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 천국과 그물 비유와 세상 끝 (마 13,47-50)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계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16:15, 개역)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 13:47, 개역)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개역)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개역)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개역)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13:47, 새번역)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마 13:48, 새번역)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마 13:49, 새번역) 『세상 끝 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마 13:50, 새번역) 『그들을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니,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물고기 입장에서 그물은 드디어 물고기 자신을 죽이는
심판하는 살육하는 기계와 같은 겁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살육하는 기계의 활동을 무시 합니다.
곧 천사들의 활동 말이죠.

그러나 늙어 죽기도 전에 그물을 펼쳐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세상의 끝을 당기는 셈인 거지요
이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천사요 
종말의 영인 성령 곧 십자가의 영이요
그라고 바로 천국이다 라는 겁니다.

천국비유가 앞에서는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표현이 되다가
갑자기 그물까지는 몰랐는데
세상 끝과 불구덩이까지 나오니까
앞의 느낌들이 다 깨어지는
아주 아주 부정적인 느낌이 확 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 쪽에서 상상하는 천국관들이 다 깨어지는 것이겠죠
이런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인 바리새인을 통해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똑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천국비유가 아니였다면
다들 소경이 소경이 인도하는 식으로
다들 엉터리 천국관으로 인해
다 지옥 갈 수 밖에 없었다 말이죠

그러니 내 쪽에서 출발하는 신앙을 포기 하라 말이죠
주님 쪽에서 나를 대상으로 삼아서 주시는 믿음만 챙겨 먹기 바쁘다 말이죠

그것아 오늘 나오는 천국 비유인 그물 비유인데

바로 앞의 글 에스겔 9장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야말로 모욕적인 구원이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웃끼는 것이
자기가 실천한 거룩한 말씀이 거룩인줄 알고
자꾸 남들을 정죄한다 말이죠
겨우 딸랑 몇 개 지켰다고 착각해놓고서 말이죠
얼마나 수 많은 것은 안 지킨채로 말이죠
더 웃까는 것은 하나 어기면 다 어기게 되는 도미노 율법인데
하나 지켰다고 겨우 딸랑 하나 지켰다고 다 지켜버린양 육의 자랑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왜? 못 지켰으면 부끄러울 뿐인데
자꾸 지켰다고 우기니까 정죄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야 자신이 지킨 거룩이
저들과의 구분짖기로 나타나야 하니까 말이죠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듯이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위험해 지는 겁니다.
그 위험을 알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지키면 된다고 하지만 
막상 속을 빡빡 긁어보세요
조심한다고 될 문제인지?

이거 저도 많이 실수를 했지만
또 역시나 남들에게도 무지 이거 당했지만
당해 놓고도 또 남들에게 그들이 나에게 했던 짖을 나 또한 또 하니까
이것이 자꾸 악순환만 될 뿐이지
이 의문의 반복을 누가 끊어줄 자가 없는 겁니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멋들어진 신앙 즉 믿음 (곧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아서 믿는 믿음)
누구든지 다 알아 먹는 정말 정말 말이 되는 구원
너무나도 고귀하고 숭고한 믿음을 꿈꾸웠건만

이거 뭐 완전 모욕스러워도 너무 너무 모욕스러워서
얼굴이 빨개 질 정도로 
왜 내 대신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냐 말이죠 (모욕적인 십자가가 나를 대상물로 삼은 믿음)
그 모욕의 십자가 저주를 말이죠

찬송가였던가요? 가스펠인가?
찬송가는 그 당시의 대중노래에 가사를 붙인것이니까 가스펠이나 찬송가나 마찬가지 입니다만

왜 날 사랑 하냐 말이죠

1.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사랑하나
후렴 : 왜 날사랑하나 왜 날사랑하나 왜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사랑하나
2. 그 손발 날위해 찢기셨네 왜 날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사랑하나
3.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사랑하나 죄용서 받을수 없었는데 왜 날사랑하나

도저히 말도 안된다 말이죠
어떻게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하냐 말이죠
이것이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이 아니요가 먼저 선행이 되고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라고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인간 쪽에서는 나올수 없는 사랑이니
이 사랑이 아니면 천국 가는 길은 없다 라고

바리새인 쪽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안 통한다는 것을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바리새인을 보여준 겁니다.
즉 내 쪽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천국을 갈 방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도리어 그물이 덮쳐지는 판국이다는 거죠

사랑 받을 자격이나 그 어떤 조건이 없어요
죄 용서 받을수 없다 말이죠 아무리 따져 보세요 있는가?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말이죠 납득이

오죽 하면 탕자를 모으시고자 암탉이 자기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에 모으듯이
몇 번이나 그랬냐 말이죠 그런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원치 않는다
맏아들아 맏아들아 너는 원치 않는구나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아니 맏아들 말이 안 맞나요?
맏아들 말이 말이 되요

그런데 탕자쪽은 말이 안되요
그 말도 안되는 탕자를 예수님이 아무 값없이 용서하는
그 용서는 더더욱 말이 안되어서
오죽 하면 다들 거부를 할 정도이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용서하냐 말이죠
이것이 천국이다 곧 인간과 안 맞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이 사랑만이 진짜 구별 구분 영원히 갈라놓는 겁니다.

사랑 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없어요
구원 보다 세상에서 가장 모욕적인 것이 없어요
사랑이 오죽하면 죽어가면서 이루거든요 화목제물이 되어서 말이죠
아무런 조건이 없이 말이죠

이것을 사람들은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미련하거든요 어리석거든요 즉 부정적이다 모욕적이다는 겁니다
또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를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무엇이? 사랑이, 오늘 본문으로 치면 천국이, 곧 그물이 말이죠,

그래서 사랑 보다는 법이 편해요
부담이 덜 해요 위험하지 않아요
불편하지 않거든요 법이 말이죠
그런데 사랑은 불편해요 불온 해요 이것을 숭고함이다는 겁니다.
거리끼는 걸림돌 이다는 겁니다. 숭고 곧 불편한 거룩 말이죠.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덴져러스 위험해요
막 죽어가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냥 가만히 그 사랑 곧 십자가로 인해 영원히 갈려 짐만을 당하면 될 것인데

맏아들이 그럴 인간입니까? 이미 인간 속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갈라놓는
구분짖는 그 기준들이 있다는 겁니다. 내 쪽 인간 쪽에서 갖추어 놓은 자기 의로움

그래서 율법을 죽으라고 지켰다 말이죠
그런데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의 공의 삼일의 간극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공의 라는 불편함 모욕적인 화목제물로 말미암거든요.
곧 부조리한 십자가인 요나의 표적 외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요나의 표적 보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행복, 구원이 더 편해요

그래야 불편하지 않고 편하거든요
자아가 발전하고 높아질려면 미리 구분짖기를 해서 갈라놓아야 하거든요.
그것이 선악의 법 법 법 이다는 거죠

저 세리와 거리두기 구분짖기를 해야 걸리적 거리지 않아요
불편하지 않아요
저 탕자와 자신을 구분지어야 정죄를 해야
내가 발전을 하거든요
저 사마리아 구역을 들어가지 않아야
더더욱 거룩에 매진 율법에 매진하게 되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만나면
강도만난 자를 만나면
더더욱 제사장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어요
누가 편한 이웃을 만나고 싶지
불편한 이웃
원수를 사랑 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욕적인데

그 선악이(울리는 꽹과리가)(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지금 창조주의 창조 앞에서 그만 들통나는 겁니다.
창조란 시작이란 곧 마침이거든요 종말이다 말아죠
오늘 나오는 그물이다 말이죠
이 종말 앞에서 창조 앞에서 들통나는 겁니다.

왜? 세상을 선악으로 창조하지 않았거든요
은혜로 용서로 창조하셨거든요
그리거 선악으로 세상을 멸하시느게 아니라
은혜로 용서로 세상을 멸망 종말 시켜 버리시는 겁니다.
이 얼마나 모욕적이겠냐 말이죠 선악을 따지는 인간에게서 말이죠.

그러니 율법을 지켜도 법만 있고 사랑이 없는 자는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모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름이 없거든요
패쓰워드 비밀 비유를 붙여 버렸어요
아무리 암호해독을 해 보라 말이죠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아니 누가 지금 펄펄 살아 있는 자기자신에게
세상 끝이라는 죽음을
종말을 미리 확 당겨 보세요 기분 좋은가?

이제 드디어 부자가 창고를 넓혀 짖고서 이제 그 동안 창고를 짖는다고 수고를 했으니
내 영혼아 이제 편히 쉬자 라고 했는데
주님의 손이 갑자기 확 나타나서
그물을 던져 버리는 겁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모잘라 모잘라 함량미달 이라고 손가락이 갑자기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막 써 보세요
얼마나 모욕적이겠냐 말이죠
성전을 장악해서 드디어 거룩을 소유물로 삼았는데
삼으면 뭐 합니까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그 창고의 보물 누구것이 되겠냐 말이죠.

그것이 천국인데 누가 이런 천국을 앞당겨 누릴려고 하겠냐 말이죠

모든 기준이 창조주와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주에게 모든 기준이 달려 있는데
저울에 달아 보니 택도 없는데
아무리 창고를 늘려 본들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오늘밤 목숨을 취하는 종말을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 버리면 말이죠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누구 기준으로 사느냐 라는 겁니다.
내 기준이 아닌
저 천국 기준
그물 기준으로 살아야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모욕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럼 내 인생은? 내 창고는?
아니 내 인생이라는 것이 없데두?
나의 소유물 이라는 것이 없어요
내 육체 마저도 내 것이 아닌 판국에!!!

그렇다고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말을 땡기고자 자기 죽음을 스스로 땡기는 자들이 있는데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으면 그랬겠냐 말이죠
엘리야도 요나도 차라리 날 죽이라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라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죠
모욕 당하기 싫다 라는 겁니다.
모욕적인 구원이 싫다 라고 말이죠
하나님으로부터 배신 당하기 싫다 라는 겁니다.

그런다고 모욕적인 구원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이런 멋들어진 구원이 오히려 가짜임을 들추어내시면서
그 엉터리 구원을 거쳐서
이 모욕적인 구원이 아니였으면
곧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동행하지 못했으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 였을 것이다 라고
반드시 고백케 만드시는 겁니다.
이런 원수도 용서 하시냐 라고 
다윗언약 다윗에게 창조주로 나타나셨듯이
요나에게도 그렇게 하셨기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을 거쳐야
멋들어진 믿음이 오히려 우상적이고
세 번 부인 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의 자리에서
원수된 자리에서 사랑을 쳐다 보게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게 하시는 겁니다.

아무도 못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이구나 임을 알아라 말이죠

고맙게도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천국을 훅 하고
우리 속에 투하 시켜 버리십니다.

갑자기 그물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어떤 영화 제목 같은데?
아 맞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이라는 영화의 제목이였지요?

쉽게 말해서 돈벼락 맞듯이
천국이 하늘에서 막 쏟아집니다.

자 그럼 이 땅은 천국이 될 줄 알았는데
돈벼락이 막 떨어지면 이 땅이 살기 좋은 천국이 될 줄 알았는데
음식이 막 떨어지면 배고픔이 사라지는 천국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이 그랬고
지금 이 글을 적고 있으면서도 저 또한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이런 천국을 확 깨는
누구 말 마따나 술먹은 사람들이 술 확 깬다 라고 말하듯이
확 깨버리는 진짜 구원은

그물과 같은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모욕으로
심판으로 몰아 넣는 것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마치 애굽에 이스라엘을 탁란 시켜서
이제 다 자랐나 보자? 아직 덜 익었네
더 익어야 겠네 라고 해 놓고서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만들어서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이스라엘을 괴롭히도록 해서
아 그래 내가 곧 가마

드디어 포도가 다 익었구나 추수하마 라고
출애굽 출예루살렘 출 세상 이라는 구원을 펼치신다 말이죠

이 땅을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거든요
그러나 땅에 속한 자들은 탈출할 곳이 없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자녀들은 탈출해야 하는데
떠나야 하는데 자꾸 뒤돌아 서는 겁니다.
창고를 늘린 부자에게만 해당 되는게 아닙니다.
갑자기 손에 쥔 빵깨이 소꿉놀이를 다 중단하고
손에 묻은 모래 돈 다 털어버리고
대식아 저녁묵자 라고 외치면
다 손 떼고 손 털고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이 보여주는 비밀이다 말이죠

그런데 손 털 생각 없이
불러주는 자가 없으니
타짜 영화처럼 아귀랑 자꾸 도박을 하는 겁니다.
이겨 본들 의미 없어요 의문의 반복 뿐이다 말이죠
동작 그만 심심하면 동작 그만 이래요
심심하면 내 손모가지 건데요 글쎄

불러주는 엄마가 없으니 소꿉놀이 빵깨이를 계속 해야 하는 겁니다.
하기 싫어도 말이죠
그 불러주는 엄마가 바로 오늘 나오는 그물로써 비유로 증거되는 천국입니다.

이름을 부르짖지 아니하던 백성에게 
부르심바 되고
이름을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으신바 되도록 하시겠다 라고

그 이전에는 부른적도 없고
뭐 이름을 알아야 부르든가 말던가 하지요
심지어 이름도 없다 라고 했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고 했는데

아이고 뭐 그까짖꺼 대충 이름 불러달라고 하니 뭐 이름 불러 주면 될꺼 아니냐 라고 하는데

단어 문자가 아닙니다 주문입니까? 문자를 부르게?

정작 그 이름을 몰라요 글쎄
이름을 알아야 부를꺼 아닙니까

텅텅 비어있는 공백입니다
동그라미로 쳐져 있는 빈공란입니다.

그 정도로 더더욱 말도 안되는 것이 이름이 없어요 글쎄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 30:18, 쉬운) 『그러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며, 너희를 위로하기를 원하신다. 주는 정의의 하나님이시므로, 누구든지 주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롬 10:13, 새번역)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욜 2:32』
(욜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 구절을 볼때마다 기생라합이 생각이 나는데
놀랍게도 누구든지 라고 해서 아무나 다 가능하다고 보는데
오히려 정반대 였다 말이죠

기생라합만이 간담이 녹을 정도로 40년 동안 벌벌벌 떨었다 말이죠
아니 그 어떤 누구도 이름 때문에 벌벌벌 떠는 자 봤나요?

누구든지 이 이름을 듣고 벌벌벌 40년 동안 간담이 녹아서 벌벌 떠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가 되는 겁니다.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는다 라고 말이죠
이 얼마나 모욕적이냐 말이죠

그 정도로 누구나 라는 말이
아무도 없다 라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부를 수 있는 즉 대상물이 되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 반대인 거죠

아무도 안 떤다 라는 겁니다.

없어요 잠깐 그럴수 있으나 피하면 안 그렇잖아요
깡패를 피해 멀리 있으면 말이죠

아 그런데 이미 멀리 있어요
그저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말이죠
지나가는 소문을 듣고 벌벌벌 그것도 한 번 듣고 40년 동안이나?

바로 이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누가 40년 동안 벌벌벌 떨어야 할 정도로 굴욕적인 구원을 바라겠냐 말이죠

심지어 기생 라합이 숨겨주고 있는 이스라엘 조차도
그것도 홍해를 건넌 민족 조차도 부르지 않는 이름을 말이죠

아 맞다 아까 뭐 적을려고 했는데 까먹어서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앞의 글이였던가?
아무튼 
또 까먹을까봐 바로 여기에 적으면
광야에서 멋들어진 믿음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싶었는데

주님은 우리를 처참하기 짝이 없도록

제발 원망해라 제발 원망해라 어쭈 이래도 원망 안해 라고
원망 안 하고는 못 배기도록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해서
기여이 법궤 안에 아니다 여기서는 증거궤
즉 요놈 잡았다 증거 잡았다 라고 증거궤에 담고자

기여이 원망한 증거물을 하나는 십계명 두 돌판 그냥이 아닌 깨어진 두 돌판이다 말이죠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 두 돌판이 깨어졌다 라는 것은 초반 시작부터 인간은 율법을 지킬수 없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 모세 조차도 율법을 마치 여호와의 법궤를 소유할려고 하면 할수록
어딜 감히 더러운 인간이 라고 웃사처럼 즉사 하고 벧세메스 족속처럼 오만 70명이 뚜껑 열다가 다 죽도록 하셨듯이
이미 인간의 그 어떤 선함도 법궤를 만질수 없도록 하시듯이
모세가 열받아서 율법 두 돌판을 깨뜨렸다 라는 것은
일종의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인 종교 문제 곧 남들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사랑하겠노라
그래서 끝까지 사랑 받고야 말겠노라 라는 이 종교문제 교리문제가
출발 자체부터 틀려 먹었다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사
그 증거물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을 증거궤에 담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한 원수임의 증거를 잡아서

그 원수를 종교 라는 666 곧 행함이 아닌
십자가의 피 용서
이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다른 구원의 길은 없도록 했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인 십자가의 저주 외에는 말이죠

그 십자가 상의 원수를 왜?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기에

그 원수를 용서하신 허물을 다 덮어버린 사랑을 어깨에 매도록 했다 라는 겁니다.

이 모욕이 나를 구원했다 라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더라 말이죠
말이 안되는 모욕이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반대로 가장 작은 아이성을
말이 되겠끔
전혀 모욕적이지 않은
멋들어진 기적 멋들어진 구원을 이루고자
세 번 씩이나 공격해도
훨씬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못 이기는 겁니다.
말이 되도록 했는데 왜 안될까요?

모욕적인 구원을 무시했거든요

실컷 최고의 성 여리고성은 무너뜨렸는데
가장 미약한 성 아이성은 못 무너뜨리는
이 모욕적이게 수치스럽게도 아이성은 택도 안되는 겁니다.

골리앗은 말도 안되게 이겼는데
젖먹이는 아무도 못 이기는 겁니다.
젖먹이 보다 강한 자가 없으니까 말이죠
말도 안되는 구원이거든요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한 겁니다. 말도 안된다고
그래놓고 맏아들 자신이 말이 되는 것들을 나열하는 식입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어긴적이 없으니까 이게 말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모세의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은 종교 문제로써
종교로는 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런 모욕젹인 말도 안되는 구원을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서는
모조리 다 말이 되겠끔 바꾸어 버렸고
이런 마귀가 이미 다 장악한 유대인을 어땋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지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이 다 들통나는 식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천국으로써 침노 침략 예루살렘을 탈환해서 거기서 
십자가의 저주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완성하셨기에
정 구원 받고 싶으면 이 하나님의 모욕적인 심판을 받으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시는 거죠

너희가 마귀를 타 넘어서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을려고 할게 아니라
내가 타 넘어 갈게 라고 종교문제를 지적 하시는 겁니다.

율법 지킬 생각 말고 내가 율법의 완성이 되는 사랑이 되어서

사랑 하마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는 니 남편을 바로 죽여 버려서
너를 생과부 만들어서
너의 전남편인 율법과 차이나는 새남편으로써 너를 책임지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원망하도록 만드시는 거죠
환자 죄인 만들기 하시듯이
생과부 만들겠다 라는 겁니다.
왜? 새남편이 이미 떴기에

전남편 율법은 자꾸 나에게 책임을 묻는데
새남편은 새남편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더라 말이죠

그런데 한국교회는 거꾸로죠 자꾸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요 글쎄 
사기꾼들입니다.

이렇게 마귀가 심어버린 메시아관으로 메시아를 바란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를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는 자기가 메시아가 된 것이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의 시험을 마귀의 모습을
들통내고 까발리는 것이 바로 오늘 나오는 그물 비유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그물처럼 마귀가 심은 것들은 하나 하나 가려냅니다.

그 다음 증거궤에 담길 물건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
곧 니만 지도자 하냐 나도 지도자 하자 라는 정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 즉 경제 문제입니다
돌을 떡덩어리 되게 하라
고기 달라 라고 해서 고기 줘서 다 죽여버립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죽었어요

도리어 그물이 된 겁니다
오늘 천국 비유처럼 말이죠

결국 진짜 천국은 우리는 구원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을 원하지 않아요

이미 마귀의 세가지 시험처럼
나는 나를 구원하고자 나를 메시아로 삼은 것을
천국이 들통내니까 그 천국을 죽여버렸듯이
천국은 이런 내막을 들추어내지 않으면 가짜이기에
참으로 모욕적으로 우리를 발가벗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우리를 마귀에게 장악당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펼치시는 천국 곧 복음이다는 거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를 죽이고 내가 보낸 자를 돌로 쳐 죽이는 자여
맏아들아 맏아들아 탕자를 모을려고 하니까 원치 않는구나
돌로 쳐 죽인다 라는 말은 결국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인간의 역사는 한치도 벗어난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묵시에서 성경말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는 인간은 없거든요.
철저한 단절입니다. 그야말로 모욕이다 말이죠
자유? 웃끼는 소리죠 자유의지? 개나 줘 버려요
십자가 외에는 모욕적인 구원 외에는 예정된게 없어요.

(마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눅 13:34,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 정도로 천국을 원하지 않아요
메시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미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탐욕 곧 우상숭배에 빠진
자기자신이 메시아 곧 우상이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천국은 곧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는

이미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메시아임을
모든 인간이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음을

저 마다 메시아 다움과 구원자 노릇
곧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라고

저 마다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들 구원자들 속에서 구원을 구원하는 것이 메시야 이고
저들 애굽 동산 같았더라 라는 가짜 천국에서 천국을 구원하는 천국이 진짜 천국이니까

진짜 메시아이신 구원자는 반드시 인간의 구원을 깨뜨려야 하고
(마치 모든 학문이 인간구원이 목적이듯이 특히 인문학인 철학은 더더욱 그렇잖아요)
진짜 천국은 가짜 천국인 모든 인간의 천국관을 즉 종교죠 모조리 다 깨뜨려야 한다 말이죠

십자가 라는 모욕적안 구원은 왜? 하나님의 저주 이기에

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이게 구원이다 말이죠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엉터리 자기 구원과 동행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와 동행하라는 겁니다.
물론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대상물로 삼으라가 아니라

거꾸로 십자가가 나를 대상물로 삼고자 다가온다는 겁니다.
천국이 그물처럼 나를 잡고자 말이죠

내가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대상물이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는 십자가 라면
가짜 십자가 이다는 거죠

또렷히 밝히 보이지 않는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또 반복인 속임수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오늘 나오는 그물 비유가
얼마나 부정적이고 모욕적인지

하늘에서 그물이 내려와서
나의 끝을 확 땡겨 버리는 겁니다.
(누가 원하겠냐 말이죠 아무도 원치 않는 이 모욕적인 구원을
출애굽을 아무도 출 탈출 하고파 하는 마음 추호도 없었다 말이죠)

어차피 인간이나 물고기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죽어요
그런데 그물은 그런 융통성이 없어요
바로 단절 뿐입니다.

미래의 죽음을 지금 확 당겨 버리는
지금 현재로 만들어 버려요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우짤래 라고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그래여 엉터리 구원
엉터리 천국을 거쳐서

그 차이로
우상과의 차이로써 증거되는 모욕적인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동행 시키는 겁니다.
모욕적인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와 함께 동행 하는 겁니다.
내 개인 적인 모든 것이 다 날라가요
자 이러니까 개인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 되어요
머리 때문에 머리 되신 예수님 때문에
안그러면 다 소돔과 고모라일 뿐입니다.
단물만 빨아 먹고 뱉어버리는 가버나움일 뿐이다 말이죠
방구석 1열을 통해 가버나움 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던데
꼭 봐야 할 것 같더라구요

종말의 판대기 곧 그물을 펼쳐 깔아서
그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와 함께 동행하는 겁니다.
이 단절과 이 모욕과 동행하는 겁니다.
분명 단절 곧 죽은 자 같았는데 산 자요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9, 새번역)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꺾으신 뼈로 기뻐한다 라는 겁니다.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공의로 인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은 즉 화목제물 되심을 믿은 최초의 사람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말이죠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언약이 아니다 말이죠
우리는 할례를 행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하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공의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
찢으셨으나 다시 꿰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

즉 이사야 이오팔 이사야 25장 8절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계 21:4, 공동)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이사 25:8.』

사 25:8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사망을 멸하시고자 사망 속에 들어가셔서
잃어버림을 당하시고자 다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이 하나님의 공의
의로움 거룩이
이 삼일의 간극이

유일하게 우리의 모욕을 대신 수치를 대신 감당하신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 스러운 의 
하나님의 믿음
곧 언약, 약속입니다.

보라 내가 이 새약속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복음에
이 그물 같은 천국의 증인으로써
이 복음의 증인으로써
인자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외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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