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 누구냐와 누구냐의 변론 (사 42,18-25)

누구(얼굴)과 누구(얼굴)의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58 더러운 소경(누구냐)과 창조자(누구냐)와의 변론 (사 42,23-2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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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 42:18, 개역)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사 42:19, 개역)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사 42:20, 개역)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사 42:21,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사 42:22, 개역)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사 42:23,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사 42:24, 개역)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사 42:25,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사 42:18, 현대어) 『[눈멀고 귀먹은 백성] 주께서 말씀하셨다. `귀머거리들아, 너희의 귀를 열고 똑똑히 들어라. 소경들아, 너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똑똑히 보아라.』
(사 42:19, 현대어) 『너희는 내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자는 바로 너희다.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내 백성으로 삼고 나의 종과 나의 심부름꾼으로 삼아 놓았으나 너희가 예언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고 무시하였다.』
(사 42:20, 현대어) 『내가 행한 일들을 너희가 모두 보고서도 거기서 전혀 배운 것이 없다. 너희에게는 나의 경고를 들을 귀가 열려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옳게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사 42:21, 현대어) 『나는 너희를 죄악과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려고 항상 너희에게 율법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사 42:22, 현대어) 『그러나 너희가 그토록 귀중한 가르침을 거절하더니 이제는 모조리 약탈을 당하고 적진으로 끌려와서 굴속에 묶여 있고 옥중에 갇혀 있다. 원수들이 너희를 불잡아 포로로 끌어 갔어도 너희를 풀어 준 이가 아무도 없고 너희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는 이가 없다.』
(사 42:23, 현대어) 『너희 가운데에는 이런 일을 당하고서도 깨닫는 이가 아무도 없느냐? 이토록 무서운 경험을 하고서도 귀기울여 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사 42:24, 현대어) 『도대체 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강도 떼에게 넘겨 주고 야곱의 후손들을 약탈자들에게 내주었느냐?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아니냐? 우리가 주께 불순종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신 것이 아니냐?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지 않았고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사 42:25, 현대어)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진노를 쏟아 징벌하시고 엄청난 전란에 빠뜨리셨다. 주님의 분노의 불길이 사방에서 밀려와 이스라엘을 태워 없앴으나 그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주께서 내린 분노의 불꽃이 이 백성을 태웠으나 그들은 조금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먼저 내가 하나님을 먼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에 대해서 아시는 겁니다.
뭐 당연한 소리를 왜 입 아프게 하냐 라고 하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식이 바로 [어떻게] 라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고전 13:12, 공동)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자신은 그 어떻게 의 방식으로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고 뭐뭐 했고 뭐뭐 했고 등등으로
혹시나 또 모르니까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하소서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서든 하겠다 라고 나옵니다.
인간으로써의 최고의 자격 조건을 갖춘 겁니다.

바로 이 방식이 바로 율법에 갇힌 겁니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입니다.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를 갖추었으니까
구원을 이렇게? 어떻게? 어릴적부터 다 지켰으니까
라고 나오는 방식이
하나님을 안다 라고 우기는 인간의 방식입니다.

여기에 반해 주님의 방식은
누구와 누구의 만남입니다.
즉 인물이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하면 구원 얻냐 라는 질문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엄마 아빠 라는 인물만 찾듯이
예수님 이라는 인물만 바라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과의 만남이 아니라
[인물] 과의 만남이니까 말이죠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 시선에서 눈을 뗄수가 없습니다.
방금 부자청년이 자기자신에게서 시선을 뗄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구원 얻냐 라고 자기 구원만 생각했지
가난한 자의 구원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시선에서 뗄수가 없습니다.

그런 나에게 나를 잊어버릴정도로 나를 나의 시선에서 너끈히 뗄수 있을 정도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는데 그 관계가 바로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물과 인물
곧 누구와 누구냐 와의 마주봄입니다.

환자는 모든 시선이 의사에게만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자기자신은 저주를 받았는지 심판을 받았는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거든요

볼게 없어요

죄인이 자기자신에게 뭐 볼게 있던가요?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나를 기대 할까요?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로
유혹에 벌써 벌써 다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를 볼 것이 없어요
그저 의사만이 이따만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안 보여요

너무 너무 그대 앞에서 너무 너무 작아서 안 보여요

가장 작은 씨앗 겨자씨 만해요
그런데 의사 예수님은 모든 새가 깃들 정도로 너무 너무 큰 나무이다는 겁니다.

그 큰 나무가 인식이 될려면
심판 주로 
죽음도 이기고
병도 심판하고
죄악도 심판하는 심판 주로 보여야 하는데

그 인물 누구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나의 숙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심판 주가 보이는게 아니라

밤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나 보다 조금 나아 보이니 한 수 가르쳐 달라 라고
지식을 모으고
숙련 단련해서 
어떻게 구원 얻냐 라는 숙제를 풀겠노라 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그러니 심판 주에게 나의 은밀한 것 곧 죄악을 내어놓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내 부족한 성경 지식 한 수 배워서 나도 너 예수처럼 많이 아는 인간이 되면 되니까 라고 말이죠

여기에 예수님은 아예 불가능한 마치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부자청년에게
내 구원이 중요한 판국에 나를 내가 구원하는 시선에서 못 떼는데
어떻게 가난한 자의 구원에 시선을 돌리느냐 라고 등돌리듯이
니고데모에게도 아예 불가능한 즉 어떻게 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거듭나야 한다 즉 다시 태어나야 한다 라고 하니까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수 있냐 라고 여전히 단절로 보는게 아니라
어떻게 로 보고 있더라 말이죠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행할 기세이다는 겁니다.
구원된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 말이죠

(요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이런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정 반대 되는 인물을 주님께서 배치시키십니다,
바로 우물가의 여인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바리새인처럼 어떻게 어떻게를 주장 합니다.
베드로처럼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노라 라고 조건을 갖추겠다 라고 하듯이

(요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철천지 원수지간이거든요
한국과 일본 사이처럼 말이죠 
이런 판국에 세리 매국노 친일파를 구원하시니까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돌아버리는 겁니다.
탕자를 용서하는 것을 맏아들은 절대로 용납을 할 수 없을테니 말이죠

아무튼 이 사마리아 여인도 야곱의 우물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 라는 장소를 따집니다
어떻게 해야 바른 장소이냐 라는 거죠

(요 4:1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개역)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4:17,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대화는 자꾸 어떻게 라는 대화 주제를 비틀어서
자꾸 인물 대 인물 그렇다고 평등한 인물이 아닙니다.
분명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원수지간입니다.

네 맞습니다. 원수와 사랑의 관계로써의 인물과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인의 입에서 더 이상 어떻게가 쑥 들어가도록 만들어 버리고
마치 베드로가 마귀에게 잡혀서 탈탈탈 털리니까 더 이상 어떻게 라는 것이 안 나오죠

오히려 누구십니까 당신 이라는

당신 사랑 하는 내 당신 둘 도 셋 도 넷 도 없는 내 당신 이라는 대화로만 나오도록 유도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영생을 주겠노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주겠다 라고 말이죠

아니 물 달라고 했는데 도리어 물을 주겠다 라고 합니다.

그럼 줘 보이소 마 얼릉 마셔 주겠슴더 라고 나오는데
주님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봐야 하기에
니 남편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진짜 니 남편 곧 6명의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말일까요?
아니잖아요 못 데리고 온다는 것을 알고 그러시는 겁니다.
남편이 6 명 있는 것이 뭐가 자랑이라서 데리고 오겠습니까
못 데리고 올 정도로
아니 아무도 몰랐던 꽁꽁꽁 감춘 비밀이다 말이죠

즉 남편이 없다 라는 말이 맞다는 겁니다.

자 이제 아까 원수 와 사랑의 만남이듯이
철천지 원수와 그 원수를 용서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만남이듯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남편 없는 여자와 책임 져 주마 라고 나오시는

신부와 신랑의 관계성으로써 예수님은 대화를 누구 라는 인물로 방향을 틀어버리시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누구 라를 인물로 향하도록 하시듯이 말이죠

여자에게 남편이 생겨 버리면
이제 자기가 자기를 책임 지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게 됩니다.
자기 숙제가 없다 말이죠

그러나 율법 이라는 전남편은 자꾸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를 갖추도록 합니다.
그 전남편과 이혼을 했으니

더 이상 전남편에게 구속 되는 것이 없다 말이죠

새남편에게 구속 곧 매인바 된 겁니다.

니고데모는 선생이여 라고 친근하게 다가가듯
주종관계로 선생이여 한 수 가르쳐 줍쇼 배우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정작 [어떻게] 하면을 갖추어버리면 냅따 단물 빨아 먹고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처럼
예루살렘에 갈꺼다 말이죠 그래야 써먹으니까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더더욱 우상화 되는 겁니다.
서로 서로 완악한 수건 누가 누가 더 완악한 가를 자랑하는 게임중독에 빠져서
종교오락을 멈출수가 없게 될테니 말이죠

분명 선생이여 라고 접근해 놓고서는 나중에 수평관계가 됩니다 막 먹을려고 해요
심판 주는 개뿔 니나 나나 뭐가 다르냐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물가의 여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처음부터 수평관계로 곧 인물과 인물로 대화를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워 하지요 
와이카노 이 양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도 안하는데
유대인은 인간이고 사마리아인은 개 짐승인데
삥 둘러서 근처도 안오는데 금도 안 밟는데 와카지?

그런데 이 대화가 인물과 인물로써 나중에는
심판 주와 죄인의 만남, 수직관계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나의 죄악을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물동이를 던지면서

의사와 환자의 만남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서로 변론하는
인물과 인물의 만남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곧 은혜로 지음받은 관계 말이죠

(요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누가 사랑하는 자 입니까?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말이죠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회개의 달인인 바리새인은 자기를 부인할 줄 모르는 회개를 지키는 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주님이 형성한 이 관계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이 관계 앞에서
더 이상 나의 회개 조차도 내놓을것이 없을 정도로
그저 용서 받은 것 외에는 없다 라고 합니다.

이 관계를 그가 나를 아는 것 같이
즉 내가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오는 죄인이다 환자이다 라는 것을 아시는

은밀한 죄악을 다 아시는 분이 당신이군요 라는 그 얼굴과

나도 이제 나의 시선에서 나를 뗄수가 없는데
이제 어떻게 뭘 할까요 가 아니라
이런 아무것도 아닌 병자를 죄인을 원수를
용서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고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집니까
도대체 나를 작게 나를 내가 쳐다도 못 보게 만드시는
나의 모든 시선을 빼앗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어찌할꼬 가슴만 칠 수 밖에 없는

그 사랑 앞에 놀라 자빠지는

그래서

눈을 멀게 한 자가 누구냐

들을 귀 없게 한 자가 누구냐

불뱀에 물리게 한 자가 누구냐?

그렇게 물으시고
따질려고 갔더니만

나 보다 더 처참하게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니
내 심판 내 저주 나의 병듬은
그 앞에서 쥐 뿔도 아니구나 라고

충격 먹고 각인이 되어서
이 십자가가 옳았다 라고

마치 저주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보고서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 맞네요 맞습니다 맞고요 라고

하나님의 은밀한 성소 곧 비밀의 십자가

우리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신 그 비밀을
그 법궤를 인간이 다루어 보겠다고 들따 보다 오만칠십명 죽고
웃사라 법궤 자빠질려는 것 안 자빠지도록 붙잡다가 죽고

그 정도로 인간은 더럽기에 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감당이 안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이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가 베푸는 그 용서에 혜택을 입으라 라는 겁니다.

주님 홀로 감당하신 나의 죄악을 다 씻으신 그 사랑만을 쫏아가서

누가 너를 사랑했냐 라는 그 물음에

창조주이신 당신이 나의 낭군
아리따운 낭군 이시다 라고 신부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신부된 교회만이 외칠수 있는 고백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그가 나를 아시고
나도 그를 알게 되는

여호와가 누구인줄 비로소 알게 되리라 라고 하신

그 분이 그 인물이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놓게 하시는 겁니다.

이 죽음을 시기하는 사랑의 낭군 때문에

전능자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했다 라고
비로소 인물과 인물

누구냐?

나오미 아니냐

아니다 마라 라 해라 나는 기쁜자가 아니라 슬픈자 괴로운자 이다

그런데 그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는

이 기쁜소식을

주님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심으로써
이 인물에 걸맞게

우리가 어떻게 갖추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우리를 환자로 죄인으로 부르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누구 이신가 라는 인물 곧 얼굴로 다가오시기에

그 얼굴에 맞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도록
주님이 직접 우리를 죄인 만드시는 겁니다.

이 관계를 창조자로써 새롭게 지금 창조 하시는 겁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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