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를 뒤집어 쓰고 베옷 입고 우는 자에게 찬송의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새노래 (시편 145편)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찬송의 옷을 입혀주심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3, 공동)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사 61:3, 쉬운) 『여호와께서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를 뿌리는 대신 왕관을 씌워 주며,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며, 절망 대신 찬양의 옷을 입혀 주실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의의 나무라 불릴 것이며,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심으신 나무라 불릴 것이다.』
(사 61:3, 현대어) 『그러므로 슬퍼하는 시온 사람들아, 모두 기뻐하여라! 이제는 머리에 흙먼지를 끼얹거나 베옷을 입고 울지 말아라! 이제는 환희의 축제를 거행하도록 아름다운 옷을 입고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나오너라! 더 이상 근심하며 괴로워하지 말고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운 노래를 불러라. 이제는 온 세상이 예루살렘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울창한 느티나무라고 부르며 여호와의 영광을 드높일 것이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시 145:1, 개역) 『[다윗의 찬송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2, 개역)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3, 개역)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시 145:4, 개역)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45:5, 개역)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시 145:6, 개역)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시 145:7, 개역)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시 145:8, 개역)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 145:9, 개역)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 145:10, 개역)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시 145:11, 개역)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시 145:12, 개역)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시 145:13, 개역)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 145:14, 개역)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시 145:15, 개역)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시 145:16, 개역)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시 145:17, 개역)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시 145:18, 개역)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9, 개역)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20,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시 145:21, 개역)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성호를 영영히 송축할지로다』
(출 15:1, 개역)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2, 개역)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3, 개역)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출 15:4, 개역)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출 15:5, 개역)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출 15: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 15:7, 개역)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출 15:8, 개역)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출 15:9, 개역)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출 15:10, 개역)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출 15:11, 개역)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2, 개역)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출 15:13, 개역)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 15:14, 개역)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출 15:15, 개역)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6, 개역)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출 15:17, 개역)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출 15:18, 개역)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 15:19, 개역)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출 15:20, 개역)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21, 개역)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출 15:22, 개역)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 15:23, 개역)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4, 개역)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 15:25, 개역)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6, 개역)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7, 개역)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사 61:1, 개역)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개역)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4, 개역)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 61:5, 개역)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사 61:6, 개역)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사 61:7, 개역)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사 61:8, 개역)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사 61:9, 개역)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사 61:10, 개역)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1, 개역)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사 61:1,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 ㉠또는 '겸손한 사람' ㉡칠십인역에는 '눈먼 사람'』
(사 61:2, 새번역)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사 61:3, 새번역)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사 61:4, 새번역)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사 61:5, 새번역)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너희 양 떼를 먹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다.』
(사 61:6, 새번역)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 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사 61:7, 새번역) 『너희가 받은 수치를 갑절이나 보상받으며, 부끄러움을 당한 대가로 받은 몫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땅에서 갑절의 상속을 받으며, 영원한 기쁨을 차지할 것이다.』
(사 61:8, 새번역) 『"나 주는 공평을 사랑하고, 불의와 약탈을 미워한다. 나는 그들의 수고를 성실히 보상하여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
(사 61:9, 새번역) 『그들의 자손이 열방에 알려지며, 그들의 자손이 만민 가운데 알려질 것이다. 그들을 보는 사람마다, 그들이 나 주의 복을 받은 자손임을 인정할 것이다."』
(사 61:10, 새번역)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주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의 겉옷으로 둘러 주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사 61:11, 새번역)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에 뿌려진 것을 움트게 하듯이, 주 하나님께서도 모든 나라 앞에서 의와 찬송을 샘 솟듯이 솟아나게 하실 것이다.』
(눅 4:18, 새번역)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 ㉤사 61:1; 2』
http://crosslamb.tistory.com/1906
새노래 곧 찬양이란
기존의 찬양을 허물기 위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그 기존의 찬양은 무엇인가?
바로 시편을 어릴적부터 달달 외우는 유대인들의 찬양
마치 부자청년이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그런 모습의 찬양입니다.
그런 기존의 개념에 새로운 것을 따로 세운다는 것은 기존의 개념을 허물기 위함입니다. 적폐청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말이죠.
그럼 새롭다 라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과 연관되는 인물 개념이 되는 겁니다.
십일조나 안식일이나 율법 등등이 바로 이 예수님과 연관이 되면 새로움입니다.
자 그렇게 되면 기존의 십일조 안식일은 다 허물어져야 합니다.
시공간을 날려버리는 안식이 와야 합니다. 그것을 안식의 주인이라고 한다 말이죠.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의 순으로 여섯째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는 안식일은 없다 말이죠.
거꾸로 일곱에서 오는 안식일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날이 아니라 인물이였던 겁니다.
누가 날짜를 말하기 위해서 쉬고 평안케 되냐 말이죠.
인물이 오지 않으면 평안은 없고 쉼은 없다 말이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안식일에 오라고 하지 않는다 말이죠, 내게로 곧 인물에게 오라 그래야 쉰다고 한다 말이죠.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라는 영원한 언약을 어떻게 과연 예수님과 곧 새로움과 연관 시키겠습니까?
만약 연관 시키게 되면 거리끼는 걸림돌 곧 본인들이 이 영원한 언약인 안식일을 지킨게 아니라
그 동안 순 엉터리로 어겨왔음을 시인해야 할 판국이니 걸림돌에 탁 걸려 버린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원수 같은 사마리아인도 미워 죽을 판국에
그 사마리아인을 옹호하는 예수는 더더욱 밉거든요.
탕자가 미워 죽을 판국에
그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우는 예수님은 더더욱 밉다 말이죠.
자 그래서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겁니다.
가인이 이 제사에 몰두할때에
아벨은 이 인물에게 순종해 버립니다.
제사는 원인 있는 결과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오는 식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순종이 등장해 버리니까 이 원인이 삭제 되어 버리는 바람에
지킨 것이 하루 아침에 다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즉 제사가 의미가 없다 말이죠.
그 제사를 지키는 나도 의미가 없어요 사라져 버려요 의미가 삭제 당하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 의미가 있는데? 그것 곧 원인을 삭제 시키는 결과가 의미 있는 겁니다.
이 결과란 인물입니다.
이 인물과 연관이 될 때만 새롭다 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아벨은 삭제 당하는 겁니다. 졸지에 결과만 덮쳐졌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가인은 그 원인인 자기자신을 끝까지 끌고 갑니다.
그 의문의 덩어리를 이마표까정 받아가면서 질질질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죽일까봐 방어적인 요소로써 모든 것이 작동합니다.
곧 원인은 자기자신이였던 겁니다.
없는 자아를 질질질 끌고가면서 삭제 당할까봐
죽임을 당할까봐
아벨을 자신이 죽였듯이
본인도 아벨처럼 될까봐 말이죠.
그러니 새로움과 전혀 연관이 될수 없는 완고함만 쌓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탄생하는 것이 영웅입니다.
그리고 성 요새 캐슬이고
이것이 국가 곧 바벨탑이 되는 겁니다.
즉 살인이, 죽음이 이 성을 점점점 높게 크게 넓게 길게 쌓게 되는 겁니다.
자아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거든요.
선인 자기자신에 예민하면 할수록 악에 대해서도 예민해지니
방어막을 더더욱 첩첩 산중 겹겹으로 쌓습니다. 그래도 불안합니다.
왜 ? 의문이요 미흡함이요 미완료요 모호하거든요.
그러나 아벨은 자아가 삭제 당하고 원인이 삭제 당하니까
결과만이 넘치는 겁니다. 그 결과란 곧 새로움이란 인물 곧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자기가 변호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나서주시는 겁니다.
아벨의 피 흘림을 갚아주겠다고 말이죠.
마치 지옥간 부자 비유 곧 거지나사로 비유에서
거지나사로는 아무말도 필요없이 아브라함이 다 대변해 주듯이 말이죠.
오히려 지옥간 부자는 마치 가인처럼
이 성을 쌓고 저 성을 쌓고
영웅들인 자식을 많이 두어도 결국 물 한 방울이 없는
긍휼이 없는 목마른 갈증의 지옥 속에 마침이 없이
그 어두운 터널에서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건널수가 없어요 큰 구덩이의 간극을 말이죠.
이것이 가인의 모습인 지옥간 부자의 모습입니다.
자 새로움이란 인물과 연관됩니다.
그 인물은 예상한 인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아무리 예언을 하고 기록을 했다손 치더라도
인간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을 다 피해가면서도 예언대로 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인물로 인해서 기존의 개념들
곧 찬양 성전 안식일 율법 모조리 다 허물어져야 하고
그 분이 다시 만드셔야 하는 겁니다.
만든다 라는 것이 좀 부족한 표현이지만
왜냐하면 새로움 자체가 뚝딱 뚝딱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게 아니라
이미 완성 된 채로 오기 때문에
만든다는 표현 보다 허물줄 알면 새로움이 이미 완료된 채로 왔구나 라는 선언 선포로 인해
무릎 꿇으면, 순종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도 제사 드린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안식일 지켜야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는 어기냐 라고 따지듯이 말이죠.
인물과 연결이 안되면 아마 지옥에 가서도 안식일 지킬려고 할것이고
지옥에 가서도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듯이 지옥에서도 지킬려고 할 겁니다.
지옥간 부자가 오죽하면 선지자를 좀 보내 달라고 얼마나 이 전도를 해야한다는 마음이 풍부합니까?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의 말은 무시하거든요. 거지나사로를 무시하듯이 말이죠.
아니 선지자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본인은 정작 아브라함 선지자의 말을 귀뚱으로도 안 듣는다 말이죠.
거지나사로가 선지자로 안보였거든요.
그러니 기존의 전도 개념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허물어지지 않고 말이죠.
누가 외부에서 와서 허물어 주지 않으면 지옥에서도 제사나 드리고 있지
더 나은 순종은 못하는 겁니다.
인물을 안 쳐다보거든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봐요
왜?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죄인 만이 인자를 쳐다보도록 의사의 부름에 저 환자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결국 전적으로 누구에게 달렸다? 이것을 새로움이라고 합니다.
그 새로움이 닥쳐왔을때에
곧 종말입니다.
결과입니다. 끝입니다.
끝이 닥쳐왔을때에
그야말로 게임오바입니다.
손 탈탈 털고 빵께이 소꿉놀이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겁니다.
새로움이 불러주지 않으면
곧 인물
아빠 예수님이 불러주지 않으면
그 의문의 소꿉놀이를 캄캄한 어두움이 닥쳐오는 밤에도 손을 놓을수가 없는 겁니다.
사생아죠 사생아
소꿉놀이에서 뭐 모래성을 엄청나게 잘 쌓았다는 둥
돈을 많이 벌어 재산이 많았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
다 소용이 없습니다.
인물이 불러주지 않으면 그 소꿉놓이 손 놓지 못하고 계속 밤에도 하는 겁니다.
새로움 곧 인물이 부르는 소리가 바로 새노래입니다. 거기에 화답하는 것이
찬양케 하기 위해서 선택한 이스라엘입니다.
즉 의사가 불러주면 네 저 환자 맞습니다 맞고요 라고 화답하는 것이
그 화답이 새노래입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혼자 노래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예상할수 있고 연습할수 있고 미리 준비할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새노래는 예상할수 없는 원인 없는 결과요
연습할 수 없는 원인 없는 결과요
미리 준비할 수 없는 원인 없는 결과요
무시험 합격이다는 이다는 겁니다.
즉 전혀 예상하지 못한 너 날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십자가의 완성으로부터 나오는 물음입니다. 외부의 인물 그것도 아무나가 아닌
새로운 인물의 물음입니다. 전혀 예상 못했던 물음입니다.
그 물음에 화답하는 것이 새노래로써
참으로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화답하는 겁니다.
이것이 새노래입니다.
사랑의 노래, 십자가의 사랑 노래. 십자가의 피 용서가 덮쳐진 죄인과 그 죄인을 위해서 죄값을 병값을 치르시는 의사와의 합작노래
그러니 이 노래의 효과는 마귀가 두손 두발 다 놓게 되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절로 말이죠.
가수들이 백날 노래 잘 불러봐요 마귀가 두 손 두 발 다 드나?
여리고성이 무너지나? 안 무너집니다.
그런 CCM 가스펠송 가수는 그럼? 역시나 안 무너집니다.
가짜 이거든요.
그냥 가짜일 뿐이요 저는 환자요 죄인입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기존의 개념만을 사수할려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과 같고 가인과 같습니다.
왜그런고 하니 본인들이 제사장 나라의 사람이다고 믿고 믿숩니다 믿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어요 글쎄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살인의지일 뿐입니다.
인간의 믿음 필요 없고 예수님의 믿음만 있으면 된다
예수님이 믿음이다 라고 하니까
자기가 빠져 있으니까 화를 내더라 말이죠.
그래도 내가 믿어야 한다고 자꾸 고집을 피우더라 말이죠.
그 믿음이 허물어져야 되는데 곧 믿음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말이죠.
졸지에 자기를 빼면 안된다고 자기가 더더욱 하나님을, 예수님을 더 믿겠다고 한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은 백날해도 믿음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즉 1234 순서대로 가는 겁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온다는 식입니다.
1이 있어야 2가 있고 2를 거쳐서 3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어기면 불법으로 본다 말이죠.
이것이 원인 있는 결과로 보는 겁니다.
내가 믿어줘야 예수님을 믿을수 있다고
내가 믿는 그 원인이 있어야 예수님을 볼수 있다는 결과를 기대하는 겁니다.
유대인도 그랬다 말이죠.
그래서 시편을 달달 어릴적부터 외웠다 말이죠.
그런데 시편대로 오신 예수님을 시편대로 행하신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것은요 원인 없이 결과로 덮쳐진 겁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고 나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움이라고 합니다. 인물과 맺는 관계입니다.
소위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역발상이다 말이죠.
결국 유대인 곧 이스라엘은 엉뚱한 인물을 상상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였다 말이죠.
그럼 하나님이 누군데? 예수님이다 말이죠.
자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만난 의사
곧 자신은 환자였고 죄인이였지 의인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정직한 영이 없다고 새마음 새 영을 달라고 했겠냐 말이죠.
그 새 마음 내가 소유하면 어차피 헌 부대로 새 술을 담아서 서로의 기능을 못 하도록 되는 셈이다 말이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기 때문에 새 마음 새 영을 달라고 한다 말이죠.
그럼 새 마음을 어떤 마음으로 기존의 개념으로 보면 안되요
새 마음이란 새 인물이다는 겁니다.
헌 인물인 나를 허물어 버리는 새 인물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분이 새 인물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자로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죽이는 자로 드러나야 한다 말이죠.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가짜로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 곧 예수님이라는 새 마음 새 영의 등장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거다 말이죠.
내가 그렇게 안 드러나길 바라는 것이 헌 마음이요
외부의 새인물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제사만 드리는 의문의 반복만 하는
지옥에 가서도 누가 그 헌 마음을 헌 영을 허물어 줄 자가 없어서
사생아로 남아서 밤에도 그 소꿉놀이를 멈출수가 없는
창고를 더 늘리는 그 쓸데 없는 의문의 장난을 반복하는 지옥에서도 멈출수 없는
사생아로 드러나더라 말이죠.
그래서 시편에서 주의 성실하심이 밤에 땍쥐 소꿉놀이 멈추고 손 탈탈 털고 떠나자 라고
출애굽 시키시는 외부인물의 등장을 바로 성실하심이라고 하고
그 지옥에서 건져내서 그 캄캄한 밤을 통과케 해서 아침을 맞는 것을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한다 말이죠.
중간에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지지 않아서 광야 그 죽음의 어두운 사막을 결국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나 돌아갈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했던 자들은
이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지 못해서 결국 탈락하고 어두운 밤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만을 쳐다본자는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말이죠
즉 나는 환자입니다 저를 고쳐주소서 라고 한 자가 말이죠.
그러니 그 앞에서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주여 저 감기 걸렸어요 주사 놓아주세요 주여 저 죄인으로 드러났어요 빨이 십자가의 피 발라 주세요 저는 환자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자에게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써 완성한 피 주사를 맞을거 아니겠습니까?
이 피 주사의 효과 곧 기능은 죄인에게만 해당된다 말이죠.
그런데 다들 의인이래
광야를 못 통과하는 이유는 다들 의인이래
다들 건강하데
환자로 일부러 만들려고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일부러 골라서
데리고 갔다 말이죠.
왜? 피 주사가 있거든요. 원인 없는 결과가 있거든요,
무시험 합격이 있거든요. 백신이 있다 말이죠.
이 백신은 환자에게만 주사 바늘 찔러 댑니다.
그런데 자꾸 다들 시험 칠려고 해
어차피 빵점인데
시편을 다 외우고 시편대로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키고 시편 다 지켰다고 우긴다 말이죠.
자기들끼리 다 100점 건강한 자 의인이라고 자기들 멋대로 체점을 해요 글쎄
그런데 예수님께서 등장하심으로써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나타는 결과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믿음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다들 빵점이라는 것이 다 밝혀지더라 말이죠.
성경 해석으로 예수님을 이겨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동안 쌓아올린 명성이 하루 아침에 와장창 무너지더라 말이죠.
순 엉터리 해석이라는 것이 들통났고 그 엉터리 해석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아왔고
그것이 드러나니까 두려워서 바로 죽이고자 해도 못 죽이고 기회를 노리게 되더라 말이죠.
졸지에 예수님의 등장 예수님의 해석 때문에 경쟁자가 생겨서
저 예수 못 죽이면 자기가 죽을 판국이 되는 겁니다.
이게 새로움이다 말이죠.
기존의 것들이 멕시코 지진처럼
미국 태풍처럼
다 놔두고 도망치지 않으면 다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존의 것들을 다 흔들어대는 것이 진짜 새로움이다 말이죠.
이 인물이 등장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메시아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메시아를 기다린게 아니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말이죠.
기다렸다는 것은 예상했다 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야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였어
그 메시아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가가 가가? 가가 가 아니였다 말이죠.
그럼 가가 가 아니였다를 증명하고 밝혀내면 된다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믿음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말이죠.
예수님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인간의 믿음이다 말이죠.
뭐 우리는 유대인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굽쇼?
단 한번도 유대인이 했던 짓에서 벗어난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마귀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아 회개 하라고?
아니요 회개 하지 마세요
회개도 기존이 회개로 보고 있지 곧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회개만 할 줄 알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회개 곧 새회개를 할 줄 몰라요
정직한 영이 없는데 어떻게 회개를 합니까?
새 마음 새 영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새회개란 예수님과 연관된 겁니다.
즉 절대로 독자적으로 반성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이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건따지지도 않고
너 날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주시지 않는 이상
회개란 없어요.
회개는 원인을 없애는 것이거든요.
결과만 덮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내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라고 회개해야 한다 말이죠.
이것은 이미 나를 용서하신
이미 날 용서하셔서 물어주시는 새 인물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이상
회개가 나올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오히려 유대인처럼 바리새인처럼 회개의 달인만 될 뿐이다 말이죠.
회개의 달인이 되어버리니까 더더욱 회칠한 무덤이 되더라 말이죠.
회개의 달인이 아니면 딱딱한 무덤이 안될텐데
얼마나 회개를 많이 했으면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도록 해 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했겠냐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고 새 마음 새 영이 없다는 것을
새인물 때문에 알게 되었다면 그 따위 회개의 달인으로써의 회개를 했겠냐 말이죠.
즉 폐기처분 되어야 할 것들을 오히려 쌓고 의미 있다고
회개까지 해가면서 소꿉놀이하듯이 모래성을 쌓더라 말이죠.
더 넓게 더 크게 더 높게 더 길게
그것이 어두운 밤에 까지 연장 되는 겁니다.
누가 불러주지 않으니까
손 탈탈 털수가 없는 겁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하다가
대식아 밥먹어라 라고 불어주면
다 손 탈탈 털고 돌아갈 집으로 향한다 말이죠.
돌아가도록 해 주는 인물 곧 부모가 있다면 말이죠.
그런데 사생아는 안 돌아가고 계속 구슬치기 합니다.
누가 불러주는 자가 없거든요.
누가 불어주지를 않으니까
계속 해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한다 말이죠.
안 불러주니까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회개를 계속해요
교회봉사를 해요 봉사의 달인이 되어버렸어
회개의 달인들이 되어버렸어
딱딱한 완악한 마음이 되어버린 겁니다.
물렁 물렁 말캉한 부드러운 젤리의 마음이 아니라 말이죠.
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못하는 겁니다.
회칠한 무덤이다 말이죠.
주여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을 못해요 말을
내가 나를 봐도 백날 그 꼬라지가 그 꼬라지야
그러니 심판받아 마땅할 뿐이다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실패다 라는 겁니다.
실패면 본전이게? 아닙니다. 마이너스 빵점이다 말이죠.
아예 없어요 구원받을 구석이 아예 ~~~~~
그런데 믿음이 나타나서 선물을 주더라 말이죠.
선물이란 예상한게 아닙니다.
공짜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선물로 받았을때에
그것을 다윗은 행복이라고 했고
왜? 믿음이기에
그 믿음이 새로움으로써 자기에게 덮쳤다는 겁니다.
그럼 자기에게 새로움이 둘이 양립하는게 아니라
새로움이 나를 아에 없애더라 말이죠.
결과가 곧 종말이 나를 이 원인을 없애더라 말이죠.
십자가에 매일 매일 못 박더라 말이죠.
그 정과 욕심을 말이죠.
그 정과 욕심을 이라고 할때에
대부분 불교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정반대입니다.
그 정과 욕심을 못 박는다는 것은
이 정과 욕심을 내가 절제하고 내가 욕심을 안 부림으로써
이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식이
모든 종교의 해석이다 말이죠.
기독교도 마찬가지 다들 이런 미흡한 모호한 666 짐승의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거꾸로 하는 겁니다.
미래완료에서 덮쳐져서 한다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석이 되느냐
그 정과 욕심을 내가 안 부리겠다는 욕심을 내 쪽에서 해결하게 하지 마시고
그래봤자 의문의 반복이니
주님이 해결해 주셨음을 날마다 보게 하소서
그러니까 이것은 내 쪽에서 할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뜻에서 막살기라 ~~~
또 막살아라 라고 하니까 막사는 나를 의미를 둬 ㅋㅋㅋ
자 이래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은
행할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골치 아파요 그래 따지면
왜냐하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당위다 말이죠.
또 오랜만에 나오는 용어
존재와 당위
당위란 존재 이전에 존재하기전에 기능이다 말이죠
당위는 존재를 거부하고
존재는 당위를 거부해요
원인은 결과를 거부하고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해요 거리끼는 걸림돌이니까
반대로 결과는 원인을 삭제해 버려요
원인 없는 결과 곧 무시험 합격이다 말이죠
이게 다윗언약입니다. 곧 새언약이다 말이죠.
다윗이 오늘 다윗의 찬양인데
다윗이 새술 새부대를 다윗인 자기에게 곧 헌 부대에게 안 넣습니다.
새 술을 헌 부대에게 넣으면 또 의문의 반복이요 마침도 없어요.
왜? 자기가 시작이 되니까
그런데 다윗 자기가 시작하니가 시작이 되니까
6 까정 갔다가 착각은 할수 있다 말이죠
착각했다 칩시다 6까지 갔는데
세상에 7 까지는 백날해도 안된다는 것을 또렷히 알게 되더라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까 그 걸림돌에 탁 걸려 못 넘어서니까
뒤돌아 보니 6까지 왔던 것도 6까지 온게 아니여
1에서 제자리 뛰기 하였던 것이더라 말이죠.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내 속의 죄가 이렇게 했다고
죄에게 탓을 하더라 말이죠.
캬 ~~~ 이게 성경의 위대함이다 말이죠.
보통 종교의 경전 같으면 내 탓이요 라고 여겨라 라고 사기를 쳐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미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고
원인 없는 결과로 무시험 합격 받고 난 뒤에
시험문제를 보니까 알고보니
내 속에 죄가 그런 짓을 했다고 남 탓 하듯이
죄 탓으로 돌리더라 말이죠.
이 뻔뻔함 이게 새 마음이 들어간 증거이다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부분을 설교하는 목사들을 보면
이 답을 이 무시험 합격을 도로 취소시켜서
불교로 바꿔 버려요
카톨릭으로 바꿔 버려요
내 탓이라고
교리 플러스 실천
이게 성화론이고 개혁주의 사상 아닙니까
인간들은 다 원인을 탓해요 원인에게 탓으로 돌려요
그래서 그 원인을 어떻게 잘 해볼려고
탓 안 당할려면 말이죠.
이 원인 이 존재에게 탓을 돌린다 말이죠.
자아도 존재이거든요
자기 탓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까 누가 꾀냐고 하듯이
존재에게 탓하지 않아요
원인에게 탓하지 않아요
존재가 있어야 탓을 하던가 말던가
원인이 있어야지 탓을 하던가 말던가
그럼 무엇에게 탓 합니까?
존재 이전의 기능에게 탓합니다.
그게 죄이다 말이죠.
이런 시선은요
존재가 기능을 가지고 노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다스릴수 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원인이 결과를 장난칠수 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 반대입니다.
기능이 존재를 가지고 놀고
죄가 인간을 다스리고
결과가 원인을 장난 치는 거다 말이죠.
자 그럼 기존의 찬양은 허물어져야 하는 찬양으로써
새찬양이 오도록 예비하는 첩경을 평탄케 한다 말이죠.
즉 울퉁불퉁 니 잘났니 내 잘났닌 저 마다의 개성이 어떻게
성격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불도져로 밀어서
못난놈 잘난놈 이상한놈을 하나로 집단적으로 통일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모조리 다 물에 빠뜨려 죽이는 세례를 베푸는 겁니다.
노래 잘부르는 CCM 앨범 대박난놈
노래 못 불러 앨범 쫄딱 망한 놈
이도 저도 아닌 중간 판매 하는 놈
모조리 불도져로 밀어서 평평하게 해 버린다 말이죠.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 곧 다윗의 행함이 있는 믿음에 따라
참선지자들이 물에 등떠밀어 확 빠뜨려 바벨론 포로 되게 만드는 것이다 말이죠.
자작극 십자가 피의 자작극
감기 걸리게 만들어서 피주사 찌를려고 백신 맞게 할려고 말이죠.
그러니 잿더미가 되어야 하고
슬퍼해야만 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울어야 하고
근심해야만 하고 아 나의 구원은 헛되구나
재를 뒤짚어 써야 한다 말이죠.
아니 왜?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아서 그 행복을
우리에게 까정 나누어 주고 싶어서
불도져로 밀어버린다 말이죠.
물에 확확 빠뜨려 세례를 퍼붓는다 말이죠.
손할례 말고
그것은 존재이고 원인 있음이고
마음판의 할례 말이죠.
기능이다 말이죠. 선지자의 기능
당위 말이죠., 존재 이전의 당위
존재는 당위를 못해요
존재는 절대로 막살기를 못해요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존재의 기능입니다 ㅋㅋㅋ
존재는 기능을 못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ㅋㅋㅋ
아무말 대잔치 ; 존재는 기능을 할 수 없는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다
존재이다는 말이야? 기능이다는 말이야?
존재는 없어요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어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말이죠.
에서와 야곱이라는 존재는 불도져에 깔려서 사라졌어요
다만 구분을 짖는 사라진 흔적은 있다 말이죠.
아 사라졌는거 맞네 라고 말하는 기능을 보충하도록 하기 위한
그럼 뭐만 남았는가?
미움받기로 작정된 기능
사랑하기로 작정된 기능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존재할 뿐이다 말이죠.
미움이 손에 잡히나요? 사랑이 손에 잡히나요?
기능에서 기능으로 연결이 되지
존재에서 존재로 이어질수 없어요
뚝뚝 끊어지는 이 단절성을 성령의 소욕이라고 한다 말이죠.
아비도 없이 어미도 없이 족보도 없이
그런데 더 또렸해???
십자가가 더 밝히 보여???
뭐 존재가 날 꾀겠다고?
존재 인 주제에
기능을 다스리겠다고?
자 당위로써 새노래가 덮쳐버리니까
노래 안 부르고는 못배기도록 말릴수가 없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새노래가 너 베드로 나 예수를 사랑하니 라고 물었다는 자체가
존재에게 물었던게 아니라
기능에게 물었기에 베드로 이전에 사랑하시기로 작정이 된
생명책에 기록된 기능에게 물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존재로써 나 예수님 세 번 부인했잖아요 라고 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날 잡아온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잡아온 이 마귀가 한 짖이고
캬 존재가 아니죠 기능으로 보고 있지요
이 기능이 바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관계성이거든요
이심전심
그런데 마귀는 사생아와 같아서 이 어두움 속에서 빠져나올수 없도록 되어 있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말이죠.
그 증거가 끝까지 존재로 따지는 겁니다.
베드로야 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존재야 라고
넌 그런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야 라고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 부드러운 음성 앞에서
십자가의 밝히 보이는 그 피 흘리심 앞에서
과연 언 놈이 꾀느냐?
아하 마귀 이 놈이 그랬군 이라고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놓고서는 마귀 탓으로 돌리더라 말이죠.
사도바울이 내 속의 죄가 그랬다고 죄에게 탓을 떠넘기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자 곧 십자가로 눈 뜬자
소경에서 십자가의 피로 피 주사 맞아서 눈 뜬 자입니다.
그 실로암 소경에게 과연 누구만 또렷하게 보이겠습니까?
십자가만 밝히 보인다 말이죠.
어딜 감히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이렇게 밝게 또렷하게 보이는데
기능은요 빛의 아들 보다 더 지혜로운 불의한 청지기와 같다 말이죠.
빛의 아들인데 불의한 청지기 보다 더 지혜롭지를 못해
아니 왜?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하다고 평하는 그 평을 옳다 라고 했거든
그 불의하다는 평가는 존재들의 평가이다 말이죠.
존재들이 존재로써 평가 해 봤자 존재로 파악한다 말이죠.
그 존재 받고? 무슨 존재? 불의한 청지기라는 존재 받고
그 불의한 청지기가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다고
이 불의함이 너희들 정의로움보다 훨씬 더 정의롭다 라고
원인 없이 결과적으로 선언해 버린다 말이죠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사랑이란 사랑할 만 해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무이다
도저히 사랑 못하는 불가능하기에 사랑이다 말이죠.
그게 바로 사랑 앞에 반드시
기능 앞에 반드시 존재를 붙이는데
바로 그냥 존재가 아닌 비존재
존재 보다 더 존재적인 비존재
이 비존재가 바로 기능인데 바로
비 非 존재, 非 아닐 비, 존재 아닙니다.
부정한 존재,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불의한 존재
아니 왜? 존재가 아닌데
끝이 덮쳤거든
새로움이 덮쳤거든
그러니 나는 헌 겁니다.
헌 것은 빨리 새 것에 의해 적폐청산 당해야 합니다.
이 적폐청산 하시는 주체인 새 것의 활동에 물러나야 하는, 허물어지고 누락되어야 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기에
그 끝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비 존재
존재 아니무이다 라고 외치는 존재
그렇게 취급 받는 무시당하는 존재가
이 비존재로써 불의한 청지기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라고 우기는 자 보다 더 지혜로와????
빛의 아들들은 절대로 인정 못하겠는데
주인이 일방적으로 자기의 마음이랑 딱 맞데 글쎄
이런 편파적이고 불의한 부조리가 어디있나?
그래서 졸지에 누굴 공격한다?
때리는 시어무이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자기 마음에 딱 맞다고 한
당연하지 주인이 그 마음을 새마음 새영을 불의하다고 취급받는 청지기에게 집어넣었으니까
그래서 자기 마음에 딱 맞다고 어쩜 내 마음이랑 똑같니 라고
이 자작극에
다들 이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새로움이 일체 못 들어오도록
그런데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누워서 침 뱉기 식으로
자기자신을 죽인 셈이다 말이죠.
그래서 거리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거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 곧 새노래입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를 다윗이 찬양하는 겁니다.
출애굽을 다시 벌리시는 예수님을 말이죠.
마귀 입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시는
그 미끼를 덮썩 무는 바람에
원수를 멸하시는 이 피의 자작극 찬양
그래서 모세의 노래 미리암의 노래 한나의 노래 다윗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곧 어린양의 노래
이 노래들의 특징이 바로
십자가라는 부정함이 나 보다 더 옳았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가
불의한 십자가라는 청지기의 지혜가 나 보다 나 라는 존재
존재라고 우기는 존재 보다 더 옳았다고 찬양하는 것이 새노래입니다.
유리바닷가에서 얼마나 행복할까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았으니 말이죠.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7, 새번역)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 ㉣시 32:1; 2』
(롬 4:7, 공동)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 ㉠시편 32:1-2.』
(롬 4:7, 쉬운) 『“자기 죄를 용서받고, 자기 허물이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다.』
(롬 4:7, 킹흠정)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롬 4:7, 현대인) 『`잘못을 용서받고 하나님이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행복하다!』
시편 32편 이군요
아 참 시편 65편을 올렸는데 아니다 이사야 65장을 올렸는데
뻔히 기존의 제사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을 따로 꼬불쳐서 세웁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본적이 없던 자를 말이죠.
이 말은 누구들이랍시고?
네 기존의 제사장 들으라꼬 말이죠.
(사 61:6, 개역)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즉 예상했다 못했다?
개같은 이방인이 어떻게 제사장이 되냐 말이죠.
오직 이스라엘만 제사장 나라 된다고 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이 이방인을 새이스라엘로 삼아버렸거든요.
누가? 이 불의한 청지기가 글쎄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거든요
끝을 미리 앞당겨 버렸어요
종말을 미리 땡겨버렸어요
미래완료를 앞당겨 버렸어요 글쎄
기생라합 생각하시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날 빨리 심판해 주세요 라고 미래완료를 끝을 땡겨와서 영접하더라 말이죠.
그냥 라합이 아닙니다. 반드시 기행 라합입니다. 불의하다고 막사는 자라고
절대로 이런 자에게서는 새로움이 나올수 없다고
여겨지는 자에게만 덮쳐지는 새노래입니다.
전혀 예상을 못하거든요.
어떻게 날 때부터 소경인데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기능이 그것도 소경에게 붙어버린 볼 수 없는 존재가 볼수 없는 고정화됨이
어떻게 기능으로써 보게 되었냐 말이죠.
방금전까지도 그 어떤 누구도 날 때부터 소경됨을 깰수 있는자는 아무도 없어서
그렇게 존재로 고정시켰다 말이죠. 방금 전까지 말이죠.
그래서 마음놓고 날 때부터 소경됨이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라고 마음껏 놀려먹을 수 있었다 말이죠.
왜? 부정하니까
이 부정함을 가지고 주님을 일하십니다.
죄인을 가지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의로움 가지고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의인을 가지고 구원자는 일하지 않아요
이 단절을 가지고
이 불가능성을 가지고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일하시는 성령의 일이다 말이죠.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구원자를 말해야지 의사의 기능을 말해야지
다들 존재를 말하니까
의문의 반복만 할 뿐 모호하다 말이죠.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게 없어요
왜?
다들 자기에게 끌어당겨 의미를 두니까
그러니 부정함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에 반발하는 겁니다.
이것이 짐승의 표를 받은 종교다 말이죠.
그냥 청지기가 아니지요 반드시 불의하다 라는 기능이 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재는 의미 없고 기능만이 돋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왜? 존재는 의미 없고
원인은 의미 없고
오로지 기능만 의미 있고
오로지 당위만 의미 있기 때문에
결과만 원인 없는 결과만 의미 있기 때문에 말이죠.
결국 새노래란 끝을 미리 앞당겨서 노래부르는 겁니다.
날 심판하소서 나의 구원은 헛됩니다.
나를 구원해 봤자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오로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만 구원하소서
예수님만 옳았습니다.
이것만이 또렷하고 밝히 보일 뿐입니다. 라고
그리심산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닌
예수안에서 성소 되신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또렷한 십자가의 밝히 보이는
그 원수를 용서하시는 그 피흘리심 만이 옳았다고 찬양하는 것이
바로 새노래 곧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감히 이 노래를 부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유대인도 못 부르는 이 노래를
시편을 다 외워도 못 부르는 이 노래를
감히 뻔뻔스럽기 짝이 없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이 새노래를 부를 줄 베드로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새노래의 자작극
부정한 부조리한 불의한 십자가의 자작극 노래, 새노래입니다.
잿더미 대신 화관을 어떻게 화관이 되냐 말이죠?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본적 조차도 없던 자가 기존의 제사장나라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개같은 이방인이 제사장 까지 되느냐 말이죠.
탕자가 금가락지를 끼게 되냐 말이죠.
다윗이 자기에게 새왕 될 자격이 없음을 알고 누구를 쳐다봅니까?
진짜 새왕을 봤잖아요
탕자가 제사장 되니까 제사장 될 자격이 있어서 입은 겁니까?
아니잖아요 바로 아버지의 긍휼을 쳐다보잖아요
신부에게 꽃단장 시키는 것이 신부 지가 지 스스로 하던가요?
외부에서 믿음이 와서 하는 겁니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요 공짜입니다.
값없이 말이죠.
이것이 찬송의 옷 그리스도의 옷 신부의 옷 십자가 피 옷입니다.
누구에게만?
죄인에게만 슬픈자에게만 우는 자가에만 근심있는 자에게만
재가 된 자에게만
개같은 이방인에게 제사장 옷 에봇을 줘봤자 맨날 태워먹는다 말이죠.
그래서 따로 꼬불쳐 놓은 그리스도의 새옷 피옷을 미리 준비한 겁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애굽, 큰 성 바벨론, 곧 짐승인 마귀 보는 앞에서 펼쳐지는
찬송의 옷의 자작극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옷의 자작극 말이죠.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사 61:10, 새번역)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주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의 겉옷으로 둘러 주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원수 복을 입은 그대로 피발린채로 말이죠.
죄수복을 입은 그대로
그래야 애굽으로부터, 큰 성 바벨론으로부터, 마귀로부터 제사장 옷 태워먹었다고
정죄 받는 불의한 죄인으로 마귀에게 잡힐 것 아니겠습니까?
미끼를 확 물어 버린 것이여 ~~~~~
어떻게 질고를 지고 대신 매맞는 것이 우리에게 나음이 되냐 말이죠?
이거 풀려고 하지 마세요
해석할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덮쳐지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새노래입니다.
사랑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안되요
오히려 원인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과를 없애버릴려고 해요
그래서 금가락지를 미워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를 거리껴 하는 겁니다.
살인자입이다 라는 고백을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원수입니다 라고 못해요
원수에게만 발리는 피인데
원수에게만 발려지는 사랑이다 말이죠.
다른 사랑은 없어요.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아 죽여라고 외친
이 우리를
이 원수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한
이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피 용서 보다 더 나은 사랑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원수에게 까지 ......
원수로써 부르는 찬양이 새노래 곧 십자가 사랑 노래 입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부를수 없는, 배울수도 없는 이 노래 말이죠.
바벨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결과가 덮쳐지더니 찬송의 옷이 입혀지는 겁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번역서에는 재미있는 소제목이 붙었다 말이죠. 이렇게
(사 43:14, 현대어) 『[새 해방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산 분, 너희의 해방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으로 정복자를 보내겠다. 그러면 그 도성의 주민들이 잔치를 벌이며 즐기는 유람선들을 타고서 강물을 따라 모조리 도망할 것이다.』
(사 43:16, 쉬운)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을 구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백성을 위해 바다에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사이에 길을 만들었다.』
즉 바벨론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하신다 라는 겁니다.
애굽에서
광야에서 말이죠.
죄인만들어
증거궤에 세 가지 물건 볼모작전 생명이 저당잡혀버린 죄인만들기 이다 말이죠.
생명의 소유권이 내 목숨을 저당잡은 이 증거궤에 담은 자에게 넘어가버렸다는 겁니다.
그 분이 심판하실줄 알았는데 웬걸 꽃단장 시키신다 말이죠.
(사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새번역)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벧전 2:9, 새번역)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 ㉣사 43:20; 출 19:5-6; 사 43:21』
이것이 십자가의 피를 노래하게 할려고 입히시는 찬송의 옷의 자작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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