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에베소서 ; 영적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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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겨울 수련회 교재
[ 영적 싸움 ]
-에베소서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전쟁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 전쟁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순수 중립적인 개념으로 나열된 물리학 속의 단어를 살펴본다.
공의 움직임은 공을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고, 별의 궤도는 별을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며 사람의 감정은 사람의 뇌를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등 모든 현상을 물체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물체의 운동은 물리의 출발점이 되는 개념이다. 역학의 목적은 물체의 운동론을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질점(質點)이란, 질량은 있지만 크기를 무시한 물체, 즉 질량을 가지는 점, 입자를 말한다. 질점을 가지고 운동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운동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물체의 위치를 시간의 함수로 구할 수 있으면 된다. 함수는 어떤 변수가 정해졌을 때, 그에 따라 다른 변수가 결정되는 관계성을 말한다. 물체가 언제(시간), 어디(위치)에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는 말이다.
변위는 위치 변화량을 의미하며 물리 세계에서 단위 시간(1초가 일반적이다)이 어느 정도 이동하는가를 수치화한 값이다. 물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하고자 할 때, 지금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지(가속)를 파악하게 된다. 가속도는 1초 동안 빨라지는지, 느려지는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과연 물리학이 전쟁과 초연하게 자기만의 고유영역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의미(meaning)와 뜻(sense)은 정반대 것이다. 의미는 큰 영역에 속하며, 우리 경험의 장 전체의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만, 뜻은 ‘뜻 없음’의 바다에서 국소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의미는 전체 수준에 속하지만 뜻은 비(非) 전체이다.
궁극적인 의미는 종교에 의해 보장된다. 예를 들면 살인, 기근, 각종 재앙 등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혼란도 신의 관점에서 보면 지고한 의미가 있다.
뜻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은유의 마술 같은 폭발 속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어떤 것이다. 즉 언어적 논리는 비-논리적인 무의식적 결정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의 이성은 우발적인 사건과 늘 일치되지 못하고 빗나간다.
의미는 해석함의 소임이며, 뜻은 정확히 의미의 총체성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그것의 기반을 침식하는 증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같은 해석의 소임이다. 의미는 전반적이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나타나는 세부 사항을 아우르는 지평이다.
뜻은 ‘뜻-없음’의 장에서 일어나는 국소적 발생이다. 의미는 외부로부터 ‘비(非)-의미’에 의해 위협받는다. 뜻은 뜻-없음에 내재적으로, 터무니없는 우발적 또는 행운의 산물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지니지만 뜻은 만들어 낸다. 의미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표의 뜻-없음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궁극적인 공포는 순진한 가면이 그대로 벗겨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숭고한 텍스트가 잘못 해석될 때 일어난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자신에 대해 오류 된 뜻으로 이해한다.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부지불식중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과 싸우게 된다. 교전 중인 모든 입장, 모든 편들기는 필연적 환상(일단 적이 제거되면 나의 존재가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나를 향한 전쟁
진정한 적은 맞서 싸우고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한성이다. 전쟁이 흥미를 끄는 것은 투쟁 자체가 아니라 관여된 입장들을 통해서 ‘진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교전 당사자들이 ‘상호 파괴’를 통해서 드러난다. 전쟁의 진정한 정신적 의미는 명예, 승리, 방어 등이 아니라 절대적 부정성(죽음)이 절대적 주인이다.
조직화 된, 유한한 삶의 거짓 안정성은 죽음을 일상에서 배제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즉 죽음을 없다고 여기고 산 사람끼리 구성할 수 있는 ‘진리’를 규명하겠다는 시도가 전쟁이다. 이긴 자의 모든 것이 진리의 구현체로 상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보편적인 원리는 자신과의 무한한 투쟁에 사로잡힌다. 즉 투쟁은 매번 보편성 자체의 운명을 위한 투쟁이다. 유지적 삶에서 특수한 순간들은 상호 간의 투쟁 속에 있으며 이 투쟁을 통해 보편성은 자신을 재생산한다.
이 세상 속에서 침착하게 ‘우리가 유한한 존재, 허무한 존재’라고 선언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서 생판 처음 보는 적군 병사가 괴물처럼 들어와서 허락도 없이 가족을 건드릴 때, 그것을 예상했던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더 어려운가!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그 어떤 형태로도 패배자이며 이 패배자를 애써 부정하고 전쟁의 승리자를 기대하게 만드는 억지가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배만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즉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나온다.
이처럼 전쟁터에서의 진리는 적의 파괴가 아니라 상호 패배자로서 상호 파괴될 자임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정화되는 환경이기도 하다. 군사적 전시 상황이 아니라도 상호 패배 경험은 노동 시장에서 일어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처럼 믿어지겠지만 실은 목적이 없으며 무미건조한 대자연의 침묵에 대항하여 인간들도 묵묵히 노동한다. 이것이 분명 억지다. 하지만 이 말이 없는 자연을 상대로 매일 같이 피곤함에 절어 패배하는 바로 그 일이 노동자 자신의 자기 정화이다. 노동은 외적 대상의 변형인 동시에 주체 자신의 규율적인 자기 도야이다.
노동은 나의 창조성의 직접적 표현이기는커녕 내가 인위적인 규율에 복종하도록, 나의 가장 내밀한 직접적 성향들을 포기하고 내가 자연으로부터 소외당했음을 인정하게 한다.
3. 자아의 내부
보다 낮은 차원의 기층을 무시하고 더욱 높은 수준의 과정들을 어떻게 하면 자연발생적으로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나를 행위자로 바라본다.
높은 파도가 해변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수면을 가로질러 오는 실체적 존재로 지각한다. 하지만 이 파도는 아무런 실체적 동일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의 원자들은 내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일은 물과 분자들 사이의 무한히 복잡한 상호작용이 대양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같은 파도의 효과를 낳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 삶의 자연발생적인 ‘사유의 동역학’의 효과이다.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의 무한한 복잡성을 피하려고 우리는 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자들을 구성한 다음 그들을 ‘행위자’로 지각하는 것이다.
나도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구성하는 뇌와 근육 사이의 무한히 복잡한 상호작용을 다 분석할 수는 없으며, 그리하여 문제의 행위를 일으킨 힘을 가진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나’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 고도로 압축된 단순화로 인하여 많이 잃어버린 것들이 생긴다. 잔을 들고 입에 대고 물을 마실 때 “내가 왜 잔을 들었지?”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갈증이다. 여기에 손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뉴런(신경세포)적 과정의 복합체를 포함할 것이다. 이 수준에도 의도 같은 것은 없으며 그저 극히 복잡하지만, 순수한 자연적 인과(因果)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사물들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나는 의도를 원인으로 상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었어”라고 말이다.
모든 현실의 무한히 복잡한 네트워크가 정말로 외부에 존재하며 그것이 궁극적인 진정한 현실이며 단지 우리의 유한한 정신은 접근할 수 없다는 전제는 과연 옳을까? 모든 구분이 무한대로 계속되고 그 와중에는 어떤 것들은 현실적으로 흐릿해지고 무시된다면 결국 궁극적 현실이란 공백의 바다가 된다.
자아란 다수의 물질적 사례들을 동원할 수 있고 그사이를 흘러 다니는 보다 높은 수준의 패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통속의 뇌’라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큰 통에 뇌만 덜렁 있더라도 뇌는 자신을 하나의 전체 육신일 것이라고 느낀다).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패턴’은 단지 나의 뇌 속에서만 자신이 끌고 들어가는 논리를 펴고 뿐만 아니라 나의 남은 몸, 그리고 나의 몸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제도들, 그리고 다른 동식물뿐 아니라 하늘의 별, 구름, 바람 각종 자연의 소리 사이의 상호작용의 패턴들이다. 내가 나의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각종 과정과 맺는 방식이 나를 ‘나의 자아’로 만들어 낸다.
나를 나의 자아로 만드는 복잡한 사회적 네트워크가 결국에는 이 나를 박탈까지 하게 한다. 우리 자신이 이처럼 이 대자연이 만드는 ‘보편적 기계’의 일종이라면 우리 자아 자체가 이 보편성의 한계 자체로 보면 된다.
예를 들면, TV 화면에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을 볼 수 있는데 이 TV 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이, 그리고 다시 이 TV 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 자아를 계속 확대 양산할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이것은 곧 언어(말)를 구사하는 당사자 자아가 있을 수 있고, 그 언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으로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고 구분할 수 있다. 어느 것이 진짜 자아냐를 따질 게 아니라 모두가 다 자아다.
이처럼 신경 중심주의자들은 나를 뇌와 동일시하는 입장과 나의 존재를 반박하는 입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어떤 유령의 환원적 생각도 나에게 그리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자아의 존재를 다시 붙든다. 나를 지상의 작은 신으로 이끈다. ‘나’라는 신(神)은 대체 누구 혹은 무엇인가?
뇌과학이란 결국 인간들은 실제로는 단지 뉴런적·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불과함을, 그리고 우리의 현상적 자기 경험의 표면 아래에서는 결국 모두가 아는 게 전혀 없는 ‘바보’라는 것을 증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받아들여야 할 형편에 있다.
그래서 광활한 우주로 의식의 범주를 넓혀서 이 두려움이 주는 중압감을 한없이 넓은 공간과 기나긴 시간을 통해서 분산 시켜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밑’ 또는 ‘뒤’에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의식을 전적으로 물리적 현상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식의 현상적 수준을 괄호 안에 넣고 자신을 ‘현실’에 제한하는 순간, 의식조차 너무 희미하게 되어 붙잡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무지개 그 자체와 일치하는 현실 속의 어떤 신비로운 X를 적시하기 위해 무지개를 좀 더 가까이 살려보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의식은 가상의 출현을 분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무엇이, 왜 우리는 가상하고 상상토록 하는가?
이래서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아무리 제거해도 남겨진 무엇과 끊임없이 내면적으로 싸우게 된다. 자꾸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의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죽음’, 그 죽음의 공간이 ‘나’다. 즉 ‘나는 살아있는 죽음’이다.
4. 자아의 죽음과 구원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因果)성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인데 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과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 하신대(요 20:17)”
아버지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인간의 눈을 예수님은 육신으로 가로막으셨다. 모세의 얼굴을 덮였던 영광을 차단하기 위한 수건 기능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3-15).”
구원이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이 방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귀환이나 재림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의 방문이다. 이로써 자아를 구원코자 하는 투쟁 의지와 이 결사적 투쟁을 뒷받침 해온 구원 신화는 성령이 오심으로 자동으로 거짓된 것으로 드러난다. ‘자아 보편성’이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 먼저 일어난 자아와 자아의 투쟁을 성도 될 자들에게도 일어나게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밖에서 형성된 기존 자아’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드러난 자아’ 사이에 전쟁을 벌이게 하신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고후 13:5-6)”
5. 예정
예정설은 우리의 운명이 영겁부터 신성한 정신 속에 존재해 온 꾸준한 텍스트(성경)에 봉인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을 예정하는 텍스트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영원한 과거에 속하며, 이 과거 자체는 우리 행위로 소급해서 다시 쓰일 수 있다. 예정설에서 운명은 그러한 과정에 선행하는 결정 속으로 실체화되며, 따라서 개인의 행위의 짐은 수행적으로 운명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운명을 발견한다(추정한다). 그리하여 우연성의 필연성으로의 변증법적 전도가 모호해져 버린다. 즉 우연적인 과정의 결과가 필연성의 가상을 띠는 방식이 말이다. 사물들은 소급하여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특이성은 인간들이 예상할 예정론을 틀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렇게 해서 성도의 운명뿐만 아니라 자아성까지 완전히 바꿔 버린다. 십자가 알기 이전에는, 우리는 죄를 짓는 숙명에 놓여 있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 죄를 없애준다는 것은 정확히 그의 희생이 우리의 잠재적 과거를 바꾸고, 따라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첼시 고양이의 경우처럼 고양이의 미소가 고양이 보다 먼저 등장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고양이가 사라져도 고양이의 미소는 현장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구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태어났다는 공식을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된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의 예정된 운명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우리의 부단한 활동을 몰고 가는 것이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따라서 자아 해부는 필수다. 해부의 진리는 어떻게 자아가 있지도 않은 ‘나’와 교체되느냐 하는 데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본래의 의미 역사성과 유기적 진화를 구분해야 한다. 유기적 진화의 경우 보편적 원리는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자신을 분화시킨다. 그 자체로서 그것은 투쟁하는 개인들의 분주한 활동, 생명의 순환인 생성과 쇠퇴의 무한한 과정을 통일시키는 차분한, 기저에 깔린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토대로 남아 있다.
그와 반대로 모든 본래의 것은 자아의 보편성 속에서 자아가 거부하는 투쟁을 말한다. 기존 자아에 근거한 지혜는 늘 보수적이다. ‘생명의 순환’이라는 고대 시대의 주제, 즉 생성과 쇠퇴라는 주제는 실은 우리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어리석게도 인간들은 폐쇄의 완전함을 지키려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전쟁이 그친 그 화해의 순간이 여전히 이 폐쇄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재표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출발선에서 한 발짝도 이동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기나긴 것 같지만 압축되는 방향으로 살아온 것이다. 손바닥 한 뼘 내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행위의 결과로 최종 국면에 이르렀다고 할 때 이는 스스로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폐쇄성의 완벽을 사람들은 도리어 자신의 이상(理想)이라고 믿는다.
Ⅱ 본론
(줄거리)
사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구약의 복에 대비하여 신령한 복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3). 따라서 자연히 에베소서를 대하는 자들은 이 신령한 복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구약에서 이야기한 복과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우선 그 복은 하늘에 속했다고 되어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창세기 3:22의 생명나무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에게만 준다(1:4).
그럴만한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도 분명하다. 왜 모든 자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오직 선택한 자만이라는 언약에 규제받기 때문이다(1:5).
그러면 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신 일이 선택의 유일한 근거를 이루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조건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풍성한 은혜다(1:7).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시고 얻으신 그 신령한 복, 즉 죄 용서의 복은 모든 구약의 복이 정향하고 지향한 바로 그 자체이다(1:7).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예수 안에서 뭉쳐지고 통합되어 있어 상속자인 우리에게는 그저 그 영광을 찬미할 따름이다(1:12, 14, 3, 6).
만물이 죽은 자나 산 자나 온 우주와 하늘의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몰려드는 그 위엄과 능력에 대하여 이제 성도는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1:17-22).
교회는 그분의 활동과 사역의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몸이다(1:23). 이제 그 사역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우선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교회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서만 교회가 이루어진다(2:1).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예수 안에서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이고 그 본질을 확산시키는 몸의 구실을 톡톡히 할 수가 있다(2:7).
여기서 ‘예수 안’이란 말은 예수님에게 발생한 은혜의 사건 전부를 말합니다. 함께 살리고(2:5) 함께 하늘에 앉히는(2:6)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란 감정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모습으로 등장한 땅에 속하지 않는 사건들을 말한다.
그 사건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된다. 교회란 은혜가 가지는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그 은혜의 능력으로 언약밖에 있던 자들까지 하나님의 동일한 식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2:11-22).
이것은 율법에 따른 기준을 철폐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새로운 기준으로 하여 새 사람됨의 자격을 부여한 결과다(2:15).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거주하실 곳도 여기다(2:22). 성령은 그곳을 이루는 일을 하신다.
사도의 이러한 성전 개념은 에스겔에서 성신의 역할이 성전 재건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다윗 언약의 완성을 역사 안에서 실현됨을 나타낸다(겔 37:25-28/48:35).
이 성전이 되어 가는 구체적인 형태는 성령이 계속된 사역으로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자에게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이 일에 관여한 자가 바로 사도다(3:6-8).
사도 자신이 환난 받고 고난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기도하고 고대하는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풍성함을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하는 것뿐이다(3:14-19).
바로 그 사랑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이다(4:2). 교회란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다. 교회가 이미 세상에 대하여 승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데 있다.
이 은사는 이미 승리한 자에게만 제공되기 때문이다(4:8-11). 이 은사는 이미 주어진 구원의 능력을 지체들에게 제공하여 그 승리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자기이기 때문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포기하고 구별된 자로써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4:22-23)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삶이다(4:32-5:2). 사랑은 우선 무엇을 포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버릴 것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희롱, 방탕과 음행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가정생활에 있어 아내는 남편을 대할 때 예수님을 의식하며 대하고 남편도 마찬가지며, 부모와 자식, 종과 고용자 사이에도 같다.
이 모든 것의 구별됨이 거룩이다. 비-거룩이란 결국 우리의 투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세력들인데, 우리는 이들과 대항 되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갑옷을 착용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해 정신을 차려 자신의 동역자인 사도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6:18).
Ⅲ 결론
실패를 수단으로 하여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얼굴에는 폭력의 증거가 얼룩져 있다. 인간의 접근은 실패다. 인간이 예상하거나 성사할 수 없는 세계가 천국이기에 인간들은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야기되는 천국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람들의 고집도 여전하다. 자신을 버리지도 못하고 버리는 방법도 모른다. 어디에다 버릴지도 모른다. 자유스럽기에 그 자유를 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낭패다.
“이것이 저의 형편이라면 하나님이여 저에게 저주를 내리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해서 더욱더 절망적이다. 금지되지 않는 욕망이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금지당하기에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음을 알려주신다.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신다. ‘출현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속아 넘어갈 때만이 저항이 없는 관계다. 나에게 내가 빼기가 되는 순간이다. 그 결과 더는 십자가 믿는 자는 사라지고 그저 ‘십자가가 된 자’만 그 자리에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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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기
비어있는 계시를 정치적 힘의 균형으로 채운다. 이것이 역사 내막이다.
므나헴(752-742)
디글랏빌레셀 3세(746-727)
아하스(735-720)
베가(736-732)
호세아(732-722)
살만에셀 5세(727-722)
사르곤 2세(722-705)
산헤립(704-681)
에셀핫돈(681-669)
아슈르바니팔(668-627)
나보폴라실(625-605)
므낫세(687-642)
느고(610-595)
요시아(640-609)
여호와아스(609)
여호야김(엘리야김)(609-598)
예레미야(627-580)
느부갓네살(605-562)
다니엘과 세 친구: 1차 바벨론 포로
여호야긴(598-597): 2차 바벨론 포로. 에스겔(593-570)도 함께 함
시드기야(597-586)
벨사살(556-539)
고레스(559-530)
세스바살
스룹바벨
(남자 여자와 아이들: 47,742 레위인: 74 레위인 성가대원: 128 짐꾼:110 성무를 돌보는 사람: 392 그 외 이스라엘 정통성이 없는 사람: 662 )
여호수아
캄비세스 2세(530-522)
다리오(522-486)
학개(520)
스가랴(520)
닷드네(페르시아 총독)
에스라+5000명 (1차 귀환자: 42,360+종 7,337=49,697/ 2차 귀환자: 남자 1,500+레위인 38+조력자 220=1758)
아하수에로(486-465)
아닥사스다(465-425)
느헤미야(성벽재건: 52일)
바슬람+미드르닷+디브엘
산발랏+도비야+게셈
알렉산더(336-323)
다리오 3세(335-331)
야두스(예루살렘의 제사장)
안드로마코스(알렉산드가 세운 사마리아 총독)
메논(알렉산드가 세운 유다 총독)
하시딤(경건한 자)
프톨레마이오스
셀류쿠스(312-280)
프톨레마이오스(323-285)
안티고노스+데메트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70인경)
셀류쿠스 3세(225-223)
안티오코스 3세(223-187)
셀류쿠스 4세(187-175)
안티오코스 4세(175-164)
프톨레마이오스 6세(180-145)
오니아스 3세(안티오코스 시대의 예루살렘 대제사장)
야손(오니아스 3세 뒤를 이은 대제사장)
메넬라우스(야손 뒤를 이은 대제사장)
가이우스 포필리우수 라이나스(로마쪽 대사)
아폴로니우스 장군(예루살렘을 점령한 군인: 야손 처단)
엘르아살의 죽음(서기관. 돼지고기 못먹겠다고 버티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죽음 당함)
맛디디아스(167-166: 마을 원로 제사장)+아들들
유다 마카비(망치: 166-160 맛디디아스의 셋째 아들)
리시아스 장군(안티오코스 4세 휘하의 진압군)
필립: 리스아스의 장군 정치적 라이벌
데메트리우스 1세(162-150)-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우스와 메넬라우스도 처형합니다.
알카무스(데메트리우스 1세 시대의 대제사장)
니가노르 장군(사리아에서 온 응원부대)
바키데스 장군(니가노르 후임 장군)
요한, 시몬, 요나단(160-142) 마카비 부대의 유다 후임. 152년에 예루살렘 점령
알렉산더 발라스(데메트리우스 1세의 정적)
데메트리우스 2세와 트리폰 장군도 상호 정적
프톨레마이오스 6세
안티오코스 6세(142)
시몬(142-134): 마카비 군대의 다음 장군
요한 힐카누스(세째 아들)(134-104)
안티오코스 7세
프라이테스(파르티아 왕)
바리새파/사두개파
힐카누스 아내
아리스토불루스 1세(104-103)
살로메 알렉산드라(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부인)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클레오파트라 3세(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지원한 이집트 여왕)
게루시아(장로회 공회. 로마시대에 산헤드린이 됨)
아레타스 3세(아바테아의 왕. 힐카누스 2세와 합세하겨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잠시 실각시킴)
힐카누스 2세(67)의 알렉스 산드라가 죽자 대제사장을 맡음
아리스토불루스2세(67-63) 왕위와 대제사장직 겸직
폼페이우스(65)
스카우루스 장군 (65 폼페이우스 휘하의 로마 장군)
안티파터(63-43. 폼페이우스를 등에 엎은 실제적인 유다땅 정복자. 이두매인)
파사엘(47. 예루살렘 총독)
헤롯(37-4. 갈릴리 총독)
안티고누스(40-37. 아리스토불루스의 2세의 아들. 대제사장)
옥타비우스(30. 안토니우스를 이김)
미리암네 1세(37. 헤롯의 부인)
미리암네 2세(24. 헤롯의 세 번째 부인. 빌립을 낳았다)
말다스(헤롯의 네 번째 부인. 아켈라오-마 2:22. AD 18년에 죽다.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분봉 왕- 와 안티파스- 행 14:3를 낳았다. 갈릴리 분봉 왕 AD 39년에 죽다)
헤롯 아그립바 1세(행 12:23. AD 44년에 사망)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6:1. AD 100년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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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에베소서: 침투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셔서 하시는 모든 일에 진행이 우리가 예측할 수 없지만 미래의 것은 주께 맡기고 지금 말씀 앞에 모였사오니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저희들이 깨닫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에베소서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사도 바울이 모든 인간에게 충격이 되는 그것이,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이야기, 4절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돼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를 창세전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언급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통보방식이에요. 통보해주는 거예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있었던 이야기를 그 뒤에 태어나게 만들어놓고 그걸 통보해주는 거예요. 알려주는 거예요. 이것을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알려준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세상에서는 내가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을 내 쪽에서 찾아서 갖게 되는 그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 되는 거죠.
그러면 통보하는 방식에서 우리가 나중에 창세 이후에 우리가 인간이 태어났으니까 여기에 통보를 한다면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런 것과는 여기서 충돌 또는 마찰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마찰을 유도하는 식으로 성경을 준 겁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올 때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 언어, 말 또는 문장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포섭하기 위해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그런데 충돌이고 마찰이니까 여기서 하나님 방식의 창세전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창세전에는 인간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왜? 인간 자체가 없으니까. 사람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옹알이할 때 말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는 벌써 자아가 무르익은 겁니다. ‘나 김 먹을래. 김치 안 먹을래.’ 벌써 자아가 형성된 거예요. 자기 판단이 시작된 겁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언어는 만들어진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터져 나오는 언어들입니다. 나를 없앨 생각이 전혀 없고 나를 지킬 요량으로 말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의 언어가 시작이 있다는 거예요. ‘시작은 있다. 끝은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는 시작은 있는데 끝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끝을 모르겠다는 말은 뭔가 끝을 향해 가는데 일단은 시작해보자.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지 뭐.’ 끝은 모르니까. 가기는 가는데 이 시작이 진짜 의미 있는 시작인지 제대로 된 방향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갈 데까지 시간 때우면서 인생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끝을 모르니까. 끝을 모르는데 끝을 누가 이야기해도 이게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보세요.
‘나는 말한다. 내가 죽을 것이라고.’ 이것과 ‘나는 죽는다.’ 이 두 개의 문장이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가 있지요(두 번째 문장). 내가 여기 둘이 있지요. 나라는 게 두 개를 사용했어요(첫 번째 문장). 내가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는 것은, 이 죽는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죽는 것이냐 하면 지금 내가 말하기 때문에 죽은 상태에요, 산 상태에요? 이게 살아 있는 상태지요. 살아 있는 상태가 무엇을 언급했습니까?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본인의 끝을 모르는데, 죽음이란 모르잖아요.
남들이 죽는다 하니까 나도 죽겠구나,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거는 남들 죽는 거고 본인이 죽을 때에 뭐 가려음증 이런 것 압니까? 어깨 쑤시고 그런 것 알아요? 천 명이 죽어도 내가 죽는 것과 경험이 달라요. 내가 직접 안 죽어봤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죽음에 대해서 몰라요. 죽는 사실을 모르는데 내가 죽는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르는 사실을 언급한 내가 이게 가짜라는 거예요. 내가 가짜에요. 개코도 모르는 걸 자기가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그 나는 도대체 진짜가 아니고 가짜인 거예요.
‘나는 죽는다’라고 해서 이것은 나는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죽음이 나를 함몰하고 있다. 죽음이 나를 덮치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살아 있음 자체가 곧 나의 죽음이라는 거예요. 남들은 나보고 살아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나는 지금 죽음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두 문장이 같아요, 달라요? 두 문장이 같은 문장이 아니고 다른 문장이란 말이죠.
‘나는 말한다’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내 앞에 타인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 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죽는다’ 이거는 독백으로 가능해요. ‘죽는구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거는 남이 없어도 괜찮아요. 혼자서 중얼거려도 문장이 되는데, ‘나는 말한다. 내가 죽는 것을.’ 이거는 누구 들으라는 이야기거든요. 타인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 교재 2페이지 보면, 뜻과 의미의 차이를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역할을 잘 소화하는 연극배우가, ‘너는 강감찬 해봐라.’ 최수종이 강감찬 잘해요. 이번엔 행복한 가정의 가장 역할, 잘해요. 그런데 최수종이란 탤런트가 제일 연기를 못하는 게 뭐냐? 본인이 본인의 역할을 못해요. 자기가 자기 역할하려고 하니까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은 숨 쉬는 것부터 모든 것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해서 꾸며서 살아온 것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자아의 주특기입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남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데 그런 자아가 제일 난처한 경우는 뭐냐 하면 본인을 연기할 때에요. 내 자신을 연기할 때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내 연기하면서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헷갈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속임수란 이런 거예요. 서로 친하게 지내고 아는 사람들 어떤 모임이 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다른 사람들한테 확 퍼졌어요. 일곱 명 모이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암에 걸려서 곧 죽을 말기 암 환자입니다. 일곱 명이 카페에 모여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잡담하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어떤 사람은 새로 나온 책 이야기, 어떤 사람은 영화 본 이야기, 또 자기 직업에 대해서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또 가정 이야기, 정치 이야기하면서 한 두 시간 이야기하고 헤어졌어요.
정치 이야기, 가정 이야기, 영화 이야기, 책 읽은 이야기, 누구와 싸웠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진짜 중요한 암이라는 주제를 피하기 위해서 동원된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지금 인간이 말을 하고 말을 사용하다는 것은 이건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서 빙빙 도는 거예요. 뱅글뱅글 그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이재명이 어떻고, 본인도 모르면서. 정치 이야기하고. 우크라이나 이야기하고. 만난본 적도 없는 김정은 이야기하고.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이유는 나는 내가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모르겠다는데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니까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데요. 그러면 얼른 주워 담습니다. 왜? 모르는 자기를 달래는 용도로. 너무 허해서 자기를 달래야 되니까 후딱 주워서 자기를 커버하지요. 그것이 바로 뜻입니다. 뜻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동원된 것들이에요.
예를 들면 이 땅에서 살인과 기근과 지진(얼마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각종 재앙들이 일어나지요. 그 모든 재앙들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으켰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일으켰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다고 우깁니다. 그러면 제가 묻지요. 그 지진 일어난 것과 하나님이 어떤 관련성 있는지 이야기해보라. 말 못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일으켰데. 왜? 나는 모르지.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지, 나는 모르지.
왜? 몰라. 뭘 몰라? 의미를 몰라요. 그런데 의미 모르면서 지진이나 풍랑이나 아는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셨든지, 주의 뜻이다. 그 이야기를 왜 발설하고 왜 언급하는가? 의미는 모르지만 뜻이 있어야 허망한 달래줄 수 있기 때문에. 내일 또 하루 살아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오늘 일은 마감 짓고 내일은 힘차게 살아야 되기 때문에 정리 되지 않았지만 일단 정리됐다 치고 그냥 넘어가자, 하는 식으로 또 시간을 하루 때우고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뜻은 뜻이 없는 장소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로서는 가장 골치 거리입니다. 아까 에베소서 1장 언급했지만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이거는 성립되지 않아요. 정답은 뭐냐? ‘나는 내가 없는 데서 나왔다’에요. 그러니까 내가 없는 데서 내가 나왔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필요하냐?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언어가 필요했던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건데 우리는 성경이 필요해요. 모르는 나를 덮기 위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을 덮기 위해서 에베소서가 필요한 거예요.
‘보자, 에베소서. 뭐가 있는지 보자.’ 봐서 뭐 할 건데요?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가.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게 거짓말이에요. 나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해답보다 먼저 있어야 돼’ 라는 고집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에베소서는 내가 없던 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이 자아문제가 언어라는 것이 있음으로서 자아라는 나, 없는 데서 생긴 것을 인간들은 어떻게 커버하느냐 하면 내가 있다고 치고 현재 내가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이런 식으로 세상 일어나는 것을 나한테 끌어당깁니다. 내가 있다고 치고. 그러면 내가 먼저 있다하고 그다음에 ‘내가 여기서 왜 있습니까’ 답을 구하는 거예요. 답을 구하면서 하나님 계심에 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나를 얻기 위해서 나를 찾기 위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 내 쪽으로 성경을 통해서 신에게 접근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게 엉터리인 거예요.
속임수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원하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해답은 모르고 있고 여긴 해답 아는 나, 이 사이에서 속임수가 필히 나오게 돼 있습니다. ‘틈’ 틈인데 이것이 뭐냐? 빈곳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해답을 제시 안 하고 있잖아요. 오늘 해답 제시 안 하면 잠 못 자지요. 그래서 해답을 벌써 내리겠습니다. 잠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해답은, 나의 자리는 내가 아닌 분의 자리를 원해서 맴도는 방식이 나의 자리가 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이란 그대 있음에 그대 있는 자리가 내 자리다. 내 자리 확보하고 나한테 오란 말이 아니고 그대 있음에 그대를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호숫가에 있으면 호숫가에 막 따라가서 하고 호텔 방에 있으면 호텔 방에. 체험이 막…….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나보다 당신이 먼저 있는 그곳에 비로소 나는 shelter 쉼터를 얻는 거예요. 쉼을 얻는 거예요. 그럼 그전엔 뭐냐? 인간은 나로 인하여 절대로 쉬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해답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충돌이 없는 거예요. 충돌이 성립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데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 사람이 확정돼 있기 때문에 들어올 틈이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는 나 자신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틈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랑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강의의 흐름을 일단은 두 개로 나눠보겠어요. 여러분 이해하기 쉽게.
내가 내 의미를 알기 위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심지어 죽음까지 알고 죽음 이후 세계까지 안다는 신에게 찾아가면서 인간이 중간에 만나는 게 있습니다. 만나는 게 뭐냐? 자연을 만나요. 그러면 인간은 이 자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언어를 활용할까요?
이게 주기율표에 나오거든요. 제일 바깥에 전자가 한 개 있는 것, 두 개 있는 것. 일족, 이족이죠. 이게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뭘 겨냥하는 언어냐 하면 자연의 흐름을 질서 잡아서 하나씩 쪼개고 극복해나가서 내가 누군지 아는데 보탬이 되고자 언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리튬(Li) 같은 경우를 보게 되면 암석이 시멘트 비슷한 색깔인데요. 리튬은 전자가 마지막에 하나밖에 없어서 반응을 잘해요. 이쪽이 알칼리성 금속이라 해서 굉장히 가벼운데 나트륨(Na)도 물에 뜨고 칼로 자르면 무른 금속이에요. 리튬은 리튬전지가 유명하고 나트륨 같은 것은 우리 몸 인체에 세포의 축색돌기에 나트륨 이온이 들어가서 전기현상을 일으킵니다. 마그네슘(Mg)은 자연에 엽록소에 있어서 엽록소 활동에 기본적이고, 칼륨(K)은 인(P), 황(S)과 더불어 3대 비료요소가 되고, 칼륨은 폐 안에 들어가서 폐 기공을 열어준다든지 또는 뼈 안의 성분으로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인데 이 전체를, 저는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성’ 인간은 신을 찾아가든지 자연을 연구하든지 간에 인간이 쓰는 모든 언어는 나를 선이냐, 악이냐 규정하지 않는 중성적 위치에다 두는 거예요. 과학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에는 과학의 영적 싸움이 성립될까요? 과학에선 성립 안 돼요. 중성이니까. 악하다, 선하다가 과학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인간들은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가복음 13장 24~27절에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것이 과학적으로 성립됩니까? 중성적인 인간의 언어로 이게 증명이 될까요? 별이 왜 떨어지지요? 이것을 설명하려면 영적 전쟁이라는 전제를 먼저 해야 돼요. 인간이 배제된 전쟁, 영적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메시아와 악마의 싸움이에요. 거기에 필요한 언어를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재우기 위해서 인간의 중성적 언어를 고집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선이고 악이고 하는 것은 내가 이런 헬륨(He)이라든지 수소(H)라든지 내가 바르게 쓰면 선이고, 그걸 악하게 쓰면 나쁘게 쓰면 악이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 판단에 있어서 나는 중성적 존재다, 지금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 하잖아요, 인간들은.
여러분 산화수소가 뭡니까? 산화수소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뭔가 노리는 세계관이 있어요. 산화수소, 네 자잖아요. 한 자로 하면 뭐가 됩니까? 물이에요. 수소가 산화된 거예요. H₂O 물 하면 되는데 H₂O로 쓰는 이유가 뭡니까? 과학적 자체 내에 확장될 세계관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관을 왜 붙들고 왜 고집하는가? 그것은 이런 언어를 확산시킴으로서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규정 못하게 위함이에요. 나는 그냥 순순하게 너무나 중립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보고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지를 마라. 공부를 못한 것은 죄인이 아니잖아요. 머리가 나빠서.
여기 과학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 16장 16절에 나옵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것 풀면 그 어려운 에베소서가 다 풀립니다. 종로학원 강사는 아니지만 이것 알게 되면 ‘아하, 그렇구나. 그거였네, 그거.’ 제가 너무 기대를 걸고 확 띄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가복음 16장 16절,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침입, 침투. 마태복음 11장 12절 같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천국이란 것은 고정적으로 ‘여기 있다. 믿어라’ 이렇게 돼버리면 왜 안 되느냐? 천국이 올 때는 우리가 결코 중성적인 존재인 것을 천국 자체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이 되려면 선한 쪽도 있어야 되지만 악한 쪽도 반드시 맞은편에 성립이 될 때 전쟁이란 게 있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무조건 선이고요, 뱀의 후손은 무조건 악해요. 그 선과 악 사이에서 이 선과 악 사이는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이야기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되기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전쟁에 ‘저는 중성인데요. 저는 아무 나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 이 말이죠. 너는 그냥 떡이나 먹어라. 전쟁 여파의 떡이나 먹으면 돼요. 그 결과를 먹으면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 땅에 침투가 될 때 천국이 침투가 되면서 인간들이 형성한 천국이 침노를 당해요. 공격을 받아요. 받으면서 구약 때는 선지서, 율법이 공격했는데 신약 때는 성도들이 인간의 세계, 인간의 천국관을 완전히 파괴시켜버립니다. 근데 그럼 성도가 어디 있느냐? 성도는 없어요. 성도가 되려면 ‘나 성도 될래’ 이래서 성도 아니에요. 성도는 어디서 되는가? 인간이 쓰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비로소 성도가 발생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겁니다.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거예요. 인간의 쓰는 언어를 도입을 해도 그 의미가 두 가지 의미를 다 품어있어야 돼요. 이 의미는 하나님께 도달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의미는 인간세계를 파괴시키는 언어다.
동일한 천국, 영생, 율법, 인간, 선, 악마, 교회, 에베소서에 나오는 창세전, 특히 예정 이런 많은 용어들이 있더라도 그 용어에서는 반드시 두 개의 기능이 다 포함돼 있어요. 이 예정이란 용어로 인간은 어떻게 사용했으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마중 나와서 그걸 요격해서 박살내느냐? 그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내 쪽에서 그것을 얻을 생각은, 그것을 납득해서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돼요.
그러면 아까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돼 있잖아요. 이 사실을 어떻게 풀어내는 것이 창세전의 언어, 창조된 언어를 활용한 사례가 될 수 있느냐? 성경은 그게 나와요. 해가 떨어지고 별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단 하루, 하루에 이뤄지는 거예요.
인자가 오는 것이 단 하루에 와요. 하루에 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긴긴 시간이 단 하루 안에 응축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 그동안 확장되었고 펼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응축이에요.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속도가 빨라지면 모든 무게라든지 질량이 축소가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제가 얼마 전에 한 기억이 나요.
하나님께선 한 날에 하나님이 준비한 모든 것을 승부를 다 내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하루, 그냥 one day죠. 그 하루가 언젠데? 사도행전 1장에 나오죠.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야길 듣고 자기 나름대로 종합하면서 단출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할 날이 언젭니까?’ 라고 물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오늘 강의한 것도 똑같아요. ‘너는 몰라도 돼.’ ‘너는 그 일에 끼어들 당사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너는 네가 이미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성경 해석의 해당자가 아닌 거예요. 끼어들 자리가 아닌 거예요.
단 하루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단 하루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령이 나오는 곳,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나오는 자리니까 이거는 시간이 아니고 공간이 되겠지요. 공간과 더불어 뭐가 나온다? 공간이 생기면서 뭐가 된다? 거기서 덩달아서 시간이 나오는 거예요. 벌여놓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잡아당겨버리면 시간도 쭉 빨려오고 공간도 빨려서 한 날, 한 지점으로서 모든 것이 진리가 통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단 하루, 이 장소를 무슨 장소로 보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라. 예수님의 죽음이 되니까 아까 우리가 논했던 언어를 여기다 응용해버리면 인간에게 응용한 것을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이올시다. (내 이야기 안 할 줄 알았다.) 인간은 죽음이 없어요. 자기 죽음도 몰라요.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죽음이 인간의 자기 일이 아니에요. 자기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모릅니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인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죽음은 단 하나의 죽음 밖에 없어요. 바로 예수님의 죽음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여러분의 인생이 정리가 돼요.
GO, GO! 가자. 어디로 가면 돼요? 내 죽음으로 가면 안 돼요. 수목장 할 거예요? 매장, 화장할 거예요? 그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어디로 가느냐?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 바로 뭐가 기다리는가? 시공간을 넘어서 시공간에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공간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베드로후서의 이야기도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는 창세전의 언어 활용을 인간이 쓰고 있는 언어와 겹쳐서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게 침투하는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말씀이에요. 이걸 여러분들이 모르게 되면 나 구원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을 죽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마귀의 종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지요. 그걸 마귀의 종이라 할 수 있는데 저는 이번 시간에 그걸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신병자에요. 다루지 말아야 할 대상을 자기가 다루려고 시작한 데서부터 이것은 비현실적인 겁니다. 한 예를 아까 말씀드렸어요. 연극배우가 다른 역할은 잘하는데 본인 역할을 못해요.
왜냐하면 다른 역할은 의식세계에 속하지만 본인역할은 본인의 담당이 아닌 자기 무의식세계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무의식을 다룰 수 없어요. 무의식이 본인을 다루는 거예요. 자기가 무의식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충동이 자기를 다루는 거예요. 내가 충동을 다루면 그건 충동이 아니지요. 기껏 본능 정도밖에 안 돼요.
충동적이란 말은, 내가 없던 자리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없던 자리가. 이게 ‘나다, 아니다’라는 경계선이 없던 자리에서 나를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사십을 살았습니까, 오십을 살았습니까? 평생토록 여러분들은 정신병자를 더욱더 공고히 하면서 살았어요. 이 정신병을. 정신병을 의식 차원에서 생각해서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꾸 상정을 해요. 그거는 정신병 아니지요. 그건 내가 실수한 거지요.
정신병이란 나의 허망함을 또는 허무함을 내가 아는 언어를 총동원해도 메울 수 없다. 한쪽을 메우니까 한쪽이 터져 나와요. 이게 지금 정신병 증세가 어린아이부터 있어요.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릴 때 제가 생각해보면 겨울 되면 두툼한 솜이불 속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몸집이 작으니까 손가락으로 쑤시면 이글루 같은 공간이 생기지요. 나의 세계가 만들어져요. 이불 안에. 그 안에 누워보면 이불 속임에도 별자리도 보이고 이래요. 거기서 나만의 세계 있어요. 그것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은 뭐냐 하면 어른들이 이불을 확 제쳐버려요. ‘뭐하노. 저녁 먹으라는 소리 못 들었어?’ 그러면 나의 소박한 세계가 다 깨져버립니다.
여러분들은 이게 어릴 때 이야기라고 생각되지요. 이집트의 피라미드이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인데 여기 숨통을 하나 냈는데 숨통의 방향이 어디냐? 북극성이에요. 영원한 고정된 별, 영원한 고정성을 향하여 연결되도록 피라미드를 만들어놓고 여기서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죽음 자체를 벗어나기를 원했던 거예요. 이 피라미드가 솜이불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다가설 때에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게 뭐라고요, 둘러싼 뭐라고 했습니까? 자연이에요, 자연. 그게 오늘날 과학이에요. 자연 질서를 만나는 겁니다. 자연 질서를 만나도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 나쁘냐는 것은 내가 결정하도록 나한테 맡긴 나는 여전히 중성적인 존재인 것을 자연이 거기서 호응하고 있다고 내가 증거를 수집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이 무슨 죄가 있어?’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달리 하면,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연에서 계속해서 더욱더 완벽하게 모든 걸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의식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마찰이나 충돌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중성이란 건 뭐가 없는 거냐 하면, 영적 싸움이 없어요. 영적 싸움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이게 매개자가 아니에요. ‘매개자’란 어려운 말이 나왔는데요.
매개자란 이겁니다. 앞집이 있고 빌라 두 채 있다면 빌라 두 채 사이에 연결돼 있다면 이게 바로 매개가 돼요. 앞집에 누구 살고 이 집에 누구 살고 앞집, 뒷집 연결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떠냐 하면 윗집은 없어요. 내 쪽에서 계속해서 질문 던지고 답 얻고, 질문 던지고 답 얻고. 코로나는 왜 생겼을까, 바이러스냐, 계속 나오는.
인간은 매개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주체가 되는 거예요. 매개가 아니고. 매개의 반대는 주체고, 주체의 반대는 매개에요. 매개란 은혜성과 연결이 돼야 돼요. 이미. 끝을 알아야 돼요. 시작도 알아야 되고. 주님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매개로 제시한 게 뭐냐?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매개자가 되고 중보자가 돼버린 겁니다.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 자신이 매개 대상이 되면서 중간에 매개자로 성립돼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노정, 그 경로가 설치가 돼요. 그러니까 이 경로가 설치되어 순환하고 있는데 여기에 인간이 끼어드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이건 바로 정신병자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도려낸 것은 이게 인간이 빠진 상태에요. 창세 ‘전’에 돼요. 그러니까 인간 보고 너는 아픈 사람이니까 빠져있고 내가 창세전에 다 이루면 너에게 뭘 해주겠다? 통보, 내가 알려줄게. 성령을 통해서 알려줄게. 이게 주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계획은 10분 쉬는 게 계획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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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2강-에베소서: 통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방에 들어갈 때 이렇게 묻지요. ‘들어가도 됩니까?’ 그에 답변은, 인간은 둘 중에 하나에요. ‘들어오세요.’ ‘못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못 들어온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미 만들어진 인간이 창세전의 상황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창세전에는 인간이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인간이 산 채로 뚜벅뚜벅 그 세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야라든지 모세.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변화산에 있을 때 같이 등장했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은 거기서 노는 거예요. 못 들어간다는 데 그들은 들어갔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묻지요. ‘저 사람은 못 들어가는데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이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은 선택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사람들은 드디어 ‘내가 그들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이 답변 자체가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 답변을 자기한테 장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도 선택해주세요, 라고 이야기를 하게 돼요. 그러면 ‘그러니까 너는 못 들어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선택이란 말을 인간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택이란 단어가 두 가기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선택을 거부하는 방식이거든요. 선택은 너와 합작해서 하는 게 아니고 한쪽이 선택해버리면 다른 것은 그 결과에 좋든 싫든 따라가는 게 선택입니다. 선택을 공유하고 놀고 탁구공처럼 그렇게 되는 게 선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한 그 기능을 우리가 그것을 우리에게 써먹을 수가 없어요.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다는 말은, 너는 너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미 한쪽 선택이 결정 났기 때문에. <Mission Impossible>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입니다. <Die Hard>도 마찬가지고. ‘빨간 선을 끊느냐, 파란 선을 끊느냐?’ 지금 뉴욕이 폭발할 직전에 어느 선을 끊는가? <The Matrix> 영화에도 비슷한 것 나오지요. ‘파란 약 먹을래, 빨간 약 먹을래?’ 나오지요.
그 선택은, 하나님의 어떤 선택은 인간을 비껴갑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 안 해도 괜찮은 조건을 주께서 주셨습니다.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우리가 굳이 천국을 선택 않더라도 우리가 지옥 갈 수 있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나보고 지옥 가래요. 나보고 주님께서 ‘너 지옥 가’ 이걸 풀이하면 아브라함과 이삭, 모세, 엘리야한테는 이 말을 이렇게 풀어요. 모세와 엘리야, 아브라함 보고, ‘너 지옥 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지옥 다녀와’ 이런 뜻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저주의 세계 음부까지 갔다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너 지옥 가’가 이게 욕이 아니에요. 'You are hell' 욕이 아니라니까. 주님이 우리한테 어떤 지시를 내리든 그 지시가 곱게 우리 안에 남아있으면 우리 안에 말씀이 남아있는 거예요. 말씀이 들어온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거든요. 통보의 아주 적절한 예가 이거에요. 예수님이 쓰셨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고 난 뒤에 자살했잖아요. ‘너는 자살하게 될 거야.’ 그래놓고 하시는 중요한 말씀이, ‘차라리 너는, 앗싸리 네 입장에서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이야기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가룟 유다한테는 아무리 예수님이 말씀을 해도 가룟 유다가 자기 선택을 그냥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내 목숨을 끊고 말고는 내 의지에 달렸다는 그대로 고수하는 고집하는 그 결과를 주께서는 그걸 아셨던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선택하심을 곱게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일단 나의 세계, 아까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솜이불 속. 일단 나의 세계에 와서 나에게 검사를 받아야 돼요. 이게 나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내가 천국 가는데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 판단을 점검해서 거쳐야 돼요.
그렇게 거치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선택에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천국 갈 자의 선택과 지옥 갈 자의 선택이 돼 있어요. 요한복음 6장 끝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70절) 가룟 유다라 하지 않고 그냥 사탄이라고 돼 있고, 요한복음 17장에도 내가 그들은 끝까지 지켜준다. 단 멸망할 자는 빼고. 요한복음 17장 볼까요? 지금 이 이야기가 듣는 너희들이 신이 나야 돼요. 기분 굉장히 좋아야 돼요.
요한복음 17장 12절에 보면,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자식의 선택을 이야기할 때 누가 멸망할 자냐 하면, ‘주께서 지켜준다는 데 주께서 말만 하고 안 지켜주면 나 어떡해요’ 하는 사람이 멸망할 자에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반드시 무슨 결과를 낳느냐 하면 반드시 멸망할 자를 낳는 식으로 주께서 은혜를 사용하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주님께서 어떤 결과를 낳든지 간에 주께서 결정했다는 자체에 대해서 자기 선택을 그 앞에서 깨어지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이 선택했다는 것은 내 선택이 와장창 다 박살나는 거예요. 깨져버리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대처하고 지키지?’ 이게 박살나버려야 돼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자체가 정말 건방진 일이구나’ 본인이 자인하고 자백해야 돼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게 바로 나의 고질병이었다는 것, 이거는 못 고쳤다는 데 못 고친 인간 주께서 부셔버렸구나. 우리는 자꾸 병을 고쳐 달라 하는데 주께선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니고 우리를 깨뜨려버리죠. 우리 자아를. 치료하는 광선을 보내서 찌지직 우리 자신을, 자아를 폭파시켜버리죠. 우리가 폭파되면 우리의 선택, 우리의 결정, 판단 이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산산조각 나있지요. 깨져있는 상태라니까.
‘내가 사용한 언어의 조합은 무의미’ 내가 사용한 언어의 조합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이야기했지요.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내가 보기엔 의미가 없어요. ‘너나 잘하세요’ 이게 정답인데 이건 실례가 되니까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이 내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내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습니다’ 이걸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나의 판단이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다 파편화돼야 돼요. 유리창 깨지듯이 깨진 파편 된 언어들만 갖고 있습니다. 누가 나의 언어를 깼습니까? 주의 말씀이 나의 언어를 다 와장창 깨고 말았어요.
극단적인 어떤 목사 같은 경우에, 극단적인 사람 많아요. 설교하라 하니까 제가 예를 들어 눈감고 하겠습니다. 눈감고 펼치니까 뭐가 나왔느냐 하면 벨사살 왕, 다니엘서 5장이 튀어나왔네요, 우연히.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여러분 다 같이 기도합시다.’ 성경을 그대로 읽었어요. 그런데 설교시간이 너무 짧잖아요. 그러면 그다음 구절을 또 읽어요. 그래도 짧다 하거든요. 또 읽어요. 그래도 짧다 하면 더 읽고요. 그래서 성경 한 열 장 읽어버리면 50분 지나갑니다. 성경대로 읽었어요. 이게 설교입니까?
여러분 이렇게 하면, ‘너무 심하지. 그거 말도 안 되지’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설마 그런 사람 있을까? 설마 광고 하나, 이번 주 김장합니다. 그런 것 하나 넣었겠지’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한글성경 말고 신약 헬라어로 읽었고 그걸 파싱이라 해요. 분석해서 이거는 가정법 과거완료가 어떻게 남성형, 여성형 하고, 그래서 50분 때웠습니다. 그거 설교입니까? 그건 설교에요? 아니지요.
설교는 딴 게 아니고 자기가 말씀에 의해서 이 성경말씀 두고 자기가 알던 말씀해석이 이런 식으로 깨어졌습니다, 라는 고백이 설교에요. ‘주께서 이런 식으로 다녀갔습니다’를 소개하는 게 설교라고요. 나는 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순결한 마음으로 순진한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이 말씀대로 지키고 하나님 믿고자 했던 이것이 바로 가증한 멸망의 자식들이나 하는 짓거리였습니다, 라고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자신이 매개자 되는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우리가 여기 있는데 주님께서 중보자, 매개자로 우리한테 와요. ‘너 말씀 잘 지켜라. 나는 볼일 다 봤다. 난 아버지께로 간다.’ 이게 아니고 나 속이 아닌 우리들 속에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여기에 상주해버려요. 성령을 통해서 상주를 한다고요.
그러면 껍데기는 우리의 모습이고 안쪽에는 아버지와 중보자 사이에 창세전에 연결된 그 케이블은 여전히 살아 있지요. 이게 침투 아닙니까. 천국의 침투.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직접 천국이 와서 우리를 영적 전쟁을 벌여서 이걸 침투해서 공격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공격당한 패배자로서의 모습. 패배자의 모습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설교지요. 이게 설교란 말이죠.
‘나는 패배자 맞습니다,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 또 이렇게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씀하지 마시고 또 살살 물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어느 대목에서? 뭐 어째서 죄인이야?’ 그러면 또 벌써 속임수 쓰는 게 들통 나지요. 하여튼 자꾸 정답만 나와. 정답만 이야기하려고 해. 정답만 이야기하게 되면 설마 정답 이야기한 나를 내칠까, 이런 꼼수, 요령꾼, 모사꾼. 기묘자요 모사라 하는 것은 주님한테 해당되지 간사한 자에게 해당되면 안 되지요.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가 죄인 되는 것을 주께서는 이걸 실감나기 위해서 고맙고 친절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준비했느냐 하면 역사를 준비한 겁니다. 교재 준비가 안 돼서 역사를 이야기 못하겠는데, 역사를 준비한 거예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정했다는 것을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싶어서 인간은 역사라는 것을 쥐고 있는 겁니다.
역사는 매개입니까, 매개 아닙니까? 윗동네와 연결돼요, 안 돼요? 연결 안 됩니다. 올라갔다가 이게 김정은이 미사일처럼 전부 다 동해에 올라갔는데 다 빠져버려요.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믿을 것은 역사밖에 없습니다. 과학이요? 과학은 역사 아닙니까? 과학사. 패러다임에 의해서 계속 발전한다는 그 과학의 인식이 바로 그 자체가 역사잖아요. 권력? 역사입니다. 민주주의? 역사에요. 이 세상에 인간이 믿을 것은 역사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 내 일기장 다 역사잖아요. 교회의 역사, 가정의 역사, 가문의 역사. 우리가 여기 온지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역사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역사의 구성요소는 법입니다. 율법.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각 나라로 흩어졌지요. 주로 이집트에 많이 갔어요. 물론 바벨론도 많이 가고. 바벨론 갔다가 이집트에 간 사람도 있고. 후다닥 애굽으로 빠진 사람도 있고. 하여튼 본토는 완전히 궤멸됐어요. 완전히 본토인들은 궤멸되고 이주민들이 혼혈아들이 유대 땅을 차지하고 특히 사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혼혈아들이 왔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세요. 계시가 끊어졌다. 어떤 계시?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과 지금의 형편,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끊어졌다. 그러면 메시아는 어느 계통으로 오느냐 하면 다윗이란 혈통으로 와요. 다윗의 혈통.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연적으로 어디를 집중하느냐 하면 끊어진 계시를 뭐로 이을 겁니까? 역사로 잇겠지요. 이게 바로 중간기라는 거예요.
성경에 말라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시를 끊어놨는데 인간이 못 견디는 거예요. 정통성이 없으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대제사장 제도를 취하는 데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당시에는 왕국이 없으니까 왕이 없고 율법을 다루는 대제사장을 찾았던 거예요. 율법을 다루는 제사장.
이것을 합해서 다른 나라에서는 포로 된 나라에서는 회당제도, 시나고그(Synagogue), 회당이란 걸 사용해서 율법 중심으로 제사를 대신해서 율법을 가르치면서 역사를 대대로 이어가겠다는 거예요. 그럼 그 역사를 잇는 맥이 뭐냐? 다윗의 혈통입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다윗의 혈통이 육신적인 DNA의 생식세포에 연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혈통의 연속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가 나오지요. 여기에 ‘~에게서’란 말이 네 번 나오는데(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이건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한 거예요. 42대 족보. 그 ‘에게서’ 나올 때마다 외부에서 투입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혈통의 순수성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순수성에다 옆구리 치고 들어와요. ‘하늘의 혈통이 개입된다.’ 유대인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어요. ‘아니야, 아니야. 너희들이 무시했던 이방인의 혈통이 주도권을 가지고 투입돼요.’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의 혈통이란 것은 뭐냐? 이건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그 이방인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이쪽은 밀리게 되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예수님이 이 말씀 왜 하셨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께서 이런 질문하는 것, 또 특히 마태복음에서 8장에서 결정적으로 때리시는 게 뭐냐 하면,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백부장 같은 이방인이 차지한다. 주께서 그런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에베소서 하는데 보게 되면, 우리가 할 작업이 보통 많은 작업이 아니에요. 여기 에베소서 2장 11절부터,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러니까 뭐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에요. 약속이 없는 자가 약속 있는 자에 왜 주제넘게 끼어듭니까?
이거는 인간의 혈통 위주로 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너 같은 건 지옥이나 가라.’ 이게 적절해요. 유대인들이 이방인 보고, ‘너는 개 같으니 지옥이나 가라.’ 그러면 구원받은 이방인은 뭐라 합니까? ‘우리는 이미 지옥을 다녀왔지만 너는 지옥 가지도 않았잖아.’ 이래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지옥을 한 번씩 갔다 와야 구원을 받아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옥 속에서만 구원이 있어요. 지옥 바깥에 나가면 구원이 없습니다. 죄인 속에 있어야 의인이 돼요. 죄 안 지으면 그거는 지옥 갑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 2절에 뭐냐?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에 불순종하고 저주 안에 있고 진노의 자식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뭘 주장합니까? 그 하나님의 저주받으면 되는데 인간은 뭔가 참지 못하고 법을 내세우고 혈통을 내세워서 법과 혈통이 만나서 뭐가 됐습니까? 건전한 history, 우리의 전통적인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재를 우리가 못 받아봤습니다만 그 교재에 보면 인간들은 그 유대인들은 아주 결사적이에요. 혈통을 위해서. 혈통을 위해서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에 모든 사례는 거기 다 나옵니다. 혈통 하나를 잇기 위해서 이방인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혈통만 유지된다면 나라를 이방나라한테 팔아먹어도 우리는 상관없다고까지 나와요. 아주 독하지요. 독하지만 오늘날 우리만큼 독할까요?
창세전이라 하는 건 여기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창세후가 태어납니다. 주님의 언약은 창세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인간들은 창세후의 자꾸 환상을 따라서 갑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내가 현재 있음을 내가 없는 쪽으로 돌리기 싫은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내가 소멸되는 것으로 간주해서 내 죽음은 죽기보다 싫은 거예요.
‘나의 죽음은 죽기보다 싫다.’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죽으면 죽었지 나는 안 죽는다’ 이걸 자살이라 하는 거예요. 아 독하지요. 되게 독해요. 어떤 경우도 내 죽음, 내가 어떤 경우를 돌아가기 싫어요. ‘이왕 생긴 것 좀 봐주소.’ 그래서 인간은 자아를 두고도 이렇게 장난치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는 뭐냐? 장난입니다. 뜻은 있는데 의미는 없어요. 뜻이 있다는 것은 나 좋으라고 발설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즘 이태리 날씨는 뭐하지요? 습하게티? 아하 이거 아재 개그인데 장난치는 거죠. 정치가들 연설, 전부 장난치는 거예요. 장난인데 배후에 쥐고 있는 게 있어요. 나의 역사는 내가 포기 못한다.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살아남기겠다.
비록 나는 죽지요. 하지만 내 이름은 국립현충원에 대전에 가든지 서울 가든지. 이게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어, 자기는 죽는데 뭐는 살아 있다? 내 몸 하나 희생되어 뭐가 살아요? 가문이 살잖아요. 다윗의 혈통이 살잖아요. 몸 바쳐서, 논개는 몸 바쳤는데.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우리 대한민국은 일체 넘어가지 않도록. 임진왜란 때 몸 바치고, 진주 논개 맞지요.
여러분들은 왜 삽니까, 하면 대의명분, 명분이란 걸 내세워요. 왜 사십니까, 왜 존재합니까? 날 위해서. 이건 너무 티 나잖아요. 그저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식 하나 보고 삽니다. 자식 막 뛰어다니고 난리치고 하는데 말썽꾸러기인데 난 자식 하나 보고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자식 죽으면 눈을 못 감는다. 눈은 의사가 감겨줘요. 나중에 감겨준다고요.
모든 인간들은 본인이 지금 내막도 해답도 모르고 장난치고 있다는 장난치면서 평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부정하고 싶어 해요. 습하게티? 내가 갑자기 정신병자 같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 의미 없는 것을 주께서 사용해주신다는 거예요. 그걸 리싸이클 산업이라 하는데 폐품재활용해서 그걸 순환시킵니다. 이스라엘 봐라. 다 쪼다잖아요. 하지만 그 쪼다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항하고 할 때 율법 알면서도 망했지만 우린 아예 율법 모르는 채 벌써 망했다는 거죠. already 이미 망했다는 사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바로 언약도 없고 약속도 없는, 그리고 12절에 보면, 나라 밖의 사람이고 약속 없는 외인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어요. 근데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뭐로 가까워졌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도 바울이 쓰는 언어를 보세요. 뭐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다든지 하나님의 도와주심, 긍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를 내세워요. 피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피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시간 세계에서 시간이 나왔던 그 세계와 유일하게 연결되는 그 시공간이 바로 ‘피’입니다. 피 흘림의 사건이에요. 피의 사건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얽힌 관계망, 뭐 불교에선 인연이라 하는데 인연이든 뭐든 좋은데 인연이라 해도 관계라 해도 같은 말이기 때문에 했는데 모든 것은 중심이 있는 거예요. 그 중심이 뭡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중심을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피’라고 이야기합니다. 피 안에 사는 자가 영생이고, 피를 모르는 자가 피를 볼 거예요, 아마. 피를 모르는 자가 저주받을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좋은 그릇, 나쁜 그릇 두 종류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한 번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세전의 결정은 주님만이 매개자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매개자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을 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를 해줘요, 말씀으로. 통보해서 받으면 되는데 인간은 통보를 받는 게 아니고 본인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해요. 본인이 성경을 연구하니까 통보 없는 해석이 나와버리니까 이게 바로 멸망의 자식입니다.
제가 과감하게 그런 건방진 주제 넘는 그러한 과장된 표현을 많이 쓰지요. 신학교수 중에서 믿는 사람 하나도 없다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진짜 없는 게 아니고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사람은 그 신학교수 가운데서 내가 성경을 파고 연구하는 이것이 내가 가져야 될 내 죄라고 고백을 안 해요. 어느 교수도. 그런 교수 봤어요? ‘나 오늘도 열심히 죄 지었어요. 하하.’ 이런 교수 봤어요? ‘우리는 특별히 가르치는 영을 받았다.’ 아이고 참. 어디 갖다 붙일 것을 갖다 붙여야지.
세례 요한은 항상 노선이 달라요. 기존의 다윗의 혈통의 노선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침투를 해요. 구약에는 세례 요한까지 침투를 한다니까. 세례 요한이 드론입니다, 드론. 침투를 하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세례 요한에게 뭐라고 질문하느냐 하면,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너 제사장이야, 네가 선지자야? 네가 뭐야?’ 거기서 세례 요한의 답변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닙니다. ‘나는 무엇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의 기초, 토대가 되는 발산되는 언어체계와 내가 몰고 온 언어체제가 다른 거예요. 세례 요한이 날 때 아버지가 사가랴, 맞지요. 아버지 사가랴가 말을 못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뭐, 뭐? 말을 해.’ 말을 안 합니다. 이름 바꾸라고 석판에 썼어요. ‘요한이라 해라.’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기존에 알고 있던 흘렀던 모든 역사에 대한 부정이 세례 요한 아버지부터 이미 주어졌고, 성령을 통해서 성령이 예언한 대로 세례 요한이 태어난 거예요. 노선이 그쪽 노선이에요.
그 노선으로서 에베소서에서는 바로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그렇게 지어진다. 성전이 성령의 전이라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은 주의 뜻은 말씀은 무엇과 싸운다? 인간의 역사와 싸운다. 인간의 역사는 뭐라고 돼 있습니까? 인간의 법 또는 인간의 언어+인간의 혈육/혈통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이것들을 모아서 이것이 뭐냐 하면 힘, 에너지인데 정치적 에너지에요. 중간기의 모든 내용들은 우리 집안에 있는 다윗의 혈통으로 제사장 세우기 위해서 외국군인들, 불신자 군인들, 셀류쿠스 왕조라 해서 북쪽에 아람나라 있잖아요. 헤즈볼라 그쪽에도 손잡고 군사적 힘을 동원하는 이유가 오직 하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예요.
그것 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것이 그들은 끊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 역사가 대체함으로서 우리 유대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정통성을 가진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계파가 사두개인, 바리새인, 쿰란공동체, 열심당원, 파가 한둘이 아니고 여러 개니까 대표적 것 네 개 정도하면 그 정도 돼요.
거기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같이 상원, 하원 모아서 만든 국회에요. 그걸 장로들의 회의라 해요. 그들의 서기관들. 그들이 다 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한 뜻을 모아서 예수님을 죽이고 거기서 나온 게 뭡니까? 거기서 짜서 나온 게 뭐예요? 피가 나왔지요. 모든 역사에 대해서 피가 고발합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있는 자리(역사)에서는 의미 있는 선택이 안 나온다. 도리어 이 선택을 피하는 방식으로 선택을 한다’ 이게 마태복음 1장 족보입니다. 다윗이 살인하고 간음해서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다윗은 자인합니다. “나 잘렸다. 난 의인도 아니고 완전히 잘렸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너의 혈통이야. 창세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네가 방금 고백했잖아.” 그러니까 창세후에서 메시아를 하나님의 언약만이 창세후 있는 존재를 뭐로 돌립니까? 창세전의 상태로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과 주의 이름만 있던 그 상태, 예수님만 있던 그 상태로 돌릴 수가 있는 거예요. 언약이 없으면 돌아가질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정신병을 다 피해서 그것과 결부하지 않고 인간은 전부 다, 가수 임영웅이 콘서트하면 무대에서 곱게 하면 되는데 후반부에 좀 흥이 난다 싶으면 고맙소, 고맙소 하면서 마이크 쥐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아주머니들이 곗돈 탄 것 털어서 십만 원, 십오만 원 주고 오는데 손잡으려고 선택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임영웅은 역사를 이룬 거예요. 인간의 선택이 살아 있는 것, 내가 주님을 선택한 선택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가했다는 자기 달램, 자기 허함을 달래주는 그런 식으로 그동안 인간들은 성경을 봐 왔던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피해가십니다.
여기에 에베소서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됐습니다, 됐습니다, 그만. 그 기쁘신 뜻이에요. 주님의 뜻이 아니에요.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다? 주님은 기뻐서 선택한 거예요. 그 기쁨과 공유돼야 돼요. 그 기쁨에. 주께서는 기쁜데 주의 뜻이 너한테 넘어가면 나는 슬퍼. 이게 뭐 뭔가 변질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냉장 밀키트 잘못 샀는가? 돈가스 샀는데 전부 다 썩은 것, 대게 샀는데 대게 다리가 썩었다든지. 주님께선 곱게 줬는데 귤 까먹다가 귤이 썩었어. ‘귤 어디서 샀어요? 누가 산 거야.’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나는 기쁜데 너는 안 기쁘지. 네가 문제거든. 네가 문제였었어.’ 그러면 ‘제가 문제면 제가 고칠게요. 어디가 문젭니까?’ ‘너는 네 피 흘려봐야 소용없는 피고, 네가 죽어봐야 소용없는.’
나의 죽음이 매개가 아니에요. 나의 죽음이 나를 살리는 매개가 아닙니다. 나의 죽음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은 곧 같은 말이 나의 평생 살아감이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살다 죽는 거잖아요. 나의 죽음이 나의 최종 인생 마감이 의미가 없다면 안 받아준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나한테 안 받아주는 거예요. 이 안 받아주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어디 있습니까? 나만 기쁜가? 내가 뭘 해도 주께서 안 받아주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 일이에요?
딸이 그림을 그리는데 자기를 정신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그림을 그려요. ‘엄마, 나 그림 잘 그렸지.’ ‘음. 잘 그렸어.’ ‘엄마 보고 이야기해, 보고. 건성으로 하지 말고 보고.’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어떻게 그렸든지 내가 잘 그렸다고 하는 것은 내 기쁘신 뜻이야, 됐냐?’ 네가 어떻게 살아도 나는 기쁘단 말이죠. 그 기쁨이 우리 속에 이미 합류돼 있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피를 보고 기뻐하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는 것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자기 기쁨을 솎아내는데 우리의 행함으로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리 제치고 방해하고 업어 치기해서 기어이 자기가 준 것을 자기가 소급하면서 스스로 기뻐하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과 같이 동반해서 주어지는 게 있습니다.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냥 기뻐 안 해요. 못 기뻐합니다. 왜? 사람이 고집이 있고 자존심 상해서 안 기뻐하니까. 주께서 은혜를 주는데 그 은혜의 출처가 어디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곧 이미 죄 사함이 완료가 돼버렸어요. 완료가 되었다고요.
야아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도 바울도 정말 대단해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 말을 거침없이 해요. 인간을 개 취급도 안 해요. 그냥 예수님 하는 이야기만 계속 쑤시고 들어갑니다. 기뻐하는 뜻도 겨냥하는 것도 예수님의 피, 은혜가 풍성히 오는 것도 예수님의 피. 결국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그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 사함을 종결시켜버렸어요. 끝내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은 일은 뭐냐? 주께서 끝내버린 그 죄가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 그 피를 전하기 위해서 우리로부터 우리의 육신대로 살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육신대로 산다 하니까 ‘우리가 이제부터 죄 지으면 되겠네’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가만있어도 육신은 죄가 나오게 돼 있어요. 여러분들 애쓰지 마세요.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다 죄가 됩니다. 얼마나 모든 것이 자동시스템이 돼서 숨 쉬는 것부터 해서 귤 까먹는 것, 물 마시는 것 전부 다 죄만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 주의 기쁘신 뜻을 위함입니다. 이미 판단은 끝났으니까요.
그러면 이 사실을 창세전의 이야기기 때문에 우리는 창세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못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9절에서는 ‘비밀’이라고 했어요. 골로새서도 마찬가지고 로마서에도 나오는데 이 비밀의 특징은 공개되었다는 점. 이게 공개되지 않으면 비밀이 있는 줄도 몰라요.
비밀이 공개되었기 때문에 비밀을 아는 측과 비밀을 모르는 측이 비밀이 기준이 되어서 갈라서게 돼 있고 서로 간에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한쪽은 창세후의 인간 이야기가 나오고, 한쪽은 창세전의 비밀이란 그리스도가 이야기되기 때문에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대화가 되지 않으면 뭐가 반복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 사건이 반복됩니다.
오늘밤에 주무시면서 이 피 사건이 꿈속에도 반복되기를 바라면서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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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에베소서: 유한과 무한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비밀이란 이야기를 지난 시간 끝부분에 했습니다. 그 비밀 안에서는 창세전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창세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기기 전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이 예정 해놓고 이미 결정해놓고 그 결정을 우리 인간 쪽에선 변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통보한다는 그 사실이에요. 우리 쪽에서 변경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통보해버려요.
통보받은 우리 입장에서 내 쪽에서 수정이 불가해요. 주어진 운명이. 주어진 운명이 내 쪽에서 수정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운명이 사도 바울의 운명이고, 사도 바울의 운명이 성도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에베소서 1장 8절에서 예수님을 비밀로 보거든요. 비밀의 확장, 확대가 사도 바울에게 전달되고 이게 운명이 돼요. 운명이란 것은 결정 났음, 다른 말로 하면 변경 안 됨. 변경이 안 돼요.
통보를 할 때는 ‘네가 너를 손대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다 손봤어. 끝냈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이 운명에 손을 댈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게 우리가 없을 때 완성된 발생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가 없을 때 하나님 자기들끼리 결정한 내용이기 때문에 내 운명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창세전의 비밀에 대해서 중간에 차단돼 있어요. 여러분들이 용어가 어렵더라도 감당하셔야 돼요.
창세전의 내용이 뭐라 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8절에 의하면 비밀이죠. 이걸 뭐로 고치느냐 하면 이걸 제가 고치겠습니다. 이걸 ‘무한’이라고 고치겠어요. 무한이거든요. 무한의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논사항이에요. 그러면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이 무한을 차단시키는데 뭣이 개입돼 있느냐 하면 유한이 차단돼 있어요.
유한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개입돼 있어요. 이 피조물에 누가 개입돼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룟 유다 보고 뭐라 했습니까?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중에 하나는 사탄이다.’ 악마의 요소가 가륫 유다 속에 들어간 겁니다. 악마는 천사기 때문에 피조세계에서 이 인간세계에서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유한이라 할 수 있고 가룟 유다는 ‘유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통일입니다. 통일인데 교회는 뭐냐? ‘통일체’에요. 예수님은 완성된 통일이라면 교회는 통일체가 돼요. 예수님이 무한이라 했어요, 유한이라 했어요? 무한이죠. 교회는 무한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22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란 말은 유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무한이기 때문에 감당이 되고 무한 안에 계속 무한한 사태가 가득가득 계속해서 끝없이 채워질 수 있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을 설명하려면 여기에 무한과 더불어서 유한을 짝으로 가져와야 돼요. 예수님이 창세전에 인간이 없을 때, 창세전에 인간이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할 거예요. 창세전에 인간이 없을 때 하나님만이 계실 그 때 결정 난 사항이 무한입니다. 그 무한이 유한세계에 나타난 게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이걸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라 할 때 에베소서 1장 22절,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 할 때 이것을 기존교회가 설명을 못해요.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왜 해석이 안 되느냐 하면 성경말씀은 도입을 했는데 교회 자체가 자꾸 더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 이 단체가 불교 단체에요. 여러분 방 서랍을 열어보면 불교 책 나오지요. 그런 것 조사 안 해봤습니까? 객실 조사. 불교 책이 나와요. 불교의 단점은 멸망하지 않으려는 데 있어요. 불교는 그거는 간파했어요. 이 세상이 인간에 고통을 준다는 건 간파했어요. 그 고통을 본인들이 감당을 못해요. 왜? 본인은 유한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에게 악마가 사탄이 들어감으로서 가룟 유다가 뭘 차단하느냐 하면 감당할 수 있는 유한이고 싶어서 무한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창세전의 비밀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가룟 유다가 그걸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요,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갑자기 가룟 유다가 저가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너는 사탄이란 말은, 악마가 가룟 유다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논사항에 대해서 감히 피조물인 악마가 여기를 수정하고 변경을 시도하는 그러한 낌새를 사탄이 계속해서 가룟 유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왜 변경해야 되지요? 수정해야 될 이유가 본인 안에 무한한 사태를 본인이 감당 못한다는 뜻이에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자기 속에 불안감과 공포가 자꾸 올라오는데 이 불안감과 아무리 죽이려 해도 안 죽어요, 이게. 아무리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안 죽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장악하고 있으니까 그게 하나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모든 은혜를 동원해서 채우고, 채우고 성경말씀으로 다 채워도 이것이 해소가 되질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무용발표회나 이런 데 가보셨지요. 우리가 춤추는 걸 볼 때 춤 자체가 아니라 춤을 만드는 궤적입니다. 춤이 만들어내는 선을 보는 거예요. 선을 본다는 것은 춤이 지나고 난 뒤에 그 사이, 그 가운데 공백, 빈자리가 남는 거예요. 어제 제가 정신병 약간 언급했지요. 정신병이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온갖 언어와, 언어가 구체화 되면 법이 돼요. 법은 다른 말로 규칙이 됩니다.
내가 언어를 동원해서 규칙을 만들어내요. 그 규칙과 언어를 동원해서 자신이 계속 살아 있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계속 메워야 되는데 이 순환, 메운데 또 메우고, 메운 데를 또 메우는 순환을 하다가 지쳐서 나 그만할래, 하고 멈추는 순간 그 사람은 우울증이 되고 강박증이 되는 거예요. 힘이 빠져서, 자기 자신의 빈자리를 메우는데 기력이 다해버린 거예요. 정신적으로 더는 버티지를 못해요. 그 끝은 자살이지 뭐. ‘이렇게 힘들어 살면 뭐하노?’
그런데 그 자살한 사람이 굶어요? 굶는 게 아니에요. 돈이 없어요?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요. 주위에 일가친척 없습니까? 있습니다. 근데 왜 그래요? 자기 안에 있는 공백이 이거는 일가친척이나 가족이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에 돈으로 해결 못하는 것이 자기 안의 허한 빈자리에요, 허망한 자리에요. 돈을 벌어서 이걸 해결한다고 아무리 돈 벌어봐야 자기 속의 허한 것을 다 메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정신병인데 인간은 잠재적인 정신병 DNA를 아담으로부터 받았어요. 조상으로부터 받았는데 정신병이냐, 아니냐는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그것을 타인을 대할 때 아닌 척할 때 정신병 돼버려요. 마치 멀쩡한 것처럼 행세할 때 저 사람 정신병이구나. 오버한다든지 과도하게 행동한다든지 갑자기 뭔가 잘해준다든지 반대로 심하게 이야기할 때는 많이 허하구나. 흑염소 다려먹어야지. 정신병 그거는 흑염소로 안 되잖아요. 많이 허한 거예요.
애,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일곱 명 낳아도 이게 내가 누군지를 몰라 도대체. ‘내가 이렇게 살아야 돼, 굳이.’ 자기 일에 열중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서 온 몸을 다 바쳤지만 그게 자기 공백을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2선, 3선 계속 나오고 탈당해도 안 돼. 지 정신병을 못 고쳐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9장이 있지요. 나는 환자 찾으러 왔다. 나는 환자를 찾으러 왔지 멀쩡한 인간 찾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온 것은, 의사가 필요한 것은 환자이기 때문에 내가 의사로 온 거란 말이죠.
이 공백은 증상이 굉장히 심해요. 그래서 이게 아토포스atopos라 하는 거예요. 아토피, 이상하게 가려워요. 어떤 게? 아토피란 뜻은 장소가 없는데 가려운 증세만 나타나는 현상, 정신적인 아토피 현상, 그게 정신병입니다. 교회 갔다가 절에 갔다가 다시 교회 갔다가, 탈북 했다가 다시 월북 했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 모든 원인은 딱 하납니다. 멸망하지 않으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의 비밀을 USB에 담았어요. 외장하드에 담았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사람들은 성경에서 종말이 나오니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이해할 때 그냥 기다보자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자. 기다려보자.
그 대표적인 태도가 과학자의 태도에요. 화성 밟고 그다음 목성하고, 어디까지? 천왕성, 명왕성까지. 어디까지? 안드로메다까지. 그것 뭐하는 짓이고? 그냥 가보자는 거예요. 종말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보자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종말은 시간적 요소가 아니에요. 시간의 끝이 종말이 아니고 종말을 곁에서 발생시켜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차 두 대 나란히 가다가 둘이 생각해요. 저 차가 우리 차와 방향이 같으니까 일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스라엘이 가는 방향과 다른 이방민족이 가는 방향이 어느 시점에서 이게 갈라져요. 틀어져버려요. 이걸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이걸 Exodus라 하는 거예요, 출애굽.
창세전의 내용을 담은 USB 외장하드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옴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다음부터 같은 인간, 누가 봐도 똑같은 인간인데 여기서 길이 엇갈리는 다른 쪽으로 갑니다. 갈 때 이스라엘은 어느 쪽으로 가느냐? 멸망하는 쪽으로 가요. 하나님께서 운전대 잡고 그렇게 멸망하는 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이 말은 이스라엘 가는 쪽이 멸망하는 길이라면 이스라엘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창세전의 내용이 들어있어요. 창세전의 내용이 그 비밀이 모든 것이 실체화 될 때 그것을 종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말은 시간의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종말이 담기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인간들입니다. 유한한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한한 인간 속에 무한이 담기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인간들은 같은 인간인데 이스라엘이 자기와 멀어질 때 차가 멀어질 때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멀어질 때 이방인들은 자신이 뭐해야 되는가? 섬뜩해야 돼요. 시간 끝에서 종말이 아니라 벌써 그들은 헤어짐 자체가 그들에게 종말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존재가 나타나고, 그리고 이방민족과 함께 살다, 이스라엘 자체가 나라가 없어요. 이방민족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히브리인들이 결집해서 정치적 결단을 내려서 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되는 걸 누가 반대했어요?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지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지요.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 꽉 죽이소서.’ 그 모세와 아론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헤어지기 싫어요. 인간은 정 붙이면 그 자리를 헤어지기 싫습니다. 종말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올 때 모세, 아론이 자기 민족한테 죽을 뻔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결별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이별’이지요. 헤어지는 겁니다. 한쪽은 유한으로 머물고, 또 한쪽은 유한 속에 무한이 담기는 거예요. 이걸 고급스런 용어로 제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유한 속에 무한이 담기는 그건 뭐냐 하면 ‘대통밥’ 잡곡을 꼭꼭 담아요. 대통밥 많이 먹었습니다. 해운대에서 공부할 때 끝나고 난 뒤 국수 먹을래, 대통밥 먹을래, 세 가지 중에서 골라요.
대나무 통이라는 그 유한에 오묘한 맛이 있는, 오묘한 맛이라고 과장되게 하는 거예요. 하여튼 형용할 수 없는 언어로, 언어가 터치할 수 없는 무한한 그것이 담기는 것, 대통밥. 그걸 두 자로 줄이면 교회.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특징이 뭐냐? 내 인생은 내가 수정이나 변경이 안 되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걸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는 나는 내 인생에서 손 떼고 날개 없이 날아가는 거예요. ‘손 떼고 가실게요’ 이런 것. 손을 떼고 펼치면서 이 지옥을 날아다닐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묻기를 ‘네가 그렇게 해서 네 인생 네가 책임질 수 있겠어’ 라고 걱정스럽게 묻거들랑 하늘의 충만이 충만하게 넘쳐 나온다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유한이 유한을 담으면 골라서 담기 때문에 법적으로 법칙적으로 자기를 선하게 보는 것만 골라서 담기 때문에 늘 지 잘난 체하는 그것이 정신병이 돼버려요. 그걸 정신병, 강박증이라 하는데 남한테 실수하지 않기,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기, 나와 내 집안이 험담당하지 않기 이런 강박증세가 우리 정신을 아주 예민하게 건드립니다.
그걸 와우 수술을 해야 되는데 와우 수술은 달팽이관의 성모조직에 문제 있을 때 수술한다는 거예요. 귀가 잘 들리지 않을 때. 수술한다는 자체가 이 또한 새로운 공백을 확장시킨 셈이 돼요. 빈터를 확보시킵니다. 빈터란 말은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뭔 뜻인지 알아보세요.
‘나에게 사과하지 마세요. 내가 먼저 사과해야 되니까.’ 이게 무슨 뜻일까요? 상대방이 나에게 사과를 안 하면 내 안에는 상대방에서 비난할 수 있는 권한이 아직도 유효해요. 타인에게 비난함으로서 내 공백의 원인과 이유를 타인 탓으로 돌림으로서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나는 너 때문에 내 인생 배렸어.’ 이러한 에너지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가 있어요. ‘다 네 탓이야.’ 이렇게 버틸 수 있는데 상대 쪽에서 사과를 해버려요. 그러면 나는 재조정에 나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니가 뭔데 마지막 버틸 수 있는 나의 정당성을 깨버리느냐 말이죠.
주체가 탈주체가 되면 못 견딥니다. 탈주체가 재주체화 돼야 돼요(주체→탈주체→재주체화). 맨날 이러고 살아요. 네가 나보다 못하고 너는 나한테 나쁜 놈이 내가 숨을 쉰다고. 내가 이 땅에 살 의욕이 생긴다고요. 그런데 네가 내 사정도 모르고 네가 사과해버리면 나는 졸지에 내가 천사 될 수 있는 버전업version-up이 안 되는 거예요. 축구에서 빌드업build up을 해야 된다고 해요. 수비로부터 올라와야 되거든요.
김민재부터 해서 올라와서 공격을 마쳐야 되는데 상대가 내가 하는 계획을 사과하고 죄송하다고 나옴으로서 전부 다 망쳤어. 그동안 내 허함을 메워왔던 내 전략이 노출된 거예요. 국가에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다. 내부적으로 경제가 어렵다. 그럼 연평도를 향하여 곡사포 사백 발 날려야 돼. 바깥의 적을 공격함으로써 내부문제를 희석시키는 그런 식으로 내 공백이 노출되지 않는 것, 이거는 개인도 정신병이지만 국가 자체가 정신병이에요.
불교에서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 골칫거리 자아를 없애는 전략에 나섭니다. 자아를 조사를 해보니까 자아는 기억으로 돼 있고, 인간의 기억은 무엇의 수집이냐 하면 내가 좋아했고 내가 갖고 싶던 욕망의 집합체가 기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기억 자체를 법이죠. 법은 뭐로 된다 했습니까? 문자. 사바사바 염불하는 것 있잖아요. 천주교도 마찬가지고요. 묵주, 구슬 같은 것 만지지요. 법과 문제를 통해서 자아의식을 없애서 무의식으로 감으로서(불교에선 7단계까지 가요) 자아를 없앰으로서 마음의 고통을 얻는 걸 해탈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럼 이 전체의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유한이 무한을 대하는 태도, 자세에요. 유한이 무한에 대한 그 공격을 다 수용할 수 없으면 나라를 그릇을 깨뜨리면 되지 않겠느냐. 심지어 교회도 이 방법을 사용해요. 동안거라 해서 겨울에 혼자서 점 하나 찍어놓고 쳐다보는 그거나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새벽기도 이야기하면 이것 비슷한 것 훈련시키거든요. 참선이란 말은 못하지만 비슷한 용어를 써서 적을 피하자, 피정. 어디서 합니까? 평창이라든지 강원도 가면 천주교 기도원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교회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가정에 뭐 문제 있습니까, 고부간에 갈등이 있습니까?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으로 변합니다. 우선 마음부터 다스려야 됩니다. 해서 하는 게 뭐냐 하면 옴~, 이거는 궁예가 했던 거고. 옴진리교 있잖아요. 일본지하철 테러한. 그냥 망하면 되거든요. 그냥 지옥 가시면 되는 거예요. 그냥 망하면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미 가룟 유다처럼 자기가 유한이기 때문에 유한이 무한을 못 담으면 무한과 대결상태, 투쟁 상태에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복음에 반-복음이 되고, 반대하는 안티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요. 내 인생 개척은 내가 알아서 하고, 내 운명은 내가 손대고, 내가 책임지고.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 의지에 결정한다. 하나님이 그 의지를 주셨다는 거예요. 특히 침례교 쪽에서. 십자가 지시는 것까지는 하고 십자가 믿고, 안 믿고는 이거는 내 결정에 달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할 때 어떤 심판의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이론이 침례교 쪽에 재세례파 쪽의 신앙입니다. 신학자 치고 신자 없지요. 이걸 통 털어서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이런 말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이 중요한 요소가 뭐냐?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복음을 잘 알고 그냥 편지로만 핵심을 이야기한 그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설교할까가 사도행전 17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트릭을 써요. 속임수를 씁니다. 어떤 속임수를 쓰느냐 하면 조각상 있잖아요.
조각상이 그들은 뭐냐 하면 ‘신들’이라고요. 일반관사. 정관사, 일반관사 있거든요. 일반(보통)관사, 영어로 하면 ‘a나 an’ 정관사 이건 ‘the’를 이야기합니다. 공무원 관사 그거 아니에요. 분명히 그리스인들은 이 땅에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에 골라잡아라 이 말이죠. 신은 뭐냐? 유한이 아니라 무한에 속한 거예요. 유한을 달래기 위해서 무한을 찾는 겁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의 차이는 뭐냐? 이 신들을 일반관사를 이걸 정관사로 바꿔버려요. 전부 다 하나의 신이라고 딱 정리해버립니다. 정관사가 되면 뭐냐? 그 모든 잡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신 앞에서 그게 합체가 되고 예속이 되고 편입이 돼버려요. 거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저한테는 유명한데 다른 사람은 안 좋아하는데 여기 24절부터 보게 되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다는 뜻이지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신과 인간의 협력관계에 있는 신은 가짜란 뜻이에요. 통합된 그 신에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잡신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부족한 것처럼” 인간이 뭔가 더 손을 봐야 신이 신다운 그런 신이 아니고 친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 했어요.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물고기를 위해서 물이 필요한 게 아니고 물 자체가 뭔지 알리기 위해서 고기가 필요했다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이 땅에 만들었다 이 말이죠. 악마도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럼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왜? 로마서 1장 21절에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알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은 무엇이 빠진 하나님이냐 하면 복음의 비밀이 빠진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 내부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사실, 하나님 스스로 멸망의 자리에 가는 하나님을 인간들은 상상도 못하지요. 왜? 본인이 멸망하기 싫으니까, 본인이 지옥 가기 싫으니까요.
아파트 화장실을 만드는 건축업자가 본인은 화장실 갑니까, 안 갑니까? 그 화장실은 아니지만 자기 집 화장실에 가지요. 내게 필요하니까 그쪽에도 필요하잖아요. 지옥은 하나님께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옥을 다녀와 버린 거예요. 그 지옥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옥에 갇힌 자에게도 복음을 전파한다고요.
내가 다녀간 코스가 비밀의 노선이기 때문에 그 비밀의 노선은 창세전에 이미 확정된 비밀의 노선에 그것이 바로 어떤 유한도 무한은 유한을 당할 수가 있어요. 그게 무한의 능력입니다. 충만이에요. 주의 뜻의 비밀의 충만, 그 충만 노선에 같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확정된 운명입니다. 그게 예정론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창세전에 무한 안에서 그 무한을 담기 위해서 유한 네가 무한의 작업에 편입하라고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나라는 유한의 구원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있었다, 없었다? 갑자기 누가 강요한 느낌이 드는데. 나를 위한 구원이 애초부터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아들을 구원하되 인간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아들 만들어놓고 구원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각자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구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각자 이름이 아들이 되면 하나의 이름으로 이게 전부 다 모아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생전 4장 12절인가,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강한 부정용어를 사용하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인간은 정신병입니다. 그 정신병의 이유는 자기 안에 죽여도, 죽여도, 죽이지 않고 계속 인간이 어떻게 손댈 수 없는 무한이 담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한의 계획 안에 이미 피조세계는 편입돼 있어요. 하나님의 예정론에 보면 ‘예수 안’은 하나님의 독생자지만 독생자는 주님이 아니에요. 이 땅에 와서 지옥을 다녀가야 그게 주님이 돼요.
심판한다는 것은 지옥에 대해서 심판하는 걸 말하거든요. 지옥을 친히 답습해서 심판할 만한 장소를 만들어놓고 난 뒤에 주가 되시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가는 표준이 성립돼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지옥 가기 싫어해요. 그러나 안 가도 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이 나를(예수님을) 싫어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이 예수를 싫어하도록 주님 쪽에서 일을 벌여요. 어떤 인간도 주님을 사랑한 사람 없게 만들어버려요. 요한일서 4장에 나오지요.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했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인간 사랑과 비껴가면서 비로소 현장에 진짜 사랑이 등장합니다.
같이 사랑해버리면 이거는 샘샘이 돼버리지요. ‘주님도 사랑했지만 나도 주님 사랑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그냥 맞먹자는 거죠. 유한이 무한을 감히 맞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아야 비로소 구원받고, 믿지 않아야 천국 가는 거예요.
인간이 아주 망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개가 되거든요. 자기를 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합니다. ‘나는 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이만한 믿음은 처음 봤다.’ 다른 사람은 신이 못돼서 환장하고 인간 못돼서 지 잘난 척 못해서 환장하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는 개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의 진짜 속성은 내가 나를 감출, 나 앞에 타인이 있잖아요. 타인 보기에 내가 어떠냐를 보이는 것이 이게 내 모습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자기가 허한 데가 있어요. 그것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가 되면 남들이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그런데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은 고맙게도 내가 안 되는 일을 남들이 해줘요. 핍박을 해주니까요. 진짜 개 무시해주니까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왜 이방인을 구원에다가 하나님이 끌어당기는지. 어제 지난 시간에 잠깐만 언급했잖아요. 짧게만. 이방인과 유대인이 이스라엘이 옛날에는 멀어졌지만 가까워졌다 했지요. 뭐로 가까워졌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만남의 장소를 예수님이 정해요. 카페가 아니에요. 하나님께 저주받아야만 생겨나는 거기서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이런 문장을 했어요. 인간에게는 뭐가 없다?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죽음만이 죽음이고 다른 죽음은 죽음이 아니지요. 왜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냐? 이 죽음의 의미 있으려면 예수님에게는 죽을 필요가 없어야 돼요. 예수님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가 죽었을 때에 그 찬스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인간이 죽어봤자 새삼스러운 게 아니에요. 생명인데 죽었다. 그 자리를 사도 바울은 마지막까지 그걸 자랑해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했어요. 그리고 또 자랑하기를 ‘나는 아직도 십자가 안에 있다’ 이것 자랑해요. ‘우리 아버지 경찰이다’ 이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 검사다’ 이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자랑할 게 뭐냐 하면 ‘우리 집안은 몽땅 죽었어’ 이걸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한 것, 여기서 유한은 무한을 만납니다. 십자가에서. 이스라엘의 장점은 망했다는 거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내놓은 자식이란 뜻이고 둘 다 십자가에 만날 때 똑같은 고백은,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하고 십자가에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너만 망했나. 나 예수도 망했다’고 망한 삼인조 밴드가 거기서 십자가 사건을 무한의 그것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은 대장하이소’ 해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된 거예요. 머리라 하는 것은 첫 번째, 나머지는 보조니까. 예수님이 대표자 됐어요.
인간세계에서 추구하는 것이 통일입니다. 여러분 아셔야 돼요. 이 통일을 현재 뭐로 이루고 있느냐? 경제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 통일을 현재는 인터넷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고상한 용어로 ‘집단이성’이라 해요. 쉬운 용어로 하면 ‘여론’ 여론으로 정치하는 이 구조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민주주의라 해요. 민주주의는 여론싸움이고, 이 여론싸움은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가 새로운 정치형태가 되는 겁니다. 이 시대에 와서.
따라서 투표는 선거 때만 하는 게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서 ‘좋아요’가 매일같이 투표하고 있는 거예요. 좋아요, 좋아요. 정우성이 삼성가 이혼녀와 결혼했다. 좋아요. 따라서 정치하려면 이 인터넷을 통계화 시켜서(수학이죠) 정치를 해야 되지요. 수학 통계학으로 정치를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함수가 뭐냐? ‘동일성의 함수’에요. 차원이 편평한 차원이에요. 균등한 차원에서 힘이 세력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가를 보고 정치하는 겁니다. 그걸 역사라 했지요.
교재, 여러분 새롭게 받아봤지요. 여기에 연대표 쭉 나오지요. 이것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힘의 축이 편평한 무대 위해서 어느 쪽으로 힘이 쏠렸느냐? 힘이 쏠리는 대로 왔다 갔다 하는 그 과정이 계시가 떨어진 빈칸을 역사가 채운 거예요. 수많은 사람, B.C.340년부터 기원후 40년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역사의 현장이에요. 소위 강대국 앞에 편승하고 매달리는 것.
이 모습이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돼 있어요. 이게 역사잖아요. 에베소서 5장이나 이런 데서는 간단합니다. 이게 뭐냐? 우리의 싸움은 우리의 씨름은 이 세상 신과 더불어…, 볼까요? 우리가 에베소서 하기 때문에 미리 보는 것도 좋지요. 에베소서 6장 10절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 표현하는 거예요. 역사, 오늘날 민주주의 세계.
잠시 보충해서 이야기하면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무슨 시대냐? 인터넷 시대 이전은 ‘비례소득세’ 시대가 돼요. 비례소득세 시대가 뭐로 바뀌느냐? ‘누진소득세’ 시대로 바뀝니다. 차이점은 뭐냐? 이거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비례로 해서, 재산이 열 개라면 십분의 일을 내거든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도 십분의 일을 내버리면 덩치가 작아요. 작은 것의 십분의 일이니까 남아 있는 것도 별로인데 부자는 하나 내도 남아 있는 것이 많아요. 이 부가 금융투기가 돼버리면 부가 부를 낳는 그 순환에서 안 벗어나요. 뭐 투기하려 해도 돈이 있어야 투기하지요. 반찬값도 없는데 무슨 투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누진소득세가 돼버리면 부에 따라서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상속세가 우리나라에선 30억 되면 60%를 내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선 85% 내요. 그러나 우리나라 평균적으로 누진소득세는 14~15%의 상속세를 내게 돼 있습니다. 3억 밑은 상속세 한 푼도 안 내고요.
제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상식 시간이 아니라 편평하다. 통계학적으로 관리가 되는 시대가 인터넷 시대 이전의 시대였어요. 인터넷은 스스로 알아서 세상에 복종하는 시대가 인터넷 시대에요. 전에는 국가가 세금으로 법으로 지배를 했던 시대지만 이제는 국가권력체가 각자 인간 내부에 장착되는 시대가 인터넷 시대에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정신병이 더 많은 거예요.
2분 넘었네. 내가 관리가 안 되네.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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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4강-에베소서: 무죄와 의
(강의:이근호 목사)
셀프 컨트롤(self control) 요즘 시대에 자기관리에 돌입합니다. 그 단적인 예가 제 때는요 집에서 부모가 결혼하라고 하면 결혼해요.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지요. 왜냐하면 부모가 결혼안했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거는 존재자의 임무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존재가 존재에 대한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 결혼이다.
자기가 결혼 때문에 생겨났잖아요. 근데 지금와서 결혼하라고하면 갑자기 이거는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할테니까 주위에서 결혼 하라마라 하지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숫자가 적으니까 외부에서 강제로 뭔가 개입이 들어가죠. 자, 우리가 계속 공부해놓은 것 복습해봅시다. 역사는 뭐로 구성되어있다고 했어요? 어제 이야기했죠. 역사란 바로 법 플러스 혈통이라고 했죠.
혈통이라는 말은 존재를 이야기해요. 존재가 되기위해서 법을 만드는거에요. 역사는 에베소서 1장에 의해서 역사는 뭐냐하면 유한이 무한을 향하여 힘을 집대성하는 과정이다. 집대성하는 과정이 역사에요. 질이 좋은 것은 무한에 가깝고 선하고, 악한 것은 내침으로써 순결하고 진실된 것을 결집시켜서 계속해서 무한에 나아가면 저기에 뭐가있습니까? 혹시 신이 계시다면 우리의 선한 노력에 대해서 긍정적 반응을 나타내줄 것이다.
힘을 집결하잖아요. 그런데 이 시대가 뭐냐하면 이 역사가 어디 안에 들어오느냐하면 개인 속에 들어와요. 국가의 역사는 난 모르겠고 민주주의 역사 난 모르겠고 나는 내 역사만 챙기면 된다. 그래서 국가 입장에서는 어떻게하느냐, 애를 안낳으니까 애 놓겠다고 인천에서는 애 놓으면 18세까지 1억을 준대요. 이게 뭐에요? 법이죠. 그러나 그 이야기듣고 개인적 역사에서는 자기의 유한성이 무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자체적인 자기이기 때문에 “돈준다고 사랑됩니까?” 이렇게 반박이 돼요. 1억이 사랑을 대체할 수 있습니까? 1억주면 누구나 사랑해요?
여러분 대부분이 아니라고 할거에요. 그러면 이제 동일성의 함수에 의해서, 수평적 합류에서 드디어 같은 함수, 수학적 함수를 높입니다. 10억. 자 10억 갑니다. 에이 10억.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데 10억? 아냐. 100억 갑니다. 그때부터 손들기 시작하는거에요. 자 자, 100억갑니다. 100억 받고 또 사랑하면 되지 하고 100억 받습니다.
바깥에도 편평화. 수평적인 것 동일성의 함수. 그걸 강도. 그냥 강도에요. 질적인 것이 아니고 얼마나 강하냐에 문제가 그동안 국가 위주로 했다면 이 국가위주가 지금은 개인위주로 들어가는겁니다. “야야, 수련회 참석할래?” “아니요.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참석 안하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자, 공통점이 뭡니까? 이런 관리의 공통점. 허점은 뭡니까? 허점은 스스로 지옥에 안갈려고 하는거에요. 지옥 이야기는 그거는 무한에 관한 문제고 나는 내 안에 따로 내가 원하는 무한을 내가 만들어 내면 되잖아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요. 내 안에 원하는. 안에 있는 무한을, 체제나 안에 있는 무한을 진무한이라 하고, 바깥에 있는 무한을 가무한이라고 이렇게 수학에서 나눠요.
가도가도 끝이없는거. 끝이 없는거는 가무한이고, 진짜 무한은 내부적으로 점점더 세분화 되는 이 무한을, 박스안에 있는데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면 거기서 계속 무한히 쪼갤 수 있다는 진무한. 가우스란 수학자는 이걸 둘로 나눴어요. 이 수학이야기, 처음에는 수학 이야기인줄 알았죠. 우리 내부 정신 이야기인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 내부 정신이 벌써 내부 무한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하면 유한이 유한으로 멈추는게 아니고 유한이 진짜 무한을 담은 박스로서의 유한이 하나의 뭐로 되느냐하면 유한체이면서도 동일하게 이게 무한체가 되는거에요. 다시말해서 하나가 되는거에요. 하나를 지향하는거에요. 하나를 추구하는거에요. 이게 뭐냐?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뭐가되리라? 니가 하나의 단독 신이 된다는거에요. 단독 신이되는거에요.
이걸 이미 무한의 세계, 하늘 나라에서는 아시고 예수그리스도를 통일체로 만들어요. 통일자로 만드는거에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미 이쪽에서 선점해서 확정시켜버렸어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었다는거에요. 이게 어느정도까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느냐하면, 이거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보면서 우리가 놀래야 될 것은 사도바울이 말하는게 거침이 없다는 거에요.
눈치도 안봐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게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사람안에 마귀 들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에요. 사람도 좋고 그리스도도 좋다는 내용이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된다는 겁니다. 왜냐? 사람 속에 있는 내부성 때문에 좋은게 좋다 이런게 성립이 안돼요.
인간속에있는 것은 필히 그리스도를 공격하게되있는 요소가 있다는거에요, 인간속에.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결단코 나와 합류가 안된다는겁니다. 차라리 자기속에 아무것도 없는, 자아가 없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아무도 천국에 못간다는 거에요. 니고데모가 고민에 빠졌죠. 내가 어른인데, 어떻게해서 어른에서 다시 어린애로 돌아올 수있느냐.
주의 뜻은 “땅에서는 니 포기해라. 땅에서는 이왕 태어난 것 어쩔수 없이 포기하고 위에서 한번 더 나면 된다.”는 거에요. “그럼 땅에는 뭡니까?” “껍데기고, 위에는 창세전의 생각한 너고. 땅에서는 니 혈통, 역사속에서 니가 확인될 수 있는 가짜 너고. 가짜 너를 진짜 너가 대신해주면 되잖아.” “누가요?” “내가 아담이잖아.” “전에있는 아담은?” “그건 가짜지 썩어져야될 아담. 나는 마지막 아담.” 그래서 예수님 이 땅에 그 바쁘신 와중에 이 땅에 오신거죠.
골로새서 1장 한번 봅시다. 1장에 보면, 얼마나 사도바울이 극단을 달립니다. 과감하게 이야기 해버리죠. 16절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라고 되어있잖아요. 이 대목에서 기독교에선 창조과학회는 다 무너져요. 창조과학회. 창조 과학회는 과학이 아닙니다. 그걸 제 뜻을 정확하게 말해서 창조 과학회가 과학이라는 이단의 사조를 굳이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창조 과학회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고, 모든 국민들이 진화론이 맞는줄 알고 그렇게 가르치니까 국가 행정상 편성에 창조론도 가르쳐서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기회조차 박탈되는 것은 민주주의 법칙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재판을 걸었죠. 재판을 걸었는데 판사가 하는 말이 “창조 과학회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과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학 과목에 넣으면 안되고 종교과목으로 넣으면 됩니다.” 이렇게 하니까 창조과학회가 그거는 싫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종교라는 선입감이 있어가지고 과학은 필히 들어야 돼요. 하지만 종교는 굳이 안해도 된다는 생각이 돼가지고 자기가 창조과학회를 밀어붙이는 정치적효과가 떨어질가 싶어서 시큰둥 했거든요. 그거는 이 창조과학회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같이 창조 과학을 하게 되면 창조과학이라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진화론 괴물이나 이쪽 괴물이나 둘다 똑같은 괴물이에요. 아무리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고고학적으로 분석하고 예수님이 화장실에 가는 것 비디오 찍어도 인간은 그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속에 있는 무한의 공백을 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분이 창조한 거에요. 창세기 1장 1절을 신약의 십자가로서 재해석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건 유대교도 알고 있고 심지어 이 세상의 유신교 종교, 철학자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습니까? 천국의 본 자식에서 쫓겨 나는거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메시아 기다린다. 라는 그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지옥가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어쩔거에요. 이젠 우리 차례인데 어떻게 처신해야 됩니까?
우리가 쫓아버린 모든 인간이 싫어버린 바된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창조되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것들과 그다음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들과 연합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관찰의 대상이에요. 그래야 미분 적분이 거기에 미분 방정식이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함수에 변수를 집어넣었을 때 동일한 결과가 반복해서 나와줘야 이게 수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그 작업을 해야 돼요. 과학도 마찬가지고 똑같은 결과가 똑같이 예측되어야 됩니다. 보이는 것들 범위 내에서만 모든 지혜를 모으는거죠. 그러면 뭐가 누락 되죠? 보이지 않는것들이 누락되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허겁지겁 수습해서 그걸 돈벌이 삼는 단체가 뭐냐? 종교단체입니다. 과학은 가라 우리는 신비까지 포섭했다. 뭐 이런 단체들이 종교에요.
문제는 그러한 종교적인 노력을 왜 하느냐는 거에요. 종교적인 노력을, 그 당시에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이미 아데나 신전에 고린도나 에베소서에서 많은 신전들이 있었잖아요. 그들이 신을 섬기는 이유가 뭡니까? 영화 찍을 때 고사 지내는 이유가 뭐에요. 옛날에 방앗간 만들 때 마다 고사지냈거든요. 돼지머리에다가 뭐 오만원 짜리 꼽고, 지금은 오만원 짜리 꼽고 해야지 뭐 천원 짜리 꼽다가 욕 얻어 먹죠.
왜 그런 것을 하느냐? 왜 신을 섬기는가? 정답은 공동체에서 추방 되지 않기 위해서. 아까 인터넷 시대로 다시 돌아왔어요. 왜 눈치보면서 집사님이 절해야 되는 이유가 그 공동체에서 추방이되면 살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공동체의 결집은 각자 갖고 있는 이익에 의해서 정보에 의해서 모아지게 되어있어요. 이 공동체 안에 뭐가있느냐 하면 내가 얻고 싶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얼마나 센지 복음 듣는 것도 눈치봐야돼요.
직장에서 이것 하면서 귀에 꼽고, “뭐듣는데?” “뭐듣기는. 노래들었지.” 나를 존재케 하는 이 힘. 돈이 나오는 이 공동체. 눈치 안볼 수가 없죠.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하느냐 하면 이걸 자아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걸 나라고 하지 않아요. 이걸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뭐냐? 자아는 나지만 주체는 남이 필요로하는 존재를 주체라고 해요. 내가 필요한게 아니고 남이 필요로하는 존재가 돼요.
그러니까 주체와 자아 사이에는 일치됐습니까? 틈이 벌어졌습니까? 틈이 벌어져있죠? 틈이 벌어져있기 때문에 퇴근하고 나서 뭘 마시냐? 컨디션. 박카스. 오메가3, 플러스 오메가6. 이거는 직장생활에, 월요병이라는게 있잖아요. 죽기까지 싫은거에요. 그 틈을, 틈이 벌어지니까 벌어진 틈이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되고 그러니까 점점 더 내가 여유만 있으면 자꾸 취미 생활하는거에요.
“사진한번 찍어봅시다.” 사진찍기라든지 동영상 음악 싣기. 자꾸 취미를 해가지고 자기 허한 것을 메꾸는거에요. 또는 난을 친다든지, 입상한사람 있어요. 우수상 받고 한 사람 있어요.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요, 취미라 하는 것은 내가 내 돈벌이에 몰두하기 때문에 놓치고 싶었던 진짜 내가 하고싶은거, 이것 하지 못했는거, 그래서 균형을 맞추는거에요. 이게 편평성의 원리, 동일성의 함수.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생기기 마련인데 그 마이너스를 자꾸 메꿈으로써 편평한거에요.
돈 버는데 미쳤다. 그럼 어떤 취미가 괜찮아요? 최고의 취미는 보험 5개를 넣는거에요. 보험 5개를 넣으면 돈 벌면서도 보람이 있어요. 저한테 보람이 있는거에요. 이게 뭐라고 하냐면 셀프관리. 자기관리. 자기통치사회에 도래한거에요. 어릴때부터 힘모으는 작업. 부모힘 아빠힘. 힘을 땡길때까지 전력을 다해서 내 것을 만드는 전략에 나서게되죠.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이거 다키웠다. 이러거든요. 부모로서는 좋지요. 이제 더 이상 신경안써도 되니까. 지가 알아서 하니까. 이제 부모는 자기 인생 즐길 준비만 하면 되는거에요. 아 유 레디?(Are you ready?) 즐길려 했는데 뭐가 또 뒤에 잡아 당기는게 있어요. 뭐냐하면 요양병원에 가신 부모님. 시부모. 아직 안돌아가시고 있는 친정 아버지 엄마.
하 50되어서 이제 좀 살만하다 하니까 이게 또 잡아당기네요. 그러면 자기관리하는 입장에서 좋은점이 뭐냐?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시고 시아버지 시엄마 다 돌아가시고, 자식들 결혼 다 시키고 거기다가 이제 같이 이혼까지 해버리고. 진짜 악마가 요구한대로 다 되는거에요. 나는 절대적인 신이 된거에요. 결국 그거는 인간은 결국 보이는 자기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키우려는 하나의 통일, 또는 통일체. 하나라는 거에요. 하나가되죠. 이 하나속에 자기의 역사가 담깁니다.
역사는 분해하면 시공간이 여기 다 담겨있어요. 시공간속에서 내가 분투 노력한것의 열매. 그게 자기만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기만의 시공간이 뭐로 응축된다 했습니까? 인자의 날. 인자의 날은 몇일? 그날. 하루만에 모든 것이 시공간이 다 해체되버려요. 끝나버려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만에 다 끝나버려요.
여럿을 하루로 못 묶어내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괴물있잖아요. 아무리 눌러도 눌려지지 않는 괴물이 자기 안에 피워오르는것에 대해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다그래요. 인간이 주님을 추방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렇게 예수님이 소모대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잘생긴 예수를 원하지 못생긴 예수를 원하지 않아요. 이거는 일단 예수님이 내가 판단하고 고르기 위해서는 나와 연속성, 같은 공통점을 유지한 조건 하에 우리는 그 신을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근데 우리 인간은 이처럼 자기 관리하기 때문에 뭐냐? 철저하게 계산적입니다. 계산적이기 때문에 계산적이 아닌 신은 인간들에게는 배제대상이에요. 주면 좋다고 복 주고, 안주면 삐지고 그런 신을 원해요. “잡수세요.”하고 주면, “오냐, 니가 십일조를 다줬구나. 복줄게.” 우리가 이게 편해요. 막 은혜받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도 진짜 나쁜말이다. 은혜를 왜 받아요. 본인이 없는데 은혜를 왜 받아요. 은혜를 받을려면 본인이 멀쩡해야 본인이 은혜를 받아요.
갖고와. 지가 고참도 아니고요. 병장이 원래 지금은 안그렇지만 옛날, 고참이 제대한다고 지도 갖다바쳤으니까 신입들한테 은근히 바라는게 있잖아요. 그 말은 신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서 그렇거든요. 인간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사랑 안하면 인간은 헛살은 거에요. 자기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린 아이에요.
수집할 수 있는 자기만의 자아가 형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수집 장소가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어린아이입니다. 굳이 내 것으로 굳힐 이유가 없는거에요. 사는 목적이 얻어 먹는대로 사는것이지 얻어와서 내 것 만드는 목적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것 만들면 나는 하나가 되거든요. 점점더 하나로 경직화돼요. 그런데 이런 인간들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들은 천국을 갔느냐?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스 피싱을 하기 때문에.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은 먼저 말을 걸어온다는 것이에요.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전화와요. 주님께서 몰래 오셔가지고 몰래 전합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아예 개입할 필요가 없는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무슨 날이냐하면 그게 시간 넘어있는 시간, 인자의 날입니다.
인자의 날의 가장 쉬운 예가 뭐냐하면 커튼이라는 시공간 뒤에 숨어있다가 커튼을 열고오는게 아니라 커튼을 찢어버리고 파괴시키며 나타나는거에요. 시공간을 파괴시키고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휘장 찢어졌죠. 휘장 설계도 어디서 제작된거에요? 휘장 제작은 땅에서되고 설계도가 어디서 마련되었습니까? 시내산에서 마련되었거든요. 위에서 모세가 그걸 그대로 제작했고.
휘장이 있고 제사법이 있고 성막이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유한이 무한과 같이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 최초로 보여준 사례가 되는겁니다. “임마누엘이 되는구나 이게.”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인간은 감당 못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조건, 요건을 갖추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구나. 감당하는 요건을 다른게 아니에요. 죄를 사해줘버리면, 여러분들 이걸 또 아셔야 돼요. 죄를 사하면 두가지 경우가 생겨요.
죄를 사하면 첫 번째는 뭐냐? 무죄 상태가 되고, 두 번째는 의인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어느쪽이 났습니까? 무죄될래요 의인 될래요?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의인이 될래요?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를 없애주기 때문에 무죄가 될래요? 어느 쪽이 되렵니까? 무죄가 되면 골치아파요. 바들바들 떨고 살아야돼요.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물을 마실 때 여기에 바이러스란 생명이 몇 개 들었는가? 2억 5천 450개. 나 산다고 생명을 죽이면 안되지.
근데 이러한 발상 자체가 아담의 선악체계, 무죄상태에서 결합된 선악체계 때문에 계속 유전병이 내려와서 그런거에요. 헌팅턴 병. 점점 더 사체가 굳어지는 병. 무죄상태는 아담이 되는거에요. 주님 쪽에선 무죄가 아니고 의인이 되는거에요. 죄가 많을수록 뭐가 된다? 의가 많아지는 그 시스템에 우리를 집어넣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것은 독자적으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이 함께있다는 조건 하에 우리가 의인되는거에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서 의인 되는거에요. 이 이야기를 듣고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이 이성적인 반발을 해댑니다. “그래, 당신이 그 논조라면, 우리가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야 되겠네?”라고 해요. 로마서 3장과 6장에 그게나와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반박 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수가 없다는 거에요. 참 사도바울의 논리가요 놀랍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어요. 죄를 짓는 것은 율법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해야 그 순간에 죄를 짓게 되는거에요. 말씀의 작용이 이미 죄인된 인간을 갖고 놀 때 거기서 죄가 발생되는거에요. 이게 사도바울의 반박입니다. 그리고 그 반박에 체험자로서 사도바울 본인을 내세웁니다. “나도 한 의 하는데, 내 속에 괴물 들었다. 나는 뭐 바르게 살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내 속의 악이 나를 사로잡아 온다. 그래서 나는 뭐냐? I am a 곤고한 사람. 난처한 사람.”
나라는 질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바로 나다. 그런데 이 나를 누가 유도했는가? 율법이 유도했잖아요. 그럼 율법이 악한가 선한가. 선해요. 선한 분이 율법 가지고 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선한 분이 나의 일이 아니었고 주님의 일로 전가된다면, 내 대신 주님이 대신 산다면, 주님 안에서 이 죄가 어떤 식으로 완성을 보는가를 살펴보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어서 의가 발생되는거에요. 의가 발생되기 위해서 나를 사용한거에요. 이게 사도바울의 논조입니다.
그래서 죄에 죽은 자가 어떻게 죄를 더 짓겠느냐 했어요. 이거는 백날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습니다. “가만히 있어보자, 죄에 죽은자가. 죄에 죽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죄가 너를 죽였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 “너보다 죄가 더 세다는 뜻이야.” “그러면 나는 착하고 싶은데.” “그게 죄야.”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그게 바로 죄야.” “나 복음을 믿고싶은데.” “그게바로 죄야.” It is a 죄.
그게 바로 죄야. 그 죄가 없으면 로마서 14장 17절이 성립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 어디서 나옵니까? 뭐 잡아 당겨서 빙그레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아니에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절망을 느낄때 그 경우에 나오는게 의와 평강과 희락이에요.
나의 의를 의지하고 싶을 때 나에게 어떤 기대와 목표 달성을 노릴 때 그게 여지 없이 허물어졌을 때 나오는 것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내가 참, 내가생각해도 참, 내가 내보고 이야기 하지만 나 참 피곤하게 산다 정말.” 내가 내보고, “나 너 때문에 못살겠다.” 진짜 나가 가짜 나를 보고 늘 핍박을 받아요, 우리 내부에서.
예수님이 함께 동거하는 조건하에 이 고백이 가능한거에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는 것이 그때 뿐이 아니고 그이후에 계속 되풀이되고 반복되어야 됩니다. 십자가 때문에 그래요. 성령은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그게 되풀이되고 반복되는거에요.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하나다 아니다? 나는 하나가 아니고 누가 하나다?
하나인 예수그리스도의 통일이 하나고 나는 그 통일체 속에 부분으로서 지체로서 이 땅에 있는거에요. 그러면 진짜 보이지 않는분은 예수님이고 보이지 않는분의 연장선에서 보이는 존재는 누구다? 자기죠. 본인, 성도 본인이죠. 그래서 이게 종속관계가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를, 내가 의지로 그걸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사후적이에요. 일이 벌어지고 난뒤에 되돌아보면 주께서 내린 조치였음을 지나고 난 뒤에 계속 고백을 하는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제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인터넷 시대에 내속에 뭐가있다고 했습니까? 내속에 역사가 있죠? 인생이 있잖아요. 인생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최후의 인자의 날이 이것을 끊어주는거에요. 수시로. 엿가락처럼 토막을 내는겁니다. 토막을 내주면 내가 내 역사를 할 때 또는 결핍을 느끼고 내가어떤 의지, 기대, 초조감, 혹시 이 계획이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이런게 있는데 이게 끊어질때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오죠.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여기 보태졌습니다. 그럼 의와 평강과 희락. “나는 참 성도지. 정신차려. 성도면서 왜 잊어버렸지? 성도로서 나는 어떻게 살면 되지?”라고 성도로서의 새로운 계획이 또 시작이 되는겁니다. 시작이 되면 또 끊어줘요. 그럴때마다 의와 평강이 지난번 의와 평강과 다른 수준의 새로운 의와 평강이 새록새록 나오게 되죠. 이게 바로 성도의 인생구조입니다.
인자의 날, 최후의 날, 마지막 날이 계속 우리를 끊어줌으로써 나의 역사가 토막난 역사로 만들어지는거에요. 이것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광야에서 이것을 보여주는겁니다. 하루 하루치를 끊어줬어요. 그리고 주님도 주기도문 속에서 이걸 담았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일용할’ 하루치만 양식을 주시옵시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금융재산이 한 10억정도 있다. 요새는 금융재산이 재산이지 부동산 재산은 재산도 아니고.. 반값이에요. 한 10억있다. 10억있는 사람이 주기도문대로 기도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에게 뭐를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준거죠. 물론 그사람한테는 일용할 양식이 10억이에요. 어쨌든간에 그사람은 이거는 몇일 간다가 아니라 이것, 하루되면 뿅 다 가버려요. 10억을 하루치에 날라가는 방법은 그걸가지고 두자로 급사라고 해요. 이상하게 자다가 죽어버려요. 자다가. “숨이 안 쉬어지네?”
인자의 날이 계속 들어올 때, 이것이 삽입되는 것이 바로 보이스 피싱이에요. 주님께서 몰래 먼저 말씀을 걸어와요.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말씀을 걸어오기 위해서 우리는 뭘하느냐하면 말씀을 봐요. 안걸어줍니다. 그거는 내가하는 국어시간이지 성경책봤다고 은혜되고 이런거 없어요. 근데 사람은 성경보고 주께서 말을 안걸어주니까 지가 조작을 해요. 은혜스러움을.
“주여, 나는 너무 은혜스럽습니다.” 주께선, “놀고있네, 혼자서 진짜 놀고 있다.” 그거 은혜안됩니다. 성경봐도 은혜안돼요. 안되지만 뭐 허하니까 그짓밖에 할게 없어요. 오늘또 석장 읽었다. 주일날 다섯장 읽엇다. 일년에 한권 떼었다. 그것도 쓰기 한다. 쓰기 하면 늘어나는 것은 뭐냐? 글쓰는 솜씨가 늘어나요. 다른 것 늘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러한 일이 뭐냐? 자기 발전입니다. 자기 역사를 질적으로 더 발전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거에요.
그러면 성경읽기, 기도같은 것 안하면 어떠냐? 안하는 것은 뭐냐하면 게으른 방법으로 은혜를 노리는 거에요. 얍삽한거에요 그것도. 몸은 편하면서도 은혜 받는 것은 더 나빠. 성경 보는사람보다 더나빠. 완전히 요령꾼이에요 요령꾼. 헌금도 안했다, 기도도 안했다, 봉사도 안했다. “주여, 뭐 은혜 줄 것 있으면 은혜 줄거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내가 머리가 되는 단독자로 되는 이 육신의 습성이 죽을때까지 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거 에베소서 1장을 다시한번 봅시다.
1장에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무한이 유한속에 충만히 담겼다는 이 말을 우리가 언제 이해되느냐 하면 내가 시도하는 것, 요령부리는 방법으로 시도하든 열심히 성경보며 시도하든 일단 은혜를 받게되면 그걸 다 끝나고 난뒤에 보게되면 하나님의 무한의 작용은 내가 어떤 게으르든 부지런하든 상관 없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거에요. 창세전에 이미 확정된 사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확정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성경 해석은 실패를 딛고 보는 해석. 나의 절망을 나의 무능력에 절감하는 요소를 끄집어내면서 보게하는거에요. 나로 하여금 죄인이다라는 사실. 주님을 지독하게 싫어했다는 사실 까지 들추어내면서 보게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게 살아있는 말씀이에요. 우리의 골수를 쪼개는거에요. 우리를 완전히 분해시키는겁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면서 니 뼈다구 하나 전부다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 상상된 너 자신을 위해서 너의 뼈가 있는게 아니에요. 너의 힘줄이 있는게 아니에요. 다 소유권이 넘어갔어요. 주님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플때는 꼭 보약을 드시고 가까운 한의원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침도 맞고 수련회 와서도 침 맞고 그래서 꼭 찾아가서 여러분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이 마음대로 “좀 하면 났겠지 내가 뭐 이 나이 됐지만 젊은사람이다.”
젊은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죽는 순간인 것 뿐이지 젊은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내것 아니니까 관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 왜 보약을 먹는지 묻거들랑은 답변은 빨리 죽기위해서 병원에 갔다고 이야기 해주세요. 급사를 해도 폼나게 급사해야 시신이 윤기가 나는겁니다. 잘 먹고 난 뒤에 급사를 대기하면 됩니다. 자, 봅시다.
에베소서 1장에 그 빠진부분이 있습니다.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이런 해석할 때 이제는 여러분들이 수월해야돼요. 무한. 무한은 뭐라고요? 유한이 없을 때, 다시 말해 창세전에 하나님만이 아시는 정보, 비밀. 그 비밀이 계시의 정신, 정신은 영이죠, 영으로 되어있어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내 소망 탈락입니다. 그분의 소망이에요.
그분이 하시는 계획이 뭐며 그분이 일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 노선에 합류되게 하는 사후적으로 합류되었음을 발견하는 것, 그게 마음눈을 밝히는 거에요. 그다음에 19절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자,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기서 이 이야기는 구약을 아신다면 간단합니다. 비교해보면 돼요. 딱 물어보면 돼요.
창조의 능력이 세냐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세냐 이걸 비교하면 됩니다. 천지를 만든 그 능력이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되잖아요. 그 창조의 능력이 셉니까? 구원의 능력이 셉니까? 어느쪽의 능력이 셉니까? 물론 정답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과정에서 보면 구원의 능력이 최종이에요. 창조의 능력은 성신의 능력이에요. 벌써 골치아프죠. 이거는 시편 104편에 나오는 이야기. 성신으로 창조를 해놓고 창조 관리를 성신에게 맡겼습니다.
근데 구원의 능력은 이거는 능력이 아니고 아들이 죽어야 돼요.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이 들어왔을때만 구원이 되는거에요. 이스라엘 구원하는 것은 양만 있으면 돼요. 어린양.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은요. 양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가는 예수님이 필요한 거에요. 아까 시편 104편에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관리하고 창조한다는 것은 시편 104편 끝부분에 28절부터 쭉 나와 있습니다. 그건 참고로 하시고.
창조의 능력은 없는데서 만들었잖아요. 근데 구원의 능력은 이미 창조된 것들이 있어요. 그 창조된 것들이 마귀의 힘에 의해서 창조자에게 대드는 상황에서 그들을 건져낸다는 것, 이것은 인간에게 하소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눈물 흘리면서, 김대중 기념식에 가서 이낙연이가 흘리면서 “이제는 전라도가 나를 믿어야 됩니다.” 갑자기 정치적 발언 나와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하고 상대해서 뭔가 성과를 얻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해서 아들이 이 잔을 내게서 할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해달라, 주님께서 안돼. 두 번 부탁해도 안돼. 세 번째는 “그렇다면 제가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하고 그렇게 얻은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까마득하게 몰랐죠. 나중에 구원 받고 난 뒤에 알게 된거에요.
아, 나는 그냥 아담처럼 잠자고 있는데 여자하나 태어나듯이 나는 그냥 어두운 세상에서 까불고 놀고 있는데 주께서 “너 합격” 이라는 통지서를 보냈을 때, 까분 것 밖에 몰랐는데 갑자기 의와 평강과 희락이 확 올라오죠. 그거 몇일분 양식? 하루치 양식. 또 내일되면 인자의 날이 언제든지 도적같이 오니까 또 인자의 날이 우리의 시간을 쪼개게 되는겁니다.
성령께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 성령께서 하는 것은 그 뒤에 또 다른방식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성도가 성령이 와서 알게 된 것은 무한, 그걸 통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거에요. 세상의 하나님 깊은것 까지 다 아는거에요.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깊은것까지 알게된거에요. 이거는 뭐냐? 내가 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미 알게 해놓고 그다음에 니가 성령 때문에 알게 했다라고 우리에게 통보해주는거에요.
두 번째 시간의 제목을 제가 통보라고 지었습니다. 통보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왜 하나님이 일을 벌려놓고 우리에게 왜 통보하는가. 그게 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에베소서 2장 봅시다. 2장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을 때 자,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의 많은 질문중에 하나가, “이미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를 알아서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됩니까?”라는 질문. 이 질문을 끄집어 낸 것도 내가 수백번 수천번이 되고요. 그때마다 답변한 것도 수천번인데 이상하게 이게 인자의 날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그 질문이 새로운 버전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겁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했잖아요. 허물로 죽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그다음에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내가 어떻게 한다가 아니라 내가 무엇무엇 한다가 아니라, 주께서 죄와 허물의 내용을 위해서 우리를 사용케 하시는거에요. 사용하는거에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삽니까?”가 아니라 “주께서 어디에 우리를 집어넣고 그걸 드러내게 합니까?”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를 계속 30, 40, 50. 어린 사람도 있기 때문에 열 살 열다섯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까지, 가면 갈수록 죄와 허물이 뭔가를 더 드러내게 하는거에요. 근데 뭐 초등학생이 아직 성령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그냥 지 공부하고 노는 책보기만 좋아하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하면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때 그 시절이 그때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이게 주님에게 꼭 필요한 일을 내 육신을가지고 사용했다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알게 만들어요.
“아 그렇구나” 죄와 허물이 뭔지. 그러면 죄와 허물이 뭐냐? 초등학교 들어가는 것? 초등학교 들어가는 것이 죄와 허물이냐? 그것은 반칙이죠. 초등학교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 잊어버렸어요 하거든요. 하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도표 하나 나옵니다.(유튜브 영상 50:12부터) 도표 쭉 나오는데 사실은 여기 점선은 갈수록 희미하게 해야돼요.
여기 a라는 현실이있고 여기는 b라고 하고 여기는 c라고 합시다. 현실에 등장하는 것, 어떤분은 저한테 감성이 풍부하다고 하는데, 하드 투 세이 쏘리(hard to say sorry.) 그것 때문에 그렇기 보다는 하여튼 감성이 풍부하다고 하는데 이 감성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이 밑에서 나와요. 우리는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는데 과거가 지층처럼, 지하수처럼 있다가 여기서 틈을 노리고 현실에 있는 틈을 노리고 올라옵니다. 이 틈이 무슨틈이냐하면 꿈꿀 때 꿈이에요. 꿈을 통해서 이 밑에 잃어버렸던 과거가 자기 마음대로 조립을 해요.
꿈이. 조립을하는데 조림하는 그 요령이 뭐냐? 현실에 주어진 아픔이나 고통을 커버하기 위해서나의 과거에 있던 기술을, 정신적 기술이 동원되어서 지금의 공포는 없다. 지금의 아픔은 없는거야. 잊어도 돼 라는 자체적인 커버, 유기적으로 보여주는 방어기제. 방어 본능으로 꿈을 꾸게 되어있다는거에요. 꿈을 꾸게 되면 시원해요. 시원하다고요. 자체적인 방패만들기에요. 과거가.
이게 이제 마이너스 a라고 합시다. 그러면 그짓을 언제부터 했는가? -a, 10년 전부터 해 왔는데 그전에 ?b부터 이미 해 왔던 것이 변함도 없어. 하여튼 끈질겨. 자꾸 인간은 독해. 끈질겨서 이것을 반복하는거에요. 이게 뭐냐? 감성이에요. 감성은 인간의 이성보다 더 셉니다. 세요. 여성들이 굉장히 감성적이에요. 그래서 국가대표 트로트 뽑는데서 떨어졌다고 김다현이는 울고 불고, 현역가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떨어졌는데 또 떨어졌다고 울고.
어린아이니까 감성이 풍부하니까, 여러분은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TV 나오는 이야기이니까. 울고 웃고, 그것은 그만큼 과거부터 그게 보호를 받는, 보호본능을 갖고 있는 여성적 보호요소가 현재의 감성으로 튀어나온 겁니다. 상당히 보이쉬 해서 남자라고 설쳐대도 따지고보면 힝 하고 울고있다니까요. 어쩔 수 없는 여성이에요.
그러면 남성은 좋겠다, 감성적이 아니라서. 천만에. 남성은요. 이게 사회적으로 아버지를 닮아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내가 쓰러지면 이 가정이 쓰러진다는 그 역사 안에서의 공동체 의식으로 단련받은게 있어가지고 못내 감추고 누르고있어요. 누르는데 한번 울었다보게되면 남자가, 노래가 있어요 조항조의 노래.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버린 그 세월이 너무 길어. 길어요.
니 딱하면 모르겠나 내마음이 어떤지. 뭐 알 수가 있어야지. 알아주기를 원하는데, 섭섭해. 식사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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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5강-에베소서: 틈
(강의:이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입니다. 이번강의 미리말씀드리지만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떤점에서 어렵냐하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대목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5절을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 앉혔다는 것,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내용과 관련 있습니다.
그래서 2장 1절을 설명하면서 어디까지 꽉 통해야 하느냐면 거침없이 연결되어야 되느냐. 막힘없이 통해야되는게 2장 6절에 하늘에 앉히시니까지 한꺼번에 확 달려가야돼요. 그렇게 한꺼번에 가는 것.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하는 대목에 왔을 때 “주여 반성하겠습니다. 회개하겠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백날 회개하고 반성해봐야 그거는 하늘에 앉힌상태가 아니에요. 노력하는 상태죠. “열심히 하면 주께서 뭐 좋은자리 주시겠지.” 그거는 아직까지 미래에요. 현재 앉혔다는 말은 완료입니다. 끝난거에요.
그래서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렵다는게 다른게 어려운게 아니고 너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이 구절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경쟁해요. 경쟁이 발생됩니다. 경쟁이 발생되어야 영적싸움이라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환경이 조성돼요. 이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하면 싸움하는 판에다가 집어넣는겁니다. 그러면 첫 번째는 뭐냐하면 인간이 끄집어 내는 죄와 허물, 나 또는 너의 죄와 허물.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시는 죄와 허물 이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주께선 “아닌데?” “저는 이것을 허물로 인정합니다.” “그거 아니야. 또 끄집어내봐. 그것도 아니야.” 죄와 허물을 끄집어 내면서 이 둘 사이에 뭐를 발견하느냐 하면 틈이생깁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 틈에서 뭐가나오느냐 하면 “하늘에 앉히시니”가 나와요. 예를들면 이렇습니다. “3시 59분에 저한테 59분된다고 이야기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는데 3시 58분에 딱 하는거에요. 여기서 뭐가 차이나요? 1분의 틈이 생기죠.
주께서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것을 이걸 이미 예상하고 하늘에 앉을려고 구원 받을려고 애쓰는 인간들을 내쳐버리는겁니다. 내쳐야 돼요. 하늘에 앉히는 것을 내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해석했던 그 성경해석 몽땅이 이게 뭐냐하면 무효가 돼요. 효력 상실 뭐 이렇게 표현해도 되고요. 인간이 성경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해줘버려요.
이것을 실제로, 효력 상실 이게 적당하겠네요. 효력 상실을 이걸 간단히 이야기해서 뭐냐하면 “불법을 행한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는거에요. 불법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너희는 성경 해석권이 없다.” 이 1번을 누가 대표하느냐. 이 1번을 대표하는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여러분 아시죠? 이스라엘. 이스라엘보고 이 일을 시킨거에요. 율법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충실히 해석하면서 그들을 불법하고있는 그러한 민족으로 들추어내는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앉히시며” 이거는 어떻게되는가?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이 내용에 의해서 인간은 근접할 수가 없어요. 아까 세 번째 시간인지 제가 문장을 하나 썼는데 문장을 다시한번 써볼게요. “방에 들어가도 좋습니까?” 제가 밑에 뭐라고 했어요? “안돼요. 안돼” 또는 “안돼요.”라고 했죠.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그럼 방에 들어가도 좋습니까?” “들어오지마 못들어와.” 그러면 이사람은 구원 못받습니까? 구원 받아요. 하나님 아는 방에 못들어가는데 구원을 받아요. 그게 두 번째 시간에 했던 것은 뭐냐? 통보.
통보란 뜻은 항상 사후, 또는 다른말로하면 추후 또는 소급해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통보해주는겁니다. 통보함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무엇을 반추하게 만드느냐하면 내가 성경 말씀에 해석했던 모든 것들이 이게 무효가 되고 효력이 없는 것들이 나에게 나왔다는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성경해석을 하고 노력하는 이 모든 것은 주님앞에서의 승리입니까? 패배입니까?
질문자체가 너무 어려웠는가? 이게 승리한거에요 인간은 패배한거에요? 패배지요. 교재에 나옵니다. 교재 한번 3페이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3페이지에 중간에 보면, 위에서 10번째 줄 쯤 되는데요. 전쟁을 통해서 다시한번 정리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뭐하는 민족이다? 온통 전쟁만 하는 민족이다. 전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다 라고 하는데 거룩한 전쟁에 그들이 끌려나온거죠.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패배자이며, 이 패배자를 애써 부정하고 전쟁의 승리자로 기대하는 억지가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전쟁에 들어가야되는 이유가 패배하기위해서, 어떤 승리도 인간에게 돌아올 몫은 없습니다.
근데 그 사실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부지런히 성경을 해석을 하는거에요. 해석하면서 성경을 해석 안한쪽보다 성경해석 하는 쪽이 반드시 우리는 승리 할것이라는 짐작으로 그런 기대감으로 전쟁에 나서게 만들어요. 이게 구약성경에 전쟁의 특징입니다. 뭔가 기대를 잔뜩하고 나서는데 아무도 승자가 없어요. 인간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에 인간이 끼어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쟁을 하면서 그들은 뭘 하느냐하면 허물과 죄에 대해서 금식하면서 반성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자기 허물과 죄가 있으면 거룩한 하나님과 합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패배가 돌아온다는 것은 역사적 교훈이다. 이 역사적 교훈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음 전쟁을 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가지고 정결하고 순결하게 전쟁해야 우리가 승리한다.” 이게 바로 열왕기상 열왕기하에 나오는 역대상 역대하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이 했던 이해에요.
근데 그게 바로 패배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당시에는 몰랐어요. 주께서는 인간이 해석을 할 때 그냥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를 가졌다는 것. 하나님이 승리자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승리자 편에 내가 설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들어있었던 거에요. 통보한다는 생각보다도 알아서 우리가 협조한다는 생각을가지고 하나님의 전쟁에 명분으로 삼고 뛰어든겁니다.
그런데 그런 명분을 삼은 이스라엘을 전쟁이 끝나고 난뒤에 분명히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왔는데 그 승리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승자가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패배자의 일부다. 적들도 패배자지만 우리도 패배자란 사실을 새겨서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을 때 그게 바로 승리입니다. 그게 승리에요. 인간이 하나님이 협조해서 하늘에 앉히는 그 법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 우편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이야기로 그치는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같이 노골적인 구체적인 증거를 남겼지만 여기에 3페이지 계속 보게되면 오늘날 노동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말이죠. 군사적 전시상황도 아니라도 상호패배의 경험은 노동시장에서 일어나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영적전쟁, 이 전쟁이 하루도 쉴 날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역사고 나 사적인 역사속에서도 전쟁이 멈춘 날이 없습니다. 항상우리는 패배자 되기를 싫어하는거에요.
자본가에 대한 투쟁처럼 믿어지겠지만 싫은 목적도없으며 무미건조한, 여기 중요한게 대자연의 침묵. 대자연은 말이 없습니다. 대자연은 말이 없잖아요. 그러면 누가 말을 겁니까? 인간 쪽에서 어느쪽으로? 대자연쪽으로 말을 걸어요. 말을 거는 방식이 뭐냐하면 노동입니다. 노동. 내가 갖고있는 나의 에너지를 자연에 투자하고 투여하는거에요.
“하나님 저 이번 일에 신경 바짝 썼습니다.” 이게뭐에요? 나의 이름을 걸고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대로 자연에다가 투자하는겁니다. “이번 시험에 합격하기위해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내가 학원다니면서 공부 꽤나 이 사십넘은 나이에 좀 했습니다.” 뭐 이런거. 어디 공인중개사 시험이 공인중개사의 법적인 학문적 발전을 위해서 합니까? 복덕방 할려고 하는거 아니에요?
자꾸 집에서 논다고 하니까 그게 짜증나는거에요. “봐, 나 시험 뭐 하잖아.” “뭐하는데?” “공인중개사” “백수지 뭐” 인간쪽에서 말을 겁니다. 노동으로 말을걸잖아요. 그럼 자연은 말을 해요 안해요? 자연은 여기보면 이 말없는 자연은, 자연은 말이없어요. 말이없으니까 자기가 자연에게 말을 걸면서 그 언어를 누가 되받아요? 말을 건 내가 되받아와요. 되받아오면 이게 뭐라하느냐하면 이게 지독한 자기사랑이죠.
그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입니다. 멸망할 때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로 바뀌었습니까? 유대교로 바뀌어요. 이스라엘이 유대교로 바뀌면서 지독한 자기사랑, 유대교. 그럼 유대교는 뭘로 충만하겠죠? 언어로 충만하지요. 그 언어는 누가 내뱉은 언어? 어떤 누구누구한테 해놓으면 그 해석을 포함해서 누가다시 되받아옵니까? 내가 되받아오는거에요.
그러면 성경말씀은 이렇게 있는데 그 부록으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이 10배 20배 많아지는겁니다. 그게 법적인 효력으로 유대교가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그 안으로 누가 뛰어드느냐? 주님이 뛰어들죠. 그리고 증명하는 것은 뭐냐? “너희들은 이미 패배자다.” “너희들이 성경해석을 하기 때문에 패배자가된거다.”이방민족에 지지 않기 위해서 해석했는데 그게 바로 패배자인겁니다. 그럼 패배자가 될 때 그러면 패배자가 되면 끝이냐?
아니죠. 패배자가 됐다는 그 과정이 추후에 주님이 통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버려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되어있죠? 여기 주와 그리스도 이 뜻이 뭐냐하면 메시아라는거에요. 현재 메시아를 누가 기다렸습니까? 성경을 해석했던 유대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렸거든요.
기다렸어요. 과연 그들이 기다릴만한 자격이 됩니까? 안됩니다. 왜? 그들은 과거에 역사적 교훈을 알아서 금식할 때 제대로 금식하고 제대로 회개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너희 금식할 때 웃었잖아. 금식할 때 가난한 사람을 학대했잖아.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유대인들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회개하고 구제하고 철두철미하게 더 이상 하나님한테 잔소리, 지적질 들을게 없도록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것. 그게 바로 패배자의 모습이에요. 그게 하늘나라 천국 못가는 주님나라에 갈수 없는 자의 극단적인 최후의 모습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그들로 하여금 종말로 몰아세운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패배자였는데 자꾸 아니라고 여기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면 이거는 어떻게 끄집어 냅니까? 성경 줘가지고, 율법줘가지고 나름 해석하도록 하는 가운데, 언어를 해석하는 가운데 은근히 자기가 노리는 하나님앞에 짤리기 싫다는 본능이 거기서 섞여서 함축해서 같이 우러나오도록 만드는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실컷 회개했나?” “회개했습니다. 저는 금식까지 알아서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금식 안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니가 신랑을 죽였다 이말이에요. 너희들이. 그때는 뭘해야된다? 그때는 회개할 것이다. 그러면 앞에 있는 죄를 위해서 금식하는 회계는 본인이 죄허물과 죄를 알아서 하는 자기 반성차원에서 하는 회계라면 뒤에나오는 회개는 울고불고가 아니고 뭐냐하면 통보하는 회개 자체를 통보해줘버려요.
그러면 그 두 개의 회개와 반성을 쥐고 거기서 뭘 발견하는가? 틈을 발견합니다. 천국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구나. 감사와 고마움이 우러나죠. 그게 바로 하늘에 앉힌사람의 특징입니다. 왜? 추후적이니까. 사후적이니까요. 더는 자기를 사랑할 수가 없고 더구나 뭘 사랑할 수 없느냐? 어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시다라는 말을 발견해요. 추후적으로.
왜냐하면 같은 하나님을 두고도 내가 해석한 하나님과 직접 찾아온 하나님과 틈이 있다는 사실. 틈이 있을 때 그 틈이 발생되어버리면 우리는 절망적이잖아요. 근데 그 틈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틈을 우리에게 통보 해줘버리면 “우째 내가 저 틈을 건너왔지”라는 그 신기함. 그 신기함이죠. 놀라워라. 어떻게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인데 “어떻게 하늘에 앉힐수가 있습니까?” 이 문장과 “어떻게”, 막 찡그리는거에요.“어떻게 하늘나라에 갈수 있습니까?” 하고 같은 단어인데 느낌아니까.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어떻게 내가 그 하늘에 앉았습니까?” 라고 완전히 반전이 일어나는거에요. 반전.
주님몫이죠. 그래서 여기 사도행전 2장 36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진작이야기하지 진작. 진작 그 이야기를 못해요.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할 때 신났어요. 아주 신바람 났다니까요. 통계적으로 대다수가 예수님 죽이는쪽에 찬성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시한번 정리합니다. 자연은 말이 없어요. 자연은 말이 없기 때문에 자연에다가 자기 인간의말을 걸어줘야됩니다. 그 말이라는 것은 내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사랑을 절대로 포기못해요. 성경해석을 하나하나 해석하면서 거기에 뭐가 묻어있습니까? 이 성경해석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것이다라는 자기사랑의 지독한 사랑을 하는거에요. 하면서 그 기본에 깔려있는게 뭐냐? “저 하나님 사랑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니가 하나님 사랑한다고 누가 알려주던데?” “주님의 말씀에 그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영적전쟁에서 니가 빠져있냐 아니면 니가 전쟁의 주체자냐?” 이렇게 묻게되면 “주님의 전쟁에 제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이 되느냐?” “그건 뭐 주님과 저의 전쟁이죠.” 그러니까 이게 영적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뭐냐하면 자기의 가치를 지키려는 나의전쟁이 되고마는겁니다.
그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지금 전혀 동의가 안될꺼에요. 그래서 교재 3페이지에. 교재 3페이지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교재 3페이지가 밑에서 두 번째줄에, 높은 파도가 해변에 다가올 때 우리는 수면에 가로지르는 실체적 존재를 집약한다. 파도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보세요. 이 파도는 아무런 실체적, 그다음에 뭐라고되어있느냐, 실체적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는거에요.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이미 자기자신을 동일한 대상으로 본인이 그걸 받아들이고있는거에요.
나는 어디장소, 미국가도 나고, 한국와도 나고 나는 어디가도 나라는 동일성은 한결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겁니다. 굉장히 어려운이야기에요. 파도를 보고서 전체는 파도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그 물방울이 다 다르다는 것은 우리는 파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파도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보느냐는 우리는 그거를 의도적으로 막아버려요. 파도는 말을 안하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을했잖아요. 죄와 허물로 너희가 죽었다 할 때 그 죽었다는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서 내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반성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그렇다면 반성하겠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해석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인간은 죽을 자격도 안되지만요, 인간은 죄와허물을 지을 자격도 없어요. 그이유가 뭐냐? 하늘에 앉은 자리, 이 자리가 누구 자리냐 하면 이게 주의 자리거든요. 근데 인간은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이 아니다 이말이죠. 그런데 에베소서 2장 1절과 7절에 보면, 중간에 어떤 과정이 있는가 다 없애버리고 1절 7절을 보게되면, 죄와 허물로 죽었죠? 근데 마지막에 뭡니까? 우리자리가 아닌 주님이 있을 자리에 우리를 어디에 앉혀요? 하늘에 앉혀졌죠.
그러면 그 가운데서 뭐가 탈락해야돼요? 나의 동일성이 탈락해야됩니까 주님의 동일성이 탈락해야돼요? 나의 동일성이 탈락해야돼요. 그러면 죄와 허물은 뭐냐? 내가 동일하지 않는데 동일하게 만드는 그 배후 세력이 그게 죄와 허물이 되는겁니다. 그거는 우리는 몰라요. 그거는 악마가 그렇게 작동을 한겁니다. 그거는 주님이 알아요. 악마는 동일하니까. 처음부터 악마는 시간에 가두어뒀다 했잖아요. 악마는 어떤 행동을 반성을해도 변함이 없어요. 왜? 악마는 동일해야 되니까.
그래서 이래도 여러분들은 납득 곤란할거라고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페이지를 봅시다. 그럴줄 알고 교재를 이렇게 복잡하게 쓴거에요. 5페이지를 보면 이렇습니다. 제일 위에. ‘예를 들면 티비 화면에서 티비가 올려져있는 책상을 볼 수 있는데 그 티비속에도 다시 티비가 올려져있는 책상이, 그리고 다시 그 티비 속에서 티비가 올려져있는 자아를 계속 확대 양산할 수있는 것이 주변에 가득하다.’
맞지요. 티비 책상에 해서 치워보면 티비속에 티비가 있잖아요. 이것이 언어를 구성하는 당사자의 자아가 있을 수 있고, 인간이 언어를 대할 때 그 언어가 일찍이 언어가 나의 티비 역할을 하는거에요. 왜? 저쪽에서 나한테 말 안거니까 내쪽에서 어떻게 답답해서 내쪽에서 해석을 하든지 말을 걸든지 하여튼 내쪽에서 뭔가 나오는 것을 내가 되받아서 그걸 내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내가 동일시되니까요.
구원받기 전의 나와 구원 받고 후의 나가 일치 되어야 되니까요. 중간의 내가 불연속 점이 되면 곤란하다 이말입니다. 지금 있는 내가 천국가있는 나와 일치되기를 내가 소원하고 있어요. 누구 마음대로? 내마음대로에요 그거는.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여기있는 나와 천당가는 나가 다른사람 같으면 우리는 곤란하다 하는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말합니다. “그게 왜 곤란한데?” “그거는 묻지말고 그러고 싶어요. 나는 승자가 되고싶으니까. 패배자가 되기 싫으니까.” “그게 마귀야 인간아. 그게 마귀의 생각이야.” 자꾸하나님은 사랑이라는거에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자기아들 예수님만 사랑했어요.
그러니 성경해석을 하면서 그해석이 묻어나와야 돼요. “나는 하나님이 자기아들 예수님만 사랑하는데 나는 뭐냐? 훼방자요, 폭행자요, 방해자가 되는거에요.” 그런자에요. 내가 방해자고 폭행자, 주님을 욕보인 자라는 그걸 알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여기있는 내가 지옥가도 할말 없다는 그걸 알기 위해서 성경 해석을 합니까? 원어 해석을 해요? 그런 인간은 없어요. 해석 할때부터 이미 노림수가 다 있는거에요.
그래서 여기보면 뭐냐하면 중요한게 있습니다. ‘그 언어 안에 담겨있는 내용으로 자아가 있을 수 있다고 구분할 수 있다. 어느것이 진짜 자아냐 따질게 아니라’ 그다음에 뭡니까? ‘모두가 자아다.’ 이게 불교의 사상입니다. 모두가 자아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강에 비친 달은 하나의 달이지만 모두가 달이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기껏 인간들이 열심히 종교활동 했는데 교회 다니고 열심히 살았는데 불교 도사가 와서 “그거 불교에 다 있는데? 불교 경전에 있는거야. 맨날 절에가서 점치는것만 봤지” 불교 이론에 의하면 전에는 절에있는 전부다 불타 없어야 돼요. 얼마전에 불탔지만. 전부다 이거는 서로가 사기인 것을 알고서 불교가 유지되는겁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 내가 곧 진리라는 사실. 내가 곧 신이라는 사실을 불교공부좀 한 사람은 다 알아요. 부처한테 왜 빌어요? 거기서 때론 용감한 사람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하죠. 안죽입니다.
인간은 부처는 죽일 수 있어도 자기자신은 못죽입니다. 자기자신을 죽여버리면 자기 동질성이 깨지는거에요. 그래서 5페이지에 네 번째 큰 단락에 보면 ‘자아의 죽음과 구원,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因果)성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인데’ 자 보세요. 이건 다같이 하고싶은데 시작. ‘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이다.’ 십자가 밖에서 죽는죽음이에요.
십자가 밖에서 죽는 죽음은 하늘에 앉힐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늘의 그 자리는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의 동질성이 동질성으로 확정된 자리에요. 우리가 왜 거기에 끼어들어갑니까? 못 끼어들어가죠. 그렇다면 다시 에베소서 2장 1절로 돌아옵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할 때 이 말은 뭐냐하면 주님쪽에서 자연이 말 하지 않고 주님쪽에서 이스라엘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했어요. 역사를 통해서.
살아볼려고 한 자를 죽여버린겁니다. 하나님께서. 잘해볼려고 하는 인간들 죽여버리는거에요. 잘해보자 하면서 인간은 계속 자기 해석에 대해서 멈추지 않기 때문에 니가 죄에 대해서 허물을 해석할 권한이 없고 내가 죄의 허물을 해석하기 위해서 죄와 허물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발시켰습니다. 불법을 저지르도록 이스라엘을 가지고 시범조로 활용하신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1절에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하기 위함이고 너희로 하여금 저주 아래에 있음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위해서.”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어떤 성경 해석을 보면 이게 확정된 결과라고 보지않고 노력하면 이 결과가 뒤집을 수 있다는 기대가지고 보는 것은 자기가 패배하기 싫고 자기가 패배했다는 말은 더 이상 나의 동질성은 여기서 멈춰야된다는 그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싫은거에요. 나로 내가 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제 스탑, 그만 둬야되는데 그걸 내힘으로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실컷 50년 60년 복음듣고 나이 80이 돼서 밤에 잠을 자게되면 또 떠오르는 것은 이거에요. “그러면 나는요?” 50년 세월지나고 60년 지나도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인간은 그때뭐냐하면 나와 주님사이에 틈을 발견해야 돼요. 나는 하늘에 못 앉히시고, 주님만 하늘에 앉히시는 그사이에 틈. 그사이에 틈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전쟁입니다. 주님은 나를 포함해서 마귀와 나와 우리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신겁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안죽으려고 성경봤는데 주님이 우리가 따라올수 없는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어떤 인간도 닭쫓던 개신세가 되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죠. 죽기까지 따라 오겠습니다. 베드로가 내놓을 카드는 다 내놨어요. 마지막에 조커 내놓고 에이스 내놓고 다내놨어요. 주께서. “쓰레기 갖다 버려라. 이게 다야?” “제 목숨 내놓겠습니다.” “니 목숨이 뭔데? 이미 죽은 목숨. 그게 하늘의 우편에 앉을거라고 니가 생각하냐?” 인간의 노동은 죽기위해서 하는게 아니고 자기 살리기 위해서 하는 노동이잖아요. 그 노동을 멈출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8절까지. 방금 이야기했던, 하늘에 앉혔죠? 8절. 앉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다고요? 통보해서 아는거에요. 그런데 이가운데서 우리 인간을 배제한 전쟁이죠. 인간을 배제한 전쟁. 배제한 전쟁이 2절에서 7절까지 나오는겁니다. 해석 참 쉽죠잉? 우리 빼고 주께서 싸우시는거에요. 그래서 주님의 별명이 뭐냐하면 주님의 별명이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이제 뻔하죠. 이스라엘중에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입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입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한다 천사가.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왕이에요. 어떻게 그래서 어떤 학자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짜 요구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그 요구를 들어줄 순 없어요. 너무 엄청난 거라서. “너가 죽으라”가 아닙니다. “너가 죽으라”가 주의 뜻이 아니고, “너가 마이너스가 돼라”는거에요. 인간에게 죽음이 없으니까.
“사는것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라. 사는것보다.” 그냥 구차한 삶 정도가 아니고 없는것보다 있는것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라는 거에요. 인간에게는 그거는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당신은 우리를 모독하니이다.” 이러죠. 참 이 바리새인들을 박수쳐야돼요. 고마워요.
지난 주일 낮 설교에 그런거 했잖아요. “니가 누구기에 감히 죄를 사하는가.” 이거뭐 성도가 고백해야될 것을 바리새인쪽에서 고백해버리는거에요. “지가 뭔데 남의 죄를 사해?” 그게 바로 예수님이에요. 문제는 인간이 죄를 생각할 때는 자기가 알아서 선악체계 자기가 알아서 죄를 회개할 범주 내에서 죄를 안다는거에요. 인간은. 꼼수를 쓴거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저히 회복 불가한 죄를 죄라고 제시함으로써 해석 차이에서 틈이 발생되는겁니다.
이 틈이 전쟁인데 그틈에서 나온 것은 이미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길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겼다는겁니다. 이미 이긴거에요. 여러분들은 이제 들으시면 여러분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여기서 다시한번 정리하는 입장에서 도표를 한번 그리겠습니다. 아시는분 다아시니까 이거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써 하늘의 앉히심이 됨으로써 지난 과거까지 그리고 앞으로 모든 미래가 쏜살같이 어디로 집결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으로 집결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이에 있던 거미망. 수많은 모든 인간간 일어난 모든 관계망이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서 벌어진 일들이에요.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사건들이 일어난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2024년입니다. 그러면 2025년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답은 빤히 나왔죠? 십자가와 관련된 일이죠. 2024에서 내가 2025로 건너갈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건너갑니다. 갈수가 없어요. 2024에서 2025로 못갑니다. 우리 권한이 아니에요.
가버리면 2024년의 나와 2025년의 내가 동일성을 유지하게 돼요. 근데 2024에 내가 십자가를 경유해서 와버리면 여기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비(非)나, 어려운말 써서 죄송합니다. 나가 아닌 나의 부정을 통해서 2025년도에 주님에 의해서 다시 허락받은 나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2024에서 2025년까지에 나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이스라엘의 오류는 뭐냐? 역사를 뭘로봤다? 역사를 계시 대용으로 본게 실수입니다. 역사는 계시 대용이 안돼요. 매개가 안돼요.
자꾸했지만 다 잊어버렸으니까. 매개란 윗집하고 아랫집하고 연결된게 매개입니다. 근데 역사는 시도하는거에요. 노력하는거에요. 열심히 해보는거에요. 역사란. 힘모아서. 그거 하늘나라에 못 앉힙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를 추구하는 인류가 누구를 추방시켰어요? 자기 공동체에서? 하늘에 앉을분을 추방시켰잖아요. 게임끝났어요. 게임오바 끝났어요.
거기에 모든인간이 합세했고 우리는 그들의 자손이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시비거니까 문제를 냈어요. 방금 이 방법을 가지고 문제를 냈습니다. 다윗이 있지? 다윗은 너희조상이지? 그럼 묻는다? 장차 올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인가? 아주 친절하게 상냥하게 물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야, 이 문제는 우리가 안다”해서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 다윗과 다윗 자손사이에 시간관계로 연결되어있어요.
다윗이 다윗DNA 해서 자손되잖아요. 그럴 때 주님께서 어떻게 다윗의 자손인데 후손인데, 어떻게 후배가 선배가 되느냐를 질문을 한거에요. 바리새인에게.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더라 되어있어요. 다시는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지 않더라는거에요. 그질문을 제가 여러분앞에 해봅니다. 어떻게 후손이 후배가 어떻게 선배가 됩니까? 세례요한은 알았어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세례요한은 이게 이야기가 되는 것이 수직선에서 세례요한은 6개월 선배입니다. 출생선배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겁니다. 6개월 선배고 6개월의 세례요한, 그리고 6개월 뒤에 예수님. 그러면 누가 먼저 태어났는가? 세례요한이 앞서고 예수님은 뒤에 태어나지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할때에 사이에 앞선 것이 아니고 위로올라가는거에요. 위에. 애초부터 그분은 나보다 앞섰는데 앞섰기 때문에 내 뒤에 와도 상관없다는 거에요. 근데 내 뒤에 오심으로써 나는 어떻게 되느냐? 비로소 나는 망해야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는 예수님앞에서 나는 어떤 위상이고 존재인 것을 비로소 증거하는 것이 마지막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하늘에서 주지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요한이 층을 2층으로 나눴거든요. 이게 골로새서 3장에 나오죠. “우리는 이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앉혔다”라고 되어있죠. 그러면 이땅의 죽은 생명은 생명입니까 생명아닙니까? 그거는 생명이 아니었어요. 자, 그러면 2절에서 6절까지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환경전쟁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죄도 뭔지도 모르고 반성하고있으니까 그게 먹혀 들어갈 수 있어요? 자기 동일성이죠. 인간 빼고 가실게요 되는거에요. 인간 빼고 전쟁하는겁니다.
그래서 이게 기쁜소식 복음이에요. 자, 우리가운데 다시한번, 인간관계가운데 온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6.25사건, 보이스피싱 사건 어떤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보이스 피싱이 왜일어나야됩니까? 사람이 자기는 오직 주님만 사랑한다고 해요. 근데 막상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그순간 자기가 해결하려고 해요. 자기가 감당하려고 해요.
왜? 이거는 사건이 오는순간 갑자기 분명히 없어졌다는 이 자아 동일성이 마중을 나가요. 어찌할꼬. 큰일났다. 경찰서에 전화해서 난리죠. 그렇게 한순간 분명히 나는 벌써 나를 부인했다고 여겼는데 나를 부인했다고 여겼던 그 시점에서 벌써 시간이 지났어요. 그러면 그 사이에 뭐가 발생되었습니까? 내가 몰랐던 내 동일성이 자아 동일성이 강화되었고 구축되어 있는 것
을 누가 알아요? 주님께서 아신거에요.
통보 효력이 줄었구나. 감기 걸렸을 때 먹는 약? 판콜. 판콜 먹고 난뒤에 하루 지나고 또 먹어야돼요. 판콜 만나를 늘 먹어야 돼요. 우리는 판콜은 아플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낫게 되게되면 고통이 없어요. 눈아플땐 “눈이 뜨이지 않아요. 이제 나는 끝났구나”하고 있는데 눈 낫고난 뒤에는 “언제아팠어? 이게 정상이잖아. 눈 건강한게 정상이야” 인간에게 무슨 정상이 있습니까? 없는데. 이제는 양쪽다 한번 맛이 가야 정신을 차리지. 이렇게 되는거에요.
여러분들이 세례요한이 주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세례 요한이 여러분 잘 알지요. 고백이 “오실분이 당신입니까?” 벌써 출제 경향이 지났어요. 세례요한이 구약의 출제 경향에서 수능만점 맞았는데 예수님이 새롭게 벌리는 그 수능문제를 풀 재간이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적 인물이라서 하늘에 앉히지를 못했어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숙제가 아니고 문제를 내겠습니다.
그러면 구약 인물들이 언제 하늘에 앉히십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아, 이거 중요한문제 우리하고 관련된 문제죠. 구약의 성도들이 언제 하늘에 앉히십니까? 이게 역사적으로 해답하는지 묵시적으로 해답하는지 한번 들어볼 거에요. 이거는 바로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가 주님하고 이야기 한겁니다. “주님, 언제 죽어요?” 예수님이 죽는 순간 그때 비로소 하늘에 앉히는 거에요.
주님이 먼저 가서 하늘에 앉아 줘야 지금까지 연결돼 있던 미진한 모든 것이 전부다 하늘에 앉게됐다는 것을 통보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에. 성령은 하늘에 앉힌 상태에서 보내는 성령은 이거는 주님 주도적이지만 그렇지않고 예수님이 하늘에 우편에 앉기 전에 성령은 이거는 보조적이에요.
“한번 노력해봐라. 말씀지켜봐라. 주께서 하시겠지.” 이게 보조적이거든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늘에 앉히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성령의 주체자가 하나님에서 뭐로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으로 바뀌어요. 예수님이 이미 완료된 것을 선물로 우리에게 공급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우리가 하지도 않는 전쟁을 주님 혼자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 효력에 우리는 값없이 참여한 바가 되죠.
그걸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여기에 단어를 보세요. 은혜 나오지요. 믿음 나오지요. 구원 나오지요. 이게다, 3종세트 이게 뭐라고요? 이게 내것입니까? 나의 동일성에서 나온거에요? 아니면 주님의 동일성에서 나온겁니까? 주님의 동일성에서 나와야 주님이 앉았던 하나님 우편에 같이 동일하게 우리가 앉을 수가 있는거에요.
내 동일성 포기하고 주님의 동일성에 합류되는겁니다. 이거 뭐 고함지른다고 이게 정답이 되는건 아닌데 그다음 선물이 뭐냐? 뭐가 선물이냐? 9절에 나와요. “이거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 행위에서 나온게 아니라는 사실 조차도 통보, 선물에 해당됩니다. 내 행위에서 나온게 아님을. 이거는 겸손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나의 겸손이 아니라 주님의 겸손입니다. 주님의 겸손도 아울러서 선물을 받아요. 이거 3종세트가 아니고 4종 5종세트가 되는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감사 고마움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선물이 가리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뭐가 발생됩니까? 영적 전쟁 중에 우리가 놓여있고 이 전쟁에서 우리가 배제됐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틈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에 충실해야 됩니까?
나의 오해에 충실해야돼요. 내 성경말씀에 대한 오해. 완벽한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는 그 착각에 우리가 매진해야됩니다. 그건 모르죠. 이게 착각인지 이것은 정도다, 진리라고 우길거에요. 그러나 성령께서 계속해서 통보를 해주니까 뒤돌아보면 아, 역시 주님의 복음믿는것도 어느새 뭐로 변했어요? 나의 믿는 행위에 결과로 벌써 변질되었다는겁니다. 우리의 동일성 때문에.
진도가 빨리나가서 다시한번 속도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도 조절을 해봅시다. 자연은 침묵한다. 자연은 침묵해요. 그다음에 누구 침묵이냐? 하나님도 침묵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고 하나님의 침묵이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통보로 바뀔려면 어디부터 움직여야됩니까? 나의 육신이 움직여줘야되죠. 나의 육신이 움직인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한다? 내가 내힘으로 내 행함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여줘야돼요.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근데 시도하는 움직임을 쭉 보면서 여기서 무엇의 재탕이냐? 이스라엘의 불법의 재탕을 보여주는거에요. 이스라엘은 율법있고 망했잖아요. 그럼 이방인들은 뭡니까? 율법없이 망한거에요. 둘다 결과는 마찬가지에요. 둘다 똑같이 망했다. 합치면 아담의 자손은 애초부터 망한다. 왜? 환경자체가 죄의 왕노릇하는 환경속에 동일하게 있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특별히 나의 동일성에 비중을, 무게를 두면서 “나만큼은 좀 빼주세요. 나만큼은 내가 정당하게 산다는 것을 주께서 통보해주면 좋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뭔가 자기 시도를 하는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교재에 2페이지에 제목보세요. 거기보면 밑에서 6번째 제목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나를 향한 전쟁이에요. 나를 향한 전쟁.
주께서는 나를 향한 전쟁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저 뜻 모를 이야기만 나누어주는거에요. 계속해서 뜻모를 이야기만. 뱅뱅 돌면서. 공백은 못들어가고 그 가장자리를 뜻모를 이야기만 하는거에요. 그 뜻모를 이야기라는 그 노래 가사 나오지요? 낭만을 위해서? 뭐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소용없는 죽음이에요.
하늘에 앉힐 수 없는 죽음입니다. 내가 죽기까지 노력했던 모든 것이 하늘에 절대로 앉혀서는 안되는 죽음을 우리 육신은 그동안 착각하면서 보여줬던거에요. 나는 너를 안반긴다. 반길수가 없어요.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고 하지만 여기서 주님이 여기서 개입을 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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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6강-에베소서: 종말현상
(강의:이근호 목사)
6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3페이지 교재에 보면 중간에보면, 중간에서 약간 밑에요. 이 말이 없는 자연을 상대로 매일같이 피곤함에 쩔어 패배하는 바로 그 일이 노동자 자신의 정화로 보는거에요. 해석. 내가 힘든 노동을 하면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를 새롭게 정화라하는 것, 순수하게 또는 순결하게 하는 것. 나를 내가 순결하게. 이걸가지고 뭐라고 표현되어있느냐 하면 자기 도야. 도닦는거에요. 인간은 노동하면서.
내가 이렇게 고생에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가가 뭐냐? 내가 정말 보석같이 빛나는 인간으로 단련될 수 있는 기회라고 해석을 내리는데 그 해석은 노동해서 얻어지는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게 잠복되어있었고 잠재되어있었던 거에요. 인간속에. 어떤 결과가 났든 그것은 나를 좋게 보는 선상으로 해석하는 것. 그러한 성질. 그 성질이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에보면 특히 3절에보면 그걸 특히 하나님보시는 그걸 뭐라고 해석하느냐? 욕심으로 보는거에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진노의 자녀의 모습이 막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고 자기정화와 자기 인격 도야를 쉬지 않는 그 모습이 진노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보니까 여러분은 진노의 자녀 근처도 안갔어요. 인간의 욕망은 신이되는거에요. 우리가 아는 상식선의 신은 뭐냐? 순결하고 깨끗하고 사랑이많고 자비심이 넘치는거에요. 그걸 누가 이야기 해주는가?
그걸 불교가 이야기했지만 이방민족에선 불교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쪽에 그게 최고 단계의 등급에 정화가 바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장로들이에요.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천국에 가고자하는 그욕심과 열의가 마지막 도달하는 어떤 경계선 점인데 경계선점을 먼저 선점해서 이런식으로 가야 천국으로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그것을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인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다. 그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에요. “이쪽이야 이쪽이야” 자꾸 그쪽이야.
이쪽이야가 뭐냐면 인간이 애쓰면 달성할 수 있는 쪽이에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행함으로 노력하게 되면 경건의 훈련을 하는데 노력하게 되면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은 누가먼저 그걸 선점했는가? 바리새인들이 먼저 선점했고 주님께서는 그 선점 자리에 예수님께서 최후로 영적 전쟁을 한판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처음부터는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처음부터는 갈릴리 쪽으로 들어가서 베들레햄에서 태어났지만 의도적으로 우회하는 작전을 벌입니다.
갈릴리 쪽으로 가서 예루살렘을 치는 노선을 정하는데 왜냐하면 갈릴리가 어두움의 자식들, 혼혈아 들이거든요 갈릴리가. 옛날 사마리아 땅이에요. 그래서 유대 민족이 봐서는 개같은 이방인의 자리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자리에요. 지형들을 놓고 지역으로 예루살렘 성전있는 쪽과 성전이 없고 가짜로 만든 그리심산 에발산 이런쪽에 성전지었던 그쪽과는 차별화시킨거에요. 유대민족이. 역사 때문에 그렇죠.
아까 계시를 대체한 역사 때문에 그것이 자기 정당성, 자기동일성을 역사로 보완을 해주는겁니다. 역사가 이러니까 우리는 한결같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있는 근거가 역사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했다. 여러분들이 교회다니면서 그런현상이 있죠. 2층에서 예배드리고 아래층에서 또 반란군들이 예배드리고 하는 것. 그런 큰교회 있지요. 물론 부동산 때문에 그런일이 벌어지는데요.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그래요. 그렇게 할 때 서로 막 같은 편끼리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그들이 기도하면서 뭘 원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편 되기를 소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죠.
1층에서 “주여 주여” 삼창하면 2층에서는 육창을 해버리고. 기싸움에서 안밀리도록 하는겁니다. 그게 차별화가 되는거에요. 그게 뭐냐? 이쪽의 동일성과 저쪽의 동일성을 두편으로 나눈거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편은 제자들도 없어요. 예수님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목자를 치니” 그다음 뭐에요? 양들이 하지말고 옆에 붙은거에요. 그동안 붙어있는 양들이 먼지를 털 듯이 털어버리니까 이 인간적인 본드에요. 의리가지고 붙어있는 본드에요. 이게.
성령으로 붙어있는게 아니고 성령이전에 인간적인 정, 스승에 대한 의리. 이렇게 붙어있던 것을 먼지털이로 털어버리니까 다 떠나버리는거에요. 니는 하늘에 앉힐 자격들이 못된다는 거에요. 어쨌든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하늘에 앉히신 분은 에수님입니다. 그리고 부활도 마찬가지에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있지만 부활의 첫열매는 예수님이지 그들이 부활의 첫열매가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환경 때문에 그래요. 환경싸움 이니까. 부활은 여러번했지만 다시한번할게요. 부활은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 이것 부활 아닙니다. 이게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은 뭐냐? 여기 한자를 더 넣으면 돼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거에요. 죽은자들 가운데서. 그러면 부활이 될려면 배경으로 어떤 환경이 우선되어야 됩니까? 모조리 다 에스겔 37장의 말씀처럼. 모조리 다 해골, 해골들의 집합체로 규정이 나야 비로소 아무도 살아 날수 없다는 것. 이게 완전히 불연속성이죠.
어떤 자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명확하게 말씀으로 확정지을때만 비로소 부활의 첫열매가 거기서 나오는겁니다. 그래서 부활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사람 몫이 아닙니다. 인간 몫이 아니에요. 부활은 오직 언약 완성자 예수님 몫이에요. 그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나라 왔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구약의 대기자, 엘리야, 모세 구원 받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못받습니다.
그들은 대기표는 뽑았어요. 37번. 뽑았는데 구원은 못받아요. 그럼 뭐냐. 하늘에 앉히시고 하늘에 앉았을때에 아들이 뭐가되느냐하면 주가 될 때 구약에 있던 선지자들 아브라함은 그들은 누구를 믿었어요? 여호와를 믿었잖아요. 여호와와 그들 사이에 언약관계가 형성되어있습니다. 그언약관계 그 자리, 그 관계망을 누가 인수 인계를 받느냐 하면 주님이 인수인계를 받아버려요. 주님이.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내부에 설치되어있던 모든 시스템을 일거에 인수인계를 받아버리면 여호와와 관계되었던 모든 자가 주님의 선물의 혜택자가 되는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에베소서 할꺼니까 미리봅시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가 위에 올라갔을 때 이때 사로잡힌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뭐를줬다? “선물을 주었다.” 모든 자가 예수님의 적 인데 적들 가운데 포로잡은 자가 있을 거에요. 그 포로잡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적이지만 뭘줍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주죠? 아까 선물에 무슨 세트? 3종세트 5종세트 막가는거에요. 주께서 그냥 주시는거에요.
이유가 뭐냐? 주님이 주님되심을 확인차 그걸 증명하는차 주님이 주님되기 위해서 여호와가 여호와 되기 위해선 백성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이 주님되기 위해서 주님이 하는 업적을 찬양하는 찬양대. 다윗의 구조. 다윗의 구조가 찬양대에 있잖아요. 성전의 문지기들. 이러한 자들이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해서 필요했던 겁니다.
에베소서 2장 한번 봅시다. 2장 20절에, 뭐 성경해석 그냥 다풀려요 다풀려. 2장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이거 지금 모퉁이 돌이 변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아요. 우리가 모퉁이 돌입니까? 아닙니다. 모퉁이 돌은요 따로있어요. 따로. 누구입니까? 고정화 되어있어요. 모퉁이돌이 고정화 되지 않으면 이건 모든 구원은 취소됩니다. 이 어려운 이야기 한번 해봅시다. 시편 118편에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22절부터 24절까지. 시편에 나오는 이야긴데 이 해석을 위해서 우리는 에베소서를 경유해서 이 해석,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을 어떻게 되는지를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건 뭐냐하면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내버린 돌이 있어요. 그러면 성전의 종류는 몇종류? 두종류. 이스라엘은 성전이 필요해요. 그러면 이스라엘 종류는 몇종류? 두종류. 가짜이스라엘과 병행한 진짜 이스라엘. 가짜성전과 병행해서 진짜 성전이 가짜이스라엘 그리고 가짜성전에의해서 버려지는거에요. 핍박받는 방식의 활동이 주님의 언약안에 포함이되어있다는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이스라엘, 가짜가 가짜로 들통나야되고 성전이 무너져야 비로소 드러나는 감추어진 비밀인거에요. 했는데 아직까지 여기서 건축은 건축물입니다. 건축구조물이에요. 시에 건축 허가 나야돼요. 그런 구체적인 건물입니다. 그렇게 보이죠.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되어있잖아요. 이까지는 우리가 알아요. 문제는 뭐냐, 24절에 첫 번째 나오는 말이에요.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게 어려워요. 건축이 있다는 것은 공간의 문제인데 갑자기 공간의 문제가 뭐가 결합이 됩니까? 시간문제. 이날. 특별한날. 인자의 날, 단 하루, 모든 시공간이 완전히 소멸되버리고 불타버리는 그날. 그날과 결합되는겁니다. 흔히 교회다니는사람이 궁금해서 미치도록 묻는 질문이 있어요. 그거는 제자들도 물었던 건데, “예수님 세상 멸망의 날이 언제입니까? 10월 18일입니까? 도대체 언제입니까?” 이렇게 한다고요. 멸망의 날.
멸망의 날을 이렇게하면 멸망의날이 언제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 날을 같은 뜻인데 이렇게 말을 바꾸어 봅시다. 종말. 종말로 바꾸어 버려요. 갑자기 여기서 해석할 기미가 보이죠. 종말은 위층에 시간이 등장되게되면 위층의 시간. 또는 위층의 이스라엘의 등장 또는 위층의 성전이 등장하게 되면 비록 지상에 성전이 있고 이스라엘 있고 시간이 있더라도 그것은 뭐냐하면 그 존재자체가 종말을 드러내기 위한 벌써 종말이 벌써 시작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증거물로 유지가 되는겁니다. 우리는 없애는것만 좋아하는데 없어지지 않으면서도 종말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 학습. 놀이동산을 우리에게 허락을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동일성을 보장하는 우리의 육신도, 육신이 두종류에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이 육신을 뭐라고 했느냐하면 하나의 드레스로, 옷으로 이야기했어요. 새옷이 장롱에 있는 한 새옷에 대해서 마음이 끌리죠. 그러면 새옷이 장롱이 진짜 값진 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갈 때 잠옷입고 나가면 안되죠.
시장갈 때 허름한 옷을 입고 간다는 것은 이거는 뭐냐하면 내가 허름함이 무엇을 증거하느냐? “나 집에 새옷있다.” 이걸 증거하는 방법으로 구애받지 않고 허름한 옷을 입고 돌아댕길수가 있는거에요. 이 육신이 부담이 안돼요. 내가 늙어 요양병원에가서 치매걸려서 아들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이건 실화입니다. “아저씨 누구세요.” 이게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이게 우리모습이거든요. 조금만 많이 기다린사람 있고 조금 긴사람 있고 짧은사람 있는데, 짧은사람도 몇 명 보이는데.
이게 전혀 복음안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나니. 이거는 복음의 하나의 과정이에요. 더 이상 내육신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자유함을 우리 육신이 있음으로써 보장해주겠다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 그만큼 우리의 현재 입장이 종말 속에 있는거죠. 그래서 한번 정리해보면 “이스라엘에 존재 자체가 종말을 증언한다.” 이스라엘 존재 자체가 종말을 증언해요. 그다음 이스라엘 자리에다가 교회 또는 성도를 집어넣읍시다. 성도의 존재의 등장이 뭘 의미합니까?
이세상 끝났네. 이중적인 자기의 육신을 갖고있는 자의 등장은 하나밖에 없는 육신에 연연한 사람을 종말이라는 완전히 파괴될 환경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존재자체만해도 전도가 돼요.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성도가. 그런 경우는 드물지만, 한번 입사했다 칩시다. 입사할 때 “종교가 뭐냐?” “무교입니다.” 이래가지고 들어가는거에요. “종교없습니다.” “교회다니나?” “나 교회를 싫어합니다.” 뭐 이런식. 들어갔다고 칩시다.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이제 성령이 온거거든요. 들어오게되면 유명한 드라마에 나오는, 눈에서 투시하는 드라마. 레이저 광선하는 드라마가 있죠. 투시하듯이. 같은 업무를 보면서도 가짜와 진짜를 두 개 동반하고 입장에서 볼 때 그 부장이라는 사람, 과장이라는 사람이 떠들고 큰소리 치고 “뭐 요새는 골프의 재미에 푹 빠졌어. 골프채가 열채야”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는 그것들이 뭡니까?
‘아, 저게 종말의 현상이구나. 저게 요한계시록 17장과 딱들어 맞네.’ 성경말씀을 마음껏 쏘아대면서 일치시킬수가 있습니다. ‘아, 사람들은 저게 바로 진노의 자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탐욕이고 욕심을 순회하고 있구나.’ 이 욕심 버리고 저 욕심 백날 돌아다녀봐야 그 욕심 그욕심이고 믿을 것은 이세상 밖에 없으니까 거기에 모든 것을 거기다가 몰입하는거에요.
그 몰입하는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겁니다. 이거면 해결돼요. 이게 뭐냐하면, 게임입니다. 아이엠(I am). be동사 + -ing. 나는 게임중입니다. 어릴때부터 컴퓨터게임부터 해가지고 인간은 날때부터 게임합니다. 그래서 어느 설교에서 제가 이렇게 표현했죠. 이걸 다른말로 인생은 오디션중이다. 오디션.
남들이 나를 뽑아줄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걸 뭐라하느냐하면 이걸 자아라고 하지 않고 이걸 뭐라하느냐하면 이게 주체에요. 이게 뭐라고요? 종말의 현상이에요. 세상 멸망의 현상입니다. 이미 합격을 한 천국을 합격한 입장에서 하늘에 주님의 오른편에 앉은 입장에서는 모든 자가 뭐냐? 실패한자. 패배자, 탈락한 자로 보이는 거에요. “그래 니혼자 크루즈 여행하고 많이 돌아댕겨라.” 크루즈 여행한다고 뭐라하는건 아니고요.
왜냐하면 골프치는게 나쁜게 아니에요. 골프 안한다 안한다 하는데 주께서 음성으로 하기를 “쳐라, 쳐라. 골프 대줄게 쳐라.”하는데 이걸 순종해야죠. “돈 안번다 안번다” 하는데 “돈벌어야돼” 하는데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돈벌어라하면 돈 벌어야죠. 주의 지시인데요. 집에 엘리베이터 2대정도 있는 집을 살아라 하면 살아야 돼요. 하, 미치겠어 정말 이게.
살아야돼요. 차가 한 3대, 4대 있는 것 그것 주께서 시키면 해야돼요. 그걸 뭐라고 느낍니까? “하, 이렇게 사는게 이게 나의 종말이다.”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린지 모르겠지만. 이게 바로 자유함이고 종말입니다. 그 종말 하는데 바로 우리가 본질상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죠. 불순종이죠. 전에는 여기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죠. 그럼 영이 두종류가 되어버리죠. 보이지 않는 영이 두종류. 하나는 악령, 하나는 성령. 그전에 성령은 인간에게 오지를 않습니다. 성신이 왔지 성령은 오지를 않았어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미완료된 언약에 관여하는 것은 성신, 이미 완성된 언약에 관여하는 것은 성령. 원어는 똑같아요. 원어는 똑같은데 성경에선 그렇게 배치되는거에요. 왜냐하면 환경 때문에.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하여금 새로운 해석을 통보해주는겁니다. 환경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는 해석으로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죠. 그렇게 해서 여기 3절에 보면 “우리도 그 가운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여기 우리에서 나를 따로 뺄 생각을 하지 마세요. 다같이 다같이 우리도 다같이 그들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을 통보해주는거에요. “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구나. 그리고 그 흔적이 내 육신으로 흔적이 현재 지속되고 있구나” 그 증거는 뭐냐? 나는 나의 동질성을 이미 불합격자인데 이 불합격자인 나를 돌아서서 다시 천국가서도 나를 구원시키려는 주께서 일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또 거기서 내가 내 구원을 걱정하면서 “내가 뭘하면 천국 합격하겠습니까?” 이렇게하는거에요.
합격증 두 개입니까? 어때요? 우리가 합격증 두 개가 필요해요? 주님이 아는 해석의 합격증 따로 또 내가 또 합격한 것 두 개가 있어야 돼요? 찢어야죠. 나의 합격시도를 찢어야 됩니다. 5절에보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그것설명하고 다음 진도 넘어가겠습니다. 이것 참 중요한 단어죠. “허물로 죽었다”. 그냥 죽은 것은 주님의 죽음에 합류하지 못하죠.
큰 사랑으로 나의 죽음이 되지 않고 우리를 어디에 묻느냐? 막벨라 굴에다가 합장을 해버려요. 아버지 죽은 곳에 아들 묻고 아들 죽은 곳에 며느리 묻고 며느리 죽은곳에 또 아들 묻고 그게 막벨라 굴이잖아요. 언약의 집결지, 최종모습. 이땅의 사는 육신의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무덤인데 그 무덤에 있던 요셉의 해골은 요셉의 후손들이 요셉의 무덤을 가만두지 않았어요.
해골 짊어지고 요셉에게 약속한, 야곱에게 언약한 약속이 동반해서 드디어 약속의 땅에 여호수아가 정복할 때 그제야 세겜 땅에다가 묻어주죠. 여호수아 마지막에. 막벨라 굴입니다. 합장하는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에 합장시켜주는 것은 바로 주님이 하늘나라 우편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나눠주게 되면 우리의 죽음을 이장을 시켜줍니다.
그 내용이 제 설교가 아니고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아직도 다윗은 죽었다. 하지만 주께서 올라가사 다윗의 죽음은 아직 있다. 그 다윗에게 준 그 말씀이 다윗의 말씀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의 말씀으로 변개시켜가지고 “그 말씀은 니꺼아니야. 내꺼야” 내것을 주님께서 다윗에게 줘서 주님의 것이 합류된 다윗을 완성된 능력으로 죽은 다윗을 주님의 나라에 같이 하늘에 앉혔습니다. 이 이야기가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하겠다는거에요. 그게바로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뭐가필요하느냐 가짜 이스라엘 말고 진짜 이스라엘에 들어가는 그것이 우리의 합격의 모습이죠.
자 그럼 그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드는가. 그게 바로 2장 11절부터 나옵니다. 이스라엘되기. 이스라엘은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율법이 있지요. 이방인들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율법이 없지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못지키는 민족으로 들통을 냅니다. 그러면 율법이 있어도 못지켰다. 이방인들은 아예 율법이 없다. 그러면 그 틈에 남아 있는 것은 뭡니까? 율법만 남아있죠. 그 율법이 스스로 어떻게 완성을 하는가를 주님이 오셔서 그 율법을 이루죠. 그 율법을 이룬 최종의 모습은 우리말로 한 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피’입니다.
근데 그게 누구의 피입니까? 사람의 피가 아니죠. 제사장의 피가 아닙니다. 누구의 피입니까? 예수피라고 되어있습니까?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성경에? 그리스도의 피죠. 그리스도의 피에요. 그리스도가 예수님으로 오셨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예수님으로 오면 예수님은 하나의 우리와 같은 실존 인물이 되죠. 그리스도가 예수님으로 오신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피를 남기면서 오시는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되는거에요. 그래야 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로 오신분임을 피가 증명해줘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을 뭐로 믿었습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한번 정리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졌어요. 자 아까했던 것 복습해봅시다. 인간은 하나님께 말을 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거는 것은 자연, 자연도 말 대답 안해요. 그럼 뭐냐? 인간은 말을 거는 본인에게 답을 본인이 조작해서 만들어내죠.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을 건내요.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을 건냈죠. 말을 건냈을 때 이거는 보이스 피싱이에요.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버려요. 우리속에 틈을 만들어 내는거에요. 우리가 가짜인 것을 드러내기위해서 질문을 던지는겁니다. 베드로가 하는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정답아니에요? 정답이죠. 그 정답과 그 정답을 말한 당사자 베드로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무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없는데 베드로가 이걸 이야기 해요. 베드로는 착각을 해가지고 “내가 정답을 이야기 하다니. 저 합격이죠?” “아니야, 합격아니야. 이거는 니가 알게한 것은 너의 혈육이 아니야.” 갑자기 베드로의 조상까지 건들면서, “너는 그노선은 합격을 못해.” 그리고 그 정답이 나옵니다.
뭐냐하면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베드로가 베드로와 베드로 되기 사이에 불연속성이 성립되어야돼요. “나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된다. 피, 내가 존재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피흘리는 메시아여야된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말리죠. “우리가 있는한 그런일은 일어나서는 안되죠.” “아, 그런일 안일어나도록 우리가 조치하겠습니다. 그러면 그건 안되죠.”라고 했을 때 주님이 갑자기 베드로가 하다가 명칭이 바뀝니다. 뭐라고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로다.” 베드로를 문제삼는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나쁘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쳐봐야 고칠 수 없는 환경을 베드로를 통해서 환경 전체를 뜯어내는거에요. 완전 인테리어 업자입니다. “니가 속해 있는 환경 자체가 너로하여금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내뱉게 만든 환경 속에 니가 놓여있다”는거에요. 그 환경에서 니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누가복음 22장에 베드로보고 “시몬아 시몬아” 먼저 말을 걸죠.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내 형제를 굳게하라.”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내가 죽어도 그게 진짜를 이야기하니까 여기 가짜 베드로가, 베드로가 자기가 가짜인줄도 모르고 자기의 열심을 냅니다. “내가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하나 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환경을 본인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습니까? 돌파할 수 없죠. 돌파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는 본인과 본인 사이에 동질성이 아니고 불연속성이 개입되어야 나 베드로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어요. 지금 제가 질문이 뭐냐하면 이런 질문입니다. 여러분 질문을 저한테 해볼게요.
여러분들이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베드로가 구원받잖아요. 그럼 제 질문은 이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 안해주면 어떻게 합니까? 누가 답변해 보세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도했는데 만약에 예수님의 기도 명단에 내가 빠져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것 수능 킬러문항입니다. 이건 학원에서 특수학원에서 안가르쳐 주는거에요. 이거 어떻게할거에요? 수련회 참석해도 소용없어요. 기도 안해주면 내가 참석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기도 해줘야돼요. 기도 명단은 우리가 확보못합니다. 주님만 보시고 주님만 알고 있어요.
그 명단에 그 전화번호부에 내명단이 빠져있다면 나는 지금 헛짓하고있는거에요. 아찔한겁니다. 우짜면 좋아? What should I do? 나는 뭘해야돼? 내가 도대체 뭘 이태까지 따라왔는데 여기와서 다시 뒤돌아가야돼, 유턴해야돼? 어쩌면 좋겠어요? 뭔가 합격했다는 확인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증거가 “너는 합격이야” 이런식으로 오는게 아니에요. 그 증거가. 합격이 아니고 새로운 환경, 이중환경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겁니다.
내가 불합격이라는것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 불합격이라는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또다른 환경이 위에서 아래로 보는 새로운 환경이 이렇게 같이 겹쳐져 있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어떤 몇주전 설교에서 했죠. 봉한 샘이라고. 아래쪽있고 위쪽있고 볼록하니 봉한 샘. 밑에있고 위에 덮개있는 봉한 샘. 그 봉한 샘은 누가 이미 계시를 줬어요. 누가? 현철씨가. 손대면 톡하고 터질것만 같은. 봉숭아 사랑이죠. 터질것같은 봉한샘.
이중으로 겹쳐있어서 안에있어야 이게 진주같아요. 귀한 거에요. 우리가 귀하지 않아요. 겹쳐있는 이중구조의 그 환경이 귀해요. 환경 구조가. 그러면 나를 보기에는 나를 보면서 뭐냐? 덮혀있는 말씀의 뚜껑을 다시보는겁니다. 주께서 다 이뤘잖아요. 주께서 자기 기도대로 응답이 이루어졌고 나는 거기에 차이점을 발견한거에요. 차이성. 내가 백날해도 이거는 말짱 소용없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을 새삼스럽게 알 때 희락과 기쁨과 감사가 터져나와요. 이거는 말릴 수가 없어요.
환경에 갇혀있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 환경을 뭐라하느냐? 사랑이라고 하는겁니다. 그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사랑은 나 대상을 떠나지 않는게 사랑이거든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장소에 그 공간에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항상 얼쩡거릴 수 밖에 만드는 그 힘. 한 인간이 스토커 하듯이 미친 듯이 계속해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드라마요.
그처럼 남자입장에서 내가있는 것은 이거는 싫어. 그대 있음에 내가 존재하는거에요. 그대 있음에. 비로소 나는 그대 있음을 중심으로 놀 때 내존재가 새삼스럽게 파악이 되는걸 그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게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에베소서가 이게 어려운데 에베소서 1장 6절 다시봅시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되어있죠? 그다음에 무슨말이 나옵니까? “안에서”. 현재 우리는 뚜껑이 없으면 인간은 누구안에냐면, 상상한 내안에 살아요.
그런데 뚜껑이 하늘나라 이미 앉혀버리면 그 뚜껑이 있어버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살게됩니다. 그 사랑안에서 살고 주안에서 사는거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구원은 항상 조건이 붙어요. “예수안에서 너가 의인되었고, 예수 안에서 너가 영생을 얻었다.” 항상 나말고 다른존재, 나를 대체한 존재, 나를 대신한 존재. 너에대해서 일체 행함을 묻지 않고 너의 모든 죄를 말소 시키는 십자가 안에서 구원 되었기 때문에 니가 자랑하고 니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거든 여러분이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땅끝까지” 누구의 증인 되리라? 성령의 증인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하는 그 말씀이 성취된 결과로서 여러분들이 이 종말에 존재하고 있는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죠. 다시한번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스라엘과 봉한샘이죠.
새로운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스라엘, 그리고 구닥다리 옛날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이방민족들을 양쪽으로 덮는데 이 안에는 피가, 예수님이 죄사함으로 흘리는 피가 여기에 있어요. 피 안에 있어요. 피로 사귄다는 말은 요한일서에 나오니까 그건 찾지 않겠습니다. 여러번 했기 때문에. 피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귐이 있고,
이건뭐 헬라어 코이노니아라고는 하는데 골치아파요. 피 안에서 여기 있습니다. 전부다 피 안에 들어오면 죄인도 의인되는거죠. 왜냐하면 피안에는 모든 율법의 완성이 피로 이루어집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바로 그거거든요. 이게 뭐냐하면 이게바로 성전입니다. 성령 안에서 피 안에서 사는겁니다.
자, 3장 넘어가봅시다. 진도가 의외로 예상보다 빠릅니다. 3장에서 3장 9절에 보시면 이런말씀 나와요. 3장 9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려 하려하심이라.” 창세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이에요. 감추었던 비밀은 누구한테 함축되어있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안에 예수님의 존재안에 함축되어있어요. 존재안에 함축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존재 생각하는데 주님의 존재안에서는 뭐냐하면 여기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죠.
이 차이는 원래부터 율법을 줬을때는 원래 차이가 났었어요. 그 차이를 더욱더 분명하게 하는겁니다. 그래야 이중구조가 되기 때문에. 이중구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삼성그룹이나 뭐 대기업에 또는 공기업에 취직했다 했을 때 성도가 레이저에서 나오는 눈빛은 이 회사의 발전도 아니고 이세상 어떻게 잘되는가가 아니라 뭐냐하면 이게 왜 지옥이냐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는 환경속에 우리를 집어넣은거에요. 왜냐하면 이중구조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녀갔던게 필요해요.
이 경로를 경륜이라고 하는데, 프로세스, 과정, 어떤 과정을 끌고오는거에요. 구약때부터 과정이니까 점선나가겠습니다. 점선이 쭉 오는거에요. 드론이죠. 숨어있는 드론. 근데 여기서 인간들은 역사를 뭘로보느냐. 실선입니다. 실선과 무엇의 만남? 점선의 만남. 계속 비밀 비밀 비밀, 근데 이 비밀이 이스라엘 속에선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비밀이 드론이 중간중간 떨어뜨리면 여기서 무슨사건이 일어나냐 하면 언약 사건이 발생돼요. 언약 사건이.
언약 사건이 발생되면서 이스라엘은 점점더 어느쪽이냐,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여호와로부터 시작해서 뭐로 끝나요? 우상으로 해서 우상했다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잖아요. 우상. 우상은 다른말로하면 역사를 믿는거에요. 자기의 전통성 역사를 믿는겁니다. 시간을 믿는거에요.
여호와께서 이렇게 왔다면 예수님께서는 언약이 오는 것은 언약은 뭐를 끊는다? 언약은 역사를 끊어버린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의 등불, “너희들은 한발자국도 너희 자신으로부터 떠난 적이 없다.” 이게 교재 7페이지에 있어요. 아, 이게 어려운 이야기 나왔다. 7페이지 한번 봅시다. 위에서 세 번째. 자, 제가 설명을 해야될것같은 느낌이 들어요. 7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것. 이거는 인간의 상식을 깨죠.
내가 먼저있고 내가 누구한테 다쳤을 때 상처가 있잖아요. 이게 상식인데, 이 언약은 시간을 초월해서 있기 때문에 역사와 묵시가 언약이 만났을때는 역사가 되지만 역사 이전에는 창세전에부터 숨어있는 비밀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받았던 이스라엘에게 더욱더 가까이 어프로치(approach) 접근하면서 다가왔던거에요. 다가 오면서 이스라엘은 망해가고있는겁니다.
어떤 수퍼에갔는데 어떤 것은 풀이 파릇파릇한데 어느쪽은 풀이 다 말라 죽었어요. 왜그런지 이유를 보니까 어떤 사람이 염소를 거기다 뿌렸다는거에요. 염소를 뿌리면 그 장소만 어떻게 돼요? 시들시들 하죠. 거룩하신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접근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시들시들 누렇게 뜬거에요. 망해가고 있습니다. 망해가고있으면서 그들은 근근이 역사의 정통성을 쥐고있는거에요. 여러분보니까 지금 누렇게 떴어요. 복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쳤지 내가 이 자리에 왜 참석해? 이거없이도 다른 오락거리 있잖아. 다른 취미거리가 있는데 왜 참석하는거야? 그런 회의가 막 들지 않습니까? 돈도 안되는데 이짓을 왜해요. 돈도 안되는데. 귤이나까먹고 이게. 이짓을 왜하는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합니까? “하지마. 니가 안할 수 있는 자신있거든 하지마. 안하면 될거아니야 너한테 자유의지가 있잖아. 하지마.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잖아. 인간은 의지의 존재라고.” 니체한테 그렇게 배웠지요. 인간은 초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시편 49편 20절에, 하여튼 이 언약은 사람을 개무시하는데 주특기를 가지고 있어요.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뭐같다?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이 말은 “깨달아라. 그러면 짐승 안해줄게”가 아니라 깨달을 위인은 아무도 없고 내가 너희를 짐승 다루듯이 다루는 정당성을 주께서 미리 던지는 거에요. “너희 짐승 취급해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 언약이 풀들을 바짝 말라죽게하는 독한 언약이 이미 너희들속에 이스라엘을 대표적으로 내가 찾아왔다.” 점점더 가까이오는거에요. 이스라엘이.
그러면 언약을 하면서 그들로 어떻게 한다? 아까 봤지만 죄와 허물을 그들에게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죄와 허물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추어진 창세전의 비밀을 알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는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아는상식에서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우상을 섬겼다는 말은 우상이 어느신입니까? 질문을 연속하면서 우리가 이해합시다. 우상은 이스라엘이 섬긴거에요 이방인이 섬긴거에요? 이방인이 섬겼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없는게 있어요. 이스라엘은 여호와 밖에없지만 이방나라가 견지하고 유지하는 것은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힘이 있어요. 권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건성으로 여호와 여호와 하지만 내심 이스라엘은 뭐를 기대하고 뭐를 부러워했던거에요? 세상 권력이었습니다. 권력하면서 드디어 역사에 실체가 역사라는 환경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에 비밀에 대적적인 위치에 있음을 이스라엘을 대표로 까발리는 기능을 이스라엘이 그동안 해 왔던 겁니다. 망하고 망하면서 이스라엘 망했다면 어느누구도 안망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죠.
그다음에 11절에보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것이라”하죠. 예정하신 뜻대로 할 때, 이 예정하신 뜻에서 뭐가 빠지느냐? 우리 자신이 여기서 빠져요. 예정하신 뜻은 누굴 택했는가? 예정하신 뜻은 예수님께 국한됩니다. 예수님뿐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선택했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정했습니다. 이걸 이야기해가지고 욕 되게먹은 신학자가 있어요. 유명한 칼바르트라는 신학자입니다.
이걸 사람들은 이중 선택설이라고해요. 폭포가 두 번떨어지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한 폭포 떨어지고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떨어져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한겁니다. 이 말은 칼빈은 폭포가 하나밖에 없어요. 한번적어볼게요. 중요한거니까.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 이렇게되는거에요.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을 했다. 이러면 우리를 크게해버리면 여기 우리에 동질성이 그대로 있어요 안그러면 불연속됩니까? 우리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칼빈이 이걸가지고 이게바로 유대교의 예정론이에요. 유대교의 선택설이고 현재 이슬람의 선택설이에요. 알라신은 우리를 선택했다는거에요.
불연속점,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은 불연속적이에요. 그런데 ‘나’가 죽는게 아니고 죽을 뻔 까지 죽음 직전까지 간다는겁니다. 그러면 살려준다???ㄴ 겁니다. 구라도 구라도 칼빈이 정말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정통 개혁주의에서는 이게 완전 교주급아닙니까? 이런 불신앙을 드러낸거에요. 안들킬려고 애를썼지만 결국 드러낸겁니다. 그럼 칼바르트를 봅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했고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 20절인가 거기에 근거해가지고 예수님이 자기를 원하는자를 선택했다는거에요. 아, 이게 선택론 이거는 시간가도 못지나가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요한복음 5장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버지가 날 선택한것처럼 이제는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 있지만 그 선택 권한을 누구한테 인계했다? 예수님께서 내가 사람을 선택해서 건진다는거에요. 폭포가 예수님 한번거치고 또 이렇게 내려오는겁니다.
이상하게 맞을것같은 느낌 들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는건 뭐를 지금 빠뜨리느냐 하면 바로 예수안에서라는 말을 이걸 칼바르트가 무슨뜻인지를 몰라요. 예수 안에서를 몰라요. 칼바르트 정신이 지금 어디에 팔려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데, 그냥 구원받는게 아니라 예정되어서 구원받는가?”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이걸 거쳐가는 것으로 보는거에요.
마지막 최종 종점이 역시 나 구원으로 도착된다는점은 칼빈이나 칼바르트나 똑같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선택할 때 최종 종점이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으로 돌아가기위한 고무줄처럼 잡아 당기기 위한 예정이되는거에요.
주님께서는 선택을 우리 인간을 다룰때는 예수님이 동일하게 인간이 되셨다는 그 공로를 인정해서 우리의 선택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선택했다는 쪽으로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예정해서 구원한거에요. 이게 무슨뜻인지 모르면 나도몰라. 더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내 안에,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안에서 구원한게 아니고 내 안을 포기하면서 까지 예수안에서 우리를 예수안에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신거에요. 끝. 더 이상 어떻게 뭐... 그래야 예수님 증거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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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겨울수련회 에베소서강해 제 7강 : 사랑을 입은 자 - 이 근호 목사
환경을 바꾸는 전쟁. 그 환경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에베소서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의 원래 사랑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내 속성 중에 하나로 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은 환경으로 적합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의 개체로서 개체적인 사랑을 대신해서 예수님이라는 개체에서 뽑아내는 사랑이 마그마가 화산에서 퍼져 나오듯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 세상을 사랑이 침투합니다. 새로운 천국이 기존 천국에 침투해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하죠. 그것을 우리는 ‘환경’ 또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환경이 되어버리면 이런 일을 해도 사랑이 되고 저런 일을 해도 사랑이 되고 어디를 가도 거기서 사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환경을 표현할 때는 ‘사랑하라’가 아니라 ‘너희가 사랑 가운데 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걸 달리 표현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3:17)” 3:18-19절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표현해요. 뭐를? 사랑을. 새로운 환경을.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 거기서 내 사랑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했다, 미워했다’ 자체를 무의미하게 지워버리는 방법은, 너 사랑 말고 너라는 개체 말고 다른 개체에서 쏟아져서 우리에게 환경으로 바뀌어지는 그 사랑이라는 환경, 그 사랑의 맛에 우리가 폭우에 소낙비에 흠뻑 젖듯이 확 젖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욕조 또는 장충 체육관 같은 새로운 환경이 되면서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랑 안에서 자라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4:13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15절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했어요. 사랑 안에서.
여기에 적절한 비유가 있어요. 중력이 없는 우주선 내부의 무중력 상태에서 그 안에 우주인들이 늘 느끼는 것은 무중력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그 폭이에요. 무중력 안에 뿌리가 박히고 무중력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무중력 자체를 알면서 그 안에서 헤엄치면서 무중력의 극한까지 자라난다는 거예요.
에베소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환경 자체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이미 완료된 환경, 시공간을 초월한 환경, 모든 게 완료된 환경. 그러면 성도가 할 것은 이미 주어진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면 되죠. 사랑을.
그러면 아까 했던 문장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묻죠. 그럼 사랑 안에서는 뭐냐? “들어와!” 드디어 허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3:20절에 나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두드리면 네가 나와 함께 먹고 마시는 거예요. 그럴 때 ‘내가 주와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주님 혼자 만드신 사랑 안에 내가 합류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자, 이 사랑을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나열하는지 이것은 빨리 한번 보면 돼요. 에베소서 4: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16절에 “사랑 안에서”, 그다음 5:1절에 “사랑을 입은 자녀” 사랑이 덮쳤다는 거예요. 2절에 “너희도 사랑 가운데”, 그다음 5:28절에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사랑 나오죠,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이렇게 사랑이 나와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안에서 계속 우리가 즐겁게 새로운 사랑을 만끽하면서 운행하는 겁니다.
이 모든 사랑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그 관계가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결과로 생긴 거예요. 율법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율법을 완성하게 되면, 구약 신명기 28장에 율법대로 지키면 뭐가 온다 했습니까? 복이 오죠. 율법을 만약 어겨버리면 뭐가 옵니까? 저주가 오죠. 율법대로 지키면 복이 온다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새 언약에 의해서 율법을 완성했을 때 사랑이 옵니다.
율법 완성을 누가 했습니까? 우리가 했습니까? 아니죠. 우리가 안 했죠. 정말 중요한 거예요. 내가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나 말고 다른 분이 한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헤엄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무중력 상태처럼. 사랑을 만끽하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늘 기도하면서 물으세요. “주님, 이것까지도 사랑입니까?” “그것까지도 사랑이다.” “왜요?” “들어와! ‘들어와’가 됐으니까.” 너 말고 들어와! 가 돼요. ‘네 안에 들어오너라’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시비 걸던 마귀가 우리하고 싸우려고 하는데 닭 좇던 개 꼴이 된 거예요, 악마가. 용서받아서 사랑 안에 있어버리니까 더 이상 율법가지고 우리한테 장난칠 수가 없어요. “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 많은 거 알지?” 그때 우리의 답변은 뭡니까? “그래.” “그럼 너 지금껏 살아온 거 다 허사고 나중에 탈락되는 거 알지?” “그래.” “그럼 넌 지옥 가는 거야.” “오케이.” 아, 이 ‘오케이’가 돼야 되는데. ‘아니야, 그건 아니지’ 이렇게 되면 벌써 이건 곤란해요.
여러분 한번 보세요. 참 이게 재밌어요. 나 혼자 재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뭐든지 행위를 해요. 배고파서 밥을 먹는다고요. 밥을 먹는 행위가 끝나고 난 뒤 그다음 행위가 ‘누가 행했지?’가 돼요. 방금 누가 행했지? 거기에 이미 사라진 ‘나’가 등장해요. 내가 행했다. 내가 행했으면 여기서 ‘제대로 했을까? 내가 바르게 행동했을까?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게 아니었는데.’ 뭐 이런 식으로… 실컷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어떻고 저떻고 했는데, 어떤 행위를 하고 난 뒤에 그 행위에 내 의식이 가미가 되니까 졸지에 ‘사랑 안에서’가 아니라 또 도로 ‘내 안’으로 사랑 안에서 이탈된 느낌을 우리가 받게 됩니다. ‘제대로 해야 되는데. 주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구원받아놓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수야.’ 하고 다시 자기에 대해서 갑자기 비판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이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컴퓨터에게 ‘너’라고 이야기합니까? 한번 답변해보세요. 컴퓨터보고 너라고 이야기해요, 안 해요? 안하죠. 왜 안합니까? 컴퓨터가 기계기 때문이에요. 기계한테는 너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여서 하나의 기계로 만들어버렸어요. 기계로 만든다 하니까 기존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떻고 거기에 물든 사람들은 상투적으로 내뱉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기계야? 우리가 로봇이야?” 이렇게 나와요.
한번 볼게요. 인간이 기계가 돼요. 인간이 기계가 되면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없어요. 나라는 인간이 기계가 되면, 기계한테는 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기계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데 이 기계를 어디에 집어넣는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사랑으로 율법을 다 이루었던 오직 복음만 주어진 여기에 넣어버리면 인간이 기계가 되는 동시에 기계가 아들이 됩니다.
아들 되는 조건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들이 돼요. 아들이 되면 이것은 주님 전쟁의 무기가 됩니다. 무기가 될 때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계라고 하지는 않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를께 뭐라고 하든지’ 이승기가 불렀던 <내 여자라니까> 노래 가사에 나와요. 이제는 너를 누나라 하지 않고 너라고 부를께. 너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왜? 주님의 동생이니까. 주님은 맏이고.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8:29)”. 맏아들 되기 위해서 ‘형상’이라는 공유적 관계에 있어요. 나도 하나님의 형상, 너도 하나님의 형상. 이러면 로봇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주님과의 패밀리, 가족이 되는 겁니다. 가족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무기가 됩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 여자라니까~ 신랑 되시는 주님이. 그러니까 이승기 노래가 얼마나 복음적인지요. 나는 신랑, 너는 나의 그냥 신부가 아니고 수많은 신부 가운데 하나. 신부들 중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게 되고 그 남편 주위를 떠나지 않죠.
그렇게 되면 남편 일과 연속성을 가지면서 남편 하는 일이 마귀와의 전쟁이라면, 주님께서 전에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지게 되면 이제는 주님을 대용한 새로운 작은 주님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가 출현하는 겁니다.
성도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연속성을 주장하지만 성도 안에는 불연속성이 내재되어 있어요. 불연속성이. 이 불연속성 빼내버리면 전부다 헛바람 듭니다.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 나 죄인이야. 내 죄는 내 행함으로 안 돼. 주께서 오셔서 내 죄를 사해줘야 돼.’ 그런데 그다음 마음이 수상하게 흘러갑니다. ‘그런데 사하고 난 뒤에 내 존재의 의미 가치는 어떻게 회복될까?’ 이렇게 하거든요.
그걸 가지고 회복신학, 통일교 신학이라 합니다. 통일교에요. 어떻게 회복될까? 갑자기 욕심이 나면서 잠시 죽은 척하면서 내가 원래 노렸던 의미 있는 나는 주님의 도움으로서 어떻게 흘러가서 마지막 결과가 ‘그래, 이거지. 그래, 이거야.’ 이렇게 될 것을 우리는 성급하게 노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날아가 버려요? 불연속성이 날아가 버렸어요. 겸손한 척 했는데, 단절되는 척을 했는데, 단절될까 될까 하다가 이게 안 끊어지고 뭔가 이어져가요. 세상의 모든 종교, 힌두교부터 해서 모든 종교, 불교, 특히 소승 불교 같은 경우에 대표적으로 그 논리를 폅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됩니다.” “그래. 스님, 그다음 이야기는 뭡니까?” “욕심을 버리면 우리는 해탈합니다.” “바로 그거지. 바로 그거야.” 내가 원했던 것. 결국 악마가 너는 신처럼 되리라 하는 그것이 우여곡절 많았지만 결국은 그래, 해냈어. 해냈다고. 안 노리는 척했는데 은근히 노렸어. 드디어 달성했다는 것.
이 불연속성이라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럼 이 불연속성을 살리고, 연속성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우리가 나의 존재 가치가 아니라 성도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스라엘로 무기로 싸우는가?
일단 주님은 안 보입니다. 구약 때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 분이 보이는 분을 진두지휘하는 것.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 자기 것으로 할 게 없을 때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모세 믿자,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런데 어느새 자기가 얼추 약속의 땅도 차지했겠다. 소유권 등록 해놨겠다. 내 노동으로 살면 되겠다 싶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은 완전히 포기해버려요.
그래서 광야에 있을 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식으로 나타낸 게 모세가 든 지팡이였습니다. 전쟁은 주님이 하시는데 나타난 것은 모세가 든 지팡이. 모세가 든 지팡이였어요. 그럼 문제는 여기서 모세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모세가 죽으면 후계자 있겠지. 그럼 여기서 문제가 더 심화되고 심각하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식으로 나타날 때 지팡이와 여호수아라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보이지 않음을 더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징후가 되겠습니까? 징표가 되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1번-지팡이, 2번-사람, 어느 쪽이겠어요?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누가 봐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팡이 보면서 인간은 나라는 인간을 부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 나는 아니야.’가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은 아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수아가 등장하니까 여호수아의 생애, 여호수아가 봤던 책, 여호수아 출신 학교, 그다음부터는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너 쓰면 나도 쓰시겠지. 너는 나한테 너 알고 있는 지식이나 나열해. 풀어.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어. 갑자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제는 같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나서버려요.
여호수아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집안의 혼사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나섰잖아요. 흑인 여자는 안돼. 구스 여인은 안돼. 우리 올케로서 안돼. 내 남동생 부인으로서 안돼. 우리 족보가 어떤 족본데. 구스가 이방이거든요. 이방여인이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나 여호와는 너희에게 이방인 아니야?”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모세라고 해서 특혜 없습니다. 그 미리암 누나가 찬양대를 인도했던 찬양 여자대장이 문둥병자가 되어서 격리조치에 들어갔습니다. 모세 집안의 복이라고 알면 돼요.
인간에서 기계 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선 안돼요. 그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내가 성도되었다는 것과 내가 인간되었다는 사이에 무엇이 놓여있습니까, 중간에? 기계. 컴퓨터보고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 성도되었잖아요. 그런데 성도되었다고 다시 인간 대우 받으려고 뒤로 막 갈 수 있습니까? 갈 수 있어요? 문워크 한번 할까요, 마이클 잭슨처럼?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거 가려면 사랑을 취소해야 돼요. 사랑은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만 두질 않습니다.
그럼 아들을 어떻게 무기 삼는가? 아들에게 그냥 네가 알아서 전쟁하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 있으면 그 안에 아들에게 자리를 부여합니다. 위치를 부여해요.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이 자리는 초월적 자리에요. 뭐를 건너온 겁니까? 기계였는데 아들 되었다. 기계는 사람도 아니죠. 사람도 아닌데 아들 되었다면 이 자리는 사랑이 되는 거예요.
사랑에서 뽑아내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뽑아내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어느 것 하나 사랑 아닌 게 없어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뒤로 돌아 뒤태를 보자.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판소리 춘향가에 나오는 사랑가처럼 일부는 사랑스럽고 일부는 미운 게 아니고, 사랑 안에서 통째로 다 사랑이에요. 채소에 설탕 입힌 걸 뭐라고 합니까? 과일에 설탕 입힌 거, 탕후루.
그래서 성도를 누가 건드리면, 성도가 무기거든요, 눈에 보이는 무기입니다, 주님은 눈에 안보여요, 건드리면 성도가 있는 자리에 침범한 게 되어가지고 누가 가만있지 않느냐 하면 주님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야기죠.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5:10)” 성도를 건드리면 주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사랑의 반대말이 저주고 미움이거든요. 주님께서는 성도를 건드려서 그쪽으로 하여금 너는 지옥의 자리에 있음을 노출시키는 계기로서 성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이정도만 해도 사실 에베소서 끝났어요. 사실은. 에베소서 끝났는데 남아있는 게 응용문제거든요. 자, 제가 기존의 에베소서 해석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2장, 3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이론,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4장 1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부터는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행위로 실천적으로 옮기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5장 1절에,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면 값을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분이 나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사하시면 여러분들은 성도입니다.” 이런 해석이 그냥 모든 주석책마다 다 나와요.
이거 지금 성도보고 할 소리가 아니고 마귀가 인간보고 할 소리에요. “너 성경 읽었잖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지 너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 “말씀대로 실천해야지. 구약 이스라엘 봐. 그땐 그들이 자기 행함으로 실천하려 했는데 이제 너는 성령까지 받았잖아. 그거 써먹어야 될 거 아니야. 받은 성령가지고 이제는 새 사람 되어서 그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이게 하나님의 진리, 그 이하 이상도 아니야. 그게 전부야. 오케이? 유 노?”
지옥이나 가라. 뭐로 돌아왔어요, 갑자기? 중간에 갑자기 문워크 했어요? 어떻습니까? 성도 근처도 안 갔습니다. 성도 근처도 간 적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막 성령 도입하고요. ‘그러므로’ 도입하고 온갖 것 도입했는데, 인간입니다. 사람이 사람 대우받으려는 그 생각을 포기 못했습니다.
실정은 이렇습니다. 실정은 환경 바꾸기에요. 환경을 바꿔버려요. 어떤 환경이냐 하면 가정환경이라는 사랑. 사랑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사랑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단독행위로 형성된 환경이에요. 환경인데 이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정환경으로 바뀌어요.
그것이 에베소서 5:22절에 나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이렇게 돼요. 환경이라는 거예요. 그다음 6장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역시 부모 자식 간에 사랑이라는 환경입니다. 그다음 6:5절에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직장, 노동현장 속이라는 자체가 거기서 사랑을 접촉하고 느끼는 환경임을 주께서 확인시켜 줍니다.
가정도 전쟁터요, 부부 사이도 전쟁터요, 직장도 새로운 봉한 샘으로서 위에 뚜껑 이중 구조로 되어있는 현실세계 안에서 생겨난 바로 사랑이라는 환경이 그동안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면서 얼마나 많은 치열한 적과 함께 영적 전쟁했는가를 이제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같이 체험에 동참케 하는 거예요. 이미 주님은 머리가 되었고 그 머리되시는 분이 아시는 사랑을 가정이라든지 직장이라든지 혹은 부부관계 속에서 그걸 살아있으면서 많이 접촉케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납득하기 곤란하죠. 잠시 바둑강좌가 시작됩니다. 바둑은 가로 19줄, 세로 19줄로 되어 있는데 바둑의 특징이 흑돌이든 백돌이든 한 돌이 놓이게 되면 그 돌이라는 자체적인 무게, 질량, 크기 전부다 제로입니다. 수학에서 점(point)처럼. 위치만 표시하는 것이 바둑돌의 입장이에요. 그럼 위치니까 이건 죽은 거잖아. 위치니까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 예. 살아있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이 다녀가서 만든 사랑의 장소거든요. 사랑의 장소가 악이 없는 게 아니에요. 악이 득실대면서도 사랑은 그대로 살아있을 때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 속에서도 버텨야 그게 천국이에요. ‘지옥은 가라. 우리끼리만.’ 아니에요. 그거 천국 아니에요. 천국이 배태되고 탄생된 그 환경이 보존되어야 돼요.
거기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겼어요. 심판을 이겼다는 거예요. 심판을 이겼다는 것을 사랑이 증명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쏘아대는 심판의 화살을 우리가 만끽하면서 내가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사랑을 더욱더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돼요. 그러니 주변에 고소하고 고발하는 자들이 좀 있어줘야 돼요. 심심하게 살면 곤란하죠.
(바둑판에서) 흑돌이 놓인 위치가 있는데 그 주변에 백돌의 공격이 들어와요. 그렇게 흑돌 사방을 백돌이 포위하는 거예요. 바둑은 위치로 포위해서 그 위치 안에 있는 돌을 잡아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내 집이 되는 게임이 바둑입니다. 백돌이 사방을 둘러싸면 흑돌이 또 한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럼 백돌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요. 상대의 돌이 완전히 둘러싸기 바로 전 상태를 ‘아다리(アタリ)’라고 해요, 일본말로. 너 안 놓으면 내가 여기 있는 너 잡아낸다. 그러면 (활로를 넓혀) 도망치잖아요. 바둑에서 이렇게 몰아세우는 것을 ‘축(逐)’이라고 합니다. 축의 특징은 그 종말이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백날 해봐야 너는 잡힌다는 겁니다.
실제로 바둑 두면서 중앙점이 있고 사방까지 해서 아홉 개의 점들이 있습니다. 바둑판 한쪽 편에서 몰아세우는 게 있다면, 축이라는 것은 백날 가봐야 결국 잡히는 게 축이라 했잖아요, 다른 한편에 자기 축이 있어서 적을 몰고 갑니다. 몰고 갈 때 이걸 미리 놔보는 게 아니고 보면서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연세가 많은 분들은 젊을 땐 ‘이거 축이네.’ 보이는데, 연세가 들면 야, 이게 종말이 끝났는지, 아니면 내가 착각해서 이게 탈출구가 있는지 막 헷갈리게 됩니다. 그럼 상대방이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어?” 이러거든요. 그럼 더 조급한 거예요. 마음이 조급해져서 ‘에라이, 두자.’해서 두면 ‘아, 내가 또 착각했구나.’ 이렇게 된단 말이죠.
몰아세웁니다. 이 멀리 있는 점에서 과연 될지 안 될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저 멀리 한 켠에 있는 축을 중앙점 근처에 옮겨놓으면 가깝잖아요. 가까우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바둑5단 수준 되어야 아는 비법이에요. 아하! 그러니까 주님이 바둑판 코너 쪽에 있다면 주님이 중앙점 근처로 성도를 이 앞에 딱 두는 거예요.
가봤자 너는 죽었어. 네가 나를 고발해? 이건 주님의 사랑에 대한 모독이야. 고발해. 고발하면 할수록 주님이 주신 사랑이 적이 있음으로써 더욱 빛나게 되죠. 아, 내가 몰랐던 사랑이 새롭게 느껴지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뭐로? 결혼을 통해서. 결혼 안했으면 그 가정을 통해서. 그러면 결혼해서 깨지면 그 자식을 통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자체적인 몸무게가 어떻고 키가 어떻고 필요 없어요. 그냥 위치가 중요한데 그 위치는 이미 다 이루어진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환경적으로 이 환경 안에 필요한 위치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 위치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때그때마다 위치가 상황이 바뀌게 되면 전에 싸우던 비(非)-복음과는 다른 방식의 비-복음이 또 나오는 겁니다. 계속 우리 자아를 자극해요.
네가 전에는 신앙생활 좀 하더니 복음 알고 난 뒤에는 기도시간이 확 줄어가지고 전에는 두 시간씩 하더니만 이제는 10초 하면 할 게 없는 걸로 바뀌었잖아. 너 도대체 자신감이 어디서 생겼어? 네가 이렇게 해서 되겠어? 이래가지고 되겠는지 네가 생각해봐. 자꾸, 네가 생각해 봐.
왜 우리가 우리를 생각합니까? 그런데 그것도 말려든다고요, 또. ‘그래, 내가 생각해보니 이건 좀 분발이 필요하네.’ 분발해서 뭐 할 건데요? 하늘의 별 딸 거예요? 그러나 막상 당하면 다시 우리는 성도에서 어디로 돌아갑니까? 중간에 기계과정 다 생략하고 ‘그래, 나는 성도답게 살아야지.’ 또 이상한 생각이 막 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께서 환경을 또 바꿔줘요. 이게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바뀌어요. 유기물로 바뀌거든요. 118가지의 원소가 있는데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계속해서 자기 위치를 자기가 결정하려고 합니다. 아, 치명적인 비-복음이죠. 과학에서 그렇게 해요.
인간은 뭐를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이 유기물질에서 진화되었다 하는데 그러면 유기물이 되기 전에 118가지 원소에서 어떻게 해서 유기물이 나왔지?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이 뭔지를 인간은 생각해요. 그리고 그 증거를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증거를 찾았다 해가지고 뭐 '네이쳐(Nature)'지에 올리고 하죠. 죽은 광물이 서서히 꼼지락 꼼지락거리면 살아있는 걸로 바뀌는 것을 산호초에서 발견하고 플랑크톤에서 발견하고 뭐 하여튼 난리도 아니에요. ‘인공으로 만든 박테리아는 드디어 스스로 자기복제가 가능하다’ 이런 논문들을 발표하는 거예요.
왜 그런 짓합니까? 내 위치를 내가 정하고 싶은 거예요. 내 위치를 내가 정하면 어떤 과정이 생략되는 거예요? 나는 주께서 너라고 불러줄 가치도 없는 하나의 죽은 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락하는 거예요. 꼼지락거리든 어쨌든 간에 뭔가 내가 인간으로서 나가 있다면, 그 나를 소급해서 내가 ‘없었다’와 ‘있다’의 경계선을 누가 정하고 싶어 해요? 내가 정하고 싶은 거예요. 아, 여기서부터는 내가 무기물이고 하나의 광물이고 여기서부터는 꼼지락거리고 생명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있으니까 그걸 생명이라 하자.
이것이 오늘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외부환경이 내부환경으로 번져요. 이렇게 되면 사랑 안에서 사랑이 내부환경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말씀이라는 외부가 이 내부에서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죠. 그 과정에 답습하는 자기 위치를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요. 어디 안에서? 부부 관계에서, 가정 속에서, 직장을 통해서, 삶의 환경을 통해서요.
그러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는 태어나기도 전을 예상도 못했는데 이미 영적 전쟁터에 우리가 놓여지게 된 거예요. 영적 전쟁터에. 그래서 제목을 제가 <영적 싸움>이라 했고 그 근거는 에베소서 6장에 있습니다. 6:12절에 보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씨름은”
씨름이란 단어가 아주 적절한데 씨름이라 하니까 갑자기 뭐가 생각납니까? 얍복강에서 야곱과 하나님의 사자가 씨름하죠. 이걸 신약적 관점에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싸운 거예요. 내가 진짜 나하고 싸워서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은 그동안 악마의 환경에 속한 하나님이 거부하는 나였음을 얍복 강가의 씨름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 나가 진짜 될 때는 복을 받아야 돼요. 복을 받는 과정이 뭐냐? 너를 죽여주는 게 복이고요. 죽은 그것을 재료로 해서 거기서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의 형상이 거기서 나올 때, 브니엘(Пенуэл), 생명이라는 게 나올 때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생명의 담지자(擔持者)’라 합니다.
생명의 담지자란 표현은 잘 쓰지 않는 단어인데 담지자는 한자말입니다. 운반체, USB, 외장하드 이렇게 보면 돼요. 그 사람이 어딜 가도 그 안에 그리스도가 같이 가는 것. 씨름이 있는데 그 씨름이 사랑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그 야곱의 씨름으로 말미암아 낳은 열두 아들이 이런 한 가족의 식구가 아니고 하나의 국가가 태동하는 원천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하는 씨름은 야곱이 했을까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 했잖아요, 구약 때는. 신약에 오면 이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을 상대로 해서 씨름을 한 거예요. 그래서 야곱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야곱이 이겼어요, 천사가 이겼어요? 천사가 급습을 해서 한방 맞고 쓰러졌죠.
이게 신약에 오면 인간이 이기고 예수님이 패배한 거예요. 해석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누가 죽어요?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는 거예요. 인간에게 맞아죽는 거예요. 맞아죽으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기대 걸 위치가 없음이 확정됩니다. ‘버리자. 이 세상 불태우자. 버리자.’ 가 돼요.
그런데 죽을 때 예수님이 패배했는데 패배함으로써 승리한 게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마귀가 승리하고 인간이 승리했지만 신약에서는 그걸 ‘언약이 승리했다’고 해요. 언약이 승리한 결과가 우리에게 난데없는, 얼토당토 않는, 뭘 해도 사랑이 되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새로운 환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스카이돔 시스템’이라고 하죠. 패트리어트 방어 시스템. 성주에 있어요. 이미지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지상에 빌딩이 있고 사람 있고 나무가 있다면 공중에 보이지 않는 방어체제가 형성되어서 바깥에서 드론이든 뭐가 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다 파괴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사랑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전부 다 안, 안, 안, 안, 전부 다 안에 있어요. 여기에 개인은 없어요. 돔 안에는 하나의 가족이 있어요. 나를 위한 구원은 애초부터 이 안에서는 성립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랑이 무기가 되는가? 우리는 환경가지고 싸우기 때문에 무기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싸우는 게 아니고 나를 둘러싼 패트리어트 돔, 돔 시스템, 방어체제 이것 때문에 우리는 무기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이 말씀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노래방에서 질리지 않는 노래만 부르지 말고 이런 것도 한번 보세요. 8: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자, 우리가 공부한 것이 허사인지 한번 봅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할 때, 하나님이 뭘 선택했는가? 제가 정답 드리겠습니다. ‘예수 안’을 선택한 거예요. 예수 안. 예수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선택함으로써 예수 안이 형성되었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이것이 에베소서 1:4절에 ‘창세 전에 예정하사’ 우리를 예수 안에서 선택한 거예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어려운 이 에베소서가 너무나 쉽지 않습니까? 굉장히 쉽거든요. 에베소서 4장으로 한번 넘어가봅시다. 이제 이것을 현장에 적용시켜봅니다. 4:16절에,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그다음에 뭐 나옵니까? 목적이 뭐에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죠. 사랑 안에서.
그러면 그 구체적인 예가 25절, 26절 계속 나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게 뭡니까? 주님께서 이 경우를 다 해결했던 것 속에 네가 놓여있기 때문에 성도는 ‘도대체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할 때, 바로 이런 것들을 해결해주시는 거예요.
하나 예를 들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여기에 대해서 옛날 내가 나의 전쟁에서 내가 주인공으로서 마귀와 싸운다면 우리는 분을 품되 서쪽을 향해 시계를 보면서 일기예보에서 미리 확인한 일몰시각을 계속 체크해야 돼요. 참아야 돼.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 참다가, 해가 넘어가면 분을 품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는 율법적으로 살기 때문에.
사랑은 환경은 일을 벌이고 난 뒤에 통보하는 거예요. 통보하는 것. ‘해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할 때 해 지고 말고… 성나는데 해 질 때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시간이 몇 시인지 관계없이 그냥 분을 내죠. 그게 인간이었어요.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인데 그다음 인간이 기계로 바뀌어요. 이건 인간도 아니에요. 기계로 바뀌어요. 기계로 바뀌었다가 기계에 불연속성을 가미해서 뭐로 바뀝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니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 몽땅 사랑이었다는 거예요.
주님 주신 은혜요 선물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며 다시 이걸 보는 거예요. 보게 되면 이 사랑 안에 있다는 것, 환경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분낼 거 또 없어요? 해지든 말든 또 성질 낼 것 없습니까?”
그럼 주님께서 에베소서 5:22절 준비했습니다. “있지. 왜 없겠어. 결혼해봐. 해 지고 말고 없어. 결혼할 때 자, 네가 어떤 환경에 있는지 내가 보여줄게.”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내들이여” 잠시 남편은 귀 막고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세상에, 이 소리 듣고 해가 지든 말든 화를 안 낼 위인이 없습니다.
남편도 뭐 존경이고 사랑을 해야…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하죠. 노름하고 노는 놈팽이 그걸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 자식 다 팽개치고. 남편한테 가서 “주님” “왜?” “지금 내가 보니까 노름빚을 져서 한 달에 한 200만원 모자라는데 통 큰 여자라서 노름 계속하세요.” “아이고, 여자 대단하네. 너 왜 그러는데?” “주께 하듯 하라고 했으니까. 주께 받은 월급을 통째로 당신 도박자금으로 내가 대겠습니다.” 이게 굉장히 감사한 일이에요, 아니면 화딱지가 날 일입니까. 이걸 누가 실천에 옮깁니까? 옮기질 못하죠.
그럼 어떻게 하는가? 소급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저지레하는 남편을 보고 화내는 게 쉽죠. ‘내 남편은 그럴 일 없어. 내 남편은 너무 착해.’ 하는데 일 벌였을 때 그때 감사와 고마움은 다 날아가고, 오늘 너 죽었다. 일단 오늘 성도 접는다. 성도 접고 에베소서 5장 22절 나는 모른척하고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나 이렇게 더는 못 산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그때 얍삽한, 수련회 참석한 남편이 눈치코치도 없이 에베소서 5장 22절 들고 옵니다. 그때 화난 아내가 성경책 집어던집니다.
이게 주님에 대한 핍박이에요. 이게 주님에 대한 핍박이거든요. 예수는 가라 해. 아이고,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막 이렇게 하는 거예요. 사랑의 깊이를 새롭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부부 가정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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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겨울수련회 에베소서강해 제 8강 : 막 - 이 근호 목사
생물학에서 ‘살아있다’라는 것을 보통 확인하는 방법은 막입니다. 경계. 경계막. 막이 어떻게 사라지고 사라진 막이 어떻게 새로 생성되는가. 인간의 언어로 자연현상을 제대로 표현 못해요. 세포막이든지 분열하면서 희미해졌던 막이 새로 다시 생길 때 사람들은 굉장히 난처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막이 나의 막인지, 아니면 내가 막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건지 그게 모호한 거예요. 내게 필요해서 막이 생긴 건지, 막이 막 되기 위해서인지.
막이라는 것은 경계선이거든요, 이것까지만 오고 이것부터는 오지마세요, 경계선이란 말이죠. 사랑의 막도 마찬가지죠. 사랑의 막이 나를 위함인지 아니면 사랑 자체를 위해서 막이 생겼고 막이 사랑이라는 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막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포로서 합류하게 하는지 그러한 인식의 차이를 분명히 우리가 해줘야 됩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렇습니다. 말씀만 살아있어요. 이것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유명한 말씀인데 제가 확인해드리겠습니다. 40:6-8절까지,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걸 방금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언급한 ‘막’을 동원하면 “모든 육체는 막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막의 꽃 같으니 풀(막)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막)이로다 풀은 마르고 막(꽃)은 다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있었는데 사라지고 있어도 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어디에 대한 봉사냐? ‘진정한 막은 예수님에 의해서 형성된,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가름하는 지옥과 천국의 막을 형성하고, 막을 형성하는 세포로서 우리를 소환했다, 호출했다’ 이렇게 보는 게 좋아요.
그렇다면 다시 에베소서 갑시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에베소서를 한꺼번에 다 이해하자는 거예요. 한꺼번에. 그럼 에베소서 5장을 한번 봅시다. 에베소서 5장에서 하는 말이 여기 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되어 있죠. 이것이 바로 말씀 완성이죠. 그럼 말씀 완성을 위해서 막이 필요하죠. 막이 필요하다면 막 기능을 하는 나의 자아성은 어떻게 됩니까? 나의 기능성은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만을 위해서 여기서 자아를 버려야 돼요.
그럼 그 자아의 내막이 뭐냐? 여기 등장하는 모든 것이 우리 자아에게 해당되는 요소입니다. 4절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또 3절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이건 다 어디서 나온 거죠? 주님께서 육신이 되면서 느꼈잖아요. 그럼 주님이 입었던 육신을 우리는 아직도 안 죽고 있으니까 지니고 있죠. 지니고 있는 육신에서 사랑이라는 말씀의 영원한 완성을 위해서 육신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나오도록 자극해주는 것은 사랑의 환경이 그 일을 친히 주체적으로 주도적으로 벌이시는 거예요.
자, 에베소서 5:22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했죠. 여기서 막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내라는 위치, 남편이라는 위치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주님을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 온전한 아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주 대우를 받을 남편은 물론, of course, 물론 없어요. 결코 없습니다.
성경 말씀 들이대면서 “봐라.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 했는데 너는 왜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주께 하듯 그렇게 안하느냐?” 할 때 그 성경책 집어던질 만해요. “네가 뭔데 감히 성경책을 들이대느냐? 막 주제에. 네가 주님이야?” “여기 남편 대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했잖아.” “네가 남편이야?” 남편은 주께서 남편이라는 기능을 사용할 그 순간 뿐입니다. 좀 긴 사람은 4분 25초 가는 사람이 있고 보통은 한 2초 내지 1초 가요.
특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할 때 아내 된 자도 마찬가지에요. 아내 된 자들이 남편을 주께 하듯 대할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남편한테 미안한 일을 했을 때, 2분 30초 갑니다. “갑자기 왜 나한테?” “여보, 이거 한번 잡숴봐. 이거 부산어묵이야. 진짜 부산어묵이야. 잡숴봐.” “아니, 안하던 짓을…. 무섭다. 갑자기 소름이 끼치네. 평소에 하던 대로 해. 겁나네.” “아니야. 오늘따라 당신이 주님처럼 보이네.” 이거 2분 30초 갑니다. 해줄 때 받아. 2분 30초 다 돼가. 해줄 때 주께 하듯 대우할 때 받아. 이거 시효 끝나면 너는 그냥 남자야. 남편 아니야.
말씀은 사건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자아가 말씀을 움켜쥘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풀이기 때문에 유한이 나서서 무한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다시 에베소서 제1강으로 돌아간 셈이죠. 에베소서 1장할 때 그 이야기했잖아요. 무한이 주도하지, 유한이 무한을 진두지휘하거나 요청하거나 요구할 권한과 자격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게 죄니 아니니 우리가 결정할 자격도 없어요. 주께서 없는 죄를 만들어내십니다. 없는 죄가 아니지만 사실은 감추어진 죄를 만들어내십니다. 왜? 사랑을 위하여.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의 모세의 지팡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도 바울 자기는 결혼도 안했잖아. 결혼도 안 한 인간이 어디 주제넘게 남편이 어떻게 하고 아내는 이렇게 하라고 말할 쨉이 돼? 오지랖도 무슨 저런 오지랖이.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너 뭐라고 이야기했어? ‘혼자 사는 것이 최고에요.’ 이랬잖아, 네가. ‘왜 고생을 자초해서 결혼이란 걸 했냐. 결혼을 한다는 자체가 주님을 온전히 섬길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야.’ 이런 식으로 결혼한 사람을 그렇게 핍박해놓고 여기 와서는 아내 된 자들이여? 네가 양심이 있냐, 없냐? 왜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어? 결혼하지 마라 해놓고 혼자 사는 게 최고라 해놓고 여기 남편 된 자는 어떻고 저떻고. 결혼도 안 해본 주제에 이게 뭐냐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은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런 인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계속 없어요. 없기 때문에 사건화 되는 거예요. 따라서 부부가 된 것은 둘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는, 이것은 내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우리 가정이 아니고 이렇게 말씀이 말씀되는 사건에 결혼한 우리를 거기다가 양도해야 될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해야 돼요.
‘이거는 행복한 내 가정이야.’를 주저없이 주께서 일으킨 말씀의 사건 앞에 이양해야 돼요. 나의 행복한 가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이끄는 가정이 필요해요. 그 가정은 우리가 더러운 육신을 가진 인간에서 기계를 거쳐서 성도가 되는 예수님 고유의 경로를 반복해서 가능한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가정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 완전한 가정은 없습니다. 없어야 마땅해요.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게 돼요. 어떤 식으로? ‘주님, 기도합니다. 재림하시더라도 우리 딸내미가 1월 14일에 결혼하는데 그 날짜 지나고 재림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설마 이런 식으로 꼼꼼 기도하는 사람은 없으되, 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곗돈을 3년 동안 부어서 타는 날짜가 1월 말인데 그때까진 일단 타먹고 그 다음날 재림했으면 좋겠다. 인간은 자기 존재성도 유지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생각을 안 갖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차마 그걸 기도로 구체화시키는 것은 우리교회 집사님 기도 외에는 없어요. 어떤 분은 너무 솔직해서 섬뜩하다니까요. 이거는 공공장소에서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생중계로 막 나가니까요. 참 용기도 대단해요.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우리교회에서 여자 분들은 기도를 제가 뺐습니다. 충격받기 때문에. 후유증이 너무 심해져요.
여기 보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달리 표현하면 나는 사건을 드러내는, 모세가 든 지팡이다. 사건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사건은 이미 통일되었어요. 그럼 나는 뭡니까? 통일체에요. 통일체.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낸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는 형태로 이 땅에 드러내서 지금도 망해가는 세상을 끝까지 포기 못하고 장악하고 있는 악마와 영적 싸움의 군사로서, warrior라고 하죠, 전사로서 사랑 안에 있는 우리를 이 현장 속에 보내는 겁니다.
결국 현장의 싸움은 뭐냐? ‘사건이냐, 존재냐’ 입니다. 너는 어느 쪽이냐? 존재는 고유성, 아까 얘기한 자기 동일성 이것이냐, 아니면 사건이냐. 주님께서는 여기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존재성을 경유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 쪽으로 돌려버려요. 그럼 우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막, 경계막의 기능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어제 부부라고 해서 오늘도 부부라는 그런 고유성을 유지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부부되게 했기 때문에 부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그다음부터 복잡한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둘이 부부라 했는데 한쪽은 남편 값을 하는데 여자가 아내 값을 못해도 그게 부부입니까?” 이런 질문이 막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나 잘하세요.
31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눈에 보이죠. 눈에 보였습니다. 사건이 눈에 보인 거예요. “이 비밀이 크도다” 갑자기 비밀이 나와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드디어 사도 바울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해서 ‘혼자 사는 것이 최고에요’ 이것과 연계를 시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혼자 사는 것도 이미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부부관계의 한 일부분으로서 혼자 사는 것도 부부관계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신랑이 주님이라는 것.
갑자기 여러분들이 뭐가 생각납니까? 수녀. 천국에서는 아무나 고자 되는 게 아니니까. 갑자기 수녀들이 서원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난 이제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남편 주님과 결혼했기 때문에 세상 결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거든요. 물어봅시다.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이 사건적 차원의 고백입니까, 존재적 차원의 고백입니까? (존재적 차원의 고백) 잘 아시네요. 이거 자기 구원받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구원받으려고.
결혼해놓고 수녀처럼 살면 안 됩니까? 이거 멋진 아이디어잖아요. 두 마리 토끼 다 잡았네. 남자한테도 사랑받고 주님한테도 사랑받고. 얼마나 좋아요. 주님한테 사랑받아서 주님께 사랑받았다는 선물로서 비리비리한 남자를 만났다. 감사하면 되죠. 비리비리한 남자 조건이 뭐냐? 일단 키가 180이상 되어야 되고 성격 좋고 인물은 조인성 정도 수준급이어야 되고요. 자기 집 서울에 강남 아파트 하나 있어야 되고 차는 외제차 아니라도 국산 고급차 타야 되고, 금융자산 한 3억 정도 갖고 있고, 집안에 시누이 없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일체 다 돌아가시고, 몸 건강하고, 뭐 고 정도만. 더는 안 바라죠. 고 정도. 솔로에 나옵니다. 나는 당신을 선택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김 아무개입니다. 이건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비리비리한 여자 있잖아요, 비리비리한 여자. 친정 아버지가 SBS 주식 한 20% 갖고 있는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의 결혼은 육신과 육신의 욕심과 욕심의 만남입니다. 성도의 결혼은 없어요. 성도는 사건화 되어야 돼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사건화 되어야 성도끼리 결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가 나타나는 모습은 성도가 아니에요. 뭐부터 출발합니까? 육신부터 출발해서 둘다 한바탕 붙어버리면 이 육신에서 둘다 짐승이 돼요. 둘다. 사자냐, 호랑이냐. 둘다 막상막하에요.
육신이 짐승으로 바뀌다가 둘다 갑자기 성령 받아버리면, 아 이건 상당히 멋진 드라마인데요, 둘다 성령을 받아버리면 둘다 붙들고 상대방이 사과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사과하는, 누가 먼저 사과할지 순서정한다고 또 한바탕 싸우고. “내가 미안하다잖아.”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뭐 형님 먼저 아우 먼저에요, 뭐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도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과 이미 한몸 되었음’이라는 이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리비리한 존재끼리 만난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혼인하게 된 거예요. 둘다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게. 그 개뿔을 두 자로 하면 이게 ‘비밀’이에요. 개뿔도 아닌 게 자기가 집사라고 목사라고 장로라고. 이게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개뿔 교회.
상대를 만나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걸 알죠. 혼자 도도한 척 인격 다지고 지리산 자연인하면…자연인하면서 나이키는 또 왜 신어요? 나 도대체 이해가 안돼. 혼자 도 닦는 식으로 백날 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고 자기 사랑에 대한 연속, 연장입니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막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계속 계속 나는 나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주님이 이미 대신했잖아요. 불연속성을 계속 유지해야 되죠.
자, 6장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무엇 안에서? “주 안에서”. 야, 이게… 주 안에서 부모 공경하는 것. 주 빼고 공경해버리면 바로 내가 효도하는 게 돼요. 내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100% 노림수입니다. 옛 사람, 성경에서 흔히 옛 사람이라 하는데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의 만남은 말씀이 우리의 존재를 부정해버리죠.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육신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된 결과가 뭐냐?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마귀에서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려면 일단 시작은 뭐냐? 우리 육신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기 육신의 본색을 드러내줘야 돼요. 멀리서 부모한테 일주일에 세 번씩 전화하고 한 달에 월급타면 다만 몇 푼 되지도 않지만 200만원씩 꼬박꼬박 보내고. 2억 버는데 200만원 보낼 수 있잖아요. 딱딱 보내면서 그렇게 해서 효자 코스프레를 해 볼래요, 아니면 같이 살래요? 어느 쪽 할랍니까? 띄워놓고 잘해줄래요, 같이 살래요?
존재는 같이 살기가 힘들어요. 인간이 부모를 효도하면서 내가 때려죽어도 효자가 될 수 없고 효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를 주님 쪽에서 환경을 만들어내요. 주님의 죄 사함과 사랑, 이것이 우리에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 나의 열심과 말씀 실천에서 이런 악마를 막아주는 방어 돔이 생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사건을 위해서 내 존재가 언제 지워져도 급사해도 나로서는 그걸 너무나 당연히 감수해야 될 처지에 있어요. 그런 육신에 있어요.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떨어져 있든 같이 살든 부모와 만나는 거예요.
2절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은 십계명 중에 제 오계명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십계명 중에 오계명을 그대로 하게 되면 출애굽에 대한 신약적 재해석이 되는 거예요. 출애굽, 십계명에 대한 신약 십자가 안에서의 재해석을 이렇게 펼치는 겁니다.
자, 일단은 이렇게 물어봅시다. “그렇게 말한 사도 바울 너는 효도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버지, 어머니 챙겼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부모가 늙어서 죽었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과거에 살아있을 때 나는 이렇게 충성했다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볼 때 뭐했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빠졌죠. 일가친척 가족 다 버리고 주의 복음 전한다고 맨날 싸돌아다녔잖아요. 터키로 그리스로 돌아다녔잖아요. 그럼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너는 네 일만 생각하냐? 다른 사람들은 아주 무시하고? 좋겠다. 너는 주의 일 많이 해서 좋겠다. 생명의 면류관 너 혼자 뒤집어 써. 너 이기주의 맞잖아. 너 이기주의잖아. 너 천당 가려고 지금 그 짓 하고 있잖아.” 라고 이야기할 때, 사도 바울은 뭐라고 대꾸하겠습니까? 주관식이에요. “남한테 이러라고 잔소리하지 말고 네가 실천해보지. 그래, 꼴좋다. 네가 그래서 땅에서 잘~~~~ 됐다, 그래. 40대 매를 세 번씩이나 맞고. 아이고, 호강했다. 호강했어. (그게 호강이냐?)”
사도 바울이 십계명을 거론하는 것은 십계명이 여기서 사건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십계명이. 십계명은 주의 뜻이에요. 주의 뜻이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철회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십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십계명을 이루기 위해서 전에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성도 되는 데에 십계명이 여기서 지배적으로 작동을 해요.
그렇다면 여기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했는데 그럼 약속 있는 첫 계명이 에베소서 6:1절에 나왔던 “주 안에서” 약속 있는 계명의 실현을 주님이 포기하지 않는다. 그 포기 않는 공간이 뭐냐? 아까 사랑의 공간이 뭐라고 했습니까? 가정 또는 부모와의 가족, 이게 공간이에요.
거기서 뭘 알면 돼요? 이것은 육신으로서 부모를 섬기는 것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마음을 자식이 부모한테 보여주면 그게 바로 최고의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에 약속 있는 계명이 있지만 이웃 사랑의 여러 분류 중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아비들아” 나오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만나서 육신이 육신을 만나서 그 환경이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자기 육신으로 봉사하는 일에 성도가 종사하게 만들어요. 성도는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성도가 하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성도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게 사랑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그런 계획을 주께서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잘되고 땅에서 장수한다는 이것이 주 안으로 이동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구약에 있는 ‘땅에서’라고 할 때는 약속의 땅이에요. 장수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오래 사는 겁니다. 이 약속을 어디로 가져가요? 주님 계신 곳으로 가져가죠. 주님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나라. 하늘나라보다 더 긴 데 있어요? 없죠. 잘 된다. 최고 잘되는 게 뭡니까? 예수님이 잘된 게 뭡니까? 십자가 잔을 피한 것이 잘된 거예요, 마시는 게 잘된 거예요? 마셔야 주님의 나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주 안에서 뭘 확인하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영생을 얻고 잘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육신을 가지고 부모와 맞닥뜨리는 이런 환경을 주께서 주신 거예요.
부모도 마찬가지고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부모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요새는 부모가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노여울까봐 ‘아들, 아들, 내 아들’ 이러면서 알아서 시녀 역할, 봉사 역할 다 해요. 아들은 원하지도 않는데 “뭐 해줄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뭘 부탁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부탁한 것, 우리 집안 이야기 같으면 “이 할머니가 뭘 사줄까? 뭐 빵 사줄까?” 하니까 우리 손녀가 하는 말이 “아파트 사 주세요,” 에베소서 말씀대로 아파트 안 사주면 노여워할 거 같아. 에베소서 3장 4절 또 위반했어. “아, 장난감 아파트?”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아파트.” 좀 컸으면 구체적으로 34평짜리 아파트 이야기할 거예요. 그거 안 사주면 노여움을 살 것 같아요, 자식들한테.
아, 더러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 이게 누굴 닮아서 그런가 하면 내 육신을 그대로 인수받아서 그래요.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환경입니다. 만약에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해주겠습니까? 아파트 사주려고 적금들 거예요. 이게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마귀가 하는 짓. 주 안에서 빼버리면.
우리는 내 전쟁하면 안 됩니다. 이미 주님의 전쟁이에요. 주께서 뭘 다 이루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육신은 활용되고 있습니다. 육신이 그냥 산속에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실생활 현상 속에 사회 속에 하나님께서 맞닥뜨리는 환경을 만들어줘요.
그다음 6:5절 봅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야, 이거 참 최저시급 이야기 아닙니까. 분명히 알아야 돼요,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은. ‘구두계약은 무효다.’ 지금 내 존재 위주로 나갔을 때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뭐가 들어오는가? 다시 한번 복습해봅시다. 역사란, 혈통+법이죠. 최저시급이 지금 얼마에요? 9800원쯤 되죠. 뭘 지키기 위함이에요? 나라는 육신을 지키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이 법이며 여기서 나의 동질성은 법적으로 보장받겠다는 거예요. 어제 살아있는 내가 오늘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사회법이 동원되어야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뭐를 주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자아를 그리스도가 죽였고 빼앗아갔죠. 주인한테 빼앗기라는 말이에요. 빼앗겨라. “주인님, 3개월 일한 거 퇴직금 왜 안 주십니까?” 3개월 일해놓고. 왜 노동자가 주인한테 퇴직금 달라 뭐 달라, 얼마 일하지도 않고 왜 달라고 하느냐? 나라에서 주는 실업수당을 빼먹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가 필요한 서류를 꾸며서 실업수당도 자꾸 반복해서 받으면 나라에서 안 주거든요. 이걸 또 가짜로 해서 마치 취업을 안한 것처럼 해서 다른 데서 또 타먹으려고.
도대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존재하는 거예요, 인간은. 존재가 이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냥 너만 혼자 살아. 남 이용하고 남한테 해코지하지 말고. 노동자로 들어가서 주인을 아주 죽여버려요. 노동자 궐기하라. 너나 하세요. 자기 회사도 아닌데 되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편의점에 아르바이트 학생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계약서에 싸인해.” 보니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빨간 매직으로 줄 그으어서) 하듯 하라’ “너 교회 다니지?” “예.” “그럼 주인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주께 복종하듯이 가스 라이팅 당하듯이 모든 걸 다 빼앗기는 심정으로 너는 나한테 일할 수 있느뇨?” “월급은 얼마 주는데요?” “월급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분량대로 줄 거야. 내가 10원 주고 싶으면 10원 주고 100원 주고 싶으면 100원 주고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줄 거야. 그럴 때 이건 내가 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주셨다 할 수 있거든 싸인해.”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주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를 뽑는 거죠. 어디 염전 노동자 구하는 거예요? 안되죠. 이래서 사업될 리가 없죠. 사람이 없죠. 자기한테 충성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사회를 보면서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빨리 떠나버리자. 뭐 성경말씀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했는데 날 우습게 생각하니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사람만큼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게 또 사람이에요.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입니까. 사람 없이는 못 살고 사람 때문에 미치겠고, 내가 못 살겠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떠나자. 어디로? 제주도로? 아니에요, 아니에요. 떠나요~ 제주도로. 아니에요. 천국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사업하면서 세상을 배우고 내가 얼마나 욕심쟁이며 내 존재로 인하여 남에게 얼마나 피해주는가를 착실하게 익히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게 주께서 거저 주신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욱더 크게 되는 체험의 날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런 종 없다. 아주 깔끔하죠. 이런 사람 없습니다.
그다음 봅시다. 그다음은 왜 이렇게 길어요? “눈가림만 하여…” 왜 이렇게 깁니까? 주님이 인간에 대해서 안다는 뜻이죠. 그다음 8절에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자, 사용자에게 회사 사장, 자본가가 이런 본문대로 하게 되면 자본가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사업은 내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내가 돈 벌어서 십일조는 해드릴 테니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은 하지 마시고 사업이 어려울 때 도와는 주시되 사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저이고 싶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죠.
이게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사업체는 내 소유고 소유가 있을 때 내 존재감은 비로소 막이 형성돼요. 인간은 소유 없으면 내가 없어요. 소유 없으면 나라는 의미 없어요. 인간은 소유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인데 교인 없다. 이게 무슨 목사에요? 교인 몇 명이고? 250명. 이게 목사죠. 목사라는 위치는 자기의 소유가 결정하는 것이지, 목사가 ‘주의 계시 받았습니다. 주의 사명 받았습니다.’ 그건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거든요. 모든 게 그래요. 뭐 다방에 가면 쥐나 개나 다 사장님이에요. 내가 뭐 사장이에요? 사장님, 사장님. 엽차만 마시지 마시고 쌍화탕에 날계란 타드실래요? 뭐 낭만을 위해서에요, 뭐에요? 실없는 농담하려고? 세상은 후딱 떠나야 된다는 것을 그냥 이렇게 경험하면서 참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더러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누구냐?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해결책을 봐야 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고린도전서 7장 두 군데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뭐다? “하나이니라”
존재가 아니고. 존재는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 몸의 지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화 된 하나의 지체일 뿐이에요. 사건화 된. 그러니까 내가 잘나서 사장이고 못나서 노동자가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요새 들으면 굉장히 과격한 발언을 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7:20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누구 마음대로 종이다 자유자다 하래? 바둑돌의 위치는 내가 지정해주고 그 환경도 내가 조성한 거야. 네가 어디 가더라도, 종이라도 내가 보기엔 자유자고 내가 자유자라도 남하고 비교해서 ‘나는 자유다’ 우기지 마. 너는 나의 종일 뿐이야. 상전은 주님이 상전이지, 네가 남한테 상전 짓하지 말라.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 지체 안에서의 상황이에요.
그러면 그다음에 나오는 생각은 ‘우리가 이대로 지켜야 됩니까?’ 지키는 소관은 우리한테 있지 않고 주께서 지키게 하는 회로를 가동해버려요. 주께서 고난 받던 회로를 가동해버리면 ‘나는 주님을 참 힘들게 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계기가 되어서 할 게 뭐 있느냐? 에베소서 6:10절 보기 전에 5장 빠진 부분을 다시 한번 봅시다. 방금 이렇게 실전적으로 경험을 했죠. 그다음 5:6절부터 보시면 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내가 준 환경 속에 위치로서 내가 존재케 했다는 뜻이거든요.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그러니까 아내 역할, 남편 역할, 주인 역할, 노동자 역할, 아버지 역할, 아들 역할 어떤 역할 하더라도 그 역할을 따지지 말고 탓하지 말고 불순종에 있는 사람과 신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를 드러내야 된단 말이죠.
그다음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말로 어두움입니까? 육신으로 실습해야죠. 회사를 차리고 또 취직을 하면서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 거예요. 내가 욕심 없다고 여겼는데 이런 욕심이 있었구나. 그럼 어두움이라는 게 그냥 ‘캄캄하구나’ 그게 아니고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러니까 이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나는 어둡다.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육신 자체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죽은 자가 죽은 자끼리 모이는 이 세상을 그대로 실습시키는 거예요. 아내도 죽은 자고 남편도 죽은 자인데 아내와 남편이 신자든 불신자든 관계없이 만나는 가운데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누가 작동하는가? 우리가 나서서 작동하는 게 아니고 죽은 자와 대비해서 실제로 진짜 살아계신 분이 우리 가운데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막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가정이라는 거예요. 가정.
여러분 가정에서 싸우라는 말입니까? 라고 저한테 묻지 마세요. 안 싸울 때도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안 싸우는 게 이상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이잖아요. 어두움이잖아요. 우리 육신 자체가 이미 폐기처분되어야 된다는 요소를 지니고 있잖아요.
5: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은 누가 빛이냐 하면 예수님이 빛이죠. 조건이 뭐냐? 네가 빛을 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빛이 함께 있으면 “내가 이거 안 했는데요. 내가 이거 안 했어요.”가 그게 착함이에요. “이거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이게 의로움이에요. “이게 제가 한 게 아닌데요.” 그게 진실함이에요.
“야, 아침에 네가 그렇게 늦잠 자더니만 갑자기 네가 아내 역할 한다고 일찍 일어나서 새벽밥을 하다니. 네가 다시 보인다. 네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아내가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내가 성도잖아.” 이러면 안돼요. 그럼 또 시험 들어 안돼요. “내가 한 게 아니고. 네 눈에는 내가 한 걸로 보이나? 내 속에 있는 주님께서 하신 거야.”
그러면 불신자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그만 그만 그만! 안 나오나 했지. 또. 제발 그 말 만큼은 그만! 좀 그냥 곱게 ‘내가 너 봐줘서 해줬다’ 그 말이 나는 낯설지 않고 반가워. 왜 주님이 거기서 꼭 끼어드냐? 진짜 지긋지긋해. 그놈의 복음전도. 그렇게 바깥에 나가서 전도해. 남편 상대로 실험 실습하지 말고. 내가 네 실험실 청개구리도 아니고 이게 뭐고.” 그러면 아내 쪽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그래, 한번 해봤다. 오늘로서 아침밥 끝. 콘 후레이크나 마시고 가라. 우유하고. 너 알아서 먹어라. 뭐 해줘도 불만인데. 아휴, 더러운 세상. 주여, 빨리 급사시켜주옵소서.”
10절에 보면 방금 이야기가 다 나오죠.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시험 장소로 이 세상을 주셨으니까요. 부모 만남, 종, 사용자, 노동자 모든 게 시험이거든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한다는 것은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어야 가능해요. ‘저것은 불신세계, 저것은 마귀세계인데….’라고 생각이 날 수밖에 없어요. 두 가지의 뚜껑이 있으니까. 이미 이 세상과 천국, 그 사이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모세 지팡이로 우리가 활용되기 때문에 이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똑같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감추고 있어도 이미 우리가 그걸 경험하고 있고 실제로 살기 때문에 그들의 실체를 그대로 말할 수가 있죠. 예수님의 안목으로 성령의 안목으로 모든 걸 통달했으니까. 창세 전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이 대목 설명을 안 하고는 끝낼 수가 없어요. 책망이 유발되도록 이 어두운 세상에 지옥 같은 세상에 성도로 하나의 바둑돌로 위치해 있습니다.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위치에서 책망이 일어나게 하고 그 책망을 통해서 나를 책망할 수 있는 더 고차원에 계신 빛의 세계와 매개관계가 계속해서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낼 때 이게 바로 빛의 열매인데, 그 안에 빛이 들어있는 열매를 못난 우리 죄인을 통해서 죄인 중의 괴수를 통해서 드러내면 우리의 행복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 대한 주의 용도는 성공하신 거예요. 빛의 성공입니다.
이것이 사랑받은 자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입니다. 14절 같은 경우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그다음 이야기는 뭐냐? 두 가지 안목을 이미 갖추게 하신 거예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죄인인데 사랑 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면 술을 아예 안 먹는 게 아니고 술 취함이 뭔지를 아는 환경 속이 찾아오는 거예요. 교회 다니고 술을 안 먹은 지 56년째 되더라도 57년째에 옆 사람이 사이다라고 속여서 술을 먹일 수도 있는 문제에요. 먹고 난 뒤에 얼굴 벌개서 취해 있을 때, ‘아, 술 취하는 것이 이렇게 완전히 개가 되는 순간이구나.’ 느낄 때, 또 그게 시와 찬미로 주께 술 취한 채로 찬미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또 이용해서 찬미하고 싶어서 술 한 바가지 잡숫지 마시고요.
결론은 이겁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우리 하나님께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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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겨울수련회 에베소서강해 제 9강 : 내부전쟁 - 이 근호 목사
9강 시작합시다. 에베소서 6장 10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구약에 있어서 전쟁에 관한 한 전형적인 틀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마련해주셨습니다.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이 주도하는 전쟁의 형태는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형태의 시스템이 그대로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마귀와 전쟁할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6장을 보면서 이 성경말씀이 구약과 연계하는 전쟁이 아니면 우리는 내 구원을 위한 사적인 전쟁이 되어버려요. ‘마귀를 이겨야 내가 구원받는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대상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전쟁을 빙자한 나의 전쟁에 국한되죠. 그런 식으로서는 성경을 도외시한 자신의 구원 야심이 강하게 작동했을 때 그런 오류가 발생됩니다.
그럼 구약에서의 전쟁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민수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에 이스라엘 안에 갖추어야 될 틀이 나옵니다. 민수기 2:3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네 진영으로 나눠 열두 지파를 동남서북 사방으로 분산시키고 각 면, 외부의 적과 접하는 일종의 막이죠, 이 선에 대해서 열두 지파를 배정해놨어요.
세 지파가 한 조가 되게 해서 각 쪽에 조장을 두었습니다. 동쪽 조장은 유다이고 그다음 잇사갈, 스블론. 남쪽은 르우벤이 조장이고, 시므온, 갓이 남쪽에 있어요. 그다음 서쪽 조장은 에브라임이 조장입니다. 그다음 므낫세, 베냐민이 조원이 되는 겁니다. 북쪽은 단 지파가 조장이 되고 아셀, 납달리가 북쪽에 속하죠. 이상스럽게도 아셀, 납달리가 이스라엘 북쪽 진영에 있습니다.
이렇게 배치를 하게 되면 이것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움직입니다. 움직이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방민족들이에요. 자, 이방민족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는, 언약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이방민족이에요. 언약이 없으니까 그들의 신은 당연히 우상이 되는데 우상을 쉬운 말로 고치겠습니다. 헛된 신. 아무 내용이 없는 신.
내용이 없는 신이니까 내용은 원래 하나님 쪽에서 채워야 되는데 ‘우리는 신을 믿습니다. 신을 인정합니다.’라고 인간 쪽에서 요청했기 때문에 내용은 허한 거예요. 그럼 이방 신에게 신의 내용은 누가 채우겠습니까? 인간의 야심과 욕심이 채우는 거예요.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는 신이나 그 인간이나 전부다 한 통속이 되는 신입니다. 이게 우상이에요.
그럼 참된 신은 뭐냐? 하나님 쪽에서 채웠기 때문에 우상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자기 신의 속성을 채웠다는 말은 인간과 진짜 하나님 사이에는 틀어지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연히 그 신은 인간에게는 배제당하고 하나님은 그 배제당할 것을 아시면서 내용을 메운 겁니다.
그래서 흔히 “신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들으면 여러분들은 이제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기 때문에 ‘아, 우상숭배자구나. 우상숭배자가 교회 만들어놓고 모였구나.’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아, 우상숭배자구나.’ 하면 돼요.
내용은 인간들이 로마서 1:21절, “하나님을 알되” 있잖아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내용은 빠져있고 신은 자기의 확산, 확대, 자기존재의 확대에서 신까지 무한까지 접수하려는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접수하려는 그러한 의도인데, 그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거기에 담겨 있질 않습니다.
이런 신이 다른, 참된 신으로 인하여서 서로가 지향하는 신이 다르다는 최초의 사건이 살인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나한테 연결된다 했습니다. 가인이 생각했던 신이 진짜 신에게 거부당하자 그 가인 마음속에 있는 악이 일종에 선전포고를 한 거죠. 동생을 죽임으로써. 한번 붙자. 그게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변에 무수한 이방민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숫자가 얼마 안돼요. 소수이고 대다수의 이방민족은 큽니다. 이걸 마음의 지도에서 마이너스 쪽으로 확 축소시켜서 결국 전 지구를 수평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은 그냥 점에 불과한 거예요. 이 이스라엘을 누가 기다리나? 이스라엘을 전체 이방민족이 다 기다리고 있어요. 이건 뭐 전쟁해봐야 누가 이기겠어요? 이방민족이 이기겠죠. 그래서 신명기에도 나와요. 너희들 숫자를 의도적으로 내가 적게 했다. 적게 해야 숫자 대 숫자로 시합해서 우리가 이겼다는 소리를 못하기 때문에. “적은데 이겼네? 이거 희한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는 지도를 확대해보겠습니다. 좁게 보겠습니다. 좁게 보면 이 안에 뭐가 있느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여기 열두 지파가 있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분으로 한 지파를 남겨두었습니다. 그게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진영 가운데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는 상자를 말합니다, 그 상자 주위에 또 하나의 띠를 형성하고 또는 막을 형성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뭐냐?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언약궤에서 나오는 특수한 죽음, 언약궤에서 특수한 피를 흘리면 인간들에게 있는 피와 특수한 피를 구분 짓는 기능을 레위지파가 해야 돼요. 레위기 17장에 보면 인간들은 피를 흘려선 안 된다. 이 거룩한 곳에. 인간은 피를 먹지 마라. 내가 피를 흘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죽여 버린다고 나오면서 “피는 생명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레위기 17장을 여러분들이 보면서 피가 같은 피가 아니라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희생 제물에서 나오는 피, 특정 장소, 언약궤 있는 곳에서 잡는 특정 피와 그 외의 피를 날카롭게 구분 짓고 있는 겁니다. 특수한 피와 일반 피, 백성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신체에 흐르고 있는 피와 양의 피라든지 염소 피, 소의 피 같은 제물의 피를 냉혹하게 냉정하게 가리는 거예요.
가려서 민수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민수기 3: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외인을 가까이 하면 너희가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민수기 1:51절에도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찌며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한 일은 특수한 죽음의 피, 이 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이 육체에 갖고 있는 이 피에게서 아주 냉혹하게 접근을 금지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 전쟁은 결국 뭐냐? 내부 전쟁.
지금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싸운다고 하는 거잖아요. 이방민족과 싸우는 게 이스라엘 목적이 아니에요. 이방민족은 허수아비고 들러리입니다. 들러리. 지금 이 싸움이 본 싸움이 아니고 진짜 본 싸움은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특수한 생명을 보존할 거냐, 아니면 내부 전쟁에서 패배해서 궤멸당할 것이냐 이 내부 싸움이 진짜 싸움이고 이 내부 싸움이 실패하게 되면 특수한 피가 이방민족을 작살내는 것은 시간문제죠.
이스라엘이 외부민족까지 가기 전에 내부 전쟁부터 철저를 기하면서 열세 지파를 만들고 한 지파가 열두 지파로 하여금 보초 서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궤에 피가 있으니까 생명이 여기 있다고요. 그러면 생명을 다른 것이 차단한다는 말은 여기에만 생명이 나오고 다른 쪽에는 생명이 있다, 없다? 이건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죽은 목숨이라고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할 때 생명과 죽은 목숨과의 차이성을 남기는 그 차이를 위한 전쟁을 하나님께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평면으로 해서는 잘 모르니까 제가 손으로 위로 싸악 당겨볼게요. 곱게 한번 당겨볼게요. 그럼 평면이 수직이 되겠죠. 그럼 수직적으로 한번 봅시다.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수직적으로 당겼으니까 가운데가 쏘옥 올라오겠죠. 그러면 제일 정점에 언약궤가 있고 여기서 피가 중력에 의해서 아래로 내려오죠.
이러한 이미지가 현대 경제학에서도 나와요. 경제학에서 ‘낙수 경제론’이 있습니다. 낙수 경제론이라는 것은 국가가 기업의 세율을 감면시킴으로 말미암아 기업이 갖고 있는 여유자금이 시설투자로 내려가게 하는 겁니다. 국가가 돈을 풀어서 기업가의 세금을 감면함으로써 기업가의 여유자금이 시설투자로 내려갈 때 국가가 기업과 함께 정점 위치에 있으니까 이걸 ‘낙수 경제’라고 합니다.
그럼 기업이 여기 시설투자를 하게 되고 시설투자를 한 만큼 고용증대가 되면서 이 고용증대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수입을 얻게 되고 수입을 얻은 노동자들이 소비층을 형성하게 되면 생산된 제품의 구매력을 갖게 되죠. 구매력을 갖게 돼서 경제가 내부적으로 선순환 서클을 이루게 된다는 겁니다.
풀렸던 여유자금이 생산설비 투자로 들어가면 여기서 점점 더 노동자 수입이 많아지니까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고정된 구매층이 두터워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풀었던 세수(稅收)가 국가로 소환되어버리면 외국기업에서 국가의 국채와 채권을 구입하게 되고 신용도가 높아지면서 환율 차이에서 오는 기업의 부담을 줄여줄 수도 있는 문제에요. 하나를 먼저 풂으로써.
그럼 다른 데 국채와 채권을 통해서 신용도가 높은 국가가 투자 들어오게 되면 이걸 가지고 국가는 간접자본으로 항만, 철도, 도로의 포장 그런 것도 쓸 수가 있고 그다음에 중산층이 두터워지게 되면 외국투자에 따라 취직을 하게 되면 빈곤층이 낮아져서 빈곤층에서 발생되는 치안경비도 많이 감소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낙수경제에요. 물을 떨어뜨리는 경제라는 거예요.
자, 이걸 그대로 적용시켜봅시다. 피가 위에서 내려올 때에, 피가 내려오게 되면 사람들은 이 거룩한 피와 자기가 살고자 하는 목숨과의 극렬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차이를 보여주면서 언약궤의 피가 중요하지, 내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레위지파의 숫자를 비교해서 민수기 3:3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좆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명이었더라” 레위인 숫자를 따로 왜 세우느냐 하면, 민수기 3: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의 핵심부분은 누가 유월절 양과 교체해서 살았느냐를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규정을 위해서 레위인의 숫자가 3:39절에 보면 이만 이천명이죠. 이만 이천명인데 43절에 보면 “일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에요.
그러면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과 이만 이천명의 차이가 얼마냐 하면 이백 칠십 삼명 차이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일대일 대응, 쪽수 맞추기에요. 쪽수 맞추기인데 레위지파의 숫자와 대신해서 레위지파가 원활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로서 태어난 자는 유월절 그때 취지가 아직도 이스라엘 내에 움직일 때만 비로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다는 거예요.
열두 지파 이것은 하나의 경비 부대이고 중요한 것은 레위지파와 그들 존재, 그들의 목숨과의 차이를 이스라엘이 느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레위지파가 온전하게 위에서 내려오는 낙수 정책에 의해서 언약궤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생명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 태어났다는 거예요. 레위지파는 이만 이천명이고,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명수는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고.
쪽수를 맞추는데 왜 이게 딱 안 맞는가? 이게 딱 안 맞아야 이게 쪽수가 맞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머지 273명을 위해서 여기 4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그러니까 273명의 존재는 ‘인간의 쪽수가 맞다’가 아니라 새 생명,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레위지파가 일하는 직장, 레위지파가 어디서 일하죠? 성소죠, ‘성소의 존재가 새 생명과 관련성 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숫자를 맞는 듯 아니 맞는 듯, 맞는 것 같은데 약간 다르게. 그 약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의도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농협에서 가을철에 쌀 수매할 때에 품질을 보기 위해서 농협 직원이 가마니를 푹 쑤시죠. 푹 쑤시면 보고 “아, 이건 1등급.” “2등급.” 이렇게 하죠. 그런데 아주 구두쇠 같은 농부가 농협 직원이 가마니 한 구석을 푹 쑤셔서 낱알 한 열댓 개 뽑았다고 해서 “손해 물어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거 없죠.
수박 먹을 때, 요새는 모르지만 옛날에는 삼각형으로 뽑아서 맛보잖아요. 삼각형으로 뽑아서 주인이 “이거 답니다. 완전히 익었어요. 한번 뽑아볼까요? 먹어보세요. 얼마나 단지.” 먹었습니다. 그럼 사는 사람이 “그 삼각형 빼고 값 따져서 싸게 해야죠.” 이런 사람 있습니까? 야박한 사람 있어요? 없죠.
샘플(sample)로 뽑잖아요, 샘플로. 샘플로 뽑는 것은 전체를 대표하잖아요. 그러니까 샘플로 뽑는다는 것은 이 성소의 존재가 현재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샘플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전쟁은 지금 이스라엘 내부 전쟁이 제대로 원활하게 돌아가느냐의 성패(成敗)에요. 나머지 이방민족 이거는 전부다 좀비 같은 거예요. 숫자 많아도 소용없어요.
유튜브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그래픽으로 해서 좀비 200만명과 자동소총을 가진 로마군인 200명 중 누가 이길까? 이런 게 나와요. 좀비 200만명이 달려들어요. 자동소총 이건 총알이 무한정이에요. 놀며 해도 이겨요. 놀며 해도. 그걸 보고 이스라엘 전쟁이 바로 저 전쟁인데 그걸 ‘붙이시는 전쟁’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들 말고 나머지를 좀비로 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산 게 아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 안 되는 것. 기다려 봐. 너희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게 생명인지 아니면 그냥 죽을 목숨인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셔서 확인 차 들어갑니다. 거 봐. 죽잖아.
그러니까 이스라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민수기에서 말하는 이 군대 진영이 무기가 되는데 이 무기에 명칭을 붙이고 싶어요. ‘단일무기’. 무기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언약궤가 하나니까요.
그럼 그게 에베소서의 전쟁과 관련이 있나? 연속됩니다. 관련 정도가 아니고 연속되죠. 그게 바로 에베소서 4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4:4절에 보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자, 여기 보면 하나가 계속 나오죠. 4: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3절에 나옵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는 거예요.
하나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 되어야 그게 무기에요. 우리 구원은 없어요. 무기로 사용하는 거예요. 하나 되는 것. 독수리 형제가 형제 간에 몇 입니까? 독수리 5형제, 다섯 명이죠. 그러나 언제 그게 하나가 돼요? 전쟁할 때. 크로스!
그러니까 모든 현대인들은 self control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하나가 아니죠. 다른 가족들 어디 갔어요? 나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괜히 다른 식구가 식구란 이름으로 비비지 말고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부 통치죠. 자기 self 통치에요. 국가도 싫고 결혼도 싫고 다 싫어. 그냥 나는 나를 지키는 단일 무기로 자기를 생각해서 하여튼 말을 해도 연필 깎는 것처럼 뾰족하게 이야기해요. 이걸 ‘방어기제’라 하는데, 말하기만 해봐. 찔러버린다. 항상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요. 샤프하게 갈아가지고 까이기 전에 깐다는 취지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무기화되어서 본인만을 위한 무기화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가 했듯이 이미 단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언약의 무기에 집결하면서 철저하게 자기 안에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내 안에다가 주님의 하나가 여기서 그 틈과 그 차이를 인정하는 내부 전쟁의 연속을 가지고 에베소서 6장에서 ‘전신갑주’라 하는 거예요.
중세 때 기사처럼 복장을 하는데 그 복장이 어디서 왔습니까? 인간은 자기 몸인데 에베소서 6장을 봐요. 그 복장을 잠시 봅시다. 중세 돈키호테 복장 있잖아요. 전신갑주를 취하죠. 허리 띠를 띠고. 그러니까 허리 띠를 띠면 안돼요. 이건 자기를 지키는 거예요. 자기를 지키는 무기가 되면 안 되고, 자기가 무기인 거예요. 진리로 허리 띠를 띠게 되면 이것은 하나가 되는 독수리 오형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 그다음 믿음의 방패, 화전을 소멸하는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이것 다 어디서 낙수된 겁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인간이 공장에서 만든 거예요? 아니죠. 문방구에서 산 겁니까? 아니죠. 이거 보면요. 마치 여기 있는 무기가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 같아요. 돈 한 200만원 주면 하나 더 추가해서 주는 것 있잖아요.
이것은 내 것이 아닌데 내 안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온다는 것, 어떤 사람만 이것이 쉽게 용납되겠습니까? 주님과 나 사이에 차이성을 발견하는 거예요. 차이성. 그래야 내부 전쟁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철저하게 종속되고 주님 앞에서 패배자가 되는 즐거움 될 때 우리는 주님과의 밀착된 결합력을 유지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가 나만 복장 갖춰서 연병장에 집합하는 것 같은데 총사령관 앞에 집합해보니까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돈키호테 복장을 하고 왔단 말이죠. “너 그거 어느 시장에서 구매했나?” 물으니까 “구매하기는 뭘 구매해? 나도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그냥 입었지.” 그러면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학력, 인품, 수입, 남자, 여자 관계없이 똑같은 것을 뒤집어쓴 거예요.
갈라디아서 3:28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뭐 입었다? “옷 입었느니라”
그 옷 입은 대상을 보니까 다 달라요.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가정환경도 다르고요. 건강상태 다르고 성격 다르고 출신성분 다 다르고 사회적 계층 다 달라요. 중산층, 하층, 빈곤층 없습니다. 상류층 없어요. 그거 상관없어요.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민수기 3장에 이스라엘의 전쟁 형태입니다. 좀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세상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다 그런 건 아니지만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제가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침몰하는 타이타닉 배 밑에 붙어있는 빈대, 그냥 빈대에요. 배는 이미 좀비 배거든요. 좀비들이 만들어놓은 이 배는 지금 침몰하고 있는데 거기서 성공하겠다고 빈대처럼 딱 붙어있어요. 요새 빈대 막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안 떨어져요. 저 성공 내 성공 되겠다고 붙어있어요. 그래서 싸움을 해야 된다고, 경쟁을 해야 이긴다고요. 어디에 붙어서? 침몰하는 배에 붙어있는 거예요.
침몰하는 배에 붙어서 손흥민 열세 골 넣고요. 열세 골 넣으면 뭐합니까. 침몰하는데. 바람의 손자는 지금 메이저 리그에서 뛸 거예요. 이정우인가 유격수로 뛰는지 모르겠어요. 뛰면 뭐합니까. 침몰하는 배에서 메이저 리그로 뛰고 있는데요. 내년에 총선하죠. 국회의원 뽑잖아요. 하니 뭐 하겠노. 소고기 사먹겠지. 당선됐다고. 침몰하는 거예요.
방향이, 이쪽의 특수한 피 쪽과 내 쪽과의 차이가 불연속적으로 갇혀있다는 거예요. 완전히 막혀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막혀있기 때문에 아무리 여호와 부르고 해도 우리 쪽에서 올라가는 것은 위쪽에서 차단해버려요. 위에서부터 내려오니까요. 그것도 완료된 상태에서 내려와요. 완료된 상태에서.
무기를 이렇게 적용하면 또 우리 마음에 슬그머니 또 올라오는 것이 우리 자신들의 걱정이죠. 나오는 질문이 “목사님” “왜요?” “내가 과연 성령 받아서 주님 군사의 돈키호테인지, 중세 기사로 모집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여튼 맨날 확인 못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왜 존재하는지를 감사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과 디모데후서 1장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우리가 수고스럽지만 양쪽 두 개를 결합시켜보겠어요. 디모데전서 1:13절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전’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경우에 내 인생이 토막 났다는 것을 스스로 지금 인정하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 엿가락 쪼개지듯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로 이어진다고 예상했는데 난입한 천국에 의해서 성령의 영역에 의해서 언약 십자가 그 피에 의해서 내 피를 보존하는 내 목숨 연연하는 이것을 두 동강 내는 일이 있었다. 그게 바로 “전에는”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에는 어떠했는가? 핍박자요 폭행자였어요. 생각해보세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깡패 출신입니까? 조폭 출신이에요? 아니잖아요. 사도 바울 자신이 폭행자요, 핍박자라 하는 경우는 이 경우를 누구 쪽에서 유발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괘씸해서 도저히 이런 이단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그다음부터는 예수님 소문 듣고 화가 나서 분노를 절제할 수 없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체포해서 죽이는 데 가담했고 스데반 죽이는 데에 가담한 거예요.
그럼 그 동기 유발자, 점잖은 나, 바리새인처럼 학자인 나, 서울대학 출신인 나를 왜 이렇게 폭행자로 몰아세웠는가? 자기는 폭행자가 아니라, 이것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일이라 생각했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 이단 척결이니까 하면서 주의 일에 말려들었어요.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할 때는 말려들었다 하지 않고 의당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죠.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났을 때, 비로소 주님한테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전에는 긍휼이 없었는데 지금은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 내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 안에 내부 전쟁을 겪은 사람은 지금 누가 뭐래도 천국백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례로 보여줬기 때문에. 내부 전쟁이에요. 나도 어떻게 감당이 안돼요. 내 인생이라고 생각해서 전에는 내 인생을 감당했는데 이제는 내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라 했으니까 ‘사도 나는 구원받았다. 끝.’ 이게 아니라 동일한 현상들이 나를 통해서 내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께서 이루도록 했다는 겁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샘플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옷가게에 있는 마네킹으로 앞에 철따라 옷 갈아입히는 마네킹으로 쇼윈도에 내세우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사도로 우리 앞에 등장시킨 거예요. 나 죄인 중에 괴수인데 내가 입은 전신투구 이것 봐. 이거 내 구원용 아니야. 주님이 하시는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불렀다는 거예요. 이게 디모데전서 1장 이야기에요.
그럼 이걸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서는 더 심화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보세요. 디모데전서 1장 이야기하고 다르죠.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뭐냐? 자기가 폭행자요 내가 핍박자라 해서 무엇이 강조되었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쪽으로 강조했는데 이제 더 심화되어서 그것마저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은 주님이 스스로 자기를 친 거예요. 킹콩처럼. 우갸갸갸. 뭐냐 하면 이 민수기 구조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것으로 가져가서 자기 내부에 불연속성으로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자기 안에 내부 전쟁을 먼저 일으키고 그 내부 전쟁을 바깥으로 전개시키는 그게 바로 비밀이 역사 속에 확장되는 그러한 원칙입니다.
우리에게 나의 전쟁이란 있을 수 없고 나한테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라면 끓인다고 물 얹어놨다가 물 넘치는 것까지 전부다 주님의 전쟁입니다, 이게. 소소한 것, 정말 하찮은 것. 아들 수능 망친 것,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 아버님 돌아가신 것, 하,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장사지내게 하라. 이게 우리보기에는 대단한데 주님은 “그게 대단해? 그건 네 명예의 싸움이고 네 가문의 싸움이잖아. 너의 싸움이잖아. 지금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전쟁과 불연속적으로 끊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야.”
네가 너를 지키는 전쟁은 이 민수기 3장의 구조에 의해서 단일 무기에 의해서 자기 지키는 전쟁과는 차이가 나야 돼요. 내부 전쟁이에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주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누가 묻기를 “너 뭐야?” “나? 적이야.” 이러면 돼요. 뱀이야~ 나오잖아요. 적이다~ 주님의 적입니다.
깡패 나오는 <친구>라는 영화 있잖아요.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때는 또 위협적으로 선생님이 손목시계를 풀어요. 안 풀어도 돼요. 안 다치는데 내 각오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시계 풀면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깡팬데요.” 이걸 번역해줘야 돼요. 번역하면 ‘저 깡패 새낀데요.’ “이게 어디서 샘 앞에서 농담하려고 하는데?” 다른 친구들이 다른 돈키호테들이 “맞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십자가마을한테 “너 뭐야?” “저 이단인데요.” 왜 말을 못해! “너 이단이지?” “어떻게 알았어?”
교재 결론부분 한번 봅시다. 교재 결론부분은 이 정도보다 더 심각하게 적어놨어요. 제가 다시 한번 읽어봤는데 이렇게 심한 말을. 교재 p.10 밑에서 7번째 줄에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음을 알려주신다.] 누가? 예수님이요.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신다. ‘출현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겠다는 것이다.] 어디 안에? 배태하는 장소는 우리 안에. 죄인 안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안에 집어넣는 낙수 원칙을 적용시키는 거예요.
언약궤의 피가 현재 네가 보존하는 네 생명과의 차이성을 두면서 너는 이제는 유월절 대신해서 목숨 바뀐 새로운 생명을 출현시키는 그 전쟁에 네가 초대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정들었고 우리 목적과 삶의 희망으로 삼았던 이 좀비의 세계, 이 세계에서 난 이겨서 내가 여기서 성공자 되겠다는 이 세계는 뭐냐? 그쪽 세계는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과 이제 헤어져야 되죠. 그 전쟁이에요.
그 전쟁한다고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내 복음을 왜 안 들어? 들을 귀가 없어.’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자기 내부 전쟁에서 내가 살아도 내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내가 나의 구원이라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했는지. 나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복음 연구한 게 얼마나 나쁜 짓이고 마귀 짓인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복음 사랑합니다.’ 해놓고는 자꾸 우회해서 결국 노리는 건 뭐였습니까? 나 천당 가게 되었어. 애초부터 그것은 나 사이에 불연속성이 없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걸 통해서 있는 우리 모습보고 “언약궤 바깥에서 기다려라.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성령을 통해서 위에서 성령을 흘려보내줄게.” 그렇다면 이 구원은 무기가 내 무기 있고 네 무기 있는 게 아니고 ‘우리끼리 경쟁하고 게임하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는 단일 무기여야 돼요. 독수리 오형제.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새 생명. 주님께서 주신 거예요.
세상과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세상에 나온 찬송가가 말해줄 거예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결국 우리는 매일이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잊혀진 계절을 우리가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서 무기를 들어낸다고 합시다. 주께서 진리의 무기, 전신갑주를 벗겨내면 우리는 똑같아요. 불신자도 자기 죽어서 좋은 데 가길 원하고 나도 천당 가길 원하고. 우리가 새 생명 얻은 것은 주님 혼자 단일체로 통일체로 만든 그 무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럼 10년, 30년, 40년 동창으로 살았던 그 동창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헤어져야 돼요. 헤어지게 하셔요. ‘그날에 쓸쓸한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 마디 변명도 없이’ 결국 인간은 이 좀비는 주님 세계에 허락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노래하는 세상 노래가 따지고 보면 다 복음과 관련되어 있는 노래들이 나온 거예요. 좀비 작사, 좀비 작곡이라도 우리 보기에는 이중성, 내가 전에는 폭행자였던 그것마저 주께서 행하신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사는 것에 여러분 구애받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침몰할 것 아닙니까. 구애받지 말고. 미련 둘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투구 쓴 순간, 예수님이 세례 받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 신세’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이단으로 죄인으로 태어나 이 땅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보는 겁니다. 어디에 눕는데요? ‘저 빳다에 누워서’ 해 저문 노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고 그게 성령이에요. 아, 침몰하는구나. 어느덧 우리의 강의도 서서히 끝나가는구나.
우리가 바로 예수님 몸에 합류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중 구조로 위와 아래 두 개의 시선을 다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전까지는 나의 전쟁밖에 없었고 남한테 안 지는 것이 사는 이유였습니다. 이제는 질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침몰하는 것도 주님의 안목으로 발견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창세 전에 이미 주 안에서 계획된 주의 일이지, 어느 하나 나의 일이 없음을 도리어 홀가분하게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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