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 이방 권력자의 갑질(다들 부러워하는 속임수)과 섬기러 온 인자(대속물) (마 20,20-28)

비꼬는 천국 비유인 포도원 일꾼 비유 (마 20, 1-19)
마태복음 2018 2020. 7. 26. 09:35
18-94 비꼬는 천국 비유인 포도원 일꾼 비유 (마 20, 1-19)

(마 20:20, 개역)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 20: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 20:23, 개역)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 20:24, 개역)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 20:25,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 20:26, 개역)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0, 새번역)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하였다.』
(마 20:21, 새번역)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마 20:22,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마실 수 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가 첨가되어 있음』
(마 20:23,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너희는 나의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는 그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마 20:24, 새번역)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
(마 20:25, 새번역)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마 20:26, 새번역)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 20:27, 새번역)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 20:28, 새번역)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모든 사람들은 선악을 알기에
자신이 똑똑하다고 봅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을 떨며 저는 무식하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하는 말도
선악에서 나온 한수 배워서 똑똑하게 될 것이다 라는 모습을 감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속지 말라 라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속지 말라

도대체 뭘 속지 말라는 것일까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이미 주님께서 세상에 나가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마귀의 속임수가 세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매일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바벨론 왕이 점괘를 보는 것이나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묻고자 오는 것이나
바리새인이 율법의 두 계명이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 이라고 묻는 것이나
부자청년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저는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나오는 것이나
베드로가 부자청년이 못 버린 전재산을 나는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주실겁니까 라고 묻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하나 같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갑질할려고 임의로 다루고 싶은 힘을 휘두르고 싶은 이 모습이 바로 세상에서 소통이 되는 666 이라는 짐승의 수
곧 매매 소통이 되는
손에 손 잡고 하나가 되는
이것이 바로 속임수 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 속임수에 반대되는 유일한 참됨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방인은 에이 어리석구나 힘을 얻어야 권력을 휘두르지
힘을 휘두르지 못하는 지혜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아니냐 라고 거부하고

유대인은 알면서도 영광을 돌리지 않는 아니 못하는
하나님과 우상을 섞다 보니
발 한 짝은 우상에게
발 한 짝은 하나님에게 양다리를 걸쳐서 씨가 섞여버리다 보니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저주임을 알면서
이 저주를 자기가 안 받고 예수님이 받아야 한다 라고 뒤짚어 씌우다 보니
거리끼는 걸림돌에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유대인은 속임수를 펼치지 않으면
또 저 저주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냐 라고
처음자리를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자기의 처음자리를 스스로 발로 차는
거리끼는 십자가가 되고만 거죠

왜냐하면 계속해서 선지자를 투입해서 돌아오라 돌아오라 라고 외쳤거든요
그래서 그 선지자를 죽여버렸으니
거리끼죠
죽으면 끝난줄 알았는데 또 보내고
또 죽이고 또 보내고 또 죽이고 또 보내고

속지말라 라고 선지자가 외쳐도
외친 선지자를 죽여버리니까
그 꺼림직한 사건이 계속 해서 남는 겁니다.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말이죠

십자가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이죠
그 정도로 얼마나 또렷하냐 말이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거든요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속임수만 남았지
복음을 외치는 자를 다 죽이고 대놓고서 거부를 해 버리는 겁니다.
세상사람이 아닌 교회가 말이죠
교회 다니는 자들이 대놓고서 돈을 사랑한다 라고
우상을 노골적으로 대놓고 섬겨요
황교활 보세요 대놓고 해요
하나님 까불면 너 죽을줄 알아 라고 대놓고 하는 자들과 손을 잡지 않나
그 정도로 힘을 추구해야 권력자 대통령이 되거든요
총리가 자기가 요셉이라는 속임수에 다 넘어갈 정도면
한국교회는 끝났다고 보자 말이죠
총신은 깡패들을 불러서 일을 하지 않나

그러니 이 세배대의 두 아들의 어미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이들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지만

이들은 바로 이런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 모습을 들통당해야만 하는 겁니다.
우상 문제 인간이 해결 못하니까 말이죠

베드로가 수제자 로써 바로 이런 속임수에 쩔어있는자 아닙니까
오죽하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라고
남이 아닌 제자
그것도 수 제자 

으뜸 제자 아닙니까
으뜸 제자 이기에 이런 마귀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모습을 들통당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섬기심이요 사랑입니다.
주님이 사랑이 아니면 안 들통내는 겁니다.
좋으신 하나님 그래 좋은게 좋은 거다 라고

삐딱한 비유도 아니고 무슨말인지도 모르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갑자기 제자 중 두 아들의 어미까 갑자기 끼어들어
그런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비유
삐딱하고 부정적인 포도원 품꾼 비유는 됐고요
내 아들 우의정 좌의정 높은 자리 제발 약속해 주세요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기도와 똑같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다 엉터리요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속임수 이기에

나는 속았다 라고 나는 똑똑한데 속다니 라는
분개함을

다 속고 있는데 유일하게 너는 속았다 라고 외치는
저 예수라는 자만 죽여버리면
다 속고 있으니 넌 속고 있어 라는 예수의 외침만 없애버리면 
저절로 다 똑똑한게 아니냐 말이죠

아무도 그렇게 안 외치거든요
딱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그 한 사람 없애는 것이 얼마나 효율적이냐 말이죠 편해요
이런 사람 남겨두면 조직이 불편해져요
조직을 흔드니까 말이죠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데 누가 열중인가?
그 당시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이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 교회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속임수에 주님은 너도 세상 권력자와 같이 힘을 추구할래?
그들에게 당해놓고서도 똑같은 힘을 추구할래?

앞의 에스겔서에서
바벨론 왕의 점괘는 거짓된 점괘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쳤거든요
그것이 거짓인줄 알고 있다면
이스라엘은 그런 점괘를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데
역시나 점괘를 보는 바벨론 왕과 다를바 없는 것을 구하더라 말이죠

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 
곧 새 일 
곧 하나님의 죽음을 생각지 않고 구하지 않고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람의 일 곧 이전 것
사라지는 것
어차피 쓰레기 통에 넣어서 삭제할 사라질 것을 왜 생각하고 왜 구하느냐

다들 바벨론 왕의 점괘 보듯이
이방나라의 권력자들의 속임수를

어차피 사라질 것들을
왜 구하냐 라는 겁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을 구하는 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모세가 갑자기 변화산에서 1300년 만에
엘리야가 900년 만에 서로의 시차가 400년일 정도로 서로 다른데
둘이 갑자기 나타나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새 일을 구하더라 말이죠

안 그러면 이전 것
사라질 것이
없어져야 할 삭제 될 것이
삭제 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하는데

성전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지나가야 하는데
계시록에서 성전이 없어요
왜? 지나가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니까

(계 21:22, 개역)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2, 새번역)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 21:22, 공동)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계 21:22, 쉬운) 『나는 성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 21:22, 킹흠정) 『또 내가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전능자와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라.』
(계 21:22, 한글킹) 『내가 보니, 성 안에는 성전이 없더라. 이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 그 곳의 성전임이라.』
(계 21:22, 현대인) 『나는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의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 21:22, 현대어) 『그런데 그 도시 안에는 성전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도시 안 어느 곳에서든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어린양 즉 희생제물이 성전이기 때문에
새로움 이기에

이전 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헌 것이 왜 있냐 말이죠 그림자가 말이죠

실체가 있는데

이 실체를 그림자들이
사라질 것들이
이전 것이
자꾸 죽여요

웃끼잖아요
그림자는 선악을 추구해서
선을 갖추고 악을 버렸다 라고 우겨요

그림자가 말이죠

그런데 실체가 없어요 붕뜨는 소리 뿐입니다.

그러나 실체는 바로 그런 그림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또렷함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니 그림자가 어떻게 실체를 죽이죠 그림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불빛에 타자를 치는데 그림자가 손가락 하나 하나에 다 달라 붙어서
그림자가 자기가 실체라고 우기면서
실체를 죽이고 있으니 말이죠

이게 속임수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유가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는
이 비유가

나 실체인 예수는 그림자로부터 죽임을 당해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라는
새 일을 다 이루었다 라고 나오니

그림자가 어떻게 실체를 죽이고

또 실체는 그런 그림자의 속임수에 왜 또 죽기는 죽냐 말이죠
말이 안되잖아요

여러분이 어디를 가도 그림자가 따라다니잖아요
그런 그림자가 어떻게 실체인 나를 죽이냐 말이죠

말이 안되죠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어요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는 것을

누구 말 마따나
학생부 수련회 때 교회 장로가
학생에게 예수님을 누가 죽였찌요 라고 물으니까

학생이 놀래면서 저 안 죽였어요 라고 하듯이

이것을 교육으로 하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안 됩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라고 하는 학생은
속임수를 배운 겁니다.
그래야 자기가 똑똑하니까 안 속았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예수님과 충돌했던 바리새인 율법사 사두개인 부자청년 맏아들 서기관
대제사장 등등은

무식한자 없어요
다들 너무 똑똑해요
그러니 멋들어진 구원을 추구하지
누가 모욕적인 구원을 바라겠냐 말이죠

이들은 바벨론 왕이 점괘를 보듯이
그 점괘가 거짓임을 이스라엘이 알 듯이
알면서도 같은 거짓
같은 속임수를 다 구하고 있음을
예수님에게 까지 요구하는 겁니다.

주여 내 아들 우의정 좌의정에 앉게 해 주세요
그렇게 권력자로써 명령을 내려 주세요 라고

이 말을 들은 나머지 제자들 또한 분개한 이유가 뭡니까

그것이 거짓이고 속임수이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
똑같이 거짓을 구하고 속임수를 구하고 잘못된 것을 구하고 있기에

분개를 하는 모습이 들통나는 겁니다.

삐딱하고 부정적인 포도원 품꾼 비유 곧 천국비유를
가로막고 치고 들어오면서

다들 말귀 알아먹는 소리로
천국비유를 막더니

기껏 외치는 것이
사라질 것

이전 것
지나갈 것
썩을 것을 달라고 하고

그것이 썩을 것이다 라고 알면서도
나머지 제자들 또한 그 썩을 것을 구하면서
분개를 하는 모습

(마 6:20, 개역)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0, 새번역)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골 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개역)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개역)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4, 개역)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6, 개역)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 양발 차기에 우리는 들통당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난 안돼
정말 안되는 인간이구나

이 남겨둔 씨 아니였다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어떤 놈이 벗어날수가 있을까 라고

주님이 이런 사태를 벌려주신 것이 감사하다 말이죠

안 그러면 이전 것 곧 소돔과 고모라인 셈이지요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29, 새번역)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1:9(칠십인역)』

인간의 신앙이나 믿음은 아무리 해도
이런 이방나라의 권력자의 속임수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당사자가 바울 아닙니까
오로지 이 한 씨를 남겨 두심 때문에
그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라고 합니다.

설마 하나님을 믿는 자가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 이겠냐
아무리 썩어도 소돔과 고모라 만치는 안 그렇다
동성애는 안 하니까 말이죠

동성애는 거짓임을 알면서도
역시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동성애 보다 더한 죄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인간 쪽에서는 기대 할 것이 없어요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새 것이 없고

이 새것 이라는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면

이전 것은 안 지나갑니다.
계속 무한 반복해요
사라질 것을 왜 반복하냐 말이죠

왜 허구 허상을 왜 무한반복하냐 말이ㅛ

썩고 없어질 것을 왜?

이런 의문의 무한반복에 마침이 되는 것이 바로

이전 것을 지나가게 하는 새 것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 속에 집어넣으시는 섬기심 만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기쁨이 뭔데요?

하나님이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기쁜소식입니다.
그를 내어주시기로 원하심이 기쁜소식입니다.

다른 의로움은 없습니다.

이 의로움에
이 기뻐하심을 입음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림을 당하고 다시 되찾는
인자의 대속물 되심 속에 참예가 되는 겁니다.

지금 이사야 후반부 56장까지 했잖아요
한 10장 정도 남았습니다.

새 일이 뭡니까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잃어버림입니다.
왜? 되찾기 위해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도록 하기 위해
불뱀에게 물려 죽게 하시는 겁니다.

바벨론 왕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것 까지도
새 일이 먼저 떳기에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먼저 떳기에

곧 하나님의 죽음이 먼저 떳기에
그 속에 집어 넣기 위해

예수 안에 집어넣기 위해서 말이죠
이 섬기심을 우리가 무시 하지 않도록

인자의 끝까지 섬기심 만으로만
곧 죽으심 만으로만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겁니다.

다른 의는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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