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피하리요 ; 벗은 몸과 벗은 발이 된 선지자 (20: 1- 6)

 

(20:1, 개역)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20:2, 개역)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20: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20:4, 개역)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뵈이리니

(20:5, 개역)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20:6, 개역)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20:1, 새번역)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보낸 다르단 장군이 아스돗으로 와서, 아스돗을 점령하였다.

(20:2, 새번역) 그 해에 주님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시켜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허리에 두른 베 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씀대로, 옷을 벗고 맨발로 다녔다.

(20:3, 새번역)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면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게 표징과 징조가 된 것처럼,

(20:4, 새번역) 앗시리아 왕이, 이집트에서 잡은 포로와 에티오피아에서 잡은 포로를, 젊은이나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벗은 몸과 맨발로 끌고 갈 것이니, 이집트 사람이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엉덩이까지 드러낸 채로 끌려갈 것이다."

(20:5, 새번역) 그리하여 에티오피아를 의지하던 자들과, 이집트를 그들의 자랑으로 여기던 자들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20:6,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이 해변에 사는 백성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의지하던 나라, 앗시리아 왕에게서 구해 달라고, 우리를 살려 달라고, 도움을 청한 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어디로 피해야 한단 말이냐?"

 

(20:1, 쉬운) <앗시리아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친다>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보낸 군대 장관 다르단이 아스돗에 도착한 해의 일입니다. 다르단은 아스돗을 공격하여 그 성을 점령했습니다.

 

(20:1, 현대어) [삼 년 동안 벗고 다닌 이사야] 앗수르의 군대 총사령관이 사르곤왕의 명령을 받고 블레셋 족속의 성읍 아스돗으로 진격하여 단번에 쳐서 점령하였다.

 

 

선지자에게는 개인의 삶이 없습니다.

그것을 쉽게 말해서 공무직 기능이라고 하지요

즉 존재감이 없어요

개인이라는 자아가 있어야 존재하든지 말든지 할텐데

존재 자체가 없으니까

비존재로써 기능만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삶은 약속만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이사야 선지자의 신체는 마치 아침에 배달온 신문처럼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발가벗은 몸과 벗은 발로 돌아다니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이렇게 발가벗겨 지는 꼴을 당한다는 예언을 미리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번에 자살한 노의원을 작은 예수에 비유했는데

만약 이 노 의원이 참선지자에 해당되는 기능이라면

그는 자살로써 자신의 신체에 담아 소식을 전한 겁니다.

이것은 그 뿐만 아니라 노 전대통령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렇게 되면 한국 자체는 일본 보다 더 한 자살국 1위의 미래 밖에 없다는 거죠

 

다행히 그들은 사랑이 없기에

울리는 꽹과리이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지난 시간에 애굽의 멸망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애굽아 돌아오라 라고 복의 중심지가 되게 하겠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어머니과 말씀을 나누었다가

다시 그 다음날 월요일 쯤에 나누었는데

 

만약 애굽 곧 성경에서 무지 무지 강조하는데 있어서

큰성 바벨론의 원조가 바로 애굽이다 말이죠

지옥 하면 애굽이고

약속의 반대 하면 무조건 이유 없이 애굽인데

이 애굽아 돌아오라 라는 말씀은 무지 무지 생소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십계라는 영화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인 모세를 언급하면서 바로의 공주가 마치 과부처럼 생각이 되어 언급했는데

어머니께서는 그 전에 바로의 공주가 과부 아니냐 라고

아마 성경 말씀에서 읽어서 바로 생각해서 언급하셨는데 아무튼

그들 애굽이 의지하고 있는 신 곧 남편이 죽지 않는 이상

새 남편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애굽은 과부가 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남편 곧 우상이 죽지 않는 이상

안 돌아오겠지요

그런데 딱 돌아와버렸다 우상이 죽어서 남편이 죽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되면 누가 난감해 지겠냐 말이죠

탕자가 돌아오니까 누가????

개같은 이방인이 예수님께 돌아오니까

졸지에 이 십자가는 더더욱 이스라엘인 맏아들을 완악하게 만드는 겁니다.
첫째가 안색이 변해 버리더라 말이죠.

 

그런 지옥백성인 애굽이 만약 돌아오게 되면

누가 제일 반발 할까요?

맞습니다. 바로 약속의 민족인 이스라엘이 반박하겠죠

그런데 사실은

이 이스라엘은 항상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마음에는 애굽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이 애굽을 돌이키는데 있어서 들추어 내신다는 겁니다.

 

그럼 여호와를 믿은 것은 뭐냐?

믿음이 아니라 눈치였다 라는 거죠

눈치 보는 겁니다.

항상 마음에는 애굽을 향해 있지만

곁으로는 흠잡히면 안되니까 율법으로 자신의 신체를 도배한다는 거죠

 

그런 신체에 반대의 신체로써 지금 이사야가 발가벗겨진 모습의 신체로 등장하게 되면

백이면 백

이 이사야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누가?

남이 아닌 이스라엘이 말이죠.

 

그래야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는 위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되니까 말이죠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흠모할 모양이 없는 모습으로 오게 되니까

다들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미 유대인들은 마귀 곧 애굽을 늘 사모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감추고자

바리새인이 그것을 감추고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자를 돌삐로 쳐 죽일려고 할때에

땅 바닥에 뭐라 뭐라 쓱 쓱 쓰니까 도망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흠모할 모양이 없는 모습으로 왔다 라는 것은

즉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라는 것은

 

인간 속에는 죄악이라는 수치가 까까득 차 있는 것을

감추고자 종교의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노 의원처럼 약자를 변호하면서 사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자기의 죄악을 해결 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쳐주세요 라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면 되는데

 

그 반대로 마치 해결 했는냥

강도의 소굴처럼 바쳐라 지켜라 착한행실을 해야 천국 갈수 있다 라고

울리는 꽹과리 깡통을 까까득 채우는 요란한 소음을 가득 신체에 담고서

작은 예수라는 별명을 거짓선지자 로부터 얻게 되니

그 역시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죠

아무리 세상이 그를 참이라고 우겨도 말이죠

 

오히려 천한 계집 또는 지옥 백성 애굽 또는 탕자를

금가락지 살진소 좋은 새옷을 입혀 버리는 아버지의 사랑이 또렷하게 밝히 보이게 되면

아마 그들은 격동하면서 아벨을 쳐 죽이는 가인의 분노를 펼칠꺼다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잔치 국수 먹는다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역시나 둘 다 똑같은 유유상종이다 말이죠

아무리 뉴스가 그를 의인이라고 아무리 떠들어 대며 세뇌를 시켜도

또 그들의 반대 무리의 악행을 비판해도 말이죠

둘 다 악한 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약속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에 가두는

선악에 가두는 것에 속지 말고

그것은 미완료이니까 뭘 해도 의문의 반복이니까

왜 이 둘이 악마들인가를

복음을 통해서 대조해 보자 말이죠

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이들이 속임수인지를 말이죠

합리적 거짓말로 사람들을 다 장악했는지 말이죠

 

이 둘 속에 만약 이사야 선지자가 발가벗고 나타나서

이 둘의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너희 둘은 발가벗겨 지게 된다 라고 말이죠

 

그 와중에도 둘이 싸우겠냐 말이죠

 

물론 끝까지 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로 둘 다 선이다 라고 말이죠 서로 지 잘났다고

아무리 봐도 보수는 악마들 그 자체인데

저들의 거짓에 말려들 수 없다고 진보들은 우기지만

사실상 자신의 모습들은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저 자신들이 꼭꼭 감추어 놓은 모습들은

보수들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쪽팔린다 라고 진보들 곧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은 잘 감추인 것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혹 실패한 노대통령이나 노의원이나 실패해서 자살한거다 말이죠

진보든 보수든 다들 악마들이다 말이죠

마치 이것은 바래새인인 유대인이 로마의 독재와 손잡고 예수님을 죽이는 모습과 같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자기 멋대로 주님이 주신 것을 훼손하냐 말이죠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와서 날 괴롭게 하냐 라고 외치는

무덤가의 청년에게 들어간 두 귀신의 울부짖음과 같다 말이죠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무화과 나무에게 과실을 내라 라고 요구하고

그렇지 못함에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베드로가 놀라는 모습은

우리 속의 마귀 곧 자아가 근심하는 것과 같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는 모습이 근심하는 모습으로

결과를 맺었듯이

이 결과 앞에

아무리 어릴적부터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키고 혹시나 빠진 것 있으면 당장 말하세요

지금 당장 지키겠다고 우겨도

사랑이 없으니까 울리는 꽹과리 소음 깡통으로 까까득 채우다 보니

짤그랑 짤그랑 귀를 막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시끄러운

마치 냄새로 치면 배설물 똥덩어리만 가득채웠는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을 자랑이나 하고

천사의 말인냥 우겨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너희들은 약속이 없어

사랑이 없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안 쳐다 보고 있어

 

반대로 너희들은 울리는 꽹과리 사모하고 있어

애굽을 사모하고 있어

깡통만 가득 모으고 있어 라고

 

이사야가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너희들의 모습이 이 모습이야 라고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사야 본인은 그럼 어떻게 사랑을 담게 되었습니까

그 역시나 사랑이 없음이 또렷히 밝혀 졌음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무조건 이유 없이 타 죽어 마땅함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단 숯불로 인해 부정함이 제거 되니까

이유 없이 무조건 이 약속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24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여라 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쳤던 자들이였다 말이죠

그들이 무슨 수로 찬양자가 되었겠습니까?

맞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말이죠

 

안그러면 자기 내부에서는 이 죄악을 해결할 길이 없다 말이죠

 

인간은 자기를 대신해 줄 자가 없어요

모든 문제는 자기 문제로써 자기가 해결해 주지

남이 해결해 줄 수가 없는 겁니다.

 

오죽 하면 어떤 사람은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하겠냐 말이죠

배가 고파도 남이 밥을 먹으면 남이 배부르지

내 배고픔이 해결되지 못하듯이

 

죄 문제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

마귀에게 모든 인간이 장악 당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죄악을 남이 대신 짊어지고 대신 죄 값을 치른다는 이 약속의 등장에

오로지 마귀만이 의식한다는 것은

곧 마귀가 모조리 다 장악한 이 세상에 졸지에 뜨인돌이 등장한 것이니

마귀가 긴장 안하고 배기겠냐 말이죠

 

맞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저 세간이요 물건일 뿐인 가구입니다.

집주인을 결박하는

이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사야의 행동은

그야말로 그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기적 기적의 풍년 속에

졸지에 요나의 표적으로써 걸리끼는 걸림돌이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음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자신들이 건설한 지혜의 탑이

이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로 무너질 판국에 놓여진 것을

마귀만이 의식한다는 거죠

위기감을 느끼는 겁니다.

 

자신들이 건설한 우상의 강도의 소굴인 유대라는 가짜 하나님이

글쎄 십자가 하나 못 넘어서는 팔 다리 짤린 우상으로 들추어짐을 당하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에 앞에 걸려 넘어지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는 이 이사야의 3년 동안의 발가벗음과 신발을 신지 않고 벗은 발의 모습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라는 일관된 방어기질을 작동케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 조차도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아무리 그렇게 되지 않고자

원인을 갖추고 또는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회개 했다는 것 조차도 졸지에 사랑의 증상의 회개가 아니라

울리는 꽹과리의 증상으로 회개를 하니까

회개 지키기를 하지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니까 말이죠

 

회개하지 마시고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세요

 

찬양하기를 지키지 마시고

새찬양자로 태어나세요

 

그런데 막상 보니 찬양하기를 지키는 자는 세계 1위의 성악가라

그런데 새찬양자로 태어난 자는 단 한번도 노래 불러본적 없는

또 찬양 자체를 부를수 조차도 없는 벙어리로 날 때부터 태어난 자라

 

누가 강도의 소굴이며

누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겠냐 말이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를 새찬양자로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곧 마귀가 장악한 세상을 염두하시는 약속이 벌리는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사랑이 없는 자입니다.

강도의 소굴입니다 라고 회개하면 되는데

이걸 또 자신이 이 죄를 해결하겠다고 나서게 되니까

더더욱 강퍅케 되더라 라는 거죠

 

상대적으로 성도를 주님은 부드럽게 만들고

무능하게 만들고

이유 없이 무조건 말이죠

 

반대로 저들은 완악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아무리 십자가가 밝히 보여도

자기 꾀의 속임수를 속임수라고 비추어 주어도 말이죠

더더욱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이 이사야의 발가벗음 모습을 보고

아 이게 우리의 모습이군요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는 벌써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이군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시면 됩니다.

 

멸망 안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멸망 속에 놓여짐을 당하더라도

주께서 애굽아 돌아오라 하신 것처럼

앗수르야 돌아오라 라고 하신 것처럼

이들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이 복의 중심지가 되는 것은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시는 십자가의 피 용서 때문이듯이

이 십자가의 밝히 보여주심 때문에

울리는 꽹과리 곧 우상을 없애 버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이 옳았음을

 

이 멸망 속에서도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바라보게 하시고자

 

허구를 멸망 시키는

그래서 우리 신체 속에 있는 우상 조차도

함께 망하게 하심으로써

 

자존심 구겨졌다고 자살하는 작은예수 흉내낼게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피 용서가 떳다는 그 결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그 결과로

 

모든 원인들은 허구임을

 

우리는 허구 속에서

우리 자신이 허상임을

 

밝히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실상을 보고

 

이 십자가의 피 용서 중심으로 돌아가는 약속을 톡톡히

똑똑히 누리는 또렷한 주님의 실상인 피가 있다는 것에

 

신나게 즐거워 하면서 사시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새찬양자의 삶입니다.

 

허구를

이 속임수를 낱낱이 밝히 보여주시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는

 

많이 탕감 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는

 

실상의 삶인 십자가의 삶이 말이죠 (날마다 죽노라)

(마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막 8:3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4,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새번역)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2, 개역)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 15:33, 개역)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 15:34, 개역)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35, 개역)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 15:36, 개역)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 15:37, 개역)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고전 15:38, 개역)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 15:39, 개역)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40, 개역)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 15:41, 개역)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