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6,24-34)

 

(6:30, 공동)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6:30, 쉬운)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6:30, 킹흠정)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6:30, 현대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2:28, 새번역)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12:28, 공동) 너희는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으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주시겠느냐?

(12:28, 쉬운) 하나님께서 오늘 들판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이렇게 입혀 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혀 주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12:28, 킹흠정) 그런즉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12:28, 현대어) 늘 피었다가 내일 없어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6:24, 새번역)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 , '맘몬(돈이나 부를 뜻하는 셈어)'

(6:25,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무엇을 마실까'가 없음

(6:26, 새번역)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새번역)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 또는 '제 키를 한 규빗인들 크게 할 수 있느냐'

(6:28, 새번역)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6:29, 새번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6:30, 새번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6:31, 새번역)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6:32, 새번역)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6:33, 새번역)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6:34, 새번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 또는 '오늘의'

 

 

그 동안 말씀보면서 오늘 본문으로 제목을 잡은 30절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귀히 여기시거든요 하물며 너희일까 이 부분이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하면서 아 그런 의미이구나 라고 감이 오더라 말이죠

 

아니 현대어 번역에는 내일 없어진다고 표현했다 말이죠

없어지는데 왜 귀히 입히실까요?

왜 하나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왜 주님은 충성하실까요? 왜 귀히 여기실까요?

 

이해가 되지 않잖아요

 

아 그런데 이사야 서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우상이란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될려고 지식을 쌓고

지혜를 쌓고 공부하고 그리고 부요함과 재산을 쌓듯이

 

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놓여질까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 찾으시는 긍휼의 자리에 놓여질까봐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찾더라 라는 겁니다.

 

바로 앞의 모압도 그렇구요

심지어 남유다 아하스 왕 조차도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할 판국인데

개같은 이방인은 오죽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주님 쪽에서 포기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여이 자신의 의사됨 때문에 환자 라는 기능을 포기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물며 너희 일까 보냐 라고 나오시면서 더 나은 귀히 여겨주시겠다고 일관 되게 약속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문제이다는 거죠

약속 자신의 문제

언약 자신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아니 왜? 바로 우상과의 차이 때문이거든요

예수님이 여기에 모든 것을 걸어버렸다 말이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믿음을 언급한적이 없어요 성경에는

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심어놓고서는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 라고

귀신 들린 어미를 칭찬했지

인간에게 실제로 믿음이 있어서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지금 그 순간 심어 놓고

비로소 이름을 알려주셔놓고서

오냐 내가 여기 있다 라고

자작극을 펼치는 식이 약속입니다.

 

반면이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믿음으로 달려드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말이죠

 

왜냐하면 방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의미 없다는 겁니다.

내일 없애 버린데요 글쎄

내일 없어질 들풀입니다.

삭제 된다 말이죠

 

그래서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그 의미 없는 것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부으시겠다고 약속 하십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믿음이 있으면 안됩니다.

믿음이 없어서 마귀에게 잡혀버렸는데

어라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고 하신다 말이죠

그럼 베드로는 그럼 기도 안했겠습니까?

했겠죠

그것도 의미 있겠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로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환자의 기능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부으시니까 열매가 맺혀지는 겁니다.

 

자 왜 의미 없어진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을 위하여 의미 있는 기도를 했을텐데

 

바로 이 차이입니다.

 

우상은 바로 의미 있는 것에 의미를 두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존재인 거죠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것에 말이죠

 

그러나 약속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두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속이 이런 판국이니까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되돌아 오는 헛된 맹세들 곧 의미 두는 것 모조리 다 헛것이 되는 점에서

 

약속은 바로 그런 우상과의 차이로써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곧 요나는 니느웨는 의미가 없고

이스라엘만 의미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요나가 의미 없게 보는 니느웨는 의미를 두고

도리어 이스라엘은 요나가 의미를 억수로 두고 있는 이스라엘은 의미를 두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나 조차도 결국 어디로 회귀 하게 되냐 하면

우상이라는 자기를 위한 것에 회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스스로가 귀히 여긴

이스라엘 선지자 다운 선지자 됨을

내일 아궁이에 던져 버린다

그럼 뭐가 되냐 말이죠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폼이 안 나잖아 라고 했는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리잖아요

 

폼이 안나는 정도가 아니라

허무하게 없어진다는 겁니다. 없어져

 

자 이렇게까지 깊어지는 두 주인 곧 돈이라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수 없다는 것을

 

아이고 우리는 안 그렇습니다 라고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신만만해 했냐 말이죠

 

그런데 알고보니 돈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자는 유대민족 밖에 없어요

다른 민족들은 아직도 돈의 의미를 잘 몰라요

 

은행도 금융도 모조리 다 유대인에게서 나온 거다 말이죠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사실은 유대인들이 구하고 있다 말이죠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참 재미있어요 오늘 본문을 지금 이방인에게 하는 소리입니까?

유대인에게 하는 소리 아닙니까

이방인들이 구한다고 하심은

지금 너희들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되어 있다 말이죠

이미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구하래요

 

나는 임마누엘 구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라고 아하스 왕의 대답이 힌트가 되는 겁니다.

즉 유대인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가 없어요

구할려면

 

개같은 며느리 다말을 아내로 삼는 시아버지 유다가 되어야

그가 나 보다 옳았다 라고 비로소 그의 의를 구하게 되니까 말이죠

 

즉 내가 의미 둔 것 모조리 탈탈탈 털려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니은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습니까?

개같은 이방인?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유대인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니 왜? 자기 백성과 싸우시는 거죠

자기 백성이 아니거든요

우상의 백성이다 말이죠

 

발람의 꾀를 앞에서 언급했는데 녹음에서 말이죠

이스라엘이 이방나라 선지자 발람의 저주가 자신들에게 먹혀들지 않고

도리어 축복이 된다는 것을 알고서

 

이제 축복이 되었으니까 축복이 된 이스라엘인 자신을 의미를 둘까요

의미를 두지 않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을까요?

 

이것이 음녀라고 했지요

거룩의 원리를 알더라 말이죠 거룩한 제사장 딸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런 거룩의 원리를 알았으니 그 지식으로 짐승을 올라탈려고 해요 글쎄

왜 일까요? 안그러면 또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된다 말이죠

 

우상을 정죄했던 본인들이 우상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참 신기하죠

 

자 그래서 요나의 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기적을 바라고 있어요

부림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통해서 구원이라는 기적도 체험했다 말이죠

 

그러니 다시는 그런 일을 또 반복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예수 너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할꺼지

그런 기적을 보여주면 우리가 너에게 의미를 두마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데요 글쎄

 

아무 의미 없다 라는 개그맨 유행어처럼

가룟유다가 그 동안 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의미를 두고 따랐냐 말이죠

아 그런데 그것이 나의 지금 하나님나라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나 가룟유다에게

아무 의미가 없더라 말이죠

의미 없으면

 

예수가 나를 아궁이에 던지기 전에 내가 던져주마 라고

너 같은 의미 없는 놈은 사라지라 라고

돈 받고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 돈으로 하나님나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총알을 사야 하니까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내가 이렇게 의미가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 내가 이렇게 의미가 있는데

십자가를 믿는 내가 이렇게 의미가 있는데

 

뭐 예수가 날 안 도와줘

 

이런 고귀한 믿음을

솔로몬이 입은 영광 보다 더한 나의 믿음을

 

뭐 저 들에 핀 들꽃보다 못하다고?

 

오히려 저 의미 없는 들꽃도 내일 아궁이에 던진다며

뭐야 이래도 의미 없고 저래도 의미 없고

 

그런 왜 날 12제자에 뽑았니?

의미 없다면서

 

바로 그겁니다.

의미 없기에 12제자 뽑은 거다 말이죠

제자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엉터리 이다는 것을 보여주죠

정작 그 프로그램을 창시한 자는 그거 엉터리 이다 라고 했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없으면 청년부 대학부 장년부

한참 일할자를 길들여서 부려먹을수가 없다 말이죠

이들이 허리 역할을 든든하게 잡아 줘야

교회가 부흥이 되냐 안되냐의 관건이 되는데

제자훈련을 변형을 해서든 활용해서 써먹어야 세뇌 시킬수가 있다 말이죠

 

꼭 유대인들 한 15살 쯤인가 그때부터 교육을 엄격하게 하는 것과 똑같아 ㅋㅋㅋ

 

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뭡니까

이사야는 지금 아들의 혼인잔치를 봐버렸다 말이죠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그것도 딸랑 혼자 이 혼인잔치

아들잔치

임마누엘잔치 구원잔치를 봐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이 혼인잔치 때문에 임마누엘을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우상과의 단절

마치 전남편 율법과의 단절 이혼을 통해서 새신랑 예수님과의 결혼을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이 새신랑 되신 예수님이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는 바로 이 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로 의의 자리 곧 삼일의 간극이라고 했지요

이 간극 속에 집어넣고자

 

아궁이에 던져 버리시는 겁니다.

이 기간이 바로 70이레 라고

한때 두때 반때

시간 개념이 아닙니다.

간극 개념입니다.

한때는 자기 죄 떄문에 핍박받는 기간이고

두때는 아무 이유 없이 이방인들에게 짖밟히는 기간이고

반때는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받는 기간이다 말이죠

바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다 말이죠

 

이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은 우리를 이 1260일 삼년반 이라는 간극 속에 집어넣어서

누가 너희를 위해 대신 못 박힌 고난의 종인가를 보라는 겁니다.

그 간극 속에서 모든 허물을 다 덮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 곧 아들을 보라고

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구원잔치를

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속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이 광야에서 샘이 넘쳐 흐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나고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이 간극 속에서 이 새 일을 보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처음사랑의 자리에서 말이죠

 

그런데 모압은 이 자리에 청함을 받았으니 택함을 받지 못해서

예복을 입지 않는 완악함으로 교만함으로 목이 곧음으로 인해 쫏겨나는 겁니다.

목이 곧아서 예복을 입지 않는게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아서 목이 곧은 겁니다,

산당을 짖고 다시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되게 해 달라고 우상을 쫏아서 혼인잔치에서 쫏겨나는게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을려고 해서 우상을 쫏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즉 끝까지 그리스도의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끝까지 번제와 제사에 의미를 두는 자기자신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완전 성화론자들과 다를바 없지요

가룟유다가 그래서 하나님나라 독립운동을 끝까지 포기 못하는 겁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려고 하니

자기가 하고 있는 하나님나라 운동과 완전 정반대의 길이거든요

자기의 운동은 의미가 있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죽으면 끝이거든요

끝나는데 무슨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까?

안 죽는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지

죽는 예수님의 의를 구하면 됩니까?

 

며느리를 타 죽으니까 죽는 자의 의를 필요가 없어요

안 죽는 시아버지 자신의 의가 옳아야만 한다 말이죠

그것만이 의미가 있어요

왜 자기는 살았으니까

며느리는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내가 곧 시아버지 유다인 내가

며느리가 의미 없도록 등떠밀어 태워 죽이면 되니까 말이죠

 

바로 이것을 깊이 파재끼는 것이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입니다.

 

왜 의미 없는 짖만 골라 하실까요

어차피 내일 아궁이에 던진다메?

 

솔로몬의 지혜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숨어 있는 사단의 깊이를 끄집어 낼줄 모르면

그 지혜는 가짜다 말이죠

아무리 지금 현대의 솔로몬 지혜보다 월등한 지혜들이

널려 있어도

이 솔로몬 지혜보다 못한 겁니다.

숨어있는 악마를 들추어 내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솔로몬은 정작 진짜 어미의 아이를 두 조각 내라고 합니다.

아궁이에 던지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누가 우는 자가 되며?

누가 박수 치는 자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감출려고 해도 감출수가 없어요

 

부모가 예언하는게 아닙니다.

자녀가 예언을 하는 겁니다.

 

(2:15, 개역)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는 겁니다.

? 솔로몬의 지혜의 날입니다.

오직 이 날에 비로소 내 이름을 알리라

솔로몬의 지혜를 알리라 이듯이

 

왜 이 날이 피의 날인데

심판의 날인데

이 심판의 날이어야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 되는 날이 되는

 

그떄만 내 이름을 안다고 하실까요?

 

우상과의 차이로써 그 이전에는 알수 없는 이름이요

부를수 없는 이름이요

찾을수 없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이 우상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말이죠

사망을 멸하지 않는 이상

 

이 죽음을 멸하는 것은 오로지 뭐 밖에 없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곧 예수님의 의 밖에 없어요

곧 아들의 죽음입니다.

 

아들이 아니면

젖먹이가 아니면 시온산에서까지 높이 세워진 이 산당을 해결할 길이 없다 말이죠

 

뭐 성화론은 여기에 비교할수 조차 없는 사기죠 사기

그런 수준 낮은 사기에도 다 넘어갈 정도인데

 

이 주님의 간극 벌리기 앞에서는 우찌 될까요?

 

그 정도로 우리는 어두운 눈입니다

 

창녀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이 미리 시체를 딱듯이 미리 장사 치르듯이

이 예수님의 죽음이 옳았다고 미리 앞당겨 외침까지

제자들이 봐버렸다면 그 정도의 수준까지 있었다면

아마 이 마리아를 돌삐를 던지는 것도 모잘라

귀를 짜르고 누구였죠? 말고처럼

또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갈기 갈기 찢어죽였을 겁니다.

 

다행이 그것까지 못 보고

수준 낮은 기준에서 그 재산을 허비한 것에 분노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왜 안주냐 라고 여전히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더라 말이죠

 

이게 우상과 약속의 차이입니다.

 

의미를 두냐 안두냐로써

의미를 두던 누구에게로 회귀하는지

의미를 안두던 결국 자기에게로 회귀해 본들 그것도 무자아를 추구하는 불교가 되거든요

무자아를 추구하는 자아를 또 의미 두듯이 말이죠

 

그냥 이래도 저래도 나는 갇힌자입니다 라고 나와야 하는 모습은

결국 예수님이 의사로써 나를 환자 취급하심에 달려 있고

죄인 취급하심에 달려있지

 

내 쪽에서 죄인의 자리에 간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죄인의 자리에 간 나는 옳잖아 라고 또 자기에게로 회귀하니까

그런 자기가 또 의미가 있는데

이것이 무슨 우상에서 벗어난 모습이겠냐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이 나를 죄인 만들어야 죄인이지

환자 만들어야 환자를 다루시는 의사라는 기능이 발현되지

 

의사의 기능을 나타내시고자 함이지

내가 내 스스로 환자 된 척 하는 건강한자이면

아무 소용없는 울리는 꽹과리요

또 더 중요한 환자 되어도

예수님이 너 나일롱 환자이지 라고

자신의 의사 기능을 펼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겁니다.

 

자 그래서 내일 아궁이에 던지시겠다는 겁니다.

 

아궁이에 던짐 당하는 죄인은 환자는 아무도 흉내를 낼수가 없어요

 

고아 과부 나그네를 흉내 낼수가 없어요

 

빅뱅의 승리처럼 그런 죄인 된다고 죄인이 되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십자가 믿는 내가 옳잖아 라고 또 나오니

예수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 스스로 우상을 다 허물고 평평하게 했다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는 귀신에 홀린 듯이 영화 곡성처럼 그 과정을 격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내 손에서 해결 될수 없는 문제임을 말이죠

 

의미를 둘게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에게 달린 문제이고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주님이 불쌓이 여겨주심에 달린거지

내 쪽에서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없어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 중

감히 머리도 못 들고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저 세리에게

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심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 기도를 따라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 말라꼬 바리새인의 기도까지 언급을 왜 했겠습니까?

바리새인은 여전히 의미를 둘게 너무 너무 많아요

십일조도 의미가 있지요

금식도 의미 있지요

그냥 금식이 아니야 편리하게 손가락을 셀수 있는

이레에 두 번 금식이야

그러면 손가락을 세고 있는 그 손가락도 의미있죠

그것을 세고 계산하고 출석도장 찍듯이 찍는 자신의 마음도 의미가 있지요

의미 되는 것 다 끌어 모아보니 울리는 꽹과리넹

 

이렇게 의미를 둘게 너무 너무 많은데

 

왜 의미 없게 시리 아궁이에 던지냐 말이죠

왜 의미를 없애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의미 없는 눈도 팔도 귀도 발도 만지지 못하는 손도 없는 우상은 정작

인간에게서 너무 너무 의미가 있고요

 

마치 윗구절 두 주인인 재물이 그 정도로 의미가 있듯이 말이죠

 

그러나 정작 의미 있어야 할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으로써 아무런 의미 없이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처럼

 

싫어버린바 되고 흠모할 모양도 없고

귀히 여기지 않는

 

의미를 아무리 둘려고 둘려고 베드로가 끝까지 따라 갈려고 해도 해도

안돼요 의미를 둘수가 없어요

 

네 맞습니다, 두지 마세요

 

의미를 두면 또 내 자신이 의미가 되어서 또 의문의 반복을 해요

두지 마세요

 

주님이 직접 하시도록 내버려 두세요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이 우상과의 차이를 직접 보여주시겠다고 벌리시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우상에게 사로잡힌 주제에 자꾸 주님이 직접 하시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려고 해요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라고 말이죠

 

우리는 사단이라는 집주인의 세간일 뿐입니다.

그러니 도둑에게 맡겨진 문제가 구원이다 말이죠

 

자꾸 이 구원문제에 거들려고 나선다 말이죠

안돼요 안돼

구원 문제는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입니다.

나선다고 될리도 없고

방해한다고 막을수도 없어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기만 하라 말이죠

어떻게 너 라는 세간을 집주인으로부터 빼앗는지 말이죠

 

그래서 아궁이에 던지시는 겁니다.

광야에

죽음 속에

 

아니 그 죽음 속이 날 구원하는 주님이 벌리신 간극인줄 몰랐다 말이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인줄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자리인 줄

 

아 그런데 헬라인에게는 그 자리에 어리석고 미련하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 자리이다 말이죠

아니 자신들의 처음자리인줄 뻔히 알면서도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한 것을 들통당하는 자리를

스스로 인정하겠냐 말이죠

그 회개의 자리에 때려죽어도 못가는 겁니다.

회개 했다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데

도리오 회개의 달인으로써 회개를 해야 자기가 의미가 있게 되는데

 

왜 의미 없는 회개를 하냐 말이죠 임마누엘을 구하냐 말이죠

그렇게 아들을 구했다가는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말이죠

하나님이 저주해서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인 예수님을 왜 구하냐 말이죠

시험하면 안된다 말이죠

 

그러니 아들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구해서 회개하라 라는 것이 바로

욥의 세친구 이다 말이죠

욥 너 자꾸 회개 안하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라고 협박하는 것이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외침 아니냐 말이죠

 

욥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이 아들의 죽음이 또렷한데

이 생소한 아들의 죽음이 낯설은데

 

저들 욥의 세친구는 익숙하고 습관이 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 말이죠

 

아닙니다 심판의 날에서만 구원잔치가 벌어지는데

그때에만 하늘이 땅이 피로 변하는 그날에만

알려주시는 그 이름이 바로 낯설은 이름이다 말이죠

존재의 이름이 아니라

기능의 이름이다 말이죠

 

바로 나사렛 이단 예수입니다.

또 거리끼는 걸림돌 즉 낯설죠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을 낯설게 당황스럽게 만들잖아요

제물이 되어야 하는 이삭 앞에서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미를 둘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 동안 습관적으로 의미 두는 것 그 앞에 아무리 내어놓아 보새요

의미 있어 지는가?

 

그래서 다윗은 회개 눈물 금식 기도 4종 세트 아무라 의미 있는 것 내어본들

이 이름 없는 아이를 살릴수가 없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발람의 꾀를 내느냐 말이죠

도리어 다윗이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게 아니라

아이가 이미 벌써 죽어버린 다윗을

저 우상적인 사고방식 밖에 모르는

회개로 눈물로 기도로 금식으로 아이를 살릴수 있는 손이 되는지

발이 되는지

들을수 있는 귀가 되는지

볼수 있는 눈이 되지는 보라 말이죠

 

될 것 같으면 벌써 아이를 살렸을 것이다 말이죠

 

못 살려요

아궁이에 던져질 뿐이다 말이죠

 

그 아궁이에 던져져 없어질 아들이

도리어 다윗을 살리고

불에 던져진 며느리 다말이

도리어 시아버지 유다를 살리고

 

불 속에 던져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아무 의미 없는 예수님이

 

도리어 불 바깥에서 죽은 시체가 되어 있는 우리들을 살리시는 겁니다.

의미 있다고 우기는 이 우상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도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도 못하는

 

우리의 이 우상성을 예수님이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로

나를 살리시는 겁니다.

 

그 살려짐을 당한 내가 의미가 또 있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옳았겠습니까?

 

십자가의 지혜는 마치 솔로몬의 지혜는

누가 박수치는 마귀이고

누가 우는 자인 천국이 떳기에 나타나는 증상으로써의 회개자를 찾아내는

주님의 숙제인 겁니다.

 

아무리 박수 안 치고 싶어도 마귀는 좋아라 라고 어서 아궁이에 던지세요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라고

 

아들을 두 동강 내는데 있어서 박수치고 난리를 치지만

참 옳으신 지혜 답다고 아부 하고 하나님이 옳았다고 외치지만

 

이 아들을 두 동강 내는 저 솔로몬 왕의 지혜를 이 십자가의 지혜를 원망할 것 아니겠느냐 말이죠

내가 믿겠다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의미 두는 십자가가 아니라 그래해본들 그것 역시나 우상이고

 

십자가 조차도 내 쪽에서 아무런 의미를 둘수가 없을때에

드디어 십자가가 나를 다룸에 있어서

세 번 부인케 만들어 버림에 있어서

탈탈탈 완전히 털렸을때에

부른적도 없고

찾은적도 없는데

예수님 자신의 숙제로 부르신바 되도록하겠다고

찾으신바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시는

그 믿음이 덮쳐졌을때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비로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내 입술에 덮쳐진다 말이죠

 

이것이 얼굴과 얼굴의 마주 봄이지

 

여기에 만약에 율법을 내가 지켰다는 것이 들어가 버리면

또 법이 기어들어가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수 없는

어딜 쳐다봐 눈 깔어 라고

또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또 우상이 또 튀어나오면

그거 사망을 멸한 것 맞습니까?

사랑으로 평평하게 다리미질 한 평탄케 된 거 맞냐 말이죠

사랑은 두려움 없다고 했는데

또 울리는 꽹과리가 그 간극에 들어가야 되겠냐 말이죠

 

(고전 13:12, 새번역)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쉬운)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현대어) 우리 비록 지금은 희미한 거울속 들여다보듯 희미한 모습만을 비춰 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나 비록 지금은 알고 있는 것 모두 다 몽롱하고 흐리나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시듯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개역본에서는 [이제는] 이라고 나오길래 빼고

[지금은] 이라고 되어 있는 번역본을 복사해서 올렸는데

 

자 지금은 은 언제이고

그때는 그 날에는 또 언제냐 말이죠

 

지금은 희미하게 보고

그때는 또렷하게 보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아주 가차이 본다는 그 날은 도대체 언제 입니까

 

비로 내 이름을 알리라 한 그 날과 같은데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곧 구원의 날이 되는

 

그 날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본다 말이죠

 

바로 베드로가 지금은 세 번 부인하지 않아서 희미한데

베드로가 그때는 세 번 부인해서 잡혀와서 심판 속에 놓여지게 되는데

이제 손을 댈수 없고 의미를 둘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말이죠

아 그런데 그 심판 속에 그 불 속에

그 깊은 바다 속에 그 지옥 속에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그 불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암요 암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잘 아십니다.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 신부 교회 베드로 라지 ~~~

 

아니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그때가 불 속에 뛰어드시니

이것 보다 또렷한게 어디 있습니까?

 

내 믿음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졌던가요?

그것은 지금은 이라는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본 때고

 

내 믿음도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진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내 믿음이 없을때에

믿음 조차도 무의미 해진 그 때에

심지어 마귀에게 잡혀 있는 지옥에 뛰어드셔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모든 전부를 보여주신 십자가의 죽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전부인 목숨까지 다 내어주신 때를

그 날에 아니 얼굴과 얼굴을 마주 안하고 베기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 따로

주님이 날 사랑한 것 따로

이 둘을 합쳐서가 아니라

 

내가 너고 너가 나 인

한 덩어리가 된 한마음이 된 하나

곧 구분 자체가 없는

예수 안에 하나가 되더라 말이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데 있어서 법이 없더라

즉 사랑 뿐이더라 말이죠

법이 있으면 감히 어딜 보냐 라고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한다 말이죠

그 짖을 글쎄 지금 마귀가 형사처럼 범인에게 어딜 쳐다보냐면서 서류판지로

눈깔아 라고 마음껏 휘두르는 그 심판 속에서

예수님은 변호사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죄 값을 치루었다고 값없이 속량하시니

그 얼굴에 뽀뽀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7:33, 개역)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지 않았고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지앟고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지 않았을까요?

 

얼굴과 얼굴로 대하지 않고

법과 법으로 대할려고 하니

도리어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이 율법을 지키는

법과 법으로 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자 이래 되면 예수님도 우상일 뿐이고

그런 자신도 우상이다 말이죠

 

이게 무슨 사랑이 되겠냐 말이죠

 

사랑은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조건을 걸지 않는다 말이죠

아무 조건 없는 것이 사랑이다 말이죠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앞의 글에도 언급했었죠

아니 예수가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과연 저럴수 있을까?

아니 이래놓고도 선지자 맞어? 저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또 이제는 아니 저 창녀를 자기 마음대로 죄를 사해?

가면 갈수록

 

선지자의 조건에서 더 멀어지는 것만 보란 듯이 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말이죠

 

? 바리새인 눈에는 모든 것이 법을 지키냐 못 지키냐 라는

부분으로만 흐릿함으로만 보는 법이지

사랑이 아니다 말이죠 전체가 아니고 얼굴과 얼굴이 아니다 말이죠

 

법으로 봐야 감히 얼굴을 못 보도록 완악한 수건으로 가리는

법을 지키면 무시 안 당하고

고아 과부 나그네 취급 안 받는다 말이죠

이게 우상이다 말이죠 사랑이 아닌

약속이 아닌

약속과 차이나는

 

자 이래서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수 있겠습니까?

 

아니 이 말 조차도 법으로만 듣낄꺼고

행하고 지켜야 하는 말로 들릴껍니다

성화론자들이 집요하게 강조하잖아요

산상수훈은 특히 더 해요 그들이 법으로 아예 사람 목을 쫄라요 쫄라

 

이런 발람의 꾀로

과연 십자가의 또렷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전체의 사랑을 막을수 있겠냐 말이죠

감히 법을 들이대?

 

법을 들이대면 사람들이 괜히 기죽거든요

경찰 옆에 지나가면 괜히 피하고 싶듯이

죄 지은 것도 없는데도 괜히

 

그러니 유대인들이 법을 자꾸 들이대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 자들이 법을 들이대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의미 없는 우리에게서 마저도 자기맹세로 값없이 속량하셨습니다.

 

이 우상과의 차이로써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용서 받았으므로

 

이 사랑을 거저 주시면 됩니다.

(3:6, 쉬운)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3:6, 킹흠정)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3:6, 현대어)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10:8, 현대어)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입니다.

 

(10:5, 개역)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0:7, 개역)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10:8, 개역)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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