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 죄사함을 받았다는 참람죄와 악한 생각 (마 9, 1- 8)

(마 9:1, 개역)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 9:2, 개역)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3, 개역)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개역)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개역)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9:7, 개역)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마 9:8, 개역)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9:1, 새번역) 『예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다를 건너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마 9:2, 새번역)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마 9:3, 새번역) 『그런데 율법학자 몇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마 9:4,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마 9:5, 새번역)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마 9:6, 새번역)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시니,』
(마 9:7, 새번역)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 9:8, 새번역)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지난주에 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심을 통해서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진짜 귀신 들린 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역시나 마찬가지로 중풍병이라는 죄악을 물리쳐 죄사함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희년 완성에 사람들은 참람 죄라고 예수님에게 죄악을 뒤집어 씌우는
죄악의 생각 곧 악한 생각을 들통내시고 있습니다.

중풍병이라는 죄악을 물리치셔서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도리어 참람죄로 고발하여서 나중에는 끝내 예수님을 죽이는 이 악한 생각을

두 언약의 대조처럼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의 대립으로써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소욕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단순히 한쪽만 나타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악한 생각이라는 비언약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언약인 곧 약속입니다.

복음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너무 너무 간단해서 어린아이도 다 알 정도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 너무 간단해서 다들 무시하기 때문에
너무 너무 어려워서 불가능해진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갈 정도로 불가능하다 말이죠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같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로 태어난 자는 기도하기를 실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꼭 어른들이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치 기도하는 자로 태어나지 못한자들이 기도하기를 실천할려고 하듯이 말이죠

믿음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이것이 출생의 비밀이지요) 믿을려고 믿음을 실천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괜히 출생의 비밀을 의식하는 자가 곧 믿음으로 태어난 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 믿음을 조건으로 갖출려고 믿을려고 한다 말이죠

오늘 본문에 바로 그 믿음이라는 불가능성을 예수님이 이야기 하십니다.
여기서 졸지에 갈려 버립니다.
인간이 종교성으로 믿고자 하는 마약(가능성)과
예수님만이 홀로 믿음의 세계를 몰고온 그 당사자 믿음 되신 예수님이
믿음이 뭔가를 소개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믿음이란 이 불가능성을 함께 누리는 겁니다.
마치 부정성을 함께 누리기 라는 책 제목도 있던데

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 이다 ㅋㅋㅋ

즉 불가능한 그 단절성을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데
자꾸 가능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독사의 자식들인 무녀의 자식 음녀의 자식들은 바리새인들이다 말이죠

즉 믿음은 예수님 외에는 모릅니다.
믿음의 세계인 천국의 주인 외에는 몰라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지키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재 소크라테스와 예수님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그 자체로써 천국을 알려주시는 이 공적인 임무에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그에 반해 인간들 중의 천재들은 바로 실천가들입니다.
즉 천국에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실천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 실천의 모범자로써 산파 역할을 하는 자청자로 나서는 거죠 실천가로써 말이죠

그런 바리새인 그런 사두개인이 오늘 본문에 악한생각을 하는 자로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 규정이 되어버린 겁니다.
저 기특하기 짝이 없는 실천가들의 실천력을 악한 생각 이라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 라고 규정을 해 버리셨다 말이죠

바로 이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라고 하셨듯이 말이죠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라는 말씀을
반드시 육으로 해석해서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려고
어떻게 해서든 가능성으로 바꿀려고 한다는 점이 바로 악한 생각이요 음란한 세대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유혹 곧 음란이다 말이죠

야동에 빠지고 사창가에 살고
창녀로 몸을 파는 것이 음란이 아니라
더 확대 시켜 버립니다.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가는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조차도 음란한 자로 규정하시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죄악을 물리치시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서
너는 죄사함 받았다고 하시니까

이것을 인간들의 신학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즉 가능성에 맞지 않는다고
즉 음란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 맞지 않는다고
도리어 예수님을 참람죄로

감히 하나님 외에는 죄 사할자가 없는데 너가 뭔데 죄를 사하냐 라고 참람하다고
규정을 하더라 말이죠
교리에 안 맞으니까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단이 될 수 밖에 없으니 말이죠

지난주의 예수님을 동네에서 쫓아내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하나님 아들이라면 이라고
하나님 아들에 대한 규정을 인간에게 검사 맡아라 라는 식입니다.

아 그런데 처음부터 삐걱 거립니다.

첫 번째 돌을 떡덩이 되게 해서 가난한 자의 가난을 해결하라는 겁니다.

자 과연 이런 마귀의 신학교리에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과연 
지성소의 휘장을 찢는 막힌 담을 찢고 쳐들어 오는 천국이 될까요?

종말을 확 잡아 땡겨서 하늘의 피를 이 땅에 뿌려
세숫대야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이 불가능성을 누릴 수 있겠냐 말이죠

악하고 음란한 생각은 바로 불가능성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라고 따지고 덤벼들고
정작 가능성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음녀인 사단의 회 인 자칭 유대인들은 절대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을려고
완악한 마음으로 율법을 더더욱 지키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찾아온 이 가능성을 절대로 놓칠수가 없다는 그 완고함에
자기 꾀에 자기들이 속아 넘아가는 누워서 침뱉기 이다는 겁니다.

유대교는 기적의 종교이거든요 기적 빼버리면 시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기적을 뻬버립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 기적인 만나를 먹고도 너희 조상들은 다 죽었다 말이죠

그러나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

또 상관이 나오네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러니 무슨 수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냐 말이죠
식인종 되어버리면 율법을 어기니까
그들에게서는 예수님이 도리어 악한 자 이다 라고 참람죄로 고소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율법을 건드리니까
죄사함을 건드리니까
신학 교리를 건드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드리니까 말이죠

지난주는 그래서 경제를 건드린 예수님을 쫓아내버렸듯이
오늘은 참람죄 즉 종교는 죄 로 장사를 합니다.
죄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허락도 없이 죄를 사해 버리면
손님 다 빼앗길 판국인데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천박한 수준이 아니라
유대교 이다 말이죠
수천년 내려오는 모세의 율법이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들에게서는 이 정통이 걸린 수천년 걸려 내려오는
신앙 문제가 걸려 버린 문제인데

예수라는 작자에게 이 구약의 말씀을 내어줄수가 없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말이죠

목사에게서 교회 문제는 목사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복음은 니 마음대로 해도 이 교회조직만큼은 가만히 내어버려 둘 수 없다고
사활을 걸고 덤벼 들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께서 깨작 깨작 그들의 속을 빡빡 긁어대시는 겁니다.

어떻게?

(마 9:3, 개역)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개역)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속으로 참람하다 라고 한 그 악한 생각을

생각이다 말이죠 속으로 속으로

아 그런데 그 속에 있던 악한 생각을 다시 밖으로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니 방금 이 생각 속으로 했었제? 맞제 맞제?
아주 아주 약을 바짝 올립니다.

(마 9:5,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죄사함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라는 말

어느 것이 더 쉽겠냐 라고 약을 바짝 올려요

즉 일어나 걸어라 라는 말은
사두개인의 귀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현대판 다니엘 사건처럼 가능성으로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기적을 가능성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니까 말이죠

아 그런데 일어나 걸어라 라고 하지 않고
일부러

일부러

약을 바짝 올릴려고

일어나 걸어라 라는 말은 중풍병자에게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고
설사 실패 해도 중풍병자야 너무 낙심하지마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라고

낙담 보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종교꾼 무녀들 독사의 자식들 음란한 세대
곧 무당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말이죠

아 그런데 이것은 이것을 훨씬 넘어서버려서
아예 불가능한 말을 해 버리시는 겁니다.

이래야 마귀가 벌떡 뛰면서 반발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머리카락을 발을 씻은 창녀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장사를 치르어야

제자들이 반발하고 주변의 모든 자들이 반발한다 말이죠

왜? 믿음 곧 불가능성을 확 앞당겨 땡겨버렸기에

자신들은 가능성으로 접근할려고 하는데
번제와 제사로 접근할려고 하는데

이 여인은 불가능성을 확 잡아 땡겨서
인애와 자비를 땡겨버리더라 말이죠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죄사함을 다 이루셨다 말이죠
이 또렷한 십자가의 피 용서가 있는데
여전히 인간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천국에 들어갈려는 그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무녀의 자식에게서 배운 것들을 시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일체 양보가 없으신 겁니다.
오직 자신의 피 흘리심 외에는 없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게 되면
세 번 네 번 다시 안 친다는 보장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탈락입니다.
다시 변화산에 나타나서 제발 예수님 죽어 주세요 별세해 주세요 라고
비로소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기념 이름이 박힌
이 불가능성을 누리게 됩니다.

얼마나 또렷하면 단 번에 모든 죄를 다 사 했겠습니까?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사랑 곧 피 용서를 누리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피 용서인 십자가를 외치는 증인이지
가능한 것을 외치는 무녀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니 현대판 다니엘이 나와도 속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것이 옳게 되어버리면

십자가는 또 단회로 단번에 끝난 게 아니라
또 의문의 반복처럼
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또 오셔야 하고
도대체 몇 번을 와서 몇 번을 십자가에 달려야 마침이 되냐 말이죠

첫 번째 아담은 지나가는 사라지는 것이기에
단 번에 끝난 십자가의 피 용서의 또렷함을 원치 않고 자꾸 또 달래요 또 또 또

그런 모세 탈락입니다.

하늘의 것을 온전히 사모해야지
땅의 것을 바라면 그것 조차도 썩어 들어가 좀이 든다 말이죠

주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이십니다.

여기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바로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예수님을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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