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의 넓은 문] (마 7,13-29)

 

(마 7:13,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개역)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5, 개역)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6, 개역)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7, 개역)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개역)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개역)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개역)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7,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마 7:29, 개역)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 7:13, 새번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마 7:14, 새번역)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5, 새번역)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마 7:16, 새번역)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마 7:17, 새번역)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마 7:18, 새번역)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마 7:19, 새번역)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마 7:20,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마 7:21, 새번역)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 7:22, 새번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마 7:23, 새번역)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4, 새번역)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마 7:25, 새번역)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마 7:26, 새번역)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마 7:27, 새번역)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마 7:28, 새번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마 7:29, 새번역)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먼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을 우상화 시켜버립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이 다릅니다.

 

이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지 않고자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그런데 이것이 바벨론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목적과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그저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되고자 하나님을 이스라엘에게 각인시킵니다.

소위 축복받아야 한다는 식인 거죠

 

반면에 참선지자는 지난주처럼 [율법과 선지자]는 정작 고향인 예루살렘으로부터

곧 이스라엘 자기 백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도리어 엘리야 선지자는 두로 지방(이세벨의 고향)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고

 

엘리사 선지자는 다메섹 아람 군대 장군 나아만 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향이 아니다는 거죠

 

이것이 기능 또는 사건으로써의

만군의 여호와 라는 이름이다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외치는 하나님과 곧 거짓 선지자도 마찬가지죠 이스라엘을 세뇌시켰으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의미에서

 

이 다른 하나님을 구하라

곧 임마누엘을 구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으로 따져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넓고 큰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하시면서

거짓 선지자와 연결시키는 겁니다.

곧 우상 숭배자인 거죠

 

그런데 좁은 문은 불가능하고 없어요

반면에 넓은 길은 계시록에 나와 있듯이

마치 짐승의 표처럼 그 표가 없으면 매매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거짓 선지자가 외치는 넓은 길은

곧 이 세상의 흐름과 대세를 따르는 겁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길인 거죠

 

자 그러면 저 미국의 아미쉬라는 이단 공동체가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전기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200년 전의 문명의 과거 모습으로 사는 것이

좁은 길일까요?

정작 인스턴트 음식으로 건강문제가 대두가 되니까

힐링푸드로 유명세를 타 버리니

도로 넓은 문이 되어 버렸다 말이죠

그런 것이 좁은 문이 아니다 말이죠

 

유행과 세상의 흐름을 타지 않는 반대의 길로 간다고 해도

역시나 넓은 문입니다.

 

멸망의 길인 겁니다.

 

그렇다고 좁은 문 좁은 길을 인간이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마 7:12, 현대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눅6:31]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진정한 율법의 가르침이요,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 7:13, 현대어) 『[좁은 문;눅13:24]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마 7:14, 현대어)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 7:15, 현대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눅6:43-44] 순진한 양의 가면을 쓰고 오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 마음은 이리 같아서 너희를 찢어 삼킬지도 모른다.』

(마 7:16, 현대어) 『열매를 보고 나무를 분간하듯이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을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찌 포도를 따먹을 수 있겠느냐? 엉겅퀴에서 어찌 무화과를 따먹을 수 있겠느냐?』

(마 7:17, 현대어) 『이와 같이 과실나무의 좋고 나쁨은 그 열매를 가지고 구별한다.』

 

그럼 좁은 길은 무엇이냐?

지난 시간에 율법과 선지자가

정작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한다고 했잖아요

왜? 참선지자가 바로 좁은 길을 가라고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자이기 때문이거든요

 

자 그럼 거짓 선지자는?

네 맞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인도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그런 기능을 하라고 주님이 배치시킨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왜 참선지자는 죽임을 당하고

거짓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요?

백성을 이미 장악한 것이 마귀이거든요

 

그러면 참선지자는 이 빼앗긴 이스라엘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임마누엘 아기를 구하라 라고 합니다

스알야숩 아이를 구하라 합니다.

마할살렐 하스바스 아이를 구하라 합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가 바로 스알야숩 임마누엘 마할살렐 하스바스입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들의 기능이 바로 남은자만 돌아온다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노략이 급하다

진노가 급히 온다 말이죠

 

(시 2:12, 개역)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주님의 의가 아니면 우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말이죠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오로지

번제와 제사가 아닌 뭐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인애와 자비 이다는 겁니다.

 

그럼 번제와 제사는 넓은 문이고 (남을 7번 용서)

인애와 자비 라는 십자가의 피 용서는 좁은 문이 되는 거죠 (원수를 7에 70번 용서)

 

시편에서는 이 문을 바로 예수님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 시편의 내용을 그대로 담은 그릇인 참선지자는

마치 예수님이 시편 대로 행하셨지만

시편을 달달달 외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듯이

참선지자는 이 시편에서 언급된 이 문 되신 예수님을 외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죠

 

그러니 시편을 달달달 외우는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요

시편대로 행하신 예수님의 길이 바로 좁은 문인 구원의 길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는 그 시편에 나오는 구원의 문인 예수님을

고난 받는 종이라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흠모할 모양이 없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어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좁은 길 되신 예수님이다 말이죠

예수님 본인이 좁은 문 좁은 길이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 쪽에서 실천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실천해 봤자

이 좁은문 되신 예수님을 어떻게 열고 닫고 들어갔다 나갔다 들락날락 할수 있고

어떻게 두 다리로 예수님이라는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신 예수님을 무슨 수로 골목길 걷듯이 하냐 말이죠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만이 멸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너희들을 건져내실 의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환자에게만 해당되는 거죠

즉 잃어버린 자에게만 되찾음이 되는 거죠

 

좁은 길이란 결국 기능이다는 겁니다.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의미처럼 말이죠

그러니 렘넌트 운동 따위 좀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런 뜻이 아니다 말이죠

 

스알야숩 곧 아이를 내세우는 전쟁만이

우상 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하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젖먹이 전쟁

그러니 다른 전쟁은 없는 거죠

임마누엘 전쟁

스알야숩 전쟁

마할살렐 하스바스 전쟁

 

오늘 본문으로 치면 좁은문 좁은길 전쟁만이

유일하게 넓은 길인 우상의 길을 허물어 뜨리는

골리앗과 젖먹이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 마태복음 7장에 언급하시는 이유는

지금 유대인 곧 이스라엘이

이미 거짓 선지자에게 다 빠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미 넓은 길인 멸망의 길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없는 길은 좁은 길을

무슨 수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넓은 길인 멸망의 길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좁은 문이 떠버렸기에 그 증상으로써 우는 자가 나타나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언급했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기쁨을 얻으리로다

 

안 기뻐요

이미 이 세상의 기쁨 꺼리가 억수로 많아요

 

그럼 그것보다 더 기쁨이어야 하는데

전혀 하나도 안 기쁨인

도리어 우는 자가 되는데? 이게 무슨 기쁨입니까?

 

그래서 성령을 받는 그 불가능성으로써 기쁨이기에

불가능성으로써의 단절인 성령이기에

 

표현을 성경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인간들이 굳이 기뻐하심을 입을 필요가 없이

자기들이 알아서 충분히 기쁨을 펼칠 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 얼마나 낯설기 짝이 없는 표현입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고

 

(눅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즉 이 말은 성경만이 일방적인 편파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즉 이 세상은 주님 보시에게 기쁨이 없기에

없음을 전제로 하고 주시는 기쁨이다는 겁니다.

평화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주시는 평화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다시는 전쟁이 없는 기쁨을 주겠다는 겁니다.

 

(사 2:4, 개역)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미 4:3, 개역)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역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인 거죠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전쟁의 마침이 되기는커녕

더더욱 전쟁뿐인 세상인 화약고이다 말이죠

 

그렇기에 칼과 창을 손 놓고 쟁기와 낫으로 만들기는커녕

넓고 넓은 멸망의 길로만 갈 수밖에 없도록

전쟁 연습을 더더욱 해야만 하고

총칼을 더더욱 쥐어야만 하고

 

번제와 제사를 더더욱 지켜야 하며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더더욱 해야지만

저 세리와 같지 않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구조는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요 자기를 위한 구원을 위한

 

그래서 절대로 좁은길 가면 안 되는

고아 과부 나그네 될까 봐 싶어서

우상을 섬겨야 하는

그래야 개무시를 안 당하거든요

 

그런데 성령은 자꾸 무시받는 율법과 선지자처럼 만든다 말이죠

 

왜? 이미 좁은 문이 떴기에

임마누엘이 떴기에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떴기에

 

그 증상으로써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는

이 세상의 진짜 현실을 안약을 사서 제대로 보라는 겁니다.

 

나 돌아갈래 애굽으로 라고 넓은 길이 구원의 길인지 멸망의 지옥인지

아니면 이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 까지

그 죽음 속에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아야만 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원수 베드로를 용서하는 그 십자가의 죽음이 옳았다고 외쳐야 하는 좁은길이 구원의 길인지를

 

똑똑히 밝히 보라는 겁니다.

 

(시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18:19, 개역)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시 9:14, 개역)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24:7,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의 문인 인간의 손으로 지은 멸망의 문을 허물어라

내가 삼일 만에 짖겠다고 하신다 말이죠

 

이 삼일 만에 다시 짖는 문 만에 의의 문이다 말이죠

 

이 문을 만들지 않으면 인간은 멸망뿐이다 말이죠

이 좁은 길인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의 이름 모를 잡초 같은\

싫어버린바 된 문이, 문 자체가 바로 예수님이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쫏고 따른다는 것은

역시나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안 쫒으면 절대로 싫어버린바 되지 않고요

극히 소수처럼 외롭지도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거든요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말라꼬 좁은문으로 가겠냐 말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또 몰라

아예 안 보여요

예수님이 안 보여요

 

안 보이니까 찾는 이도 없어요

 

없는 길을 가라고 하니 말이 안 되잖아요

 

누구 말마따나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거짓 선지자는 있는 것만 외쳐요

 

바로 이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말이죠

그러나 정작 약속은 없음을 추구하는데

우리 보고 이 없음을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래 되면 성화론자처럼 불교가 된다 말이죠

 

무 無 를 추구하는

 

무를 주세요 그 무를 추구해도 추구한 자신은 또 있어요

무가 안됩니다. 없음이 안돼요

 

그 안 되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이 단절성인 이 성령의 일을

 

주님이 하셔서

다 이루셔서

그 결과를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우시는

이것이 바로 인애와 자비라는 긍휼입니다.

 

우리가 추구해 버리면 그건 또 번제와 제사이고

노동이고 노동은 반드시 한풀이 원한 살인 의지로 나타날 뿐이다 말이죠

 

이 불가능한 좁은 문 으로 들어가는 것조차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아 그러면 탱자 탱자 놀면 되겠네 라고 좋아라 하세요 ㅋㅋㅋ

 

해 봤자 주님의 의가 덮쳐지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간극이 틈이 홈이 파이기 때문에

 

 

저절로 아파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노시는 분으로 착각 하면 안돼요

그렇다고 같이 놀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어요

 

인간 쪽에서 의를 만들 수 없어요

좁은길 갔다고 쳐 본들

 

주님이 만드시는 의 앞에서는

그냥 이유 없이 무조건 물속에 빠뜨려서 다시 건지시니

 

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 외에는 없으니까 아예 기댈 하덜덜 마시길

 

주님이 이미 벌써 다 이루셨다 말이죠

이 깃발 기준에 의해서만 다루실 뿐이니

 

걱정 하덜덜 마세요

방종하면 어떡하나 나쁜 열매 맺으면 어떡하나

이런 이단 사상에 빠지면 안 될 텐데 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은 마치 인간 쪽에서 자유의지가 있는냥 착각하지만

그것조차도 강요된 선택이다 말이죠

 

인간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아예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거짓 선지자들이 도리어 열매로 알리라 라고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도로 선택할 수 있는냥 가르치더라 말이죠

 

그 반대입니다.

 

 

(마 7:16, 개역)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7, 개역)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개역)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개역)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선택할 수 없어요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어요

 

좋은 나무가 타락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식이

한국교회의 가르침이다 말이죠 불교와 뭐가 다르냐 말이죠

선택권이 없다니깐요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이 말씀을 이루셨는가를 보자 말이죠

인간이 실천하는 숙제가 아니라

 

놀랍게도 이 말씀을 예수님이 어떻게 숙제를 다 이루었는지 보세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잖아요

어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이 졸지에 나쁜 열매를 맺었어요

 

(마 7:18, 개역)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더 놀라운 것은 저들 말이 맞아요 나쁜 못된 나무인 개 같은 이방인이

나쁜 것 본인들도 안다 말이죠

어 그런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버렸어요

 

아니 불교의 땡중들이 성경도 공부한다고 합니다만

그들의 해석이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해석이나

같은 해석을 해요 글쎄

 

인간의 숙제에서는 다른 답이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말이죠

 

자 그럼 애초부터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 못 맺는다고

이미 익히 다 아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다 알아 먹을 소리 같으면 잔소리이요 입만 아프지

다 아는 데 말이죠

 

네 맞습니다. 모른다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때려 죽어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 라고

다들 아 이거는 우리가 아는 소리이다 라고 나올 거다 말이죠

 

바로 비유, 비밀이란 모두 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 어떤 누구도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게 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곧 성경이다 말이죠

 

열매로 나무를 안다 라고 하면

마귀가 격동을 하면서 견디지 못해 할까요?

전혀 안 그렇습니다. 다 안데요 그거 모르는 사람 어디 있냐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문자가 되면 안 됩니다.

 

사건이어야 합니다.

사건이 되면

이 문자를 아무리 포착하고 있어도

뒤집어집니다.

 

시편을 아무리 유대인들이 어릴 적부터 달달 외워도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에게서는 이 시편을 사건화 시켜버리니까

정작 시편을 외운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율법을 지키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도리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신 예수님을,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는 사건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 이다 말이죠

 

남에게 대접받고 싶으면 남에게 대접하라 가 무슨 놈의 사건이 되냐 말이죠

문자를 포착하고 그것을 숙제하듯이 하면

아무런 사건이 안 일어나요

 

십자가 라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사건은 없어요

 

열매로 나무를 알리라 백날 문자 포착하고 해 보세요

사건이 일어나나?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의 열매로 나무를 안다 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면서 예수님을 죽이고픈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비로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예수님이 다 이루셨는가 라는 사건을 보게 되는 겁니다.

 

(마 7:29, 개역)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자 보세요 결과적으로 서기관과 같지 않다고

차이가 난다고

다르다 라고

 

나옵니다.

 

네 맞습니다.

서기관과 같으면 안 죽어요 예수님은

왜 서기관과 다른 소리를 하셨을까요?

 

자 예수님 자체가 좁은 문이다 라고 구원의 길이다 라고 했잖아요

그럼 다르기에

서기관 자체가 뭐가 됩니까? 넓은 길이요 멸망의 길이다는 겁니다.

 

사람을 존재로 안 보고 기능으로 봐 버리는 겁니다.

 

사건이 떴기에

증상물로만 나타날 뿐이다 말이죠

백날 존재라고 우겨도 소용없어요

존재는 선택권이 있다고 우기지만

 

기능에서는 아예 없어요

그냥 그 나무에 그 열매로만 나와요

 

그러니 나무도 열매도 존재로 해석하는 자는

이미 자기 자신을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로 이미 해석하고 있는

유대인과 지금 다를 바가 없는 같은 넓고 큰 길인

멸망의 길에서 나온 해석의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니 거짓 선지자 이야기를 안 하실 수 없는 겁니다.

너희들을 다 속였구나 라고

바리새인이 이미 유대인들의 정신을 말이죠

 

자 그럼 예수님은 이렇게 엉터리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엉망진창 만들어 놓은 것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겠다고

마치 베드로는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겠다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존재가 아닌

이스라엘 기능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시 되찾아서

 

누구에게 준다?

 

유대인 선민이라고 우기는 자칭 좋은 나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이

저 사마리아인은 저 개 같은 이방인은 원래 나쁜 나무였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어찌나겠냐

나쁜 나무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열매가 나겠냐

 

라고 했던 그 나쁜 나무에서

세상에 아름다운 열매인 새 이스라엘이

이방인이 새 이스라엘 신부로써

신랑을 외치는 기능을 다 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맞습니다 맞고요

지혜 지식을 추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좁은 길이다 말이죠

 

이 십자가의 지혜에서

다 이루셨다에서 나오는 증상물이 바로 좋은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인

나무로 열매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라는 사건을 거치지 않으면

불교에서도 다 아는 이야기를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중언부언 하듯이 의문의 반복으로만 할 뿐인 거죠

 

마침도 없이 말이죠

 

좋은 나무라고 우기는 유대인에게서 인애와 자비가 안 나와요

율법 지키면 지킬수록 비판만 더 나온다 말이죠

 

탕감 받은 적도 없는데

죄인이 된 적도 없는데

의인만 건강한자만 추구하는데

 

어떻게 탕감 받냐 말이죠

 

많이 탕감 받을수록 많이 사랑한다 말이죠

이 말이 바로

열매로 나무를 알고 나무로 열매를 아는

사랑의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문자 포착해서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다 말이죠

 

십자가의 사건을 거쳐서

열매로 나무를 알고 나무로 열매를 아는 이 관계가

증폭이 되어서

 

씨 뿌리는 비유로 그 사랑의 깊이 넓이 높이 길이가 점점점 더해가듯이

 

또 증폭이 되어

 

(요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 관계성이 부정의 부정으로 표현되고 있다 말이죠

 

예수님과 무관하게 유대인들이 예수님 필요 없이도 좋은 나무로 여겼던 것이

결국은 다 엉터리 멸망의 길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 선지자는 결국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무관하게

좋은 나무가 되어라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라를 불교 땡중도 다 아는 이야기를 할거 아니겠냐 밀이죠

 

그럴꺼 같으면 말라꼬 성경에 기록하셨겠냐 말이죠 성령이

 

성화론자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자가 전혀 아님을 더더욱 새록 새록 느끼게 된다 말이죠

 

아이구 저 거짓 선지자와 저 멸망의 길에서 빼내 주심에 소름이 쫘악 돋을 정도로

너무 너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마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자 그렇기 때문에 성화론자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오늘날 거짓 선지자 이거든요

산상수훈을 그들이 왜 그렇게 강조를 하고 자신만만해 하는지

실천했다고 여기니까 말이죠

 

집을 반석 위에 지으라를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없어요

예수님이 반석 아닙니까

 

예수님이 길이고 예수님이 좁은 문입니다.

이게 실천이 가능한 말이 아닙니다.

 

주여 저는 못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죄인의 자리에서

환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를 봐야 합니다.

 

어떻게 다 이루었는지 말이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치고

주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는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주님을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했고

주님의 길로써 두 발로 걸었으며

 

주님의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로 맺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썩 물러가라

 

제가 주님을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니깐요

사탕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

 

 

바로 예수님이라는 의의 문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그 문

그 간극

그 길

그 나무와 열매의 관계

그 사건에서

 

사탄이 격동하면서 견디질 못하는 지혜를 펼치시는 겁니다.

 

천한 계집종이 왕비가 되고

왜? 사람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로 인해

기뻐하심을 입게 되었거든요

우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 기뻐하심을 입게 되었다 말이죠

 

그리고 배고픈 거치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 배부르게 되니

 

거지 나사로와 지옥 간 부자는 이것은 인간의 실천 문제에서 떠난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이다 말이죠

 

즉 약속이 이 둘을 이렇게 갈라놓는

약속 성취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왜? 기뻐하심을 입었기에 말이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을 예수님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포하시는 이유는

 

실천의 대가들인 유대인에게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심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졸지에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까발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처럼 발가벗고 다니듯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인 나무에 달아 죽여 놓고

하나님 핑계 대면서 저 봐라

하나님이 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 아니냐

우리를 말렸을 거 아니겠냐 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게 아니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서 자기 얼굴에 누워서 침 뱉기 하듯이

 

이 십자가라는 거울을 반사시켜 보여주시는 겁니다.

 

가는 곳마다 이 거울이 따라다니면서 비추어 보여주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사기치노 라고 자신들의 꾀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도록 하시니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고 만 거다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거울로써 거리끼는 걸림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말씀이어야 하는데

 

졸지에 산상수훈을 실천해 버리니까

동일시 합일시 해 버리니까

 

 

도리어 남을 정죄하기 바빠지더라 말이죠

 

번제와 제사를 드리고 있지

 

인애와 자비를 구하지 않더라 말이죠

 

아하스 왕처럼 나는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노라

 

쪽팔려서 성화를 해야만 하겠노라 라고

그래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니까 라고

 

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식인종이 아니다 라고 우기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써 과시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마귀에게 철저하게 갇힌 바 되었기에

 

예수님 홀로 빼앗기지 않겠다고 나서시는 겁니다.

이 산상수훈 곧 의의 돌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인간의 완악함과 죄악을 다 멸하시고자 말이죠

 

이 우리 마음 속의 우상인 산당을 부수는 뜨인돌이 시온에서 나왔다는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하듯이

 

이 좁은 문이 떠서 넓은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을

좁은 문이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면서

 

마음껏 기뻐하심을 입었기에 마음껏 뭘 해도 죄인으로써 죄인의 자리에서

의사를 신나게 외칠 수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자랑하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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