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고로 말(기도) 하노라(말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당위) (시편 116편)

 

기도하지 말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믿으라

 

기도할 생각 말고 기도의 아들로, 십자가가 낳은 아들로, 십자가의 피로 낳은 죄인 원수 다윗이 외치는 원수 갚으심에 대한 감사



(116: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116:10, 개역)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3,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116:10(칠십인역)

 

(116: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116:2, 개역)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16:3, 개역)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116:4, 개역)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116:5, 개역)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116:6, 개역)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116:7, 개역)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116:8, 개역)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116:9, 개역)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16:10, 개역)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116:11, 개역)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116:12,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16:13, 개역)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16:14, 개역)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16:15, 개역)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116:16, 개역)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16:17, 개역)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16:18, 개역)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116:19, 개역)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 정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시편 116편을 어머니께 누가복음 18장을 연결시켜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기도하지 말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는

기도에 대한 것을 말이죠.

 

시편 1161절을 보니 딱 누구가 생각이 났는고 하니

베드로가 생각이 났습니다.

 

(116: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저를 사랑한다 고 말이죠.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아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구나 라고

예수님께 욕 얻어 먹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뭔고 하니

마치 효도를 자녀가 생각한 효도를 할 줄만 알았지

부모가 원하는 효도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한 것이

자식이 저축을 한푼 두푼 모아서 이렇게 정성들여 열심히 살아서

부모님을 위해 은행에 저축을 열심히 해서 이 돈을 쓰는 효도를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 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뭐냐?

정작 부모는 그 자식의 꿀밤을 때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은행의 주인이다 말이죠.

그러니 왜 저축을 하냐 라고 이 은행을 유산으로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저축을 하고 있으니 꿀밤을 때리면서

너는 너 생각만 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너는 내 생각을 부모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을 왜 하지 않느냐 라고

저축통장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주님을 따라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겠습니다.

 

이것이 기특하기 짝이 없는 저축해서 효도하겠다는 사람의 일 곧

지 생각만 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 생각이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이런 베드로를 마귀에게 붙잡히도록 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직접 기도해서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해

피를 발라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고 그 물음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말 하도록

 

믿음으로 말 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치 남을 7번 용서할 생각 말고

너나 770번 용서 받을 생각 하라는 것과 같다 말이죠.

 

이것이 기도할 생각 말고

너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아주 어려운 내용을 설명했습니다만

실제로 아주 쉬운데 너무 너무 쉬워서 안 믿겨지는 소리를 했습니다.

 

보통 기도를 어떻게 인간이 하는고 하니

먼저 인간은 기도 자체를 할 줄 모른다 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기도를 할 줄 몰라요

기도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엉터리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중언 부언의 뜻을 어머니께서 무엇인지 그 동안 묻고 싶다고 하셔서

중복 하는 언어, 곧 말을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라고 했지요.

마침 잘 물으셔서

제가 인간의 기도는 독자적일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기도 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즉 중언 부언이란 이방인의 기도란 우상의 기도요 우상에게 하는 기도인데

이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말을 같은 말로 반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가장 큰 문제는 대상이 없이 지 혼자 하는 말이다는 겁니다.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주고 받고 하는 말이 새로운 말이 아니라

대화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말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밖에 모르는 독자적인 말로 채우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8장에 저는 십의 이조를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교회 충성 봉사 했고 토색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상대방과의 언어를 통해서 대화의 내용이 달라지는게 아니라

지 혼자 일방적으로 나는 이거 이거 했고 이거 이거 했다는

혼자의 언어를 발설하는 이방인의 기도인 우상의 기도를

성전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이 기도한다는 겁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데 혼자서 김칫국을 마시는 거다 말이죠.

존재 대 존재로 볼 뿐이지 기능 곧 이름으로 안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를 이름의 개입으로써 기도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우상을 배격하는 평생을 우상을 단 한번도 믿은적이 없는

그 우상배격자들인 유대인이 실상은 우상숭배자로 들통나는 것이

본인 자체가 우상이 된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우상과 같은 유유상종의 모습을

실로암 소경으로부터 들통당하는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주셨다 말이죠.

 

오히려 저들이 우상숭배자 라고 뒤짚어 씌우는 이방인이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는

구원자를 외치는 입술로 말을 하더라 말이죠.

저들은 입이 있는데 말을 못하는데

그것도 우상숭배자인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이 오로지 하나님만 믿는 그런 환경으로만 도배가 된

그 유대인이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예수님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예수님의 음성을 못 듣더라 말이죠.

 

이런 역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경험해본 최고의 우상숭배자들은

불교나 천주교나 그런 자들은 세발의 피요

진짜 우상숭배자들은 저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상숭배에 빠진자들은

기독교인들이다 말이죠.

 

어쩌면 말씀이 그야말로 실제상황이다 말이죠.

정말 정말 역설적이다 말이죠.

 

그렇듯이

오늘날 기도하는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우상처럼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는

지 혼자 독자적인

존재로써만 우기고 주장하는

기도하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다 말이죠.

우상숭배자들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중언부언 즉 의문의 제사만 반복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기도는 뭔가 사건이 터지면 그 다음에 기도하지 말라고 말려도 기도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즉 사건이 먼저 터지고 그 다음 기도 이다 말이죠.

시간 순서처럼 마치 시계처럼 123시 순으로 흘러가고

1시가 없으면 2시도 없고 2시가 없으면 3시도 없다는 식이

인간이 시간에 갇혀서 기도하는 모습이고

 

이게 인간의 기도이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도는 그 반대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기도가 먼저이고

이 기도 때문에 사건이 터지는

시간이 거꾸로 가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도가 먼저이고

마치 이름이 먼저 이듯이 기능이 먼저이다 말이죠.

그 다음에 그 기도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수십번 반복해서 자주 이야기 해왔듯이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 할 건데

 

그래서 시편 1161절을 딱 보자 마자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믿음되신 예수님께서 개입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심으로 인한 결과가

바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말이죠.

 

결국 베드로는 믿은 적도 없고 기도한 적도 없는

둘 다 모조리 다 실패한 자였을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 덮쳐져서 기도하듯이

예수님의 일하심이 덮쳐져서 즉 믿음이 덮쳐져서 비로소 말하게 되더라 말이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더 자세하게 어머니께 설명하고자

누가복음 181절 부터의 어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

즉 하나님도 무시하고 인간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 모습으로써 예수님이 기도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 것을 가지고 다시 설명을 했습니다.

 

흔히 불의한 재판관을 귀찮게 해서라도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라고

흔히 목사들이 설교하는데 그거 사기치는 겁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시편 116편은 분명히 원수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겁니다.

즉 기도란 원수 문제와 연관이 됩니다.

이 원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구원문제는 없다 말이죠.

결국 구원문제인 셈입니다.

맞습니다. 다윗은 출애굽을 또 외치는 겁니다.

그 구원사건 말이죠.

원수를 이기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사건 말입니다.

 

십자가를 자꾸 운운하는 것은

결국 원수 문제를 계속 언급하는 것과 같고

그 원수로부터 구원받는 문제인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기도를 본능적으로 하듯이

원수문제를 개인의 사정에 따라 원수가 저 마다 주섬 주섬 다 다르고

그것에 따른 구원 문제도 다 다르게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소위 교리요 종교이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 속에서 또는 이방나라 로마 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운운한 것은

마치 다윗이 이스라엘 속에서 출애굽 사건을 운운하는 것은

십자가를 운운하는 것은

그야 말로 헛짓이다는 겁니다.

 

그 당시 다윗이 외친 출애굽을 아무도 안 듣듯이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고

원수 문제도 다른 식으로

마치 가룟유다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 독립하는 운동에

예수님을 끌여들일려고 하듯이

오늘날 교회는 최순실 박그네를 원수로 삼아서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보여 달라는 식으로

저 마다의 구원론을 형성하더라 말이죠.

 

전세계에서 이런 사태가 어디 우리나라 뿐이겠습니까?

안 그런 나라가 없다 말이죠.

스노든 이라는 영화를 보니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러니 갇혔는데

아무도 기도를 안해요

왜 믿음으로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은 있어도 말을 못해요

 

사실상 말을 믿음으로 말을 못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믿음을 주지 않는 믿음의 주가 안 주시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러니 입은 있으나 말을 못하고 눈은 있으나 보지못하고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는

우상과 같은 존재로 만드시는 분에 의한 것이다 말이죠.

 

주님 핑계대지 말라고 누가 그럴수 있는데

핑계를 대는게 아니라 이것이 복음이요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우상숭배자의 입을 막고 말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눈을 막아버리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떠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주이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과부의 기도를 볼때마다 누가 생각이 나는고 하니

바로 모세가 애굽왕의 멱살을 잡고 내 백성 내놔라 라는 모습과

또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의 멱살을 잡고 막내 내 놓으라 라고 귀찮게 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라고 하니

 

어머니께서 웃으시면서 요셉이 생각난다고

왜냐하면 자꾸 뺑뺑이 돌리면서 간첩을 만들어 가면서 까지 뭔지 알수 없는 것을 자꾸 내놓아라 라고 멱살 잡고 형제들을 귀찮게 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뭔지를 알려줘야 내 놓을껀데 뭔지도 모르는데 자꾸 내놓으라 라고

케보이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냐 말이죠.

자꾸 멱살 잡고 내놓아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요셉사건을 하나 더 추가 하시더라 말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미리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과부는 예수님이고 불의한 재판관은 시아버지 유다 또는 애굽왕 바로 또는 어머니께서 추가하신 요셉의 형들 그리고 저 김대식 이라고

 

그러니 과부되신 예수님께서 나의 멱살을 잡고 김대식이 내 놓으라고 자꾸 흔드는 겁니다.

그렇게 누가복음 181절 부터의 내용인 기도에 대해서 설명했다 말이죠.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멱살을 잡고 자꾸 귀찮게 남편 내놓으라 라고 합니다.

할수 없이 막내를 내놓은 듯이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막내 가 아니라 너 시아버지 너

너 가 나의 남편이다고 멱살 잡고 내놓으라 라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내어놓을수 없죠.

그렇게 되면 불륜 스캔들 곧 십자가 요나의 표적이 되어버리는데

어떻게 내어놓을수 있겠냐 말이죠.

 

말도 안되는 소리죠

불가능 하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믿음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상일 뿐입니다.

입은 있으나 말을 못하고

손은 있으나 만지지 못하는

 

관계성이 아닌 독자적인 기도일 뿐인 중언부언 즉 혼잣말이다는 겁니다.

 

과부되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인 하나님도 무시하고 사람도 무시하는 이 김대식의 멱살을 잡고 김대식~이기를 내어놓으라고 멱살을 잡고 귀찮게 한다 라고 설명했다 말이죠.

 

아니 나 김대식 여기 있잖아

 

너 말고 김대식이기

 

아니 내가 김대식인데 내가 김대식이기를 따로 내어놓으라는 무슨 말을 하느냐

 

너는 우상일 뿐이고

너는 존재일 뿐이고

 

존재보다 앞선 기능 곧 당위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김대식 이기를 내어놓으라 라는 겁니다.

존재적 김대식이기 에서 기능적 김대식을 뽑아내는 이 불가능성을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내어놓을수가 없는 거죠.

성도는 기능입니다. 존재가 아니라

그래서 성도는 불가능성을 기도합니다. 가능한 것을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요 중언부언이다 말이죠.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기 때문에 마침이 없습니다.

 

그러니 애굽왕 바로왕을 우리가 이해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모세가 바로왕의 멱살을 잡고 10번씩이나 찾아와서 귀찮게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건입니다.


이미 기도가 덮쳐졌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질 것이라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기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차적으로 벌어져야만 했었었었던 사건이다 말이죠.

시간이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기에 바로 주의 이름 때문에 벌어졌었었었야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내어놓으라 라는 겁니다.

존재 이스라엘이 아니라 기능 이스라엘을 내어놓으라.

 

아니 왜?

 

유월절 어린양의 피 제사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피 발려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기능 곧 죄인 내어놓아라 라는 겁니다.

 

아 그래! 그럼 우리에게는 수 많은 신이 있으니

너의 신도 수입해 줄게 나가지 말고 여기서 드리렴

 

안된다 나가서 드릴꺼다 우리 하나님이 안된다 카더라

 

아니 너거 하나님이 누군데?

 

여호와이다

 

여호와가 누군데?

 

여기서 이름 곧 기능이 나온다 말이죠.

즉 이름이 등장했다는 것은 상대적인 우상과 이제 한 세트를 이룬 겁니다.

 

나가지 말고 여기서 제사 드리라 라고 해도

안되는 이유가 이름 전쟁이기 때문에

원수가 등장한다 말이죠.

이것이 믿음으로 말하는

기도의 문제이다 말이죠.


믿음으로 말하는 것을 저들은 아무리 귀가 있어도

우상처럼 또 우상을 지은 손처럼 

존재로 듣지 기능으로 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말이죠.

 

마치 과부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의 멱살을 잡고 내 남편 내놔라 라고 멱살을 흔들면서

귀찮게 하는 거다 말이죠.

 

즉 기도는 다말이 귀찮게 했기 때문에 남편을 얻게 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태어나기도 전에 과부 다말의 남편이 시아버지 유다였다는 겁니다.

유다는 다말의 남편이였다는 것이 태어나기도 전에 작정된 겁니다.

 

이 관계성을 기도 곧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말이죠.


우상을 사람의 손으로 짖듯이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기도인 믿음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다말은 유다의 손에서 죽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죽은 다말이 도리어 자기를 죽인 유다를 살리는 겁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보여줄
다른 표적을 보여줄게 없는 요나의 표적인 겁니다.(반드시 거리끼는 걸림돌이어야 한다 말이죠)

그러니 백날 존재를 죽여본들 기능은 안 죽는 겁니다.

죽지를 않아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거든요.
의인은 존재로 살지 않아요.
떡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주의 이름 때문에 잠시 왔다가 철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존재로 살려고 하니 안 철수 할려고 해요 ㅋㅋ
철수를 해야 진짜 철수인데
안 철수 하니까 철수가 아니무이다
교회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 다윗은 철수하자 라는 겁니다.
제발 철수가 되어다오 라고 말이죠.
기도할 생각 말고 기도가 되어라고 ~~~


이것이 니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

곧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다 말이죠.

실로암 소경이 소경된 것은 그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런 우상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줄 몰라서 눈이 있어도 못 보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더라 말이죠.

그저 우기는 것은 존재의 제자

넌 예수 제자이지 신참 예수의 제자이지

우리는 수천년 묵은 모세 제자야 라고

존재를 우긴다 말이죠.

우상을 우긴다 말이죠. 자기를 위함만 우긴다 말이죠.

관계성 곧 사랑이 없어요.

성령으로 소통함이 없어요.

지혼잣말을 중언부언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 말마따나

도대체 뭘 내어놓아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느냐

말을 해라 뭘 내어놓아야 할지 말을 해 라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랐는데

 

세상에나 요셉이 말을 안해도 비로소 시아버지 유다가

드디어 며느리 다말과의 남편 아내의 관계에서

즉 사랑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말하는 그 기도에서 나온 자식을

내어놓으니까

드디어 통과 하는 겁니다.

 

패쓰 하더라 말이죠.

 

베드로도 그렇게 통과 합니다.

무시험 합격

 

이 무시험 합격 때문에

 

거꾸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었어여만 했다 말이죠.

즉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은혜를 더할려고 죄인이 아니라

그건 존재이고

 

기도 라는 기능 때문에

사건이 기도 때문에 터지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 곧 십자가의 죽음 피흘리심 때문인

믿음으로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유대인들 부끄럽게 여기는 걸림돌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어리석게 여기는 미련함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광이요 자랑인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믿음으로 말하는 기도이다 말이죠.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이름 없는 아이가 죽도록 아무리 기도해도 금식해도 회개해도 살릴수 없도록 무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작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동원이 된 세 번 부인 세 번 쓰리 희생번트였다는 겁니다.

아니 왜?

내 때문에 왜 저들이 죽어야 해?

 

과부 다말처럼 예수님이 다윗의 멱살을 잡고 다윗을 내어놓으라 라고 흔들면서 귀찮게 하는 것처럼

 

이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이유로 인해

 

비로소 원수가 보였던 겁니다.

이 원수를 발등상에 놓음으로써 동시에 다윗을 다윗으로부터 빼내시는 것이다 말이죠.

 

베드로가 백날 장지진다고 우겨도 결국 우상이요

우상을 짖는 손일 뿐인

마귀와 한 패거리일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원수 마귀로부터 베드로를 끄집어 내는 방법은

함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라는 사람의 일을 허용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막아버리고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기도하는 것을 막아버리고

그런 의문의 반복 백날 해 본들

아이는 안 살아난다 말이죠.

 

오히려 꺽으신 뼈로 기뻐함은

기도해서가 아니라

그건 존재요 우상이요

백날 회개 금식 기도 눈물 해도 아이를 살릴수가 없듯이

 

도리어 아이가 너를 살리고자 죽어야만 하는

이 걸림돌 거리끼는 걸림돌

이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가

나 보다 옳았다 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방식 아니면

우리는 원수로부터 구원 받을 길이 없다 말이죠.

 

원수가 들추어지지 않는데

원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이 독자적으로 형성이 되냐 말이죠.

 

그러니 원수 마귀와 한 패거리인 김대식의 멱살을 잡고

예수님은 과부처럼 김대식 내어놓으라 라고 흔들면서 귀찮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요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말이죠.

우상은 이렇게 믿음으로 말을 못해요

손으로 만질수도 없어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이런 우상과 같은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입니다 고쳐주소서 라고

상대방 외부

자아 밖의 한 인물을

내 손 밖의 한 인물의 이름을 봤더라면

고침이라도 받을텐데

본다고 우기는 존재 곧 우상일 뿐이기에

소경이다는 겁니다. 우상이다는 겁니다.

 

말이 역설에 역설을 자꾸 반복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백날 만져도 존재일 뿐이지

기능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말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자 라는 겁니다.

즉 내가 기도하는게 아니라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써의 가장 초극대로 가버린 최대의 절망의 상황에서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과부 다말처럼 대식이 내어놓으라고 눈뜨라고 기도하신 그 기도가 아니였다면

믿음으로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써 파렴치 하고 뻔뻔스럽기 그지 없으며

그야말로 선악을 뛰어넘어버리는

오로지 십자가만 쳐다보는 남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날때부터 소경인 실로암소경 보다 더 못한 인간이 되었을진정

 

이것이 바로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기도한번 한 적 없는

저축한번 한 적 없는

은행회장의 아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 용서 7번 용서 할 생각 하지 마시고

도리어 770번 용서 받기로 태어난

어리석은 지혜만 믿고 말하는

거리끼는 지혜만 외치는

탕자 곧 죄인이라는 기능으로 태어난 자인

기도의 아들로 태어남을 누리 라는 겁니다.

 

기도해본들 어차피 중언부언이요

의문의 제사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인애와 자비이다 말이죠.

 

맏아들은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받기로 작정된 겁니다.

이것을 감추고자

이 기능을 감추고자 존재를 주장하고 우기면서

의인으로 살아야 하고 (즉 존재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빡빡 우기는 성화론자들 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자로 살아야만 하고 존재를 우기고 행하는 것을 주장하고요

 

반대로

탕자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원치 않아도 평생 사기꾼으로 살아야만 하고

죄인으로만 살아야 하고

 

예수님이라는 이름 때문에 원수로 살아야만 하는

원수를 사랑한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

태어난

기도의 아들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아들

 

캬 오늘 부제목 하나 더 달아야 겠네요

 

기도의 아들, 십자가가 낳은 아들, 십자가의 피가 낳은 죄인

 

그러니 당연히 우상숭배자와 우상으로부터 우리는

그 잘난 의인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믿음으로 말하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도하는 중언부언의 기도의 달인들로부터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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