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묵시 ;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 (21, 1-17)

 

(21:1, 개역)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 같이 몰려왔도다

(21:2, 개역)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매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21:3, 개역)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21:4, 개역) 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21:5, 개역)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21:6, 개역)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21:7, 개역)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떼와 약대떼를 보거든 자세히 유심히 들으라 하셨더니

(21:8, 개역) 파수꾼이 사자 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섰었고 밤이 맞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21:9, 개역)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숴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21:10, 개역)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

(21:11, 개역)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21:12, 개역) 파수꾼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21:13, 개역)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21:14, 개역) 데마 땅의 거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21:15, 개역)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21:16, 개역)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군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21:17, 개역)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1, 새번역) 이것은 해변 광야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남쪽 광야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처럼 침략자가 광야에서 쳐들어온다. 저 무서운 땅에서 몰아쳐 온다. / 바빌로니아

(21:2, 새번역) 나는 끔찍한 계시를 보았다. 배신하는 자가 배신하고 파괴하는 자가 파괴한다! 엘람아, 공격하여라! 메대야, 에워싸거라! "내가 바빌론의 횡포를 그치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하겠다."

(21:3, 새번역) 그러자 나는,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고통이 이런 것일까? 온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 말씀을 듣고 귀가 멀었으며, 그 광경을 보고 눈이 멀었다.

(21:4, 새번역) 나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떨었다. 내가 그처럼 보고 싶어한 희망찬 새벽빛은, 도리어 나를 무서워 떨게 하였다.

(21:5, 새번역) 내가 보니, 사람들이 잔칫상을 차려 놓고, 방석을 깔고 앉아서, 먹고 마신다. 갑자기 누가 명령한다. "너희 지휘관들아, 일어나거라. 방패를 들어라."

(21:6,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대로 보고하라고 하여라.

(21:7, 새번역) 기마병과 함께 오는 병거를 보거나, 나귀나 낙타를 탄 사람이 나타나면, 주의하여 살펴보라고 하여라."

(21:8, 새번역) 『㉡파수꾼이 외친다. "지휘관님, 제가 온종일 망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밤새 경계 구역을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 / 사해 사본과 시리아어역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사자가'

(21:9, 새번역) 그런데, 갑자기 병거가 몰려오고, 기마병이 무리를 지어 온다. 누가 소리친다. "바빌론이 함락되었다! 바빌론이 함락되었다! 조각한 신상들이 모두 땅에 떨어져서 박살났다!"

(21:10, 새번역) , 짓밟히던 나의 겨레여, 타작 마당에서 으깨지던 나의 동포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렇게 내가 그대들에게 전한다.

(21:11, 새번역) 이것은 두마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세일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파수꾼아, 밤이 얼마나 지났느냐? 파수꾼아, 날이 새려면 얼마나 더 남았느냐?" / '침묵'. 두마는 에돔에 대한 어희, 두 히브리어 사본과 칠십인역에는 '에돔'

(21:12, 새번역) 파수꾼이 대답한다. "아침이 곧 온다. 그러나 또다시 밤이 온다. 묻고 싶거든, 물어 보아라. 다시 와서 물어 보아라."

(21:13, 새번역) 이것은 아라비아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드단 사람들아, 아라비아의 메마른 덤불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드단의 행상들아,

(21:14, 새번역) 목마른 피난민들에게 마실 물을 주어라. 데마 땅에 사는 사람들아, 아라비아의 피난민들에게 먹거리를 가져다 주어라.

(21:15, 새번역) 그들은 칼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사람들이다. 칼이 그들을 치려 하고, 화살이 그들을 꿰뚫으려 하고, 전쟁이 그들의 목숨을 노리므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21:16,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 년 기한으로 머슴살이를 하게 된 머슴이 날 수를 세듯이, 이제 내가 일 년을 센다. 일 년 만에 게달의 모든 허세가 사라질 것이다.

(21:17, 새번역) 게달의 자손 가운데서 활 쏘는 용사들이 얼마 남는다고 하여도, 그 수는 매우 적을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1:1, 공동) 해변의 광야에 이런 선언이 내려졌다. 남쪽 광야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저 무서운 땅 광야에서 몰려온다.

(21:1, 쉬운) <바빌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바빌로니아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광야에서부터 재앙이 불어 닥친다. 네게브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무서운 땅에서 올라오고 있다.

(21:1, 킹흠정) 바닷가 사막에 대한 엄중한 부담이라. 남쪽의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이 사막으로부터 두려운 땅으로부터 그것이 임하는도다.

(21:1, 현대어) [바벨론 멸망의 환상] 바벨론에 대한 멸망 선언이다! 강변의 사막으로 남녘의 광야에서 회오리바람처럼 적군이 밀려오고 있다. 저 광야에서, 저 무서운 나라에서 적병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21:11, 공동) 『㉠에돔에 이런 선언이 내려졌다. 세일 산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파수꾼아, 얼마나 있으면 밤이 새겠느냐? 파수꾼아, 얼마나 있으면 밤이 새겠느냐?" / 히브리어 본문: "두마."

(21:11, 쉬운) <에돔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두마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누가 나를 세일에서 부른다. “파수꾼아, 아침이 오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느냐? 파수꾼아, 밤이 지나가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느냐?”

(21:11, 킹흠정) 두마에 대한 엄중한 부담이라. 그가 세일에서 나를 불러 이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매

(21:11, 현대어) [에돔에 계속되는 밤] 세일산 동쪽의 두마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세일산에서 나를 부르며 물었다. `파수꾼이여, 얼마나 있으면 밤이 새겠소? 파수꾼이여, 이 밤이 언제 새겠소?'

 

 

(21:13, 공동) 아랍에 이런 선언이 내려졌다. 드단족 행상들아, 아랍 땅 덤불 속에 몸을 숨기고 밤을 새워라.

(21:13, 쉬운) <아라비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드단에서 온 상인들이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밤을 지샜다.

(21:13, 킹흠정) 아라비아 위에 놓인 엄중한 부담이라. 오 여행하는 드단 족속의 무리들이여, 너희가 아라비아의 숲에서 묵으리라.

(21:13, 현대어)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의 말씀] 드단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의 말씀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마을들까지 공격할 것이다. 사해 동쪽의 드단 사람들아, 대상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숲 속에서 밤을 새워라!

 

 

오늘 본문에는 바벨론의 멸망(해변 광야) 예언이 1절부터 나오고

11절 부터는 에돔(이스마엘)의 심판

그리고 아랍(아라비아)의 멸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의 특이성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긍휼의 그릇이 이유 없이 긍휼의 그릇이 된다는 그 이유로

반드시 한 세트가 되는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진노의 그릇이 이유 없이 된다는 겁니다.

 

마치 뒤에서 소급이 되어서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고 뒤짚어 씌우듯이

이들은 약속을 무시하고 또 약속의 자녀인 이스라엘의 마음에

헛된 부러움을 심었다는 이유로 멸망시키는 겁니다.

 

아니 이스라엘이 잘못했는데 말이죠

 

아무튼 반드시 두 세력이 한 세트로써 약속에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참선지자는 반드시 이 두 그릇의 상황을 다 이야기 하도록 되어 있지

한 쪽만 언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거짓선지자는 이 이스라엘만 신경 쓰면 된다는 식으로 나오다 보니

왜 저들이 진노의 그릇의 역할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모르는 겁니다.

또 이유 없이 진노의 그릇이 되니 더더욱 이유를 모르도록 되어 있으니

관심사가 이스라엘 밖에 없게 되니

약속의 흐름을 모르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연스럽게 긍휼의 그릇의 의미도 모르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도 모르고 이스라엘이라는 껍데기에

죽도록 충성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약속 곧 언약이 뭔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래놓고 선지자의 노릇을 하게 되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전부라서 거기에 모든 것을 걸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 라고 거짓선지자는

참선지자의 부정적인 표현에 반발을 하고

절대로 이스라엘은 안 망한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를 부르면서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대충 대충 고치더라 라는 겁니다.

 

(6:14, 개역)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8:11, 개역)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즉 오늘 나오는 표현 혹독한 묵시를 아예 안 볼란다 라는 식으로

남의 나라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을 무시해 버린다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도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방나라도 망하는 판국인데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시겠냐 말이죠?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반드시 매를 대신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사생자죠

 

먼저 이들 이방나라의 심판은 곧 이스라엘이 부러워 하는 자들이였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애굽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이들 애굽의 멸망이 이스라엘과 무관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부러움을 제거하는

저들 곧 애굽을 짤라내는 식으로

수치 죄악을 굴러가게 하는 식으로

할례를 하듯이 짤라내어서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할례를 하는

마음판의 할례를 벌리시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자기의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없는데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말이죠

오로지 약속만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거지나사로가 아닌

상대적인 부자청년처럼 자신의 소유로 또는 자신의 지키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꽹과리 짖, 강도의 소굴의 짖을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간섭하셔서

주님 쪽에서 가리우는

수치를 자신의 피로 덮어서 모든 허물을 가리우는

그래서 스스로 가리운 나뭇잎이 아닌

그거 벗겨 버리고

마귀도 들추어 볼수 없도록 하신

십자가의 피로 덮으시고자

마귀에게 잡혀오는

예수님의 세 번 부인했다고 잡혀오는

그래서 스스로 가린 것이 쓰잘데기 없는 배설물임이 들통남과 동시에

불로 태워도 타지 않는 그리스도의 피 옷을 입히심으로써

어느 정도로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지를

예수님 자신의 피 자랑과 과시

어느 정도로 또렷하고 밝히 보이고 명료하고 미래완료로 미흡함이 없이

미쁘신 든든한 바위임을 보이시고자

 

이 이방나라가 당하는 혹독한 심판 속에 같이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때문에 저들이 당하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에게 쓸데 없는 마음을 집어 넣었느냐 라고 말이죠

유혹 당한 이스라엘 보다 (잘못은 이스라엘이 했는데)

유혹한 이방민족을 더 패는 겁니다.

 

물론 그 심판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부러워 하지 않겠죠

그러나 다 유혹에 넘어갈 때 까지

오히려 심판은커녕 더욱더 잘 되니까 안 부러워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더욱더 확장 되고

아벨은 그렇게 개죽음을 당해서 누구하나 들여다 보는 자 없는

그야 말로 허무한 죽음인, 그 허무, 그 무능 속에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아벨의 족보인 죽었더라 족보는 정작 예수님의 죽음 속에 집어넣기 위함이고

즉 절대로 심판의 불이 붙지 않는 그리스도의 피 옷을 입히시고자

육의 옷을 벗기시는 식이고

(결국 아벨은 가인에게 죽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죽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미래완료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라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 또렷한 피 흘리심이 덮쳐져서 허무하게 죽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죽음이 단독적인 죽임이 아닌

이미 벌써 승리했기에 말이죠.

예수님과 합쳐졌다는 그 이유로 미래완료에서 덮쳐지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죽음이다는 겁니다.그리고 이 약속을 소홀히 여기는 상대적으로 역여지는 한 세트로써 가인은 오히려 안 죽도록 보호 하심으로써

저들의 죄악을 더더욱 퍼트리는 식입니다. 즉 마귀와의 전쟁구조인 약속이다는 거죠.)

반대로 낳고 살았더라 라는 가인의 족보는 사라지기 위해서, 이미 졌기에 더더욱 팽창 시켰다는 겁니다.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은 거짓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이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과 연관 시키기 위함이고

저들은 그 반대로 예수님과 무관한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겁니다.

약속인 언약과 무관하게 말이죠

 

다른 민족들은 있음()에서 있음()

존재-있음에서 존재-있음으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은 육이 단절된 상태인

아브라함의 죽은 태에서 태어난 특이성 곧 약속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약속과 합한

연합된

세례 할례된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없음에서 없음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무에서 무로

단절에서 단절

그런데 더더욱 풍성하더라 말이죠

존재 보다 비존재가 더더욱 또렷한 존재더라 라는 겁니다.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존재이다는 거죠

 

어 분명히 죽였는데 더더욱 살아있고

분명히 불 속에 집어 넣었는데 더더욱 춤추고 찬양하고

 

반대로 불 바깥에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 살아있음이 모호하더라 라는 겁니다.

좀비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들 이스라엘 곧 약속의 증상물, 십자가의 증상물들은

오히려 육이 죽는 쪽으로 가면 살고 (날마다 죽노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고)

반대로 육이 사는 쪽으로 가면 죽도록 되어 있기에

 

이 육의 나라의 대표성인 애굽 쪽으로 가면 죽도록 되어 있기에

주님은 이 이스라엘을 징계를 퍼부어 서라도

수치 죄악을 짤라내듯이 애굽을 짤라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애굽으로 가봤자

애굽이 사라지고 없애버렸으니까

소용이 없는 겁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부러워 죽는데

그래서 가까이 가면

주님이 애굽을 없애 버리니까

이스라엘이 본심을 드러내더라 라는 겁니다.

완악한 마음을 말이죠

 

마치 강도의 소굴인 성전에 까까득 거룩이랍시고 가득 채웠는데

마치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잔뜩 모아서 채워서 가리고 가렸는데

주님은 자신이 성전이다고 자신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시니까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까

근심하고 돌아서는

애굽이라는 악마의 마음이 들통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그때 그시절로 끝나는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시로 불쑥 불쑥 벌어지는 사건으로 있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으면

아벨처럼

미래완료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벌어지지 않으면

아벨은 약속과 무관한 자인 가인과 뭐가 다르겠냐 말이죠

 

차이가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차이

 

분명 쌍둥이 이다 말이죠 에서와 야곱은 말이죠

남들은 구분 못해요

가족들도 헷갈려 해요

아부지 이삭이 헷갈려 하니까 말이죠

즉 남들은 때려 죽어도 차이가 안 보이는데

 

약속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언약으로 또렷하게 구분 구별 시키는 겁니다.

 

애굽 곧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은 구분 없어요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둘 다 새는 바가지입니다.

도진개진 이다 말이죠

 

그런데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 십자가의 죽음이 개입하게 되면

이 둘은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어어어 라고 샴쌍둥이의 머리가 분명 붙어있었는데

졸지에 의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 의사의 기능이 발휘되는 증상으로 인해서

머리가 하나였던 붙어있던 샴쌍둥이가 둘로 분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인

마귀가 끊임없이 퍼붓는 선악이라는 법이

이 지옥이 계속 땡기는

지옥의 마음이 계속 퍼붓는 지옥의 증상물로써의 진노의 그릇으로써 말이죠

 

또 하나인 야곱은 분명 형 에서와 다를바 없는 머리 붙은 샴쌍둥이처럼 하나가 된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임이 계속해서 덮쳐지니까

심판 속에서의 긍휼이 계속 퍼부어지니까

선물이 미래완료에서 계속 퍼부어지니까

약속이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 야곱이 점점점 선악에서 벗어나서

은혜 곧 십자가의 희생만을 쳐다보는

긍휼을 바라는 자가 되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피 흘리심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것이지

야곱이 한 게 없어요

야곱은 형 에서와 마찬가지로

저 선악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벗어나고픈 마음도 추호도 없었고

늘 마귀가 퍼붓는 자아 라는 자기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된 이 선악을 쥐고서

이 하나님 되기에서 벗어날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악마의 손에서 끊임없이 주인을 결박해서 빼내시는 긍휼작전을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작전을 펼치더라 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과의 차이성으로써 벌어지고 구분 구별이 되고 갈라지는 겁니다.

 

그러니 지난 시간에 언급했고 계시록에서 언급했듯이

애굽을 짤라내듯이

수치 곧 죄악을 짤라내는 이 거룩작업 이 구별 구분 작업인 할례인 십자가의 죽음(마음판의 할례)

 

죽어 마땅한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해당되겠습니까?

 

아니면 의인 또는 건강한 자에게만 해당 되겠냐 말이죠

 

저들 의인들 저들 건강한 자들인 애굽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그리고 또다른 의인의 자리

또다른 건강한 자의 자리에 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죄인 되기 싫어도 죄인으로 만드시는

환자 되기 싫어도 환자로 만드시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다는 그 이유로

그 떠버린 피 때문에 피의 증상물

곧 의사의 증상물인 환자

구원자의 증상물인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음으로써

 

광야에서 거짓영을 받은 자들인 거짓선지자 짐승 음녀 곧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음으로써

선악이 탈탈탈 털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됨으로써 그 잘난 내 스스로 수치를 가리고자 했던

되도 않는 의

되도 않는 행함

육의 자랑 등등

그런 것들이 배설물로써 울리는 꽹과리로써 탈탈탈 털리게 되는 겁니다.

 

마귀가 유혹해 놓고 마귀가 잡아와서

베드로를 내 놓으라고 했을때에

 

인간의 믿음 곧 베드로의 믿음이 아니라

 

그럴줄 알고 예수님의 믿음이

믿음의 주가 되신 분이 이 믿음을 선물로써

다 이루신 십자가의 또렷한 밝히 보이심으로써

그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반복인 그 속임수를

오히려 밝힘으로써 이 차이로써 베드로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셨다는

예수님의 기도로 덮어버렸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지

인간과 마귀와의 싸움이 아니다 말이죠

마귀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겁니다.

인간을 미워하는게 아니라

 

마귀가 악하다고 밝히 보임으로써 그 속임수의 내막을 십자가로 밝혀 버리시니까

선악이라는 속임수를 들통내 버리시니까

그 악함이 드러나니까 말이죠

 

얼마나 마귀가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는지

거짓선지자들도 똑같다 말이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서 가난을 해결하라는 겁니다. 경제문제 해결하라는 거죠

또 성전 그냥 성전이 아닌 거룩한 성전 최고의 거룩한 성전의 최고의 높은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천사가 두 손으로 밭쳐서 발이 상하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칠때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말이죠

 

아무리 시편말씀을 들고 와도

왜 예수님이 죽도록 아벨이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악마가 이기도록 하셨을까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말이죠

 

선을 아무리 이것이다 라고 규정해도

그 다음날 그 선이 악으로 돌변한다 말이죠

그런 아무 의미 없는 짓

다람쥐 챗바퀴 도는 의문의 반복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또렷한 밝히 보여주는

선악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죽음에 다 몰아넣고자

졸지에 이스라엘 때문에

이방나라는 매 맞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나기도 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이 긍휼의 그릇 됨 때문에

 

형 에서는 진노의 그릇이 되어야만 하는 그 정당성이 미래완료에서 퍼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는 죄악이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죄를 짖고 그 다음 죄인이 되는게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에 죄가 미래에서 덮쳐지는 식으로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는 편파 판정이 뒤에서 덮쳐지는 겁니다.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서 팥죽과 바꾼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면

주님의 심판이 옳았다고 외친다 말이죠

지옥 갈 자는 아무도 그렇게 외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끝까지 주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끝까지 이를 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지옥이다 말이죠

지옥사람은 끝까지 선악을 포기 못해요

그 선악을 마귀가 때려부음으로써 덮어씌움으로써 형성이 된 것이 자아인데

그것을 인정해 버리면 자아가 없어지게?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자아(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을 아는 자아)는 끝까지 죄를 다스려들려고 하는 그 뫼비우스의 띠

의문의 반복의 고리에서 못 벗어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자아를 우상이라고 하고

이 우상 때문에 이방나라는 이유 없이 심판을 받는

설사 우상 안 섬겨도

종교 없어도 자아라는 우상이 있다는 그 이유로

선악을 안다는 그 이유로

어차피 약속이 없기에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고 뒤에서, 미래에서 뒤짚어 씌우는 식으로 편파판결로써 지옥의 증상물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인 십자가의 죽음에 반발하고 싶다면

 

죄의 소원을 이겨 보라 말이죠

다스려 보라 말이죠

 

못 다스립니다.

 

그럼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직도 선악을 아는 인간이라고 우기겠냐 말이죠

죄를 다스릴려고 적어도 노력한다고

비록 못 이기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조금이나마 선 함이 쪼매라도 있다고 우기겠냐 말이죠

 

왜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을 똥물에 7번 담구라 라고 하셨냐 말이죠

똥물 보다 선하고 깨끗한 구석이 나아만 속에 있기는 있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탈탈탈 터는 겁니다.

베드로를 예수님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탈탈탈 터는 겁니다.

선악이 가득한 인간에게

말도 안되는 그 불가능성인 믿음을 집어넣고자

약속을 집어넣고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속에 집어넣고자

피 흘리심 속에 집어넣고자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완료 속에 집어 넣고자

의문의 반복인 선악을 탈탈탈 터는 겁니다.

 

일곱은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입니다, 완벽한 분리 구분 구별입니다.

 

즉 일곱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저들과 다를바 없는

차이가 전혀 없는 자를 일곱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차이를 반드시 내겠다는

주님의 믿음이 일곱이다 말이죠

 

그러니 일곱교회는 가짜교회인 사단의 회와 한세트로써 구별 구분이 되는데

항상 서로의 소욕이 반대 되는 식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처음사랑과 니골라 당의 행위의 대조

처음사랑은 자아는 작게 보이고 주님만 크게 보이는 겁니다.

니골라 당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미혹 유혹케 만들어서 우상

곧 자아를 위한 예수믿기로 만드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아닌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처럼 말이죠

 

요나 선지자 본인도 거짓선지자와 다를바 없는

내 열심이 특심이라고 외치는 엘리야의 외침 속에서

그 꽹과리 속에서

정작 약속은 안 쳐다보고

심판 속에서 긍휼을 안 쳐다보고

자신들이 죄인의 자리가 아닌

나 옳았잖아 (나의 죄를 나는 제대로 가렸잖아 나 선하잖아 내 열심이 특급 열심 특급선함이잖아) 라는

의인의 자리 건강한 자의 자리에서 외치는 그 교만을 꺽으심으로써

 

주님께서 피흘리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허걱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부정한 자였구나 라는 회개가 덮쳐짐으로써

흐릿한 또는 꽹과리 또는 배설물인 내 열심이 특심(선악)이라는 속임수를 짤라내신

십자가의 죽음이 옳았다고 외치는

이 주님의 사랑이(울리는 꽹과리와 대조되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옳았음을 외치고자

이 죽음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떳다면

우리는 이유 없이 비언약의 자리에서 정작 심판 받아 마땅한 자의 자리에서

긍휼을 쳐다봐야 할 판국인데

 

오히려 거짓영을 받은 자들에게 미혹 당해서

오늘날로 치면 위에서 언급한 거짓선지자의 평강이다 라고 외치면서 심상히 대충 고치는

개혁주의나 성화론자들이 해당되는 거죠

또렷한 십자가의 사랑 보다

흐릿하고 의문의 반복인 속임수를 가르치는 거짓영을 받은 자들이다는 겁니다.

 

유혹 당한 우리가 심판 받아야 하는데

왜 우리 새끼 유혹하냐 라고

잘못 한 것은 우리인데

내 새끼 건드렸다고 애굽을 작살낼때에

우리가 오히려 당황해서 허걱 놀라는 겁니다.

실상이 나타나고

저들의 허상이 벗겨지니까 놀라는 거죠

그들의 풍요함이 다 거짓으로 밝혀지니까 말이죠

부자청년의 어릴적부터 지켜온 그 율법 지킴들이 다 허상 허구

꽹과리로 밝혀지는 것은

사랑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누가 꾀냐 말이죠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는 거짓선지자의 미혹과

 

십자가의 또렷한 죽음인 믿음과의 대조로써

인간의 믿음이 아닌 그것도 선악이니까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를 십자가의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광야에서 이 마귀의 속임수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겁니다.

 

이 싸움에 놓여졌다는 자체가

이미 이겼기에

우리 개인의 승패와 무관하게

개인의 죽음과 무관하게

이미 다 이루셨기에

광야라는 죽음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실상 속에서 허상이 그 대조로써 밝혀지는 겁니다.

그러니 내 열심이 특심이다 라는 꽹과리를 외칠께 아니라

그런 의문을 외칠게 아니라 언제 또 열심들이 시들해 질지 누가 아냐 말이죠

아프면? 병들면? 죽으면 열심 자체가 나오질 않는데???

오히려 죽어도

끊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죽음도 끊을수 없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베드로를

죽은 베드로를

잡혀온 빼도 박도 못하는 베드로를 살리더라 라는 겁니다

 

이 약속의 증상물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

이스라엘의 특이성 때문에

 

주변의 나라들은 진노의 그릇

또는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미혹하는 광야에서 마귀가 세가지 시험한 내용들로

예수님과의 말씀의 차이성으로써

그 진노의 그릇 역할

마귀의 역할을 톡톡히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미혹하고

우상숭배자로써 힘의 우열로써 국가 서열을 짖듯이

바리새인들 또한 말씀지키기로 서열을 지어서

저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그 우상숭배성을

 

그 꽹과리를

 

사랑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또렷하게 그 속임수를

그 선악을 낱낱이 탈탈탈 털어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이 상황을 지금 이스라엘이 격어야 하기에

바벨론 멸망 에돔 멸망 아랍의 멸망을

참선지자는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맞 물리도록 되어 있거든요

 

임마누엘이 떳다는 그 증상으로써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그 증상으로써

무조건 이유 없이 이스라엘은 곧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긍휼의 그릇으로써

징계를 받도록 되어 있는 또렷한 십자가의 용서의 증상물이고

 

반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그 증상으로써

무조건 이유 없이 이방나라는 진노의 그릇으로써

심판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피 용서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더더욱 죄의 소원처럼 끝까지 선악을 쥐고서 놓지 않는

하나님과 같이 됨의 포기를 모르는

마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한 쪽 강도처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본다고 고침을 받겠는가?

죽어가는 자에게 구원해 달라고 한다고 구원이 되는가 라는

선악성을 자아라는 우상성을

하나님됨을 포기 못하는

약속을 우습게 보는 완악함이 덮쳐지는 그 증상을

십자가의 피 용서가 떳다는 이유로 나타내도록 되어 있듯이

 

이 이방나라 우상숭배자들 힘을 짤라내는 할례받지 못하는 그 속성들을

괜히 이스라엘을 삥둘러서 깔아놓은게 아님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는

십자가의 피 용서를 무시하는

 

지금 애굽 뿐만 아니라

저들 이방나라 곧 이스라엘을 삥 둘러 우겨쌈을 당하는 주변의 모든 나라를

애굽처럼 다 멸망시키시는 겁니다.

 

저들의 롤모델 애굽

에덴동산과 같았던 애굽

그 잔상이라는 환상을 쫏는 허구 허상을 쫏는

힘의 제국을 추구하는

 

저 죄악 저 수치를 짤라내시고자 주변에 깔아놓았다 말이죠

 

?

저들은 미움 받기로 작정된 나라 곧 이유 없이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진노의 그릇임을 밝히 못 본다면

또 거짓선지자들처럼 사랑의 하나님을 외칠것이 뻔하다 말이죠

 

그리고 이스라엘은 사랑 받기로 작정된 나라 곧 이유 없이 긍휼의 그릇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유와 조건을 갖추어서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자 같이 행동하자 라고 나선다 말이죠

이것이 니골라당과 발람의 교훈이자 유대인 사단의 회이다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 광채의 맛을 봐버렸는데????

모세도 못 벗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벗겨주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 못 벗습니다.

그래서 벗겨달라고 주여 제발 죽어주세요 라고 변화산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만을 쳐다보는 겁니다.

 

자 이렇듯 마음판의 할례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가야

곧 긍휼의 그릇인 야곱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 합하고자

하나되고자 세례 할례 곧 마음판의 할례케 하고자

이 이스라엘을, 이 야곱을 허리를 뿌사야

고추를 짤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사건이 그들 개인의 사건이 아닙니다.

점점더 깊어져서

이방나라와 이스라엘 나라로 확대가 됩니다. 이사야 때에 말이죠

나라 잃고 해도 할례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안식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인간이 지키는 손 할례나 안식일 지키기가 아니라

그 반대인 죄인의 자리에서 안식의 주인을 만나는 손마른 자의 자리에서 영원한 언약을 만나게 되고

마음판의 할례를 느닷없이 변화산에서 나타나 주여 마음판의 할례를 해주소서 나는 더러운 자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는 더러운 자이기에 당신만이 저를 깨끗케 거룩케

이 수치 죄악을 짤라서 굴러가게 하실 분입니다 라고 외친다 말이죠

 

예수님 때에는 육과 영으로 확대 됩니다.

즉 세계관이 점점 또렷해지고 확대됩니다 밝히 보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

역사의 세계와 묵시의 세계의 대조로써 소욕으로써 점점점 말이죠

그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가 더 더 더 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묵시 곧 약속은 점점 더 구체화 되는 겁니다.

더욱더 실상화 되는 겁니다.

 

계시록은 그야말로 현실 그 자체입니다.

그 이전의 것은 맛배기입니다.

계시록은 실상입니다.

그 이전의 특정 시간과 특정 공간에서 한정적으로 제한이 되어서 벌어진 사건들이

이제는 지구촌 구석 구석 뻥뻥뻥 안 터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또렷합니다.

 

지금 동생 야곱의 때

지금 형 에서의 때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얼마나 거리가 멉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그 사건이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지는

실상으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말씀 곧 혹독한 묵시이다는 겁니다.

 

이사야가 외치는 이 경고는 그 당시 시대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경고와 심판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이죠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자들 지금 우리가 얼마전에 격었던 엠비와 박그네의 심판도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멸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그 동안 여럿사람이 죽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들의 삶이 우상적인 삶인 이유는

자기를 위한 우상적인 이유는

끝을 미리 앞 당겨 볼수가 없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순간만이라도

끝을 미리 앞 당겨 봤더라면

회개해서 고침을 받았겠지만

 

주님께서 혹시 깨달을까봐 고침을 받을까봐

벌벌벌 떠셨기에

그들은 한 치 앞도 모르고

교만한 목을 뻣뻣이 세우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그 순간 까지 가도록

또 많은 자들이 굽신 굽신 거리도록 하시는 것은

못 보도록

끝을 절대로 못 보도록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 너무 너무 밝히 보이는 그 또렷함을 보여줘놓고도 못 보도록

이런 기능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러니 말씀이야 말로 실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허구를 낱낱이 밝히는 또렷한 명명백백한 실상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쫏는 자는

그 속임수에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도록 되어 있는

내버려 두심에

 

대조적으로 반대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때려서라도

짤라내고 굴러가게 하시고

죄악을 물러가게 하셔서

 

찢으시면서까지 낫게 하시고

매를 데어 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빼내어서 죄악을 짤라내어서 다시 싸매어 주심으로써

 

이 죄 문제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까지

 

화목제

곧 죄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화목제가 떳다는 이유로

이방나라는 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좌로 인해

주의 주 되심으로 인해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피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 (추수 때의 분리작업)

혹독한 묵시라는 십자가의 또렷한 거룩 세탁기 속에

이방나라인 우상숭배자들과

이스라엘은

세탁기 속에 들어가서 분리작업에 의해 갈라지게 되는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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