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영이 없다고 외치는 상한심령 (시편 143편)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시 143: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143:2, 개역)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시 143:3, 개역)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시 143:4, 개역)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시 143:5, 개역)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시 143:6, 개역)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시 143:7, 개역)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시 143:8, 개역)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시 143:9, 개역)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시 143:10, 개역)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1,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 143:12, 개역)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지난 시간에 멀쩡히 기존의 이스라엘 국가 백성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새로운 이스라엘 왕을 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폐기 시키겠다는 의미로 작용한다고 했습니다.
기존의 예배 찬양 안식일 성전 제사 등등 엄청나게 수많은 것이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노래
새성전
새제사 등등이 따로 세워진다면
기존의 것을 파기 시키고자 함이다 말이죠.
마치 옛언약의 파기처럼 말이죠.
어디 그것 뿐이겠습니까?
새 몸을 세웠다는 것은
기존의 몸은 다 폐기처분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새 몸을 본 사람 같으면
자신의 육체와 마음은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알아게 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지난 시간에 시편 142편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왕이 세워지니까
정작 기존의 이스라엘 왕인 사울왕은 폐기처분이 됩니다.
그리고 정식 왕으로 다윗이 새로운 왕으로써 다시 이스라엘 속에서
정식 절차로 세워지겠지요.
자 그럼 그 새로운 이스라엘 왕 다윗이
과연 새로움 답게 새로움을 보여줄까요?
전혀 아니올시다
역시나 자신이 똑같이 당했듯이
사울왕에게 당했듯이
본인이 사울왕이 되어서
우리야 장군인 다윗을 괴롭히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이 똑같이 그대로 합니다.
이게 무슨 놈의 새로움이냐 말이죠
자 그렇기에 새롭다는 것은 인간에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새로움이란 바로 그런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서
율법 4배나 갚으라 라고 외치는 다윗
아히멜렉 제사장을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다고 죽였던 그 사울왕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전혀 새로운게 아닌데
바로 그런 다윗에게 일만달란트의 용서가 부어지니까
다윗이 눈 놋듯이 녹아버리는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음을 말이죠.
곧 심판 받아 마땅한 자 임을 말이죠.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회개를 하는 겁니다.
왜? 이미 용서했기에
그 용서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회개입니다.
주여 나에게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라고 말이죠.
회개 했기에 용서하시는게 아니라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는데 어떻게 회개를 하냐 말이죠.
회개의 달인들은 회개 하면 할수록 더욱더 완악해져서 수건을 벗지 않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결국 새로움이란 정직한 영이 없음을 새로움을 보고 새로움에 장악당해서 나오는 고백이다 말이죠.
앞의 시편 149편에서 겸손한자가 새노래를 부른다고 했는데
바로 그 겸손이란 우리가 말하는 윤리적인 선악적인 의미가 아닌
정직한 영이 없기에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가 겸손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정직한 영이 없으니
새마음 새 영을 달라고 한다 말이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처럼? 바로 귀신들린 딸의 어미처럼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자가 바로 겸손한 자인데
놀랍게도 유대인에게서는 찾아 볼수가 없다는 겁니다.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어서 상한심령이 된 새 마음을 달라고 하는 자가 없다 말이죠.
긍휼을 달라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달라고 하는 자가 겸손한 자 이다 말이죠.
즉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 중에 더 나은 왕
이스라엘 국가 백성이 더 나은 국가 더 나은 백성이 되기를 기대한다 안한다?
기대 안하는 것이 바로 겸손한 마음이다 말이죠. 새노래를 부르는 자입니다.
이미 완료 되었기에
새로운 왕은 예수님이지 다윗 본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상한 심령 곧 주의 인애와 자비를 구하는 자로 만드니까
졸지에 원수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저도 깜짝 놀랬다 말이죠.
교회를 위해서 저렇게 힘쓰고 열심히 일하던 자가
졸지에 주님의 원수 였는 줄 꿈에도 몰랐다 말이죠.
졸지에 주님의 긍휼 곧 상한마음이 덮쳐지지 않았다면
꿈에도 모를 정도로 말이죠.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주지 않았다면 원수들이 달려들지 않는다 말이죠.
금가락지를 반지의 제왕의 영화처럼 반지를 끼워주니까
안 보이던 주님의 원수가 다 보이더라 말이죠.
인간의 원수가 아닌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거든요.
과거에는 여자라는 잉여가 선물로 개입해 버리면 졸지에 원수도 화친관계로 돌변한다 말이죠.
오늘날은 돈으로 다 해결 되더라 말이죠.
결국 원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원수도 아닌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의 원수이다 말이죠.
졸지에 예수님이 베푸신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끼워준 피 반지를 탕자가 끼게 되니
졸지에 원수들이 막 달려들어요
아 이 원수들로 인해서 주님께서 상한심령이 되셨구나
괴롭힘 당해서가 아닌
저들 원수가 행하는 번제와 제사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에 반대되는
상한심령 곧 주의 인애와 자비만을 원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은 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왜? 다른 것은 함량미달이다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고집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순한 양이다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다고 우는 자에게 상한심령을 부으셔서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집어넣어서
주의 인애와 자비를 심판 속에서 종말 속에서 구하도록 새노래를 부르도록 입술을 제단 숫불로 지져 부정함을 제거 하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로 씻으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심판이 우리를 부정함을 제거하는 주의 거룩이다 말이죠. 곧 십자가의 피입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자 있겠습니까?
이보다 또렷한게 어디 있냐 말이죠.
자기 목숨을 내어준 것인데
또 의문의 것에 나 돌아갈래 라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냐 말이죠.
그거 의문인데
마침도 없는데
희미한 것이고 흐릿한 모호한 것인데
자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모든 것들은 이 새로운 왕 앞에서
폐기처분 당해야 할 헌 것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 라는 새노래 곧 주의 인자하심 외에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없다 말이죠.
이 처음사랑이 없다고 제발 주세요 라고 다윗이 아무리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져도
맹 사울왕과 마찬가지인 죄인으로써 드러날 뿐이다 라고
주의 목전에서 항상 내 죄가 있다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고 외침으로써
정직한 영이 없다고 제발 주세요 라고
새 몸을 봤기 때문에
외치는 새 노래로 인해
원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겁니다.
안그러면 원수들로부터 괴롬힘을 당할 이유가 없거든요.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는게 아니다 말이져
나를 미워해서 나 예수를 미워해서 그런 거다
왜? 내가(예수님) 세상을 악하다 라고 증거했기에
증명해버렸기에
십자가로 다 들통내 버렸기 떄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 본인도 악함이 드러났고
악하기에 정직한 영이 없음이 드러났기에
주여 심판해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제발 정직한 영이 없으니 주옵소서 라고
긍휼을 바라는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꼬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이스라엘이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백성
곧 다윗 본인이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은자 개같은 이방인으로써
나의 새로운 왕이 되어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지옥에서 이 사망의 권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는 흑망의 백성이구나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은 자이구나
개같은 이방인이구나 라고
새로운 왕을
심판의 자리에서 나의 왕이 되어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 부르짖음 자체가
이미 새로운 왕으로 인해서 불려지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새로운 왕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니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해 해방 되었다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고백을 참으로 뻔뻔스럽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말씀을 실천해서가 아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주께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그 주의 음성 때문에
우리가 뻔뻔스럽게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 새노래를 아무도 배울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만드신 입술로 마구 마구 막 튀어나오는 겁니다.
넉넉하게 흘러 넘치는 주의 사랑 때문에 말이죠.
원수도 끊을 수 없는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곧 새노래를 부르게 하시고자 우리를 만드신 겁니다.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의 구원은 헛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옳았습니다. (시편 144편) (0) | 2017.09.03 |
---|---|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편 150편) (0) | 2017.09.02 |
심판 속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 (시편 149편) (0) | 2017.08.27 |
버림받은 자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는 십자가 지혜 (시편 142편) (0) | 2017.08.20 |
하늘의 해와 달들아!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시편 148편) (0) | 2017.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