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살인)? (사 66, 1-24)
살인과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사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시 69:9』
(시 69:8, 개역)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시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 6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4, 개역)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 66:5, 개역)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66:6, 개역)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사 66:7, 개역)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사 66:8, 개역)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사 6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사 66:10, 개역)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사 66:11, 개역)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사 66:12,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사 66:13, 개역)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 66:14, 개역)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 66:15, 개역)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사 66:16, 개역)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사 66:17, 개역)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66:18, 개역)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사 66:19, 개역)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사 66:2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사 66:21, 개역)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6:2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사 66:23, 개역)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사 66:24, 개역)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사 66:1, 새번역)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받침대다. 그러니 너희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짓겠으며, 어느 곳에다가 나를 쉬게 하겠느냐?"』
(사 66:2, 새번역) 『주님의 말씀이시다.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겸손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나를 경외하고 복종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내가 좋아한다."』
(사 66:3, 새번역)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 오히려 가증한 우상숭배를 즐겼다. 가증한 우상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였다.』
(사 66:4, 새번역) 『그러기에, 나도 나의 뜻대로 그들을 혹독하게 다루어, 그들이 겁내는 것을 그들에게 들이닥치게 하겠다. 내가 그렇게 불렀으나 그들이 응답하지 않았으며, 내가 그렇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보는 데서 악한 일을 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골라 하였기 때문이다."』
(사 66:5, 새번역) 『주님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를 미워하는 백성은 너희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너희를 따돌리며, 이르기를 '주가 영광을 드러내어 너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가 한 번 볼 수 있게 하여 보아라' 하고 말하나,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사 66:6, 새번역) 『성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오며, 성전으로부터 소리가 들려 온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님의 대적들에게 보응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사 66:7, 새번역) 『시온은 진통이 오기도 전에 해산한다. 해산의 고통이 오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다.』
(사 66:8, 새번역) 『누가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길 수 있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이 오자마자 아이들을 낳았다.』
(사 66:9, 새번역)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 나오게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66:10, 새번역)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사 66:11, 새번역) 『이는, 너희로 하여금,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하고, 또한 너희로 하여금, 풍요한 젖을 빨아들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사 66:12, 새번역)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 오게 하겠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사 66:13, 새번역)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 66:14, 새번역) 『너희가 이것을 보고 마음이 기쁠 것이며 너희의 뼈들이 무성한 풀처럼 튼튼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권능이 종들에게 알려지며,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진노하실 것이다.』
(사 66:15, 새번역) 『보아라, 주님께서 화염에 싸여 오시며, 그의 병거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올 것이다. 그의 노여움이 진노로 바뀌고, 그의 질책이 타는 불길이 되어 보응하려 하신다.』
(사 66:16, 새번역) 『주님께서 불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며, 주님의 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니, 주님께 죽음을 당할 자가 많을 것이다.』
(사 66:17, 새번역)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하며, 몸을 깨끗하게 하고, 이교 제사를 바치는 동산으로 들어가서, 우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서서 돼지고기와 부정한 짐승과 쥐고기를 먹는 자들은, 모두 다 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사 66:18, 새번역) 『"내가 그들의 일과 생각을 알기에, 언어가 다른 모든 민족을 모을 때가 올 것이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사 66:19, 새번역) 『그리고 내가 그들 가운데 징표를 두어서, 살아 남은 자들을 ㉠스페인, 뿔, 활을 잘 쏘는 룻, 두발, 야완 민족들과 나의 명성을 들은 적도 없고, 나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게 보낼 것이며, 그들이 나의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알릴 것이다. / ㉠히, '다시스'』
(사 66:20, 새번역) 『마치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성전에 바칠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서 가져 오는 것과 같이, 그들이 또한 모든 민족들로부터 너희의 모든 동포를 나 주에게 바치는 선물로 말과 수레와 가마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서,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66:21, 새번역) 『"그리고 나도 그들 가운데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으로 삼을 자를 택하여 세우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66:22, 새번역)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늘 있듯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사 66:23, 새번역)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마다, 모든 사람이, 내 앞에 경배하려고 나올 것이다."』
(사 66:24,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다." 그들을 먹는 벌레가 죽지 않으며, 그들을 삼키는 불도 꺼지지 않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들을 보고 소름이 끼칠 것이다.』
(막 9:48, 새번역)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그, '게헨나' ㉢사 66:24 ㉣그, '그들의 벌레들'』
(행 7:49,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 ㉠사 66:1; 2』
(마 5:34, 공동)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 ㉠이사 66:1.』
(막 9:48, 공동)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이사 66:24.』
(행 7:49, 공동)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 ㉠이사 66:1-2.』
(살후 1:8, 공동) 『㉠주께서는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느님을 거부한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 ㉠시편 79:6; 이사 66:15; 예레 10:25; 출애 3:2.』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48, 새번역)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행 7:49,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 ㉠사 66:1; 2』
(행 7:50, 새번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행 7:51, 새번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행 7:52, 새번역)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제목에 갑자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인 이라는 의미가 들어갔습니다.
아니 주의 전을 향한 열심이 어떻게 살인으로 이어질까요?
우리가 신약의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바리새인 곧 유대인과의 출동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지만
오늘 구약의 이사야 당시에는 완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 곧 참선지자들은 마치 예수님이 무시받는 상황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냥
주의 전에 향한 열심으로 인해 살인이 벌어진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의 가장 높은 선함이 도리어 정반대의 살인과 연결이 되다니?
말이 됩니까?
이것을 마치 소를 번제로 바치고자 함이 살인과 같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본인이 율법을 통해서 그렇게 바치라고 했다 말이죠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살인이라니?
(사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아니 레위기를 통해서 거룩할려면 이렇게 하라메요? 하라메? 그캐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모세 언약 때에는 그랬죠
그런데 다윗 언약 때에는 갱신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처럼 번제와 제사가 도리어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앞의 글 즉 녹음 내용에서 골로새서를 언급하면서 강조했지요
모양은 있는데 유익이 없는 겁니다.
지혜 있는 모양 즉 지혜의 껍데기는 갖추었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결과가 안나타난다는 겁니다.
(골 2:23, 개역)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딤후 3:5, 개역)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 개역)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개역)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개역)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개역)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개역)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6, 개역)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개역)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 3:8, 개역)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딤후 3:9, 개역)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10, 개역)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딤후 3:11, 개역)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딤후 3:12, 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3, 개역)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4, 개역)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개역)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개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개역)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어라 그런데 오늘 본문처럼 경건의 모양을 갖춘다는 것이 도리어 살인 곧 핍박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딤후 3:12, 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진짜 경건은 곧 실상이지요 핍박과 이어집니다. 곧 살인 당함입니다.
모양만 갖추는 그림자는 반드시 실체, 실상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하나님의 기뻐하는 금식인 유일한 금식인 예수님의 금식은
인간의 금식에 의해서 살인 당하는 죽임 당하는 금식입니다
그러니까 금식이지요.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금식 아닙니까
그것을 예수님에게 다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에게서는 금식의 완성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는
율법의 완성인 것이지요 금식의 완성.
인간의 금식은 그냥 죽는 척만 하고
옷을 찢는 척만 하지 육체를 찢지 못해요
그렇게 맨날 모양만 갖추다 보니 오히려 남의 육체는 잘 찢는 거죠
차라리 모양을 갖추지 않았다면 남의 육체를 잘 찢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금식이 먼저 떴기에
모든 인간은 금식을 하던 안하던 손할례이든 무할례이든
진짜 할례인 마음 판의 할례가 아닌 것은 매 마찬가지이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모두다 발 벗고 나서는 겁니다.
못 박아라 못 박아라 못 박아라
이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는 이 경건의 모양 즉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모양만 대따 갖추었지 유익 곧 경건의 능력인 남을 사랑할수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수
꺾으신 뼈를 살려내고자 다윗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라는 4종 세트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겁니다.
진짜 회개 진짜 눈물 진짜 금식 진짜 기도는
도리어 꺾으신 뼈로 인해 다윗이 다시 살려냄을 당하는
다윗은 꺾으신 뼈를 죽였으나
꺾으신 뼈는 다윗을 도리어 살려내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말이죠
죽은 다윗을 살려내는 것이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겁니다.
결국 율법의 모양 갖추기 라는 살인과
율법의 완성인 마침 이라는 다시 살려내심은
반드시 맞물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 것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기에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행하면 행할수록
더더욱 예수님을 미워하는 [살인 의지]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율법과 선지자는 그 지킨 것 그 행한 것 그 실천한 것을
불도져로 밀어버려서 일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처음자리라는 본래의 자리로 만드시는 거죠.
안그러면 거짓선지자의 거짓 붓으로 기록된 율법의 모양만 갖추는
소위 개인구원에 빠지는 겁니다.
모든 종교가 마약인 이유는 즉 666 함량미달인 이유는
개인구원 개인천국 개인축복에 빠진 겁니다.
그 개인이라는 자기를 위한 것이 바로 우상 아닙니까?
시선을 남에게 갈수가 없어요
그러니 우리는 뭘해도 예수님을 살인할 수밖에 없는 죄 아래 갇힌 겁니다.
번제를 드리면 드릴수록 그냥 바칠수가 없잖아요
소를 바치든 양을 바치든
요즘은 돈을 바치든 바친다 말이죠
그러니 살인 이다는 겁니다.
우와 예수님의 해석은 너무 확대해석으로 억지로 엮은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레위기의 정결제사는 결국 그림자로써
실상인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행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식하게 어떤 목사의 사모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성경에 기록했다 그러니 자기 말이 맞데요 글쎄
그 본문을 점점 글자를 크게 또 더 크게 또 더 크게 빨간 글씨로 적었다는 것은
그게 바로 살인이다는 겁니다.
그건 그림자입니다. 실상을 말하는데 있어서
이제는 소를 바칠때에 살인이 벌어지는 것이
졸지에 예수님이 그 소로 오시고
양으로 오실때에
인간들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은 죄로 인해 소를 바치거나 양을 바칠 때에
죽음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전가 시킬 뿐이지
자기는 안 죽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졸지에 의문의 반복이 되다 보니
본래의 취지 보다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모양 갖추는 게 그게 어디냐 라고 맞아요
개인 구원 개인 문제에서는 그렇다 칩시다
문제는 항상 타인과 관계된 입장에서는 하나도 유익이 안된다는 겁니다.
다윗이 개인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는 그렇다 칩시다
율법의 4배나 갚으라를 통해서
나단 선지자가 그 놈이 너다 라고
자신의 잘못된 방향을 돌리는데
즉 개인의 죄를 깨닫는데 까지는 유익이라고 볼 수 없지만 유익이라고 칩시다
문제는 남을 살리는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도리어 개인의 구원이 즉 개인의 죄 깨닫는 모양이 개인의 유익이라고 쳐 버리는
그 개인의 구원이
문제는 예수님 곧 실상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것에는
인간은 그저 무지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거죠
이것이 방금 언급한 디모세 후서에도 나옵니다.
(딤후 3:6, 개역)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개역)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 3:8, 개역)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딤후 3:9, 개역)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즉 남의 집이라고 항상 남과의 관계성에 놓여졌으니
개인 문제로 끝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자가 바로 거짓교사로 표현된 두 사람 곧 얀네와 얌브레 라고
모세를 대적한 자 곧 애굽의 술사죠 지팡이를 뱀으로 만든 것으로 대결했던 자들인
거짓선지자에 해당되는 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이스라엘 곧 저들 거짓교사들의 꾀임에 빠진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 말이죠
출애굽 전체의 사건으로 볼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중간에 탈락한 자들과 함께
거짓증거로 모세를 방해했던 자들이 여기 얀네와 얌브레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삯꾼 목자들이겠지요
자 그럼 아까 그 사모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뻘건 글씨로 살인을 펼치는 그 거짓교사처럼
이들은 자기 개인 구원과 연관된 입장에서 거룩을 살아 있는 것으로 봤고
그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와 양은 당연히 죽어 마땅한 것으로 봤찌
자기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로 못 봤던 겁니다.
물론 처음때는 그랬죠
그런데 점점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무감각해 질 수밖에 없고
아예 당연하다고 보는 겁니다.
살인이 말이죠
누가 처음자리를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회복 할 수 있는 상태가 무능하게 되었다는 말은
도리어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데 달인들이 되어버린 상태인 거죠
그래서 앞의 글에서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환전상을 엎어버리고
소 양 비둘기 들을 쫓아내는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때에
과연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이 살기가 안 피어나겠냐 말이죠
살기가 넘치는 강도의 소굴인데?
오늘날 교회는 그야말로 살기가 넘쳐요
자기 개인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들은 다 죽여버려요 글쎄
성화론자들 보세요 얼마나 살기가 넘치는지 원
눈에 레이져 광선이 막 나와요 찌찌지찍 구워버린다니깐
우병땡의 레이져 발사 이라니깐요
자 그런데 도리어 진짜 경건은 도리어 핍박당함과 죽임을 당함으로써 연관 지음으로써
이것도 말이 안되게
다들 아마 에이 그럼 누가 구원 얻습니까 라고 다들 개인 구원 노리고 다가왔듯이 맞아요
개인 구원 없어요
에이 경건이 핍박당함과 죽임당함으로 연관되면 에이 그럼 누가 경건하겠습니까 라고
다들 자기 구원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핍박당함과 죽임당함을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 자기구원과 개인구원과 연관된 성전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소와 양을 바치는 자기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소와 양은 죽은거죠
아까 그 사모처럼 거룩은 살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모양만 있고 유익이 없어요
개인구원이 목적이니까
그런데 항상 남과 엮여져 있기에
자신의 거룩을 남을 위해서 온전히 다 주고 죽는
저 소
저 양의 처지에 놓여지게 된다면
그런 구원 그런 경건 그런 금식은 과연 원할까요? 원치 않을까요?
그래서 인간들은 우상과 섞어서 하나님을 믿게 되니
경건도 금식도 회개도 기도도 모조리 다 자기 구원을 위한 중심으로 다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을
주님이 이런 원수들을 위해서 다른 성전 곧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준비하신 겁니다.
행함이 아닌 믿음에서 나온 성전 말이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그런 성전과 연관된 모든 것들은 다 살인이지만
경건의 모양 뿐이지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은
도리어 진짜 거룩 진짜 경건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살인을 당하는 성전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살인을 당하는 성전을 싫다는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무소부재 하여서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안 무너지는 영원성
하나님과의 동일성
그래서 그것을 선으로 보고
그 나머지는 악으로 취급하는
그래서 졸지에 예수님이 악으로 취급당하고
바알세불 걸린 왕으로써 핍박 당하고 살인을 당하는
이것이 진짜 경건임을
사도바울 본인이 핍박해 봤으니
이 핍박한 당사자가 우와 바로 저것이 진짜 경건이구나 라고
경건의 비밀을 깨닫게 되더라 말이죠
성령 때문에 말이죠
그럼 그 이전에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지식을 쫓지 않고
그저 하나님에 대한 열심만 나타낸 모양만 갖추었지
유익 곧 남을 구원 시키지도 못하는 가짜 복음으로써
경건의 모양만 대따 갖추었다 라고
바로 얀네 와 얌브레 와 같은 그저 종교 지도자 거짓교사 거짓선지자 였을 뿐이다는 겁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니 나만 남았다 라고 경건의 모양은 갖춘 것 맞아요
그런데 남을 살려내 보라 말이죠
그건 못해요
그럼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 일 뿐이다 말이죠
이스라엘 선지자 맞으면 뭐합니까 그건 천재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력이 아니라
공적인 자유를 외치는 공무원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세밀한 음성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남을 살리는 무시받는 음성
핍박 당하는 음성
살인 당하는 음성으로 말이죠
소와 양을 막 죽일 줄만 알았지
그 밑고 끝도 없는 무한반복의 살인만 있을 뿐이지
개인 구원을 위해
자기 죄 씻겨짐만을 위해 말이죠
정작 소와 양의 입장에서 단 한 번에 죽고 없어지는
그 단회적인 단번에 딱 한번의 죽음은 생각해 봤냐 말이죠
그러면 주님이 말라꼬 이 소처럼 이 양처럼 죽임 당하러 오셨겠습니까?
영원성 같은 큰 지진 큰 태풍 큰 벼락으로 각인되듯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평생에 단 한번 격을까 말까 한 로또 벼락처럼 말이죠)
늘 무시당하면서 눈에 보이는 나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당하는
그 번제와 제물이 되는
단번도 아닌 또 하고 또 하고 밑고 끝도 없이 의문의 반복인
그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구원하고자 또 죽고 또 죽고하는
이 무시받는 세밀한 음성 곧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 그 무시받는 참성전으로 오시겠다는 겁니다.
딱 두 세계 뿐입니다.
살인자의 세계이냐 왜? 주의 전을 사모하기 때문에 주님을 삼키는
아니면 믿음의 세계 곧 살려주는 세계냐? 화목제물이 되신
자 그렇다고 자기가 경건의 모양에서 벗어나
참된 경건을 이루겠다고
일부러 핍박 당하고
일부러 살해 당하는 위치에 의도적으로 서겠다 라고 하는 것도
경건의 모양만 껍데기만 갖춘 것이지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훼방하기는 매 마찬가지인
애굽 술사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거짓교사 인 겁니다.
우리는 뭘해도 죄인인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 일 뿐입니다.
가해자 이지 피해자 일수가 없습니다.
죽은자를 찾습니다 라고 본인이 외쳐놓고 본인이 죽은자를 찾으면 죽여버리는
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거죠
아무리 발버둥쳐도 본인은 죽은자가 될 수가 없어요
그것 조차도 경건의 모양만 갖출 뿐이지
남, 타인, 이웃을 생각해서 나온 것이 아닌
자기 개인을 염두한 사고방식이라서
여지껏 막살면 안된다 라고 거짓교사 노릇을 하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인간은 뭘 해도 안 됩니다.
죽은자가 스스로 될 수 없고
핍박 당하는 자가 스스로 될 수가 없고
살인 당하는 자가 스스로 되어서
경건의 능력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그건 개인이지
남과 이웃과 엮여지지 않습니다.
성령에게 맡겨라 말이죠
그러면 이웃이 남이 아닌 내 손에 죽는
나는 뭘 해도 살인자 밖에 될 수 밖에 없는
이 악한 세대에 갇혀버렸다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게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남 곧 이웃을 살리는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인 유일하게 기뻐하시는 금식인 단 한 사람 예수님만의 금식 뿐이듯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내 밖에 몰라요
오죽 하면 신땡지에서 요즘 세계 평화의 날을 심심하면 기념해요
그게 거짓입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심심하면 외쳐요
그게 거짓 곧 경건의 모양새만 대따 갖추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얼마나 유혹꺼리로써 온갖 선한 이미지를 다 갖추는지
과거의 다락땡도
오늘날 신땡지도 사람들이 잘 못하는 약점을 파고들어서
모양새만 갖추어서 그것으로 광명한 천사 노릇으로 미혹하는데
공감능력이 뛰어난 여자들이
뱀에게 먼저 유혹 당했듯이
다 빠져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아담에게 있으니
예수님이 일부러 마귀를 깔고서
거짓선지자를 깔고서
무시받는 세밀한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성전으로
소 양 비둘기를 다 쫓아내시고
이런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다시 짓는 성전을 일으켜 세우겠다 라고 오실때에
다들 살인해 버리는 겁니다.
그 살인 받고 다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이
진짜 경건, 남을 살리고자 하는 성전
남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이자 마침인 성전이
무슨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감히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리스도의 원수에 대한 사랑인 율법의 완성을 막고 끊을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신땡지가 기존의 교단들 곧 정통이라고 우기는 그들과의 차이로써
자신들의 경건을 갖추면 저절로 경건하겠냐 말이죠
둘다 마귀 집단들끼리 서로 자기가 더 높냐 라고 설치는 판국에
남을 살리지는 못하는 것은 둘 다 똑같으니까
둘 다 마귀집단이다 말이죠
아니 거짓선지자 말 듣고 북이스라엘이 실로암 망대처럼 무너져 깔려 죽었다고 해서
저들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거냐 말이죠?
그 다음 차례는 역시나 너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거짓선지자 말 안 따랐다고 저절로 경건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남(이웃)을 살리지 못하는 이상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못 되는 이상
역시나 거짓선지자와 다를 바 없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한 가버나움이다는 겁니다.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중간에서 삥이나 뜯는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외식 곧 위선 즉 경건의 모양새 껍데기만 대따 갖추었을 뿐이다는 겁니다.
자 이런 자에 비해서 상대적인 한 세트를 구성하는 자들이 있겠죠?
(딤후 3:12, 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3, 개역)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4, 개역)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개역)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개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개역)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냥 단순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만 외울게 아니라
바로 감동이란 구체적 보편성을 말하는게 아까 말한
아니 본문 윗구절에도 언급된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는 그 껍데기 경건을 갖추고자 하는 바람에
내 손에 의해 살해 당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내 손에 의해 죽임 당한
그 진짜 경건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이
도리어 그런 원수를 용서하시고자 화목제물이 되신
핍박자는 나요 살해자는 나이고
진짜 경건은 저분 예수님이고 진짜 남을 사랑한 이웃사랑 실천의 완성은 저분 예수님이
살해자인 나를 위해
핍박 당하시고 죽임 당하심으로써
나의 질병을 대신 지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남을 살리는 이 유익만 제대로 창출해 내신
이 새 일의 완성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의미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써
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배우는데 유익이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진짜 현실이고 실제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꼭 성화론자들이 좋아라 하듯이
거짓교사들이 꼭 저런 경건의 모양새만 껍데기만 갖추도록 하고자
막살면 안된다는 식으로 또
개인 구원
개인 경건으로 빠지도록 하고자
이런 구절들을 무지 무지 강조를 한다는 거죠
이 내용으로 사건이나 충돌을 곧 십자가 사건을 발생시키지 못해요
즉 남을 살리지 못하고
그저 개인의 경건으로만 끝나요
타인과의 관계에 놓여버리면
그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막살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만 말하는
바로 그것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역시나 나는 살인자임을 부끄럽게 여기는 게 아니라
더 자랑해요
저 세리 살인자 보다 낫다고?
둘 다 마찬가지 심판받아 마땅한 자 인데!
한 쪽 강도는 예수님을 보고 참 경건 참 성전을 보고
개인구원 따위는 없고 저분이 구원 받아야 한다고 비로소 외치는데
다른 한 쪽 강도는 때려죽어도 끝까지 개인 구원을 외치다 보니
스스로 자살하듯이 죽는 예수가 뭘 남을 구해?
자기도 구원 못하는 판국에?
바로 이것이 인간이 끝까지 우상적인 자기 구원을 손 못 떼는 이유인 겁니다.
가룟유다의 자살도 마찬가지인 거죠
끝까지 자기의 소원인 하나님 나라가 회복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그럼 뭐냐 말이죠?
자기 눈에만 덜 회복 된 거죠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말이죠
그런 이스라엘 예수님 조차도 회복 안해요
이미 다 완료되었거든요
사람의 손으로 짓는 성전은 회복은커녕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허물어 뜨려 버려야지요
왜? 실상이 왔으니
그림자는 누락 되어야 하니까 말이죠
이 성전은 결국 인간의 신체성입니다.
인간의 몸은 예수님의 몸이 완성 되어 버린 이상
누락을 보여줄 뿐이다 말이죠
오늘날 눈에 보이는 교회도 누락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데
가짜 교회일수록 역사와 정통과 그딴
모양만 대따 갖추고
그 모양새 갖추기 위해서
도리어 남을 살해하는 자로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 것은
이미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 이미 다 완성 되었기에
누락 시키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이스라엘을 이미 다 완성 했기에 말이죠
그럼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오늘날처럼
모양새만 대따 갖추는 식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것을 보고
우와 우리 또한 저들의 모습
얀네 와 얌브레의 모습이 거짓임을 보고
도리어 저들의 손에 죽어나가신 예수님처럼
그 예수님만을 바라본다는 이유로
저들로부터 핍박 당하고 죽임을 당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며칠전 주일 예배를 통해서
분명 앞에는 이사야 29장 앞 부분에는
슬프다 아리엘 이여 라고 했는데
뒷부분은 이스라엘은 구원받았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마치 로마서 7장 끝까지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하듯이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듯이 말이죠
아 그런데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그 어떤 중간의 연결점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무조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좀 전까지만 해도 3초 전만 해도 오호라 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했는데
언제 그랬냐 라듯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것처럼
오늘 본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초반부는 엉터리 성전인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없다 왜? 피가 가득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즉 원인이 없는
행함이 없는
오직 믿음의 세계에서는 결코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듯이
(믿음이란 오직 저분만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이다고 다 이루었다를 기뻐하듯이
저 분의 완성만을 보는 것, 나는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환자는 안되고 저분만이 의사임을 외치는 믿음만을 보는 것,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
(딤후 3:15, 개역)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바로 저런 배경을 깔고서 그 차이로 한 세트를 구성해서 말이죠
그 부분을 나누고 이사야서에서 에스겔서로 넘어갈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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