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편 150)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50:1, 개역)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50:2, 개역)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150:3, 개역)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4, 개역)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5, 개역)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6, 개역)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오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궁창에서 찬양하라 라고 나오는데

 

(150:1, 개역)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46-150편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지은 것이라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마치 계시록으로 치면

유리바닷가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어디를 빠져나왔다? 모세의 노래는 애굽을 빠져나왔다 말이죠.

어린양의 노래는 이 땅에 이 세상으로부터 출세상 출인생 출자아 출마귀세상이기에

육으로부터 빠져나왔다 666으로 부터 짐승으로부터 빠져나왔다 라는 구원의 노래 곧 새노래

십사만사천명만 부르는 노래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결국 앞의 것으로부터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애굽과의 단절이요

세상과의 단절이다 말이죠.

그것이 새 롭다 라고 했지요

 

 

새 왕을 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왕이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새롭게 왕을 세움으로써 앞의 것을 폐기처분한다는 겁니다.

적폐청산이다 말이죠.

이것을 새로운 왕을 기준으로 해서 참선지자들이 계시록의 일곱천사들처럼

기존의 헌것들을 다 뜯어내는 바닥 뜯기를 하는 겁니다.

? 새로운 것이 완성되었기에

 

그래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은 바로 앞의 것인 기존의 의미들을 다 폐기처분하기에

새 몸이 세워졌다면 헌 몸은 폐기처분하는데 있어서 일곱심판이 부어지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성령의 일은 개방이 아니라 바로 앞의 기존의 것과의 단절성입니다. 차이성이다 말이죠.

 

찬양과의 단절이 새노래이고

예배와의 단절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말이죠

이 산 모리아산 그리심산 성전의 예배냐? 아니면 저 산 시온 곧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냐?

이 산도 저 산도 아니다 말이죠.
그리심산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니다 말이죠.

이 성전 싸움 때문에 서로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누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가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다른 성전 다른 예배를 주장하니 졸지에 예수님이 더 더 더 나은 원수가 된 셈이다 말이죠.
유대인이 과연 가만히 놔 둘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와중에

또 성전과의 단절이 기존 성전을 헐고 3일만에 다시 짖는 새로운 참성전이신 예수님 자체가 새성전이시니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예수를 죽여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 유대인이다 말이죠.

 

결국 새 몸 새 성전의 등장으로
졸지에 기존의 모든 것들은 다 엉터리요 뭘 해도 죄요
, 뭘해도 가짜이다 라는 것이 십자가로 밝혀지는 겁니다.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욥이 제가 하나님을 잘 섬겼지 않았습니까?

엘리야도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요나도 3일만에 돌라는 것을 하루 만에 돌아서 에라 망했뿌라 라고 한다 말이죠.

 

이거 다 폐기처분 시키는 단절 곧 성령의 일이 개입하는 겁니다.

곧 심판입니다.

이거 다 주님이 이어주지 않고 도리어 버려버립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단절성 이 심판성 이 성령의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는

버림 받음

잃어버림을 받는 이 버림받는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 앞에서 어딜 감히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둥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열심히 특심이오니 내만 남았다는 둥

밤새도록 벽돌로 아토피 피부병을 빡빡 끍어대면서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라는 둥

이런 심각한 것들이

 

이 십자가의 죽음의 피흘리심 갈기 갈기 찢으심 앞에서는

쨉도 안된다는 겁니다.

 

우찌되었던간에 자아라는 나의 의미를 이어볼려고 개방이라는 둥 이것을 하늘에 올려볼려고

내 열심히 특심이니 나만 남았다고 자꾸 의미를 하늘에 올릴려고 하는데

 

정작 하늘에서 내려온 분은 이 땅에서 갈기 갈리 찢겨 죽는다는 그 앞에서

졸지에 다 단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의미를 올릴려다가 나 보다 더 큰 죽음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오신분이 갈기 갈기 찢겨지니까

상한심령이 되니까 나의 상한마음은 그 앞에서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그 앞에서 아프다고 말을 못해요

더 큰 아픔이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는 모습을 보여주니

 

손가락 다쳤다고 내밀려고 하다가

머리에 가시관 쓰신분을 보고 충격 먹어서

내 아픔은 아픔도 아니구나 라고

오히려 예수님의 아픔이 밀려와서

내 아픔은 쓸려 내려가 쓰레기 통 휴지통에 삭제 시켜야 할 판국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일곱심판이다고 했지요

 

주님의 그 심판 곧 단절 앞에서는 엄살과 핑계 밖에 안됨을 천부당 만부당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는 죽음이다 말이죠.

이것 보다 더 명료한 것 어디있는데 날 꾀냐?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속일려고 한다 말이죠.

내 아픔이 세상에서 제일 아픈 아픔이다고

 

그래서 십자가 보라고 일부러 벌린 사건이요

널 아프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 보니 아픈 손가락 내밀려다가 쑥 들어가는 겁니다.

어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냐 말이죠.

 

이 단절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나오는 성소입니다.

성소 곧 시온이요 곧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이 성소의 기능인데

인간들은 그 성소의 기능을 단절이 아니라

개방으로 만들어 놔서 졸지에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강도라고 하니까 살인자처럼 보이는게 아니라

도리어 광명한 천사들처럼 행동한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들처럼 믿음 좋다는 둥 봉사를 잘 한다는 둥

그런 인간의 자랑들이 소통되는 짐승의 수 666이 소통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성소의 진짜 기능은 단절이다 말이죠. 심판입니다.

물가지고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태워 달라는 겁니다.

내 모든 죄 멸하소서.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소서

새 마음 새 영을 달라고 말이죠.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성소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원수 갚기 (시편 73)

 

http://crosslamb.tistory.com/1687

 

 

시편 73편에 악인들이 너무 너무 잘 되어서 실족했다 말이죠.

심지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다 삼켜버리는 개구리 입으로 말이죠.

다 잡아먹는데 이스라엘까지 다 잡혀먹힘을 당하는 겁니다.

 

또 시편 137편에서는 심지어 바벨론에서 이런 굴욕까지 듣습니다.

야 이스라엘사람에 너희 시온의 노래 좀 불러봐 라고 말이죠.

 

야 예수쟁이야 예수노래 한 번 불러봐 라고 말이죠.

http://crosslamb.tistory.com/1879

 

그 앞에서 그 동안 잘 믿었던 것 봉사 많이 했던 것 무슨소용이 있겠냐 말이죠.

철저하게 갇혔다 말이죠.

 

그래서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겁니다.

제사의 상대적인 것이 순종이다 말이죠.

오히려 제사는 사울왕이 지킬려고 하더라 말이죠.

 

지금 바벨론 큰 물고기 입 속인데 말이죠.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일곱 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으로 우리의 의미를

그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를 의미 있는냥 착각하고 쥐고 있는 것들을

이런 것들을 동원해서 다 삭제 휴지통에 집어 넣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 곧 단절성이다 말이죠.

 

그리고 그 큰 물고기 바벨론 원수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직접 내려오셨다 말이죠

하나님 본인이 직접 내려오신 것만을 구원이라고 한다 말이죠.

이 구원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일 뿐이다 말이죠.

단절 되었기에

어딜 그 앞에서 십의 이조드렸다는 둥 열심히 특심이라는둥 하냐 말이죠.

오로지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고백해야할 판국인 단절성인데

 

그래서 예수님 본인이 직접 성소 곧 죄를 사하고자 화목제물이 되는

그 현장이 바로 성소요 시온이요 예루살렘 아닙니까?

이 강도의 소굴 예루살렘을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죽음으로 탈환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만이 소통되는 겁니다. 단절만이 소통된다 말이죠.

곧 십자가만이 이 새노래 만이 말이죠.

그 소통을 찬양이라고 합니다.

다른 노래를 안 불려지고 오로지 십자가 곧 주의 인자하심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신 이 구원만이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죽으심을 당한 그 십자가만이 구원이요 노래다 말이죠.

 

이 단절만이 찬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소에서만 찬양이 되는 겁니다.

즉 성소는 인물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찬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권능의 하늘에 곧 네트워크로써 우주에까지 전파 된다 말이죠.

 

(146:1, 개역)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146:2, 개역)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생전 곧 평생 인생의 모든 시간이 바로 이 단절성을 찬양하는 겁니다.

나를 버리는, 단절시키는 예수님을 찬양하라 라고 말이죠.

나를 죄인 만드시는 예수님을 말이죠.

마치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찬양했던 예수님처럼 말이죠.

 

(147:1, 개역)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2, 개역)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147:3, 개역)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이스라엘아 찬양하라 돌아오라 라고 말이죠.

주님 본인이 흩으시고 주님 본인이 다시 모으신다 말이죠. 이 단절성

원망케 만들고자 물없는곳 양식없는곳 인도해 놓고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쉬게 하신다 말이죠. 이 단절성

 

 

(55:1, 개역)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돈 없는 자 오라 해 놓고서 사라고 한다 말이죠. 그래놓고 또 값없이 사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돈 없이 사게 되면 종속관계가 되어버린다 말이죠.

이것이 저 자유로운 사생자 보다 더 나은 관계인 아바와 양자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8,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돈 주고 사라 말이죠. 이 관계를

매맞는 아빠와 아들 관계를

저 사생아에게는 없는 이 관계

이것이 성령의 일 곧 앞의 기존의 사생자에게서는 단절 된 단절성이다 말이죠.

 

 

(148:1, 개역)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148:2, 개역)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148:3, 개역)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148:4, 개역)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148:5, 개역)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리고 오늘 나온 하늘에서 궁창에서 찬양하라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라

곧 하늘에 속한 자유자가 찬양하기 위해서 지음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소되신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나님을 찬양했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시온과 예루살렘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인간이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을 가지고서는 찬양 못합니다. 새노래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단절성을 통해서

저 멀리 떨어진 궁창에서 하늘에서 찬양하라 라는 겁니다.

날개 없이는 못 찬양하겠지요?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5:1,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3,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오직 자유하는 자만이 새노래를 부른다는 겁니다. 그것이 단절된 자 곧 성령이 임한자입니다.

내가 의미를 두는 것 곧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열심히 특심이라는 둥 이렇게 의미를 두고 있는 것들이 다 무의미로 심판 받아 단절 된 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직접 죽으심으로 인해 십자가로 인해 용서 받아

또렷하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것만 찬양하는 자 말이죠.

 

 

그리고 시편 149

 

(149:1, 개역)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149:2, 개역)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지어다

(149:3, 개역)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하라 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백성은 바로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 뿐이다 말이죠.

 

십자가 정치라고 했었죠

정치인을 잘 못 뽑으면 자살자가 그렇게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정치인 곧 왕이죠.

 

섬기는 왕을 뽑으면 그렇게 백성이 즐거워 한다는 것이 실제 통계로 나온다 말이죠.

구지 현대의 빅데이터를 통하지 않고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다 알던 사실이고

특히 성경에서는 섬기는 왕, 백성을 위해 죽는 왕을 언급했다 말이죠.

 

그렇게 이스라엘이 그런 왕을 달라고 해놓고서는 엉터리 왕을 뽑는 이유는 뭘까요?

이 성령의 일인 단절성을 몰라서 그렇다 말이죠.

 

십자가 정치는 곧 이 단절성을 구원하는 겁니다.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자살자가 많다는데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버림 받는 예수님 버림받는 이스라엘 왕 유대인의 왕이다 말이죠.

바로 이 십자가 곧 버림받는 예수님을 구원하는 겁니다.

 

(왕상 1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상 12:7, 새번역)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결국은 성령의 일이 아닌 육의 일로써

단절이 아닌 개방으로

할례가 아닌 힘으로써

왕의 3대 금칙인 신명기 17:16-17의 금칙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왕 제도가 부러워서 왕을 세운다 말이죠.

 

(17:16, 개역)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17, 개역)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것이니라

 

(삼상 8:10, 개역)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삼상 8:11, 개역)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개역)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개역)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뗘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개역)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개역)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개역)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개역)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개역)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삼상 8:19, 개역)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개역)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삼상 8:21, 개역)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삼상 8:22, 개역)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곧 인간의 행함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말이죠. 행함은 곧 믿음을 버린 것처럼

왕을 달라는 요구는 결국 하나님이 왕 됨을 거절하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말이죠.

 

인간 사무엘 선지자가 버림 받은게 아닙니다. 인간은 버림받은 적 없고

버림 받을수 없어요 인간들끼리 뭘버려요

이질적인게 하나도 없는데

오로지 이질적인 걸림돌은 십자가 뿐이다 말이죠.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지혜 말이죠.

 

이것이 성령의 단절성입니다.

죄악을 파고들어가죠

전혀 몰랐던 인간 속의 깊은 죄악 말입니다.

말만 구원이 아니라 구원 자체는 인간을 깊이 깊이 파고들어가서 그 바닥을 뜯어낸다 말이죠.

그러니 심판 받아 마땅한 겁니다. 단절을 구원하고자 말이죠.

버림받은 하나님을 구원하는 것이 진짜 구원입니다.

 

(삼상 8:1, 개역)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삼상 8:2, 개역)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삼상 8:3, 개역)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삼상 8:4, 개역)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개역)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개역)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개역)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개역)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삼상 8:9, 개역)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찬양하는 새노래가 벌리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졸지에 두 패로 갈라지는 것은 새노래가 개입하게 되니까 벌어지는 사건인

십자가 사건으로써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교회가 돈 싸움 때문에 두 패로 갈라지는게 아니라

그건 역시나 한 패거리죠 결국 둘 중에 하나 나가서 또 돈장사 하거든요

그런 강도의 소굴 말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벌어지는 십자가가 벌리는 사건이 매일 매일 터지는 겁니다.

왜 새노래가 새노래를 부르게끔 하고자 말이죠.

 

그리고 오늘 시편 150편에서

성소에서 곧 심판받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성소되신 예수님이 이 죄인들

이 실패한 자들을 맞아주셔서 찬양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돌아오게 되니까 표시를 해 두어라 했잖아요

그러면서 울던 선지자가 포로 잡혀 간다고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다 라고 찬양했듯이

눈물로 씨를 뿌린 적도 없는데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새노래가 벌린 사건으로 인해 구원

곧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 비로소 원수의 멸망을 보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죽음을 당하고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신

그 새노래에 동참케 되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구원이란 결국 원수로 부터의 구원이거든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인해

모든 원수는 패한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성소에서 하늘의 궁창에서 높이 올라가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구원의 노래

곧 새노래

곧 모세의 노래 유리바다를 건너면서

홍해를 건너면서 불렀던 그 노래

죽음의 바다를 건너면서 부르니 얼마나 감격이겠습니까?

어린양의 노래 곧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시는 십자가에서의 그 외침이

우리에게 덮쳐져서

 

이 모호하고 흐릿한 것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이 원수들로 부터의

넉넉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고자

십자가에서 갈기 갈기 찢기시면서까지 다 이루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화목제물로써 말이죠.

 

역시나 호흡이 있는 자 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150:6, 개역)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기존의 호흡이 아닙니다.

끊어지고 단절되어서

새로운 호흡

새로운 숨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런 자만이 새노래 곧 십사만 사천명만이 호흡이 있는 자로써 여호와를 찬양하는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유대인 이라고 자부했던 99.9999999%가 다 탈락했습니다.

호흡이 없어서 기존의 호흡만 주장해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아서 말이죠.

 

그 코에 생기를 집어넣어 생령이 되었지만

흙에서 사람이 되었지만 산자가 되었지만

 

(2: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2:7, 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 '아다마' , '아담'

(고전 15:45, 새번역)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 2:7(칠십인역)

 

생령이 떠남으로써

육체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6: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천년 곧 묵시가 떠나니까

겨우 120년 이라는 시간을 의미있다고 가치있다고 여기면서

그것만 이어갈려고 한다 말이죠. 단절성을 거부하면서 말이죠.

이게 육체입니다.

자기에게 의미있는 것만 가치를 두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한자는

곧 호흡이 없는 자는 주를 찬양치 못하도록 하셨다 말이죠.

그들은 기존의 것만 주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새노래 새몸 새성전에 관심이 없이

기존의 것이 단절되고 허물어져야 하고 심판받아 마땅함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성전 그것도 46년동안 지은 성전에 가치를 두는 겁니다. 의미를 둔다 말이죠.

그 의문의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주님이 계시지도 않은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새성전만이 3일만에 짖는 참성전만이 의미가 있기에

완악한 성전은 허물어져야함이 마땅하다 말이죠.

그 심판의 일곱이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그래서 세리는 긍휼을 쳐다보는데

? 심판 받아 마땅한 의문의 것인줄 알기에

의문 곧 뭘 해도 다 가짜요 뭘해도 다 죄 밖에 안되는

뭘 해도 다 심판받아 마땅함을

일곱을 봤기 때문에 외치는데

 

일곱이 등장해도

인간들은 그저 기존의 의문의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내 열심히 특심이라는 둥

그 껍데기르 허물어져서 불에 타 다 안개처럼 잿더미처럼

후 불면 다 날라가 버리는 의미 없는 것에 의미는 두더라 말이죠.

 

자 그래서 저들의 무가치 무의미하게 여기는

이 새노래 곧 십자가를 의미있게 노래하는 겁니다.

성령을 훼방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그 무시받는 성령의 영으로써 호흡을 새롭게 받아서 말이죠.

 

이 다윗의 십자가 정신을 선지자들이 곧 단절성을 이어 받아서

새 영 새 마음 새 호흡으로 찬양하는데 있어서

막을 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헌 마음 헌 몸을 물에 확 빠뜨리고자 등떠미는 겁니다.

세례죠. 주님과 합한 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11:19, 개역)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11:20, 개역)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1:21, 개역)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36:23, 개역)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36:24, 개역)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36:25, 개역)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36:26, 개역)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개역)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36:28, 개역)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새노래는

이미 넉넉히 이기었기 때문에

이 원수로 부터의 승전가를 신나게 부르면서 살도록

구원의 노래인 십자가를 외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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