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 너희와 저희로 나누는 가라지 비유 (마 13,24-30)
(마 13:24, 개역)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개역)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개역)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개역)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8, 개역)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9, 개역)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개역)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비유의 목적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너희와 저희 로 나누기 위한 목적입니다.
마치 앞의 씨뿌리는 비유처럼
씨를 막 허비하면서 까지 감추어진 땅의 속성을 곧 밭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말이죠
말씀을 뿌리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이미 창세전에 결정난 것을 들추이는 것이지
말이 되겠끔 앞으로 잘해서 좋은밭이 되도록 하자 라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 그럼 가라지 비유에서는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바로 원수 개념입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성경책을 읽고 계시길래
어머니 어디 읽고 계십니까?
마가복음 읽는다
무슨 내용인데요
나사로가 죽게 되었는데
일부러 3일 뒤에 가니까
동네사람들이 과연 너 예수가 나사로를 사랑했는거 맞냐 라고 따지는 부분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침 그 부분이 오늘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맞음을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지금 글을 적고 있는 가운데서 느끼게 되어 한번 적어 봅니다.
어머니 왜? 주님은 어차피 죽은 나사로를 살릴꺼 아닙니까?
그런데 왜 3일 뒤에 일부러 늦게 가시는 겁니까?
죽기 전에 가지 않고
왜? 어차피 살릴꺼니까
왜 죽기 직전에 가지 않고
꼭 욕 한바가지 먹어야만 하는
죽은 뒤에 일부러 3일 뒤에 가시는 것일까요?
우리 지난 주에 좋은 밭 씨뿌리는 비유를 배웠잖아요
왜 바로 좋은밭으로 가지 않고
꼭 세가지 밭 즉 길가 돌짝밭 가시밭을 왜 거쳐서 가야할까요?
그 죽은 나사로 사건에서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부활 개념으로 바로 갈게 아니라
반드시 숨어 있는 마귀
곧 오늘 본문의 원수 개념을 거쳐서 봐야 하는데
과연 누가 마귀의 편에 서서 마귀의 사고방식을 나타내느냐 라는 겁니다.
그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그 마귀의 사고방식을 펼칠까요?
오빠 살려내라 라는 마르다 마리아?
아니면 동네 사람들 아니 사랑했다면서 이렇게 늦게 오냐?
나사로야 우리가 대신 울어주마 라고 울음꾼으로 나서는 자들
야히로 딸이 죽었다고 어느새 울음꾼들이 쫘악 깔려서
대신 울러줄려고 서로 서로 울려고 하는 그 시끄러운 곳에
조용히 해라 아이가 잠잔다 라고 하니까
자신들의 이웃사랑실천인 울음꾼 노릇의 가치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잔다 그러니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라 라는 소리에
열받아 한다 말이죠
죽었는데 자고 있다고 하니
말이 되냐 말이죠
말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처럼 말 되는 소리 좀 하라고 그런 기능을 하라고
울음꾼 노릇의 가치를 보라 라꼬
서로 대립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마침 도올 과 유땡민의 대화를 하는 너튜브의 내용을 들었어요
좌파들이지요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선을 추구 할려고 하는 겁니다.
위선자들이지요
물론 우파들은 악마들입니다 대 놓고서 악마짖을 해요
이런 두 악마들 선과 악의 시선에 가둘려는 이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것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이 예수님의 죽음 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면 이 악마의 시선(선악에 가두고자 하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마 유땡민이가 도올을 또라이로 보는데 워낙 깐족거리는 놈이기에
그런데 노땡현이를 변호하는 발언을 하니까 또 선땡님 선땡님이라고
얼마나 가식적으로 높여주던지 ㅋㅋㅋ
지식 측량으로 우열을 가리거든요
그런데 웃끼는 것은 그렇게 왜 단군의 자손이 왜 저 이스라엘의 신를 믿냐 라고 그렇게 헛소리를 하던 놈이 몇 년전 부터는 돌이켜서 예수를 존중하는 식으로 외치던데
아니 그것을 노땡현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같은 식으로 표현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깐족이가 선땡님 선땡님 이라고 하는 겁니다.
노땡현을 높여주니까 말이죠
깐족이는 알쓸신잡에서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통해 예수도 못한 것을 했다는 식으로 깐족 깐족이던데
얼마나 예수님을 싫어하는지 아니 사랑이라메?
그런데 이 놈의 사랑이라는 예수라는 인물 땜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냐 라고
천주교를 국가가 대핍박 하고 죽이는 조선시대를 언급하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촛불시위를 왜 동참하냐 말이죠
물론 국가는 실체가 있지만(비록 추상적이다고 해도 정치는 살아있다고 했듯)
종교는 아무리 봐도 없거든요 국가가 최종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고
국가에서 벗어난 종교는 위험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촛불 시위는 소위 정의실천 이다는 거 라는 거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칸트처럼 소위 이성주의 이다는 거죠
그러니 무모하지 않은 이성적인데
종교는 너무 무모한 비이성적 영역이니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너무 비효율적인 비이성적인 짓을 너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성주의가 소위 좌파 경제학자 말마따나
10% 밖에 안되요 오히려 주류 경제학자들(우파) 말처럼 10% 밖에 안된다 말이죠
나머지 90%는 비합리적이다 라고 행동심리 경제학자들이 주장한다는 겁니다.
비진리 비진실 비사실이 90% 다고 그 정도로 복잡하다 라고 좌파 이땡배 기자가 그렇게 경제의 속살에서 언급했다 말이죠
자기 들이 말을 해 놓고서는 자기들 말을 뒤짚는 모순을 펼치더라 말이죠
90%를 추구해야 한다고 해 놓고서는 결과적으로 10%를 주장하더라 말이죠
남들 보고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해 놓고서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넘어설려고 하지 않거든요
아무튼 돌삐처럼 노땡현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동일시 합일시 하던데
그 정반대 이다 라고 어머니께 이야기 했죠
오히려 가룟유다가 그렇게 적폐청산 검찰개혁을 외치면서
독재와 맞서싸우는 독립군으로써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는데
예수님이 도와 줄줄 알았는데 안 도와주더라 라는 겁니다.
이 이상에 이 이념에 이 이데올로기에
예수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팔아버리고서는 자살을 하는 겁니다.
다음 생애 태어나도 이런 놈은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이고 또 자살을 할꺼다 말이죠
절대로 막살지 않는
하나님나라 운동
독립운동
정의실천운동을 하면서 말이죠
앞의 글에서 언급한 부자 지옥간 부자처럼 말이죠
말이 되는 일만 골라서 할꺼다 말이죠
그런데 반대로 베드로는 저런 이상이 없어요
하나님 나라 운동 따위를 한 적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한 죽은 나사로가 아닌
부자와 상대적인 한 세트로써 거지 나사로는
자기를 변호할 필요가 없이 아브라함이 알아서 다 처리해 줘요
이것 보다 말도 안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부자는 여전히 자기 숙제가 지옥에 가서도 너무 너무 많아요
절대로 막살지 않도록 선지자를 보내 달래요 글쎄!!)
이상은 무슨 놈의 이상
독립 운동은 무슨 놈의 독립운동
그저 하루 살이로써 입에 풀칠 하기 바쁜데 말이죠
저런 의문의 반복 따위를 할게 아니라
진짜 배고픔 이라는 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 심판의 불을 톡톡히 격고 있다 말이죠
자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숨어 있는 원수를 거쳐야 하는 겁니다.
조국을 중앙에 놓고서
조국 살려내라 라고 외치는 쪽과
조국을 죽여라 라고 외치는 쪽 두 패로 나누어졌다고 해서
서로 극과 극인 서로 원수지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패거리입니다.
촛불시위든 태극기시위든 한 패거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거쳐서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진노 심판 속에서 보라 말이죠
숨어 있는 마귀를 거쳐서 보게 되니
둘다 한 패거리입니다.
선과 악 이라는 한 몸이다 말이죠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이 가라지가 바로 마귀가 심었다는 겁니다.
이 가리지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보이는대로만 볼 뿐이다 말이죠 확증편향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보니
악마들이 이런 두 패로 나누어진 조국 죽여라 라는 악과 조국 살려라 라는 선을
둘 다 마귀로 본다는 겁니다.
즉 마귀가 심은 가라지 이기에
마귀를 거쳐서 보게 됨은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보게 된 거죠
십자가의 죽음은 정작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했다 말이죠
이것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악마의 자식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심판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심판을 글쎄 예수님이 대신 받아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는 겁니다.
이 지식이 없으면 망해요
아니 이미 벌써 망한 겁니다.
숨어 있는 마귀를 소환해서
마귀야 마귀야 욥 봤냐 라고
욥을 걸고서 마귀와 내기를 하신다 말이죠
이 마귀를 거치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음을 모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죄 지어서 지옥가는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몰라서
감사치 않아서
영광 돌리지 않아서 지옥가는 겁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관이 아니다 말이죠
불뱀에게 물려서 죽는게 아니라 지옥가는게 아니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봐서 지옥가는거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못 쳐다 봐여
왜냐하면 그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바로 내가 달려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님을 달아버렸으니 그것도 달려야 할 내가
내가 예수님을 달아버렸다 말이죠 남이 아니라 내가
그러니 도저히 못 쳐다보는 겁니다.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죠
자 그럼 원수는 누굽니까?
촛불 시위로 조국 살려라 라고 하는 자 일까요?
아니면 태극기 집회로 조국 죽여라 라고 하는 자 일까요?
이 사람들은 돈 받아서 하루살이로 연명한다 말이죠.
이거 다 거짓입니다.
진짜 시위의 외침은 실상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는 외침이
바로 우리 입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조국 죽여라 조국 살려라 라는 이 모든 소리가 실은 하나입니다.
내 신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겠다는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내 속에서 이런 소리를 외칠 수밖에 없도록 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수 밖에 없었던 베드로처럼 말이죠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 부인하지 않겠다 라는 다짐을 더더욱 강혈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더더욱 부인 할 수 밖에 없도록
마귀를 붙이시는 겁니다.
이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 어떻게 예수님을 제대로 알수 있겠냐 말이죠
에스겔 6장을 통해서 남은자와
이사야 서를 통해서 남은자는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남은자가 아니라
포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스알야숩을 구하지 않겠노라 라는 히스기야왕)
포로 됨 속에서도
심판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남은자를 운운하는 에스겔서
아니 어차피 살릴꺼면 왜 망하기 전에 살리지 않고
왜 꼭 죽은 뒤에
3일 지나서 한 참 뒤에
그것도 늦게 늦게 와서 남은자를 운운하냐 말이죠
바로 그런 이유로 숨어있는 마귀를 소환해서
우리를 짖밟아서 죽이십니다.
저 촛불시위든 태극기 집회든 모조리 다 마귀들에게 놀아나는 겁니다.
배후에서 조종하는 놈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거든요
모두 자신의 신체를 기준으로 해서 나도 당할까봐 그런다 라고
태극기 집회 나오는 돈 받는 탈북자 하루 살이와 뭐가 다르냐 말이죠
자 그렇게 짖밟아 죽여서
그 죽음 속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고 하니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마귀에게 붙잡혀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다 이루었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거룩 공의를 이룬 겁니다.
왜 좋은밭 비유 한 개의 밭 이야기만 하면 되지
왜 세가지 길가 돌짝밭 가시밭을 왜 이야기 하시느냐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 간다처럼
바리새인을 타 넘고 와 보라 말이죠
가라지라는 원수를 타 넘어서 와 보라 말이죠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누가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길자가 어디 있냐 말이죠
저들 말 마따나 말이 되는 것인데 왜 못 타넘냐 말이죠
죄를 이겨 보라 말이죠
못 이겨요
길가 라는 억수로 재수 없는 자 그야말로 예외인간 배재된 인간입니다.
돌짝밭 처음에는 말씀을 받아 기뻐했는데 환란 고난 핍박으로 인해 뿌리를 못 내려 열매를 못 맺어요
가시밭 이것은 돌짝밭과 정반대 환란도 고난도 핍박도 없어요
오로지 유혹 밖에 없습니다.
가시가 더 잘 자라니 모조리 유혹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말이죠
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 무슨수로 이길래요
말이 되는데 왜 말이 되는 것을 못 이길까요?
이긴척 하는 놈들이 사기치면서 촛불이든 태극기든 자꾸 들라 라고 조종한다 말이죠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 한 쪽에는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있고 (서민정책과)
바리새인이 다른 쪽에는 로마 즉 친일파로써 친롬파로써 정치를 해야 (귀족정치)
자신들의 강도의 소굴을 유지 할 수가 있지 않냐 말이죠
전목사 빤스 목사처럼
명땡교회 목사세습처럼
서로가 조국을 그런 식으로 유지 보수 할려고 하는 겁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조국을 살리자 라는 쪽과
조국을 저 빨갱이 조국으로부터 살려야 하기 위해서 조국을 죽이자는 쪽으로
둘 다 국가 라는 짐승에 빠진 겁니다.
괜히 음녀(거룩한 제사장의 딸=유대인)가 국가 라는 짐승 위에 올라탈려고 한게 아니다 말이죠
여기에 대비된 14만4천명이라는 남은자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자 이라고 우는 자들 이다 말이죠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 보다 더 낫고자 해서 나은게 아니라
거꾸로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이유 없이 무조건
원인 없는 결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말도 안되는 놀라운 구원을 받은
30배 60배 100배의 좋은밭으로 이미 태어난 자들이다는 겁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 버린
새것이 된
왜? 바리새인 곧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이겨서가 아니라
반대로 주님께서 마귀를 타 넘고서
일방적으로 편파 용서를 하심으로써
님은자가 되어버린 자이기에
한 몸이 된 겁니다.
그러니 촛불시위 따위의 독립운동하는 가룟유다도 아니고
태극기 집회로 돈 벌려고 하는 자들도 아닌
저런 것들은 말이 되는 방식이고
말도 안되는 구원이 먼저 떴기에
그 증상물로써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라는 이 정답이 떴기에
먼저 뜬 정답으로 인해 증상물인 문제지로써
문제아 문재아앙 인 탕자가 새롭게 태어나는 겁니다.
탕자는 마귀를 거쳤거든요
그런데 맏아들은 마귀를 거치지 않으니까 여전히 자신의 선함
의로움
말씀실천
독립운동
정의실천
이웃사랑 등등은 운운하면서
왜 맏아들인 나에게는 금가락지 안주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탕자가 미웠는데
이제는 탕자 보다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서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겁니다.
탕자는 심판의 자리에서 곧 마귀에게 사로잡혀봐서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무화과 나무 잎이 없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본 겁니다.
이 사랑이 먼저 떴기에
이 정답이 먼저 떴기에
그 증상으로써 문제아 탕자 곧 죄인이
죽었따가 다시 살아나는 이 간극
이 공백 이 십자가라는 긍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맏아들은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 라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고
울리는 꽹과리만 시끄러운 소음으로
울음꾼들처럼
나 지켰다 지켰다만 외칠 뿐이지
정작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떴기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아버지의 의로움을
안 쳐다 보는 겁니다.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는 이 의를 말이죠
다시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어차피 꿰메워 주실꺼면
차라리 찢으나 마시지?
어차피 다시 되찾을 것이면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마시지
어차피 다시 사실꺼면
십자가에서 죽지 마시지
이것이 인간에게 마귀가 심어버린 가라지
곧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의를 나타내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마귀가 내 마음에 심은 이 가라지 원수 됨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이 십자가의 죽음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지
누가 이 십자가의 죽음을 찬양하며
누가 이 꺾으신 뼈로 기뻐하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구원인데
그저 말이 되는 구원을 추구하는 가라지처럼
맏아들은 말이 되는 구원을 받고자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 라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이게 마귀가 심은 선악인줄 모르고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비밀로써 남은자에게만 알아먹는
가라지는 도저히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비밀을 대 놓고서 외치시는 겁니다.
이 비밀 자체가 저들에게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하도록 말이죠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영광이듯이
이 가라지 비유 조차도 속이 뻥 뚫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에
그저 까무라쳐서 놀라 자빠질 정도로
말도 안되는 놀라운 구원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비유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이 어마 어마한 십자가의 지혜를 알려주신다니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겁니다.
그 비밀을 니 한테만 알려주마 라고 귀에 속딱 속딱
마귀 보는 앞에서 펼치시는 이 사랑 앞에
언제든지 죽어도 좋아 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정답이 먼저 떴기에
심판의 자리 곧 십자가의 자리에서
주의 사랑을 노래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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