석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말이죠.
존재의 해석이 아니라
기능의 해석이다 말이죠.
왜?
예수님 자체가 길인데 무슨 꽃길을 따로 있어서 따로 존재하는 것을 합치 일치 동일시 시켜서가 아니다 말이죠.
예수님 자체가 길이기에 걸어가는 길이 따로 없다 말이죠.
예수님 가시는 길이 뭔들 is 곧은 길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왜? 예수라는 이름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공간 시간 존재로써 곧을 길 찾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람의 일입니다.
심지어 우리 존재가 포착한 십자가의 길 조차도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인간에게 포착당하는 십자가의 길은 없어요.
지 혼자 독자적으로 백날 십자가의 길을 가본들
인물 즉 누구 그 이름이 함께 동행하지 않는 길이면 굽은 길이요 악인의 길이다 말이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은 무조건 십자가의 길이요 곧은 길이요 평탄한 길이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편파해석 했듯이
세례요한도 주의 길을 평탄케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해석을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너무 띄워줬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너무 허무하게 바로 죽어버리니까 말이죠.
(마 11:11,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눅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결국 예수님 자체가 길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편파해석을 붙임으로써
아무리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길로 보일지라도 그야말로 꽃길이다 말이죠.
결국 누구를 보느냐 누구와 함께 걷느냐의 문제이지
존재로써의 길로써는 파악이 안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오늘 시편 125편은 마치 시편 24편처럼
이런 노래가 생각 납니다.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손 깨끗한자
거룩한 곳에 설자는? 맘청결한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주께 향하는 자 찾아 - 오!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손 깨끗한자
거룩한 곳에 설자는? 맘청결한자
주의 산 곧 시온산과 예루살렘 산입니다.
주변의 산들이 이 산을 둘러서 보호하듯이 삥 둘러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 125:2, 개역)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즉 이 시온 산 중심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아닙니까?
유대인은 이 성전 곧 시온산만 있으면 말씀이 성취된다 말이죠.
죽으나 사나 오로지 이 시온산만 장악하면 된다 말이죠.
그런데 그 공간으로써의 시온산 존재로써의 시온산이
성경에서 말하는 시온산이 아니무이다.
성전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성전만 있으면 말씀이 성취되어
자신들이 구원된다 말이죠.
그래서 자력의 힘이 아니더라도
로마에게 아부를 해서
부조리하게서라도 성전만 있으면 된다 말이죠.
성전이 그렇게 더러운 사고방식에서 유지가 되든 말든
일단 존재만 하면 된다 말이죠.
과거에 이방왕 고레스를 주님께서 메시아로 삼아서 그를 통해서 성전을 세우기도 했으니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존재로써의 성전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이 아니무이다.
아 그럼 로마에게 아부를 해서 성전만은 파괴시키 말아주세요 라고
아부를 떨게 아니라
독립운동을 펼쳐 자주 국방 아래에서
원수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떳떳하게 거룩한 성전을 세우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전을 유지하면 되겠군요?
아니무이다 그것도 성전 아니무이다.
부조리하게 로마에게 아부를 떨어서 성전유지하는 것을 나무래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부조리함을 추구하지 못했기에 성전이 아니무이다.
그것이 바로 기능인데 바로 이런 성전
뭘 해도 인간의 손으로 짖지 않은
인간의 손을 떠난
이런 인간의 순수한 마음으로 어떻게 해서든 성전만큼은 사수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인간의 손에서 떠나버린
그런 성전이
존재가 아닌
하나의 아무것도 아닌 기능으로써 한 인물 자체가 성전이다 라고 했을때에
존재 곧 우상이 즉 탐심이 바로 튀어나옵니다.
너 몇짤이야
뭐 3일만에 성전 짖겠다고? 그게 무슨 성전이냐
적어도 우리 성전은 46년이 되었는데?
너 누구 제자야
우리는 모세 제자야 적어도 천년 이상 묵은 존재감이 철철철 흘러 넘치는 모세가 우리 스승인데
뭐 너는 예수 제자라꼬?
예수가 누군데? 어딜 감히 신참이 선배도 몰라보고
존재감 없는 이름을 들이대!!!!!!!!!
성전을 통한 자기존재 투사를
예수님께서 다 헐어버리겠다고
그리고 제대로 된 성전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3일 성전입니다.
참으로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식이다 말이죠.
이런 존재를 부정하는 부정
결국 문제는 덜 깨끗해서 문제 삼는 식이 아니라
덜 존재감이 약해서 문제 삼는게 아니라
그들이 우겨먹는 존재감 자체가 존재깜도 안된다고 더 나은 뻔데기 부정함인 딸랑 3일
더 나은 부조리한 딸랑 3일 성전 되는 것을 들이댄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나 예수의 제자다 말이죠.
그러니 더더더 더 나은 존재감을 내세우지를 못한 거다 말이죠.
얼마나 들이댈게 없으면 모세를 들이대냐 말이죠.
예수님 자체가 뻔데기 인데.
(요 9:28, 개역)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5:45, 개역)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요 5:46, 개역)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마 23:2,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결국 존재로 본 성전
존재로 본 시온산 예루살렘 동네에서 살기 자체가
그들에게 올무가 되는 겁니다.
그 어떤 존재도 다 부정하고 뭔들 is 죄로 취급하는 그런 기능인줄 몰랐다 말이죠.
성전도 사물이요
시온산도 사물이요
예루살렘도 사물인데
이들이 기능이 마치 세례요한처럼
저분이 성전입니다.
저분이 시온입니다.
저분이 예루살렘입니다. 외치고
누락 되더라 말이죠.
누가? 성전이 말이죠. 성전이 외치기를 저분이 참성전입니다.
저 성전은 저분의 신들매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라고 외치고 누락되듯이 성전이 허물어 지는데
인간들은 성전을 따로 소유를 해 버리니까
그 존재를 소유해 버린 이상
예수님이 성전으로 보일 리가 없으니
도리어 올무가 되어 넘어지는 거다 말이죠.
율법도 마찬가지 저분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라고 외치고 뒤로 빠지는 몽학선생인데
엉뚱하게 율법을 붙잡으면 그렇게 율법이 말하는 사랑이 되냐 말이죠?
사랑이 아니라 존재만 된다 말이져 딱딱한 우상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사랑이 없음을 더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라는
율법 지키는 이 몸이 지옥임을 실감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번 금식했다는 둥
되도 않는 의문의 반복을 들이대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았으면
사탄이 주장하는 것을 말하느냐 말이죠.
그게 바로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준 것처럼
예수님 앞에서 마저도 유대인들은 그 완악함을 철두철미 하게 지키더라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 교회사람들이 우상숭배자들이다 말이죠.
불교 샤머니즘의 우상숭배 돌조각 숭배 보다 더 심각해서 쨉도 안된다 말이죠.
그러니 교회 다니는 사람 만나면 우상숭배자 사탄의 회에 속한 자를 만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들과 안 어울리고 피해 다닌다고 해서 옳은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갇혀 버렸다 라는 것을 외침으로써
세례요한처럼 퍼뜩 퍼뜩 누락되듯이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주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말씀이 덮쳐진 자입니다.
그러나 존재는 예수의 이름에 관심이 없어요
자기 존재 밖에 관심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니까 예수님이 도망치시는 겁니다.
자기 배를 위해 임금 삼고자 하니까 말이죠.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안그러면 존재감이 없어져 버리거든요.
예수의 이름이 개입 되는 것에만 관심 두면
나 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려요
표적 곧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 표적만 보고자 한다면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을 다윗은 죽으라고 외치는 겁니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말이죠.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
자 그렇기 떄문에
뭘해도 갇혀버린 것인데
되도 않는 존재감을 왜 그리 들이대는지?
존재깜도 안되는 것으로
너 몇짤이야
너 누구 제자야
너 몇 년 성전이냐? 난 46년 성전인데 너 몇 년이야?
너 십의 몇조 드렸어?
너 이레에 몇 번 금식했어?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흐릿하고 모호한 것을 들이댈게 아니라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유일한 창세전의 것을 들이대시면 됩니다.
겨우 몇 년 몇 십년 몇 백 몇 천년 묵은 것을 들이대지 말고
모세의 스승인 예수님을 들이대시기를 바랍니다.
뭐 수천년된 기독교를 들이대지 말고
그 46년 된 성전, 46년 된 교회, 몇 년 된 신앙, 몇 년된 기독교가 아닌
딸랑 3일 만에 짖는 복음을 들이대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는 존재개념이 아닌 기능 곧 관계개념으로써 스승이니까
반드시 존재가 거부하는 스승기능입니다.
3일만에 라는 기능만이 존재는 화를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3일 조차도 존재가 되면 화를 낼 필요가 없겠지요.
오히려 가치를 두고자 존재가 자기 쪽으로 끌어들일테니까요
아무것도 아닌 이름
그래서 기분 나쁜
3일만에 짖는 자의 이름을 들이대시길 바랍니다.
자 결국 주의 산에 오를자 없습니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단코 못들어갑니다.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바리새인의 의 보다 나은 인간이 없도록 하신 겁니다.
즉 이말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께서 갈 생각 말고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넘어 오신다는 것
이것이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의문의 제사의 반복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긍휼만 바라볼 뿐이다 말이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란
우리가 올라간 적이 없는데
성전이 우리를 등마 태워 목마 태워서
우리의 비천한 자리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높이신 거다 말이죠.
이것이 한나가 믿음으로 말했고
마리아가 믿음으로 말했고
앞의 글 다윗이 믿음으로 말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믿음 적도 없이 행한 것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의 놀라운 탄식 덕분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믿음으로 말한 기도이다 말이죠.
기도라는 것을 실천해서가 아니라
이미 기도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누리는 겁니다.
닭과 거위 라는 동화처럼
아니다 미운오리새끼처럼
우리는 이미 태어났기에 미움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고후 4장의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말하기 위한 기능 때문에 말이죠.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시 116:10(칠십인역)』
예수님에게 세례요한이 주님은 평탄한 길 가셔야 합니다.
제가 끝까지 살아남아 주님이 꽃길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는
기독교가 교육으로 사람을 가르쳐서 교육화 시킨 엉터리 내용이고
복음은 교육으로 불가능하다 말이죠.
예수님 자체가 평탄한 길 그 자체인데
뭘 또 불도져로 밀어버리느냐 말이죠.
그냥 본인이 퍼뜩 퍼뜩 누락이 되어버리는 식으로
허무하게
내가 이럴려고 참선지자가 되었는가 하고 자괴감이 들정도로
너무 너무 빨리 퍼뜩 퍼뜩 누락이 되는 것이
오히려 구약에 예언된 대로
정작 본인이 일체 보탬이 없이
그의 신들매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일 하겠다고 나서지 말고
그냥 누락 되시면 됩니다.
그냥 미움 당하면 된다 말이죠.
그는 흥하고 나는 퍼뜩 망해 버리는 것이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괜히 일부러 망할려고 할게 아니라 이미 벌써 망했고
주님이 벌써 흥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흥하심을 누리시면 됩니다.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존재가 아닌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꽃길로 가도록 하겠다고 설치지 마시고
그냥 똥차나 비켜 주시면 됩니다.
엠블란스가 가는데 길 안비켜주고
철수 안하고
안 철수하고
버텨본들
소용이 없다 말이죠.
명료하고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것은
성전 그 자체되신 예수님이지
평탄한 길 그 자체 되신 예수님이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 그 자체되신 예수님이지
그 길을 가겠다고
진리를 쫏겠다고
생명을 돕겠다고
부활을 믿겠다고 해본들
존재가 발악하는 달음박질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냥 설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만 쳐다 보시면 됩니다.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알아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 사건을 터트리시니까 말이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한 줄 아시면 됩니다.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내 취향저격 (시편 126편) (0) | 2017.03.01 |
---|---|
찬양하기가 아닌 찬양자로 태어난 열방의 찬양자 (시편 117편) (0) | 2017.02.27 |
한 과부의 기도처럼 다윗은 믿는 고로 말 하노라 (시편 116편) (0) | 2017.02.20 |
우상이냐? 이름이냐? (시편 115편) (0) | 2017.02.18 |
위의 권세에 굴복하라 그리고 핵소 고지 (0) | 2017.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