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선지자]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 7-12)
(마 7:7, 개역)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개역)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9,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개역)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개역)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2, 개역)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7, 새번역)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 7:8, 새번역)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 7:9, 새번역)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마 7:10, 새번역)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마 7:11, 새번역)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마 7:12,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먼저 사람은 무엇을 구할것인지를 아예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에서 구하는 모습 곧 기도는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성화론자들이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다른 종교와 다를바가 없이 엉터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곧 전갈과 독을 구하는 셈인 겁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기도와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 전쟁이 벌어집니다.
바알 아세라의 기도는 더 크고 더 높고 더 강한 것을 기도 합니다
마치 성화론자들처럼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처럼 말이죠
그러나 엘리야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기적이 없는 겁니다.
즉 사랑입니다.
앞의 글 이사야 55장에서 사람들은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직 배 부르거든요
배 부르니까 율법을 지킬려고 하지 배고파봐요 율법 지킬 수 있겠냐 말이죠
딴나라 마약마늘주사당은
문재땡을 어떻게 해서든 노무땡처럼 자살로 몰아갈려고(연극도 했듯이)
패턴을 똑같이 일부러 실수로 인공기 넣어서 방송사고인척 하듯이 가짜 뉴스에 미쳐 있고
노무땡 유훈당은 아직도 율법을 지켜서 저런 가짜뉴스당을 이겨보겠다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여전히 정의 정의를 외치고 있다 말이죠
이 짐승과 음녀가 과연 은혜를 구할까요?
마찬가지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 곧 바리새인도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지
요나의 표적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 조차도 요나의 표적인 은혜 곧 사랑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울리는 꽹과리만 잔뜩 구하고 있더라 말이죠
성화를 많이 해야 그런 꽹과리를 모아야 신앙인 답다고 사기를 치고 그 속임수에 넘어간다 말이죠
이렇듯 아무도 율법과 선지자를 구하지 않는 겁니다.
선지자가 나타나면 골치 아파요
온갖 잔소리를 다 하거든요
그런데 거짓선지자 조차도 온갖 잔소리를 하기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바로 율법 해석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도 역시나 산상수훈으로써 율법에 대한 재해석이거든요
문제는 예수님은 이 산상수훈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 라고
이미 완료 되었음을
이미 승리 나팔을 불어서 이미 다 완료되었다고 산상수훈을 외치는 식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오늘 본문을 자꾸 인간이 지켜야 할 숙제로써 외친다는 점입니다.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인 거짓 선지자가 말이죠
그러니 이들에게서는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는냥 외친다는 점입니다.
지난주에도 비판하지 말라 라는 말씀을 자꾸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거짓 선지자는 가르친다 라고 했지요
이 비판하지 말라는 어떻게 예수님이 다 이루셨는가를 보는 입장이 아니라
자꾸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볼려고 하는데 자꾸 중간에 가로막아서 못 보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비판하지 말라는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비판하도록 되어 있는
율법이라는 죄 아래 가두는 올무에 빠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 의문의 증서인 율법을 찢으러
전남편인 율법과 이혼케 만든다 말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은 율법과 선지자를 구하라 인데
이 율법이 의문의 증서이고
전남편인데 구하면 안되잖아 자나 자나 안된다 말이죠
그런데 왜 구하냐 말이죠
자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해석을 예수님을 통해서 재해석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할 줄 모르고
모르면서 자꾸 포착할려고 하니
율법은 포착은커녕 자꾸 미끄러져 빠다 버터를 바른 듯이 빠져나가버린다 말이죠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성화론자들이 거의 세뇌시켜버린 그런 해석이 아니라
우리가 이사야서를 통해서 봤듯이
율법이 어디서 나옵니까? 시온에서 나오잖아요
곧 뜨인돌입니다.
자 그럼 항상 율법이 겨냥한 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율법은 관심 없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도리어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에서만 관심을 두더라 말이죠
그러니 시온에서 나온 율법에 의해 이 뜨인돌에 의해서
우리 마음판이 할례 당하듯이
시온에 세워진 산당을 다 허물어 뜨리는 평평케 하는 이 뜨인돌은 관심이 없는 겁니다.
지금 마태복음 아닙니까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자 산상수훈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면
누구와 가장 부딪힐까요?
예수님이 이방인과 부딪힐까요?
아니면 로마 압제 시대이니까 독립투사가 되어
로마와 싸우실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이 3년간의 공생애가 3년반 동안의 발가벗고 맨발로 다닌 이사야 선지자처럼
누구와 충돌하면서 싸울까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사야도 그랬듯이 예수님도 그렇다 말이죠
이게 율법과 선지자입니다.
즉 왜 발가벗고 이사야가 3년 반 동안 다녔습니까?
이스라엘이 수치를 애굽으로 가렸거든요
그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애굽은 수치를 가려주기는커녕 발가벗었다고
이게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지요
너희들이 발가벗은 모습을 이사야가 발가벗고 다님으로써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발가벗은 모습을 거울 비추듯이 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상을 겨냥한 시온에서 나온 율법이라는 뜨인돌 곧 거룩으로써
모든 산당을 허물어 뜨리는 충돌을 벌리신다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율법이 언급 됩니다. 곧 산당 우상
심지어 우리 마음 속의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는 그 우상을 깨뜨리는
율법의 완성으로써의 사랑이
바로 우상이라는 울리는 꽹과리와 대조를 이루면서 한 세트로 율법이 언급되고
선지자는 이 우상을 제거하는
이 마음판의 할례를 누가 하는고 하니 바로
젖먹이 어린양 아기
누구의 아들로써 앞장 세워 우상을 깨뜨리는 젖먹이로 등장되는 겁니다.
이사야 조차도 아모스의 아들로 언급되면서 우상깨뜨리는데 동원이 되고
이것이 에스겔에서는 인자 라고 사람의 아들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즉 인자가 아니면 우상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말이죠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요
사람들이 웃기는 게
처음에는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다음에는 구원 그 이후 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어서
이제는 죄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하기 위해서
성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이죠
그 말을 외치는 선지자가 바로 성화론자들과 같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구원 그 이후란 없어요
시간이 1234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구원이다 말이죠
즉 존재의 구원은 없어요
기능의 구원이 있기에
우리는 구원이 매일 매일 담겨진 그릇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다 완료된 새이스라엘을 이사야가 봤듯이
그 미래완료를 땡겨와서 이 어린양만 옳았다
이 아들 곧 인자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옳았다 라고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외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는 이 말을 외치는 데 있어서
정작 그 당시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나
오늘날 기독교라고 우기는 교회나
참선지자는 미워 죽는 삐딱한 소리만 하는 것으로 들린다 말이죠
절대로 성화하겠다는 데에 안 도와준다 말이죠
말씀지키고 남을 7번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실천하는 데에 안 도와주신다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독을 구하고 전갈을 구하고 있는 것인데
아니 어느 부모가 전갈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 주고
독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독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독을 먹이고 전갈을 먹이는 자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사야 때나 (구약의 참선지자 때)
예수님 때나
이방나라 우상의 민족과 싸우는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과 싸우신다 말이죠
야곱하고 씨름하듯이
자꾸 환도뼈 허리 힘 남근을 치실려고 말이죠
성화하겠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거룩을 지켜보겠다는 것이거든요
지키면 뭐 합니까?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눌 수 없게 되는데 말이죠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함량 미달이 되는
짐승과 음녀처럼 도리어 아들 이삭을 핍박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핍박하지 않으면 될꺼 아니가 라고
우리의 조상이 했던 짖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노라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소리를 너희 조상이 똑같이 했다는 겁니다.
아니 그러면 어쩌란 말이죠
그럼 누가 구원 얻느냐 라고 심심하면 누가 구원 얻습니까 라고 나온다 말이죠
행함이 단절이 되면 다들 외치는 소리가 곡성처럼 누가 구원 얻냐 라고 말이죠
자꾸자꾸 숙제 달라 그러면 숙제 다 지켜서 구원을 따 내겠다고
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겠다고 한다 말이죠
맏아들이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듯이 말이죠
구원은 행함으로 이루는 게 아닙니다.
이미 다 이루었는데 뭘 또 이루어요
자꾸 가룟 유다는 독립군으로써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야 한다고
구원을 이루고자 할려고 한다 말이죠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따로 뭐 ~~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없어요
다 이루었다 뿐이다 말이죠
사람이 노동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행함이 뭔고 하니 바로
아들입니다 아들
과거 인디언의 풍속 중에
방금 죽은 조상의 살점을 먹는 행위가 있듯이
전 세계 여러 부족에서도 나타난 풍속인데
그것이 일종의 부활인 셈이지요
아버지가 아들 몸 속에서 부활이 되어 함께 한다고
마치 모든 종교에 다 있는 부활사상 처럼 말이죠
그러니 아들 개념은 유업을 잇듯이 역사를 잇듯이
첫 아담의 부활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기에 맏아들 말이 맞아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다 곧 나는 부활되고 구원이 되고
아버지와 동일하게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행하고 지킴으로써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는 정작 탕자 곧 고추가 짤린 여자처럼 되어버린 탕자를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겁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로 말이죠
물론 율법 지킨 적도 없어요 해 봤자 함량 미달이니까
엉터리 율법인 거죠
정작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쏙 빼버린 채
껍데기만 까까 득 채웠거든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온 데 간데없고
껍떼기만 요란하게 달그닥 달그닥 울리는 꽹과리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봐라 봐라 나 율법 지키잖아 라고 대로에서 기도하고
왼손 하는 일 오른손 다 알게 행하고 있으니 말이죠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도리어 우상을 더더욱 세우고 산당을 더더욱 세우고
강도의 소굴로 까까 득 채우더라 말이죠
이 문제를 바로 선지자 라는 기능이 아이 아들 아기 로써
이 우상문제와 충돌시키시겠다는 겁니다.
마침 앞의 글에서 그 본문을 올렸더군요
가버나움아 소돔과 고모라에게 퍼부은 것이 오히려 더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라고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시고서는 갑자기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다고
어린아이가 왜 여기서 나오냐 말이죠
그리고 아들이 나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자 없다고
아들이 갑자기 갑분튀 갑자가 튀어 나온다 말이죠
어린아이 와 아들 말이죠
바로 율법과 선지자에서 율법은 언급했고
선지자가 앞장세우는 것이 바로 이 아들이다 말이죠
아까 말한 인간들의 노동으로 인해 낳은 결정체 인
인간의 자식인 아버지의 살을 먹어서 인디언풍속처럼
아버지의 부활을 인간의 아들이 기업을 이어받듯이 잇고 잇는 것처럼
이 계집종 하갈의 아들과
하늘에서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
이 두 언약의 한세트로써의 대립을
선지자는 전혀 다른 아들을 앞장세워서 증거하는 겁니다.
너희들 아들 곧 장자는 곧 애굽으로는 수치를 가릴수 없어 라고
발가벗고 죽은태처럼 거울반사 시키듯이
너희들은 발가벗었다 어서 항복하라 라고 투항하라고 외칠때에
도리어 미친놈이라고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요나의 표적 곧 구체적 보편적 진리이다 말이죠
안그러면 세상이 견디지 못하고 격동케 하는 참지혜가 아닌 셈이니까 말이죠
자 그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보자 말이죠
인간들은 구하라를 자꾸 실천할려고 해요
여기에다가 거짓선지자까지 쫘악 깔아버렸으니
구하라 라는 숙제를 안 지키면 안될 정도로
거짓선지자가 그런 환경을 만들어버렸다 말이죠
마치 안식일 지키기 위해 안식일날 절대로 밀을 까먹으면 안되고
심지어 손마른자를 고쳐도 안되듯이
또 십의 일조를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을 지켜야 하듯이
또 아무리 강도 만난자가 있어도
피 흘리고 있는 그 부정함을 만지면 안되듯이 그냥 지나쳐야 하듯이 말이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그 율법이라는 의문의 증서를 깨뜨리는 것이 사랑이 되기에
안 깨뜨리고는 은혜를 모르니까 말이죠
그래서 모조리 다 심판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율법이 그래서 가입이 되었다 말이죠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지키다가 결국 못 지켜서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몸에 갇혔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율법인데
그렇게 평평하게 되지 않으면
율법 지켜버린 자신이 또 산당처럼 울퉁불퉁 첩경을 이룬다 말이죠
마치 남자의 남근처럼 고추가 서게 된다 말이죠
누가 더 크냐 라는 것이 남자의 정신병인 강박증이거든요
이게 울리는 꽹과리인데
아니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바리새인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처럼 똑같이
십의 일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세리처럼 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아들로써
남자 있는 여자가 낳은 아들로써 나올때에
예수님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은
존재가 아닌 이름은
남자 없이 낳은 여자의 아들로써
인간의 바로 이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우상 곧 울리는 꽹과리를 해결하는
유일한 젖먹이로써
어린아이로 우상이라는 힘을 끊어버린다 말이죠
아니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거대한 괴물을
왜 어린아이만이 유일하게 해결할수 있는지?
그 어린아이를 반공교육투철하게 시켜서
다 자라면 독립군으로 양성해서
골리앗과 싸우게 하지
왜 젖먹이를 저 골리앗과 싸우도록 최전방에 배치 시키냐 말이죠
이런 임마누엘 아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릴수 있을까요?
없어요
성령이 아니면 안되요
그저 사람의 뜻으로 육으로 혈통으로 할 꺼다 말이죠
혈통 곧 남자 있는 여자가 낳은 아들로써 말이죠
성령이 아니면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는
왜? 여전히 역사라는 시공간에 얽매여 있기에
이미 다 완료된 다 이루셨다는 못 끌어 당겨오기에
율법과 선지자를 구하지 못하기에
율법과 선지자를 구하라꼬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써
마땅히 빌어야 했을 율법과 선지자를 비로소 성령의 탄식으로 구하게 된다 말이죠
왜? 인간은 아예 모르기에
베드로를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를 예수님이 하셨듯이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임마누엘을 구하게 된다 말이죠
안그러면 자꾸 아하스 왕처럼(남유다)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노라 라고
그 하나님이 가짜요 우상인줄 모르니까
왕으로써 이 나라를 책임지고자
연합군과 손 잡아서 적을 물리치겠다고
골리앗을 물리치겠다고
어린아이를 구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는 모습이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주장과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진 모습이냐 말이죠
골리앗과의 싸움에 어떻게 젖먹이가 필요하겠냐 말이죠 버려야죠
아니 국가를 가룟유다처럼 건설하고 독립운동을 펼쳐야 하는데
쓸모없는 돌은 버려야 한다 말이죠
국가의 왕으로써
백성을 먹여 살리는 엄마로써
아들이 고아이고 과부이고 나그네 라면 버려야 한다 말이죠
그 버린 돌로써 머릿돌을 삼는
우상 문제를 해결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인데
이런 세상에 그런 나라가 무슨 수로 세워지겠냐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해 버렸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주실 것이 없어요
아무도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말이죠
일부러 골리앗을 일으킨 이유는
블레셋 나라 멸망이 먼저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가 우상이 된 것 깨뜨리고자
반드시 안 구하고는 못배기도록
이미 벌써 다 주셨음을 (이미 벌써 임마누엘이 떳기에)
그래서 잉태치 못한 자리에서 만국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짖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 육적 이스라엘의 아들 곧 장자를
방어막으로써 보호하고 있는 주변 우상의 나라를 하나 하나씩 쳐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퍼붓듯이 양파껍데기 하나 하나를 벗기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남도 아닌 유대인 곧 바리새인과의 충돌만이 오히려 복음서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이유는
바로 바리새인이 곧 유대인이 우상으로써
어떻게 그 우상을 하나 하나 치시면서 중앙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천국을 탈환 하시는지
침노 하시는지
빼앗으시는지
이 이스라엘을
이 예루살렘 딸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고추 다 짤라 버리시는
이 마음판의 할례인 십자가 곧 요나의 표적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거짓된 자들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다 이루신바를 어떻게 주시는지
그것을 받은 자로써
이미 우상문제 죄문제를 다 해결이 되었는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은 이 믿음을
행함이 아닌 이 믿음을
어떻게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매일 매일 이 은혜를 담은 그릇으로써
이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를
부른적도 없고 찾은적도 없는 그 자리에서
그 목마른 자리
그 잉태치 못한 자리에서
누리게 하시고자
먹고 마시게 하시고자
의문의 반복인 율법 지키기가 매일 매일 벌어지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무한 반복으로써 십자가의 사건이 매일 매일 터지는
아 이런 죄도 용서하셨군요
이런 원수성도 용서하셨군요
이런 죄인도 사랑하셨군요 라고
아버지의 의사됨 때문에
환자라는 그릇
곧 긍휼의 그릇으로
은혜의 그릇으로써 오늘 말씀 율법과 선지자를 누리는 겁니다.
그냥 누릴 뿐이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 율법과 선지자라는 빵꾸멍 내는 그 구원의 뿔에
뻥뻥뻥 구멍 뚫힐 뿐이다 말이죠
그러나 아버지의 의사되심이라는 기능과 무관하게
건강하다고 우기는 진노의 그릇들은
자기자신의 존재에만 신경쓰도록 되어 있는 강박증처럼
구하기를 몇 번 하고
찾으라를 몇 번 하고
두드리라를 몇 번 했는지에 대한 그 의식에서 그 강박에서
못 벗어나도록
거짓선지자 까정 풀어서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될까봐
부활 못 할까봐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무엇을 해야 구원 얻습니까 라는 숙제에 집착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수 없고
자기도 못 지키는 것을
남에게도 멍에 지우니까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 감추시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곧 어린아이 중에 그 어떤 어린아이도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하는 어린아이가 없듯이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는
이 우상문제 죄악의 문제를
주님의 온유함 덕분에
구스 여인을 아내로 삼아주셨듯이
비로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비로소 부르게 만드시더라 말이죠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 떄문에
우리는 이미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한적이 없는 자리에서 구한바 되고
찾은적 없는 자리에서 찾으신바 되고
두드란적 없는 자리에서 두드린바 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 이미 다 이룬채로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사 65:1, 공동)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해 주었다.』
(사 65:1, 쉬운)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찾지 않는 백성에게 나를 알려 주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그들에게 나를 밝히 드러냈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하였다.』
(사 65:1, 우리말) 『“나는 내게 물어 오지도 않던 사람들에게도 대답해 주었다. 나를 찾지도 않던 사람들도 내가 만나 주었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하고 말했다.』
(사 65:1, 킹흠정)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찾아내었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아니하던 한 민족에게 말하기를, 나를 보라. 나를 보라, 하였노라.』
(사 65:1, 한글킹) 『나를 구하지 아니한 자들이 나를 찾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내가 발견되었노라. 내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민족에게 말하기를 "나를 보라, 나를 보라." 하였노라.』
(사 65:1, 현대인)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묻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나를 나타내고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에게 내가 발견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은 나라에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하였다.』
(롬 10:20,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 ㉠사 65:1(칠십인역)』
(롬 10:21,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 ㉡사 65:2(칠십인역)』
정작 이사야 65정 1절에 대한 [새번역]과 [현대어] 번역은 좀 이상하던데
신약 로마서에서는 또 바르게 번역했으니 앞(구약) 뒤(신약)가 안 맞아서 빼고 올렸구요
(롬 10:20, 공동) 『또 이사야는 더욱 대담하게,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하였습니다. / ㉠이사 65:1.』
(롬 10:21, 공동)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 ㉠이사 65:2.』
(벧후 3:13, 공동)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 ㉠이사 65:17.』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4, 개역)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개역)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6, 개역)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롬 10:17, 개역)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8, 개역)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롬 10:19, 개역)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롬 10:20, 개역)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롬 10:21, 개역)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우연히 우연입니다 우연 ㅋㅋㅋ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으로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3년 반이라는 주장들이 많더군요
이사야의 발가벗고 돌아다닌 3년 반처럼
물론 우연입니다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애굽이라는 수치 덩어리로 수치를 가리지 말라고 했듯이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이듯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누룩인 수치로 수치를 가릴려고 한
유대사회 전체를 발가벗었다고 수시고 돌아다니는 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 라는 의미인 겁니다.
행복한 사람 임을 누려 ~~~~~~~
아 제가 잘못 말했네요 ㅋㅋㅋ 이사야도 3년이네
3년 반은 엘리야와 계시록에 나오고
물론 둘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삼일의 간극인 셈이지요
(계 16:15, 현대인) 『그때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가겠다.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숭이로 다니지 않으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계 16:15, 개역)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새번역) 『("보아라, 내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깨어 있어서,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며, 자기의 부끄러운 데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그, '자기 옷을 지키다'』
(계 16:15, 공동) 『그 때에 "잘 들어라. 내가 도둑같이 오겠다. 벌거벗고 다니는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계 16:15, 쉬운) 『그 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보아라! 내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도둑같이 너희들에게 갈 것이다. 깨어서 옷을 단정히 입고 있는 자는 복이 있으리니, 벌거벗은 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계 16:15, 우리말)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이다. 깨어서 자기의 옷들을 지켜 벌거벗은 채로 다니지 않고 자기의 수치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계 16:15, 킹흠정)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나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여 그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 16:15, 한글킹)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서 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 16:15, 현대어) 『그때 이런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보라, 정신차리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내가 도둑같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다. 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기 때문에 벌거벗고 다니는 수치를 면할 것이다.'』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54:4, 개역)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을 보지 아니하니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사 54:5, 개역)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사 54:6, 개역)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 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사 54:7, 개역)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사 54:8, 개역)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4:9, 개역)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사 54:10, 개역)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참 가장 중요한 것 빠뜨렸네요
결국 율법과 선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였다가 다시 3일 만에 살리시는
이 간극 말이죠
찢으셨으나 다시 꿰매시고
잃어버렸으나 다시 되찾으시는
노아 홍수를 평평하게 다리미질 하신
이 주님의 도를 가르치는 겁니다.
선지자도 그냥 선지자가 아니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선지자
곧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자유하는 여자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호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개역)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 6:3,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사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미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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