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 남을 7번 용서하는 게임중독 (마 18,21-22)
(마 18:21, 개역)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1, 새번역)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 ㉭또는 '신도'』
(마 18:22,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 ㉠또는 '일흔일곱 번까지'』
사람이 일평생 살 동안
과연 몇 번의 용서를 받아야 할까요?
7번?
요즘 애들 말로
장난하냐? 가 되는 겁니다.
소위 이것을 값어치로 매겨 봅시다
평생을 살면서 과연 7번의 용서로만 살수 있을까요?
하루에 사람이 거짓말을 10-200번 정도 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더 기가막힌 연구가 있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의 첫대면의 10분 사이에
평균 3회의 거짓말을 한다 말이죠
베드로가 30? 40? 평생 살면서 남을 7번 용서 했다면
남은 인생 동안 얼마나 더 용서를 해야 할까요?
오죽 힘들었으면 저런 말을 할까요?
그 정도로 어렵다는 겁니다.
그 당시 평균수명을 모르니까 40대면 평생을 걸친 용서요
80이면 앞으로 7번 더 해야 할 거 아니겠냐 말이죠 총 14번?
이것을 값어치로 환산해 봅시다
돈 이야기 해야 눈이 확 뜨이지
고리타분한 이야기 하면 잠만 오죠
돈 이라는 것은 단순히 만원 5만원 이라는 지폐를 두고 말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은 그 돈에 믿음을 부여하게 되니까 말이죠
결국 인간은 이 돈과 자신 또는 인간 자체를 바꿀수 있는 (인간과 돈이 동일시 된)
목숨 값과 연결 시킨 믿음이 들어가니까 말이죠
소통이 되는 겁니다.
예로 물물교환 할 때 나는 쌀을 가지고 왔는데
저쪽은 종이로 접은 딱지를 가지고 왔다고 칩시다
쌀 속에 그 동안 투자가 된 시간과 정성이 담겨진 마치 그릇(공간,몸,박스,신체)처럼 말이죠
그런데 종이딱지는 몇초면 된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동일한 가치로써 교환을 즉 소통을 하냐 말이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소통이 될 턱이 없는 이유가 이러하다 말이죠
급이 안 맞잖아요
가치가 서로 서로의 급이 맞아야 소통이 되는 교환이 된다 말이죠
동일한 가치가 안되면 물물교환이 안되고
믿음! 아 여기서는 믿음이라고 하지 말고 신뢰 라고 해야 갔구나(김정은)
왜냐하면 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 이라는 책에 믿음이라는 용어를 썼길래
언급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의 표현으로 하자면 선악이 안된다 말이죠 666만이 이 세계에서 소통이 되어요
소통이 되지 않는 믿음(선악=하나님 됨, 호모 데우스)는 도태 되어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믿음 이라는 용어를 그 책에서 섰을 정도로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점에서
믿음 곧 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돈은 곧 신입니다.
돈 자체가 종교가 되었다 말이죠
WCC 종교연합운동 백날 해 봐라 말이죠 택도 없어요
각자의 자기 지분을 포기 못해요
그런데 한 순간에 포기 하도록 만드는게 있어요.
돈은 종교까지 다 통일시킨다 말이죠
그게 666 아니냐 말이죠
사실상 간판만 다르게 달 뿐 이미 통합이 되었죠
통일이 된 겁니다.
기독교도 666이고
불교도
천주교도 이슬람도 다 돈 외에는 믿지를 않아요.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들만 몰라요
아무것도 아닌 종이조각인 돈이 어떻게 신이 되었을까요?
인간이 믿음을 부여했거든요 (상상력이 실재가 되어버린 최고의 잉여가 된 거죠)
예수도 돈이 안 되면 안 믿어요
돈이 되기에 믿어요
그러니 돈을 예수님과 함께 섬기잖아요
아무리 가난하다고 마음이 가난하다고 팔복을 산상수훈을 지켜도
주님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막 10:23, 개역)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그러니 자본주의 자체는 정신병으로 움직이니까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안티오이디푸스
정신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정신병자가 되기로 했다 이것이 탈주방법이다 라고)
안미치고 싶으면 돈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못 벗어나죠 (마치 자본가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습득하니까 이런 자본가들 손에서 벗어날 인간들은 아무도 없다 말이죠 우상에서 벗어날 자가 없듯이)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신체처럼 그것도 하나님과 같이 된 신이 된 신체처럼
돈에게 시간과 공간 곧 역사를 부여함으로써
최고의 가치 곧 목숨 값으로써 돈에게 믿음을 부여한 겁니다.
아무튼 시간과 공간을 부여함으로써
월급 이라고 하죠
한 달 이라는 시간의 노동(인간의 몸, 신체, 공간이 움직여서 수고한) 값 이니까 말이죠
오늘 본문에는 그 노동을 용서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처럼 반드시 숫자를 언급합니다.
몇 번? 7번
과연 7번의 용서로 평생을 살 수 있을까요?
마침 다음 구절인 다음주에 할 내용이
일만달란트 인데
달란트가 요즘 시세로 하면
검색을 하니 2015년 시세로 5년 전의 시세로 치면 7억 2천이라고 하네요
한 달란트가
여기에다가 일만을 곱하면 7조가 되는 거죠
어 7조 하니까 누가 생각나죠 이땡용 삼땡
졸지에 45억이 25년 만에 7조 3천 9백억 15만 %의 수익률이 되었으니 마법이죠
15만 % 우와 대단하다 15만 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물론 다른 검색내용에서는 한 달란트가 20억 이라고 하니
20조가 되고
아무튼 이것을 시간으로 계산하면 15만년을 일해야 한다고 하더라 말이죠
자 그럼 이 일만달란트의 용서가
빌게이츠와 같은 세계 부자 1위 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요?
20조는 이들에게는 껌값인데?
그래서 시간으로 계산하니 15만년
즉 이 말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가장 쉽게 이해 할려면
예수님의 용서는 7에 70번 곧 일만달란트 15만년 짜리이고
베드로의 7번 용서는 백데나리온 3개월치(100일 노동 값) 용서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과연 3개월만 살 수 있는 인생 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80년을 넘게 살아야 하는 질긴 인생에서는 3개월 치 용서로는 못 삽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어찌 이스라엘아 자꾸 죽을려고 하느냐
제발 좀 살아라 살어 ~~~~~
왜 자꾸 3개월 치 만을 추구해서 자꾸 죽을려고 하느냐
왜 그딴 남 용서 7번을 영원히 살리겠다 라고 하느냐
주님은 반대로 율법을 곧 하나님의 법과 의를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영원히 살리시겠다 라고
7에 70번 영원히 용서 받는 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영원히 살리시겠다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3개월 치로는 못 삽니다
죽어요
제발 죽지 말라 말이죠
왜 자꾸 죽을려고 하느냐 말이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갚을 수 없는 15만년 치 탕감받는 빚 만이 곧 일만달란트는 살수 있고
3개월치 월급인 백데나리온으로는 못 산단다
그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그래 3개월치랑 엿바꿔 먹을려고 하니
제발 좀 죽지 말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어 ~~~~~~~~
즉 말을 괜히 빙빙 돌렸는데
하고픈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겁니다.
장난치지 말라는 겁니다.
뭐 7번 장난하냐? 라는 거죠
뭐 3개월치(100일 노동 값)으로 평생을 살라꼬 장난하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그럼 율법은 바로 예수님의 목숨 값
영원한 십자가의 피 용서를 영원히 살리고 살리고 하시겠다는 겁니다.
일만달란트와 같은 목숨 값과 백데나리온의 대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 이스라엘이라는 하늘의 백성이
왜 지옥의 땅이 백성이 될려고 하느냐
은혜가 왕노릇하는 백성이 될려고 하지 않고
용서가 왕노릇하는 백성이 될려고 하지 않고
가짜 용서(게임)라는 사망의 종 노륵하는 백성이 될려고 하느냐
그러니 제발 남을 7번 용서 하지 마세요
제발 이웃사랑 실천 하지 마세요
테레사 보세요
나중엔 게임 중독도 나이가 드니까 다 귀찮아 지니까
과연 하나님 있는 것 맞냐 라고 이제야 비로소 속마음이 튀어나온 겁니다.
아직 힘이 덜 빠지면 게임에 미쳐 있기에 아무리 옆에서 말해줘도 귀에 안 들어와요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거리의 노숙자와 같은 그런 사람을 도왔다고
이것을 sns 에 올려서
이것이 이웃사랑 실천인냥 주님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자랑을 하던데
장난 치냐 말이죠
그러니까 옥한땡 목사를 멘토로 삼아 살겠다고
우상숭배하겠다고 남에게 까지 과시 한다 말이죠
왜 자꾸 죽을려고 하느냐 말이죠
결국 이웃사랑 실천 했다고 하는 것은
소위 게임 장난에서 이기고 싶어 하는 탐심을
우상숭배를 자랑하는 거다 말이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말이죠
주님과 우리 와의 관계는 오로지 용서의 관계로만 형성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용서가 아니면
즉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사랑이죠
이 은혜가 아니면
가짜 용서인 삼개월짜리 게임 쿠폰으로 죽는 사망이라는 권력으로 자꾸
인간이든 신이든 모든 관계망을 잊고 연결하고 소통할려고 하는데 있어서
주님은 그 꼴 못 보겠다 라고
이 땅에 쳐들어 오신 겁니다.
자기 백성을 끄집어 내시겠다 라고
베드로는 지금 남 용서 해야 할 판국이 아니라
지금 주님이 바로 그런 베드로의 게임 중독에서 끄집어 내시겠다고
쳐들어 오신
장난 질 치고 있는 그 게임 세계에서
허구 세계에서
끄집어 내시고자
진짜 현실을 들이내미시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인간은 그 어떤 누구도 허구의 세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단순히 게임 오락실 피씨 방 PC 방에서 끄집어 내시는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베드로의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그 선악세계에서
그것이 누가 죄악이라고 보겠냐 말이죠
십의 일조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그런 세계가 종교오락의 세계인 마귀의 세계인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도리어 저 매국노 짓을 하고 있는 세리 삥뜯어서 로마에 바치는
저 세리가 마귀로 보이지
누가 그 반대 편에 서 있는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악마의 세계인줄
광명한 천사(성경에서는 마귀 라고 합니다. 처음 보신 분 오해 할라)의 세계인줄 누가 알겠냐 말이죠
바리새인처럼 철두철미하게 율법 지킨자가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고후 11:13, 개역)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개역)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개역)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결국 용서 라는 관계는 하나님은 오로지 용서하시는 분 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반대로 인간은 오로지 용서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이 용서 라는 관계에 놓여지는 겁니다.
다른 길로서는 이 관계를 형성 할 수가 없다 말이죠
이 용서가 바로 십자가에 피 흘리시는 저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심에 복종 하심입니다.
이 순종이 남을 7번 용서 하기를 지키는 제사 보다 낫다 라는 겁니다.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다면 교회는 지난 주 에도 언급했듯이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나누는 자들입니다.
내용 자체가 종말적이다 말이죠
즉 예수님의 죽음이 종말이거든요
내 죽음도 아닙니다.
내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듭니다.
옆으로 빠져야 해요
내 죽음이 심각해 지면 예수님의 죽음이 보일 턱이 있겠냐 말이죠
주님의 죽음을 보라꼬 나를 죽이시는 겁니다.
율법이 나를 죽여요
제발 죽지 말고 살라꼬
니 때문에 죽은 분이 너를 대신 해서 죽었따 라꼬
죽음의 자라에 내려가지 않으면 다른 분의 죽음을 볼 수가 없어요
지가 지 스스로 죽는 죽음 말고
율법이 나를 더더욱 죄인 되게 해서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더 이상 내 목숨은 목숨이 아닌 살아도 산 것이 아니구나
진짜 생명이 없구나
죽은 자와 마찬가지 이구나
어 그런데 그 속에서
그 바벨론 포로 속에서
마귀에게 잡혀 송사 걸린 베드로의 예수님 세 번 부인한 자리에서
십자가의 피 흘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만날 줄이야?
내가 예수님 부인 했다 그것도 세 번 했다 라는 것이
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심각한 축에 못 들어요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딴 죄책감이 밥 먹여주냐 말이죠
어딜 감히 7에 70번의 영원한 용서의 피 흘리심 앞에서
그런 배불러 터진 죄책감을 들이내미냐 말이죠
나중에 이 죄책감은 원한으로 변해요
그 한풀이는 살인의지로 변하구요
자기가 자기를 용서 못하고
모든 원인을 용서 못하게 된다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하겠다 라는 것은 한 풀이입니다. 게임 이다 말이죠
뉴스를 통해서 어떤 할머니의 원한이 계속 해서 돌고 돌아요
감사함이 없어요
마침이 없어요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아요
누가 이기나 보자 라고 나와요
그러다가 같은 편끼리 또 싸워요
일본은 신났죠 갑자기 할머니 편들고
딴나라당도 신났죠
이게 게임이 된 세상이다 말이죠
니가 뭔데 날 이겨 먹고 정치꾼이 될려고 하냐 말이죠
내 앞에 어서 무릎 꿇어라 라고 나온다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하겠다 라는 것은
남을 꺽겠다 라는 겁니다.
나는 절대로 막살지 않겠다 라는 것은
남을 꺽는 재미로만 살겠다 라는 겁니다.
이 선악의 세계는 주님은 찢으시고자 7에 70번 영원한 용서로써 오셨다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이 십자가를 무능하고 무가치하게 여겨
쓸모없다 라고 버렸는데
버리면 버릴수록 더더욱 머릿돌 되는
종말의 상황이 펼쳐지는 겁니다.
천국이라는 종말(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인)의 세계는
7에 70번 용서의 세계입니다 영원한 용서의 세계입니다.
얼마나 천국을 시시하게 봤으면
겨우 7번 용서로 천국을 탐하냐 말이죠
그게 지옥의 세계 인데?
자기가 잘났다 라고 하는 세계가 지옥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지옥은 재미가 넘쳐나는 천국이고
천국은 재미 때까리 하나도 없는 지옥이다 라고
그 기준 곧 재미가 누가 느끼냐 말이죠
주체가 누구 입니까
자기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지옥이 자기 자아가 되는 거죠
그 정도로 잘난 자가 자기 밖에 더 있냐 말이죠
남을 7번 용서 하는 잘 난 자기가 낫지
누가 도로 남으로부터 7에 70번 말이 그렇지 영원히 용서 받는
못난 자가 되는 것을 누가 원하냐 말이죠
그게 무슨 재미가 있냐 말이죠
신나고 재미난다 라는 것은 게임이다 라는 것이거든요
승부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요
승부를 붙여야 재미가 나요
지는 것이 신나고 재미나는 사람은 비정상이다 말이죠
의도적으로 지킬려고 하는데
딱 한 사람 뿐입니다 포기 하세요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살아라 말이죠 왜 자꾸 죽을려고 하냐 말이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왜 달았냐 말이죠
살라꼬 달아놓은 것 아닙니까
아무도 안 쳐다 봐요
다들 죽을려고 해요 글쎄
왜? 나 환자 아니다
나는 의인이다 아직도 나는 남을 7번 용서하는 이 게임에 빠져 있다 라고 나오니
죽을려고 환장하고 있다 말이죠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태어나도록 되어 있는 종말의 몸들 곧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즉 7에 70번 영원히 용서 받아야만 하는 철저한 죄인으로써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해주시는 분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살할려고 하는 가룟유다와 같이 죽을려고 하는 자들 밖에 없는 세계에
용서 라고는 일도 없는 세상에
이 용서의 세계를 감히 겁도 없이 이 땅에 푯대로 박아버렸습니다,
누가 이 남을 꺽어야만 살수 있는 죽음의 세계에서
저 십자가의 죽으신 참사랑의 살려주시는 영의 세계를 쳐다보겠습니까
쳐다보면 쪽팔린다(성화를 하지 않으면 쪽팔린다 라고 한 박땡선) 라고 이 승부의 세계에서 이 게임의 세계에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니가 뭔데 니 혼자 벗어날려고 하냐?
지옥 끝까지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반드시 사도바울을 죽이겠다 라는 유대인의 생각처럼
이 세상은 서로 서로 경쟁하는 게임의 세계이다 말이죠
남이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사도바울을 죽이겠다는 세계가 유대인의 세계이니까 말이죠
(행 23:21, 개역)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맹세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 맹세를 하고 있다 말이죠
율법 지킬려고 하는 것이 율법을 깨뜨리고 있으니 말이죠
바로 인간이 율법 지키는 즉 쪽팔리지 않고자
영웅이 되고자 함이 바로 게임의 세계에
주님이 율법으로써
율법은 바로 이 우상을
게임판으로 변한 이 세상을 찢고자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거든요
모조리 다 불도져로 깨뜨려서 모든 육체를 다 죽이시는
십자가에 못 박고자 왔따 말이죠
오냐 아직 덜 죽어 봤구나 제대로 죽어보라 라꼬
그래서 제대로 제발 살아라 라꼬 말이죠
어라 남을 7번 용서해? 아직 게임 판이 덜 찢겨졌구나
더 찢어 주마
그 죽음 속에서 남을 7에 70번 영원히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 십자가의 피 용서의 세계를 영원히 살리시는
이 7에 70번의 용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생일을 저주 하고
쟂더미를 뒤짚어 씌우고
머리를 쳐 박고
울게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 만드시는 겁니다.
그 죄인의 자리에서
그 죽은 자의 자리에서
죽은자 같으나 산자로 만드시는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고
꺾으신 뼈를 보고
이 꺽으신 뼈로 기뻐하게 하시는 겁니다,
다른 것으로는 기쁨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것으로는 용서도 없고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습니다.
오로지 이 꺾으신 뼈 로만 기뻐함으로써
게임의 장이 되어버린 세상을 찢으시는 겁니다.
어떻게 세수 대아에 담긴 물이
그 조그마한 양의
요즘 세수 대아는 적어서 2리터 생수병 두 개 3개 정도면 차지만
그 5-6 리터의 작은 양의 물이
수 억 수 조의 수 경? 경 다음에 해 인가?
과 같은 바닷물을 그 엄청난 양의 바닷물을 저 작은양의 세수대아의 물이 다 덮고도 남냐 말이죠
말이 되냐 말이죠
게임의 세계에서는 말이 안되지만
용서의 세계에서는 벌써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용서가
나의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이니
두 말 하면 잔소리 인거죠
이 기쁨으로만 사는 자가 남을 7번 용서하는 자가 아니라
7에 70번 영원한 용서를 받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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