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겔 7, 7-14)
(겔 7:7, 개역) 『이 땅 거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겔 7:8, 개역)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겔 7:9, 개역)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치는 줄을 네가 알리라』
(겔 7:10, 개역)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겔 7:11, 개역)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
(겔 7:12, 개역)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겔 7:13, 개역) 『판 자가 살아 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가서 그 판 것을 얻지 못하니 이는 묵시로 그 모든 무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도 돌아갈 자가 없겠고 악한 생활로 스스로 강하게 할 자도 없으리라 하였음이로다』
(겔 7:14, 개역)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예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미쳤음이라』
(겔 7:7, 새번역) 『이 땅에 사는 사람들아, 정해진 멸망이 너희에게 들이닥쳤다. 그 시각이 왔고, 그 날이 다가왔다. 산에서 즐겁게 환호하지 못할 당황할 날이 가까이 왔다.』
(겔 7:8, 새번역) 『나는 이제 너희에게 내 분노를, 나의 분을 너희에게 쏟아서, 너희 행실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며, 너희의 역겨운 일들을 너희에게 갚아주겠다.』
(겔 7:9, 새번역) 『내가 너희를 아끼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겠다. 오히려 나는 너희의 모든 행실에 따라 너희를 벌하여, 역겨운 일들이 바로 너희의 한가운데서 벌어지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주가 이렇게 치는 것임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겔 7:10, 새번역) 『그 날이다. 보아라, 들이닥쳤다. 정해진 멸망이 시작되었다. 매질할 몽둥이가 꽃을 피우고 교만을 꺾을 채찍이 싹터 나왔다.』
(겔 7:11, 새번역) 『㉡폭력이 일어나서 죄악을 징벌하는 몽둥이가 되었다. 이 백성 가운데서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이 백성의 무리들 가운데서도 더 이상 남을 사람이 없고, 그들의 재물이나 그들이 가진 것들 가운데서 눈에 띌 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또는 '광포한 자가'』
(겔 7:12, 새번역) 『그 시각이 왔고, 그 날이 이르고야 말았다. 사는 사람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사람도 슬퍼하지 말아라. 이 땅의 모든 무리에게 진노가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겔 7:13, 새번역) 『판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 하여도, 팔린 것을 되찾으려고 돌아갈 수가 없을 것이니, 이 땅의 모든 무리에게 보여 준 묵시는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을 굳게 부지할 수가 없다.』
(겔 7:14, 새번역) 『그들이 나팔을 불고 모든 장비를 갖춘다 하여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내 진노가 이 땅의 모든 무리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에스겔 7장의 다른 번역에 소제목을 붙인 것을 보니
(겔 7:1, 쉬운) 『<에스겔이 종말을 말하다>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셨다.』
(겔 7:1, 현대어) 『[범죄의 당연한 종말]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셨다.』
(겔 7:10, 현대어)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 보라, 심판의 날이 왔다! 멸망이 막을 수 없는 홍수처럼 밀어닥친다. 교만과 폭력이 온 나라에 가득 찼기 때문이다.』
(겔 7:15, 현대어) 『[이스라엘이 받을 형벌] 성밖으로 나가면 적군의 칼에 찔려 죽고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 전염병과 굶주림이 그들을 삼켜 버릴 것이다.』
하나 같이 이스라엘이 당하는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에스겔이 얼마나 이상한 행동 즉 부정한 인분으로 구운 떡을 먹지 않나
머리카락과 몸의 털을 모아서 예루살렘을 그림 그리고 그것에 불질러서
그 위에 머리카락과 털을 삼분에 일 씩 불 태우질 않나
좌로 390일 우로 40일 꽁꽁꽁 묶어서
자신의 신체를 마치 학대하듯이 하질 않나
그렇게 했던 모습들이 이제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되어서 나타나는
이 심판성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그 말도 안되는 에스겔 곧 인자가 당하는 모습을
이스라엘에게 확대를 시키고 있으니 원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거죠
이것은 곧 이스라엘은 개인적인 것이 없어요
즉 종말을 보여주는 자들이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판을 당하는 모습 조차도
왜? 종말의 단체 집단이기에
역사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역사란 개인 적인 것이 있다 말이죠 즉 자기 것이 있어요
그러나 역사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묵시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종말의 단체인 이스라엘은 묵시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기에
인류를 대표해서 심판 받는 겁니다.
그 심판을 통해서 이방인이 한 쪽은 돌아오기도 하고, 또 다른 한 쪽은 돌이키지 못하도록 하는
두 패로 가르는 주님의 공의를 보여준다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곧 주님의 완벽한 심판과 즉 찢으심과
다시 주님의 완벽한 거룩으로 싸매어 주심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종말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이다 말이죠
(벧전 4:16, 개역)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7, 개역)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그러니 이스라엘이 아무리 타락해도 그 기능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주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손해 보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종말적 기능을 이스라엘이 아무리 거부해도
주님은 반드시 뽑아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범죄가 바로 이겁니다.
약속의 땅에 주님의 희생 덕분에 살았으면서도
주님의 희생(창조라는 은혜)이 아니라 즉 위에서 언급한 주의 공의로움 의로움으로 산게 아니라
이런 묵시성 계시성이 아니라
묵시의 골짜기에 살면서도 묵시가 아니라
자꾸 역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기 것(선악의 법)이 있는냥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그 속내가 겉으로 표출 된 것이 바로
증상으로 시온 산을 산당이라는 우상으로 가득 채우는 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우상이란 역사적인 사고방식인데
시간과 공간을 자꾸 행함으로 채우는 선악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시공간을 날려 버리는 새 일, 창조 곧 종말의 기능을 펼치시는 겁니다.
왜 우상숭배로 빠지게 될까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의 취지인 인애와 자비 곧
너희가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빼내주신 여호와 이다 라고
역사 속에서 빼내었는데
도리어 역사 속으로 자꾸 들어갈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 역사가 무엇인고 하니
곧 우상이 뭔고 하니 바로 자기 것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 것
묵시에는 자기 것이 없지만
역사 속에는 자기 것이 있어요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나 라는 자아가 있거든요.
자기 아들은 고아가 되면 안된다고 바벨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는 과부가 되는 일이 있으면 안되고
나그네가 되면 안된다는 거죠
그러나 복음 곧 기쁜소식인 희년은 고아에게 과부에게 나그네 에게만 해당 되는
하나님의 거룩인 의로움 입니다. 그래서 환자(죽은자)를 부르러 오셨거든요.
죽은자를 살리는 공의 이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절대로 과부 되지 않겠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겠다 라는 바벨론 여자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공의(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 라는 지혜)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사 47:8, 개역)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사 47:9, 개역)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전히 네게 임하리라』
창조(새 일)는 이것을 곧 우상을 향한 공격이 되는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고
이 땅에 직접 내려오셔서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창조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율법의 취지인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서 사랑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사망을 시기하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우상을 시기하고 죄악을 심판하는 사랑입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을 창조를 제대로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7, 개역)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 25:6,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사 25:7, 개역)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랑 곧 사망을 멸하기 위해서 잃어버렸다가 즉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사망을 멸하는 공의를 펼치시겠다는 겁니다. 수치를 가려주는 것이 구원이거든요.
역사가 외치는 우상이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말이죠 그것은 대충 고치는 것이고
진짜 구원은 죄악에 대한 심판 속에서 나오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다 말이죠
그렇게 시작한 율법은 개인의 것이 없기에 집단적입니다.
그래서 시형제 결혼법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이
개인적인 자기 것이 없는 집단성인
신약으로 치면 개인의 세계가 없는 그리스도 안 이라는
예수 안 이라는 종말의 단체성을 보여주는 의미이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약속의 땅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심어서 소출을 내어 먹게 되는 방식이 아닌
특이하게도 약속의 땅은 심어서 소출을 먹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자기가 심었다고 결국 자기가 기준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입니다.
행함이란 어디까지나 자기 것이 개입이 된 겁니다.
자기라는 신체 몸을 기준으로 하는 겁니다.
이 행함을 제거 하는 것이 믿음 이거든요
(신약에서의 죄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은
뭘 해도 막살기 밖에 안된다는 것은
그 기준이 나의 신체 기준이였던 구약에서의 나 라는 기준이
이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몸(인자)
모든 기준이 예수님에게로 옮겨진 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은 선물이 믿음이거든요 즉 믿음 의인화 해서 믿음이가 되는 겁니다. 선물이가 되는 겁니다.
동시에 나는 선물이가 아니고 나는 믿음이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 입니다.
저 분이 믿음이요 선물이다는 겁니다. 은혜 곧 창조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출을 먹게 되는
은혜를 보여주는 땅이 약속의 땅이다 는 겁니다.
그 은혜로만 살도록 되어 있는 땅을
도리어 선악의 법칙으로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소유로 만들어 버리니까
그 땅을 더렵혔다고
그래서 그 땅에서 쫓겨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있을수 없는
말도 안되는 사건이지요(역사가 아니라 사건 곧 묵시 계시 약속)
다른 민족은 그저 사건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역사(자기 것, 우상)만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인, 자기 것, 사적인 것
그런 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어서 민족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으니
우상(의문의 반복) 외에는 보여줄 게 없다 말이죠.
이스라엘은 그 반대로 묵시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어 본들 역시나 개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개인이 없었다 말이죠
자기 것이 없이 출발한 겁니다.
육체로 낳은 자식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영으로 낳은 자식이기에
역사가 아닌, 묵시에서 태어난, 자기 것이 없는, 말씀으로 난 자들이다는 겁니다.
사람의 뜻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갈 1:1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벧후 1:21, 개역)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바로 이런 사람의 뜻(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 곧 우상을 거쳐서
그 차이로 그 차별로 그 구별, 구분으로 주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겁니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 공의를 담은 그릇이 바로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졸지에 약속의 땅에 살게 된 것이
자기 것으로 봄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공짜로 은혜로 누린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가 뭔가를 해서 (행함이란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개인 몸을 기준으로 해서)
십의 일을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세리와 같지 않았다고
자기 것 즉 신앙도 자기 것
믿음도 자기가 행해서 믿음이 졸지에 자기 것이 되어버려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된 것이 이런 자기 것으로써의 믿음과 행함이 있어서 살게 되었다고 보니
이런 자기 것이 사라지면 안된다고 잃어버릴까봐
광채나는 얼굴을 가리고자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은 것이
바로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한 자기 것이 생겨서 완악한 수건을 못 벗는겁니다.
그러니 약속을 완전히 정반대로 오해를 했던 거죠
심지어 결과도 의문으로만 남아요
광채나는 얼굴을 가리고서 사라지지 않아야 하니까
시온에 산당이 가득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겁니다.
즉 하나님만 용어로 단어를 하나님 이라는 문자로 따왔을 뿐이지
내용은 모조리 우상숭배의 사고방식인 선악의 법으로 채운 겁니다.
즉 교리 플러스 실천 곧 불교죠
이것이 히브리식 불교인 유대교 이다 말이죠.
이 우상숭배는 용서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몽둥이를 통해서 치십니다.
매를 대십니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그 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우상 숭배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다른 몸으로써
즉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몸
곧 인자입니다.
누구 누구의 아들
우리의 죄악을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은 박스 그릇으로써의 인자를 통해서
주님의 공의를 통해서 엉터리로 생각한 곧 우상숭배에 빠진 모습을 지적 받는 겁니다.
인간의 몸에 유일한 차이나는 몸이 생겨 버린 겁니다.
행함의 몸 밖에 없는 몸의 세계에서
믿음의 몸이 졸지에 생겨 버린 은혜의 세계가 되어버렸거든요. 창조 곧 새 일을 보게 된 겁니다.
이것이 율법의 마침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은혜의 세계 인 믿음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자기 것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하는 행하는 몸이
믿음의 몸을 거부하는 거죠
즉 자기 개인의 믿음으로 거부하는 것이겠죠
믿음의 몸이 너무 너무 이질적이고 동질성이 너무 없어서 말이죠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신체인 바리새인의 몸, 행함의 몸입니다.
대표성으로써 모든 인간의 신체를 대표한 몸으로써 바리새인과 충돌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말이죠
마치 왕 제도를 달라고 해서 가장 뛰어난 자인 사울왕을 백성들이 선택함에 있어서
주님은 다른 신체 곧 소년 다윗 얼라를 그 상대적인 몸으로 곧 인자로 세우시는 묵시의 사건 처럼 말이죠.
여기서 구체적 보편성인 사도바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말이죠.
오늘 본문에 죄악의 몽둥이가 꽃이 폈다고 합니다.
이 죄악의 몽둥이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게 하십니다.
(겔 7:9, 개역)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치는 줄을 네가 알리라』
(겔 7:10, 개역) 『볼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매를 대시니까
징계를 내리시니까 말이죠
이스라엘은 바벨론과 똑같이 [자기 것]이 생겨버린 우상숭배에 빠진 겁니다.
그러니 신앙도 개개인의 문제로 보는 겁니다.
아닙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전부를 치시는 방식이 얼마나 부조리 하게 여겨지겠습니까?
인자 에스겔이 앞에서 당하는 그 고난들이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을 담는 식입니다.
개인의 고난이 아니다 말이죠
이것이 인자 이다 말이죠
그러니 신앙은 믿음은 개개인의 믿음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성화론자나 개혁주의가 그래서 엉터리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개개인이 모여서 촛불집회로 모여서
집단을 형성한다고 해서
인자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 개인이 당한 이스라엘 전체의 거부성이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치는 것이
집단이 한 개인에게 퍼붓는 저주가 아닙니다.
거꾸로입니다
개개인이 모인 것이 인자라는 신체에 낚여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발로 찬다고 해서
남의 운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여기서 모세가 광채가 사라지지 않고자 열심히 열심히 수건으로 가리운 것이
무슨 놈의 의미가 있겠냐 말이죠 의문의 반복인데
그래서 모세는 변화산에서 강제소환 당해서
자신이 죄인의 자리에서
곧 집단의 자리에서
주여 죽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저 모세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지난 주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모세는 수건을 벗고 싶어도 벗을 수가 없겠구먼
바로 이겁니다.
벗으면 죽어요
히브리인들이 아무리 홍해를 건넜다고 해도
그들의 습관이 베인 몸은 우상적인 몸입니다.
자기 것에 예민한 자들이다 말이죠
그래서 교만한 목을 꺽고자
주님은 일부러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만한 곳으로만 골라 다니십니다.
그렇게 예민해진 히브리인들이 얼마나 그 신체가 예민해 졌겠냐 말이죠
그러니 모세는 수시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자리에 놓여진 겁니다.
자기 것을 자기 신체를 건드리고 있는데
모세가 어떻게 살아남겠습니까?
수시로 죽일 준비 태세가 되어 있거든요
조국이 불쌍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촛불시위 하는게 아닙니다
언제든지 검찰은 나 라는 개인의 자기 것을 건드릴수 있는
불법의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고 있기에
서로의 이익에 부딪히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그러고도 남기에
조국을 방패로 삼아서 넘어오지 말라꼬 촛불을 드는 거다 말이죠
태극기야 뭐 그저 하루살이로써 생계비를 얻어야 하니까 상관이 없지만
돈 떨어지면 저절로 없어지지만
촛불은 자기 것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노골적인 우상숭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거든요
정의라는 가면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세처럼
자기 신체 기준이니까 말이죠.
벗으면 죽거든요
선악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수 있는 매매 소통 수단이지
십자가의 은혜로는 하루도 못 살도록 되어 있는 짐승의 세계임을 촛불시위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조차도 이방인과 다를바 없이 모조리 다 우상숭배에 빠졌는데
이스라엘 만큼은 때려서라도
어떻게 해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되었는지를 상기 시켜 주시면서 약속의 의미를 뽑아 내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만한 몽둥이인 바벨론과 뭐와 다르냐 말이죠
교만이란 우상숭배이거든요
자기 것을 가졌다 이거거든요
사도행전에 그 유명한 사건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바로 이겁니다.
차라리 내지 않겠다고 하면 되는데
괜히 내겠다 라고 과시를 하다가
도로 낸 것을 가지고 가다가 즉사 당한 겁니다.
(행 5:1, 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개역)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개역)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개역)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 5:6, 개역)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 5:7, 개역)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행 5: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 5:9,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 5:10, 개역)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행 5:11, 개역)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 상황은 삯꾼 목사들이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적으로 많이 사용을 하는데
문제는 거짓말 했다고 베드로가 죽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럼 돈을 작정한 금액을 낸다고 해 놓고서
도로 얼마를 빼내어서 금액이 맞지 않는다고 죽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삯꾼 목사들이 다 그런 식으로 가르칩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베드로의 취지는 이것이 성령의 활동으로 소유를 팔아서 내었다 라면
개인의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개인의 사유화로써 성령을 속였다 라는 겁니다.
삯꾼 목사들은 여러분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속여도 괜찮습니다.
삯꾼 목사에게 거짓말 해도 괜찮아요
작정 헌금 천억 낸다고 거짓말 해도 되요
어차피 그 놈도 거짓말 이니까
지 혼자 마음이 설레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할 테니
얼마나 그들이 성령을 속이는지를 오히려 보게 될 겁니다
베드로의 취지는 성령 안에는 개인적인 자기 것이 없는데
성령으로 했다고 우겨놓고서는
자기 것이기 때문에 아까운 겁니다.
즉 성령을 소유화 했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사적인 소유물로 믿음을 성령을
은혜를 약속의 땅을 복음을 십자가를 개인 소유화 한 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다 이렇거든요
물론 형님 미국을 따라하니까 다 그렇지만요
모조리 가 개인 소유물이 된 것에
제대로 걸려든 겁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이유로 그 부부가 죽은 겁니다.
개인 소유화 하는 것은 수준 높은 성화론자들을 보면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실로암 소경의 죄악을 분석하겠다는 성경박사인 바리새인을 보면 얼마나 또렷하게 보여주시는지?
본다고 하는 기능을 개인 소유화 하니까 남의 소경됨을 자기 의로움과 구분짓기를 하더라 말이죠.
넌 예수 제자이지? 난 모세 제자야!! 라고
자 이렇게 되면 한국의 성령론은 결국 악마론입니다. 구분짓기를 통해서 서열을 정하는 겁니다.
우상이다 말이죠 아무리 수준 높은 성화론자들도 그들의 성령론은 다 우상론이다 말이죠.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은 것이 심각한게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징계가 없다 라는 것이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이다 라는 거죠
아무도 몰라요
내어버려 두었으니, 사생자 처럼 매가 없어서 돌이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삯꾼 목사의 속임수에 다 넘어가요
목이 곧은 백성 즉 우상 숭배
곧 교만을 꺽으시는 매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두려운 겁니다.
사도행전 5장의 특이한 점이
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으로 인해
우와 겁난다 두렵구나 라고 해서 이 사건을 통해서 다들 흩어지게 되고
더 이상 모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모이게 되는 집단성 곧 믿음으로 더더욱 모이더라 라는 겁니다.
살아계심을 봤으니까 말이죠
지난 주 글에
모압여자 이방나라 여자인 룻이 도리어
어머니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맞군요 라고
아니 얼마나 사랑이 맞으면
징계를 하시겠냐 말이죠
죽은 자 이방여자가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여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 겁니다.
희년 기쁜소식을 본 겁니다.
다른 며느리와 또 정작 시어머니 나오미는
나 봐라 하나님이 저주 내렸다 이것이 전능자 하나님 이시다 라고 하니까
떠나는 며느리와 나오미 본인도 떠나라 라고 하더라 말이죠
아니 그것이 오히려 더더욱 또렷하고 확실한데요 왜 떠납니까?
그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 맞습니다 맞고요 라고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을 믿어요
그렇게 믿는 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기 몸 기준이기에
어디까지나 말이 되는
가능성만 믿거든요
그 가능성이 무너지니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떠나가라고 한 겁니다.
이제 가능성 없다 라고
그런데 오히려 룻이 나오미에게 믿음을 전합니다.
이방나라 모압 여자가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인 시어머니 이스라엘 사람 나오미에게 전도 하고 있으니
이 사랑이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이 사랑을 확증 시키시더라 라는 겁니다.
얼마나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죽은 하나님이 아니면
이방나라 바벨론을
교만의 몽둥이를
이스라엘에게 대시겠냐 말이죠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서
자기 것이 너무 너무 자기 주머니에 까까득 담았기에
인자를 통해서
탈탈탈 털어서
빈 공백
빈터로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이 빈공백에 쓸데 없는 자기 것을 손에 주머니에 까까득 담아서
주여 십일조냈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바리새인) 세리와 간극을 벌린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고(부자청년) 가난한 자와 구별 짓기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습니다(탕자의 형 맏아들)
이들의 의로움, 자기 의 쌓기, 자기 것을
탈탈탈 털어버리심으로써
쭐꾸덕 미끄러 지게 만들어 버리심으로써
빈공백(인자)은 여전히 빈터로 남겨두심으로써
그 어떤 자기 것 이라는 우상을 가지고 와도
탈탈탈 털리도록 하시는 이 사랑이
은혜가 아니고 뭐냐 말이죠
이 은혜로 함께 동행했거늘
우상과 다를바 없는
선악을 따지는 하나님으로 오해한 것을
너희가 겉으로만 바벨론을 싫어하나 속으로는 좋아라 하는 바벨론을 통해서
치시는 겁니다. 배신 당하게 말이죠
베드로의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마귀에게 잡혀봐야
이것이 마귀의 고백인줄 아는 겁니다.(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 이다)
선악 보다 가장 놀라운 고백이 없다고 봤는데
이 자기 것 으로써의 고백이 거짓임을
마귀로부터 잡혀 봐야 안다는 겁니다.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모아온 자기 의로움
자기 믿음
자기 신앙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봐야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시고자
바벨론 몽둥이를 사용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이다는 증거이거든요
그래서 세리는 심판의 주를 사모함으로써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성령의 전으로써
집단으로써 고백하는 겁니다.
즉 저는 사생자가 아니라 자녀라써 이유 없이 무조건 매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심판의 주를 보여주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한 것을
인자로써 에스겔을 참이스라엘의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외치는 바리새인이 이스라엘의 기능이 아니라
세리처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 이라는 새로운 몸을 기준으로 하는
나 개인의 기준은 없고 무조건 예수님 몸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말하기 위한
인자로써 세리는 죄인의 자리에 놓여서
주님의 심판을 담은
징계를 담은 그릇으로써
사생자가 아닌 자녀로써
이스라엘의 기능을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이방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는 방식입니다.
우와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이 글쎄 자기 백성에게 매를 대시네
사생아가 아니구나
자녀 이구나 라고
우리도 자녀 삼아 주세요 라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원수에게 내어주시는 이 사랑(은혜)을 보고서
모든 이방이 무릎을 꿇고
입술로 주 라고 시인하는
주님의 새 일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것이 움직이는 이스라엘 이라는 성전
주님의 심판과 긍휼을 담은 그릇이라는 인자 라는
종말의 단체 이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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