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정욕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노래하겠네(시편 134)


 

(134: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2, 개역)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3, 개역)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제목을 찬송가 313장 후렴구를 응용했습니다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마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나의 죄를 아는 나의 죄를 사하는

아무도 해결할수 없는 이 꽁꽁숨겨놓은 죄악을

해결하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우물 두레박 우물 긷는 동이를 집어던지고

마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처럼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봤다고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절대로 나올수 없는 찬양이다 말이죠.

 

육신의 정욕을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그러니 질문하신 분이 자꾸 문자 또는 존재로 보게 되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금가락지요

라는 말과

아랫구절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를 따로 따로 따로국밥으로 보더라 말이죠.

같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을때에

사실은 진짜 택하신 족속인 이스라엘을 버리고 개같은 이방인을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다 말이죠.

 

10절 너희가 전에는 백성 아니더니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사실은 진짜 백성 이스라엘은 백성이였는데 이제는 백성 아니다는 말이다 말이죠.

그런 껍떼기 시절은 그림자 시절은 갔다는 겁니다.

새술은 새 부대에 새 시대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상의 시대에는 개인적인 자질을 따지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따지는 시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가 전에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못하는 자였는데 이제는 제어했다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를 보고 외치는 겁니다.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을 보고 외치는게 아니라

 

결국 오히려 개인적인 자질로 따지면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데 달인 도사들인

유대인을

누가 봐도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을 예수님은 육신의 정욕을 못 벗는

완악한 수건을 못 벗는 사단의 회 라고 취급해 버린다는 겁니다.

 

역시나 기준은 개인행동유무가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입니다. 존재 이전의 창세전에 기록된 기능 곧 십자가의 피 기능입니다.

 

그러니 이제 금지라는 명령어에 매이지 않는다 말이죠.

명령어 지켜서 구원 받을 자가 없거든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마귀는 이 세상을 원인을 따져야 설명이 되도록 만들었다 말이죠.

그래야 소통이 되도록 한 겁니다.

원인 없는 세상은 거부하는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은 송축하라입니다
.

?

 

이 송축

곧 찬양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찬양입니다.

 

만약 찬양이 이유가 있고 원인이 생겨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찬양이 아니무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찬양이 이유 없이 원인 없이 나온 때를

시편기자는 상기 시키는 겁니다.

 

그때가 바로

밤입니다.

 

밤 밤 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곧 주의 인자하심을 찾고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밤에? ? 주님의 성실하심이 지근 지근 밟아버리는 심판이 퍼부어졌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곧 출애굽 사건 재현입니다.

십자가 사건

곧 유월절 어린양의 피 사건을 반복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 만이

이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세상을 진멸할수 있다는 겁니다.

나의 실천 유무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개인 숙제로 만드는 것이 바로

마귀라는 영이 육신의 정욕으로 가둔 세상이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자들은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서

자력으로

예수님의 피 없이도 된다고 보는 겁니다.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키는 부자청년처럼 말이죠.

그게 다들 부러워 하는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자이다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할 정도로

개인적인 자질이 뛰어난

예수님의 피가 구지 구지 필요가 없어도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없어도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자가 말이죠.

 

그런데 성전에 올라가서 보니까

그것이 거꾸로 였다는 겁니다.

그들이 오히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한 것이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증거였다는 겁니다.

주님을 안 쳐다보니까 말이죠.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못할 정도로

율법의 정신을 모독하는 자들이였다는 겁니다.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오히려 금가락지 좋은 옥 신발 천국잔치를 시기하는

죄인 하나 돌아와서 천국의 천사들이 다들 기뻐하는 그 천국잔치에

혼자 삐뚤어져서 잔치 예복을 입지 않는

피 옷을 거부하는 자처럼 말이죠.

이게 바로 십자가의 피를 거부하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선이 십자가 중심으로

다 이루셨다 중심으로 봐야지

예수님이 다 이루신 언약 완성으로 봐야지

개인의 숙제로 본다는 자체가 오히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 말라 라는 명령어가 오히려 더 하도록 부추기는 금기가 더 부추기는 이 사망의 몸의 원리를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세계에서는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말이죠.

원인 없다

원인 없이 결과로 누리는 겁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말이죠.

 

그런데 원인을 따지겠다는 자체가

결과가 없는

마침이 없는

무한반복의 의문의 쳇바퀴에 갇혀 버려서

뫼비우스 띠처럼 말이죠.

시츠프스의 신화처럼

겨우 겨우 참고 참아서

돌 위로 경건의 계단을 1000계단 올라가서 드디어 정상 정복했더니만

쪼르륵 미끄려져 내려와서

다시 처음부터 한 계단 두 계단 또 올라가는

아무 의미없는 헛짓을 반복하더라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자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죠.

 

자아가 없으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결과만 덮쳐버린 겁니다.

내가 나를 다룰 필요가 없다 말이죠.

 

결과는 저 분이 다 일괄처리해 버렸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죄수복을 입고서

특별사면이라는 예수님의 피 도장으로 박힌 붉은 피 글씨가 박힌채로

 

이 피를 노래하는 겁니다.

 

남들은 다 무시하죠

죄수라고

 

붉은 피를 안 볼려고 해요

 

그런데 죄수는 죄수인데

피 글자로 구원 받고

 

저들은 흰옷 입었고 죄수 복을 입지도 않았는데

피 글자가 없어서 무조건 지옥이다는 겁니다.

이 피의 붉은 글자를 안 볼려고 무시한다 말이죠.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거든요.

하나님의 저주라고

 

그런데 우짭니까? 이 피가 안 발리면 다 지옥인데

흰 옷 입었다고 천국가는 줄 아느냐 말이죠.

육신의 정욕을 제어했다고 천국가는 줄 아느냐 말이죠.

 

주님의 합격 도장인 피가 묻혀서 천국가는데

다들 죄인 되기싫어서

피 도장 합격 도장이 싫은거다 말이죠.

 

그렇게 쪽팔려서 살빠엔

차라리 그냥 피 없이 의인으로 흰옷만 입고 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겉이 희다고 속 검은줄 모르는 줄 아느냐

어딜 속일려구

 

땅에 쓱 ㅆ ㅡ ㄱ S S G 하고 쓰니까

다들 도망치더라 말이죠.

 

뭐라고 쓰셨을까요?

이 남자는 어젯밤에 어떤 창녀에게 몸값을 치렀습니다 라고

어떤 분이 우스께 소리로 하던데

가만히 보니 그 반대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부자청년 이야기가 힌트 였습니다.

물론 중요한 건 아닙니다.

 

즉 어제 이 남자에게 아내가 또는 이웃이 도와달라고 했는데

일체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십의 이조 드리는데 정신팔려 있었다

이웃환대법이라는 율법정신을 모독했다 라는 식이

마치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주라 라는 식과 같지 않겠냐 라는 식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완성할 율법의 완성인 사랑과 연관된 것을 바닥에 쓰셨지 않았나 라고 말이죠.

 

결국 율법도 못 지키면서 율법 지킨 것들을 내세우는 것이

저들의 육신의 정욕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개같은 이방인은 그야말로 개다 말이죠 개

오죽하면 귀신들린 딸의 어미가

딸을 고쳐 달라고 했겠냐 말이죠.

 

그냥 아픈 딸을 고쳐달라고 사건을 기록하는게 아니라

상대적인 누구를 겨냥하고서 기록하시냐 말이죠.

너희들 유대인이 보기에도 이 여자 맞다 개 맞다

그런 개같은 이방여자도 예수님을 찬양하는데

왜 너희들은 개도 아니면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찬양 못하니?

 

너희들은 바로

입으로는 나를 찬양하나 속으로는 저주가 가득하다는 겁니다.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6:24, 개역)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29:13,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5:8, 개역)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6, 개역)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가장 존경 받는 유대관원 곧 선생 곧 바리새인이

예수님 앞에서는 가장 마귀로 독사의 자식으로 취급받는 이유이다 말이죠.

 

원인을 갖춘 것이 바로 악마들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뭐 막살지 마세요?????

막 살지 마세요

 

소는 누가 키우냐 말이죠.

 

찬양이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저절로 튀어나오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원인을 갖추는 찬양을 해온 유대인을 부러워 하고 있으니

그 유대인의 속성이 바로 독사의 자식이였음을 터트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만이 밝히 보임으로써 꾀는 속임수가 들통나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제발 꾀지 말라 말이죠.

속이지 말라 말이죠.

나 자신을 육신의 정욕을 제어 할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을 기뻐 뛰며 주를 보게 된 겁니다.

이미 육신의 정욕 벗은 우리 영혼을 기뻐 뛰며 주를 보게 된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무슨 수로 자기 자신의 숙제를 해서 눈을 뜨겠습니까?

안된다는 것을 알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바리새인들이 이 날 때 부터의 죄인을 가지고 시험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말이죠.

 

그런데 날 때부터 소경 된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니

이런 해석법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인간에게서는 안 나온다 말이죠.

인간 자체는 존재이기에

존재를 기준으로 하는

원인에 따른 결과를 따지거든요.

그러니 절대로 눈 뜨는 결과가 나올수 없어서

마음껏 안심 푹 놓고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겁니다,

 

이게 육입니다.

 

그런데 영혼 곧 영은

그게 바보같이 영에 말려드는 육의 속성을 들추어내는 것이 영이다 말이죠.

?

원인 없는 결과를 나타내는

아니 나타내고는 못 배기거든요.

눈 뜨니까

당황하셨어요~~~

갑자기 순회를 합니다.

대화의 주제를 바꿔 버려요

얼마나 악마들입니까?

우리도 똑같아요

갑자기 불리하면 대화의 주제를 확 바꿔요

너 누구 제자야

신참 예수 제자이지

너 겨우 역사가 30년 밖에 안되지

우리는 모세 제자야

역사가 1300년이야

천년 묵었어

라고 말이죠.

이게 역사와 정통을 우려먹는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자들이다는 겁니다.

지금도 유대인의 교육을 보면 그야말로 마귀들 모습 그대로입니다.

경건의 달인이라는 것이 자랑꺼리이던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육의 자랑 뿐이지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는 놈은 단 한놈도 없는 악마들이다 말이죠.

그것으로 세상을 지배하더라 말이죠.

저런 교육방식으로 말이죠.

 

누가 찬양자 입니까?

주께서 부르짖도록 하기 위해서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했거든요.

 

그럼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외치는 자가 찬양자입니다.

피 발라 주세요 라고 말이죠.

 

그런데 마귀들은 이 피를 노래 못하는 겁니다.

 

오히려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것을 부끄러운줄 모르고 자랑 하고 있습니다.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못 나누어 주는

긍휼을 쳐다보지 못함을 부끄러운줄 모르고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다고 자랑하고 있다 말이죠.

 

한 율법사가 큰 계명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못 지키는 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도리어 그 껍데기를 지켰다고 육신의 정욕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로

마치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식으로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묻자

지 입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라고

지 입으로 지 스스로가 율법을 어겼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니까

비로소 육신의 정욕 곧 예수님을 저주하는데 본심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너 자신이 강도 만난 자인줄도 모르고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다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그 피흘리심으로 긍휼을 받아야 할 판국에

큰 계명 두 개를 지켰다고라 고라 고라

 

그러니 마귀로 돌변하는 거다 말이죠.

 

이게 찬양입니다.

멀쩡한 인간을 마귀로 돌변케 만드는 것이 찬양입니다.

 

?

십자가의 피를 노래 하거든요.

 

아니 그랬더니만

그 동안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천사로 인기 있던 자들이

갑자기 얼굴에 가면이 벗겨지면서

마귀로 돌변하더라 말이죠.

광명한 천사의 실체가 바로

이 십자가의 피로 인해서 들통나는 겁니다.

 

이것을 글쎄 시편 찬양자가

지금 이스라엘 속에서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때 출애굽 때의 찬양을 또 외치더라 말이져

 

결국 이스라엘 탈출입니다.

 

이사야 43장에 내 백성은 나를 찬양하기 위해 지었고 택했다고 합니다.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예루살렘 약속의 땅에 있을때에는 안 불러요

주님이 얼마나 듣고 싶었냐 하면

출애굽사건을 벌리니까 그때서야 부릅니다.

곧 바벨론 포로 되어 가니까

그 바벨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하는 요나처럼 찬양을 부르더라 말이죠.

 

포로 안되었을때에는 때려 죽어도 안 부르더니

포로 잡혀 가니까 말이죠.

 

이런 예수님 이해가 되십니까?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노래 하겠습니까?

결핍 된게 없는데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었다 말이죠.

그런데 포로 되어 잡혀 가니가

비로소 신나게 춤 추는 겁니다.

이제 너희들은 주님을 찬양 안 하고는 못 배긴다고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찬양이다는 겁니다.

 

찬양 할 수 없는 가운데 찬양하는 겁니다.

소망 할 수 없는 가운데 소망하는 겁니다.

 

불가능한 찬양 곧 사건으로써의 찬양을 말이죠.

 

우리는 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

이 개같은 이방인 여자처럼

맞습니다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긍휼로써 먹고 살지 않습니까 라고

탕자가 이 부스러기 하나만 보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었다 말이죠.

 

아무도 육신의 정욕을 해결할 자 없습니다.

원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수가 없습니다.

조건 갖출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예수님이

너 날 사랑하냐 라고 일체 묻지 않고 그 피만 보실때에

네 제가 주님의 피로 구원 받았습니다 라고

원인 없는 결과로

이 피만 옳았습니다.

나 보다 옳은 피만 자랑하겠습니다 화답하는 겁니다.

아니 예수님도 안 따지는데
왜 마귀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저 토색하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냐 말이죠
마귀도 안되는 판국에 왜 내가 내 자신을 미완료로 취급하냐 말이죠.
주님은 다 이루셨다를 밀어붙이는데
더 이상 완성 안된게 없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결국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찬양만을 부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노래하기가 아니라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노래하는 자로 태어난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는

십자가의 피로 태어난 찬양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