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자신을 위한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한 야곱 (시편 135편)
(시 135: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히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 10:30, 새번역)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고 말씀하시고, 또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신 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신 32:35 ㉫신 32:36; 시 135:14』
(히 10:30, 공동) 『"㉠원수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시고 또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하고 말씀하신 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신명 32:35. ㉡신명 32:36; 시편 135:1-4.』
(시 135: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시 135:2, 개역) 『여호와의 집 우리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너희여』
(시 135:3, 개역)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시 135: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시 135:5, 개역)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광대하시며 우리 모든 신보다 높으시도다』
(시 135:6, 개역)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행하셨도다』
(시 135:7, 개역)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시 135:8, 개역)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시 135:9, 개역)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 징조와 기사를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복에게 임하게 하셨도다』
(시 135:10, 개역) 『저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시 135:11, 개역)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시 135:12, 개역)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시 135:13,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기념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 135:1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리로다』
(시 135:15, 개역)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시 135:16, 개역)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 135:17, 개역)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시 135:18, 개역)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라』
(시 135:19, 개역)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5:20, 개역)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5:21, 개역) 『예루살렘에 거하신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시 135:1, 새번역)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시 135:2, 새번역) 『주님의 집 안에, 우리 하나님의 집 뜰 안에 서 있는 사람들아,』
(시 135:3, 새번역) 『주님은 선하시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가 은혜를 베푸시니, 그의 이름 찬송하여라.』
(시 135:4, 새번역) 『주님께서는 야곱을 당신의 것으로 택하시며, 이스라엘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택하셨다.』
(시 135:5, 새번역) 『나는 알고 있다.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며, 어느 신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시 135:6, 새번역) 『주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바다 밑 깊고 깊은 곳에서도, 어디에서나,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분이다.』
(시 135:7, 새번역) 『땅 끝에서 안개를 일으키시고, 비를 내리시려 번개를 치시고, 바람을 창고에서 끌어내기도 하신다.』
(시 135:8, 새번역) 『이집트에서 태어난 맏이는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모두 치셨다.』
(시 135:9, 새번역) 『이집트야, 주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너희에게 나타내셨다. 바로의 모든 신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시 135:10, 새번역) 『주님께서 많은 나라를 치시고 힘이 있는 왕들을 죽이셨으니,』
(시 135:11, 새번역)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 가나안의 모든 왕들을 죽이셨다.』
(시 135:12, 새번역) 『주님께서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주셨으니,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다.』
(시 135:13, 새번역)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기념하는 일이 대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시 135:14, 새번역)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변호해 주시고, 당신의 종들을 위로하여 주신다.』
(시 135:15, 새번역) 『이방 나라의 우상들은 은덩이나 금덩이일 뿐,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시 135:16, 새번역)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시 135:17, 새번역)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으로 숨도 쉴 수 없으니,』
(시 135:18, 새번역) 『우상을 만든 자들과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은 누구나 우상과 같이 될 것이다.』
(시 135:19, 새번역) 『이스라엘 가문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아론 가문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시 135:20, 새번역) 『레위 가문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송축하여라.』
(시 135:21, 새번역) 『예루살렘에 계시는 주님, 시온에서 드리는 찬송을 받아 주십시오. ㉡할렐루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출애굽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은 오로지 예수님 자신만을 위해서 벌린 사건입니다.
즉 인간을 위해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좋아라 할만한 요소가 십자가 사건에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사건에 특별한 소유물이 등장하는데 있어서
바로 야곱 곧 이스라엘입니다.
결국 야곱이나 이스라엘은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광야교회란 죽음이라는 사막 속에서 태어났기에
기능일 뿐이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만을 노래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존재 이전의 기능
자 그렇기 때문에 애굽과 히브리인 이 둘 사이는 원수지간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해요
원수 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곧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의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죠.
그 상관 없는 구원을 오늘날 기독교는 구원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앞에서 댓글로 질문하신 분이
일관성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관성이 없거든요.
맞습니다.
일관성이 있어 버리면 인간의 믿음이 가능해 집니다.
결국 성경은 늘 열려있는 개방이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란 종교 자체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존재이거든요.
주님이 구지 십자가에 달리는 사건이 필요가 없이도
믿음이 가능해져요.
그래야 종교가 유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졸지에 단절성을 말하는 겁니다.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런 복음을 예수님께서 증거하실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에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는 반응이였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는 겁니다.
단절성이 너무 너무 또렷해 짐을 그들이 직시했거든요.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 때 마다 사람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기적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니까
다들 되돌아 가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은 나의 구원에 나의 구원자 조건에 안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나의 표적은 단절 곧 기적을 꺠는 기적
구원을 깨는 구원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단절 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종교는 가능성을 조금이라고 부여해야 의미가 됩니다.
나 너 우리 모두다 의미가 된다 말이죠.
이게 존재입니다. 곧 육입니다.
그런데 기능이란 곧 육 이전의 영은 존재 가 존재하기 전에 있었기에
기능은 딱 하나 뿐입니다.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걸림돌 기능 말이죠. 이것이 성령의 일 입니다.
이 기능 때문에
특별한 소유로 택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자신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특별한 소유 자체가 맏아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남들은 다 용서해도 저 탕자만큼은 절대로 용서하시면 안된다고
돌부리 턱 걸려 넘어서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 단 한 사람 곧 이런 개인 단 한사람만을 위한 구원 과연 사람들이 원할까요?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이지 않거든요.
구원 사건이 모두를 위해야 하는데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면 다들 반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버립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 보편성에 맞지 않거든요.
건물이 뭡니까? 사회조직이고 국가 조직이고 나라와 민족이고
팔 다리 머리 몸 과 같은 유기체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천국이라는 나라에 걸맞지 않아서 버렸다 말이죠.
곧 유대인에게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에 안 맞더라 말이죠.
우리 모임에 우리 조직에 안 맞다는 겁니다.
곧 머리 가 아니다는 겁니다.
아무리 특별해도 보편성 속에서 특별해야 자랑꺼리가 됩니다.
머리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데 딸랑 한 명을 두고서 특별하다 라고 하면
누가 바라봐야 특별한지 아닌지의 여부가 생길 것 아니겠습니까?
몸이 없이 단독적으로 머리가 머리 다울수가 없잖아요.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리더 딸랑 혼자 있는데 어떻게 뛰어난 리더 이냐 라고 비교를 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다수 속에서 특별하게 구별 되는 것이다 말이죠.
지 혼자 있는 세상에 나는 특별해 라고 한다면
지 혼자 있는 세상에서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냐 말이죠.
모든 어머니들이 극성스럽게 자기 아들은 특별나다 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다른 어미의 자식들 보다 ~~~ 라는 대상들을 염두하고서 이다 말이죠.
아무도 아들도 없는 가운데 내 아들은 특별나다 라고 한다면 의미 없거든요.
자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나의 이스라엘은 곧 교회는 신부된 교회는 특별나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라고 했을때에
반드시 누구를 염두하고서 하신다 라고 했습니까?
바로 전에는 백성이였는데 이제는 백성이 아닌 자칭 유대인의 모임 회 라고 하는 사단의 회
곧 맏아들을 염두하고서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껴주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아예 코 앞에서 말이죠.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서로 대조 하면서 코 앞에서 보란듯이 말입니다.
이게 기능이예요
존재에서는 나올수 없는 의미입니다.
존재는 일관성만 추구하면 되요.
나만 잘 하면 됩니다. 나의 독자적인 숙제만 하면 된다 말이죠.
그런데 기능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의 피를 말해야 하거든요. 찬양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찬양자로 태어난 자와 찬양하기를 지키는 자를 반드시 대조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반드시 애굽과 이스라엘 입니다.
반드시 에서와 야곱이 등장하는 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했고 누가?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말이죠.
이게 기능인데
존재인 형 에서는 이렇게 창세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작정했다 라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절대로 변경 될 리가 없다고 여겨서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던 겁니다.
장자권에 대한 집착 한 것이 오히려 장자권을 무시한 셈이다 말이죠.
왜냐 장자권은 주님에게 달린거거든요.
곧 약속에 달려 있는데
약속을 무시하거든요.
언약의 피를 무시하거든요.
즉 이스라엘은 무조건 장자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인데
그것을 보증한 양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순서대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인데
뭐 팥 죽 한 그릇에 왔다리 갔다리 일관성 없게
일관성 없게
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존재를 위한 존재의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본인이 정한 하늘의 도리를 하나님 본인이 배신 때릴 리가 없다는 거죠.
절대로 절대로 네버 네버 전에는 백성이였는데 이제는 백성 아니다 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전에는 긍휼을 얻었는데 이제는 긍휼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나님 본인이 본인 스스로를 거스리는 위반을 벌리게 되면
하나님 본인이 거짓말 쟁이가 되는데???
이게 존재가 존재 자신을 투영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결국 신은 자신이 내어놓은 법에 의해서
졸지에 인간의 시다바리가 되는 겁니다. 우상이다는 겁니다.
종교가 괜히 신을 언급하는게 아닙니다.
신은 두 말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 신을 믿어주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이 인간에게 코 끼인 겁니다.
미끼를 확 물어 버린 것이여
결국 인간은 아니 신은 인간 없이는 못 사는 겁니다.
연민이다 말이죠.
인간을 위한 신이 모든 종교의 신입니다.
신은 인간에게 두손 두발 싹싹 빌면서 다른 신을 믿지 말고 제발 나를 믿어라 라고
애걸 복걸 하는 겁니다.
그 신이 바로 현대인에게서는 인간 자기자 신 이다는 겁니다.
약속을 못 지키는 거죠.
이 약속은 곧 언약의 피 이거든요.
이 언약의 피를 못 보여주는 겁니다.
(히 10:29, 개역)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언약의 피를 찬양 못 하는 겁니다.
신을 취사선택할 수 있을 정도이니 왜 뭐가 아쉬워서 찬양 영광 돌리겠냐 말이죠.
오늘날 현대인들은 국가도 취사선택해서 이민을 갈수 있을 정도가 된 겁니다.
과거는 그 신이 바로 국가이다 말이죠. 짐승
아무튼 신과 국가는 결국 인간의 시녀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존재의 투영 투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특별한 소유물로 삼는데 있어서
그 특별한 소유물이 기능으로써 작용하는데
바로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작정하신 겁니다.
또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이것이 자신이 피 흘리신 십자가를 위해서 이 둘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주의 오른팔에 사랑하기로 작정된 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죠.
또 하나는 주의 발등상에 미워하기로 작정된 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놓여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라는 겁니다.
즉 이것도 기능이기에
그 반대는 존재는 자기를 위해서이기에 우상인거죠. 우상이란 약속을 못 지킨다는 겁니다.
그럼 약속은 뭔데요? 베드로야 너 나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이다는 겁니다.
언약의 피를 발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하시기로 작정했다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을 드디어 나타내는 겁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할줄 알고 오독 오해 했습니다.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그대 왜 나를 세 번 부인했나요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날 위해 슬퍼 말아요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의미를 잃어버린 그 표정
날 사랑하지 말아요
너무 늦은 얘기잖아요
애타게 기다리지 말아요
사랑은 끝났으니까
사랑은 이제 내게 남아있지 않아요
아무런 느낌 가질 수 없어요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이렇게 물을줄 알았다 말이죠.
그런데 아닙니다.
약속 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를 보시는게 아니라
베드로에게 발린 피를 자신의 피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너 나 사랑하제
나는 저런 우상들이 하는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저런 존재들이 묻고 따지는 조건을 일체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너 나 사랑하지 라고 묻는다 말이죠.
존재를 깨우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존재성으로만 따지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기능을 깨우는 겁니다.
베드로 자신을 깨우게 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항상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드는 거죠.
베드로 이전의 베드로 태어나기도 전의 기능을 깨우는 겁니다.
그래 맞아 이 말 하라고 일부러 나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라고 하셨구나 라고
오히려 더 신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연기라고 했지요.
이 삼일의 간극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을 여러 버전의 장면으로 묘사합니다
어머니께서 막 기뻐 눈물을 막 흘리신다 말이죠.
몇 번을 들어도 천번을 듣고 만번을 들어도 막 깔깔 거리면서
얼마나 신나게 우시면서 기뻐하시는지
입을 옆으로 삐죽이면서 옆에 있는 마귀보란 듯이 눈으로 눈치주면서 싸인을 보냅니다.
속삭이듯이 야야야 베드로야 마귀가 보는 앞에서 나를 사랑한다 크게 말해 알았지? 라고 윙크 싸인 보내고
스탠바이 큐 하면
졸지에 간극이 생기는 겁니다.
결국 마귀가 나 베드로를 잡기 위해서
예수님이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하신게 아니라
예수님이 마귀를 잡기 위해서 나를 미끼로 사용해서
마귀에게 잡혀 오라는 겁니다.
마귀가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라고 신나게 둘이 짝짝꿍 함정수사로
마귀가 잡히는 것이다는 겁니다.
마귀 지가 잡히는 줄 모르고 자기 꾀에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말려드는 겁니다.
다윗은 정작 누가 봐도 빼도 박도 못하게 잡혔는데 뒤로 확 빼돌리더라 말이죠.
이 부조리한 함정수사가 바로 십자가였던 겁니다.
그러니 헬라인 곧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에게는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한 짖이고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기적이라는 도움닫기가 아니라 오히려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 아닌 그런 기적을 다 없애버리는 기적인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거리끼는 걸려 넘어뜨리는 돌이다 말이죠.
그러므로 원수 잡는 것은 하나님께 있지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원수이지 니 원수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 원수로 부터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애굽과 히브리인 이 둘 지간이 원수 지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이 주의 인자하심만
개입하게 되면
역사 속에 비집고 침범하게 되면
졸지에 어제의 절친이 오늘은 원수지간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것도 형제이다 말이죠. 맏아들 탕자 에서와 야곱
그것도 쌍둥이 이다는 겁니다.
쌍둥이 이면 일수록 일심동체 라는 존재가 아니라
더더욱 단절 시키는 영영히 멀어지는 간극을 보여주는데
기가막힌 도구가 된다는 겁니다.
쌍둥이는 오히려 남들 보다 더 잘 통하는데
텔레파시라는 소통은 무슨 놈의 소통
완전히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피의 영광을 위해서 벌어지는
나타나야만 하는 영원한 갈라짐인 간극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두 쌍둥이를 보겠습니까?
아니면 이 둘을 극과 극으로 갈라버리는 이 간극을 바라보겠습니까?
둘은 차이가 안나니까 안 보겠지만
오로지 이 둘을 벌려 버리는 이 간극이 차이로써 보는 겁니다.
이 소리가 우상인 자기자신의 존재만을 쫏는 자에게는
이 약속이 다 헛소리인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겁니다.
동생으로 태어났으면 동생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쌍둥이 몇초 차이라도
그 몇초로 먼저된자는 먼저 된자는 겁니다.
이것이 확대 확장이 되어서 국가와 국가로써
애굽과 이스라엘의 대립으로
지옥과 천국의 대립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약속은 바로 존재를 위한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는 기능 곧 존재 이전의 기능을 발산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가감히 뻔뻔스럽게 팥 죽 한 그릇으로 이 세상의 법칙을 깨고자 팥죽으로 형 자리를 사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을 깨고자 팥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산다 말이죠.
육체의 법칙을 말이죠.
육신의 정욕을 깨고자 유월절 어린양의 피 한 그릇으로 애굽이라는 우상을 깨는 겁니다. 약속을 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기도 보세요 무시무시합니다.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지요.
아무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출애굽 전쟁 요청입니다.
이스라엘 꼬라지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과 같은 짖을 한다고 이 출이스라엘 전쟁을 벌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기준이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그 피를 잊었다는 겁니다.
이것에 대한 원수 갚기입니다.
(히 10:29, 개역)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처음사랑에 대한 거부
긍휼에 대한 거부
은혜에 대한 거부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요청 곧 원수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쳐달라고 합니다.
높은자 낮추고 낮은자 높여 달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육신의 정욕에서 보는 그런 높 낮이가 아닙니다.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바로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다 말이죠.
그런 육에서 보는 높 낮이가 아닌
십자가라는 언약의 피 기준이다는 겁니다.
만약 저렇게 되면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할 이유도 없고
그냥 처음부터 저 바리새인이나 또는 엣세네 파 등등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로마와 싸우면 됩니다.
그 로마가 원수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로마가 원수가 아니다는 겁니다.
진짜 원수는 그런 나쁜놈 로마와 싸우고 있다고
어두움은 빛을 이길수 없다고 노래하면서 촛불 시위를 하는
그 자들이 높은 자이다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자들이다는 겁니다.
불교와 천주교의 성화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불의와 싸우는
그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이렇게 어두움과 싸우는 선으로써 빛으로써
로마와 싸우고 있는 가운데 있어서
매국노 세리 곧 로마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저 세리 저 토색하는 세리를
얼마나 얍잡아 볼 수밖에 없겠냐 말이죠.
그게 바로 높은자요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자이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말이죠.
그런데 마리아가 바로 저런 자들을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여달라고
본인이 당해 봤거든요.
율법을 든 머슴아들이 남자 없이 임신해서 아기를 배고 있으니
얼마나 요상한 존재로 보고 마녀사냥을 하겠냐 말이죠.
마치 앞의 글에서 언급했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자로 취급한다 말이죠.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 취급하는 겁니다.
헤롯만 두 살 밑으로 아기를 죽이는게 아니다 말이죠.
애굽만 두 살 밑으로 아기를 다 죽이는게 아니다 말이죠.
누구도?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유대인도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간판을 단 자들이
삼일 만에 짖는 성전을 무시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이들도 똑같이 두 살 밑으로 아기를 죽이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를, 언약의 피를 무시하기 때문에 말이죠.
결국 사싱상 그 훨씬 이전에 뱃속에 있을 빼부터 죽이고자 하는 겁니다.
마리아 사건을 통해서 보면 말이죠.
그러니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큰 붉은 용과 다를바 없는 겁니다.
왜? 육신의 정욕이 가득하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가 빛이라는 둥 선이라는 둥
허구헛날 그 추운 날씨에 촛불들고 나가서
어두움은 빛을 이길수 없다고 외쳤으니
얼마나 육신의 정욕이 가득한 것을 정당화 하고 정당화 했겠냐 말이죠.
얼마나 구제불능인고 하니 그 육신의 정욕을 짜르라고 하니
육신의 정욕을 짜를 생각을 안하고 손할례당으로 전락하더라 말이죠.
이게 법입니다.
법은 지켰으니 더 이상 따지지 말라 간섭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과 신은 버린 겁니다.
껍데기를 지킴으로써 말이죠.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러니 오히려 더더욱 지킬려고 해요
그 정도로 구제불능이라서 마음판의 할례를 말하니까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괜히 쓸데 없이 할례를 한 것이 오히려 지옥 가고파서 몸부림 친 꼴 밖에 안되더라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가 다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래서 마리아가 외치는 겁니다.
이 아기가 바로 이 전쟁을 수행케 해 달라고 말이죠.
이것도 나라냐 가 아니라
이것도 이스라엘이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전쟁의 전리품이 바로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결국 마리아도 참선지자들처럼 이스라엘을 확 등떠밀어서 물에 빠뜨려
원수가 누구인지 구세주가 누구인지를 보라는 겁니다.
당연히 원수와 싸우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본인들이 원수갚기를 하고 있으니
그래서 독립운동가와 매국노의 차이를 거룩의 기준을 육으로써 가르고 있더라 말이죠,
존재로 가르고 있더라 말이죠.
정작 성령은 곧 기능은 그 반대로 가르고 있는데
전에는 백성 아닌 자가 백성이 되고
긍휼을 얻지 못한 자가 긍휼을 얻게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다 이루셨다에서 나오는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는 이 약속
이 약속 중심으로 갈라지는데
육으로 존재로 가르고 있으니
그게 무슨 놈의 이스라엘 입니까
그래서 개같은 이방인 여자를 이스라엘로 세우고
방금 저들이 욕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한 그 세리를
이 약속을 위해서 동원이 되는 것이 야곱 곧 이스라엘 로 삼으시는 겁니다.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그건 우상이고
예수님 자신의 피를 위하여
언약의 피를 위해
먼저 된자 나중으로
나중 된자 먼저 되게 말이죠.
그래서 쎄고 쎈 허다한 나라 또 땅 다 내비두고 왜 하필이면
애굽 속에 탁란 하시느냐 말이죠.
피로 가르지 딴 것으로 안 가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겁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꼭 마귀 보는 앞에라야 마귀가 발똥합니다.
탕자를 맏아들이 보는 앞에라야
금가락지 살진소 좋은 옷 새신발의 기능이 나타나는 겁니다.
마귀보란 듯이 펼쳐지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이 원수 곧 예수님의 원수에게서 건져주시겠다는 겁니다.
나의 원수도 아닌데 왜 그 마귀라는 원수에게서 건져주시겠다는 거죠.
나의 원수는 바로 로마요 애굽이요 저 독재자 박그네요
악덕 업주 갑의 기업이요.
사회 악인데???
갑질하는 사장들인데 말이죠.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저들이 악이다 라고 보고 있다 말이죠.
그렇게 보고 있는 그 바리새인이 바로 악이다는 겁니다.
악인이 자기꾀에 자기 그물에 걸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세리를 붙이고
의도적으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코 앞에 붙이고
의도적으로 실로암 소경을 붙이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마귀에게 붙이는 겁니다.
엉뚱한 데서 구원을 논하고 있으니
누가 구원 얻겠습니까? 아무도 못 얻지 라고 했다 말이죠.
구원이라고 하면 그렇게 예민하기 짝이 없게 반응하는 유대인들인데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에 목숨 건다
받고
십의 이조 드리는데 목숨 건다
오 케이 받고
이레에 두 번 금식 하는데 목숨 건다
보세요 금식이 뭡니까? 식음을 전폐하는 것 아닙니까?
목숨거는 일에 목숨 건다는 이중목숨걸기 이다는 겁니다.
받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에 목숨 건다.
이게 유대인입니다.
그야말로 악마들입니다.
이 악마들을 오늘날 교회들이 부러워서 따라하고 있어요.
성화론자들 보세요
변형된 방식으로 하잖아요,
주일 성수에 목숨 건다
받고
받고
완전 도박쟁이들 이다 말이죠.
우리가 부러워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저들이 대변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피 속에서 보니까
언약의 피 속에서 죽음 속에서
광야 속에서 보니까
정작 원수가 달라요 달라
저 세리
저 매국노
저 로마
저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이 원수가 아니라
진짜 애굽은 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들인 유대인였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 자체가 탕자가 되니까
다들 거부해요
이 십자가 자체가 실로암 소경이 되니까
다들 장난감처럼 다룹니다.
날 때부터 죄인이긴 죄인인데 자기 죄인지 부모 죄인지
장난감처럼 다루다가 갑자기 재미있게 가지고 놀던 실로암 소경을 고쳐버리니까
내 장난감 빼앗아 갔다고 화를 내는 겁니다.
왜 십자가는 왜 이런 식일까요?
인간들과 어울릴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그 십자가가 이 뜨인돌이 왜 등장했을까요?
미끼를 확 무는 놈이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이 눈앞에 있는데
우연히 기가막히게 예수님이 지나가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을 미끼로 확 물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베드로를 확 무는 놈이 생기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하는 자가 비로소
눈에 안보이게 숨어있다가 드디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원수로부터 건지겠다는 겁니다.
알고보니 나와 똑같은 바리새인이였더라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으로부터 탈출 할게 없어요 할게
똑같은데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믿는 거나
실천하는 거나
행하는거나
사고방식이나
같은 방향이더라 말이죠.
뭘 탈출한다는 말입니까?
뭔가 달라야 하는데 다른게 전혀 없다 말이죠.
그래서 새롭게 맹글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시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약속
곧 십자가라는 간극이다는 겁니다.
그 간극에서 태어나는 겁니다.
바로 광야라는 죽음에서 태어난 자가 이스라엘 이거든요.
그러니 성령은 우리를 물에 확 빠뜨리는 겁니다.
등떠밀어 버린다 말이죠.
다윗도
예레미야도
참선지자도
마리아도
죽음 속에 한번 들어갔다가 나와 보니까
시선이 바뀌는 겁니다.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니라
구원해 주는 구명튜브 였다는 것을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니라
불 속에서 건져주는 다말이였다는 겁니다.
불 속에 들어간 것은 다말이 아니라
시아버지 유다였다 말이죠.
소방관 닭이 뛰어들어서
베드로는 건지는 겁니다.
대신 울었거든요 대신
우는 자가 있어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잖아요.
그래서 예수님 외에는 십자가를 지시면 안되는 겁니다.
우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죽는 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살려주는 영입니다.
그러니 저들이 보기에 이 간극이 쓸데 없는 짖으로 보는 겁니다.
소홀히 여겨요
장자권을 뒤 바꾸는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게하는 이 약속을
무시하는 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한 이 약속을 말이죠.
높은자 낮추고 낮은자 높이는 이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를 말입니다.
그러니 선 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넘어질까 두려워 하라 라는 겁니다.
십자가가 약속인줄 모르고 무시했다 말이죠.
은사란 성령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란 무시받는 기능이거든요.
가장 무시했던 사도바울이 이제 무시했던 그 기준들
근거들을 배설물 똥떵어리로 여기고
이제 자신이 가장 무시했던 십자가를
오히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스럽게 이 십자가만 외치는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큰 깨달음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들은 운적 없어요.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피 언약의 피를 위햐서
특별하게 소유로 삼은 겁니다.
그러니 반대자가 오히려 보편성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 진리를 외치는 겁니다.
내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였는데 이제는 백성으로 삼아주셔서
이 첫사랑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십자가의 긍휼의 피를 찬양한다고
지난 주에도 어머니랑 같이 불렀습니다.
시편 134편이 짧다면 그것을 길게 주름을 편
접는 부채를 활짝 편 것이 바로 오늘 시편 135편입니다.
송축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주님 집에 거하는 자들아
성소 향해 손을 들고서
송축하라 송축하라
이것이 성전에 올라가서 곧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보게되는
누리게 되는
그래서 마음껏 다윗은 이스라엘을 등떠밀어 물에 빠뜨리듯이
이것이 비오지 않기를 삼년반 동안 말이죠 기도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 십자가 하나 딸랑 믿고서 노래하는 겁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말이죠.
아무것도 없어요.
오로지 이름 만 부를 뿐입니다.
존재를 의지하는게 아니라
이름만 말이죠.
즉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의 피만 외친다는 겁니다.
왜?
저들이 무시하거든요
구약의 전쟁의 특징은 무시받는 짖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할례
아니면 성을 언약궤를 매고서 뺑뺑이 도는 것
즉 무시하라 라고 보채는 식입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어리석고
거리끼는
지혜롭기는커녕
디딤돌이 되기는커녕
이 시온에 두는 뜨인돌로 인해 다 자빠지는 겁니다.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자빠집시다
더더욱 낮게 실패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를 선물할 뿐입니다.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 물으시는 겁니다.
옆에 있는 마귀 보란 듯이 말이죠.
이 상황 속에서도 찬양 하라 라는 겁니다.
왜? 너는 나의 특별한 소유물이기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금가락지요
그의 왕 같은 좋은 옷이요
그의 거룩한 신발이요
그의 소유된 살진소이니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찬양자로 삼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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