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사 45: 1-25)
(사 45:15, 개역)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5, 한글킹) 『오 구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 개역)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사 45:2, 개역)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사 45:3, 개역)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사 45:4, 개역)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 45:5, 개역)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사 45:6, 개역)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7, 개역)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 45:8, 개역)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 45:9, 개역)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사 45:10, 개역)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사 45:11, 개역)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사 45:12, 개역)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사 45:13, 개역)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사 45:14,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애굽의 수고한 것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다 네게로 돌아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사 45:15, 개역)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6, 개역)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사 45:17, 개역)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사 45:18, 개역)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19, 개역)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
(사 45:20, 개역)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한가지로 가까이 나아 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
(사 45:21, 개역)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22, 개역)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며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3, 개역)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사 45:24, 개역)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를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마는』
(사 45:25, 개역)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하셨느니라』
(사 45:1, 새번역)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에게 말한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놓겠다. 네가 가는 곳마다 한 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않게 하겠다. 고레스는 들어라!』
(사 45:2, 새번역)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 ㉠사해 사본과 칠십인역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그 뜻이 불확실함』
(사 45:3, 새번역) 『안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 때에 너는,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 45:4, 새번역)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 45:5, 새번역)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
(사 45:6, 새번역) 『그렇게 해서, 해가 뜨는 곳에서나, 해가 지는 곳에서나, 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 나는 주다. 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
(사 45:7, 새번역)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사 45:8, 새번역) 『너 하늘아, 위에서부터 의를 내리되, 비처럼 쏟아지게 하여라. 너 창공아, 의를 부어 내려라. 땅아, 너는 열려서, 구원이 싹나게 하고, 공의가 움돋게 하여라. "나 주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사 45:9, 새번역) 『질그릇 가운데서도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닥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냐?'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네가 만든 것이 너에게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 45:10, 새번역)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나를 자식이라고 낳았습니까?' 하는 자와, 자기 어머니에게 '무슨 해산의 고생을 했다는 겁니까?' 하고 말하는 자식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사 45:11, 새번역)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낳은 자녀를 두고, 너희가 나에게 감히 물으려느냐? 내가 한 일을 너희가 나에게 감히 명령하려느냐?』
(사 45:12, 새번역) 『바로 내가 친히 이 땅을 만들었으며, 바로 내가 그 위에 인류를 창조하였다. 내가 손수 하늘을 폈으며, 그 모든 별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 45:13, 새번역) 『바로 내가 ㉡그를 의의 도구로 일으켰으니, 그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겠다. 그가 나의 도성을 재건하고, 포로된 나의 백성을 대가도 없이, 보상도 받지 않고, 놓아 줄 것이다." 만군의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 ㉡고레스를』
(사 45:14,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집트가 수고하여 얻은 재물과 에티오피아가 장사하여 얻은 이익이 너에게로 넘어오고, 키 큰 스바 사람들이 너에게로 건너와서 네 밑으로 들어와 너를 따를 것이며, 사슬에 매여 와서 네 앞에 엎드리고, 너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이르기를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할 것이다."』
(사 45:15, 새번역)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진실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 45:16, 새번역)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창피한 일을 당할 것이며, 치욕으로 물러갈 것입니다.』
(사 45:17, 새번역)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 안에서 안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영원할 것입니다. 너희 이스라엘아, 너희가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 45:18, 새번역)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사 45:19, 새번역) 『나는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말하지 않았으며, 야곱의 자손에게 '나를 허무하게 찾아라' 하지도 않았다. 나 주는 옳은 것을 말하고, 바른 것을 알린다."』
(사 45:20, 새번역) 『이방 나라에서 살아 남은 자들아, 모여 오너라. 다 함께 가까이 오너라. "나무 우상을 들고 다니는 자들과, 구원하지도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다.』
(사 45:21, 새번역) 『너희는 앞 일을 말하고 진술하여 보아라. 함께 의논하여 보아라. 누가 예로부터 이 일을 들려주었으며, 누가 이전부터 이 일을 알려 주었느냐? 나 주가 아니고 누구냐?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는 공의와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니,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사 45:22, 새번역)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사람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서 구원을 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나 밖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사 45:23, 새번역)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한다. 나의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이 거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모두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사 45:24, 새번역) 『'참으로 주님께만 공의와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나에게 고백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올 것이나, 그에게 대항하던 자들은 모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사 45:25, 새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주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예를 얻을 것이다.』
(빌 2:10, 새번역)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 ㉡사 45:23(칠십인역)』
(롬 14:11, 공동) 『성서에도, "㉠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내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 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 ㉠이사 45:23.』
먼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기존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곧 기존의 하나님관은 결국 우상이기 때문에
이 낯설기 짝이 없는 하나님과의 차이로써 등장한다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자 예수님을 이용할때의 그 예수님과
그런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이시고자 풍랑을 일으켜 빠뜨려 죽이시고
다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신 예수님이 다르게 보여서
도대체 당신 누구요 라고 나오는 그 에수님이 서로 다르듯이 말이죠
인간은 자신이 물 위를 걷고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반면에
주님은 그런 인간을 물 속에 빠뜨려서 예수님 자신의 가치를 곧 약속의 가치를 증거하고자
우리에게로 다가 오신다는 겁니다.
결국 우상이란 인간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알수 있는
포착가능성으로써 인간의 기준에 충분히 납득이 가고 이해가 가는 하나님인데
내 쪽에서 충분히 접촉하고 와이파이 연결하듯이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랜선으로 접속을 시도할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내가 선택하고 내가 사랑하고 그런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도대체 패쓰워드 비밀이 걸려 버리니까 접촉이 안되는 단절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참생명되신 예수님과 연결이 안된다면 모든 인간은 다 죽은자일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우상처럼 습관적으로 익숙하게 자기를 위하여 접촉 연결 연합을 시도할 때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을 소개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그런 하나님이 바로 지금 유다 왕이 착각하는 가짜 하나님 곧 우상으로써
그 차이로써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뭔가 인간 쪽에서 접선할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접촉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으로써
단절로써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들 보이는 하나님을 소개하는데
이사야 혼자 안보이는 하나님을 소개한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아니 보여도 믿을까 말까 하는 상황인데
안보이는 하나님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잖아요
안 보이는데 어떻게 소개를 해요!!
불가능한 단절된 하나님을 무슨 수로 소개할수 있단 말입니까?
그 정도로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의 조상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위치를 재설정해 버린다는 겁니다.
즉 물 위를 걷고자 했던 베드로를
물 속에 빠뜨려 죽이는 죽은자로써의 과부의 위치로 말이죠
왜? 바로 우상과 한 세트를 구성하고자함 때문에 말이죠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가 방금 경험했던
850 대 1로 싸워 이긴 그 하나님을 가지고서
눈으로 귀로 충분히 자기만이 납득한 하나님으로써
접선을 시도하다가
바로 내 열심히 특심 으로 접선을 시도하다가
왕장 깨지는 겁니다.
그것 조차도 우상의 사고방식이다는 거죠
곧 큰 지진 큰 태풍 큰 비 큰 화산폭발로 나타나는게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다들 눈치를 채고 바로 바로 인간들은 제사를 드리고
신을 달랠려고 한다 말이죠
왜? 눈으로 봤고 귀로 들었으니 말이죠
그런 짜장면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를 어머님은 짜장면을 싫어하셨어 하나님은 싫어하셨어
부모가 홍해라는 죽음은 건넌 경험으로서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죽음과의 차이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강령 뜻은 [본래의 취지] 이다는 겁니다.
즉 이 말 자체가 본래의 취지인 알맹이를 다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껍데기와 알맹이의 차이를 또렷하게 나타내겠다는 취지요
왜? 그 정도로 지금 유대사회가 저 바리새인 같은 껍데기라는 외식을 추구하는 자들 때문에
알맹이를 아무도 안 알려주고 있으니까 말이죠
마치 십계명 전문인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죽었던 너희들은 건져낸 살려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 이다 라고 다시 새롭게 정립하듯이
강령이란 십계명 전문인 본래의 취지이다 말이죠
(출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마 22:40, 개역)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0, 새번역)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40, 공동)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 22:40, 쉬운)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마 22:40, 한글킹)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고 하시더라』
(마 22:40, 현대인)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 22:40, 현대어) 『모든 다른 계명과 예언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짜장면을 싫어하신다고 나타나시는데
자꾸 짜장면을 좋아하신다 라고 인간들이 자꾸 접속을 추구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나타나시는게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니까
일단 안 보이고
일단 안 들리는 겁니다.
단절이 되는 겁니다.
어 왜 짜장면을 우리 엄마는, 여호와는 번제와 제사를 싫다 라고 하시지?
라고 단절이 된다 말이죠
듣기는 들어도 안 들리고
보기는 보아도 안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나오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치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당신은 참말로 피 남편이군요 라고
말릴수가 없다 라고 옛따 라고 자식들의 양피를 끊어서 발에 던지니
그 피를 보고 패쓰 패쓰 넘어가는 겁니다.
오로지 피로써만 접선을 한다는 거죠
즉 이 접선이라는 말이 좀 뭐랄까! 점쟁이 같은 용어처럼 느껴지잖아요
네 맞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나오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단절과
대조가 되는 한 세트로써 우상적인 것이
늘 우리 속에 있음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접속 할려는 인간의 우상성 종교성
곧 보고 듣고 하는 인간의 눈과 귀를
애당시 처음부터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어떻게 해서든 포착할려고 하고
믿고자 달려들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따라잡을려고 하고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봤거든요
눈으로 직접 말이죠
눈으로 봐 버린 이상 임금 안 삼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거든요
이 선악의 몸이 말이죠
그런데 임금 되기 싫다 라고 도망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짜장면이 싫타고 하셨어 예수님은 임금이 싫타고 하셨어 야 야 야 ~~~~~
(요 6: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 쯤 되더라』
(요 6:11, 개역)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요 6:12, 개역)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24, 개역)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럼 뭐로? 바로 피입니다.
자신의 살과 피로
인애와 자비로
그럼 또 피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지고 오겠지요
그럼 그렇게 보이는 피, 듣고 깨달은 피는 또 거부한다 말이죠
피 자체가 우상을 겨냥한 것인데
피를 또 우상화 하게 되니 말이죠
그럼 우짜란 말이냐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왜? 피를 흘려야 합니까?
울어라 라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다는 겁니다.
그럼 또 울음꾼으로 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나의 위치를 재설정하시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자리로
물에 빠져 죽어 마땅한 자로 예수님이 나를 빠뜨린다는 겁니다.
너의 위치를 바로 이 자리가 마땅하다고
나는 물 위가 마땅하다고 봤는데, 왜? 그것이 가치가 있거든요
그런데 물 속의 죽음의 자리가 너에게 마땅하데요 글쎄????????
그런데 울 생각 안하고
회개할 생각 안하고
또 피 제사를 드려서
더더욱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구제불능이다는 겁니다.
마치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우상화 하듯이
기드온이 던져준 제사장 옷 에봇을 우상화 하듯이
오늘날 교회를 우상화 하듯이
그때나 오늘날이나 똑같아요
뭘 줘도 보이는대로 듣기는대로 족족 모조리 다 우상화 할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안 보이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으로 안들리는 세미한 음성으로
거리끼는 걸림돌로써의 예수님으로 오시는 겁니다.
왜 아무도 가치 있게 안 여기거든요
다들 고개를 돌리고 싫어버린바 되어서 흠모할 모양, 가치가 아예 없는 겁니다.
같은 취급 당할까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겁니다.
우와 당신은 참말로잉 십자가의 예수님이구만요잉
지긋 지긋하게 따라잡아도 지긋 지긋 징글맞게 도망치시는 예수님이구만요잉
결국 눈으로 귀로 접선을 성공 시키고야 말겠다는 식이
바로 우상이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다가가는 방식은 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왜? 포착했으니까 레이다망이 눈과 귀를 기계화 한 것 아닙니까?
눈과 귀에 포착되는 레이더 망에 포착되는 예수님은 가짜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상대적인 차이로써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 쪽에서의 접선 시도를 모조리 다 차단하겠다는 거죠.
왜? 우상적인 시도를 거부하시니까 말이죠
오히려 그런 우상성을 까발리겠다는 것이
예수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방식인
싫어버린바 된 모습이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마치 당신은 알짤 없는 피남편이군요 라고
자기 목숨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접선을 시도할려는
이 우상성을 파괴함이 마땅함을 알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내어놓는 방식으로써
내 눈은 거짓이군요
내 귀는 가짜이군요
나 라는 레이더망은 엉터리 고물 고철이군요
라고 내 눈과 내 귀를 미워하는 것은
이런 고장난 것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할려니 되겠냐 말이죠?
자기 목숨을 미워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모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순 꼬물 고철 엉터리 고장난 제품이다는 겁니다.
누가 고장난 것을 사랑하겠습니까? 가치있게 여기겠냐 말이죠
우리는 어두운 눈이라서 새 일을 가치 없는 고장난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고장난 가치 없는 우리의 눈과 귀는 억수로 억수로 가치있게 여기니
거꾸로 되어도 한 참 거꾸로 되었다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로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실때에 비로소 우리가 할 수 밖에 없는 고백이요 회개 입니다.
당신은 알짤 없는 피 남편이군요 라고 하듯이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 가짜를 내어놓는 것이 바로 피 방식이라는 겁니다.
주여 이 가짜 고쳐주세요 라고 말이죠
마치 한 아기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 한 아기가 뭔데?
유일하게 우상을 깨뜨리는 화목제물이다는 겁니다.
남이 고장난게 아니라 내가 고장난 눈과 귀이다 라고 고쳐주세요 라고 말이죠
우와 당신은 알짤 없는 화목제물 하나님이시군요
즉 십자가의 하나님
곧 독생자 예수를 아낌없이 원수(우상숭배자인)에게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는 하나님이시군요
이것만이 사랑이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새번역)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10, 공동)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접선하는 게 아니다는 겁니다.
어차피 레이더에 포착 되지도 않지만
그런데 교회가 이런 접선을 시도하는 무당의 집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신접한 자가 따로 없고 마술사가 따로 없어
그저 그저 죽은 자의 교훈만을 잔뜩 모아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식으로 점쟁이 노릇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사 8:19, 개역)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이들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사람들이 찾고 구하기 때문에 있다는 겁니다.
신접한 자가 얼마나 사람들이 찾고 있었으면
요즘 IMF 구제금융 이후에 갑자기 사주 팔자
그 뭐였죠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보는 것
로또가 아니라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나네
서양 카드로 점 치는 것???
영화관에 갔는데 깜짝 놀랬어요
아예 돗자리를 깔아주더라 말이죠
임대해서 자리를 옆에 깔아요
그 정도로 장사가 잘 되니까
수요 곧 찾는자들이 많으니까 말이죠
이상하잖아요 우주로 가는 최첨단의 기술 시대라고 우기면서
손에는 스마트 폰 다 들고 있으면서
정작 진짜배기 속 마음은 저 타로에 가 있더라 말이죠
타로다 타로
동양귀신에서 서양귀신으로 옮긴 것이 최첨단 인공지능의 시대이니 원
아마 아니 벌써 인공지능을 글쎄 목사로, 중으로, 신부 사제로 벌써 활용해서
월급 안 줘서 편하죠 ㅋㅋㅋㅋ 맨날 월급 문제로 싸울 필요가 없고
어차피 다 빼겨서 하는 설교이니 인공지능이 더 잘하겠죠
오늘 본문의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다 라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신접한자와 마술사는 사라지지 않아요
인문학자들이 다 죽은자의 교훈을 전파하는 자로 남듯이
그야말로 마술사 신접한 자 곧 눈과 귀를 막는 바리새인이다 말이죠
눈과 귀를 막아요
그럼 이 이스라엘의 우상을 파괴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아서 이 우상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만 해당 되는 겁니다.
곧 과부에게만 해당 되는 불의한 재판관을 통해 원수 곧 우상문제를 해결하신다 말이죠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때려죽어도 손 못 놓을때에 탈탈탈 터는 방법은 뭘까요?
마귀에게 잡혀 오는 겁니다.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단의 가시를 푸욱 수셔 찔러서 절대로 빼내지 않는 겁니다.
주님은 사도바울도 안 믿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쉽게 믿나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진 적도 없는데!!!
즉 믿는다고 하는 행위 행함은 곧 종교성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이용해 먹을려는 의도이다는 거죠
아무튼 지난주에 말했듯이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는다는 겁니다.
마치 다윗의 자손이냐 다윗의 조상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도리어 우리 쪽의 위치 선정을 새롭게 해주시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왜 하필이면 불의한 재판관이냐 왜 하필이면 우상숭배자 고레스냐 가 중요한게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이냐 아니면 정결한 재판관이냐 가 중요한게 아니라
정반대로 그렇게 눈으로 귀로 보고 듣고 판단하는 내 쪽의 판단 기준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내 쪽을 새롭게 위치 배치를 재배치 시킨다는 점입니다.
죽은자로 과부로 고아 과부 나그네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개같은 이방인 갈릴리 의 위치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오신다 말이죠
나사렛
오죽 하면 얼마나 부정하고 불경스럽고 더럽고 악했으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라고 하겠냐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결국 나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이 무용지물이다는 거죠
왜냐하면 내 눈은 나의 가치만을 위해서만 볼 뿐이고
내 귀는 나의 가치만을 위해서만 들을 뿐이니까
엉터리이다는 거죠
어차피 남들은 못 봐도 나는 볼수 있다 남들은 못 들어도 나는 들을수 있다고 우겨도
신접한자 마술사를 겹겹으로 깔아놓았기 때문에
어차피 눈은 막혔고 귀를 막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아예 넘어올 생각을 말아라 말이죠 바리새인의 의 보다 나을려는 생각 말아라 말이죠
한 마디로 말해서 너가 우상처럼 눈이 있기는 하냐
귀가 있기는 하냐 라고
눈 달려서 뭐하겠노 소고기 사먹겠지
귀 달려서 뭐하겠노 폼으로 달아 놨나 라고
나를 우상처럼 너는 팔도 다리도 눈도 귀도 없어 라고 주님께서 취급하실 때
그래 바로 그거야 너가 바로 우상이야 너 자체가 우상이야 라고
이 우상 문제 어떻게 해결할래 라고 나오시는 방식이
주님 쪽에서 던지시는 질문이다 말이죠
그 질문을 듣고 우리는 다시 질문을 새롭게 바꾸어서 질문해야 합니다.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 때문에 다시 사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으로써 질문하는 겁니다.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질문하죠
답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이 질문에 답하십니다 그래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질문을 마치 새롭게 질문하듯이
나 여호와가 불의한 재판관 이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너 이스라엘 너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너를
재설정 재창조 새롭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질문이 바뀌게 되는 거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먼저 떳다는 그 이유로(우상과 한 세트가 되기에)
내 쪽에서 해결할 수 없는 눈 깜은 소경이요 귀로 들을수 없는 귀머거리인 나를
새롭게 들리도록 새롭게 보도록 하겠다는 분이 바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이 달라져요
물 위를 세 번 걷게 해 달라고 질문했던 우리 베드로가 달라졌어요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고
우상에게 쉽게 다가가서 질문하던 그 버릇이
도대체 내가 볼수도 들을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저를 눈멀게 귀멀게 하셨나요?
물 위를 걸을 때 알던 그 예수님은 이제 생각이 안나고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처럼
죽음 속에 들어가니 당신 생각 뿐이던데
도대체 당신 내 마음에 무슨 짖을 해서
당신만 생각나느냐
나는 나만을 가치 있게 여겨서 그런 질문만을 했던 나인데
도대체 무슨 짖을 해서 화목제물인 당신만을 가치 있다고 질문하게 되었으냐 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죽음 조차도 죽음이 심각한 상황에 죽음이 생각 안나고 왜 당신 생각 하는거죠?
무화과 나무 잎이 없는 이 심각한 상황에 왜 당신 생각에 즐거워 하죠
포도 나무 열매가 없어 굶어 죽게 된 이 심각한 상황에 왜 나는 당신만을 생각하게 되어서 즐거워 하는 자가 된 거죠?
도대체 내게 무슨 짖을 하신 거죠 라고
질문이 바뀌는 겁니다.
왜 제가 이렇게 예수님을 이렇게 사무치도록 사랑하게 된 거죠?
참으로 역설적이지요
때려죽어도 나의 가치만을 생각했던 자가 다른 것은 일체 가치 둘 생각 조차도 한 적도 없고 못했던 이 심뽀가
도대체 왜 제가 남인 타인인 당신만을 가치있다고
그렇게 귀하디 귀한 나를 가치있게 여기지 않고 당신만을 가치있다고 당신만 생각하게 된 거죠
바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니까
기존의 눈으로는 안 보이고
기존의 귀로는 안 들리는 분으로써만 오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증상으로 나타난 거죠
숨어계신 하나님만 생각하게 되어버리고 가치있다고 외치게 된 그 증상물이
나 자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가짜 하나님이요
우상 취급하듯이
임금 삼고자 따라다닐때에 예수님은 도망치겠다는 겁니다.
스스로 도망 치시는 예수님이 되는 식이다 말이죠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되겠다는 겁니다.
왜? 상대적인 우상 숭배자의 접선을 거부하겠다 라고 그 차이로써 말이죠.
그럼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무슨 의미냐?
주님 쪽에서 다가가는 식으로만 구원하겠다는 것이
바로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아서
시온 산의 산당을 파괴하는 자로써 삼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스스로가 손 할례 하듯이 해본들 택도 없을 정도로
이 산당 문제 우상 문제를
이스라엘의 손에서 떠난 문제로 감당이 안되기에 말이죠
죄가 우상이 인간을 다루고 있거든요
즉 나다나엘을 참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너 나다나엘 참 이스라엘 백성의 참 임금 이스라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창세전에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라고 지금 질문 던지시는
이 시 공간의 간극 사이에 뭔가가 중간에 잔뜩 끼여 있을까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뭐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큰계명 두 계명 다 지켰다 라는 것들 일까요?
이 중간에 끼이면 될까요 안 될까요?
중간에 끼인다는 것은 우상으로 채웠다라는 말이거든요
그런 조건을 갖추겠다고
지금 내가 주님을 포착했으니 내 눈과 내 귀를 중간에 끼어서
임금 삼겠다는 것이 통할까요 안통할까요?
나다나엘 간사함이 없다 라는 말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내용을 엉터리 목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자기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또 솔직함을 창세전에 불렀다와 지금 참이스라엘 사이에
중간에 조건인냥 또 집어넣더라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를 말하는데 오히려 조건 갖추듯이 원인으로 솔직한 정직함을 집어넣더라 말이죠
아닙니다.
솔직한 자를 안 좋아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 말이죠 다 좋아라 하지
어 나의 솔직함을 좋아라 해주시는 주님 당신은 참 임금이군요 이래 나오면
또 조건을 걸게 된거다 말이죠
아닙니다.
그래서 잘했군 잘했어 라는 노래처럼
원인 없는 결과 이다 말이죠
조건 없어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질문이 바뀌게 된 이유가
주님 쪽에서 조건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해주심을
베드로가 믿고 고백하는 행한 것이 없는 조건이 없는
무조건으로써
질문이 조건 따지듯이, 우상에게 접근하듯이 했던 베드로의 질문이
이제는 바뀌게 되었다는 겁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요즘 질문이 없는 시대라고 질문을 하라고 이 말이 유행하잖아요
질문을 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라고
아닙니다. 그 말 자체가 질문을 가로막고 있어요
엉터리 질문만 하는 시대로 거짓선지자들이
진짜 제대로 된 질문을 가로막고자
눈과 귀를 막고 있어요
즉 이 말은 모든 인간의 언어는 조건 갖추기 원인 갖추기 이다 말이죠
다다음 이사야 10장의 불의한 법령이다 말이죠
(사 10:1, 개역)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았다는 것은 질문을 바꾸라 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고 메시아로 고레스를 삼았으니까 고레스를 경배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까?
고레스에게 경배하는게 아닙니다.
고레스는 말 그대로 말뚝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심지어 여호와가 누구인지도 몰라요
더더욱 심지어 지금 오늘 본문은 100년 이전에 지금 이사야가 예언하는 겁니다.
고레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죠
그럼 누가 벌리는 사건이라는 말입니까?
전도서 인가 잠언인가?
큰 성 임금 집에 집을 짖고 사는 지혜로운 동물이 있다고 했지요
자신의 약함을 알고 무능하다고 큰 성 임금 집에 빌어붙어사는 겁니다.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잠 30:24, 개역)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잠 30:25, 개역)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잠 30:26, 개역)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잠 30:27, 개역)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잠 30:28, 개역)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이 지혜를 큰 성 임금이 준 것이라고 큰 성 임금에게 경배해야 하나요
아니면 그런 지혜를 주신 주님을 경배해야 할까요?
애굽에 탁란하니까 애굽을 섬겨야 할까요?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아예 완전히 망하뜨리고 나오잖아요
우와 주님께 경배 드립니다 라고 말이죠
처음 애굽에 탁란 할때는 겨우 칠십이였지만
단물 빨아먹고 빠져나올때는 300만 400만? 훨씬 넘어요
숫자를 일부러 부풀릴려고 들어간게 아닙니다.
노아언약때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내용의 성취이다 말이죠
국가의 근간을 흔들어 해체시킬려고 들어간거다 말이죠
풍년 7년 흉년7년을 통해서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주님의 의가 보호해줬지
애굽이 보호한게 아니다 말이죠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보호한 것은 고레스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주님이시다 말이죠
어차피 메대 파사는 다니엘 네 짐승 중 은신상 어깨 가슴으로써 어차피 무너지는
이것을 또 눈으로 귀로 포착했다고
유대인 어떤 종파는 고레스를 메시아로 끝까지 섬기는 종파까지 있을 정도이니
그 눈과 귀가 여전히
관심이 주님의 의에 있는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있다는 겁니다.
기능을 안 보고 존재를 따진다는 거죠 조건으로 말이죠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삼은 것은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마치 마귀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방식은
마귀도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원이 되는 부정적인 도구일 뿐이다 말이죠
(마귀도 자유의지가 없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데
인간은 그놈의 교리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자꾸 우긴다 말이죠
그래야 불안하지 않거든요 아무나 지나개나 다 건드릴까봐 두려우니까 말이죠
그래야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만들 수 있는 이 좋의 의도를 알아달라고
그러나 아닙니다 없습니다. 자유의지는 없어요 또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변호하는 방식은 없어요 자발적이지 않아요
너나 변론자 앞에 서라 말이죠 하나님을 변론할 생각 말고
[창세전에 지명하심과 참이스라엘이구나 그 간극에
중간에 끼어넣을 생각 말고]
너희 죄가 붉을지라도 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희게 하시는
이 변론자 앞에 서라 말이죠
안설려고 하니까
자유의지가 있다는 둥
자꾸 하나님을 변론하고자 하는 취지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을 나는 믿는다고 자기를 변론하는 거다 말이죠
그 우상을 변론해서 뭐하게요?? 사람의 구원은 헛된데~~)
고레스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심지어 오늘 이사야의 예언은 100년 뒤에 나타날 사건입니다.
고레스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다 말이죠
이 고레스가 메대 파사의 왕 아닙니까
다니엘 네 짐승 곧 머리는 금신상인데 바벨론이고
이거 무너뜨리는 어깨 은신상이 바로 메대 파사 이다 말이죠
바벨론을 치는, 멸망시키는 메대의 왕이 고레스 이다 말이죠
그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먹는 바벨론이고
앗수르를 바벨론이 멸망시켰죠
그리고 이 앗수르는 몽둥이 역할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산당을 파괴하는 몽둥이가 되고
자 이렇게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먹히고 바벨론은 다시 메대 파사에게 먹히고
이것이 다 주님의 계획대로 되어 있는데
왜 이렇게 하시느냐 말이죠
바로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주님의 맹세 때문이다는 겁니다.
약속 말이죠
우상 저거들끼리 이 이스라엘 잡아 먹어 시체로 만들었는데
도리어 그 시체에 깔려 죽는
노예로 만들었는데 그래서 주인이 되었는데
자기가 노예로 삼은 그 노예에게 깔려 죽는 (출애굽때 처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특이성이다 말이죠
다른 민족에게 없는
그러니 우상에께 안 빼앗기겠다고
우상에게서 빼내서 노략질 하면
노략질 도적질 완성 끝 이게 아니라
우상이 예수님에게 뻬앗긴 이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냐 말이죠
저거들끼리 서로 이 이스라엘을 다시 잡아먹겠다고 나선다 말이죠
이게 계시록 내용 아닙니까
그래서 한때 두때 반때 라는 주님의 의 이라는 간극 속에 숨겨놓았다 말이죠
아무도 이 고난 속에는 안 들어올려고 하거든요
예수님과 같은 운명인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 징계 속에는 안 들어올려고 해요
그런데 이 속이 바로 주님의 의로 이스라엘을 덮어버린 감추인 숨겨둔
기생라합처럼 거짓말 속에 숨겨두어서 이스라엘을 피신 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우상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죄 문제를 말이죠
주님만 심각하게 보고 있는 죄 문제를 말이죠
그러니 도리어 이 약속 때문에
우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우상이 무너지는 그 속에서 직접 느끼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현장학습이다 말이죠 실제상황이다는 겁니다.
다른 현실은 없어요 역사 속에 투입된 우리는 이 구경만 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놀래서 감탄만 할 뿐입니다
우와 우와 박수가 저절로 나오고 찬양이 저절로 나와요
눈도 이제 없고 귀도 이제 없는데
오히려 눈 있을 때 눈으로 볼때 보다 귀로 들을 때 보다 더 각인이 되어서
역사로 시공간으로 보는게 아니라
묵시로 보게 되더라 말이죠
눈도 없는데 더 잘 보이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귀도 없는데 더 잘듣끼는 겁니다. 누가 꾀더냐?????
눈봉사가 되어도
귀머거리가 되어도
오히려 있을 때 보다 더 잘 보고 더 노래를 잘 불러요
시온에서 때려죽어도 안 부르던 시온의 노래를
바벨론 포로 큰 물고기 입 속에서 시온의 노래를 울면서 불러요 글쎄
너무 너무 기뻐서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라고 말이죠
La scia ch'io pianga la du ra sorte e che sospiri la li berta
라샤~~ 오 삐앙~~~ 가
라 두~~~ 라 쏘르떼
에 께 쏘오스피리 라리 베르따
도대체 때려죽어도 회개할줄도 모르고
울줄도 모르는 나를 회개케 만들고 죄인만들고 울게 만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라고 질문이 바뀐다 말이죠
나를 울게 만드는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상이라는 안경으로는 안 보이고 역사라는 안경 시공간이라는 안경으로는 안보이고
묵시라는 안경으로만 보니까 십자가로 밝히 보이니까
이런 내막들이 낱낱이 밝히 보여주시면서
뭐가 속임수인지 까지 다 보이는 겁니다.
인간의 꾀인지 우상인지를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뿔사 어찌할꼬 라고 가슴을 치면서 성령이 임하니까 비로소 울게 되는 겁니다.
라샤 ~~~~~
아 고레스 라는 마귀 조차도 이 주님의 계획에 동원이 되어서 펼쳐지는 묵시 곧 약속이구나 라고 말이죠
그 정도로 우리는 우상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우상화 곧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모조리 나를 위한 것으로 만드는
우상조각가 였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처럼 말이죠
이 우상 조각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는 유일한 우상문제 해결자는
비웃음인 이삭이 제물되는 방식 뿐이다 말이죠
한 아기 이다는 겁니다.
보라 세상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말이죠
그 정도로 우상에게서 빼내시겠다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쳐다보라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다고 말이죠
하나님의 저주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너가 지금 하나님의 저주 속에 놓여졌다고
남이 아니라
남 7번 용서하겠다는 것이 너의 악마성이다 라고
너나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쳐다봐야할 죄인 이라고 하나님의 발등상에 놓여진 원수라꼬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그 정도로 눈과 귀가 막힌
어두운 눈을
이 어두운 눈을 소경을 눈 뜨게 하시겠다고
숨어계신 하나님
즉 싫어버린바 된
아름다운 풍채도 없고 왜냐 풍채있으면 지나개나 다 다가가서
자신의 죄악이 들통나지 않은 상태로 영접할려고
서로 달려들고 서로 임금삼겠다고 할 테니
아예 도망치는 예수님으로써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이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못보고
어떻게 해서든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고만
나의 시선 나의 역사 나의 안목만으로 하나님께 다가갈려는 시도로
접선할려는 그 자세를 이 무당과 같은 이 신접한자와 같은 죽은자의 하나님을 찾는 식인
이 우상숭배를
완전히 뜯어 고치시겠다고 하신다는 점에서
이 징계가 옳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하소연 하는 그 기도에 대한 의미로써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실때에
바로 우리의 안목은 저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것에 툭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못 넘어선다는 거죠
왜 우상숭배자인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지
우리가 해결할수 없는 우상문제를 해결하시고자 메시아로 삼지 라고
도저히 납득이 안돼요 안돼
일부러 납득이 안되는 길로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간단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냐 하필이면 왜 정결한 재판관은 왜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실까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우상성이 들통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발각되지 않아요 도로 깊이 깊이 숨어버린다 말이죠
눈으로 나타나고 귀로 들리는 주님이 되어버리면
우리 쪽에서 충분히 다가갈려고 할꺼 뻔하다 말이죠
우상화 시킬려고 말이죠
우상화 시켜본들 또 반복이 되어요
습괂화 되어요
이상하게도 성화론자들 속에 있으면
그것만 반복해요
자신의 지 덕 미 또 뭐있죠? 하여튼 그런것들을 마구 마구 쌓고 쌓아요
이야 그야말로 범접할 수가 없어
얼굴에 광채가 나서 아에 수건으로 가릴려고 작정하는 것 같아
날 건드리면 죽는다 봐 내 얼굴 광채 나잖아 라고
이거 뭐 살아 있는 신이 될려고 거룩 거룩으로 도배를 해요 글쎄
예수님은 정반대로 지나개나 다 발로 뻥뻥차는 축구공이였는데
이놈의 성화론자들은 알짤없어
그러나 그 정도로 우리의 죄악을 담기에 충분하고 넘치고 넉넉했는데
그런데 안보이는 안들리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면
이 불의한 재판관을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모든 안목과 해석이 다 엉터리로 들통당하는
아 맞군요 내가 우상숭배자 곧 불의한 자이군요가 되는 겁니다.
왜 해석할 길이 없으니까
다 막혔으니까
눈과 귀를 내가 내 스스로 막아요
내 속에 우상이 가득하고 선악이 가득하니까
이거 해결해 달라고
해석 못한다고 울 리가 있겠습니까?
성령이 와야 울게 되는데 라샤 ~~~~~~~~
그러니 불의하냐 정결하냐를 따지는 이 선악의 판단을 못 넘어서지만
정작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도리어 나의 자리를 재배치 시킴으로써
해석할 줄 아는 나 가 아니라
도리어 해석 당해야할 판국에 놓여진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의 자리에서
주여 불쌓히 여겨주소서 나는 해석할 줄도 모르는 소경입니다 라고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왜 과부 라는 위치에서는 아무도 안 물어볼까요?
다들 불의한 재판관에 꼿혀서
과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안 물어봐요
그 정도로 우리는 우상 속에 갇혀 있는 겁니다.
너무 너무 쉬운 해석입니다.
과부 자리에 놓여지면 불의한 재판관 해석 너무 너무 쉽게 풀려요
그런데 아무도 자신을 과부라고 여길수 조차도 없기에
꿈에도 몰랐기에
안 보이는 겁니다.
이 안보는 것 때문에 우는자도 없구요
왜 과부가 되어야만 불의한 재판관을 통해서 기도가 이루어집니까 라고 묻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말이죠
과부는 죽은자 이거든요
아무도 과부와 부활을 연결 시키는 자가 없다는 뜻으로써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 왜 시형제결혼법이 깨어지니까
자신과 율법을 연합 지마음대로 연결 시켜요
바리새인은 부활이 있다 왜 과부가 아닌 죽은자가 아닌
자신의 의를 부활을 통해서 천국에 갈수 있는 조건으로 갖추었으니 말이죠
자신과 부활을 연합 지 마음대로 연결 시켜요
그런데 둘 다 아니다는 겁니다.
진짜 부활과 연결 된 자는 아무도 예상 못한 과부입니다.
이미 벌써 끊어져서 저 구석에 쳐 박혀 있는 이 죽은자 같은 과부를
예수님만이 긍휼히 여겨주시는
인애와 자비로써 십자가로써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부활교리로 이루시는게 아니라
죽음으로써
그 과부의 죽음에 뛰어드는 같은 죽음이 되겠다고 말이죠
왜? 그것이 바로 우상에게서 빼내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모든 개념이 인간 쪽에서 접선을 시도하는 방식이기에
그래서 조건을 따져 보니가 불의하고 부정한 요소를 다 빼는 겁니다.
아이쿠 시형제결혼법에 따르면 도대체 맏형수가 천국에서는 누가 남편이 되지 라는
이 엉터리 질문으로 막혀 버린 그래서 부활이 없다 이 말은 천국도 없다는 것인데
그럼 또 찝찝하니가 천국은 있다 그런데 부활은 없다
자기들 교리 자체가 스스로 모순이 되는 우상이라
또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은 그저 자기자신이 쌓아올린 의 밖에 관심이 없으니
죽어서도 이 의를 천국에 집어넣어야 하기에
부정타면 안된다고 부활 있다고 왜?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은 의 로움 이니까
이런 모습이야 말로 진짜 우상숭배가 아니고 뭐냐 말이죠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이런 우상과는 반대로
먼저 주님 쪽에서 나타나셔서
먼저 주님 쪽에서 이스라엘아 야곱아 라고 불렀지
불렀다는 말은 너가 우상숭배자였는데 거기서 빼냈다는 말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들을 불렀다 라고 말이죠
이 전제성을 다시 각인 시키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 인데
그들을 다 죽여버리지요
그러니 맞잖아요 우리는 우상숭배자임이 명명백백 다 밝혀지잖아요
수건으로 가릴 판국이 아닌데
우리만 몰라요 다들 아는데
수건으로 가리기 바쁘니 알 턱이 없잖아요
인간 쪽에서 먼저 신을 부르고 신을 찾는 방식은 모조리 다 우상이다는 겁니다.
신을 부르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 쪽에서 가득 뭔가를 지키고 행하고
가득 까까득 채우겠다 라는 전제성이 깔려 있는 거죠.
바로 그 우상을 깨뜨리는 방식이
주님 쪽에서 부르시고 주님 쪽에서 다가오심이니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이유 없이
그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불뱀에 물린자로 취급받는
과부로 취급받는 죽은자가 된다는 겁니다.
죄인이 되라 라고 하니까 막살아라 라고 하니까
무식하게 시공간적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일부러 만드는 놈이 있어요
막살기를 새삼스럽게 지키는 놈이 있더라 말이죠
그것은 인간 쪽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죄인이요 접선 방식이다는 겁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인 거죠
인간 쪽에서 불러서 응답하는 하나님이다 말이죠
거꾸로입니다.
주님 쪽에서 불러서 응답하는 자가 바로 죄인이다는 겁니다.
죄인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으로써 새 창조가 되는
이전 것이 없는 자입니다.
과거를 의식하는 죄인이 아니라
의사를 말하는 환자이다는 거죠
그러니 과거가 아닌
미래완료적인 죄인이기에
이런 자는 십자가의 피만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죄인은 주님 쪽에서 만듭니다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낼수가 없어요
이런 죄인을 저들은 해석할 길이 없어요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여 저는 우상숭배자이로소이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으로 나타나니까
이사야서 본문처럼 똑같이 이방나라 열방들처럼 이 이스라엘을 서로 잡아먹을려다가
왜 죄인이니까? 저 죄인 이스라엘을 당장 능지처참 하여라 라고 예수님의 운명과 똑같죠
그렇게 이스라엘을 시체로 만든 그 시체에 도리어 깔려 죽는 자들이
우상숭배자로써 들통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만들어내는 죄인은 죄인이 아니라
결국 죄인 죄인 이라고 우겨도 의인이다 말이죠
나는 죄인 되었는데 너는 못 되었지 라고 죄인이라고 우기는 여전히 의인이다 말이죠
이것이 인간 쪽에서 만들어내는 죄인인 반면에
주님 쪽에서 만들어내는 죄인은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써 만들어 내는 죄인이기에
의사가 만들어내는 환자요
구원자가 만들어내는 죄인임으로써
이 관계가 기능적으로 주님 쪽의 기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지
인간 쪽의 기능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다 말이죠
그럼 주님의 기능
곧 숨어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기능이냐
바로 우상과 한 세트를 구성하기에
우상은 뭡니까?
눈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귀로 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충분히 인간 쪽에서 다가갈수가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연결 연합은커녕 모조리 다 단절 되어버렸습니다.
도리어 당신은 어쩔수 없는 피 남편이군요 라는 식으로
나의 목숨이 끊어진 죽은자로 만드시는 입장에서
자리가 재 배치 될 때
그 과부에 그 부활이라꼬
그 남편에 그 아내 부창부수
과부로 나의 위치를 설정하는 부활이 바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 아기가 나를 흑암의 백성으로 위치를 재설정함으로써
자신이 한 아기 곧 기묘라 모사라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심 앞에서
그 나타나심을 당하고 있는 위치인 흑암의 백성으로 놓여지는 겁니다.
왜? 빛으로 오시는 한 아기 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죄인인데
죄인 스스로가 ㅋㅋㅋ 빛과의 관계성을 무시하고
자기가 알아서 자기 스스로 어두운 흑암의 백성 자리에 놓고서
나 죄인 맞잖아 왜 내 말을 안 듣고 무시하느냐 라고 나오게 되면
이게 죄인인지 의인인지?
자기자랑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죠
흑암의 백성은 개같은 이방민족만이 아니라
우상숭배자일 뿐만 아니라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지옥 백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백성 된 자기를 무시하지 말라꼬 나 죄인 맞으니까
천국 백성 맞지 라고
이 뫼비우스의 띠에 도로 말려든 것이다 말이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짖는
그런데 은혜가 더해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출발 자체가 은혜가 뭔지 모르니까 말이죠
도리어 은혜를 무시하고 출발했으니 말이죠
여전히 한 아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고만 우길 뿐이다 말이죠
당신 시킨대로 했는데 나를 배신 때리기 있냐 라고
죽을 때 까지 영원히 못 벗어나요
우리도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주님 쪽에서 다가오지 않는 이상은 안되는 겁니다.
이 우상문제에서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방식이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써 다가오시는 겁니다.
이사야가 오죽 하면 이런 하나님을 보고 기뻐했냐 말이죠
이스라엘이 아무리 잡혀 가고 잃어버림 당하고
포로가 되고
나라가 쫄딱 망해버리고 해도
휴 다행이다 라고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본 이상
마음 푹 놓고 기뻐하는 겁니다.
잡혀 가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죠
신났어요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박수를 쳐요
기뻐 춤추며 찬양해요
아니 포로 잡혀 가는데 뭐가 좋아서 박수치고 노래하냐 말이죠
다윗 왕이여 지금 술먹고 먹기를 탐하고 노래부르고 할 상황닙니까?
좀전까지만 해도 울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눈물 회개 했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다고 포로 안 잡혀가겠냐 말이죠
죽은 아이가 살아나냐 말이죠
아이가 안 죽겠냐 말이죠
오히려 꺽으신 뼈로 기뻐하듯이
예레미야는 포로 잡혀가는데 신나게 춤추면서
드디어 해결 되었다고
우상 문제 해결 되었다고 기뻐하는 겁니다.
야들아 표시해 두어라 다시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뜰날 돌아 온단다 ~~~~~~~~~~
이 주님의 의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라고
우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이 십자가가 옳았다고 선지자들은 외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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