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마 21,12-17)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마 21, 6-11)
마태복음 2018 2020. 8. 23. 09:10
18-98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마 21, 6-11)
(마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12, 새번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 21:13,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사 56:7 ㉦렘 7:11』
(마 21:14, 새번역)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 21:15, 새번역)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또 성전 뜰에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마 21:16, 새번역)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시 8:2(칠십인역)』
(마 21:17,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을 남겨 두고, 성 밖으로 나가, 베다니로 가셔서, 거기에서 밤을 지내셨다.』
강도의 소굴은 딴게 아니라
소위 우리 교회는 깨끗한 자만 오라
건강한 자만 오라
더러운 죄인을 오지 말라
저 세리 매국노 너 오지마
강도 창녀가 문둥병자 소경 앉은뱅이 등등 오지마 라고
즉 집권자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집권자가 되어버리면
남의 눈을 의식하는 껍데기는 완벽하게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속 알맹이는 썩어 버리는 거죠
어떻게?
성전의 기능 자체가
더러운 죄를 거룩함으로 이동 시키는 용서가 펼쳐지는 곳이다 말이죠
이제 그 건물 그 공간은 해체가 되고
한 인물을 통해서
어디서든 어떤 시간이든 상관없이 주의 이름으로 인해
그 성전의 기능이 펼쳐지도록 하셨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손에 의해 조작되는 성전 오늘날 교회는
도리어 집권자들의 행패 깡패질처럼
횡포를 부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한 과부가 낙심하지 않고 비밀의 기도함을
도리어 하나님도 무서워 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그 기도를 들어주더라 말이죠
고레스 왕처럼 말이죠
정작 이스라엘 장로들처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우상 찾듯이 찾으니까 주님이 막아버리시고
오히려 옛언약(구약 신약 하듯이 그 옛언약의 구약이 아니라)만 기억하시겠다 하시듯이
너희가 핏덩어리로 너희 부모 무녀로부터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을 때 그때 했던 언약만을
밀어붙이시겠따 라고 말이죠
그래서 처음자리였던 그 원수의 자리에서
너희 죄악을 말갛게 씻은 그 처음사랑의 자리에서
너희들은 구원하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원수로 만들어서 사랑하시는
그 원수사랑이 바로 성전의 기능인데
다들 원수가 아닌
멋들어진 구원이라는 우상숭배로 인해
껍데기만 저 세리 원수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고 있지만
정작 그런 바리새인이
의인 중에 의인이 바로
우상숭배자 였다 라는 겁니다.
율법 껍데기는 완벽하게 갖추었다 말이죠 모든 조건을 갖추듯이 말이죠
그런데 알맹이 곧 사랑이 없어요
울리는 꽹과리 이다 말이죠
평강이다 평강이다 하나 평강이 없는 대충 대충 심상히 고치더라 말이죠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용서가 없어요
긍휼이 없어요
십자가의 피 용서하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새 것(예수님의 죽음) 이 없어요다른 생명은 없어요 예수님 뿐인데
졸지에 목숨 보다 소유의 넉넉함으로 장난으로 목숨의 자리를 대신 채웠고
몸 보다 의복으로 종교오락으로 귀중한 몸(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자리를 대신 채웠고
생명 보다 음식으로 생명 대신 결국 자기라는 우상을 대신 채웠다
그것이 부자 라는 겁니다.
이들은 피 발라 주심을 원치 않아요
그 정도로 나는 살인자란 말인가?
그래 살인자 맞어
나 안할란다 라고 등돌리는 겁니다.
과연 주의 살과 피를 먹지 않고서
사는 자가 피조물 맞을까요? 이스라엘 맞기는 맞나요?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이 다 그렇게 외쳐요 글쎄
즉 피 발라주심이 없어요
긍휼을 원치 않고
도리어 남을 7번 용서하는 의를 세우는 완악함에 미쳐 있어요 그거 다 종교오락인데
남을 7번 용서하기는 대따 많은데
그 정도로 남과의 비교에서 우수상 상장 받을 트로피 받을 짖은 대따 많은데
그것이 의로움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은 완악함 이였다 말이죠
7에 70번 용서 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더라 말이죠도리어 7에 70번 용서 받는
피흘려주심으로써 용서받은 비밀의 용서는 정작 하나도 없더라 말이죠
아니 남을 7번 용서하고자 하는 사람이
도리어 남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가룟유다처럼 자살할 껍니다.
얼마나 성질이 급한지
자기와 똑같은 짖을 하고도 베드로는 용서 받잖아요
용서 받을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도 용서가 됩니까 라고
괜히 일찍 죽어버렸네 라고 할꺼다 말이죠
괜히 죽었어 괜히 죽었어 ~~~~~~
웃찾사 였던가? 개콘 이였던가? 아무튼 이제는 다 사라진 ㅋㅋㅋㅋ
아 개콘 남성인권보장위원회 였군요 ㅋㅋ
지가 똑똑한 줄 알았던 거죠
그 정도로 나는 양심이 있다?
박원땡처럼 양심이 있다굽쇼?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건 아시죠
저거 다 거짓말이다 라고 외치던 자가 거짓말이였던 거죠
즉 어떤 장애와 반발 거부에도 불구하고
이미 장대 높이 인자가 달려버렸기에
7에 70번은 장소 시간과 무관하게 펼치도록 되어 있는
성전의 기능을 펼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 긍휼이 아니면
다른 길은 없어요
상상한 예수를 또 조작해서 만들어내요
누가 하겠습니까
교회가 그 짖을 하지
교회 아니다 라고 하는 자들이 하겠냐 말이죠
돈이 되거든요
남을 7번 용서하면 돈이 되어요
그러나 도리어 7에 70번 용서 받는 것은 단절이 되어요
매매를 못하고
소통이 안되어서 단절이 되어요
종교오락은 게임머니처럼 소통이 되거든요
다들 이해가 되니까
이해 안되는 것을 누가 소통하겠냐 말이죠
바로 이 긍휼 곧 7에 70번의 용서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피용서를
이것을 하나님의 집 이라고 오늘 본문에 표현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는 것이죠
(마 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니 야곱은 자기가 원치도 않았는데 졸지에 하나님의 집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기도하기를 실천할 필요가 없이
야곱 자체가 움직임 하나 하나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에
기도 즉 비밀의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집인
주님의 죄 용서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남을 7번 용서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 받는 자로써의 모습만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는 사기꾼 이거든요
7에 70번 용서 받기 위해서
그는 평생을 사기꾼
곧 죄인
곧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야만 했다 라는 겁니다.
그 원수의 자리에서
주님의 용서를 외쳐야 하기에 말이죠
즉 아무리 야곱이 주님의 용서를 방해하고자
베드로처럼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둥
절대로 예수님 배신 때리지 않고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는 둥
남들은 다 버려도 나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라가겠다
장 지지겠다 라는 방해짖만 골라서 하더라도
주님의 용서는 그 어떤 베드로의 방해
그 어떤 야곱의 방해에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 라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했기에 말이죠
이것이 주님 쪽에서 찾아와 주심인 구원입니다.
그러니 비밀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주님을 찾는 것은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겠따 라는 것은
비밀이 없어요
남들 다 알아먹는다 말이죠
그런 지혜(십자가)는 마귀가 하나도 격동하지 않고 견디지 못해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응원한다 말이죠
그런데 저렇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원수를 잡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십니까 라고
마귀가 격분하는 일만 골라서 마귀 보란 듯이 펼치시는 것이 주님의 구원이지
인간 상대하는 구원은 없어요
마귀는 자꾸 인간은 주인공으로 내 세우고
자신은 마치 겸손한냥 자꾸 뒤로 빠집니다
예수님은 그 반대입니다.
인간 뒤로 누락 배제시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를 자꾸 앞장세워요
그래서 바리새인을 대 놓고서 노골적으로 충돌하십니다.
제발 좀 마귀를 보라꼬
주님이 인간 상대하는지
아니면 마귀만을 상대하는지를 말이죠
그 마귀의 방해에도 멈추지 않는
성전의 기능인 피 흘리심으로써의 죄 용서를 다 이루신 겁니다.
이 새 것이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는 그저 마귀의 속임수에만 놀아날 뿐입니다
야 정신차려 술취한 듯이 비틀 비틀 거리지 마
정신차려 속지마 속지마
일부러 예루살렘성 부활의 골짜기를
양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도록 하신게 아닙니다.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개인 구원이 아닌 거죠 집단 전체로 묶어버리니ᄁᆞ)
이방나라에 포로가 되게 함으로써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어떤 표적?
죽음(스올, 지옥, 큰 물고기 뱃속 어두움 속) 속에서만 생명의 빛을 보여주시겠다 라는 겁니다.
왜? 그 죽음을 찢는 빛이니까 생명이니까
곧 한 인물이다는 겁니다.
심판의 불 속에서만 새찬양(즐거움)이 있다는 겁니다.
왜? 안그러면 또 개인의 역사를 즉 오락(즐거움)을 찾아요
개인은 곧 역사이거든요 그 개개인이 모여서 주관이라고 우겨요
그런데 묵시는 개인이 없어요
역사가 없어요
개인을 찢어버립니다.
묵시는 집단이라서 역사가 없어요
시 공간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안
예수 안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건물로써의 성전이 없더라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없더라도
한 인물이 찾아와 주심으로 인해서 죄 용서 받은 성전의 기능이 펼쳐짐의 혜택을 받은 자는
그 사람 또한 역시나 교회로써
금 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용서 받아라 라는 겁니다.
금이나 은은 역사 곧 개인 곧 우상의 세계에서 통하는 소통하는 매매꺼리이다 말이죠
그거 없으면 소통이 매매가 안되요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런거 없는데
역사가 없는데
이것 밖에 줄게 없다 라고
나사렛 예수 이름 이다는 겁니다.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신
참성전의 기능이 이 인물에 의해서 펼쳐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도 죄 용서 받으라 라는 겁니다.
이 한 인물이 너의 죄를 용서하실 분이시다 라는 겁니다.
(행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1, 개역)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개역)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개역)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개역)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개역)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개역)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개역)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 3:9, 개역)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 3:10, 개역)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행 3:11, 개역)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행 3:12, 개역)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개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개역)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3:15, 개역)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 3:16, 개역)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7,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행 3:18,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 3:19,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20, 개역)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21, 개역)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으로 인해
성전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얼마나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겠냐 말이죠
그때 베드로는 개인의 역사라는 버릇 습관에 젖은(다들 그렇게 엉터리 지도자로부터 배우다 보니 개인의 자질에 주목할때에) 그 시선을
예수님의 죽음 이라는 새 것으로 돌리는 겁니다.
날 쳐다 보지 말고 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꼬
내가 십자가를 졌더냐?
그저 개인의 구원을 바라다 보니
개인(베드로 개인의 자질과 능력
사도바울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쳐다보고
자꾸 개인 곧 역사를 바라볼때에
그 역사를 찢는 겁니다. 우상을 찢는 겁니다.
(고전 1: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역사 곧 우상은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희망을 걸지만
생명은 예수님이고 나머지는 다 죽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배워서 후차적으로 나온 것은 다 길이 아니고
나를 제대로 심판 할 줄도 모르는 것들이니까
의지할 필요가 없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나를 용서하시고자 대신 죽으신 분은
그야말로 생명이기에
스스로 버릴 권한으로써
스스로 되찾으심으로써 생명의 주 되심을 보여주셨다 말이죠
그러니 다른 용서는 없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기는 가짜요 우상입니다.
개인의 역사이니까 찢어집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을
이전 것은 지나가 버린 새 것이 된 나에게 담으시는 겁니다.
개인의 나 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나 속에 말이죠
그러니 따로 개인적으로 따로 국밥처럼
하나님의 집 이라는 죄 용서의 기능을 따로 내가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개인 숙제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성화론자들 보면 완악하기 짝이 없어요
비밀이 하나도 담겨져 있지 않고
다들 알아먹어요
그건 종교 오락하는 달인들입니다.
그런 바리새인 타 넘어서 천국(역사, 개인의 숙제) 갈 생각 말고
천국(한 인물)이 바리새인 저 악마들 저 성화론자들(개혁주의, 정의를 외치는 놈들)을 어떻게 타 넘어서 오시는 지를 그 차이를
저들의 지옥됨과의 차이로써의 천국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율법을 쥔 놈들은 앞의 글 에스겔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옥 밖에 몰라요
강도의 소굴로 예루살렘 성을 만들어 버리잖아요
로마에게 빼앗길 까봐
예수님이 부활이다를 방해해요
바로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활 되심이 안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일부러 나사로를 죽여서라도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부활 교리 믿지 말고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말이죠
예수님이 천국이심을
그러니 천국이 그냥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이 지옥을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지옥입니까?
모조리 장사하는 장소로
즉 우상숭배의 터전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교회를 통해서 장사를 해요 이 놈들이 말이죠
김태땡 이라는 놈도 장사하는데 국가가 방해하지 말래요 글쎄
장사 못하면 우리는 목숨을 잃은 것이다 라고 해요
안 그러는 목사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답이 없어요
제가 시 공간에 갇혀서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30년 동안 보니까
가면 갈수록 더 답이 없어요
한국 교회는 미쳤어요
정신병자들 양성소 이다 말이죠
우상숭배를 대 놓고 해요 대놓고
그러니
포기 하세요
역사는 끝났어요
종말 곧 묵시만을 땡기는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퍼부어 달라는
목마른 자의 부르짖음을 주님은 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이 목마른 자
즉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암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
이들에게만 희년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1주일 동안 참으로 신기한 내용에 꽃혀서 생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왜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딸랑 한 명에게만 보내심을 받았을까요?
그것도 자기를 죽이고자 했떤 이세벨의 고향 곧 친정에서 말이죠
태풍 소식으로 인해 태풍의 눈이 생각나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아기를 낳은 여자가 광야 속에
죽음 속에 들어가잖아요
그 공백 속에 3년 반 동안 숨듯이 말이죠
곧 예수님의 죽음 속이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나의 원수됨을 씻는 용서의 기능을 합니다.
즉 내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자가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듯이 말이죠
바로 이런 젖먹이와 같은 자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의 기능을 펼치시는 겁니다
피 흘리심의 용서를 펼치시기 위해서
대충 대충 심상히 고치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하나 평강이 없는
강도의 소굴인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서
피 용서의 기능을 제대로 작동케 하시고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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