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 겸손한 주께서 나귀새끼를 쓰시겠다 하라 (마 21, 1- 5)
다윗의 자손이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20-28)
마태복음 2018 2020. 8. 9. 08:06
18-96 다윗의 자손이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20-28)
(마 21:1,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 21:2, 개역)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마 21:3, 개역)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 21:4, 개역)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개역)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1, 새번역)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다. 그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 ㉠그, '그들이'』
(마 21:2,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마 21:3, 새번역)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리하면 곧 내어줄 것이다." / ㉡또는 "'주님께서 쓰시고 곧 돌려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마 21:4,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마 21:5, 새번역)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 ㉢슥 9:9』
(슥 9:9, 개역)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새번역)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마 21:5, 공동) 『"㉠시온의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이사 62:11; 즈가 9:9.』
(사 62:11, 개역)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마 21:5, 새번역)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 ㉢슥 9:9』
(요 12:15, 새번역)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슥 9:9』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이겠지요
온유의 반대말은 완악함이구요
그런데 지난 주에 말씀을 나누면서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라고 했는데
사실은 겸손한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목사들에게 또 속습니다.
자꾸 겸손한 자가 되라고 하는데
그러는 목사는 왜 겸손한 자가 없는지 말이죠
자꾸 사기를 쳐요
겸손한 자는 없어요
그래서 겸손하신 분이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표현이 있는데
(사 57:15, 개역)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소성 이라는 표현이 겸손한 자와
통회하는 자 에게 반드시 붙습니다.
즉 소위 겸손한 자가 되자 라고 가르치는 거짓선지자들은
기존의 있는 것으로 겸손을 가르친다는 겁니다.
있음에서 더 나은 겸손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겸손은 성경에 없구요
오히려 그것을 바로 교만 이라고 지난 주에 이야기 했습니다.
겸손을 교만으로 가르치고
교만을 겸손으로 가르친다 라고
바로 앞의 글 에스겔에서
일상에서 더 나은 일상 곧 역사에서 더 나은 역사로 나아가자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
곧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그 반대로 기존의 있던 것 마저도 찢어버리시는
쪼개 버리는 것이 말씀 곧 묵시 계시 에스겔 표현으로 하자면 예언입니다.
그 기록된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는 스가랴서에 기록된 말씀을 응하게 하신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것을 막아버리시고
옛언약을 기억하셔서 언약대로만 하시지
지금 현재의 난관을 해결해 주시는데 아예 관심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것 곧 일상을 날려 버리시는
찔러 쪼개버리시는 겁니다.
그것을 겸손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겸손이 없다 라고 울어야 할 판국입니다.
정직한 영이 없음을 시인해야 할 판국입니다.
그래야 그 겸손을 주시지 않겠냐 말이죠
그래서 소성
즉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시겠다 라는 거죠 새로 외부에서 개입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겸손하신 분이 오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분의 겸손한 마음을 구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 없습니다.
에스겔 이나 이사야 식으로 표현하자면
새 일을 구하는 자
새 마음을 구하는자가 없습니다.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노라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다고 주님이 포기하실 분이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기존의 모든 일상을 찢어버리시면 저절로 이 새 마음을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일상은
사라질 것이고
이전의 것이지
새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겸손한 분의 마음
곧 죽기까지 복종한 분의 마음을 구하지 않기에
새 것
곧 예수님을 죽음만을 기뻐하는 그 기쁜소식
희년을 주시고자
기존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 서의 나귀새끼 예언이 나오는게 아니라
나귀 새끼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시온의 딸 예언이 나오는 겁니다.
시온의 딸의 의미를 모르면
나귀새끼의 의미도 모릅니다
그저 나귀새끼 라는 예언이 단어로 문자적으로 인용되어서
오늘 본문에 이루게 된 것으로 볼테니 말이죠
앞의 글 에스겔에서도 히브리서 4장 12절을 언급하면서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왜 운동력이 있어야만 하느냐 살아있는 운동력 말이죠
그래서 11절도 언급했는데
위에 안식 개념이 나옵니다.
이 안식 개념이 왜 나오는지를 안식교들은 모를겁니다
왜냐하면 교만하거든요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운동력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히 4:11,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게 된다 말이죠
본이 뭔고 하니
(히 4:6, 개역)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 4:7, 개역)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먼저 되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 곧 걍퍅함
온유의 반대죠 강퍅함을 말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앞의 글 에스겔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먼저 된 일상이 아니라
나중된 말씀이 먼저 것을 찢어버림으로써 안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일을 행하시는 자가 바로 겸손한 분입니다.
그러니 평화 평안 안식 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다 엉터리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삶의 폭파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안식교 애들이 그런 배불러 터진 구원처럼 보고 있는데
평안이란 기존의 것을 다 파괴라고
새것으로만 교체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와 상의 없이 그냥 무조건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우선시 함에 있어서 그 삶을 허구로 만드시고
찔러 쪼개 깨뜨려서 말씀을 우선시 함으로 채우시는 겁니다.
자 그렇게 교체 당한자
자기 삶이 폭파 당한 자가 바로
시온의 딸로써 스가랴 서에 나오고
그것을 다시 마태복음에서 인용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호산나 라고 외치는 어린아이 젖먹이의 찬양과 연결이 되듯이
왜? 겸손한 분 이신 예수님과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분의 대상물인 겸손한 자가
크게 부르짖는 것이 관계성으로 나타나야 하듯이
또 바로 그런 겸손함과 완악함이 한세트가 되어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시켜라 예수야 너희 제자들 아이들 좀 조용히 시켜라 라고 해야 하는 완악한 자들이 한 세트를 구성해야 하듯이
스가랴서에
겸손하신 나귀새끼를 타신 분과
시온의 딸
즉 자기 삶이 폭파 되어서
크게 부르짖지 아니하고서는 못 배기는
시온의 딸이 겸손한 분과 관계성으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마치 눈먼 소경 귀머거리 앉은뱅이가 단절된 자로써 희년과 연관이 되어야 하듯이
이 시온의 딸은
(슥 9:9, 개역)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마 21:5, 개역)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신분이 새롭게 소성케 해서 만들어낸 겸손한 자로써
창조주 여호와와 창조의 원리와 비밀을 담은 피조물 이스라엘 과의 관계로써
바로 우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시듯이반드시 등장하는 겁니다.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왜 시온의 딸일까요?
왜 예루살렘 딸일까요?
이스라엘 아들이 아니라
그것은 애통하는 자 만들기 즉 새롭게 만들기입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단절된 자를 말합니다.
한 달 지났나요? 천국을 위한 고자처럼
고추 짤린
이스라엘 아들에서 예루살렘 딸로
그것도 모잘라서
수태치 못한 여자여 기뻐하라
왜?
사람이란 자기가 우선시 되었기에
여자라고 해도 마치 고추 달린 남자처럼
우상만을 위해
즉 자기 자신만을 우선시 하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이라는 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 암몬이 망하듯이
이스라엘을 폭파 시키겠다
이스라엘에게서는 자기 삶이라는 것이 없다 라고
폭파 시켜 버리니까
아들 이스라엘에서
딸 예루살렘으로 바뀌는 겁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라고
시온은 다윗의 집 아닙니까
(슥 12:10, 개역)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 마음판의 할례는
인간의 손으로 하는 할례와 차원이 다릅니다.
남자에서 여자로 고추 짤라 단순히 여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온의 딸이
애통하도록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간 왕
곧 유대 왕의 높아짐을 낮추시는 그 심판에 같이 놓이게 됨으로써
여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바로 자식입니다.
그 자식과의 이별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징벌을 받는 거죠
그러니 시온의 딸
여자로써 구하는 것이
크게 크게 애통하면서 부르짖는 것이 바로
한나의 기도처럼
마리아의 기도처럼
이 자식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 원수를 봄으로써
크게 크게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새로운 왕
섬기시러 오시는 왕
겸손한 왕
높은자 낮추시고 낮은자 비천한 자 높이시는
이 새 왕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심으로써 판을 뒤짚어 엎어버리는 그 새 왕을 간구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들 이스라엘은 때려죽어도 못 부르짖는
애통한 자로 만드시는
그 단절로써
부정한 여자로써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목마른 자로
겸손한 자로 새로 소성케 해서
시온에서 율법이 나옴으로 인해서
시온의 딸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나온 율법의 기능에 제대로 애통하게 되는데
울지 않는 겸손하지 못한 완악하고 강퍅한 자
부르짖지 않는 자와 대조를 이루게 하시고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을 구하는 자로써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겁니다.
한나와 마리아의 기도처럼
자식이 죽음 속에 놓여짐을
여자는 직감하게 되니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거죠
(시 77:2, 개역)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렘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마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것이 집권자 다들 인간 왕처럼
임의로 권력을 행사하고파 하는 그 마음의 높아짐 때문에
졸지에 깔려 죽게 되는 자로 만드셔서
새 왕을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 새 일에 에스겔서처럼 이스라엘은 무관심입니다.
자기 삶이 우선시가 되는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선지자를 찾아서 하나님한테 뭘 드릴까요 라고 나오는 것을 다 막아버리시고
그의 나라 그의 의를
먼저
인자의 나라
인자의 의를 구하도록 만드시고자
성령 즉 애통하는 영을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저들 권력자와 반대로 부으셔서
애통케
겸손하게 크게 크게 부르짖도록
자기를 우선시 하는 삶을 폭파시켜서
말씀이 우선시 되는 자로 만드시고자
시온의 딸로 만드시는 겁니다.
머슴아도 다 고추 짤라서
여자도 자식을 잃는 자기 삶의 파괴로 인해
비로소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퍼부어 달라고
얼마나 얼마나 무시 무시한 기도를 하는지
여자 입에서 전쟁을 요구해요 글쎄
이것이 평안을 입은 자입니다.
그 정도로 위로 받기를 거절 할 정도로
애통한 자
곧 시온의 딸로 만들어서
오로지 하늘의 전쟁이 아니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면
기쁜소식이 없을 정도로
새 것이 없을 정도로
주님의 희생만을
기도하는 울부짖는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의 세계는 시온의 딸을 괜히 건드려서
전쟁 요청의 SOS 에 멸망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 기쁜소식을 펼치시고자
이 새 것을 펼치시고자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누가 기뻐하고
누가 싫어할까요?
집권자
기득권자
자기 멋대로 성경해석해서
그 높은 자들의 높은 마음 때문에
졸지에 애통하게 된 자
이렇게 맞물리도록 주님의 말씀은
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시 함으로써
비유
곧 계시를 펼치심에 있어서
인간 종교지도자 집권자들은
무슨 소리인줄 모르고
그저 큰 소리 소음에 신경질을 냄으로써
자신들의 질서를 지켜 나갈려고 합니다
곧 무너질 안개를 붙잡고서
자신들이 당해야 할 저주를
저들 시온의 딸에게 퍼부으면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 라고
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 죽일려고 하면서 말이죠
바로 이런 높은자를 낮추시고
낮은자를 높이시는
진정한 겸손한 나귀새끼 타신 분만이
저들의 악을 심판하시러 오신 겸손하기 짝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나를 나에게서 구하소서 ~~~~~~~~~~~~~~
이것이 하루치 양식을 바라는 자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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