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 항상 있는 새 하늘 새 땅 과 영원한 제사장(참성전) (사 66, 1-24)


(사 66:2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사 66:22, 공동) 『그렇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내 앞에 남아 있으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그처럼 너희의 자손과 이름도 이어가리라.』
(사 66:22, 쉬운) 『“내가 내 앞에 영원히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 이와 같이 너희 이름과 너희 자손도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 66:22, 현대어) 『내가 만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의 무한한 창조력을 힘입어 끝없이 존속하는 것처럼 너희는 내 백성으로서 언제까지나 멸망하지 않고 이름을 떨치며 후손들과 함께 살 것이다.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약속한다.』

(사 6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4, 개역)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 66:5, 개역)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66:6, 개역)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사 66:7, 개역)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사 66:8, 개역)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사 6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사 66:10, 개역)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사 66:11, 개역)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사 66:12,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사 66:13, 개역)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 66:14, 개역)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 66:15, 개역)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사 66:16, 개역)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사 66:17, 개역)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66:18, 개역)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사 66:19, 개역)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사 66:2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사 66:21, 개역)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6:2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사 66:23, 개역)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사 66:24, 개역)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사 66:1, 새번역)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받침대다. 그러니 너희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짓겠으며, 어느 곳에다가 나를 쉬게 하겠느냐?"』
(사 66:2, 새번역) 『주님의 말씀이시다.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겸손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나를 경외하고 복종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내가 좋아한다."』
(사 66:3, 새번역)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 오히려 가증한 우상숭배를 즐겼다. 가증한 우상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였다.』
(사 66:4, 새번역) 『그러기에, 나도 나의 뜻대로 그들을 혹독하게 다루어, 그들이 겁내는 것을 그들에게 들이닥치게 하겠다. 내가 그렇게 불렀으나 그들이 응답하지 않았으며, 내가 그렇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보는 데서 악한 일을 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골라 하였기 때문이다."』
(사 66:5, 새번역) 『주님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를 미워하는 백성은 너희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너희를 따돌리며, 이르기를 '주가 영광을 드러내어 너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가 한 번 볼 수 있게 하여 보아라' 하고 말하나,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사 66:6, 새번역) 『성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오며, 성전으로부터 소리가 들려 온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님의 대적들에게 보응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사 66:7, 새번역) 『시온은 진통이 오기도 전에 해산한다. 해산의 고통이 오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다.』
(사 66:8, 새번역) 『누가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길 수 있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이 오자마자 아이들을 낳았다.』
(사 66:9, 새번역)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 나오게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66:10, 새번역)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사 66:11, 새번역) 『이는, 너희로 하여금,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하고, 또한 너희로 하여금, 풍요한 젖을 빨아들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사 66:12, 새번역)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 오게 하겠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사 66:13, 새번역)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 66:14, 새번역) 『너희가 이것을 보고 마음이 기쁠 것이며 너희의 뼈들이 무성한 풀처럼 튼튼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권능이 종들에게 알려지며,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진노하실 것이다.』
(사 66:15, 새번역) 『보아라, 주님께서 화염에 싸여 오시며, 그의 병거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올 것이다. 그의 노여움이 진노로 바뀌고, 그의 질책이 타는 불길이 되어 보응하려 하신다.』
(사 66:16, 새번역) 『주님께서 불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며, 주님의 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니, 주님께 죽음을 당할 자가 많을 것이다.』
(사 66:17, 새번역)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하며, 몸을 깨끗하게 하고, 이교 제사를 바치는 동산으로 들어가서, 우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서서 돼지고기와 부정한 짐승과 쥐고기를 먹는 자들은, 모두 다 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사 66:18, 새번역) 『"내가 그들의 일과 생각을 알기에, 언어가 다른 모든 민족을 모을 때가 올 것이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사 66:19, 새번역) 『그리고 내가 그들 가운데 징표를 두어서, 살아 남은 자들을 ㉠스페인, 뿔, 활을 잘 쏘는 룻, 두발, 야완 민족들과 나의 명성을 들은 적도 없고, 나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게 보낼 것이며, 그들이 나의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알릴 것이다. / ㉠히, '다시스'』
(사 66:20, 새번역) 『마치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성전에 바칠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서 가져 오는 것과 같이, 그들이 또한 모든 민족들로부터 너희의 모든 동포를 나 주에게 바치는 선물로 말과 수레와 가마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서,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66:21, 새번역) 『"그리고 나도 그들 가운데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으로 삼을 자를 택하여 세우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66:22, 새번역)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늘 있듯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사 66:23, 새번역)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마다, 모든 사람이, 내 앞에 경배하려고 나올 것이다."』
(사 66:24,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다." 그들을 먹는 벌레가 죽지 않으며, 그들을 삼키는 불도 꺼지지 않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들을 보고 소름이 끼칠 것이다.』

(막 9:48, 새번역)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그, '게헨나' ㉢사 66:24 ㉣그, '그들의 벌레들'』
(행 7:49,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 ㉠사 66:1; 2』

(마 5:34, 공동)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 ㉠이사 66:1.』
(막 9:48, 공동)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이사 66:24.』
(행 7:49, 공동)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 ㉠이사 66:1-2.』
(살후 1:8, 공동) 『㉠주께서는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느님을 거부한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 ㉠시편 79:6; 이사 66:15; 예레 10:25; 출애 3:2.』


지난주에 이사야 66장 초반부의 사람의 손으로 짓는 성전과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살인이라는 의미가 동원이 된다고 언급했지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킨다 라고 말이죠


오늘은 후반부 참성전의 참제사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롬 12:1,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거룩한 산 제사가 뭐냐 하면

너희 몸 이라고 했잖아요
즉 예수님의 피가 발린 몸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다 말이죠
그러니 우리 몸 자체가 졸지에 제물이 된 겁니다.

그러니 소를 바쳐서 살인과 같은 그런 의문의 반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는 겁니다.
자 이래 되면 또 인신제사가 논란이 되겠지요

실제로 성화론자들이 이삭이 제물이 된 것을 가지고
인신제사로 해석하는 성향과
더 나아가서 어떤 목사는 이 부분을 성도들이 아니다 그냥 교인들이 따라 할까 봐
아예 성경에서 빼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자신이 가르치는 자로써의 책임과 막중한 부담감을 표출 하더라 말이죠

참으로 다행히도
우리 몸을 제물처럼 바치는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예배는
육체를 바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 되면 또 의문의 반복이 되고
또 소를 바치듯이 살인을 하는 
자신을 살인하는 식이니까
염려 부뜨러 매시고
그렇게 걱정하는 목사는 얼마나 공부를 안한티를 팍팍 내서
(그런데 막상 그들이 천재다 말이죠 공부 엄청해요
공부는 죽는 짓이다 라고 할 정도로 자기부정을 위해서 해요
그래놓고 자기부정한 자기를 내세우는 걱정을 하는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목사로써 목사답게 목사다운 자가 되자는 다짐이 바로 살인이 된다 말이죠
그게 바로 죽은 제사이지 산 제사가 아닙니다.

성도에게 발린 피 곧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의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 곧 제물로 바치라는 말은
문제는 성전이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성전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없어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교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요
살인자들의 모임인 아지트 본부 이다 말이죠

참성전은 예수님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제사의 제물
곧 거룩한 산 제사의 제물로 바친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 발린 몸으로써 이 피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산 제사요
영적 예배 이다는 겁니다.

아까 그 목사의 걱정처럼
진짜로 행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이 부분을 성경에서 빼버리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게 빼버리면 결국 성경 전체를 다 빼버리는 것이다 말이죠

이런 목사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한국에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친 전도사가 있었다고
저도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신문에 난 사건이다고 하더라 말이죠
아마 80년대 인지? 70년대 인지?
최근에도 이런 비슷한 것이 심심찮게 들릴 정도로 실제로 발생을 하니까
목사가 걱정을 하는 겁니다.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는
카톨릭 교인인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들었던가?
분명 매체를 통해서 들었는데 아무튼
남편이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
아내가 그 시체를 집에 계속 두었더라 말이죠
아내 혼자 말이죠
사망신고도 안하고 말이죠
아마 아내가 약사였던가 그랬지 싶은데
왜 시체를 방치 했는가? 살인은 아니고
병으로 죽은 남편인데

아내가 그렇게 한 이유가 바로 남편이 부활할 것이다 라는
성경의 내용을 이런 의미에 붙여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자꾸 썩은 냄새가 감당이 안되다 보니
이웃주민의 신고로 인해 결국 세상에 밝혀져버린 사건인데요

소름이 돋더라 말이죠

나중에 아내의 우울증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판명이 나서
끝나버린 사건이였지만

아무튼 이런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룩한 산 제사의 제물이 우리 자신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몸 곧 육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복잡하게 몸과 육과 영과 정신 등등을 신학자들이 나누면서 개념을 정리하던데
우리 아마추어는 그렇게 까지 잘 모르니까
그냥 쉽게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몸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바쳐라 라는 말은
여기서의 몸은 신체 육체를 말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바쳐라 라는 것을 명령어를 실천해야만 하는 행함이 되어버리고 
경건의 능력이 아닌 껍데기인 모양이 되니까 

신체 육체가 아니라


몸은 관계성을 말함으로써 한 몸이 된
누구와의 연관된 몸 즉 이렇게 보면 쉽습니다.

죽은 나에게 이미 신체는 죽었다 칩시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수혈을 해서

피를 넣어서 살려냈다 말이죠
그럼 내 육체의 피는 내 것이 아니고 내 육체가 만들어 낼 수 없었는데
그 사람의 피가 들어와 버렸으니

이제는 내 몸이 내것이 아니다 저 분의 피가 들어와서

졸지에 나와 한 몸이 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쉽습니다.
그럴 때 몸이라고 한 몸을 전제로 한 겁니다.
전에는 한 몸이 아니였는데 이제는 원수 된 것을 화목 제물로 하나 되게 했다는 의미에서 몸이다 말이죠
그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바쳐라 가 되는 겁니다.
즉 따로 행할 숙제를 남겨놓은게 아니라
이미 한 몸이기에 바쳐진 몸으로써 한 몸이기에
이 관계 속에 놓여진 것을 누려라 즐겨라 가 되는 겁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새 일과 한 몸이 되다 보니
공의의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라고 했잖아요 이번 주 음성녹음에

자 이렇게 되니까 이사야 조차도 졸지에 기다리는 몸이 되어버린
한 몸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사야가 잘 나서 한 몸이 된 겁니까?
아닙니다 그도 외부에서 
곧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서
부정함을 제거하니까
제거 당해서 졸지에 한 몸이 되어버리게 되었으니
기다리신 공의의 하나님과 똑같은
기다리는 몸으로써

기차역 또는 버스정류장에서 시계 보면서 약속 장소에 기다린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기다림이란 공의의 하나님의 기다림을 보여주고자
이사야 본인이 3년 동안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것이 기다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그 예가 3가지 나오는데
첫 번째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과
두 번째는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한 것과
세 번째 엘리야가 삼년 육개월 동안 비 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이 공의의 하나님의 기다림을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으로써
증거 한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기다림이 가능성을 말하는 인간이 실천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불가능성을 담는
보배를 담는 그릇이다는 겁니다.

그 그릇으로써의 몸
보배를 담은 그릇인 하나가 된 몸이다 말이죠

관계성입니다.
인간의 몸 개념은 그냥 딸랑 자기 몸 뚱아리 하나만을 생각하는 것이고
완전 정반대로써의 몸 즉 구체적 보편성의 몸입니다.

내 몸이 아니무이다 라는 거죠

딴 사람들은 아냐 그 몸 니끼다 니 몸이다 라고 카고

아냐 내 몸이 아니야 저분의 몸이야 라고

자꾸 간극을 벌려요
기다림을 벌려요
공백을 만들어요
3일 뒤에 일부러 기다렸다가 죽은 나사로 오빠에게 가시더라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한 몸 인 자신의 몸에게 가시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몸에게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반드시 상대적인 몸들은 다 살인의 육체로 드러나지요
울음꾼들과 비웃는 자들이 말이죠

부활교리를 믿는다니깐요 라는 몸도 살인의 육체일 뿐이다 말이죠
오빠 나사로를 죽었다고만 취급하니까
멀쩡히 산 자를 죽었다고 규정해 버리니까
이 세상의 법칙으로 말이죠

하늘의 것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먹는다 말이죠

오늘 본문이 딱 그런 의미입니다.
꼭 마태복음의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벌리시는 임금 비유 같아요

혼인잔치를 꼭 원수 마귀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비유 이 비밀을 누구만이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법칙으로만 보는 자들에게 누구만이 이 비유 곧 하늘의 비밀을 이야기 할 수 있냐 말이죠

(사 66:21, 개역)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6:2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하늘의 비밀을 알기는커녕
더 세상의 법칙에만 빠져 있더라 말이죠

그렇다고 이 기능을 포기하시느냐 
이 하늘의 것을 외치는 비밀선포자가 바로
탕자가 되는 겁니다.

엄집사님을 통해서 어떻게 탕자가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지 
그 질문 덕분에 저도 알게 되었는데요


탕자가 이 놈의 질 나쁘기 짝이 없는 탕자가 글쎄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하늘의 것을 외치는 제사장 기능을 하게 됩니다.

본인이 방금 격었거든요

바로 전이과정을 보여주는 자이다는 겁니다.

제사장이란 어떻게 더럽고 속된 것이 어떻게 거룩하고 깨끗한 정결한 것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안 그래도 이번 주 녹음에 탕자와 맏아들을 이야기했잖아요

또 누가 아주 솔직하게 이런 말을 했어요
구체적 보편성이 무슨 의미인줄 모르겠다 라고 말이죠
대충 단어의 의미와 등등을 알겠는데 뭔가 실감이 안나는 낯선 의미이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 해 준 덕분에
다시금 제가 생각하게 됨을 당했는데
성경 전체의 사건 하나 하나가 구체적 보편성이 아닌 게 없더라 말이죠

마침 맏아들과 탕자를 이야기 하다가
어 문뜩 불의한 청지기 또한 구체적 보편성이네 라고 번뜩하고 생각나더라 말이죠

그러니 구체적 보편성 하나만 단독적으로 떼어와서 생각하면 안되고
반드시 한 세트가 되는 보편성과 VS 구체적 보편성의 대립으로 봐야 한다 말이죠

자 그러면 성경에서 놀랍게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낯설어서 헷갈렸다 말이죠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 16:8, 새번역)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분명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 라고
빛의 아들들 이라는 표현이 졸지에 참 낯설게 되더라 말이죠

아니잖아요 사실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게 낯설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제사장과 레위인이 바로 왜 빛의 아들들은 칭찬 못 받고
즉 맏아들은 칭찬 못 받고

불의한 청지기는 왜 칭찬을 받는지
왜 탕자가 금가락지 새신발 살진소를 받는지

이 이유는 제사장은 늘 보여주도록 되어 있었다 말이죠
그런데 분명 자신들이 행하고 있으면서도 설명을 못해요

거꾸로 제사장 자신들이 설명을 해야할 탕자에 대한 구원을
정작 불의한 탕자가 왕같은 제사장으로써 설명을 하고

빛의 아들들이 이 의미를 외쳐야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거꾸로 불의한 청지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외치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외쳐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도리어 제자들이 욕하고 있는 창녀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부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이 행함이 있는 믿음 곧 공의의 하나님의 기다리심 많이 참으심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러니 당연하다는 제사장이 아니라 즉 보편성이 아니라
마치 요즘으로 치면 목사가 복음을 외치는게 아니라
그 목사에게 정죄를 받은 초신자가 복음을 외치는

이것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

즉 반대를 위한 반대 이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 말이죠

자 이렇게 율법을 어겼다 라고 그 목사(사울왕 보편성)가 다윗(초신자 구체적 보편성)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줬다고 하나님 모독 죄로 
제사장 아히멜렉과 85명 제사장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죽였듯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사울왕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로 주님은 다윗을 구체적 보편성으로 투입했고

다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또 일어나서 그 반대를 위한 반대에 다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다윗 왕의 죄악으로 인해 죽은 
이름 없는 솔로몬의 형인 아기가 그 꺾으신 뼈가

다윗 왕을 이스라엘의 왕에서 내려오게 하고
죄인의 자리에서 환자의 자리에서 의사를 맞이하는
거룩 공의라는 새 언약을 담는 긍휼의 그릇으로써 전이, 이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만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새 것이 되는 겁니다.
즉 헌 것과의 차이이다는 거죠
모호한 것과의 차이로써 십자가의 피 용서(전이, 이동)는 밝히 또렷히 보이는 완료입니다.

미흡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함량미달의 의문의 반복인 미완료가 아니라

도리어 흘러 흘러 넘쳐 흘러서
성전에서 나온 물이 사막까지
죽음까지 다 멸하는

이 전이
더러움을 깨끗게 하는
지혜를 펼치시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전이의 효과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방인인 헬라인에게서는 이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보편성이 깔리도록 되어 있고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하나님의 저주로 자리 잡은 보편성인데
그것을 보란 듯이 깨뜨려서
구원을 얻은 탕자인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요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아니 저주가 어떻게 아름답냐 말이죠

잠언 30장에도 나오는 천한 계집에서 왕비로 전이가 되었을때에 마귀가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는
이것이 진짜 지혜 가 벌리는 일이다는 겁니다.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심지어 잠언 30장 1절부터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인데 곧 아굴은
자신이 지혜가 없는 자라고 하면서 이런 말들을 펼친다는 자체가
바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 자체가 죄인 무능자 환자의 자리에서 외치는 지혜인 것이죠.

이렇듯 구체적 보편성은

보편성(선악)을 마귀가 잡고 있는 가운데서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구체적 보편성을 펼치시는 겁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물음입니다.
문제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정답을 가지고 오셨고
베드로 라는 문제아의 정답이 되시겠다 라고 
마귀 보란 듯이
마귀 들으랍시고 대 놓고서 외치시면서
신부 삼으시는 겁니다.

자칭 빛의 아들들이 불의하고 더럽고 추악한 불의한 청지기 보다 못하게 되는
도리어 빛이라는 보편성에 의해서 정죄를 받는 불의함이

빛 보다
보편성 보다

더 나은 빛으로써의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보편성 보다 더 나은 보편성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라고 시아버지 유다 쪽에서 외치도록 되어 있는

그래서 베드로가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냥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그것도 마귀에게 잡혀서 밀까부듯 초정밀 조사를 당하는 베드로가
형사 마귀에게 잡힌 현장에서 검거당한 그 베드로 범죄자가

전이 곧 십자가의 피로 인해
공의로 인해
의로 인해 (간극을 벌리심이 도리어 이 베드로는 살리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베드로를 마귀 목전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겁니다.

내가 정답이다 너는 문제이구나 드디어 잃어버린 양 찾았다 라고
내가 신랑이다 내 신부 어디있노?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말이죠
신랑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정답은 문제아 베드로 곧 음부의 권세가 아기지 못하는 교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이 전이 라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다시 역전이에 역전이가 계속 발생하듯이
이중분절이 (구체적 보편성의 무한반복 곧 십자가의 피 용서만 무한반복 항상 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뭐든지 아니오 함이 없고 예만 있는)

그래서 엘리야의 심각한 내 열심이 특심이라는 그 심각함이 

졸지에 웃음이 되는 전복, 가로지르기, 전이효과, 구체적 보편성이

비극에서 희극으로의 이동, 전이

하나도 심각한게 없게 된이 기쁜 소식이라는 새 일을 다 이루어놓았다 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외침에

이 다 이루신 영원한 제사장 예수님과의 관계인
영원한 관계
곧 쪼개어 나누어 질수 없는 잔여물인
이스라엘과의 결혼인

사랑입니다.

전체(보편성) 보다 비전체(구체적 보편성)가 더 전체 답다는 겁니다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말이죠.


본다 라는 보편성에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 볼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말이죠)
소경이라는 구체적 보편성이 (아무도 소경은 볼수 있다고 보는 자가 없다 말이죠)
아 그런데 정작 본다는 소경 아니다 라는 자는 예수님 이라는 비밀을 못 보고
실로암 소경은 그것도 날 때부터 소경은 볼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에수님을 제대로 볼 줄 알게 되니

이 실로암 소경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눈 있는 자 보다 더 잘 보는

바로 이 전이 곧 거룩을 감당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능인
더럽고 부정한 것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것으로 이동시키는 전이를 담당한
이 제사장의 일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그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전이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인
시아버지 유다 보다 진짜 이스라엘은 
시아비지 유다로부터 정죄 받는 개 같은 이방인 여자인 며느리 다말이
더 옳았다는 겁니다.
더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서로 맞물리면서 이 차이가
시아버지의 고백으로 인해 드러나는 겁니다.

그가 나보다 옳았다 라고 말이죠

이것이 기다림을 담은 그릇인 몸으로써 한 몸인
우리는 시아버지 유다 자리에서 예수님 곧 며느리 다말이 옳았다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공의 이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과 완전 정반대입니다.

탕자가 더 왕같은 제사장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졸지에 살인을 방조한 그냥 죽게 내버려둔
강도만난자를 그냥 지나치는 자인 살인자로써 예수님은 언급하시는 겁니다.

괜히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킨다고 하신 게 아니다 말이죠

괜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신게 아니다 말이죠

반드시 그것을 카페트 배경으로 깔고서
하늘의 것을 말하는 영원한 제사장 곧 멜기세덱 반차로 오신

이 영원한 제사장 만이 우리를 더럽고 추악한 죄에서 전이시켜 이동시켜 거룩하고 깨끗한
거룩한 신부
흰옷입은 신부로

오늘 본문이 그러하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사야 마지막인데
이사야가 바로 이 일로 허걱 하고 놀라는 겁니다.
이 새일을 이제 이스라엘을 더럽혀 놓는 바벨론 포로 속에 집어넣고
다시 살리시는 전이를 보여주심으로써

이 샬롬에
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에 놀라는 겁니다.
안 타죽는 것도 놀랍고
이 부정한 입술에서 새노래가 나오는 것도 놀랍고
이 전 것은 다 지나가는 것도 허걱 놀라고
보라 새 것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고

이것이 바로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영원한 제사장 되심 때문에
그래서 이사야는 신나게 딸랑 혼자
아무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기쁜 소식을 신나게 죽든 말든 상관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야 말로 혼인잔치로써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에 있어서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 이다는 겁니다.
한 몸 됨이 흘러 흘러 넘치는 겁니다. 초과잉적으로 말이죠. 


(시 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자 그러면 시편 뒤에 나오는 이 참선지자들의 기본 매뉴얼은 바로 시편이 되는 겁니다.
이 시편 대로 가는 겁니다.
알고보면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시편인 거죠

시편은 이미 해답지가 되고
이 정답에 맞는 문제가 참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사건들인 겁니다.

이미 선 정답 공개이고
후 문제 찾기로써 말이죠
후 문제 찾기인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찾기 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오직 이미 떠버런 정답에
그 정답에 맞는 문제아만 찾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 라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3일 뒤에 가심은
기다렸다가 가심은

이미 자신이 정답이시고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이고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이제 드디어 문제지를 만들려고 가신다 말이죠
이 문제지를 만드시고자 기다리시는 그 오래 참으심과 
민망해서 우심이 바로

참선지자들이 시편을 기본 매뉴얼로 해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이 정답에 맞는 문제를 찾아 찾아 사바 사바
천사를 찾아 해매이는 나의 모습 아니다
문제를 찾아 해매이는 나의 모습 사바 사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라고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제사장과 레위인 만이 아는 정답으로 인해
이제는 문제만을 찾는다 말이죠

마치 칠년 풍년 칠년 환란을 통해서
요셉이라는 삼일의 간극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요셉이라는 정답이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문제를
문제아를 찾는다 말이죠
그래서 간첩으로 몰고
또 뒤로 가서 울고
또 동생 인질로 볼모로 삼아서 아버지 이동 시키고
참 오래 참고, 기다리죠
정답에 맞는 문제가 되어라고 말이죠

오늘 본문으로 치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정답에 맞는
문제가 되어라꼬

바로 이 예수님의 피 라는 정답에 맞는 문제를 찾고자

제사장과 레위인이 투입이 되어서

더러움과 거룩 사이에서
이 전이 곧 이동이라는 대박사건을 증거 하는 자가 제사장 레위인인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제는 그것을 증거하고
나중에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으로써 하시고
그 반차를 따라서
탕자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한 몸(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하고
제자들이 나중에 약속하신 성령을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값없이 받아서
베드로처럼 베드로가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저 눈 시퍼렇게 떠 있는 제사장들 레위인들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외치더라 말이죠

피의 이동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기는커녕, 빛의 아들들이 하기는커녕
이스라엘의 집이 하기는커녕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맏아들이 하기는커녕

탕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외치고
불의한 청지기가 공의(첩경을 평평하게)를 외치고
개같은 이방 여자 귀신 들린 딸의 어미가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주님의 긍휼을 외치는 영적예배를
거룩한 산 제사를
온 몸으로 드리고 있더라 말이죠

빛의 아들들 이라는
원수의 목전에서 

예수님과 한 몸을 겁도 없이 말이죠
피 바르신 저 분을 외치는
정답을 외치는

문제지 로써 비밀로써 비유로써 말이죠

자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는 문제지를 비로소 찾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또한 그러합니다.

오늘 마지막인데 이사야 
이 간극 이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이 공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고 했잖아요

마침 댓글을 다신 분 덕분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정답이 오게 되면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뭘 해도 죄인 밖에 안되는데
그 심판 속에서 졸지에

정답 되신 예수님을 심판주로 영접했을 뿐인데
졸지에 그 정답에 맞는 문제지가 되어버렸고

반대로 자신이 이미 정답이라고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자들은
그저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어린아이는 절대로 묻지 않는 말만 골라서 묻더라 말이죠

어린아이에게서 아빠 엄마는 무조건 이유없이 정답이다 말이죠
그러니 어린아이가 따로 정답을 찾거나 
정답을 맞출려고 하거나
정답을 갖출려고 할 필요가 있다? 없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고 하신 이유는
어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답을 풀어야 하고 갖추어야 하고 찾아야 하니까

정작 본인이 정답에 맞는 문제가 되지를 못한다 말이죠
의사에 딱 맞는 환자가 되지를 못해요
엄마 아빠의 사랑에 딱 맞는 것은 어린아이 이다 말이죠
어른이 될 필요가 없어요

도리어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니까 진짜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려고 어떻게 해서든 함 해볼려고
정답을 맞추어 볼려고 하더라 말이죠

구원자 예수님이 이라는 정답에 딱 맞는 자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로써 정답으로써 왔는데
자꾸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 살려내라 라고
정답 맞추겠다고
부활교리 믿는다고 정답 맞추었잖아 살려달라고 울더라 말이죠
동네 사람들은 비아냥 거리면서 울고 말이죠

아니 예수님이 정답이고
예수님이 부활이고
예수님이 길이고
예수님이 생명인데

왜 자꾸 따로 따로 따로국밥처럼 자신의 부활
자신의 길
자신의 생명을 따로 정답처럼 갖출려고 하냐 말이죠

이미 살아 있는데 왜 자꾸 죽었다고 하냐 말이죠
예수님이 살아 있다면 산 거다 말이죠

예수님 쪽에서 이미 정답으로 오심으로 이미 끝났다 말이죠
시험 끝났어요

아 그런데 또 자꾸 시험치겠다 라고 정답을 적을려고 한다 말이죠

아니 이미 끝났다니깐
오늘 이사야 끝났어요

혼인 잔치 이미 벌써 벌어졌다 말이죠
새 하늘과 새 땅 이미 벌써 펼쳐졌다 말이죠

아 그런데 아직 까정 신부 화장하겠다고
정답이 되겠다고
교회가 되겠다고
의인이 되겠다고
신부가 될려고 신부수업 듣겠다고 하더라 말이죠
이미 결혼 속에 들어갔다니깐요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말이죠

이런 예수님과의 혼인하는 한 몸을 누리는 게 아니라

여전히 예복을 입지 않고 따로 정답을 갖추겠다고
이미 주는 예복을 거부하고 말이죠

그래서 쫏겨나서 어둠에서 이를 갈도록 하시듯이

오늘 본문에서 지옥불에 영원히 집어넣으시겠다고

새 하늘과 새 땅에 한 세트가 되는 의미로써
상대적으로 대조되는 의미에서 동원이 되는 겁니다.

(막 9:48, 새번역)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그, '게헨나' ㉢사 66:24 ㉣그, '그들의 벌레들'』
(행 7:49,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 ㉠사 66:1; 2』

(마 5:34, 공동)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 ㉠이사 66:1.』
(막 9:48, 공동)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이사 66:24.』
(행 7:49, 공동)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 ㉠이사 66:1-2.』
(살후 1:8, 공동) 『㉠주께서는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느님을 거부한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 ㉠시편 79:6; 이사 66:15; 예레 10:25; 출애 3:2.』

그런 의미에서 지옥불이 신약에서 인용된다 말이죠

(사 66:24, 개역)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사 66:24, 현대어) 『나를 경배한 순례자들이 도성 밖으로 나가 보면 힌놈 골짜기에서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며 내게 반역하던 사람들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죽어서도 끝없이 고생하는 형벌을 받아서, 언제까지나 죽지 않는 벌레들에게 파먹히고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질 것이다. 이런 유다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역겨움을 일으킬 것이다.'』

이 부분이 마치 마태복음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벌린 임금 비유의 마지막 부분과 똑같습니다.
지옥불에 말이죠
아무리 청함을 받은 자가 많아도 택함을 받지 못하면
즉 피 발리지 못하면
여전히 정답을 맞출려고 또한 갖출려고 하니
이미 정답이신 예수님의 예복을 무시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능을 무시하고
선지자의 외침을 거부하고 죽이는 살인만을 펼칠 뿐이더라 말이죠

(마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10, 개역)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아 참 초반부에 로마서 12장 1절을 언급했는데
11장 전체와 12장 그 뒤의 12 전체를 다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원가지를 왜 짜르시는가? 를 말이죠

(롬 11:21, 현대어) 『하나님께서는 원가지들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니 여러분을 아까워하실 리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 발리지 않은 자는 아무리 유대인이라고 해도
가차 없으신 겁니다. 정답 없이 어떻게 다른 길로 다른 답으로 들어갈려고 하냐 말이죠

바로 정답이라는 결과가 미리 미래완료로써 와서
즉 의사가 와서

문제아 탕자 죄인을 환자를 찾아야지

원인(문제)없는 결과(정답)로써

졸지에 저들과의 차이로써 문제(죄인, 환자)가 그때 발생하는 겁니다. 한 몸 즉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자 의를 덮어 씌운
흰 옷을 입힌 신부인 교회가 우발적으로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천한 계집종을 왕비로 만들어야
세상이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게 되는 지혜 참지혜라는 겁니다.

이 비밀을 감당한 자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인데
존재가 아닌 기능인데 이들이 못하면
선지자와 율법이 하는 거죠
그냥 선지자 그냥 율법이 아니라
거짓선지자와의 차이로써 당사자 조차도 차이로써
또 거짓선지자의 붓에서 기록된 율법이 아닌
시온에서 나온 율법 곧 뜨인돌 골고루 평평하게 평준화 일반화 시키는
첩경을 평탄케 하는 창녀와 제사장과 일반이 되게 하는 그 시온에서 나온 율법이 말이죠

그러니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자를 그냥 지나쳐 가버리니까
그들의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전이(이동)를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탕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듯이 말이죠

자 이것이 바로 새일로 인한
즉 영원한 제사장 이신 예수님의 새 일을 다 이루심으로 인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항상 있는
이 새 일 곧 정답만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만
노래하는 새 노래꾼인 이스라엘 곧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신부 말이죠

반대로 이번주 녹음처럼
맏아들의 하나님을 쫓아서 신부라는 관계가 없이
그저 번제와 제사의 관계이고

반대로 탕자의 예수님은 신부라는 관계 곧
인애와 자비라는
신랑 되신 예수님이라는
남편의 긍휼을 담은 한 몸(그릇)으로써
영적 예배 곧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반대로 맏아들은 하나님이라는 효과만을 노릴 뿐이지
하나님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성은 거부하는 겁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울리는 꽹과리일 뿐인데
아내가 될 마음이 없이
그저 복이나 바라는 우상화 할 뿐이고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할 뿐이지

어떻게 더럽고 속된 것에서 전이시켜 이동시켜 어떻게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즉 복음의 비밀에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즉 더러운 자리에 놓여지기를 거부하는
마치 바벨론 여자들이 왜 우상을 섬기는가
유대인들도 똑같은 심정이다는 거죠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될려고 우상을 섬기듯이

바로 이런 의문의 것들을 다 사라지게 하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새 하늘과 새 땅만 영원하고
그 외의 것들은 다 사라지게 하시는 겁니다.

이 새 일을 다 이루심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기쁜 소식에
우리는 증상물로써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 기쁜소식을 마음껏 누리라꼬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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