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 은혜(용서)로만 들어가네 ; 기쁨으로 나오며 평안히 인도 받을 것이요 (사 55, 6-13)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사 55, 1- 5)
이사야 2017 2020. 7. 4. 16:26
18-93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사 55, 1- 5)
(사 55:6, 개역)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7, 개역)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8, 개역)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개역)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10, 개역)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사 55:11, 개역)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 55:12, 개역)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사 55:13, 개역)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 55:6, 새번역)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사 55:7, 새번역)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사 55:8, 새번역)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사 55:9, 새번역)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사 55:10, 새번역)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 55:11, 새번역)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사 55:12, 새번역) 『참으로 너희는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사 55:13, 새번역)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잣나무가 자랄 것이며, 찔레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화석류가 자랄 것이다. 이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할 것이다.』
(행 13:34, 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는데, 이렇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복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 ㉧사 55:3(칠십인역)』
(사 55:12, 현대어) 『[산천 초목이 춤추는 해방의 길] 나의 동족 이스라엘아, 너희가 이제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기뻐 뛰며 조국 산천으로 돌아올 것이다. 주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을 따라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너희가 돌아올 때에는 언덕과 산들도 기뻐서 환호성을 외치고, 들녘의 나무들도 손뼉을 칠 것이다.』
먼저 지난 주 말씀 2절이
(사 55:2, 개역)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눅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신약의 내용과 일치함에 있어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나중에 이 말씀을 찾으니 다시 소름이 끼쳤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 55:6, 개역)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마 7:7, 개역)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개역)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주님은 성령 곧 새마음을 주시겠다 라고 하십니다.
즉 다윗언약에 의하면 정직한 영이 없음을 비로소 알고
목마르게 하셨거든요
비로소 좋은 것을 달라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겠다 라는
약속을 주님은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시겠다 라는 겁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그 자리
율법에 의해서 불도져로 밀려당함을 당하는 자리에 가서야 비로소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주여 용서해 주소서 라고
사람은 떡으로 곧 명예 정의 의로움 권력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용서로만 사니까
그 정직한 영인 새 마음을 성령을 좋은 것을 달라고 외쳐라 부르짖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밀어버린 그 처음자리 에덴동산 곧 천국에 딱 맞는 자는
은혜로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 있어서
주의 이름을 위해 곧 예수님을 위해서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 들어가게끔
바벨론 포로 속에서 기쁨으로 나와서 약속으로만 들어가게 인도하시겠다 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신약에서는 예수안
에스겔 에서는 새성전이 너희를 영접하는
은혜로만 들어간다는 겁니다.
즉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값없이 사서 말이죠
과연 그런 나라를 목말라 할까요?
주님은 참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십니다.
이사야는 포로 되기 전에 이런 말씀을 이사야를 통해서 하니
설마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설마 망하겠어 라고 하는 그 속에서 이 말씀을 외치시고
또 반대로 에스겔 때는 다들 포로 속에 있다 보니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마음이 추호도 없는 가운데서
반드시 인도해 내겠다 라고 하시니
이사야 때도 나쁜소식이고
에스겔 때도 나쁜소식인
기쁜소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기쁜소식이라고 우기니
자꾸 자꾸 말씀하시니
에라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아 ~~~~~
피 할 수 없으면 즐기라꼬
그래 그래 기쁜소식이 되도록 하지 뭐 라꼬
성화론자들처럼 기쁜소식으로 억지로 만들어요 글쎄
기쁜소식 구원파 였던 가요? 애네들이 하는 노골적인 짖을 미리 터트려 주었고
사실상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소위 시장과 같은 좌파들이 그런 짖을 하더라 말이죠
너무 대 놓고서 돈 달라고 하는 것 보다 안들키도록 말이죠
정의가 없는데 정의로운척
인권이 없는데 인권스러운척
그래서 억지로 나쁜소식을 기쁜소식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내지 말입니다 라꼬 그 어려운 악을 선으로 쉽게 바꾸고
반대로 그 쉬운 선을 어려운 악으로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저도 자꾸 적다 보니 헷갈려서 바뀐게 아닌가 싶었는데
사실상 이게 수시로 바뀝니다 하여튼 인간은 선악을 해석할려고 달려들고
성령은 그 선악을 포기하라꼬 해석에 손때게 만드시는
주님의 숙제로만 펼치시겠다 라고 하십니다.)
그게 바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억지로 나쁜소식을 기쁜소식으로 만드는 조작
이것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가짜 하나님 인 겁니다.
왜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어렵다 어렵다 불가능한 말만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는지를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이해 되는 소리만을 해 달라고
자신들은 아무리 나쁜소식 조차도 기쁜소식으로 만드는데 말이죠
단절의 성령 조차도
개방의 성령론으로 바꾸는 것이 기술자가 된 목사들인데
왜 날것 그대로 주냐 말이죠
심판의 주도 구원의 주로 바꾸어 버려요 글쎄
심판의 주를 만난적도 없이 어떻게 기쁨을 얻는지
앞의 주를 빼버리고
원인을 빼버리고
결과를 나쁜 결과를 좋은 기쁜결과로 조작을 해요 글쎄
그래놓고 기쁜소식이라고 해요
나쁜소식이든 기쁜소식이든 그들은 결국 돈만 챙기면 되거든요
그러니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만 있으면 그것으로 기쁜소식 땡 이 되는 겁니다.
다른거 필요 없다는 거죠
자 분명히 이사야 때는 포로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나쁜소식 중에 가장 나쁜 소식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이것을 기쁜소식으로써 주님의 용서가 떳다 라는 그 이유로
우리는 이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으로 인해
너희가 얼마나 용서 받은 자인줄 아니
그것을 바벨론 포로 속에서
너희도 우상숭배자로써 그 속에서 심판 받음 속에서 용서를 보라는 겁니다.
얼마나 나쁜 소식 입니까
우상숭배자도 아닌데 (끝까지 우기죠 하나님과 자기라는 우상을 합체 시켰는데)
우상숭배자들에게 포로 잡혀가서
그것도 그들과 함께 망하라 라는 겁니다 죽으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용서요 이것이 기쁜소식이다 라는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의 활동 뜨인돌의 활동
어떻게 저 가장 강력한 큰성 바벨론을 허물어 뜨리는지를 보라 라는 겁니다.
볼려면 그 속에서 봐야 할 까 아닙니까
멀리서 보면 딴짖할꺼 뻔하니까(시온에 산당을 세우는 짖을 멈출 리가 없으니 포로잡혀가서
주님의 용서를 보라 라는 겁니다)
그래야 일만 달란트의 용서를 볼꺼 아니냐 말이죠
이런 모욕적인 구원을
이 나쁜소식을
인간은 멋들어진 구원으로 바꾸고자
거짓선지자를 초빙하는 겁니다.
나쁜소식을 기쁜소식으로 바꾸어 달라꼬
바리새인을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세우는 겁니다.
지도자로 말이죠
그리고 바로 이런 나쁜소식을 전하는 기쁜소식메신저 이사야 선지자를 죽이도록 되어 있고
예수님도 교회가 죽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미 인간들에게는 멋들어진 구원처럼
멋들어진 용서를 바라고 있지
이런 모욕적인 용서는 싫다 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 이다는 겁니다.
걸림돌은 반드시 뽑아서 절대로 가차이 둘수 없는
멀리 멀리 간극을 멀리 보내버려야 하는 겁니다.
마치 탕자를 용서하는 그 용서는 절대로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이라고
너의 침묵에 예 예 예 예예예예 예 예 예 라고
나발을 불어요
절대로 그 모욕적인 탕자에 대한 용서는 이룰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완악한 이스라엘 나라가 된 거죠
오늘날 교회가 그래서
거리끼는 걸림돌을 뽑아내고
대신 멋들어진 용서와 구원으로 포장해서
결국 또 돈 벌어요
모든 결과는 생존으로 귀결 됩니다.
인간이란 살 자격이 없어요
은혜는 바로 나는 살 자격이 없는 자 이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나쁜소식을 기쁜소식으로 거짓선지자 광명한 천사들을 동원해서
은혜가 아닌 행운아로 복된 자로 바꿔버리니까
죄인 중의 괴수는 한 놈도 없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한 놈도 없고
다들 양의 탈을 쓴 늑대무리들이 교회에 가득차 버렸더라 말이죠
행운이란 좀 더 더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해 달라는 거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주의 이름이신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아냐 말이죠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종교 용어 666 단어가
부끄러운 구원으로써
십자가 상의 두 강도 중에 한 강도를 그렇게 취급해요
이 얼마나 모욕적인 구원이냐 라고 말이죠
그런데 지금 이사야가 바로 이스라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보고
용서를 보고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인간은 두 부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의로 인해 갈라진 겁니다.
토기장이가 불의 하냐 말이죠
십자가 라는 의를 베풀어도
십자가의 피 용서를 베풀어도
인간들은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외쳤다 말이죠
남도 아닌 이스라엘이 말이죠
단 한번도 창조주를 믿은 적이 없다 라는 거죠
그래서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진노의 그릇 형 에서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긍휼의 그릇 동생 야곱 밖에 없어요
이 쌍둥이 곧 두 강도로 만들어서
하나는 데려감을
하나는 남겨둠을 펼치시는 것이 토기장이의 의 곧 거룩입니다.
뭐 부끄러운 구원이라굽쇼
배불러 터졌구만
두 강도 중에 하나인데
건방지게 나는 두 강도 중에도 안 속하는
아예 강도가 아닌 부류에 속하겠다 라고 나오는 것이
진짜 강도들의 특징입니다.
다윗 베드로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는 엘리야
모세
다 이래요
그래서 일급 살인자로 만들어요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용서를 베푸시니까
비로소 두 강도 중에 한 강도가 되어서 주님의 용서를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반드시 두 언약 밖에 없어요
세 언약
네 언약 없어요
하늘에 속한 자유하는 여자인 사라의 언약
자꾸 사람의 이름을 붙이니까 사라가 주인공인줄 아는데 그 반대입니다.
사라를 어떻게 언약이 다루었는가
언약이 주인공으로써 긍휼의 그릇으로 언약을 그 그릇에 담았고
땅에 속한 계집종 하갈의 언약은
하갈을 진노의 그릇으로 다룬 언약이였다 복음이였다 라는 겁니다.
복음이 가룟유다를 등떠밀어서 죽인 겁니다.
가룟유다가 자기 스스로 깨닫고 죽은게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어요
진노의 그릇으로 이미
진노를 담은 그릇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릇인데 자꾸 인간인척 하면 곤란하죠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나머지 인간은 그저 좀비일 뿐인
그냥 육체 라고
생령이 떠난 육일 뿐인 흙일 뿐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짜 죽음이지
어딜 감히 죽음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냐 말이죠
자꾸 인간 이라고 우기니까
자꾸 멋들어진 용서 멋들어진 구원을 바라고 있는 그 부푼마음에
도리어 거꾸로 절망적인 너무나도 절망적인
포로 되었다가 다시 끄집어내는 주의 이름을 펼치시겠다 라고 하니까
자 이미 이 주님의 계획이 떳잖아요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놓았다 라고 완료로서 떳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은 그 증상물로써 나타나야 하는데
어라 그때부터 이 새일을 먼저 떳기에
거짓선지자들이 출현해서 이 새 일을 가로막는 일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활동에 있어서 바리새인이 나서주지 아니하면 왜 복음이 복음인줄 몰라요
기존의 바리새인이 기쁜소식으로 사람들을 다 장악했거든요
그 가짜 하나님이 깔려있는 상태
그 가짜 기쁜소식이 깔려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기쁜소식을 전할때에
그 기쁜소식이 전혀 기쁘지 않는 모욕적이고 나쁜소식으로만 들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짜 기쁜소식을 깨뜨리시면서
제발 죽지 말라꼬
주님의 용서를 펼치시는데 있어서
그 용서가 바로 포로 되었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
십자가라는 모욕적인 용서를 제시하시는 겁니다.
아니 그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나쁜놈 입니까
그 정도로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십자가의 피 흘리심 용서가 아니면 용서 못 받을 정도로
그 정도로 우리가 나쁜놈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를 죄인 중의 괴수임을 날마다 그러내는 용서이고
반대로 인간의 멋들어진 용서는 나 이렇게 용서 받을 정도로 잘난 인간이다 라고
또 자기의 확대를 예수님의 용서를 이용해서 펼칠려는 용서이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남을 7에 70번 용서를 못할 정도로 그 정도로 악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름아닌 예수님이 몰고온 용서 곧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다 이루어 질까봐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 방해를 하는 거죠
이미 다 이루어졌는데 뭘 방해할까요?
방해하면 방해가 되는게 아니라
이미 다 이루어졌기에
그 증상물로써
진노의 그릇이 나와야 하고
긍휼의 그릇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정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두 강도 이기에
둘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좌파든 우파든 악마들입니다.
그 속에서
두 강도 속에서
베드로든 가룟유다는 똑같은 죄인이고
다윗 왕이든 사울왕이든 둘다 악마입니다.
그들의 행위에서는 의로움은 없어요
베드로는 막판에 주님이 그를 미끄러뜨려서 죄인 되겠끔 아예 미리 이야기 하십니다.
너는 나를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할 것이라고
베드로에게서 이것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죄인만드심으로 인해서 용서를 퍼붓지
베드로가 남을 7번 용서해서 용서받을만한 인간이 되었기에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왕도 도저히 이길수 없는 벌거벗은 여인을 동산 중앙
아니 궁전 중앙에서 목욕하도록 했다 말이죠
마침 다윗과 밧세바 라는 영화를 오래전 그레고리 펙이 다윗이라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가만히 보니 밧세바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는 거의 없다시피 적게 나오다 보니
인간의 상상력이 가미가 되다보니 분량이 많이 나오던데
그 영화에서 나온 밧세바는 마치 나는 우리야 장군의 아내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윗의 아내이다 라는 뉘앙스로 나와서 좀 웃겼다 말이죠
마치 그 당시쯤에 나온 삼손과 데릴라 라는 오래전에 봤던 영화 속의 데릴라처럼
아니면 시아버지 유다를 나는 처음부터 당신의 아내였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 며느리 다말처럼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여성은 분량도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자들을 주님 앞에서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들통내기 위해서
자신이 친히 미끼로써 동원이 되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런 용서로만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자기 쪽에서 아무리 찾아 볼래야 찾아볼수 없는 의가 없도록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오로지 주님 쪽에서 마련한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만 들어가는 은혜의 나라로 말이죠
그러니 이런 남자들같이 모든 것이 날라가 버림을 당하는
율법에 의해 남을 7에 70번 용서하겠다 라고 다가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모조리 다 한 순간에 다 무너짐으로써
잃어버림을 당하게 될 때
이런 죄인 중의 괴수도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입니까?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말도 안되는 소망을 외쳐요
얼마나 뻔뻔한지
안그러면 시장처럼 자존심 무너졌다고 자살해요
처음부터 우리는 성추행범입니다.
안그러는 남자 없어요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 여자처럼
교회에 와서까지도
고아 과부 나그네 안 되게 해 달라고 우상을 하나님과 썩어요
그런 죄인으로 들추어내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만이 그런 우상숭배를 들추어내시고
들추임을 당함으로써
이런 나도 당신의 나라에 기억해 달라고
뻔뻔스럽게 고쳐달라고 환자로써 죄인으로써 의사를 부르짖는 겁니다
환자가 아니면 의사를 부를 턱이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어서 안부르짖고는 못배기겠끔
밤새도록 벽돌로 끍어대는 그 저주 그 심판 속에서 살려달라고
고쳐달라고 외치도록 만드시는 것이 심판의 주에게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감히 여기에 무슨 멋들어진 용서이겠냐 말이죠
모욕적이기 짝이 없는 용서인데
나를 명예롭게 하는 남을 7번 용서하는 그런 용서는 없어요
7에 70번 용서 받지 아니하면 안 될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 용서 입니다
솔로몬 재판에 그 어떤 누구도 판결을 내릴수 없는
저 국가 국토의 끄트머리에서 아무도 풀수 없는 판결을
국가의 가장 중심점 가장 중앙에 심지어 왕에게 까지 가야만 하는
우리의 죄악은
베드로의 죄악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죄인으로 와서
직접 화목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왕이 직접 화목제물이 안되면 안될 정도의 죄인으로 와서
용서하시고자 베푸시는 일만달란트 용서인 겁니다.
주님의 피 용서를 자기 구원용으로 이용하는게 아니라
모욕적인 용서로써
강도 안된 상태가 아닌
반드시 강도 된 상태에서 고백케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두 강도 곧 사울왕과 다윗왕은
둘 다 나쁜놈일 뿐입니다.
사울왕은 오히려 더더욱 좋은 놈이 될려고 했고
다윗왕은 사울왕처럼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처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희생안타
우리야 밧세바 이름 없는 아기를 양산함에 있어서
더 이상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아이를 살릴수 없음을 알고
도리어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진짜 기쁜소식 나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그 괴수를 7에 70번 용서하시는 이 모욕적인 용서가
옳았다 라고 외치는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약속을
언약을 예수님 곧 주의 이름을 반드시 밀어붙이셨고
그 증상물로 다윗 왕이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에서 태어난 거죠
이것이 주님의 용서입니다.
인간의 봐주기 남을 7번 용서가 아닙니다
그런 가짜 용서는
종말의 끝에서 오는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오는 용서만이
그 심판의 종말 속에서 다시 되찾는
다시 살리는 용서 곧 긍휼입니다.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모욕적인 용서 외에는
심판 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심판하시는
이 의로움만이
예루살렘의 첫 열매인 예수님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
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화목제물로 바치는
나의 구세주 예수입니다.
이 긍휼로만 들어가는 약속의 땅이기에
이스라엘은 이미 이 기능을 다 하도록
예수 안에서 완료 되었음을 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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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 (사 54, 7-17) (0) | 2020.06.28 |
모든 수치를 책임진 남편의 세계(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사 54, 4- 6) (1) | 2020.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