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심령을 통촉하시고 (시편 143편)
(시 143: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143:2, 개역)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시 143:3, 개역)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시 143:4, 개역)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시 143:5, 개역)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시 143:6, 개역)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시 143:7, 개역)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시 143:8, 개역)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시 143:9, 개역)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시 143:10, 개역)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1,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 143:12, 개역)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시 143:1, 새번역)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애원하는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의 진실하심과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나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시 143:2, 새번역) 『살아 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하니, 주님의 종을 심판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 143:3, 새번역) 『원수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뒤쫓아와서, 내 생명을 땅에 짓이겨서, 죽은 지 오래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묻혀 살게 하였습니다.』
(시 143:4, 새번역) 『내 기력은 약해지고, 놀란 심장은 박동조차 멎어 버렸습니다.』
(시 143:5, 새번역)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그 모든 행적을 돌이켜보며, 주님께서 손수 이루신 일들을 깊이깊이 생각합니다.』
(시 143:6, 새번역)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내 두 손을 펴 들고 기도합니다. 메마른 땅처럼 목마른 내 영혼이 주님을 그리워합니다. (셀라)』
(시 143:7, 새번역) 『주님, 나에게 속히 대답해 주십시오. 숨이 끊어질 지경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나에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들처럼 될까 두렵습니다.』
(시 143:8, 새번역) 『내가 주님을 의지하니, 아침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 의지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
(시 143:9, 새번역) 『주님, 내가 주님께로 몸을 피하니, 내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십시오.』
(시 143:10, 새번역)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의 선하신 영으로 나를 이끄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 143:11, 새번역) 『주님,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내가 받는 모든 고난에서 내 영혼을 건져 주십시오.』
(시 143:12, 새번역) 『주님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니, 내 원수들을 없애 주십시오. 나를 억압하는 자들을 멸하여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오늘 시편 143편을 보니 시편 5편을 가사로 한 노래가 생각 납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시 5: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시 5:2, 개역)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5:3, 개역)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4, 개역)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시 5:5, 개역)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시 5:6, 개역)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7, 개역)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 5:8, 개역)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 5:9, 개역)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시 5:10, 개역)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 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시 5:11, 개역)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5:12, 개역)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모세가 느닷없이 1300년 만에 변화산에서 나타나
주여 별세해 주세요 라고 외칩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900년 만에 변화산에 나타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즉 상한 심령이 되어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왜? 인간에게서는 상한심령이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애굽사람 곧 마귀자식이다 말이죠.
육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아빠없이 태어난 여자의 후손이다 말이죠.
그러니 여자의 후손인 모세가
예수님 저 모세를 주의 인자하심으로 태어나게 해 주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아빠 없이 태어나게 해 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기존의 질서
자연의 질서를 깨는 겁니다.
아빠가 있어야 태어나는 질서를 말이죠.
그런 질서는 원인만 따지는 의문의 반복이라서
그런 번제와 제사를 주님이 싫어하신다 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버릇없이 죽어주세요 라는 말이
나쁜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이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만을 나타내달라고
상한심령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자들이 모세와 엘리야 이니까 말이죠.
아빠 없이 태어난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버릇없고 싸가지 없는 소리로만 들리는 겁니다.
얼마나 싸가지 없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냐 말이죠.
안그러면 인간은 오로지 육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빠가 있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문의 제사와 번제만 반복할 뿐이지
완료가 없다는 겁니다.
완성 없이 모호하고 흐릿하고 마침이 없이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껍떼기만 반복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율법 외의 한 의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이다는 겁니다.
거기서 태어난 자들이 아빠 없이
육에서 태어난 자가 아닌 성령으로 거듭난자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거짓말 같은 소리입니까?
니고데모가 오죽하면 말귀를 못 알아 먹어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나요 라고
역시나 육에서 육으로의 방식을 고집하는 애굽자식의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틀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무슨 수로 벗어나겠습니까?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철저하게 갇혀 버렸습니다.
마침 어제 어머니께서 욥기를 읽으시다가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욥의 세친구들이 욥을 그렇게 저주를 하더라 라고 말이죠.
제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친구 라고 괜히 성경이 붙인게 아닙니다.
욥기는 결국 마귀의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의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의 방식으로 태어난, 아빠 있음으로 태어난 육의 사람에게서는
욥이 저주를 받았다 라는 결과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는 해석입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 라는 해석법입니다.
그래서 친구라서 친구이기 때문에 친구로써 욥을 무지 무지 걱정해주는 마음으로
욥아 회개 하라 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너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저주를 당할 거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악마가 심은 해석법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욥의 세친구는 주장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다는 거죠
그런데 욥이 그런 친구들의 마음을 안 받아주는 겁니다.
그럼 친구들의 해석법을 무시하느냐?
욥 조차도 그런 해석법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사건이 그런 해석법으로 통하질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는 겁니다.
졸지에 다른 하나님이 덮쳐진 겁니다.
엘로힘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로써의 하나님이 아니라
기능으로써
이름으로써의
여호와 하나님이 덮쳐버린 겁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그야말로 욥의 세 친구 입장에서는 참람죄나 마찬가지 이죠.
예수님이 하나님 이라니?????
자 그럼 어떤 해석법이냐?
그 새로운 해석법 때문에 욥의 세친구의 해석법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겁니다.
동의 해 봤자 그런 해석법으로는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는 것인데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욥의 세친구들은 그 해석법을 고집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이것은 위에서 하늘에서 마귀와 여호와하나님의 내기 장기에 놓여진 겁니다.
마귀의 해석은 주님이 봐줘서 욥이 그렇지
주님이 보호해주는 장치를 다 없애면 반드시 원망한다고 하는 것이
마귀의 해석입니다.
이것이 원인 있는 결과 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마귀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귀는 항상 맞는 말을 해요
문제는 항상 맞는 말을 한다고 그게 옳은게 아니다는 겁니다.
항상 맞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맞는 말 보다 더 나은 말을 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이것을 못해요
더 나은 말을
더 나은 것을 못하기 때문에 저들은 악하다는 겁니다. 항상 틀린 것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항상 맞는 말을 해도 말이죠. 뭘 해도 다 가짜다 라는 겁니다.
가인이 제사를 안 드린게 아닙니다.
가인이 제사를 정성스럽게 드렸다 말이죠.
문제는 더 나은 제사를 못 드린다는 겁니다.
인간의 해석법이 더 나은 해석을 못한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어떤 해석을 내 놓으면 더 나은 해석이 항상 뒤에 나오니까
먼저 내놓아서 나왔다 하면 더 나은 해석이 따로 있게 되니
이것은 내어놓으면 바로 그 차이로써 뒤에 나오니까
무조건 틀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선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두려워 하라 라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고전 10:12, 개역)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아니 왜????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입니다.
그러니 존재는 항상 이 기능을 의식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 가인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아벨의 제사가 뒤에 왔다는 것에
안도 하면서 휴 주님 감사합니다 더 나은 제사를 받아주셔서 라고
더 나은 해석에 감사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그 차이성 보다 동질성이 앞서다 보니
나의 해석이 무시 당하는 것에
나의 제사가 무시 당하는 것에 참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다 죄요
뭘 해도 다 가짜라는 것을
그래서 무조건 항상 감사하라가 되는데
왜? 감사라는 기능이 존재 보다 앞서있거든요
그래서 뒤에 온다 말이죠.
앞서 있었고 뒤에서 오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그 사이 간극에서 없음으로 취급받는 존재일 뿐인데
뭘 해도 죄요 다 가짜이기에 감사 뿐인데
감사가 나오질 않는 겁니다.
나 보다 더 나은 것이 왔다는 안도감에 감사하는게 아니라
왜 내가 드린 제사를 무시하냐 라고
나 보다 더 나은 것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것이 미뻐야 하는데
믿음직 스러워야 하는데
곧 상대적으로 나의 것은 뭘 해도 모호하고 의문이고 마침도 없고 완성도 되지 않은채로
늘 미완료이고 흐릿할 뿐인데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왔는데
다 이루심이 왔는데
그런데 항상 감사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기쁨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쉬지말고 기도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괜히 감사를 지키고 기쁨을 행하고 기도하기를 지킬려고 하니까
졸지에 살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라는 모호함 곧 의문은 결국 살인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덮치지 않으면 모르도록
귀가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못본다는 겁니다.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그럼 귀와 눈의 방식이 아니다는 겁니다.
귀와 눈은 육체입니다.
육은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면 무슨 소리인지 무슨 장면인지 들어도 보아도
뭔지 모른다 말이죠
그럼 육체가 아닌 귀와 눈은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어야 하는 귀 라는 기능이고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의 귀이어야 하고
볼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어야 하는 존재 아닌 기능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그럼 귀도 눈도 할례를 해야 할 판국인데
무슨 수로 귀의 껍데기
눈의 껍데기를 짤라내야 합니까?
어차피 손으로 하는 것은 다 육인데
의문의 반복일 뿐인데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는
인간 세계에서는 육의 세계에서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겁니다.
아빠 없이
원인 없이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욥의 해석은
욥의 세친구의 해석법처럼
그런 원인에 따른 결과 의 해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저주를 말이죠.
마귀의 해석법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의 방법으로 말이죠.
그럼 여호와의 해석법은 뭔가?
욥의 해석은 뭔가?
이유 없이 원인 없이 아빠 없이 태어난 여자가 낳은 아들이
십자가 라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을 다 이루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이 와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미래완료에서 쳐들어 와야 하는 겁니다.
마귀와의 내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욥을 놓고 내기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꿍쳐놓은 히든 카드인 어린양의 십자가의 피를 감추고서
욥에게 피 발라 주고자 함이였으니
무조건 이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그런 십자가 보다
그런 저주 보다
그런 광야교회라는 주의 인자하심 보다
차 포 떼 면 내기에 나서주겠다는 겁니다.
차 포 까짓꺼 떼줄게
마귀가 괜히 자신감을 얻은게 아닙니다.
차 포 뗀 그 원인으로 하나님은 너희들을 버렸다 라고 뒤짚어 씌우기 딱 좋잖아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 조차도
마침 옆에 지나가고 있는 예수님을 끌여들여서 시험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은 너희들을 버렸다 라고 뒤짚어 씌울려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 빼고 다 쳐도 된다고 허락 받았다 말이죠.
자식도 마누라도 심지어 욥의 세친구도 다 마귀가 들어가서
욥을 공격 합니다.
심지어 잠도 못자도록 만드는 피부병
얼마나 심했으면 벽돌로 빡빡 끍어대어야 할 정도로 못 견디게 만들어 버립니다.
원망 안 하고 배깁니까?
그런데 욥은 끝까지 저런 해석법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엘로힘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기능의 하나님 이름 곧 여호와
곧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인 출 탈출
저런 가짜 하나님
존재의 하나님 엘로힘으로부터의 탈출
의문의 엘로힘으로부터 말이죠.
그래서
내가 상한 심령이 되어서 회개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래 봤자 또 의문입니다.
다윗이 이름없는 아기를 살려달라고 눈물 회개 금식 기도 라는 4종 세트를 드려도
아이 못 살려 냅니다.
즉 상한심령은 내가 만들 수 없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덮치기 때문에
나의 외부에서
아빠 없이 태어나는 여자가 낳은 아들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상한심령이다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이 전쟁을 승리하는 겁니다.
마귀라는 사망의 권세에서 무조건 이기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오늘 시편 143편은 제발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처음사랑처럼 아무 조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용서했던 그 사랑
그 처음자리를
시편 5편에서 살려달라고 외쳤던 그 때
그 처음 때처럼 말이죠.
그래서 연기로 곧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우리를 물에 확 등떠밀어 버리는 겁니다.
그 처음사랑을 만나라꼬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겁니다.
훌쩍 훌쩍 거리면서
내 눈물이 아니라
저 분의 눈물을
저분의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보라고
그 처음사랑이 언제 조건따졌더냐 라는 겁니다.
그때를 기억하면서 처음자리를 처음사랑을 외치는 겁니다.
바로 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
아무것도 아닌 간극에 다윗은 목숨을 거는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에서는 마귀가 원수가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지 않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
곧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되는
그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피흘리심 이라는 십자가 사건이 무한반복으로 나타날때에
비로소 원수가 보입니다.
욥은 아 위에서 이런 내기를 했군요
그것도 모르고
욥의 세친구는 자꾸 눈에 보이는 것만
원인을 찾아서 결과가 나타났기에
저주 받았으니 회개 하라고
회개로 될 것 같으면 벌써 했다 말이죠.
다윗에게 신하가 어찌하여 좀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이제는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노래 부르십니까?
혹시 미친 것은 아닌지요?
다윗이 하는 말
눈물 금식 회개 기도로
아이를 살릴수 있을 것 같으면 벌써 살렸다는 겁니다.
이런 해석법으로는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상한심령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를 살릴께 아니라
아이가 죽음으로써
정작 죽어 있는 나 다윗을 살리고자 하심이다 이것이
처음사랑
무조건적인 이유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십자가의 용서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
바로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하 말 마따나
조금전 까지만 해도 울었다 말이죠.
그런데 왜 지금은 웃습니까?
이 사이의 간극을 매꿀 방법이 없다 말이죠.
로마서 7장 마지막 부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없다 말이죠.
그런데 느닷없이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요
그냥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 되어버린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 노력한 적도 없이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새것이 된 원인이 없는 채로 결과만 증거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선물이다는 거죠.
그런데 행함은 원인에 따른 결과 라는 해석만 고집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래야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들을수 없는 것을 듣게 된다 말이져
상한 심령의 우는 소리를 듣고
썩어 뭉드러진 마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게 누굽니까?
제발 날 좀 제발 그만 쳐다보고
제발 나의 말만 들을려고 하지 말고
그것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을려고 하니
다 순 엉터리 가짜요
뭘 해도 의문의 반복이요
흐릿하고 모호하고 마침이 없는 의문이지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겠냐 말이죠.
십자가가 높이 장대 높이 달리는 이유가 그겁니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니 모세가 그리고 엘리야가
이 인자가 높이 달릴수 있도록 해 주세요 라고
율법 대표자
선지자 대표자가
마땅히 당연한 말을 한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 해석법에
자꾸 욥의 세친구처럼
회개해라
너는 저주 받았다
십자가의 저주를 왜 받는데????
하나님의 저주인 그 나무에 달려 죽는 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그 저주가 왜 주어졌는데
그래서 나중에 친구들을 위해서 성결제사를 욥이 드려요 글쎄
욥의 세친구 말마따나 세친구는 회개 안해요
욥이 대신 회개해요
자 그럼 오늘 다윗이 왜 처음의 시편 5편처럼 살려주세요 라고 왜 부르짖는가?
연기라고 했는데
연기 라고 하니까 자꾸 가짜라고 보는데
그래서 부정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짜라는 것을 앞으로 나타날 거짓선지자들이 다 차지한다는 겁니다.
소위 진짜라고 우기는 것들이 말이죠.
다 저런 엉터리 해석으로 하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부정의 부정으로써 삐딱하게 부정하게 외치는 겁니다.
참선지자들이 바로 이런 노선입니다.
우리를 확 등떠밀어서 물에 빠뜨리는 연기를 합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물에 빠뜨려 건져내니
주님이 달라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달라요
예수님이 달라졌어요
예수님 도대체 누구세요
누구시길래
죽음이 순종하고 파도가 순종합니까
우리는 그런 파도면 벌써 죽고 사라졌을텐데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파도까지도 순종하냐 말이죠.
아ᄁᆞ 물 위를 걸었을때의 그 예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기껏 내가 물 위를 걸었다는 기적을 행했다는 그 자랑에
예수님을 끌여들여서 육의 자랑이나 하고 싶은 마음을
채워주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였던 겁니다.
오히려 확 등떠밀어 물에 빠뜨려 다시 건져내니까
나의 이런 죄 나의 이런 육에서 육의 자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오로지 주의 인자하심만 자랑하라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이 피만 자랑하라고
모조리 탈탈탈 털어서
물에 빠뜨려 세탁을 한 후에
먹보다 더 검은 죄를
피로 흰눈 보다 더 희게
붉은 피로 진홍같은 주홍같은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물가의 여인이 물동이를 던지고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동네방네 외치는 겁니다.
의식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기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당위
(사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 상한심령을 보라고
주의 인애와 자비를 보라고
저 번제와 제사와 상대적인
저 마귀의 해석법과의 차이로써
저 욥의 세친구의 해석법과의 차이로써
인애와 자비를 보여줄려고
눈과 귀를 물에 확 빠뜨려서
도저히 볼수 없는 것을 보게하시고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주의 긍휼을 듣도록 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를 원수 보라꼬
마귀 보란 듯이 물에 확 빠드리는 겁니다.
베드로가 졸지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줄 본인도 미쳐 몰랐다 말이죠.
그렇게 물에 확 빠졌을때에
베드로를 건져서 이것이 마귀가 한 짖이다고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동안 몰랐다 말이죠. 안 보여서
이제 주님이 보여주시니까 숨어있던 세계가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주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 날 사랑하냐 라고 세 번 물으신다 말이죠.
넌 흰 눈 보다 더 희게 되었어 라고
주님이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누구 코 앞에서
바리새인 코 앞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소경을 고치듯이
자 그렇게 되니까 바리새인과 마귀가
원수 다운 모습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가인이 이 더 나은 제사가 덮쳐진 아벨을 죽이더라 말이죠.
실로암 소경이 보게 되니까
비로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소경 이면서 소경 아니다고 하니
고칠 필요가 없는
의사가 필요가 없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실로암 소경을 고쳐서 무슨 소리인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실로암 소경이 누가 고쳤는지 제발 알려달라고 해도
뻔히 봐 놓고서는
못본척 하는
그저 모세 제자 라고 우겨먹는 그 진짜 소경됨
진짜 벙어리 됨을 나타내더라 라는 겁니다.
이 더 나은 제사를 거부해요 글쎄
왜? 원인을 따지니까
누구 죄냐
날 때부터 소경이였으니까
자기 죄인지
부모 죄인지
둘 중에 하나 라는 해석 법에
그런 마귀의 해석법에 빠져있으니까
미래 완료에서 오는 해석을 거부하는 겁니다.
해석 자체에 손 떼지를 못한다 말이죠.
그게 전부이거든요
더 나은게 외부에서 오지 않으니까, 덮쳐지지를 않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고맙게도 다윗은 우리를 확 물에 빠뜨려서
율법 외의 한 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만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리 로다 ~~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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