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의 소굴이냐? vs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냐? (시편 138)

14-138 강도의 소굴이냐 vs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냐 (시편 138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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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1:18,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56:3, 개역)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56:4,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6:5, 개역)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56:6, 개역)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56:7, 개역)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고전 3:16,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8, 개역)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38: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138:2, 개역)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138:3, 개역)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4, 개역)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138:5, 개역)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138:6, 개역)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138:7, 개역)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138:8,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138:1, 새번역) 주님,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들 앞에서, 내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138:2, 새번역) 내가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주님의 진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온갖 것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 ,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모든 이름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138:3, 새번역) 내가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응답해 주셨고, 나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 시리아어역을 따름(칠십인역과 타르굼 참조). , '내 영혼에 힘을 주시어 나를 거만하게 하셨습니다'

(138:4, 새번역) 주님,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은 모든 왕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38:5, 새번역) 주님의 영광이 참으로 크시므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그들이 노래합니다.

(138:6, 새번역) 주님께서는 높은 분이시지만, 낮은 자를 굽어보시며, 멀리서도 오만한 자를 다 알아보십니다.

(138:7, 새번역)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138:8, 새번역)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들에게 갚아주시니, 주님,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모든 것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니까

성전에서 제사를 편하게 할수 있는 편의장치들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제물을 들고오다가 썩게 되거나

또는 짐승 같은 경우는 죽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면

제사를 못 드리잖아요

 

그래서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성전 앞에서 매매를 하게 되는 겁니다.

곡식을 팔거나

짐승을 팔거나

모두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편의시설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위한 장치를

모조리 회초리로 짐승을 쫏아내고

돈으로 바꾸는 환전 계산대를 다 엎어버리 시더라 말이죠

 

너무 한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제사를 드리냐 말이죠.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1:16, 새번역)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 , '성전 바깥 뜰을'

(11:16, 공동)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11:16, 쉬운) 예수님께서 그 누구도 물건을 가지고 성전의 뜰을 가로질러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1:16, 킹흠정) 아무도 성전을 통해 기구를 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1:16, 현대인)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도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시고

(11:16, 현대어) 또 물건들을 가지고 성전뜰을 지나다니는 것도 못하게 하셨다.

 

아예 그 어떤 물건도 성전 안으로 들어 나르는 것은 허락지 않았다 말이죠

 

제가 어머니와 토요일날 대화를 하다가 이런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니고데모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

니고데모 바리새인은

결국 모든 것을 가능성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동일성 합일성 동질화 말이죠.

그렇게 되면 행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불가능성의 이야기만 하십니다.

오죽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하니까

즉 이 말은 단절이다는 뜻이거든요.

너희는 못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 그런 해석은 처음 들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아 어떻게해서든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고

해석이 가능하면

행함이 가능하고

믿음도 가능하다고 보니까

기껏 해석하는 것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되냐 라고 하는 겁니다.

 

좀 크지 않나?

 

어떻게 들어가지

제왕절개 수술하는 방법으로 태어난 아기가 있듯이

그런 방법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인가?

라고 결국 어떻게 해서든 행함을 실천하고 지키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러고도 너가 이스라엘 선생이냐 라고 물으시는 거죠.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분명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릴적부터 시편을 달달달 외웠다 말이죠.

그리고 랍비들은 가르쳤다 말이죠.

 

오늘 시편 138편을 가르쳤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시편 대로 오셨다 말이죠.

 

그런데 선생인데 가르치는 자인데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 라고 하신다 말이죠.

 

결국 육이다는 겁니다. 666

영의 사람이 아니다는 겁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주의 인자하심을 말한다 말이죠.

 

그런데 주의 인애와 자비가 아니라

행함으로 육으로 이제껏 가르쳐 왔으니

주님의 말씀이 육으로 가능한 소리로 해석할려고 달려든다는 겁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개혁주의 자들이 다 이런 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입니다.

 

영이란 완벽하지 아니하면

함량 미달이면 남을 살리는 영이 아니다는 겁니다. 육이다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고 하니까

어떤 무식한 양탈쓴 무리들이

거룩한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바리새인이 곧 독사의 자식들이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하는 모습을 가르치더라 말이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는 것은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을 지켜라 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이 덮쳐져서

아무리 더러운 인간도 거룩하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마귀 보는 앞에서

 

그게 바로 탕자가 맏아들 보는 앞에서

금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소를 잡듯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라는 의미 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되거든요

선물이니까 공짜 이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시험 합격이니까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것을 설명할려고 하니

말이 되게끔 만들려고

저들은 결국 미흡하기 짝이 없는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식으로

설명이 되겠끔 말씀을 가르쳐 왔다는 겁니다.

니고데모가 그렇게해왔기에

남을 가르칠려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먹혀들어서

자신이 선생 값을 할수 있지 않겠냐 라는 거다 말이죠.

결국 모조리 다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함이지

말씀을 위해서 지키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나를 위한 말씀으로 만들어야

남들에게 그렇게 자아를 위한 말씀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야 목사 값 할꺼 아니냐 말이죠.

 

그냥 선생 이라는 것 포기 하면 되요

왜 남을 가르칠려고 하냐 말이죠.

도로 예수님에게 배우시면 되는데

말라꼬 가르치냐 말이죠

가르칠려고 하니까

자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되거든요

말 안 되는 소리 해 보세요

제자훈련이고 뭐고 다 도망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심심하면 제자들에게 왜 너희들도 나를 떠나지 그러냐 라고

자꾸 등떠미시더라 말이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따라왔는데

요나의 표적을 이야기 하니까

비로소 다 떠나는 겁니다.

한 사람 한사람 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들에게 왜 너희들도 가지 왜 남았니 라고 하신다 말이죠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67, 새번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6:67, 공동)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67, 쉬운)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들도 떠나고 싶으냐?”

(6:67, 킹흠정) 이에 예수님께서 열둘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6:67, 현대인) 그래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자

(6:67, 현대어) 그러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 하느냐?'

 

참 말 되는 소리 있던가요?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다들 떠나잖아요

육으로 온 사람들 다 돌려보내는 영의 말씀이다는 겁니다.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행하고 실천할려는 사람들 다 등돌리고 떠나가게 하신다 말이죠.

? 실천하게 되면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식인종이 되거든요

피를 마시게 되면 피째 먹지 말라는 율법을 자동적으로 어기게 되거든요.

 

(7:26, 개역) 너희의 사는 모든 곳에서 무슨 피든지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말라

(7:26, 새번역) 그뿐만 아니라, 너희가 어느 곳에 살든지, 새의 피든지, 짐승의 피든지, 어떤 피든지 먹어서는 안 된다.

(7:26, 공동) 너희는 어디에서 살든지, 모든 새와 짐승의 피를 결코 먹지 마라.

(7:26, 쉬운) 너희는 어느 곳에 살든지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 마라.

(7:26, 킹흠정) 또한 너희는 너희의 모든 거처에서 날짐승의 피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지니라.

(7:26, 현대인) 새의 피든 짐승의 피든 피는 절대로 먹지 말아라.

(7:26, 현대어) 기름 덩어리뿐 아니라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어느 곳에서 살든지간에 날짐승이나 집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을 받게 되면

졸지에 율법을 어기게 되요

어기게 되면 반드시 마귀들이 송사 고소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무시험 합격이 덮쳐버려요

반칙 중에 반칙입니다.

탕자에게 금가락지 끼우니까 말이죠.

여기서 반발하는 세력을 예수님이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곧 맏아들입니다.

이것이 영의 일 바로 하나님의 일

곧 약속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약속 말이죠.

이것이 실상인데

율법을 지키면 이 약속이 나타날까요?

 

오늘 다윗이 주의 인자하심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셔서 나타내달라고 합니다.

아니 시편 다 끝나가는데 도대체 원수는 어디에 있길래

다윗은 아직도 원수 타령을 하냐 말이죠.

 

제발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원수 죽었잖아요

사울왕

없어요

출애굽 타령하는 것도 말이 안되요

애굽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참선지자도 똑같이 다윗처럼 원수만을 의식하고 외치는 겁니다.

이스라엘 망한다고

 

그런데 거짓선지자는 다윗이 왜 저런 시편을 기록한지를 모르듯이

원수가 있기는 하냐 말이죠.

이렇게 태평성대가 이어지는데

하나님의 복 주시사 평강이 넘쳐나는데 원수는 무슨 원수

 

저 참선지자들은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현혹하는 모습으로 국가를 위기로 몰아간다고

자꾸 삐닥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다윗처럼 물속에 빠졌다가 다시 건져내게 되면

예수님이 달리 보이듯이

이제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선지자들은 이 다윗의 외침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에 빠뜨렸다가 다시 건지게 되면

실상이 보이게 된다 말이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말이죠.

 

그런데 그런 전쟁은 없단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거짓선지자들은 외친다 말이죠.

약속 곧 주의 인자하심을 못 쳐다보겠끔 하는 겁니다.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심판 속에 못 들어가게 한다 말이죠.

이 완료 속에 못 들어가게 하고

자꾸 미흡한 함량미달의 666이라는 짐승 곧 악한 영이 들어가서

백성들을 미혹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데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데

 

자꾸 번제와 제사라는 미흡한 의문의 반복케 백성들을 세뇌 시키게 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어야 하는데
이 요나의 표적이 똥물에 7번 담구어라
곧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심판을 제대로 봐야
긍휼을 바랄것 아니겠습니까?
이 요나의 표적 밖에 없는데 곧 십자가의 저주 밖에 없는데

모든 인간들은 곧 악한 세대인 이스라엘은 기적을 원하더라 말이죠.

힘을 원하는 겁니다. 힘 되는 것

곧 짐승의 표 죠

 

그런 현장 곧 실상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상을 업어버리시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또렷한 실상이 보이는데

어딜 의문의 것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의문의 것들을 꽉꽉 채울려고 하느냐

 

이 강도들아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려고 하느냐

 

니고데모처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무지 접근해 왔습니다.

나 보다 나은 자를 보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한 수 배울려 한다 말이죠

그런 자세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성경 토론도 하고 싶었고

한 수 배우기도 하고

지혜를 갈고 딱고 하고 싶은 마음으로

더 나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접속 접근 연결 소통을 시도한다 말이죠

 

그런데 항상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가장 예민한 구석을 끍어댑니다.

어머니 결국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 코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다 라고 하셨을때에

바리새인이 과연 믿어 줄꺼라 라고 이야기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가장 예민한 것을 의도적으로 건드리실려고 하신 것일까요?

아무리 참고 굴욕을 당하는 마음으로 한 수 배울려고 했지만

내가 하나님이다 라는 말 앞에서

늘상 그런 결론으로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볼 때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인데 너가 하나님이라고 하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되면서

졸지에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마치 보란 듯이 원수 중에 원수인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꾸 보란 듯이 코 앞에서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시고

그러니 율법을 어길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이제는 아예 대 놓고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하니

 

유대인으로써는 특히 바리새인으로써는 하나님을 믿는 자 로써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건드린 겁니다.
곧 하나님을 건드린 겁니다.
하나님을 건드리면 돌아버립니다.
오늘날 짐승의 표를 받은 자에게 하나님 건드리면 돌아버립니다.
이스라엘 기독교 아버지가 딸을 죽이는 이유도 하나님을 건드린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만큼은 돌아버리는 겁니다. 가장 예민한 것을 건드리시거든요.
자기의 신을
자기를 위한 우상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름이라는 기능입니다.

이게 이름이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습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 이름이 하는 역할 곧 기능은

내 속에 있는 존재의 하나님을 빡빡 끍어대는 겁니다.
하나님을 건드려요 글쎄. 각자의 신을 건드립니다. 이것이 이름 입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 말이죠

 

아 그럼 하나님을 안 믿는 자는 괜찮네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된 아담

첫사람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래서 살리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의 기능인 살리는 영의 일을 못하는 겁니다.

율법 백날 지켜보세요 남을 살리는데 율법 지킨 것을 활용하지 못하더라 말이죠.

그것은 곧 율법을 어기게 되니까 말이죠.

 

그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라는 이름의 기능은

남을 살리고자

의도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뭐 율법 어긴다 해놓고 그게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제발 좀

 

말 되는 소리 하면 안되요

반드시 모순 될 수 밖에 없는 소리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인이 구원 받습니까?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 말이 안되는 것을 십자가 곧 주의 인자하심은 합니다.

너희는 못하나 나 여호와 하나님은 합니다.

 

말 되는 소리를 하게 되면 저 니체처럼 예수님을 경쟁자로 삼게 되는 겁니다.

결국 자기가 예수래 ~~~~

미친 놈이지요

 

성화론자들이 니체를 그렇게 욕하면서도 니체 짖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어요

경쟁자로 삼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믿음으로써 선물로 주어지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십자가의 용서가 담겨진 그릇이 되어버리면

즉 하나님의 집이 되어버리면

졸지에 예수님처럼 동일하게 율법을 어기게 된 자가 됩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의문의 반복을 멈추게 된다 말이죠.

그리고 그 의문의 반복이 아닌

율법 외에 한 의로 인해서

율법의 완성을 누리게 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율법 어겼는데 율법의 완성이라니

그러니까 무시험 합격이다는 겁니다.

시험을 쳐야 합격인지 아닌지를 가를텐데

시험 자체도 친 적도 없는데 이미 합격이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을 쳐다보겠습니까?

시험 친 적도 없는데

율법을 지키게 되면 자신을 쳐다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친 적도 없다니깐요

시험장에 간적도 없어요

시험 친 적도 없는데

합격 통지서가 날라왔으니

도대체 누가 했냐 라고

그 누구를 볼게 아니냐 말이죠.

 

육체에서

육이 행한 것에서 찾게 될까요

영에서 찾게 될까요?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육이 하는 행함을 볼려고 하지 말고

영이 하는 일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영이 하는 일을 보게 되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 말도 안되는 일이

무조건 이유 없이 다 알게 된다 말이죠

그게 바로 이름 이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곧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맛 보라고

우리는 원수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다윗이 말이죠.

다윗 본인이 그 주의 인자하심 속에서 생명을 만났거든요.

바로 주의 살과 피입니다.

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 없어요

이게 어렵도다 라고 해서

그 대신 땡빵으로 할려고 하는 것이 성화론이다는 겁니다.

율법 어기기는 싫고

식인종 죄인은 되기 싫고

율법 지킨 것은 티를 팍팍 내어야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걸림돌에 탁 걸려서

넘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갈수도 없는

유대인들은 그래서 십자가가 거리끼는 돌로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실족케 되더라 라는 겁니다.

주의 살과 피를 먹을려고 하니

시어머니 율법이 울 것 같고

율법을 지킬려고 하니

예수님이 주시는 썩지 않는 만나 곧 영생이 물건너 갈 것 같고

결국 그 동안 해왔던 의문의 반복으로 돌아서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그래서 등 돌리는 겁니다.

 

새술을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헌 것으로 취급해서

완전히 배설물 똥떵어리로 여기지 않는 한

새 부대로 옮겨질수가 없거든요.

 

기존의 것을 악취나는 썩은 냄새로 못 여기지 않는 이상

절대로 예수님을 바라볼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 맞지요

 

이게 바리새인 곧 유대인들에게 먹혀들 이야기 이겠습니까?

짐승의 표를 받아서 서로 매매하던 자들에게

이 예수님의 말씀이 씨알도 먹혀들 이야기냐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뻔히 거부할 줄 알고 대 놓고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에라이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강도들아

 

평생을 하나님께 제사를 바치면서 사는 자들에게 말이죠.

 

얼마나 도발적입니까?

그거 가짜야 라고 유일하게 말 하신 분입니다.

딱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다수가 정통의 역사를 유지하면서 행해져 온 그 정통을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야말로 죽을려고 환장하신 겁니다.

어딜 감히 인간에게 도발하냐 말이죠.

그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 도발하는 예수님을 가만히 두질 않는다 말이죠.

 

인간이 신이 거든요. 인간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이거든요,

감히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다니 말이죠.

 

그런 산 하나님에게

그런 인간에게

 

예수님은 죽은 하나님으로 도발을 하는 겁니다.

침략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강도의 소굴에 침범해서

빼낼자만 빼내고 하늘나라로 가시는 겁니다.

 

다윗이 오늘 시편 138편에서

이스라엘에게 외치는 모습이

마치 예수님께서 시편대로 행하시는 모습처럼

원수의 손에서 건져낼자 다 건지시고 떠나시는 모습과 같다 말이죠.

 

유대인 곧 사단의 회에서

강도의 소굴에서 건져낼자 건져내시고

마치 구원받은 강도를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빼내시듯이

 

그러니 모든 장소 모든 시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그 장소 그 시간과 같은 겁니다.

맞습니다 주여 저는 강도의 소굴에 있는 강도 맞습니다.

이 강도의 소굴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새술을 봤다면 새부대를 봤다면

기존의 것이 이 강도의 소굴이라는 의문의 반복

미흡한 것의 반복인 짐승의 수,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볼때에

희년 곧 포로된 자 갇힌 자 억눌린자에게 기쁜소식으로 들리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저들 유대인들은 강도의 소굴로 하나님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서는

이 기쁜소식을 발로 차버리는 거죠.

저들에게는 예수님이 뭐 하나님이라고?

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말 되는 소리 좀 하라 라는 겁니다.

~~ ~~~

 

원인에 따른 결과를 말하라는 겁니다.

원인 없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존재를 말하라 라는 겁니다.

존재 이전의 기능을 말하지 말고

안 보이는 것을 말하지 말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원인 있는 결과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말이죠.

 

성경 전체 그 어디에도 말 되는 소리가 없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함이 담겨진 하나님의 집이 바로 다윗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성전은 건물이다 말이죠.

그런데 너희가 성령의 전이다는 겁니다.

약속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것인 주의 인자하심이 담겨진

약속이 담겨진 것은 너야 너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 말이죠.

 

다윗 속에 거하시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인데

졸지에 주의 인자하심이 덮치니까

맨날 울어요

주여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실상을 보고 말이죠.

그것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 어디있는데?

 

다윗은 자꾸 늑대가 나타났다고 하니까

백성들은 늑대 어디있는데?

하도 다윗이 지겹도록 외치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치니까

저거 왕 아니였으면 쥐어박았을 텐데 라고

그냥 거짓말 하는 자로만 취급하고 쉬쉬하고 만다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미에 맞는 말을 하는 자는 거짓선지자 였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들이 다 거짓선지자에 다 빠져 있다 말이죠.

그렇게 교인들이 가려운 구석인 구원 그 이후의 삶

그 권태로운 삶에 숙제를 던져주는 성화론자들이 너무 너무 고마워

이 거짓선지자들 덕분에 교회 다닐 맛이 나?

 

뭐 원수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언제까지 죄 죄 죄 그럴래?

언제까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외칠래?

이제는 부활만 외쳐야 하고

의인이 되는 의로운 행함을 외쳐야 한다고 거짓영들이 이야기 하니까

그게 말이 되거든요,

 

말이 안되는 소리를 붕 뜨는 소리인데

 

말 되는 소리를 하니까 구미에 딱 맞으니까

다들 거짓영을 받은 자들에게 미혹되는 겁니다.

 

너희는 성령의 전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밭이다 라고 했을때에

원인 있는 결과로써

곧 행함으로 지켜서 말 되는 소리로써 한 겁니까?

말도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성령의 전이다 라고 하신 겁니까?

 

다윗을 보자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져서 하나님의 집이 된 다윗을 보면

그 원인이 될만한 조건이나 요소들이 있던가요?

 

오히려 없기에 더더욱 없다는 것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다윗의 손에 죽은 우리야 밧세바 이름없는아기인 꺽으신 뼈

뿐이다는 겁니다.

즉 원인을 아예 찾기 말라고

결과만 누리라고

그것이 주의 인자하심 곧 불쌍히 여겼다는 겁니다.

다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모든 허물을 일체 보시지 않겠다는

주님 쪽의 반칙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거기에 반발하고자

숨어있다가 실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다윗이 주의 인자하심을 외치는 것은

원수를 보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원수가 한 짖이다는 겁니다.

 

그 원수만을 상대로 하는 완료인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다는 심판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이 원수만을 상대로 하신 겁니다.

 

그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니

이 십자가가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지만

본인들이 사단의 회이니까 말이죠. 송사 고소하는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덮쳐진 것이니

이런 선물이 없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선물

 

그래서 다윗은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춤추고 막 노래 부르는 겁니다.

찬송의 옷이 입혀져서 막사는 겁니다. 막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144천명이라는 찬양대 곧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완료를 노래하는 찬양의 옷이 입혀진 자의 즐거운 노래자이고

 

이와 상대적인 수는 늘 미흡하고 미완료이고 함량부족이고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인

짐승의 수 666인 사람의 수입니다.

 

 

 

 



강도의 소굴이냐 vs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냐 (시편 138편)_0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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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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