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아무것도 아닌 부정)과 함께 머무는 천국 (보석 장수 비유)

18-58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비유와 이스라엘의 특이성 (단절의 비밀 비유) (마 13,45-46)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막 7:28,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3:45, 개역)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개역)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5, 새번역)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 ㉫또는 '상인의 사정과'』
(마 13:46, 새번역)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먼저 미리 답을 내고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거짓선지자가 이 본문을 어떻게 설명하는고 하니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즉 장사꾼은 바로 인간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고 유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인간은 천국을 대상으로 삼아서 행동에 나서야 하는 판국이 되는 거죠

이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이런 우상과의 차이로써
천국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즉 인간이 천국을 대상으로 삼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천국이 우리 인간을 대상으로 삼아서
좋은 진주를 찾고 구하는 장사꾼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 곧 천국이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에게서는 기분이 나쁘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앞의 것 거짓선지자가 설명하는 천국이 기분이 좋다 라는 거죠

지난 주에 말씀을 나누다 보니 보물 비유 곧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해서 전재산을 다 걸어서
감추인 보물을 사는 비유를 꺾으신 뼈 비유 라고 제목을 다시 수정을 했습니다.
글로 적었을 때는 몰랐는데
말씀을 나누다 보니 아 이거구나 싶어서
기뻐서 막 제목을 다시 수정을 했지요

거짓선지자는 마치 다윗이 회개 눈물 금식 기도를 해서
솔로몬의 형 곧 이름 없는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즉 기도한다는 말은 대상물로 삼았다 아입니까
그 기도의 대상물로 삼은 아이를 위해서 살려달라고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라는 4종 세트를 인간 쪽 다윗이 바치는 것으로써
거짓선지자는 주장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 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꺾으신 뼈가 다윗을 그것도 죽은 다윗입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다윗이 아니라
부정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다윗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죄인으로써의 다윗을 살리고자
다윗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꺾으신 뼈 곧 천국이다는 겁니다.

이 꺾으신 뼈 로만 기뻐하도록 한 것이 바로 천국이다 라고
유일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말이죠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가 빛의 아들들의 지혜 보다 더 옳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 밖에 없으니까 말이죠

모든 종교 곧 우상숭배자들은
그 반대죠
어떻게 해서든 천국을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처럼 발견하도록
너가 장사꾼처럼 좋은 진주를 발견하듯이
천국을 발견해야 한다 라고
대상물로 삼으로 라고
이것이 인간의 종교심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지적 받지도 않고서
천국으로 바로 갈려는 속임수 곧 트릭을 부리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모습인데
앞의 글 70명의 유대 장로가 그랬던 겁니다.
그 모습을 감추고자 속임수가 뭔지도 모르기에 속임수를 펼친 것이 바로
모든 선한 의지를 다 나타내는 모습이다는 거죠
바리새인이 그랬고요
웃사가 그랬고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나오는 빛의 아들들이 그랬고요
탕자의 형 곧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그랬고요
부자청년도 그랬죠
또 누구냐 하면 소위 바른생활 한다는 자들
바른 신앙생활 한다는 자들이 다 그랬다 말이죠

이에 반해 예수님은 반대로 부정한 자만 골라서 찾아 다녀요
마치 예수님은 인자 라는 박스로써의 자기 신체에
부정한 자들을 담고자 찾아 다니시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제목을 보고 눈치 채신 분은
귀신들린 딸의 어미가 생각 났을 겁니다.

나 예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라고 했다 말이죠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즉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이다는 겁니다.
보물이 아니면 안된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이방여자가 그것도 귀신들린 딸
그야 말로 부정의 부정
최고의 부정의 극치인 이 귀신들린 딸의 어미 이방인 여자가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더러운 자 맞습니다.
그러나 그 더러운 자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개처럼
주인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습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그때 예수님은 좋은 진주를 발견했다 라고 좋아라 기뻐 뛰십니다.
죄인 하나 돌아 오면 천군천사들이 잔치를 벌린다 말이죠

상대적으로 정작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아무리 찾아 가도
아무도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가 없었다 라는 겁니다.

왜 일까요?
힌트는 앞의 글 에스겔에서 70인의 유대 장로들처럼
뭔가 분주히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축복을 주기 위해서
저주로부터 피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온 맘과 정성을 다 해서 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과연 예수님을 쳐다보겠냐 말이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본다고 과연 낫겠냐 말이죠

안식일 지키기 바쁜데
누가 안식의 주인을 보겠냐 말이죠

귀한 것이 이미 있는데
누가 안식의 주인을 귀히 여기겠냐 말이죠

주객이 뒤 바뀐 겁니다.
주인을 쳐다보는 개같은 이방여자와는 달리

안식의 주인도 안 쳐다보는
도리어 안식일날 손마른 병자를 고쳤다 라고
안식일을 어겼다 라고
죽일려고 달려드는 이 모습이 바로

주인의 긍휼이 필요가 없는
자기 쪽에서 알아서 구원을 펼치겠다 라는
이 우상숭배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였다 라는 겁니다.

모조리 다 자기를 위한(우상) 거였다 라는 거죠

지금 현재의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숭배 밖에 없어요.

자 이렇게 우리는 왜 거짓선지자의 말에 속을 수 밖에 없느냐 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니까
뭔가를 잃어버렸다 라고 여기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장사꾼처럼 좋은 진주를 구할 리가 없다고 본 거죠

한 마디로 말해서
신 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소망하는 신처럼
무소부재 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신이기에
그런 신을 바랬기에
뭐가 부족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다니겠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의 주장처럼
하나님 쪽에서의 출발 보다
인간 쪽에서의 출발로써 하나님께 다다르는 그런 사고방식인
은혜가 아닌 선악으로 따지는 것에
모든 육의 신체가 동의를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동질성 합일성에

예수님은 반대로 그런 신 이라는 개념인 우상과의 차이로써
지금 이 순간도 부지런히 뭔가를 찾고 돌아다니신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라는 신 개념이 깨어지는 겁니다.
뭐가 아쉬워서 찾아 돌아다니겠느냐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선악 의지에서의 거룩 곧 공의나 정의라 의로움 이라는 거룩개념은
예수님과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신을 대상으로 해서 만들어낸 교리로써의 거룩이니
이 얼마나 엉터리 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의는 그 반대로써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잃어버림을 당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거룩 때문에
졸지에 부정한 자리에 놓여진 잃어버림을 발생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3일의 간극 이라는 공백을 만드시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오벧에돔의 집에 여호와의 궤가 석달 치나? 
3개월 동안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서
그 집안에 축복을 내렸다 라고 했다 말이죠

이 3개월의 의미는 숫자 개념이 아니라
우상(합일, 동질성)과의 차이로써의 단절성입니다.

이 공백은 그 어떤 인간의 것이 머물수 없도록 차단 하는 기능이거든요.
아니 분명히 죽은 자 인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냐 말이죠

아 하나님의 공의가 떳구나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심이 떳구나 라는 겁니다.

(삼하 6:8, 개역)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하 6:9, 개역)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개역)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삼하 6:11, 개역)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2, 개역)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삼하 6:13,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개역)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삼하 6:15, 개역)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이것은 마귀도 흉내를 못내요
우상숭배자들과의 차이는 이것 하나 밖에 없어요

바로 십자가 라는 3일의 간극 이다는 겁니다.

곧 찢으셨으나 다시 꿰매어 주심을
심판 받아 마땅하나 불쌍히 여겨주심 때문인
바로 하나님의 불의 형상을 봤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자 이것을 본 자는 비로소 우상과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교회 백날 다녀보세요 우상을 본 적이 있어야
그 차이로써 하나님의 불형상을 볼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없어요
아니 누가 교회 안에서 누가 우상 숭배를 하겠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없어요 눈 씻고 누구 말처럼 안약을 발라서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늘 빼거든요
이 속임수에 모두다 빠져 있는 겁니다.

즉 선악의 의지는
좋은 것에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든 참여를 하던가 아니면
참여 중에 놓이도록 하고
반대로 나쁜 것에는 어떻게 해서든 그 부정과 멀리 떨어지던가
거부하는 식이다 말이죠

이 선악의 의지가 바로 속임수 이다는 겁니다.
이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일 매일 이렇게 속이고 있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사도바울도 오죽 못 벗어났으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즉 선악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할 정도 이니까 말이죠

누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자 곧 부정한 자로 여기겠냐 말이죠

우상을 왜 섬기느냐 어떻게 해서든 부정한 자리에 안 놓아고자 함이거든요
그것이 이미 벌써 부정한 자리에 놓여진 증거 이다는 겁니다.

좋은 진주를 찾는 장사꾼이신 예수님은 곧 천국은

누가 봐도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누가 봐도 좋은 진주로 여기고
맏아들 자기 자신 마저도 자신을 좋은 진주로 여기고 있는 판국에

느닷없이 탕자 라는 더러운 나쁜 진주를 예수님은 버선 발로 마중 나와서
살진 소 금 가락지 새신발로 입혀 주시니까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냐 말이죠
아버지의 공의 거룩 의로움 곧 사랑으로 입혀 주시니까
아무리 더러운 탕자 라고 해도 깨끗하게 되지 않겠냐 말이죠

이런 다윗에게 바지가 벗겨진 다윗에게
아무리 천한 모습으로 놓여진 다윗에게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물이 된 다윗에게
여호와의 궤의 대상물이 된 다윗에게

아무리 바지가 벗겨져
체통을 구기고
왕비의 체면을 구겨도
아버지의 사랑에 대상물이 되었다는 그 사실에
아무리 잃어버림을 당해도
바지가 훌러덩 벗겨져도

이 아무것도 아닌 공백에 놓여져도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나그네가 되어도

이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다시 살도록 되어 있는 이스라엘 만의 특이성 이거든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신이 창조주 임을 나타내시고자
이스라엘을 죽였다가 멸망 시켰다가 다시 살려내심인데

오히려 인간의 신앙이라는 종교는 오히려 그 은혜의 방식을 거부하고서
자기 쪽에서 신념을 지키고자
절대로 막살지 않는 모습
바지가 홀라당 벗겨지면서 체면을 구기고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천하디 천한 부정한 모습을 안 갖추겠다 라고 하니까
이것을 주님께서 까발리시면서
이런 우상과의 차이로써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이라는 특이성 곧 부정함 이겠지요
남자와 상대적인 더 부정한 여성성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지혜를 나타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 이거든요
그냥 교회가 아니라 그냥 신부 아내가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써

반드시 베드로는 마귀를 거쳐서
우상을 거쳐서
아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수 밖에 없는
예수님의 대상물로써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믿음의 대상물로써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 베드로를 꾀는지
꾀는 속이는 그 마귀의 실상을 우상의 실상을 거쳐서
자기 자신의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시더라 라는 겁니다.

아무리 최고의 범죄인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한 것이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힐문 조차 안되는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는 이 십자가의 피 공로를 보여주시고자 했던
주님의 믿음을 보여주시고자
들을 귀 없던 베드로는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믿음의 눈을 믿음의 귀를 선물로 주셨다는 거죠

그럼 마귀의 정죄는 뭡니까?
왜 너가 하지 않았느냐 라고 자꾸 책임을 따지고 묻고 정죄하는 것이 마귀 곧 우상이거든요

하라 하지말라가 마귀의 질문이자 정죄입니다.
즉 너가 대상물로 삼은 예수를 왜 버렸냐 라는 거죠
여기에 베드로의 대답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신다 라고
자신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의 대상물이 되어버렸기에

더 이상의 꾀는 없다 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가 이렇게 또렷한데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십자가의 희생 곧 사랑이 이렇게 또렷한데

선과 악이 그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거죠

그러니 막살지 않겠노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또 속일려고 하는 수작이 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이런 우상에 미쳤어요
결국 돈 벌이가 되거든요
즉 미움을 받지 않겠노라 라는
70인의 장로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의 의로움은
미움을 받는 더럽기 짝이 없는 부정한 자만 골라서 찾아다니시는
인자 로써 오신 겁니다.

인자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우상(애굽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선악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과의 차이로써

젖먹이로써 오신다는 거죠

아니 누가 이 젖먹이 에게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 젖먹이 되신 예수님 당신에게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겠습니까 라고 보겠냐 말이죠

나는 젖먹이 이신 당신의 대상물입니다
저야 말로 우상숭배자인 개같인 이방인으로써 당신이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셔야만 하는
의사의 대상물인 환자 맞습니다 라고

누가 젖먹이 에게 살려 달라고 하겠냐 말이죠

모든 사람이 반대로 젖먹이를 살릴려고
70인의 장로들처럼
지극히 정상인처럼
그것도 지극 정성으로 아이를 살리고자 말이죠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국가 자체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종교이니까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70인의 장로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이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했겠냐 말이죠

예수님 당시의 가룟유다가 그랬거든요
가룟유다의 소원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이스라엘의 독립이다 말이죠

이 선한 의지에 예수님은 완전히 딴 짖만 하고 계시는 겁니다.
부정한 자만 골라서 돌아나녀요 글쎄

이미 완성된 천국이다 라고 말이죠
가룟 유다 눈에는 완전히 미친 놈이 되는 거죠

현실 곧 로마 압제
한국으로 치면 일본 지배 아래에 놓여진 현실을 부정하고
뭐 천국이 이미 다 이루어 졌기에
부정한 자 만을 찾아 돌아다닌다?

이거 완전 똘아이 아니냐 말이죠
30냥 백냥 천냥에 팔아 넘겨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현실을 무시하고 말이죠
홍콩 사태
계엄령 위수령 사태
이엠닭그네라는 적폐청산 해야할 현실을 무시하고

뭐 천국이 이미 다 이루어 졌다 고라 고라 고라~~~~~

천국은커녕 지옥 같은 현실 밖에 없잖아요
70인의 장로가 바로 그래서
지옥 같은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미리 민주주의 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종교이거든요
독재만 종교인게 아니다 말이죠
민주주의 또한 우상 이다 말이죠

지옥이 되기 전에 뭔가를 해서 저주를 피하도록 지옥을 피하도록 하자 라는 것이
이미 지옥인 것이다 말이죠

우상숭배의 목적과 동일하거든요

민주주의 라는 우상을 섬기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죠

손익계산을 따지는 내 자신이 어느 것이 좋은가를 통해서
그때의 신체성에 따라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결국 인간 자신의 신체 중심이지

누구 누구의 아들 기준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상이다는 겁니다.

이런 우상성을 지적 받기 위해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비밀 비유로써의 천국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즉 천국이 다가와서
천국의 대상물이 되어서
천국이 직접 알려주지 않는 이상

인간 쪽에서는 풀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비유를 증거하시는 겁니다.

즉 반드시 엉터리 해석을 하도록 해서
그 엉터리 해석을 비켜가는 식으로써

마치 어떻게 하냐 하면
아무리 예수님 쪽의 해석에 동의를 할려고 해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까봐
도저히 다가갈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치 니고데모 라는 바리새인이
밤에 몰래 찾아오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의 성경 지식은 탐나고
바리새인 집단으로부터 왕따 미움은 당하면 안되고
그렇게 자기 따나 지극 정성으로 선한 의지로 다가왔건만
예수님에게 삔잔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선생이면서 이것도 모르냐 라고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단절성의 말만 골라서 하더라 라는 겁니다.

성령이 단절의 영이거든요
그런데 자기자신은 자꾸 어떻게 해서든 연결 시켜 볼려고
동일시 해 볼려고 아무리 다가갈려고 해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야 말로 말 그대로 단절 감만 느낄 뿐이다 말이죠

그 반대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이 막 들어가요
막 쳐들어 가요
유대인인 예수 당신이 어찌 우리 사마리아인과 상종 함께 말을 건내 주고 받을려고 하느냐

상종치 않는 단절 아입니까

맞다 나는 단절만 찾아 다닌다 라고

단절만 찾아 다녀야
그런 부정한 인간이 뭔가를 주님께 바라고 다가갈수가 있겠냐 말이죠
소위 선한 것을 들이내밀수가 있겠냐 말이죠

오로지 환자 곧 부정한 자는 나 이거 고쳐 주세요 라고
부정한 것만 외칠 수밖에 없는
의사만의 기능을 환자의 입에서 나타낸다 말이죠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이성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공의 곧 거룩이다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라는 말씀을
자기 쪽에서 실천 할려고 하니까
거룩을 대상물로 삼아서
자기가 거룩 할려고 해요 글쎄

이것이 우상숭배자들의 특징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까 그 거룩의 대상물이 되었기에
나는 오히려 부정한 자리에서
환자의 자리에서
의사를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의사의 기능인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완전 정반대 이지요

이런 십자가의 지혜는 교회사람들로부터도 미움을 받도록 되어 있어요
교회 사람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마귀의 세가지 시험 중 2번째가 종교 아닙니까?
미움 받지 않을려고 교회 다니는 자들 아니냐 말이죠

70인 장로가 그랬고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가룟 유다가 그랬다 말이죠

로마 침략 이라는 이 부정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이것 때문에 70인 장로가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드린 겁니다.

이해가 안된다 굽쇼?
천만의 말씀

교회에서 하는 짖이 다 이거 밖에 한 거 없어요

나 자신을 위하여
예수든 하나님이든 십자가든 다 끌어모으는 이 탐심
이 우상숭배 밖에 한 것 밖에 없다 라는 것을

십자가는 밝혀 보여주는데

들통 당하지 않는 자는
70인의 장로들과 다르다 라고
또 자기자신을 성경말씀과 일치 시킬려고 하지
단절성을 모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여전히 인자 곧 누구 누구의 아들 보다

애굽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성화론자들과 다를바 없어요
자기 자신 쪽에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십자가이든 대상물로 삼는 짖에서
때려 죽어도 손 못 떼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다는 겁니다.

그런 우상숭배문제를 인간 쪽에서 손 땔 리가 없기에 말이죠

천국은 그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좋은 진주 곧 이스라엘의 특이성 곧
탕자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아버지의 사랑만
십자가의 피 용서만 받은 그 긍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먼저 떳기에
인자가 장대 높이 먼저 달리심이 먼저 떳기에
그 증상물로써

불뱀에게 물린 자로써
부정한 자로써
고아 과부 나그네로써

주님의 의사 됨을
희년을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도록 되어 있는 새노래꾼들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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