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속성, 가장 작은 겨자씨가 모든 공중의 새들을 쉬게하는 창조(은혜)를 보여줌
18-54 창조자(천국)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겨자씨(남은자) (마 13,31-32)
(마 13:31, 개역)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개역)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 새번역)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 ㉤또는 '겨자씨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의 사정과'』
(마 13:32, 새번역)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 13:31, 현대어) 『[겨자씨 비유;막4:30-32,눅13:18-19]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마 13:32, 현대어)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막 4:30, 개역)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막 4:31, 개역)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막 4:32, 개역)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3, 개역)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막 4:34, 개역)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눅 13:10, 개역)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눅 13:11, 개역)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눅 13:12,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눅 13:13, 개역)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눅 13:14, 개역)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눅 13:15,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눅 13:16, 개역)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눅 13:17,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눅 13:18, 개역)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눅 13:19, 개역)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남은자로써 곧 인자로써 하나님이라는 정답을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은 그 이전에는 이 하나님을 정답으로써 제대로 외치는 자가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럼 참선지자나 세례요한은요?
참선지자와 세례요한은 정답을 외치는 자가 아니라
자꾸 예수님에게 떠넘김으로써 저분이 오실 저분이 너희에게 정답을 외치리라 라고
나는 신들메 풀기도 감당이 안된다 라고
내가 언제 십자가에 달렸니? 십자가에 달린 분은 저분이다 라고
종말을 외치는 겁니다.
즉 창조자가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정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되는게
모든 인간을 대표로 한 유대인이 하나님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창조를 보여 줄 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구약 선지서를 보더라도
메시아가 온다 그럼 그 메시아를 맞이할 마음자세를 갖추고
그런 국가의 상황이 되도록 하자
그래서 로마로 부터의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은
단순히 독립운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나라 운동
천국운동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천국운동을 벌려도
천국이 되기는커녕 더더욱 지옥이 되는 겁니다,
황폐하기가 짝이 없다 말이죠
조국 보세요 검찰개혁을 하면 할수록
도리어 자신의 가족이 황폐화 된다 말이죠
하필이면 그때에 아내가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왜 아프냐 말이죠
손떼라 라는 겁니다.
안 뗄줄 알기에
옳은 일을 한다고 여기면 여길수록 하늘의 천벌을 퍼붓는 겁니다.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정의를 이루고 선을 이루고
부패를 정의로 바꾸게 되면 그것이 선이 될 줄을 아는데
잠시 시이소처럼 안 보일 뿐 다른 곳에서 그 악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잠깐 눌렀을 뿐 그래서 안 보일뿐 다른 곳이 도리어 불룩하게 쏟아 오르는 겁니다.
예를들어 대학의 시간강사의 처후를 개선하는 법을 겨우 겨우
수년 동안 싸워서 겨우 통과 시켰다 말이죠
자 정의가 실현이 될까요 아니면 그래서 이제는 아예 대량해고를 해 버릴까요?
처후 개선 개혁이 도리어 악화가 되는 겁니다.
물론 혜택을 보는 자가 있어요 없으면 안되죠
몇몇 그것이 다입니다.
결국 기존에 길들여진 습관화 된 욕망이 있는데
아무리 법을 세워서 그 욕망을 막고자 해도
역시나 같은 욕망이기에 도긴개긴이 될 뿐이다 말이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도리어 갑질하는 기업가들이 더 잘 적용하듯이 말이죠
법의 빈 틈을 노리거든요
그래서 맑스의 말 마따나
개혁은 백날 외부에서 공격해서 해본들 소용이 없어요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오히려 개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하는 겁니다.
부패를 저지르는 그 당사자가 해야 바뀌지
그 당사자가 아닌 자는 백날 떠들어 대도 소용없어요
도루묵이 될 뿐이다 말이죠
이것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아니 전체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귀찮게 하면서 까지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과부의 기도를 통해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있다 말이죠
이 비유가 얼마나 어려우면 아무도 해석을 못해요
아니 해석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그냥 포기 하세요
나 만큼은 해석하겠노라 라고 달려들어도 소용이 없어요
(눅 18:1, 새번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눅 18:2, 새번역)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눅 18:3, 새번역)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눅 18:4, 새번역)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눅 18:5, 새번역)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눅 18:6,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눅 18:7, 새번역)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눅 18:8,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자 사실은 이사야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이사야 내용에서 언급할려고 했는데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지지난주에 이사야 41장을 살펴봤잖아요
(사 41:1, 개역)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하여 서로 변론하자』
(사 41:2, 개역)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사 41:3, 개역)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사 41:4, 개역)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주님께서 2절에 동방에서 한 왕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고레스 곧 메데 파사의 왕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네 짐승 중에 두 번째 짐승인 은신상에 해당된다 말이죠
이 고레스 왕을 통해서 주님께서 자신이 정답이다 임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서로 변론하자 라는 말은
기도의 의미를 너는 모르지 그래 내가 제대로 된 정답으로써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마 라고 하시는 겁니다.
막상 그 정답을 들어보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말이죠
방금 누가복음 18장 비유처럼 말이죠
저번에 또 누가 질문으로 묻고 하셨는데
같은 원리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통해서 과부는 권리를 찾는다 라고 합니다.
(눅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7, 새번역)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눅 18:7, 공동)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눅 18:7, 쉬운)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간청을 듣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미루시겠느냐?』
(눅 18:7, 킹흠정) 『비록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자기에게 부르짖는 자들 곧 자기의 선택 받은 자들을 향하여 오랫동안 참으실지라도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눅 18:7, 한글킹)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밤낮 부르짖는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지 않고 그들에게 오래 참고만 계시겠느냐?』
(눅 18:7, 현대인)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 원수를 갚아 주시지 알고 계속 그대로 두실 것 같으냐?』
(눅 18:7, 현대어)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간구하는 그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해주시지 않겠느냐?』
권리, 원한, 원수 갚기, 공정한 판결, 원한 풀기.
등등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이게 서로 변론, 변호, 구원 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번에 질문에 답하기를 애굽왕을 귀찮게 모세가 내 백성 내 놔라 라고 하잖아요
거기서 졸지에 부르짖음이 발생합니다. 기도가 발생해요
아니 히브리 잡족들은 기도 곧 부르짖음을 할 생각을 아예 한 적이 없어요
구원해 달라고 한 적이 없다 말이죠
구원이란 오로지 주님의 아이디어이지
인간이 요청한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부르짖을려면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네 맞습니다.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오냐 너가 나를 부르짖는구나 라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마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 곧 종말(십자가 라는 창조자 곧 정답을 외치는)을 구원을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낙심치 말고 기도하라 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열 번을 찾아가서 비로소 열 번 만에 애굽왕 바로왕이 풀어줬다 말이죠
10가지 재앙 곧 열 번의 귓방망이 맞고 말이죠
이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주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말이죠
(롬 9:17, 현대어) 『애굽의 바로의 경우가 그 한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한 대로 애굽 왕국을 그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힘을 그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온 세상에 ㅂ)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퍼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ㅂ. 출9:16)』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창조주가 사랑으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거부성은 바로
선악이라는 법으로 법 법 법 거린다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외치는 법 법 법의 수호자 곧 우상숭배자를 가지고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겠다 라고
이 정답을 우상숭배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애굽왕 말이죠.
이게 변론입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변론하는지 보라 라는 겁니다.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변론 사건을 곧 십자가 사건을
창조의 사건을 제대로 보여주겠다
이 분이 바로 정답이다 라는 겁니다.
저저번의 녹음에서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해 보라 라고 언급했다 말이죠
답을 못하면 죽는거죠 뭐 마치 스핑크스의 질문처럼 말이죠
하나님의 질문은 이겁니다 왜 광야에 비를 내리느냐 라는 겁니다
(욥 38:26, 새번역)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
(욥 38:1, 개역)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 38:2, 개역)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 38:3, 개역)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4, 개역)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5, 개역)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욥 38:6, 개역)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욥 38:7, 개역)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욥 38:8, 개역)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욥 38:9, 개역)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욥 38:10, 개역)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욥 38:11, 개역)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욥 38:12, 개역)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욥 38:13, 개역)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욥 38:14, 개역)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 같이 나타나되』
(욥 38:15, 개역)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욥 38:16, 개역)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욥 38:17, 개역)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욥 38:18, 개역)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욥 38:19, 개역)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욥 38:20, 개역)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욥 38:21, 개역)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가 많음이니라』
(욥 38:22, 개역)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욥 38:23, 개역)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욥 38:24, 개역)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욥 38:25, 개역)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욥 38:26, 개역)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개역)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욥 38:28, 개역)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욥 38:29, 개역)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아차피 마귀의 질문에도 답을 못할테니 말이죠
(그래서 욥기에서 마귀를 끌어들여서 내기를 하십니다. 정답이 누구냐 에 대한 질문에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마귀가 정답을 알려주는 꼴이죠.)
마귀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묻습니다 다윗에게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 라고?
(시 42:1, 개역)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2, 개역)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 42:3, 개역)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 42:10, 개역)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시 42:10, 새번역)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빈정대니, 그 조롱 소리가 나의 뼈를 부수는구나.』
(시 42:1, 현대어) 『[2권; 고난속에서 주님 기다립니다; ㄱ) 고라 사람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암사슴이 시원한 시냇물을 애달아 찾듯 하나님, 이 몸 주님 그리워하기를 그리합니다. 그렇게 애달아 주님을 찾습니다. (ㄱ. 히브리어 성서(마소라 본문)에는 42편과 43편이 본디 한 작품으로 되어 있다)』
(시 42:2, 현대어) 『살아 계신 하나님! 주님이 그리워 이리도 애가 탑니다. 언제나 되어야 주님 앞에 이르러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요?』
(시 42:3, 현대어) 『하루종일 온종일 사람들 나를 보고 한다는 소리가 `네가 섬긴다는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오니 주님이여, 이것은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밥 먹듯 눈물을 하염없이 흘립니다.』
(시 42:9, 현대어) 『나의 든든한 바위이신 하나님께 여쭈오니 어찌하여 이것을 잊으셨나요? 어찌하여 저 원수들의 압제 속에 이토록 계속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건가요?』
(시 42:10, 현대어) 『저들은 나에게 악담을 늘어놓습니다. `네가 섬긴다는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루종일 이런 말로 괴롭힙니다.』
(시 42:11, 현대어) 『그러나 내 어찌 슬퍼하기만 하랴. 어찌 괴로워하기만 하랴. 나는 하나님만 기다리리라. 다시 한번 그분을 찬미하리라. 나를 구원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가장 미약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신 7:7) 가장 강력한 애굽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정답이 누구신가?를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신 7:6, 개역)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7,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8, 개역)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9, 개역)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 7:10, 개역)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왜 예수님은 가장 작은 씨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를 통해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자신의 나라 천국을 증거하실까요?
부자나라 또는 강력한 민족,
건강한 자, 또는 의인을 통해서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지 않고
왜 겨자씨 같은 가장 작은 자를 통해서 창조주를 증거하시고
천국을 나타내실까요?
이상하잖아요
말이 안 되잖습니까?
겨자씨가 천국을 외쳐 보세요
누가 듣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랬습니다.
예수님 본인이 겨자씨 같은 가장 작은 모습
미약한 모습으로 천국을 증거하시니까
누가 듣던가요?
자기 백성 조차도 안 듣는 천국이다 말이죠
이게 비밀이다는 겁니다 비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믿음이 좋을 때
가장 번성 할 때
가장 잘 나갈때에
예를 들면 다윗이 왕이 였을때나
솔로몬 왕이 지혜를 펼칠때에
왜 그때 예수님이 안 오시고
가장 상황이 가장 안 좋을때에
가장 열악할때에
왜 그때 하필이면 오시냐 말이죠
이 정도로 주님하고 인간하고는 아예 안 맞아요 안 맞아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아무도 못 알아보도록 하는 천국으로 오신 겁니다.
아니 소경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아먹고
눈이 보이는 소경 아닌 자는 왜 예수님을 때려죽어도 못 알아 보는 것일까요?
이상하잖아요
왜 말이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말이 안되는 것만 기록이 되었냐 말이죠
겨자씨는 이런 의미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 어떤 기대감도 안 먹혀드는 절망감 그 자체 로써 말이죠
어떻게 말도 안되는 젖먹이로써 천국을 증거하시냐 말이죠
왜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냐 말이죠
강할 때 강한 주님은 왜 안 돼냐 말이죠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10, 현대어)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문입니다.
창조를 우리는 선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가라지를 심어서 창조를 모르게 되어 버렸거든요
곧 믿음으로 창조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기에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절망 속으로 내 모시고
죽음 속으로 내 몰아가시고
나약함
약함
핍박
심판 속에
진노 속으로 내 몰아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먼저 떴기에 말이죠
그래서 에스겔 서 7장에서
바로 앞의 글에서
이스라엘 땅을 불질러 버리시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듯이
모든 인간의 몸(성전)을 불 태워 버리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땅이 없는 곳에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도록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겨자씨는 남은자 개념처럼
분명히 존재 하지 않는데 존재 합니다.
말이 안되죠
결국 이스라엘 땅인 약속의 땅 개념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존재 하지 않는데 존재하는 겁니다.
존재 하지 않으면 무시하면 되잖아요
아 그래서 무시했다 말이죠
그런데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더 또렷한 겁니다.
이것이 남은자 개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땅은 없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가 이스라엘 땅이 아니였는데
이스라엘 땅인 약속의 땅으로 되어버린 겁니다.
즉 새 이스라엘은 이미 다 완성이 되어버렸기에
더 이상 손댈 필요성이 없게 되듯이 말이죠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성전이신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지으신 성전으로 인해
기존의 성전이 다 허물어져서
즉 없어져도
분명히 없어졌는데 무 인데
그 무가 도리어 있음의 유 보다 더 또렷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내가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고 충성봉사하고 그런 것 할 필요가 없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는
주님 쪽에서 넘어와서 처음부터 날때부터 겨자씨로 만들어 버리시는
도리어 기존의 이스라엘 기존의 예루살렘 보다 더 또렷한
이방인이 주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입술로 주를 시인하고 찬양하는
참성전이 다 이루어졌음을 외치는 찬양자 곧 남은자 개념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이 누구로부터 창조 되었느냐 라는 질문을 받는 자가 남은자입니다.
남은자는 그 질문에 대한 지혜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찬양을 화답을 하는 자입니다.
지혜자의 질문은 곧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죽은자 였다는 겁니다.
그 죽은 자를 살리시는 질문입니다.
이 지혜자의 질문에 답할 지혜가 없어서 이스라엘은 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미 망해 버린 개같은 이방인이 도리어 이 지혜자의 질문에
창조자의 질문에 지혜로써 답변함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외치는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서 주의 주 되심을 외친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자리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
흑암의 백성의 자리에서 주의 주 되심을 외쳤듯이
이 노선을 따라 다윗 언약으로써
참선지자는 지혜자가 창조주가 저 분입니다 라고
우상 곧 선악을 따지는 그 자들 앞에서
그 원수들 앞에서 무시 받으면서
없는 것을 있다 라고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서 존재 한다고 외친다는 자체가
무시 받는다 말이죠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의 겨자씨
가장 미약한 적은 수의 족속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의도적으로 한 세트를 만들고자
가장 강력한 군대, 울리는 꽹과리 라는 무기를 소요한 애굽에게 붙이시는 겁니다.
게임 자체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붙이십니다.
아예 노예로 들어갑니다.
이미 져버린 자로 들어갑니다
자 그러면 게임 끝났잖아요
아 그런데 아무도 이스라엘의 구원하겠다는 마음이 추호도 없을때에
아무도 조국을 건지겠다 라고 어떤 누구도 생각지도 않았을때에
촛불 시위 한번 한 적 없을때에
상한심령 통회하는 성령인 창조주의 구원이 펼치시고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인 기도가 부르짖음이 덮쳐지게 되니까
애굽왕 바로왕이 강퍅케 되고
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는 구원 곧 변론을 펼치시더라 말이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요
선악의 법칙이 아니라 원인 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세계가 아니라
원인 없이 결과가 도출이 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구원을 얻게 되고
용서를 얻게 되는 이 은혜로 창조했음을
창조자는 질문을 통해서 누가 저 악인에게 아무도 없는 곳에 비를 내리시고
은혜를 베풀었느냐 라고 질문 하는 겁니다.
이 지혜자의 질문에 지혜로운 총명한 자(짐승의 수를 셀수 있는)는 답변을 할 줄 알고
그렇지 못한 자는 마귀의 세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거기에 매진하는 사망이 왕노릇 하는데에 종노릇이나 하고 있는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을 하는 겁니다.
육체는 죽이는 자를 겁내어서 그 마귀의 질문에 답할 생각하지 말고
영혼 까지 소멸하시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보라는 겁니다.
이 지혜자의 질문이 우리는 살리는 겁니다.
남은자는 곧 겨자씨는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무화과 나무 잎이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라는
새들이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나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 하며 새들처럼 여호와에 깃드는
이 찬양자로써 태어났다 라는 것을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화론자들처럼 자기 숙제를 가득 안고서 그 숙제를 실천해야만 할까요
아니면 도리어 이 겨자씨가 되시는 예수님의 섬기심을 받고
무숙제 합격 무시험 합격이라는
천국이라는 비밀
곧 은혜로 세상을 창조 했다 라는
이 정답을 외치는 자로 만들었을까요?
도리어 이 정답을 외치는 자로 창조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은
정답을 외치지 못했고
반대로 도저히 알수도 없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고
여호와가 누구인지 조차도 알지도 못한 자들인
이방인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또렷히 보여주겠다 라는
주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는 자들에게 부르신바 되고
말이 안되죠
주의 이름을 찾지도 않을 자에게 찾으신바 되는
이 새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도리어 이방인이 주 여호와께로
구원자 예수 께로 돌이키도록 하겠다 라는
이 비밀에
이 천국이라는 비밀에
예수님 이라는 비밀에
육적 혈통적인 이스라엘은 더더욱 완악하게
탕자의 형인 맏아들처럼 완고한 모습인 원수성을 나타내고
아버지의 사랑에 반발하더라 라는 겁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둘을 갈라놓을까요?
형제가 사이 좋게 의롭게 살도록 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가장 적극적으로 그 의를 갈라놓을까요?
주님은 마귀를 거쳐 오라는 겁니다.
마귀가 심은 가라지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은 혈통을 안 보십니다.
육으로 안 따져요 선악으로 법 법 , 법으로 안 따집니다.
영으로 따집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따집니다
여기서 갈라집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갈라집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법적이지 않냐 라고 불만을 토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죄를 미워하시고 사망을 미워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망을 미워 할 줄 알지만
사망은 죄를 미워 할 줄 모르거든요 누가 더 은혜롭나요 뭐든지 다 용서하는
사망이 죄도 미워할 줄 모르니까 말이죠
여기에 주님은 그 사망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은혜로 창조한 세계에
선악의 법으로 우상화해 버린 세계를 심판하시고
손해하나 본 것 없이 은혜로 만드신 세상을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을
아무리 세상이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고
아무리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개판 만들고
아무리 예루살렘을 개판으로 만들어도,
오늘날 교회가 교회를 개판으로 만들어도
주님은 이미 다 완성해 버린 종말의 은혜의 세계를
종말의 이스라엘인 새 이스라엘을
종말의 예루살렘 성전을 하늘에 다 이루심으로써
손해 하나 본 것 없이 다 이루셨다를 외치심으로써 왕노릇하시는 겁니다.
괜히 헌부대 헌술이 되어버린 썩은 동앗줄인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땅(지금의 유대인 땅)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등등을 백날 붙잡아 본 듯 소용이 없듯이
벌써 다 이루었음을 노래하는 것이 겨자씨 남은자로써
거기에 안식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겁니다.
안 그런자는 여전히 생명 보다 소유의 넉넉함을 쫓는 식이 되겠죠
이 다 이루었다 라는 천국의 비밀을
아무것도 아닌
가장 작은 겨자씨가(왜 천국은 왜 희년은 왜 기쁜소식인 복음은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고아 과부 나그네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의 갈릴 리가
빛을 외치도록 되어 있을까?
다들 무시하는 가장 작은 겨자씨 일 뿐인데?
왜 항상 바리새인 남자들에게 그것도 나약한 여자 그것도 현장에서 잡힌 여자,
어린아이, 문둥병자 창녀 세리 강도 등등의 불의한 자를 통해서 기쁜소식을 증거할까?)
마치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이 도리어 외치고 있고
아무리 애굽의 부요함처럼 많은 성경지식과 건강함과 의로움을 아무리 많이 쌓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이 천국을 외쳐 본들
그들에게서는 이 비밀이 없는 그저 말이 되고
지극히 이해가 되고
마귀의 반발 하나 없이
우상화된 자기를 위한 천국 증거에 여념이 없도록 만듬으로써
번제와 제사 곧 쉼이 없는, 안식이 없는, 생명이 없는
그저 소유의 넉넉함만 쫓는 의문의 반복에 빠져버리도록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개같은 이방인을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외치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돌아도록 하신 이 지혜에
도리어 왜 그렇게 하냐 라고 반발했던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라는 사랑의 자리를 도리어 선악의 법의 자리로 확고화 시킨 이 우상성에, 이 반발성에
상대적인 이방인이 이 처음자리에서 이스라엘 답게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울리는 꽹과리들 앞에서 외친다. 이것이 겨자씨의 비유 이다. 십자가의 지혜 외에는 외칠 비밀이 없다.)
그 요나처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입에서 제가 주님을 사랑한 줄 주께서 더 잘아신다 라는)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 보여줄 구원 보여줄 지혜가 없다는 겁니다.
이방인이 찬양하는 이 십자가를
천국의 비밀인 겨자씨가 무시받는 없는 존재 취급 당하는 겨자씨를 통해서
증거하심을 통해
이 천국이 어떤 인물인가를 누구신가를 보여주시는 그 섬기심을 찬양토록 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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