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신명기 ; 말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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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씀
- 신명기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못 알아먹기
사람은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도 못 알아먹는다. 그것은 자기를 낳은 근원을 후차적으로 조성하기 때문이다. 곧 자기가 태어난 자궁을 태어난 후에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성 회복이다. 변화 많은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서 본래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인간의 현존재는 끝없이 지금의 자신과 다른 그 무엇이 되어 가는 과정 속의 존재자일 뿐, 영원히 자기동일적으로 남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죽음, 따라서 나의 죽음은 내가 생각한 죽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힘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집체적으로 주어지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무차별적 상황이 죽음이다. 따라서 죽음 안에서 따로 ‘나’라는 개별자의 가치를 끄집어낼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이 세계와 철저하게 무연관적이다. 끝까지 ‘나다운 나’를 뽑아낼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늘 비-본래적이기에 스스로 극복할 대상조차 의미 없다. 어떤 식으로도 나는 나의 편을 들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고통과 죽음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유용하다거나 해롭다고 여기는 해석은 부질없는 일이다. 진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태를 못 알아먹는다.
2. 꿈
꿈 이야기를 듣고도 해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는 같은 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흥미롭게도 두 번째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어딘가는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게 된다.
먼저 언급한 꿈 이야기와 나중에 한 꿈 이야기의 사소한 말 바꾸기는 인간이 무심코 무엇을 감추면서 살고 있느냐가 드러난다. 즉 인간은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는 것을 본인조차도 알지 못하다가 꿈에서 무심코 드러난다. 꿈에 대한 억압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뒤에 그 꾼 꿈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게 되면 증상의 뿌리에 가까워지기에 내부의 저항이 강해진다. 여기서 어떤 꿈을 꾸었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더 이상 그 꿈은 지난 밤에 꾼 그 꿈이 아니다. 지금 그 꿈을 가지고 강력하게 현실에 대처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현실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다. 꿈의 카탈로그에서 꿈을 꾸는 사람은 어딘가 ‘하나의’ 장소에 할당할 수가 없다. 꿈의 모든 카탈로그 안에서 주체는 ‘모든 장소’를 돌출한다. 이는 주체는 꿈의 세계에서 자신을 분산해서 현실에 대해서 과잉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즉 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꿈꾸는 본인의 변신물들이다. 꿈속에 나오는 모든 지인들은 곧 자기 자신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행위의 주체이다.
이 언어의 장(場)이 곧 인간들이 이해하는 현실 세계이다. 꿈은 곧 현실 세계의 일부가 되며 현실은 확장된 꿈이다. 주체가 해석해 놓은 결과물이다. 이것이 본인이 그동안 구축해 놓은 언어의 영토이다. 이 언어에 걸려든 모든 타인은 본인의 해석망에 걸려든 타인들이다. 곧 자신의 변신들이다.
인간의 이런 세계 구성은 어머니를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생물학적인 어머니로 인하여 등장한 어머니는 먼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위치에 있다. 먼저 말하는 존재,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 오는 존재가 어머니다. 이 어머니와 마주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어머니가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아이를 언어로 이끌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만 어머니는 아이에게 있어 최초의 남이 된다. 곧 타인의 욕망에 뭔가 반응을 보여주면서 인간은 언어에 언어적 반응을 보이는 ‘나’가 된다. 즉 언어 망 안에는 인간은 타인과 나로서 언어(말)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 관계 안에서 욕망은 피어난다. 무슨 이유로 욕망이 생겨나서 실어 나르는지도 모르면서.
인간들의 욕망은 누군가의 욕망과 만난 결과로 생겨난다. 그렇기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는 반드시 타자가 욕망하는 존재, 즉 타자에게 어떠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길 원하는 근원적인 욕망이 내재해 있다.
경험을 말로 한다는 것은 욕망의 망으로 얽혀 들어가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꿈으로 구성된 현실성과 엮어보면 이렇게 된다.
‘왜 꿈을 꾸는가?’ → ‘왜 꿈을 깨는가?’
즉 왜 현실은 꿈이 아닌 것처럼 여기게 되는가? 이것은 욕망이 꿈으로 구성된 현실 속에서 유일한 현실다운 현실로서 지배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꿈은 인간이 꾸지만, 해석은 욕망의 주도적인 지도를 받아서 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란 우연한 현실 속에서 유일한 현실다운 현실이다. 잠을 자서 꿈이 생길 때까지 깨어있을 위인은 없다. 따라서 욕망이 도리어 꿈의 현실을 이용해서 모든 해석을 욕망 안으로 끌어당긴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해도 영원한 욕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눈을 뜸으로써 잃어버리게 되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면 시선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된 세계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기존의 ‘나’도 상실된 세계이다.
‘꿈→수시로 발굴되는 본래적 경험→심리적 현실→환상 ? 실재계’가 된다.
실재계란 개인의 말로 뚫어낼 수 없고 더 이상 거슬러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을 갖는다. 바로 이 세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트라우마(상처)를 지닌다. 아무리 해도 그 세계에 관해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어긋나게 말하는 것, 아무리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냥 껴안고 있는 것, 이는 말하는 모든 주체에게 동등하게 부여된 조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바로 그때부터 구조적으로, 트라우마(마음의 상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마음의 상처로 인해 인간은 이 환상적 세계에서의 자기 부재(不在)가 증명되지 아니한다.
3. 자폐증
광기는 구체적 개인이 부재(不在)하는 겹친 다른 세계의 흔적이다. 정신병 환자가 보이는 벙어리 증상은 자신의 말을 박탈당한 다른 정신의 등장을 말해준다.
늘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아이가 잠시 엄마가 현장에 없으면 아이는 다음과 같이 놀이를 하게 된다. 아이가 실타래를 침대 밑으로 던져 놓았다가 보이지 않게 되면 ‘오, 오, 오’라는 소리를 내고, 실타래를 끌어내어 보이게 되면 ‘다’라고 발성한다. 이것은 엄마 부재(不在)와 엄마 현전(現前)에 대응하는 표현이다.
아이는 실타래를 끌고 나와 ‘있다’라고 발성하고서는 부재한 실타래에 대해 현전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현전이 부재에 대해서 명령하는 것이다. -여기서 환상(우상)이 발생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아이는 자신의 부재를 전혀 예상하거나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이가 곧 부재 혹은 현존의 대상이 됨을 아이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현전과 부재로 인해 자신의 생사가 좌우되고 있고 아이의 모든 호소는 전능한 어머니를 대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어머니가 볼 때, 아이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다. 이 미성숙이 언어 사용과 더불어서 실리게 된다.
자폐증의 사례로 들어본다. 적절히 양육을 받지 못해 방치된 아이가 하나 있다.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 pp 387-389]
그는 짜임새 있는 문장을 말할 수 없었고 단어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특히 불안감을 느낄 때, “늑대!”라는 단어를 외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
예를 들어 그는 화장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보호자에게 문을 닫으라고 요구한다. 그래 놓고서는 갑자기 “늑대!”라고 외친다. 그 아이는 대변이나 소변을 배출할(자기 신체로부터의 분리) 때 불안해하고, 변기에 담긴 분뇨를 버릴 때도 “늑대!”라고 외쳤다. 대체로 이 ‘늑대!’라는 단어는 어떤 경우에 외치는가?
즉 문이 열린 공간에 구멍이 뚫리거나, 변기 안에 내용물이 버려져 무(無)의 공간이 생기는 것에 대해 심하게 불안해했으며, 그 불안감을 ‘늑대!’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늑대!’라는 단어는 그 아이에게는 “주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계속 관찰하면서 이 ‘늑대!’라는 단어는 ‘파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아 방기로 인해 주거와 시설, 병원을 전전하며 살아야만 했던 아이에게는 문밖으로 나가는 것,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버려지는 것)은 파괴를 의미했고 ‘늑대!’라는 단어는 빠져 있는 공간을 메우기 위한 단어였다.
그 아이는 이 ‘늑대!’라는 반복성 단어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단어와 연쇄되지 않고 분절화된 단어다. 이런 단어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아이에게 ‘늑대’라는 단어는 최종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어다.
당연히 다른 사람과의 의사 교환은 전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체적인 향락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된다.
이처럼 자폐증 아이는 내재적인 언어의 효과를 부여받고 있다. 그의 ‘늑대’가 실제 ‘늑대’와 일치되느냐 여부는 본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의 생사 한계에 직면할 때와 관련해서 외칠 수 있는 최종적인 단어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이 최종적 존재요 궁극적인 존재이다. 이 자폐증 아이를 제외한 모든 인간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나름대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언어를 지니고 자유롭게 적절하게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자폐증의 확장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숱한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단어가 결국은 하나의 의미에 다 연계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연쇄 고리에서 아무리 단어를 달리해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떤 최종 권위에 멈춰 서는 것이다. 어떤 권위적인 단어도 모든 전체 단어를 보증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외에 최후적 입법자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실제로는 자신이 최후의 입법자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마치 자기 말고 자신이 의지하고 최종적인 절대 권위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사기꾼 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 꿈의 세계, 환상에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 진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불러낼 최종 권위자가 자기 말고 없기 때문이다. 나만 존재하기에 내가 내뱉은 말이 진리며 그래서 내가 최종적 존재자, 곧 신인 것이다. 모두가 자폐증 환자들이다.
4. 예수님의 부재(不在) 증명
예수님에게만 아버지가 계신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 8:38).”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알지 못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그 증거가 그들 눈에 예수님의 육신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나타남과 존재성은 인간 세계에서 ‘아버지 없음’을 보이는 증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5:31-32).”
부재(不在)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만이 예수님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부재하는 존재로 여기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과 예수님의 세계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자들임이 증명된다. 즉 인간들만 있는 이 환상의 세계는 애초부터 엉터리 세계요 그야말로 허상의 세계였다.
만약에 이 허상의 세계를 하나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언약적으로 활용당한다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5-46).”
여기서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구별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8-39).”
이 ‘말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의 바탕과 재료로서 동원된 것이다. 따라서 모세는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중첩되어 있는 언약 안으로 들어선 자이다. ‘말의 세계’는 필연적 실패를 전제로 한다. 언약에 의해서 봉쇄당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38-40).”
‘말의 세계’의 실패를 전제로 해서 ‘말씀의 세계’가 언약을 통해서 제시된다. 따라서 언약은 끊임없이 실패를 만들어 내면서 그 속에서 ‘말씀의 세계 완성’을 이룬다.
해석은 ‘설명에 의한 안심’이 아니라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로 실행된다. 언약은 성도를 규정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임을 유지시켜 주기에 이 점을 즐기고 감사해야 한다. 삼손처럼.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삿 15:18-20).”
삼손이 그 시대의 계시가 되고 언약 해석이 된다. 오늘날 성도도 이런 입장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 5:2-3).”
Ⅱ 줄거리
이스라엘의 존재는 여호와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 신명기에서 압축된다. 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필요로 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함이다(1:8).
이스라엘로 하여금 꼭 그 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은 언약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세가 처한 입장은 그 많은 백성들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었다(1:9). 그러나 모세 홀로 짐을 다 질 수 없어서 지파의 두령들을 세우고 천부장을 뽑은 것이다(1:12-15).
모세와 더불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모세에게 준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고 그 율법을 준수할 때 비로소 언약의 공동체로 존속되는 것이다(1:18). 그러나 여호와의 능력을 멸시한 쪽으로 돌아섰고 유월절 정신의 상실이 나타났다(1:31-32).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여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러 약속된 땅을 마주 보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3:25).
여기까지 와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 유지되려면 여호와가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그대로 행하는 데 있다(4:4-8). 왜냐하면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하다(4:23).
약속 밖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인정해 주시지 않았다. 오직 열조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자비의 약속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4;24-31). 그 자비가 권능을 베풀어 애굽에서 나오게 했으며 함께 있어도 이스라엘이 생존할 수 있었으니, 모든 율법과 규례는 이 여호와의 자비를 제대로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4:32-40).
여호와께서 이집트에서 건져낸 자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준수하기 위한 자들이었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그런 자들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6:20-25). 그 규례와 법도에 담긴 뜻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또 각양 기적을 받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다른 민족과 비교했을 때 수효가 가장 적은데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인들을 정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7:1-7).
그것은 여호와의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이스라엘은 이런 사랑의 베푸심 위에서 사랑을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7:8,12-15).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확실한 반응은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민족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진멸하는 것으로 나타나져야 한다(7:16).
그들을 두려워한다든지 그들의 수(數)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면 애굽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이적과 사랑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7:14-26). 이와 같은 여호와의 이스라엘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보는 세상관과 같은 세상관을 가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지난 40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실습을 미리 받았다. 만나를 끊임없이 내려준 것도 모든 승리는 결코 이스라엘이 잘해서 승리한 게 아닌 것을 보이게 함이다(8:16-18). 모든 것이 여호와의 의로움 때문이다(9:4-6).
이처럼 이스라엘은 낮아진 마음으로 여호와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데 특히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전에 애굽에 있을 때도 같은 신세임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셈이 된다(10:18-19).
이런 명령은 모든 규례에 다 적용이 되는데(24:14-22) 그것은 모든 절기나 제사법이나 가정생활, 정치제도에 있어 앞으로 들어가서 살 땅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제도와 풍습과 불일치를 가져오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민족으로서 유월절 정신이 살아 있기에 여호와의 사랑에 근거한 이웃사랑으로 충만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14:28-29/16:14/24:17-22/26:12-13). 결국 이와 같은 철저한 율법에 대한 순종 요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기업(基業)으로 삼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32:9).
여호와는 그들 편에 서서 복수하시고(32:35), 그들을 여호와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33:27). 이제 12지파 모두가 복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복은 이스라엘이 잘한 것이기보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다(33:3).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29:15).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28:1-14) 만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되고 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아니한다(28:15-62). 하지만 다시 마음을 돌이키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저주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다시 모아서 약속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단다(30:1-4). 그래서 여호와가 사랑하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 영원히 존속된다.
Ⅲ 결론
인간들에 의해서 추방당한 자를 굳이 다시 소환할 필요가 있을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다는 말은 인간들의 지혜로 충분히 이 세상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만이 모든 인간에게 무리 없이 수용 가능한 최종적 의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것만이 건전한 것이다.
따라서 새삼스레 말씀을 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감히- 참으로 감히!- 거역하는 태도이다. 곧 자신이 자신의 본성을 배반하는 무리한 짓을 시도해 보는 것이 된다. 마땅한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에 도달된다. “한낱 지나간 역사 이야기에 불과하니 많은 의미를 담는 위험한 행동은 삼가라.”
우리 자신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주의하라.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말씀을 대하라. 진리라고 여기는 경솔한 짓은 하지 말라. 다 지나간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심심하거든 보라. 굳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다.”
그렇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 내가 나에 대해서 남이 되는 자들에게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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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1강 ? 신명기 : 한계 뚫기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절로 아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우리가 무엇을 몰랐는가를 알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신명기를 하는데 신명기에서 여러분들이 다 읽어보겠지요. 물론 성경에 나오니까. 신명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전체 내용을 말로 하기보다는 제가 뭘 하나 갖고 왔으니까 이걸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빵을 하나 갖고 왔고, 여기 소시지를 햄이죠. 햄을 이렇게 넣었습니다. 신명기를 보게 되면 거기 역사라고 돼 있거든요. 역사라고 한다면 이런 빵이 돼요. 역사라는 것은 겉모습만 보게 돼요.
그런데 신명기는 안에 소시지가 들어있고, 이 소시지를 분리시켜요.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고 여기 있는 빵과 약속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침투해서 빠져나와 버리면 이스라엘 안에는 뭐냐 하면 빈 공백이 돼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이 언약, 소시지와 역사를 둘로 분리를 시킵니다. 둘로 분리시켜서 따로 이해를 해야 돼요. 이걸 분리시키지 않고 같이 합쳐버리면 인간은 역사와 해석을 설명할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역사와 나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따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인간 속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 내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역사를 보느냐 하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잖아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두운 데서 밝은 데를 보는 거예요. 이거는 반칙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을 어두운 곳에 숨겨놓고 화면에 비친 것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자기 자신은 그 해석에 끼어들지 않고 빠져버리는 거예요. 자기를 안 다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는 숨겨놓고 바깥에 흐르는 이 세상에 대해서 평가하는데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평가의 한계를 뚫어야 한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내가 하는 평가의 한계를 뚫어야 하는 거예요. 성적이 몇 점 나왔느냐? 나는 만약에 수학 30점 나왔다. 그러면 안 되지. 백 점 맞아야 되는데 30점밖에 안 나왔어요.
백 점 맞겠다는 그것이 자기가 설정한 자기의 평가의 한계잖아요. 왜 백 점 맞아야 되지? 백 점이 다인가, 그게 선인가, 좋은 것인가? 백 점 맞아야 되겠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굴레를 씌우는 겁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냥 뚫고 나가야 돼요. 뚫고 나갈 때 누가 도와주느냐? 바로 이게(소시지)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뚫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 내부에 침투해서 그것을 바깥으로 나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인식과 한계를 다 긁어내지요. 긁어내면서 남는 것은 소시지 없는 그냥 맛없는 빵이죠. 이건 어떻게 하느냐? 이거는 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기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버리는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은 너 자체의 한계를 스스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들은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굽 사람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나’라 하는 것은 방금 말했잖아요. 애굽 사람으로 치환하는 겁니다.
애굽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다 나왔기 때문에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은 내가 여기 있으면 환경이 애굽 환경이에요. 애굽 환경에 의해서 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가 가는 곳에는 이 환경도 같이 따라오게 마련이에요. 따라오기 때문에 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굉장히 낯설지요.
그래서 우리는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애굽 사람인 경우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부터 순서가 먼저고, 그다음에 두 번째, 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반대하느냐, 이걸 두 번째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서서히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이게 교재에 힌트가 나와 있어요. 여러분 교재 다 보시고 오셨지요. 제가 두 달 전에 올렸으니까 다 보셨지요.
교재에 보면 꿈은, 여기 꿈이 나오는데 왜 꿈을 꾸느냐, 이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왜 꿈을 깨느냐, 하는 거예요. 왜 꿈을 깨지? 꿈을 왜 깨지? 꿈에서 깨어나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서 잃어버리는 것을 인간은 어떻게 보충하느냐 하면 꿈을 설명하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그걸 메워요. 본인이 꾼 꿈이 기억이 안 나니까 대충 생각나는 대로 꿈의 해석을 꿈에다가 보태버립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지금은 꿈꾼 상태가 아니고 내가 깨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특징은 신으로부터(중요한 겁니다) 벗어나기 위해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애굽 사람들의 신의 관점이에요. 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신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게 아까 꿈 이야기하면서 그런 겁니다. 꿈이 뭔지를 꿈속에 있었던 적이 있는 꿈이 뭔지 몰라서 꿈이 이럴 거라고 자기가 꾼 꿈을 깨고 난 뒤에 원래 꿈인 줄 알고 갖다 붙여버리지요. 억지를 부리면서.
그래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알기 위해서 신을 우회로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서 정립하기 위해서 신을 우회로, 신을 거쳐서 나는 이렇다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 방법을 가지고 사람들이 성경을 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도 말씀을 들었으니까 말씀을 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실 거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 나올 때는 빨간 테두리를 치겠습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실 거야.” 이 생명나무에다 그다음에 뭐로 바꾸느냐? ‘선악과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 거야.’ 여기다 뭘 바꾸느냐? ‘천지창조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실 거야.’ 그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전부 다. 엇갈림이죠. 영원한 엇갈림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하는 목적은 빵이에요, 빵. 나라는 빵. 이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왜? 이거는 내가 빵이니까 어떻게 나를 버립니까? 내가 나를 못 버리는 이상은 뭘 버려야 되느냐 하면 내가 빵이고,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에 대해서 거추장스럽고 장애되는 모든 것은 다 빼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제거하면 된다 이 말이죠.
제거할 때 그냥 제거하면 남들이 욕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제거하느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 공식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아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내가 안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소중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애굽에서 믿던 인간들의 하나님이에요.
평생을 살면서 교회 다녔다. 왜? 하나님 믿기 위해서. 하나님을 왜 믿는데? 내가 누군지를 알고 나한테는 내가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교회 다녀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 선악과, 생명나무, 구원, 율법,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을 내가 안다는 것은 하나님도 그런 점에서 날 알아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을 방금 이 논리를 아주 박살을 낸 사람이 있어요. 이 논리를, 인간들이 하는 이 수작을. 첫째 작살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느냐? 이게 오늘 첫 시간과 관련이 있어서 제가 소개해드립니다. 문장을 하나 쓸 텐데 여러분이 많이 듣던 문장이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이(라캉) 어디서 이 문제의 허점을 발견했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다, 라고 내가 말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존재, 내 생각보다 숨어있는 게 뭐냐 하면 ‘나는 말한다’에요. 순서가 ‘말한다’가 먼저고, 그다음에 ‘나는 생각한다’, 그다음에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말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나의 의미가 먼저고 그다음에 나의 존재는 뒤에 오기 때문에 나는 의미를 얻기 위해서 내 존재까지 이용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까지 끌어당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라캉이죠. 이 사람은 그걸 지적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음에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인간 주변에 돌아다니는 말이 먼저였다는 겁니다. 그게 교재에 나오지요. 교재에 못 알아먹게 돼 있고, 사람은 자기를 낳은 근원을 후차적으로 조성한다. 나는 어디서 태어났을까를 후차적으로 해요.
처음에는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관심이 없다가 ‘엄마, 아빠라고 해’ 이렇게 하면서 나는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자기가 후차적으로 그걸 안다 이 말이죠. 어떻게 아는가? 그것도 의미 있게 아는 거예요.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의 나를 조성하기 위해서 세상 만물 하나님이고 부모고 간에 모든 것은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신명기를 보니까 신명기가 해석이 될 이유가 없지요. 해석이 안 됩니다. 왜? 신명기 여러분 다 읽어봤겠지만 신명기 마지막은 뭐로 끝나든가요? ‘너희들 저주받았어’ 그걸로 끝나요. 끝까지 여러분 신명기 1장에서 34장까지 참을 수 없거든요. 중간에 붕 떠서 마지막에 보세요. “너희 귀신 섬길 거야. 너희 망할 거야. 너희 내 손에 죽어” 이게 신명기의 마지막이에요.
왜? 너의 하나님 해석과 하나님이 충돌되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이 충돌되는 그 진리 현장을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멸망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왔고, 그것을 멸망받기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지요. 좋든 말든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필연적으로 망한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어요. 사람은 꿈을 왜 꿉니까? 그러면 꿈이 꿔지니까 꾼다. 심지어 어떤 과학자들은 꿈을 왜 꾸느냐 하니까 지구가 자전해서 꾼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지구가 자전을 한다는 것은 밤낮이 바뀐다는 것이고, 밤낮이 바뀌면 인간의 두뇌 가운데서 청각, 시각, 촉각, 감각이 있는데 인간의 두뇌는 각자 자기 영역 싸움에 열중하기 때문에 자기 영역이 만약에 활동성이 줄어버리면 옆의 영역이 자기 영역을 침범해요.
그래서 밤이 되면 보이질 않으니까 시각적 영역이 자기 활동할 게 없어요. 없으니까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의 두뇌 가운데서 잠자고 있을 때 시각적인 능력이 발휘되어서 뇌간으로부터 후피질까지 밤새도록은 아니겠지만 왕복하면서 자고 있으면서도 드라마는 이뤄질 때 아침에 나는 내 영역을 무사히 오늘도 지켰다. 따라서 꿈은 지구 자전 때문에. 이상하게 일리 있게 들리지 않습니까?
제가 묻는 게 그게 아니고 그런 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꿈이 왜 있느냐는 말은, 꿈이 왜 있느냐고 제가 질문하는 것은 꿈과 우리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꿈이 왜 있느냐는 그 질문이 어느새 나한테 상관있는 질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왜 그런 질문이 상관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는 말이 내 존재보다 먼저기 때문에 자꾸 말을 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 있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 주위에 말할 상대자도 없고 말할 대상이 없다면 이거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권사님들 기도하는 이유가 자꾸 말하고 싶어서 한다는. 말하면서 내가 비로소 살아 있는 거예요. 입 다물면 이거는 송장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전화할 때 짧게 하면 30분, 보통은 한 시간 반, 좀 길게 한다 싶으면 세 시간 가는. 팔 아프면 이쪽에서 이쪽 팔로 옮기면서 전화하잖아요. 그게 살아 있는 거예요. 말을 하는 겁니다.
뭘 닮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닮았어요. 하나님은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에 제일 충격적인 것은 뭐냐 하면 거기 왜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여기 하나 붙인다면, 그들이 거기에 왜 있지요? 당신이 거기에 왜 있습니까?
모세가 애굽에 찾아갈 때 모세와 아론, 당신이 왜 거기 있느냐 말이죠. 왜, 왜? 왜 애굽에 찾아왔지? 거기에 답변을 해야 돼요. 우리가 여호와를 보냈다는 겁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를 요청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청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허락 없이 거기 왜 있느냐는 겁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겠습니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요.
열왕기하 6장에 아람군대가 엘리사 있는 곳을 포위했어요. 그래서 엘리사 때문에 이스라엘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생각 하에 엘리사 있는 곳에 군대를 보내고 말과 병거를 보내서 포위를 했어요. 포위를 하니까 엘리사의 매니저가 겁이 나서 “우린 죽었다. 선생님 우리 죽었습니다. 끝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 엘리사가,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16, 17절) 눈을 열어서 보게 하니까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 말이거든요.
여기서 제가 질문하는 것은, 천사들이 거기에 왜 있느냐는 거예요. 이게 아람군대를 공격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게하시를 공격하기 위함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항상 객관식 할 땐 문항이 두 개밖에 안 되거든요. 어느 쪽이에요? 게하시의 한계거든요, 한계. 아까 제가 뭐라고 썼어요? 평가의 한계를 뚫어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보는 평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그 평가. 이 평가는 우리가 뚫을 수가 없는데 누군가 거기에 나타나 있는 거예요. “당신들 뭐야? 당신들 뭔데 거기 왜 있는데?”
거기에 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인간이 평가하거나 인간의 해석을 넘어선 그 누군가를 찾아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보물찾기하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보물찾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보물찾기하면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지요. 왜? 아무것도 남겨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보물이 없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이렇게 되지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보물이 없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이거는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이 마련한 어떤 낯선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이 그 환경 속에서 없는 존재인 것을 발견해야 돼요. 거기에 하나님만 계시고 하나님이 계심으로서 나는 없어야 되고, 이 말은 뭐냐? 내가 있게 되면 필히 하나님은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신명기의 광야의 해석이에요.
눈을 뜸으로서 잃어버린 게 현실인 거예요. 꿈속에선 꿈을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왜? 꿈에 싸였으니까. 근데 꿈의 해석이 필요한 것은 더 이상 꿈꾸는 걸 스톱하고 현실세계로 왔을 때에 인간은 ‘어젯밤에 뭘 꿨는데?’ ‘뭐했는데?’ ‘가만있어봐. 해석해줄게.’ 해석에 들어가면 이미 그거는 그 꿈이 아니에요. 엇갈림이죠, 그게.
왜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가? 하나님께선 인간 속에 있는 장애를 끄집어내려는 거예요. 그 장애가 뭐냐? 인간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자기 상처를 하나님이 그 상처를 자기가 가져오기 위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남아있는 자기 상처. 어디 속에? 인간 속에. 그게 뭔데요? 선악과를 너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눈이 밝아졌지요. 다시 원래의 눈이 밝지 않은 상태로 인간은 못 돌아갑니다. 그러면 눈이 밝은 상태에서 뭐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옹호하기 위해서, 나를 절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우선되기 위해서 나보다 우선되는 신은 없어야 돼요. 그래서 자기가 제일 우선되고 그다음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걸 호응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신명기 전체를 첫째 시간에 다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선 뭐냐? 형상을 만들지 말라 했잖아요. 십계명 제1계명이죠. 제일 우선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 왜 인간은 형상을 만들고 있었느냐? 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신을 필요로 하는데 신은 없단 말이죠. 그러면 나와 관련된 신을 누군가 만들어야 돼요. 누가 만들까요? 내가 만들어야지요. 나의 가치를 다치지 않는 조건 하에, 내가 저주받는 사람 아니라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만들어야지요.
어떤 성경해석을 하든 간에 너는 참 잘났고 훌륭하고 대단하고 너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너는 천국 갈 거야, 라고 그것을 되받아서 나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신을 내가 만들어야지요. 뭘 보고? 성경을 참조로 해서 만들어야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 의미들 다 끌어 모아서 그걸 한 바구니에 담아서 그걸 내가 이성으로 조립해서 나는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그 해석을 내가 계속 유지해야 되지요.
뭐가 사단이냐 하면 꿈에서 깬 게 사단 나버렸어. 꿈에서 왜 깨어났어요? 그냥 창세기 2장에서 꿈속에 있지 왜 선악과 따먹어서 꿈에서 깨어났느냐 말이죠. 왜 선악과 의미에서 벗어났습니까? 선악과 의미에서 벗어나서 선악과를 알고 그다음에 생명나무의 의미를 알고 따라잡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문제 삼는 것은 네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네가 있는 자리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냐? 원래 자리와 지금 네가 변해버린 그 자리의 차이점을 두는 거예요. 그 차이점을 두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이해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율법을 구조로 하는 거예요. 이렇게 그리면 되지요. 정육면체. 율법은 구조다. 구조의 특징은 뭐냐? 안에 중심이 있다. 근데 이 중심은 비어있다. 중심이 빠져있어요. 중심이 빠져있는 구조가 율법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 속에 들어오게 하고 율법을 따라오게 하고 그 구조를 경험하게 하고 그 구조를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고요. 따라서 인간은 이 구조에 아무것도 없음에 본인이 나설 수가 없어요. 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기에 만약에 중심에 아무것도 없음에 자기가 참여하게 되면 누가 아무것도 없는 자가 돼요? 내가 없어지는 자가 되지요.
그런데 이미 눈을 뜬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 없는 뭐냐 하면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 제일 상상하기 힘들어요. 천국 가도 거기 있을 것이고, 지옥 가도 거기 있을 것이고. 있는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건 상상도 못합니다. 내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으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율법 구조로 가다가 중심이 있는 구조로 바뀌어요. 중심이 있는 구조는 뭐냐 하면 내가 중심을 차지하는 이러한 율법적 구조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바로 신명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굴 닦달 내느냐? 모세를 닦달 냅니다. “모세야. 양식 가져와. 물 가져와.” 모세에게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꼭 기억을 해주셔야 되는데 광야라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사는 환경을 광야라 해요. 모세가 사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거기 있는가? 광야가 자기 자리기 때문에 거기 있는 거예요.
제가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 광야고 모세가 사는 곳이 광야인데 이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모세와 하나님 이름은 광야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나님 쪽에서 의견은 뭐냐? 이 차이만 알아도 여러분 첫째 시간 다 안 게 돼요.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물 달라, 양식 달라, 고기 달라.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한계점을 알아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계를 뚫으라고 한 거예요.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놔버릴 것인가? 놔두고 떠날 것인가를 위해서 광야를 준비했거든요. 광야란 척박한 환경을 준비했다고요.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런데 인간이 그 광야를 떠나려면 애굽에서 살던 식의 삶이 아니고 물 없어도 양식 없어도 사는 그 세계의 생활방식에 준해야 그 원칙에 준해야 우리는 가뿐하게 거침없이 이 세상을 포기하고 떠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게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반발하지요. 반발할 때 누가 여기서 시편105편 12절,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여기 인원수가 굉장히 적다고 했지요. 거기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빵과 떡과 물, 이게 필요한 게 아니고 이쪽 세계에서는 율법이 나왔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이 세계 말고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세계에 꼭 필요한 조건으로 본 거예요. 율법이에요, 율법.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 방식은 율법으로 무엇을 죽이느냐 하면 떡 달라, 밥 달라, 물 달라 이 인간들을 죽이는 절차가 필수적으로 이게 동원돼야 되는 거예요. 떡으로 만든 나, 밥으로 만든 나, 돈으로 양식으로 만든 나는 필수적으로 율법에 의해서 제거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시냐 이 말이에요.
시편 105편 42절, 제가 읽겠습니다.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자꾸 나온다는 이야기 있지요.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제 여러분들이 신명기 어느 정도 감이 잡혔지요. 제가 첫째 시간 이야기하면서 핵심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그다음에 거기에 호응해서 그것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 쪽은 그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아주 첨예한 충돌의 현장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광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반드시 죽여줄게. 왜냐하면 네 힘으로서는 십계명을 못 지키니까, 네 힘으론 율례 법도를 못 지키니까 그 못 지키는 고질병을 내가 없애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와도 마찬가지에요. 중풍병자가 예수님에게 병 고치러 왔을 때에 주님께선 그 중풍병자를 어떻게 하시는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를 가지고 다가섰습니다.
중풍병자가 원하는 것은 자기 병이 낫는 거예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 죄인을 죽여서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생략을 빼버리고 둘을 연결하니까 “저 병 고치러 왔는데요?”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문장을 두 개를 급조해서 같이 묶어버리니까 중풍병자는 병 고치러 왔는데 생뚱맞게 예수님을 네 죄를 사했느니라.
그러면 중풍병자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 안에 뭐가 포함돼 있어요? 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그것이 죽을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주님,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네 죄를 사하느니라.” 무슨 뜻이에요?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그게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모든 종교에서 이야기는 그게 죄인 줄 몰라요. 모든 교회에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그게 죄인 줄 몰라요.
놀라운 사실은 본인이 죄를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어떤 작업에 들어가느냐 하면 어디까지가 네 한계냐를 보여주는 그런 친절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그 시범조교가 누구냐?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원래 논산훈련소에서 시범조교는 키 크고 쫙 빠졌어요. 미남이고, 자세 좋고. 조교생활 군기 셉니다. 이스라엘 군기 대단히 셉니다.
네가 말이야 시범을 보여야 되고 네가 모범이 돼야 돼, 하고 계속 정강이 쪽을 군화발로 찹니다. 왜? 이스라엘이 샘플이기 때문에. 인간은 왜 저주받아야 되고, 이스라엘은 꼭 망해야 되는가를 그것을 신명기를 통해서 보여주면서 그 까이고 까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이방민족이 뒤늦게 성경 보면서 후들들 떠는 거예요. “내가 맞아야 되는데 저게 미리 맞았구나. 저 이스라엘 사람들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멸망당하네? 가만있어봐.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신명기를 통해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기가 캐낼 수 없는 한계와 문제점을 말씀을 통해서 끄집어내시는 이 친절과 이 사랑에 이번 수련회에서 우리가 푹 젖어봅시다. 한 번 젖어봐야 돼. 인간 생활에 어떤 삶의 어떤 순간, 순간 주님께서 그 죄를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범죄 하고 인간은 뭐다? 제습기다. 이상한데 여기 습기 없는데? 한 시간만 가동해보세요. 제습기 물통에 물 주르르 나오지요.
죄를 빨아들이는 제습기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많이 먹음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돼 있어요, 주님을. 죄를 많이 먹음은 자가 쏟아내는 배설물의 그 시원함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남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오늘도 저 파리에서는 금메달 따는 죄를 또 범하고, 여자 공기소총 10미터에서 또 금메달, 은메달.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 금메달, 은메달은 그 선수들의 한계입니다. 인간으론 뚫을 없는 그 한계를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완전히 뚫어버리죠.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이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죄인으로 바꿔요. 인간을 죄인으로 바꿀 때 여기에 뭐라 들어오느냐?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가고 언약이 들어가면서 인간이 죄인 되지요. 죄인 되면서 인간이 있을 때는, ‘당신네들 거기 왜 있는가?’ 천사보고 이야기해도 되고 예수님보고 이야기해도 되고 모세보고 이야기해도 돼요.
거기 왜 있습니까, 라고 외쳤던 그들을 죄인의 입장에서 주님 왜 거기 계십니까, 라고 질문 자체 바뀌지요. 주님 쪽에서 안 바뀌어졌는데 뭐가 바뀌었어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율법 작용에 의해서 내가 달라지고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거기 왜 있습니까, 라고 의문표 했던 것이, 여기는 거기 왜 계십니까, 라고 느낌표로 바뀌는 거예요.
주님이 벌써 거기 계셔서 작업 시작했군요, 라고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멸망하면서 감사한다? 이것은 뭐냐 하면 꿈은 자기가 꿈에서 깬 것 말고 꿈, 비전이라고 하지요. 환상, 꿈, 비전입니다. <The Sound Of Silence> 노래 가사에도 영어로 vision으로 돼 있어요. 꿈, 환상.
현실에 충실했던 나를 뭐에 집어넣는가? 환상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꿈에서 깨서 나는 자립자다, 나는 자존자다 했는데 다시 꿈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꿈속에 집어넣으면 어떤 점이 좋냐 하면 내가 내 언어를 사용할 필요 없이 그 환경 자체가 주님이 주신 해석입니다. 꿈의 해석이에요. 꿈과 그 해석을 이미 대기하고 준비된 그 세계 속을 신명기에선 그걸 말씀의 세계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첫째 시간 끝내면서 이런 질문합시다. 말씀을,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이 질문을 끝으로 10분 쉬고 다음 시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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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2강 ? 신명기 : 확정된 저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언약이 주어진 환경을 광야라고 하는데 언약이 주어졌다고 해서 언약이 완성되는 건 아니에요. 주어진 언약이 완성 상태로 생겨나는 환경이 바로 광야입니다. 어떻게 언약이 스스로 자기 완성의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거는 인간 속에 상처를 심어놓고 그 상처를 하나님이 찾아오는 그러한 방식으로 합니다.
인간 속의 상처라는 것은 쉽게 하면, ‘내가 어디 있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 광야는 내가 원했던 장소가 아니고 여러분 인생이 여러분 원하던 인생이던가요? 아니잖아요.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내가 왜 있지? 또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인생을 살지?
여기서 뭐냐 하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처를 받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 한 인간을 자기 조건을 이루는 환경 속에 주님께서 잡아당겨요. 이걸 포획합니다. 가져와요. 가져와서 인간 속에 상처를 심어놓고, 상처를 남기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인간을 몰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 속에는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낯섦이 생기죠.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데, 내 인생 이래 되면 안 되는데,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 속에 불편함, 그리고 서글픔, 내 뜻이 엎어지는 그 좌절감,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꾸 조성해나가요. 조성해나가면서 인간들로 하여금 이건 내 뜻이 아닌데 나는 이런 인생이 아니고 싶은데, 라고 자기 자신을 피신시키는 동작을 유발해요.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어려운 용어는 빼놓고요. 인간은 존재가 힘드니까 고통 없는 존재로 이동하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여기 존재에다가 자꾸 사건을 집어넣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사건에 합류하는 그걸 포함하는 인생으로 살게 만듭니다.
그게 신명기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숫자는 적은데 이상하게 전쟁에 승리한다든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뭔가 내가 나쁜 짓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보너스다 하고 25억 던져주는 것, 이게 낯선 사건이에요. 내가 원하는 식으로 인생을 끌고 가는 게 아니고 어떤 특이 사건이 자꾸 나로 하여금 내 한계를 내가 쥐고 있을 수 없도록 내 한계를 파괴되도록 주께서 끌고 가는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이게 레위기 말고 출애굽기, 민수기, 그다음에 신명기에서 끊임없이 무슨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요. 그 사건을 신명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이걸 ‘전쟁’이라고 합니다. 자꾸 전쟁이 일어나거든요.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을 처벌한다고. 명분이 뭐냐? 악을 처벌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앞장세워서 내가 악을 처벌하겠다. 이 땅에서 악을 없애겠다, 라고 하면서 악한 이스라엘을 사용합니다.
그러니 모든 전쟁의 승리에 대해서 누가 부끄러움의 몫이 되느냐? 이스라엘이, 승리한 자가 이상하게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리를 원한 게 아닙니다. 아예 전쟁이 없기를 원해요, 인간은. 인간은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싸워서 이기는 것, 그것도 짜증나, 귀찮아. 그냥 조용하게 날 좀 건드리지 마라. 날 안 건드리고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적은 숫자를 의도적으로 많은 숫자와 대결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이건 신명기가 아닌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뒤의 일인데, 열왕기하 13장, 엘리사 이야기에요. 엘리사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요아스 왕이 엘리사 선생이 죽으면, 일종에 제갈 공명처럼 생각한 거예요.
대단한 참모로 생각해서 엘리사 죽으면 이 나라 누가 지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사람도 없는데 우리가 선지자를 얼마나 좋아하고 선지자를 위해서 사는 것 아시면서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4절)라고 해요. 우리의 최고의 무기는 엘리사 당신입니다, 라고 하면서 죽지 말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엘리사가 창문을 좀 열어보세요.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시고 동편 창을 여세요. 쏘세요. 그래서 쐈거든요. 또 쏘세요. 또 쐈어요. 또 화살들을 취해서 땅을 치세요. 할 때 요아스 왕이 땅을 세 번 칩니다. 세 번을 치는 걸 보고 죽어가는 엘리사가 화를 내면서 왜 세 번만 쳤습니까? 대여섯 번 쳤으면 완전하게 아람군대 이길 수 있는데 왜 세 번만 쳤습니까, 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지금 왕이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엘리사 살아 있으면 우리나라 이기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고 승리한다, 라는 이 한계는 내가 존재하는 한 이 한계도 같이 있는 거예요. 내가 이 한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한계에 있으면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전히 안 다칠 수 있다는 자기 한계에 그냥 잠식돼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온갖 아부를 하면서 주의 종이 함께 때 있을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게 자기 딴에 믿음이라 우기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지켜줄 겁니다. 그럴 때 엘리사가 하는 이야기는 그거에요. 지금 당신은 그렇게 돼버리면 이 승리가 당신 승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당신은 한계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된다는 거예요. 한계를 못 벗어나고. 결코 나의 승리가 안 되려면 승리는 당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시키는 그 토대 위해서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줘야 돼요.
그래서 엘리사가 이렇게 합니다. 왜 대여섯 번 치지 않고 세 번만 쳤냐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현장에 여러분이 있으면 엘리사한테 어떤 말을 하고 싶어요? 진즉에 이야기하지 진즉에. 진즉에 대여섯 번 치라고 하면 안 할 내가 아니라고요. 만약에 왕이 일곱 번 쳤으면 엘리사는 또 화를 냅니다. 왜 열 번을 못 채우고 일곱 번만 쳤습니까, 이런 거예요.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지금 아람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걸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미를 그 바탕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 바탕이 나의 단단한 존재에서 나왔어요. 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의미가 나왔단 말이죠. 그러면 이 존재가 신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 뭐 천국을 믿고 재림을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버리면 이거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 의미가 신을 믿으면 우리에게 예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그게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 밑바닥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 안 깨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를 왜 받아요? 은혜 받아서 뭐할 건데요? 은혜는 받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나를 제거하는 게 은혜에요.
지금 제일 골치 아픈 게 뭐냐? 이 골칫거리인 내가 제거당하지 않아서 제일 골칫거리에요. 떠나야 되는데 안 떠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좋다고. 주께서는 친절하게 광야까지 마련해서 떠나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 의미도 몰라요. 광야에서 사는 방법, 일단 절약하자. 남에서 구제하고 선교하면 복을 받으리라. 뭐 이런 식이에요.
나의 존재에서 의미가 나왔고 이건 나에게 확고하게 결부되었기 때문에 의미를 못 벗어나잖아요. 중간에 여기서 전쟁을 집어넣습니다. 이 의미와 나의 존재를 떼어놓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람나라로 이스라엘을 포위하게 만들었지요. 이게 뭐냐? 요아스 이스라엘 왕에게는 상처가 되는 거예요.
<범죄도시4>에 나오는 마동석 말고 마동석이 맨날 불러내는 사람 있잖아요. 장이수. 장이수가 마동석에게 왜 자꾸 나를 찾아와서 괴롭히느냐는 거예요(“또 못살게 구네!” “또, 또 사람 못살게 굴려고 또.” “아 진짜 또 못살게 구네!” “나만 못살게 굴어 왜!”). 그게 나한테 뭐가 된다? 상처가 되는 거예요. 아픈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나한테 상처 되는 하나님 말고, 상처 안 되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거예요. 상처 안 되는 하나님으로서 사이좋게 평화롭게 온유하고, 성경에 나오는 그런 것 있잖아요. ‘내게 강 같은 평화~~’ 이런 좋은 신앙생활, 종교생활을 하고 싶은 거예요. 상처가 없기를 바라는 겁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까진 욕심내긴 싫고 그나마 제발 나를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는 것, 내 하는 식대로 그냥 봐주기만 해도 나는 고맙겠다, 이러는데.
주께서는 상처를 여기다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그 요아스는 상처에 파묻히겠지요. 여기서 엘리사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반발과 반항이 나오지요. 반발과 반항, 이게 진즉에 나와야 돼요. 이게 초장에 나왔어야 되는데 교회 오십 년 다니고 나오면 안 돼요. 교회 한 1년 다니고 이게 나와야 돼요. ‘나 이제부터 하나님 믿으면 개다.’ 이게 나와야 돼요. ‘내가 두 번 다시 예수 믿는가 봐라.’ 이게 진즉에 나와야 된다고요.
이것을 고발하는 2022년도의 영화가 있어요. 이건 국내에서 개봉 안 된 영화인데 영화제목이 이렇습니다. <Everyone Will Burn> ‘모든 인간이 불타버릴 것이다.’ 제목이 그래요. 이 내용에 의하면 성경의 예언대로 이 세상 불타기 위해서 그들이 왔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들이 저벅저벅 왔다는 거예요.
이 영화의 내용은 뭐냐? 이미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서 그들이 왔다면 여기에 대항해서 자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인간들의 분투노력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영화 끝. 그래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미 신명기에서 모든 인간은 저주 내리기로 확정된 이상 교회 오십 년, 육십 년 다니고 철야하고 성경 읽고, 성경 쓰고 무슨 난리를 쳐도 이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왜 못 믿느냐는 겁니다. 그걸 왜 못 믿어? 수련회 참석하고 어떻고, 간식 챙기고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게임 끝났어요.
그들이 누구냐 하면 성령이거든요. 성령님과 예수님, 그들이에요. 왜? 인간 쪽이 아니니까.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저쪽 세계에 살던 분, 성령과 주님이 Everyone Will Burn, 모든 인간은 반드시 불타버릴 것이다. 할 말 있어? 인터뷰할 것 있어? 없어요. 끝나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어요. 감사할까요? 하나는 그냥 재림할 때 불탈 것인지, 아니면 니가 알아서 죽어서 지옥 갈 것인지, 두 가지. 감사해야 돼, 감사해야 돼.
그래서 신명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건 그거에요. 왜 우리는 이단인가? 왜 우리는 거짓인가? 자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다 거짓말입니다. 겉핥기식 성경해석이에요. 그 예가 바로 아까 화살이야기에요. 모든 환경과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스라엘이 뭐가 문제인줄 모르고 그저 엘리사한테 애걸복걸하고 제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할 때 엘리사는 뭐냐 하면 이번 차에 네가 네 자신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것을 아는 멋진 기회로 삼아라, 하고 본인은 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엘리사가 그렇게 죽었잖아요. 열왕기하 13장 21절, 누구 크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와아 엘리사는 죽었어요.
중풍병자는 자기 병 고쳐달라고 왔는데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은, “네 죄는 내가 사해줄게” 이래 됐단 말이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진짜로 우리가 원해야 되는 것을 주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공짜로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라를 어떻게 지킵니까, 하는 엘리사의 용도를 우리나라 지키는 그러한 용도로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에게 엘리사가 죽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겠어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은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부활했어요. 다시 소생했습니다. 이거는 생각하지 못한 보너스에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살아서 네 나라 지킬래, 아니면 죽어서도 또 살래, 어느 쪽 할래?” 이런 식이거든요. 일단 네가 죽었다는 말은, 네가 예상하고 기대하고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그 입 다물라고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살아 있으면서 입이 다물어집니까? 계속해서 하나님 기도합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죽여줘야 속이 시원하냐?”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겠습니다.” “제발 좀 입 안 다물래?” 누가 보답하랬어요? 보답을 왜 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직도 살아 있는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한 거죠. 자기 존재와 관련된 의미가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샘플로 해서 인간이 무엇을 요구하던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멸망할 자는 반드시 멸망하고, 살려줄 부활될 자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던 상관없이 반드시 부활하시는데 그 토대가 뭐냐? 그 토대가 사람들에게 밉상 받았던 바로 메시아의 대실패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도 실패할 생각을 안 하니까 주님이 먼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주님 십자가 달릴 때 다 피신하기 바빴어요.
그러면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다 도망쳤고 숨어서 그냥 비겁하게 그 추이를 살폈다는 말은, 이것은 아까 한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 존재가 있으니까 예수님이 존재해도 자기 존재에서 나왔던 의미를 일방적으로 자기가 회수한 게 돼요. 주님은 바로 이러한 스승을 버린 이곳에 존재에다가 예수님의 자기 상처를 심어놓고 그걸 회수하면서 이 상처받은 자를 구원해내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거예요. 멋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실컷 약 올려놓고 실컷 삐지게 만들어놓고 ‘나, 주님과 안 놀아’ 해놓고 네가 그러한 낯선 사건 속에, 특이 사건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순수 사건이라 하는데 그건 어렵고, 특이 사건 속에 휘말리게 해놓고 그 사건을 몽땅 주님의 자기 일로 가져오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별로 좋아하고 기뻐할 생각도 없네.
따라서 주님한테 뭐가 필수적이냐? 너희들은 Everyone Will Burn, 다 불탈 것이다. 이것이 주께선 어쩔 수 없는 가장 친절 중에 제일 좋은 친절이 이 친절이에요. 내가 필히 죽여주마. 불로써 죽여주마. 그 불에서 나온 게 뭐냐? 신명기 4장, 5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이거에요. 율법이 어디서 나왔는가? 불에서 나왔다. 율법이 불에서 나왔다는 말은, 모든 율법의 기호와 문자의 배후에 불이 거기에 깔려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주께서 이들로 하여금 불타게 만들기 위한 미끼로 율법을 준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뭐냐 하면 이 율법 기호가 불타버립니다. 불에서 나와서 기호가 되고 이 기호가 다시 불속으로 사라져요. 신명기에서. 이걸 위해서 모세가 불타는 산에 가서 거기서 모세가 나올 때에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율법을 손에 들고 옴으로 말미암아 이 율법을 위반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냥 있지 않고 불로써 심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에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 떨기나무 있었잖아요. 기억하십니까? 그 떨기나무가 말짱한 떨기나무였습니까? 불타는 떨기나무죠. 그 불타는 떨기나무가 모세로 바뀌면 불타는 모세가 되죠. ‘불타는 모세’ 꼭 영화제목 같다. 모세가 불속에서 나왔어요.
신명기에 보면 모세는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사십 일 동안 있었어요.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습니까? 그래도 물은 먹어야 연명할 건데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사십 일 동안 있었는데 얼굴이 너무 좋아. 얼굴이 막 빛이 나요. 오늘 아침에 그걸 미용의 권능이라 했는데 얼굴에 손도 안 댔는데 얼굴에 빛이 나요. 문제는 아무도 그 모세를 부러워하거나 탐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 아무도. 그 누구도 자기 한계를 벗어날 자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래 생각하면 제일 좋아요.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그냥 사시면 주님께서 말씀과 율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상처를 일으키고 그 상처가 우리 안에 들어있는 특이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됨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뿌리가 썩은 이빨처럼 자꾸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누구냐 너?’ 내가 나보고 묻는 거예요. 내가 거울보고 이야기하면 돼. ‘누구야, 너? 너는 왜 그렇게 매일같이 달라져?’ 다른 사람이 돼 가는 거예요. 그거는 특이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만드는 겁니다. 그 방법은 상당히 우리 보기에 잔인한데요. 신명기에 보면 율법을 통해서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복이 나오고, 하나는 저주가 나옵니다. ‘감사합시다’에서 감사의 결과는 선택지가 둘밖에 없어요. 복이냐, 감사냐.
율법은 가만있지 않고 활동을 해요.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의해서 주어진 환경 속에 거해야 돼요. 복과 저주를 주고, 시내 산 밑에 이스라엘 전체에게 전부 다 확산이 돼요. 복과 저주가 확산이 되면서 그들은 결국 율법에 대해서 저주하지요. 저주하는 결과가 뭐냐? 신명기 끝에 나옵니다. 나는 율법이 없는 하나님을 믿겠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을 믿겠다. 그런 선택을. 율법 자체가 없는 불에서 나온 게 없는 것을 믿기로 작정하지요. 이게 바로 반발심이고 반항심입니다. 저주가 나오지요. 복은 없지요. 복 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내려오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저주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율법의 활동의 증거물이 되는 증거물로 참여하는 그런 특혜를 입게 됩니다. 저주는 받는데 이 저주가 어디서 출발한 저주인가를 몸에 둘둘 감을 수 있는 찬스가 온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이걸 누가 알았느냐? 이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요?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걸 알고 가만있겠어요? 주의 성령에 의해서 글로 남겼지요. 그 글이 뭐냐? 로마서 7장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자꾸 나는 죄만 짓는가’에요. 나는 선을 원하는데 나는 복을 원하는데 왜 나는 저주받는 쪽으로 자꾸 기울어지고 그쪽으로 가는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 했으면 나도 할 건데 하나님의 율법이 없었으면 나는 언제든지 하는데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순간, 나는 그다음부터 안 해. 고집도 이런 고집이. 하나님이 하라 하면 하는데 하나님이 하지 마라 하면 안 해요. 왜냐하면 내 역할이 그 역할이니까. 여러분 가운데 이것보다 자기에 대해서 더 긍정적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부럽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나는 하나님이 하라 하면 절대로 안 해.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왜? 내 자신의 한계를 아는 즐거움을 매일 느끼니까.
오늘 분위기 왜 이런지 모르겠어. 침묵 시간이에요?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아무리 해도 맨날 성경을 백독 봐도 모르는 이야기인데 자꾸 성경을 보면 볼수록 일곱 귀신이 와서 “성경 어떻게 봤어?” “그냥 봤습니다.” “꿇어앉아서 봐야지. 신령한 말씀을. 자세 꼬라지하고는, 그게 뭐야. 너 오늘 몇 장 봤어?” “다섯 장 봤습니다.” “주일 날 되면 곱빼기로 열 장은 봐야 주일 지키는 거지, 그게 뭐야. 너 그러고도 나중에 천국 가겠어?”
더더더더, 음주 측정하듯이 마귀가 일곱 귀신을 계속 부추기고 있어. “너 옆에 김 집사하는 것 봤지. 반만 따라가, 반만. 그것도 신앙이라고 신앙 꼬라지하고는 이게 뭐야.” “바쁘다 보니까.” 핑계대기는. 제가 참 착하니까 일곱 귀신이지 사실은 칠십에 칠, 사백구십 귀신입니다. 이거는 번갈아가면서 순차적으로 찾아와서 귀신이 자꾸 독촉해요. 네 존재가 구원받겠느냐고 계속해서 독촉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십일조 왜 건너뛰었어, 이런 것. 교회가 교육관 짓는데 왜 외면했어, 이런 것. 그 광고할 때 참석 안 했습니다. 핑계대지 마.
인간은 자기에게 낯선 게 들어왔을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처가 돼요. 상처가 뭐냐?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이게 뭐냐 하면 상처는 낯선 의미, 낯선 단어, 낯선 개념, 낯선 문장 이게 들어올 때 우리에게는 가만있어도 이미 상처가 돼버려요. ‘저리 안 가나. 저리가, 저리가.’ 밀어내지요.
그 밀어내는 것을 누가 이용하느냐? 하나님이 이용하신 거예요. 율법이 갖고 있는 저주의 기능에 딱 적합한 최적화된 존재,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의 반항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율법과 더불어 있는 백성,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여러분, 그 특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이스라엘 나라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지요. 그거는 제가 답할 게 아니고 에베소서 2장에서 답할 문제에요. 그 자부심,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하나님을 독대한 사람이 준 율법을 우리 민족만 받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그 자부심을 가진 이스라엘은 어떻게 됐느냐? 에베소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12절, 제가 읽을게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방민족보고 이야기해요. 오늘날 우리 같은 단군의 자손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거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은 약속을 약속되기 위해서 이방민족을 제치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율법, 언약을 줌으로써 약속이 약속대로 성취가 어떻게 되는가를 특혜를 준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저주받음으로써 그들은 저주받고 율법은 살아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손댐,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업적이 이스라엘 백성에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거기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맨날 뭐하느냐? 맨날 회개에요. 이사야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배우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네가 안식일에 뛰놀고 파티 열었고, 회개하지 않았고, 금식하지 않았고, 구제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그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에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오는 메시아에게 보란 듯이 당당하게 기다리겠습니다.
이것 누가복음 18장에서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바리새인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바리새인의 한계입니다. 율법을 줬는데 자기 존재가 율법에 안 들어왔어요. 율법 앞에서 스톱했어요. 근데 자기 존재 안까지 저주가 들어온 사람이 누구 게요? 아까 이야기했어요. 로마서 7장에서 누구죠? 사도 바울이죠. 여러분, 사도 바울이 부럽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나는 저주받아야 합당합니다.
왜? 내 안에 나의 주인 노릇하고 있는 악이 있으니까. 악을 찾아서 수만 리. 내가 모르는 나의 주인을 찾아서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한테 내 속까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나의 의미 자체가 저주를 유발하는 의미로 가득 찼다는 이제야 마음껏 부담 없이 주저하지 않고 고백하는 이 자유, 성령이 주신 자유입니다.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주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나한테 시킨 일이란 것을 발견하는 그 기쁨이에요.
우리는 차마 그것까지는 근접하지 못했거든요. 끝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뿐이고 그것도 모자란다면 그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만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린 이런 식으로 주와 거래했지요. 언약은 거래가 아닙니다. 끝까지 Everyone Will Burn, 모든 인간은 이미 확정 났어요. 지옥 가기로 확정 났습니다. 인간이냐? 그러면 지옥입니다.
그럼 목사님, 천국 사람은? 그거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지요. 그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다. 이거는 신명기에서 확정된 거예요. 말씀에서 확정되어 인간은 이미 죽은 거로 간주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신명기로 끝나면 큰일 나죠. 신명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신명기를 토대로 해서 계속 확장되면서 어디까지 오는가? 신약까지 넘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란 모세언약을 넘어서 타넘고 새 언약까지 왔을 때 모든 언약을 마감이 되는 겁니다. 새 언약은 신명기언약, 모세언약이 토대에요. 다 죽인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이게 토대가 되니까 새 언약 안에서 도로 신명기로 갈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신명기에선 몰랐는데 새 언약에 오니까 우리가 바르게 살자는 자체가 애초에 성립이 안 되는 존재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은 안 된다. 왜? 우리는 이사야 40장 8절에 의하면 풀 같은 존재라서 말씀을 못 지켜요.
그래서 말씀은 말씀 스스로 말씀을 지켜내는 작업장으로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음악가한테는 스튜디오고, 미술가에게는 그림 그리는 공간이 되겠지요. 조각가는 작업하는 공간이 되고. 그래서 그 공간에서 삐져나온 것이 뭐냐? 하나님 형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형상 앞에서 우리는 뭐냐? 마귀 형상이죠. 그냥 마귀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만 하나님 형상이라 해요. 골로새서 1장에 의해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제가 지금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 절차는 뭐냐 하면 신명기 가기 전에 출애굽기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부터 시동을 거는 거예요. 여기 출애굽기에 다른 시공간,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밤중에 나올 때 그때부터 하루를 카운트로 치는 거예요. 계산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카운트, 수를 세는 것 이걸 기수라 하고, 인간의 모든 문명에서 인간이 셈을 하는 이것은 서수에요. 수학에는 기수와 서수가 있는데 서수부터 먼저. 서수는 순서가 있는 것,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연결시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연결했느냐? 첫 번째가 있어야 두 번째 결과를 낳고, 두 번째가 있어야 세 번째란 결과를 낳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문명은 바깥에서부터 뱅뱅 돌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 해서 안에 구심, 구 형상으로 집약돼요. 응축이 돼요. 근데 인간의 약점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나오기 때문에 끝 번째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구심점은 뭐 있어요? 항상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다?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의 결핍을 자극하는 거예요.
욕망을 절대로 달성되면 안 됩니다. 욕망이 달성되면 욕망이 없어지면 인간은 죽어요. 인간은 희망 때문에 사는 거예요. 이루어지지 않는 그 욕망이 인간의 희망으로 자리 잡는 겁니다. Boys, Be Ambitious.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의 발전은 중간에 항상 점점 비어있어요. 이거는 더 지혜로운 후손들이 해야 되고, 이건 누가 해야 되는가? 정신 차려서 AI, 인공지능이 해야 될 문제. 항상 남겨둬요. 남겨둔 것을 그다음 순서 n+1번째를 하는 이 보람으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이유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엄마가 말기 암일 때 자식이 엄마에게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해요. “엄마, 죽으면 안 돼. 내가 아직 시집을 안 갔잖아. 나 시집갈 때 엄마, 아빠가 참석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엄마 용기를 내라고.” 그럼 엄마가 또 한다고요. “그래. 네 말대로 네 결혼식 보고 눈 감으마. 의사는 2개월밖에 못 산다는데 네가 남자도 없이 무슨 수로 하겠어.” 그럴 때 엄마를 살리는 이유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에게 내 남편이라고 해주면 돈 이십만 원 줄게. 이게 뭐냐 하면 <마지막 잎새>에요. 창가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죽는데 안 떨어져, 질겨요. 왜?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으니 떨어질 리가 없지요. 이게 인생의 억지입니다.
회사에서 나가라 하는데 내가 이 회사 사십 년 근무해서 정들었는데 그냥은 못 나갑니다. 내가 돈을 보고 안 나가는 게 아니고 나도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둬야 내 의미의 마감을 해야 나가도 나가겠습니다. 회사에선 그걸 용납 안 하지요. 책상 들고 나가. 쫓아내지요. 그러면 회사 욕하고 마지막에 종이박스 들고 나가는 장면,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드라마에 나와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고 난 뒤에 그 종이박스가 뭐냐? 유대민족이에요. 유대민족이 구약역사를 재해석해서 묵시문학적으로 해석해서 메시아가 오신다 하면서, 박스 뜯어보면 메시아가 오신다. 제3성전 만들 때 쯤 오신다. 이러고 들고 나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순서, 서수에요.
그런데 언제부터 서수만 있어야 될 인간세계에 초월적 인물로 자청하면서 나온 니므롯 같은 인간이 이 서수를 자기 안으로 통합을 시키면서 등장한 게 뭐냐? 기수에요. 1, 2, 3, 4, 5 이런 게 기수에요. 기수는 1과 2는 따로 놀아요. 3과 4 따로 놀아요. 하나하나가 단독자입니다. 단독자끼리 모인 것을 억지로 또 하나로 만드는 이걸 무슨 제도라 하느냐 하면 민주주의제도에요. 왜? 투표권이 한 사람당 하나만 있으니까. 기수, 카운트를 해요. 기수를 한다고요.
서수가 있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손에 손 잡고 모두가 하나였어요. 서로 끊어지지 않았어요. 서수시대 때. 옛날 혈통시대 때. 우리가 몇 대 후손인 줄 알아? 죽은 귀신과 우리가 손잡고 살아가는 그 시대. 그래서 조상을 잊지 말라고 제사 지내는 그 시대에는 서수가 살아 있는 시대였어요.
그런데 근대국가가 등장하면서 무기가 발달하면서 근대국가 아닌 인간들을 제국주의 사고방식으로 점령하고 난 뒤에 너도 나도 빨리 혈통국가 벗어나서 다 같이 근대화시키는 근대국가로 전환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서수시대에서 기수시대가 된 겁니다. 여기에 전환하는 방법이 그 당시 기수라고 하는 왕과 왕비,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앙투아네트 왕비를 처단하면서 거기서 나온 노래가 나왔지요. 프랑스 국가(La Marseillaise). 2024프랑스올림픽 개막식에서 박물관 지붕 위에서 흑인 가수(악셀 생 시렐)가 노래 부르는 것 보셨지요.
그 노래 부르고 이것을 해체시켜서 개인으로 돌아와서 개인의 권리를 서수가 아니고 단독, 너도 나도 똑같은 평등 된 단독이라 여기면서 기수의 통합체로 만들겠다는 이게 뭐냐 하면 국가 개념이에요. 바벨탑이에요. 이걸 먼저 시도한 자가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의 고향에 세운 탑이 무슨 탑이게요? 바벨탑이에요. 인류의 역사는 기수로 왕질하는 자기가 먼저 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그 세계에 터널을 뚫고 거기에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 그러니까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 가운데서 누가 죽었습니까? 아벨이 죽었지요.
아벨이 왜 죽었습니까? 장차오실 하나님의 상처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아벨이 피를 흘리고 죽었어요. 그 아벨의 요소가 이 세상을 초월적으로 인간세계 만들겠다는 그것과 융합하면서 언약적으로, 그 소시지에다가 바깥에 인간의 자기 역사 위주로 나오면서 같이 병행하면서 교환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게 신명기 1장부터 되는 거거든요. 그거는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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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3강 ? 신명기 : 질적 일의성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는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서 출애굽에 나오는 그 요소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신명기는 출애굽하고 난 뒤에 율법을 준 것을 나중에 모세가 마지막 경계선,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선에 서서 지난날에 있었던 율법과 인간의 만남에 있었던 모든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언급한 것이 신명기거든요.
지금 내가 말하는 그것은 옛날에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금 너희와 언약을 맺었다. 신명기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고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와 세우신 것이다, 해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율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의 지속이 문제가 아니고 율법이 그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여정 속에 당신은 초대되었습니다. 율법은 당신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당신들을 요청했다는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신명기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이 하나의 요소로서 내포된 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만약에 우리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도중에 탈락자가 없어야 돼요. 광야에서 그들을 다 살려야 돼요. 그런데 홍해 건너온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정작 살리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는 거예요. 율법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은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합당한가, 그들이 부합되는 인간이 될 경우에만 율법의 백성,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을 주께서 거신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둘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에서 우리로 갈 때는 중간에 뭐가 삽입돼야 하느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요소가 우리에서 우리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이 우리라는 것이 뭐냐? 지난 시간에 한 걸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리라는 것이 순서, 그러니까 인간의 문명 초기에서 운동의 순서에요. 운동의 순서가 계속 결과를 맺으려면 그다음 순서, 그다음 순서로 계속 이어져가는 거예요. 결과를 낳고, 결과를 낳고 계속 화살표가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가 둥지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의 결국은 구심점을 형성하는데 그게 둥지지요. 새들이 여기저기서 운동하면서 활동하면서 나뭇가지를 뜯어 와요. 나무에 붙어있는 에너지를 차용해서 자기 에너지로 집합시키는 그것이 하나의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제가 서수라 했죠. 서수는 B.C.3500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3500년 후에 기수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기수라는 것은 어떻게 가느냐 하면 그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그것이 점점 원형으로 맺어지면서 어떤 집약이 되는데 이 집약 자체가 비어있는 공백이라고 했습니다. n, 그다음에 n+1, 그다음에 계속해서 공백이지요. 이 공백의 빈자리를 인간들은 뭐로 채우느냐 하면 운동에서 그다음에 정지로 나서면서 이 전체 순서를 1로 쳐버리는 거예요. 1로 하면 여기서 빈자리를 서수가 있던 그곳에 기수가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을 뭐로 보느냐? 이 전체를 하나로 보자는 거예요. 집합적 의식을 가지고 하나로 보자는 거예요. 하나로 봐서 여기서 나가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동영상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서 이때까지 이러한 운동들과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식을 숫자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하나가 딱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면 정지돼 있는 거죠.
사과가 있다면 사과를 어디서 따왔느냐는 서수에 관한 문제지만 여기 사과가 세 개가 있다는 것은 한 개 있고, 한 개 있고, 한 개가 있는 겁니다. 이것 단일체, 이것 단일체, 이것 단일체. 1+1+1 하면 뭐가 되지요? 3이죠. 3도 또 하나의 이 전체를 동그라미 치면 3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1과 3은 연결이 없어요. 그냥 전체, 전체, 전체를 보는 관점이 1과 3을 만드는 겁니다.
이 의식이 왜 중요하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이 새로운 단일체 1의 기수로 등장하는 거예요. 양을 잡음으로서 양이 모든 인간들의 마지막 기수 자리 1에다가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개입돼버려요. 개입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의 이스라엘은 기수적 단일체에서 질적 일의적 단체가 돼요. 질적으로 질을 포함해서, 숫자는 질이 없어요. 질적으로 뭔가 하나의 의미를 갖는 단일체로 전환됩니다.
그 상태는 질적이 없어요. 자기 운동밖에 없기 때문에 고정된 확정된 정지된 질적인 것이 없는데 인간들은 대책이 없이 살아온 그것을 나라고 내가 나한테 규정해버린 거예요. 내가 나한테 규정한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 존재가 있으면 이 존재 자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어느 층으로 올라간다 했어요? 의미로 와서 그 의미를 다시 존재로 다시 끌어당기는 식으로 자기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이거는 수적 일의적 개체가 되지요. 질적이 아니고 내가 수적으로 계산해서 하나의 의미로 내가 단일체로 자부하고 있는 것, 이것을 쉬운 말로 개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개인이 사회와 만나면 주체가 되는데 아직까지 사회는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라는 의미는 16세기 들어와서 사회 주체가 생기기 때문에 그때는 그냥 개인이에요.
개인은 밥이지요. 왜? 이런 하나의 수적 일의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들의 본래 의미는 유월절 어린양 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사회가 복잡하고 인구가 늘어나니까 그게 수적 일의적, 하나의 단일체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의외로 간단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피곤해서 못 들은 그걸 메우겠습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 이것은 내가 말을 하게 되면서 나오는 후차적 의미에요. ‘내가 참 생각했지, 내가 존재하지.’ 이거는 내가 말을 하면서 하는 거고, 이 말이라는 것이 왜 무슨 권리로 먼저가 되느냐 하면 어린애가 있을 때 어린애 주변에 무슨 환경이 돼 있느냐 하면 말하는 환경이 어린애의 존재보다 먼저 우선돼 있습니다. 아빠, 엄마란 가족이.
그래서 아빠, 엄마란 가족은 애를 하나로 수적 일의적으로 쳐줘요. 뭐냐 하면 아빠 1, 그다음에 엄마 1이니까 이걸 집합으로 묶어버리면 뭐냐? {1.1}={2}가 되는 거예요. 애 하나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1.1.1}={3}, 집합 3이 되는 거예요. 이 3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1 속에 아빠가 살아온 동영상이 들어있어요. 지난 운동이 순서적으로 들어있어요. 이걸 또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순서, 순서, 순서 하는데 항상 뭐냐? 미지의 여백이 남아있어요. 마저 채울 수 없는 게 있다고요. 마저 채울 수 없는 것을 뭐로 채우느냐? 지나온 살아온 모든 인생을 이걸 하나로 치자는 거예요. 의미가 그래야 무심코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고 다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라는 단일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단일 의미를 일의적 하나의 의미체가 되지요.
아빠 있고 아빠가 여기 환경에 개입하고, 엄마가 환경에 개입하고. 아기 태어나기 전에 아빠, 엄마는 두 명인데 가족이 아니고 부부라 하지요. 부부가 형성돼 있는 겁니다. {2}로 형성돼 있는 것을 또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버리면{{2}} 2는 뭐가 되느냐? 새로운 단일적 1,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다. ‘우리가 남이가’ 뭐 이런 거요. 우리는 한 몸이다. 2인데 하나가 돼버렸어요. 뭔가 이상하게 반칙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여기서 애가 태어났다. 아빠, 엄마가 말을 합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 1과 1이 2가 되었다는({1.1}={2}) 동영상을 언어로 담아서 애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아빠고 너는 아기인데, 나는 엄마고 너는 아기인데 너는 어디 속하느냐? 내가 지속적인 단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너는 내게 포함이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포함이 되면서 뭘 붙여주느냐? 아기를 1을 만들면서 붙여주는 게 바로 name이름입니다, 이름. 이름이 붙여져요. 이름값을 하라는 거예요. 네 소속이 우리 가족이란 걸 잊지 마라.
그런데 사회가 되면서 이 가족 있잖아요. 가족 하나, 수적 단일체를 포획하는 단체가 등장합니다. 모든 가족들을 전체 집합으로 묶어서 하나로 만든 이것이 뭐냐 하면 국가의 등장이에요. 가족은 반항하지요. 내 행복이 우선이니까. 그래서 가족은 도피하고 국가는 따라오면서 포획하고. 비 올 때 다리 놔줄까? 그러면 우리 마을은 정말 좋은 마을 되겠지요. “그래. 다리 놔줄게. 그런데 세금은 내야 돼.”
그러니까 이게 서수…, 순서가 있고 전체잡기, 그다음에 위계질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순서는 서수지만 전체잡기에서 기수가 되고, 기수에서 더 큰 넓은 기수, 집합적으로 많은 기수로서 수적인 하나의 의미니까 일의체의 등장이 되는 겁니다. 수적인 일의체에요. 왜 질적은 안 되느냐? 질적은 처음에 순서 지을 때 여기에 공백, 아무런 질이 없어요. 그냥 운동을 위에서 내려다봐서 1로 그렇게 나는 이것을 내 인생이라고 여긴다, 라고 본인의 일방적인 해석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이거는 수적으로만 이야기할 뿐이지 질적은 없어요.
그 질은 누가 부여하는가? 그 질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부여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등장한 게 이스라엘이에요. 이걸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가정의 기수, 우리 가정의 아들로서 전체잡기, 기수가 되지요. 위계질서가 되기 위해서 이 가정에 태어난 아기를 뭘 해야 위계질서, 너 높은 레벨의 기수에 오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학원을 다녀야 돼요. 강남에 있는 학원을 다녀야 돼요. 그런데 누구 좋으라고? 가족이라는 집합체 좋으라고.
그런데 강남에서 학원을 하는데 국가에서 킬러문항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고액과외를 하기 위해서 피신해버리죠. 피신할 때 여기에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서 고액과외 수사에 나섭니다. 그게 뭡니까? 피신에 대한 뭐예요? 포획이에요, 포획. 지금 이 모습을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서수, 기수로 설명이 다 돼버려요. 집합으로 다 묶어버리는 겁니다. 이걸로 설명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유월절 집어넣는 것은 이렇습니다. 계단이 있잖아요. 계단 제일 위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질적 일의적 질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굳어진 그 기수가 여기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라버리면 이 피는 계단을 타고서 흘러 내려오겠지요. 흘러 내려와서 전체 이스라엘을 적셔줍니다. 초코파이 만들 때 공장에 빵부터 만들고 뭐로 그걸 촉촉하게 적셔주지요? 초콜릿으로 적셔주지요. 어린양의 피로 다 적셔줄 때 이것을 이스라엘의 탄생, 이스라엘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왜 굳이 이걸 애굽에 하느냐? 애굽은 국가입니다. 수적인 일의성이에요. 수적인 하나의 단체, 수적으로 1이라고 칭함으로서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그러한 단체가 등장하지요. 처음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 예속하기 싫지만 여기서 수적인 단일체, 많은 가족1, 가족2, 가족3 각종 가정들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전체를 묶은 게 국가인데 다른 나라 국가, 일본이라든지 필리핀, 레바논, 이스라엘 저들 나름대로 규칙이 있잖아요. 그 자체를 단일체, 수적인 단일체로 만들 때 여기서 뭘 하느냐?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요.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닫혀있는 집합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서 그걸 포함시키기 위해서 이걸 제국주의 의식이죠. 조선을 삼키겠다는.
이걸 해버리면 전쟁해서 수적인 일의성이 어떻게 나름대로 질적인 일의성을 하느냐? 전쟁하는 것은 뭐냐? 선이 뭘 징벌한다? 악을 징벌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여기서 선한 의는 어디서 생깁니까? 둘 중에 누가 착하지요? 둘이 축구 한 번 할까요, 양궁해서 결정할까요? 뭐로 합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전쟁이라 하는 것은 선이 뭘 징벌하기 위해서? 악을 징벌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우크라이나 동쪽 부분은 국민들 자체가 러시아 성향을 갖고 있는데 왜 우크라이나가 남의 땅을 역사를 조작해서 러시아 땅을 쥐고 있느냐? 흑해로 진출하겠다.” 그래서 러시아는 침범할 수 있는 명분을 가졌다고 푸틴이 그렇게 했잖아요. 푸틴이 나름대로 대외적으로 자기가 정의롭다고 이야기하지요.
이게 수적으로 그냥 존재할 때는 수적인데 여기서 갑자기 뭐가 나왔습니까? 정의롭다고 나오면 수적이 뭐로 바뀌지요? 질적으로 바뀌지요. 그러면 전쟁을 통해서 전쟁의 정의로움, 진짜 의로움은 어떻게 발생됩니까? 어떻게 나오겠지요? 둘 다 가족 존재하고 있는 입장에서 수적인 일의성 있는 입장에서 정의는 어디서 나옵니까? 전쟁에서 뭐하면 돼요? 승리. 승리가 정의를 결정짓는 겁니다. 무조건 이기고 봐야 되는 거예요. 지면 악한 것이고, 이기면 정의롭고 선한 거예요.
이쪽 나라에 신이 있지요. 이쪽 나라에도 신이 있잖아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보증하기 위해서 빈자리에 들어가는 게 신이에요. 내가 그냥 산 것이 아니고 의롭고 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보증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서수의 마지막 빈자리에 신을 요청을 하고 초대를 해서 거기다 박아 넣으면 그 신의 기수에 의해서 단일 의미에 의해서 내가 거기에 예속되었다고 자부하면서 나는 의로운 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모든 민족이나 모든 가정이나 다 그러니까 이게 통합적인 정의로움은 보장이 안 되거든요. 그럴 때 그냥 붙어보는 거예요. 전쟁해서 승리자가 될 때 이것은 뭐냐? 우리 민족의 하나님을 누굴 지켜준다? 우리를 어떻게 복 된 민족으로 정의로운 민족으로 지켜줬다는 그 현실성이 뭐냐? 승리로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면 우리는 승리한다. 옛날에 영국 국가(國歌) 이름이 뭐냐? ‘하나님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 지금은 여왕이 없고 왕으로 바뀌었지만 그랬어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그건 자연이죠. 자연은 혼란스러워 안 돼요. 이거는 자연을 묶어주는 기수의 역할을 해야 돼요. 하나님도 아니에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게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든 가정마다 자기 가정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요청하고 싶은 것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 마음이잖아. 그걸 동의하고 있지? 그러니까 애국가로 지정하자. 하나님 집어넣자. 절에 가도 애국가는 부르자.
그래서 어떻게 해요? 하나님 있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게 현실화돼야지요. 현실화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었더니만 만사형통하고, 자식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늘 수입이 날마다 늘어나고. 그때는 뭡니까? 우리는 다른 가족과 비교해서 승리감에 빠지는 겁니다.
승리감에 빠지면 자, 기수가 정해졌어요. 그다음에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있지요. 기수가 정해졌으면 그다음 할 일이 뭡니까? 위계질서로 더욱 높은 단계로 출세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아직 새벽제단 해서 기도할 제목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우리애가 공부 잘해서 검사 됐는데 그게 기수지요. 검사 되면 끝납니까? 검사장 돼야지요. 그래서 국회 나가야지요. 위계질서를 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이게 현상이고.
그 최고의 자리에 왕이 있는 거예요. 왕은 수적 일의성이기 때문에 그냥 빈 공간에 하나로 등장했기 때문에 왕은 뭘 따지지 않습니까? 질적을 따지지 않아요. 왕의 인품, 왕의 성격, 왕의 집안, 왕의 사생활 묻거나 따질 필요 없어요. 그냥 너는 거기 있으면 돼. 왕을 문제 삼고 왕비를 문제 삼는 것은 뭐냐 하면 국민들이 백성들이 ‘너만 왕이냐, 나도 왕이다. 너만 기수야? 나도 기수가 될 수 있어’ 할 때 혁명이 일어나는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 사생활 문제, 기쁨조 그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북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어떤 뚱댕이든 뭐든지 간에 그게 박혀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이게 단일 집합이 되지 않고 각자 집합이 되어 함경도 왕, 평안도 왕 따로 생겨서 나라꼴이 안 돼요. 그러면 집합의 숫자가 줄어들고 힘이 약하게 되면 이건 다른 국가에 포획 상태가 돼요.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획 상태가 되고 러시아한테 포획 상태가 된다고요. 이게 세상이고 이게 인생입니다.
아무 질적인 내용은 없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끝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적인 내용을 뭐로 채워줬습니까? 마지막에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채워줬습니다. 유월절의 어린 사람이 아니고 유월절의 어린양이죠. 짐승이죠. 짐승이니까 짐승이 어떻게 인간세계의 대표가 될 수 있는가? 그 경로, 그 내력이 율법이 자기 백성에 관여하면서 서서히 밝혀질 거예요. 신약 때까지. 그때까지 율법의 발전은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 기수의 특징은 정지상태에요. 스톱돼 있어요. 모든 운동의 마감이에요. 포도주 병에 마개가 있지요. 안의 포도주는 그 분자들이 활발하게 운동을 합니다. 발효가 되지요. 그런데 그걸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는 운동합니까, 운동 안 합니까? 거의 죽은 세포니까 운동을 안 하지요. 운동하지 않는 것이 모든 운동을 막아놓으면 그것은 하나의 수적인 단일체가 형성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산 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죽은 자의 조상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옛날 시대 때 유교집안에 뭘 드리죠? 제사 드리죠. “15대 우리 선조가 임금과 같이 사우나 하고, 밥 먹고, 조선시대 때 우리 선조는 그렇게 놀았어, 마. 너는 우리 족보의 이름으로 살아야 돼요. 우리 가문에 먹칠하면 안 돼.” 이게 단일 집합으로 그렇게 구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대한 사람, 훌륭한 이순신 장군 15대손 하면 굉장히 자랑스럽잖아요.
그런데 그걸 생각하세요. 이순신 장군의 15대손이 원균의 15대손에게 상처를 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이걸 미리 이야기합니다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줘요. 가만있으면 되잖아, 하지만 가만있어도 피해를 줘요. 인간은 죄를 빨아 당기는 가습기입니다. 내가 가만있어도 죄가 돼요.
“내가 네 꼬라지 보면, 참. 좀 꺼져줄래? 좀 나가. 퇴직했다고 집구석 앉아있지 말고. 전에 직장 다니는 것처럼 나가 줄래? 이 가정이라는 게 내 나와버리거든. 그냥 저녁 때 들어와. 어디 골프 치든지 네 마음대로 하는 건 좋은데 내 나와버리에 쓸데없이 삼식이처럼 밥 세 끼씩 챙기지 말고 좀 나가. 평생 일군 내 터전이야.” 곧 다가와요. 벌써 넘어선 사람도 있고.
집합체가 중간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갑자기 우리는 한 몸이라 하더니 이게 한 몸이 아니었던 거예요. 자기 동영상을 따로 갖고 있었던 거예요. 사우디 가서 낮 기온이 50도 되는 열사에서 돈 벌어주니 아내는 그 돈으로 허비했을 때 동영상이 다르잖아요.
회사 일궈서 기러기 아빠처럼 미국에다 자기 아내와 자식 보내서 공부 다 시켜놓았더니만 아내가 미국 한인교회에서 좋은 남자 만났어. 이제 그만 갈라서자, 했는데 그 순간에 남편 회사가 상장하게 되어 주식이 열 배나 뛰었을 때 이거는 <굿파트너>의 변호사가 와서 개입을 해줘야 돼요. 갑자기 우리 합치자, 이래 나오는 거예요. 니 동영상과 내 동영상, 살아온 동영상이 달라요. 별 볼일 없다고 여겼는데 상장이 되니까 갑자기 볼일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짐승에서 인간에 대한 구원자지요. 유월절 어린양, 새로운 질적이 되면서 주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짐승이 되기 위해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짐승과 합일하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버립니다. 광야로 보내면 이스라엘은 두 가지의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는데 유월절 어린양의 정체와 관련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생깁니다. 시간은 시간을 몰고 다니는 집단, 출애굽기 12장 2절,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따로 시간을 갖는 집단의 등장해요. 기존에 애굽에서의 단체로 하나의 집합체로 적용되는 시간 말고 따로 뽑아낸 새로운 질적 일의적 단일, 하나의 의미로 통합이 된, 하나의 집합 안에 들어온 새로운 이스라엘로 가면서 그들은 기존의 인간들, 이런 어린양의 언약이 포함되지 않는 세상과 다른 시간을 형성하게 돼요. 시간을 몰고 다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짊어진 새로운 시간의 의미는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건 밤이에요. 그날이 무슨 밤이냐? 42절에 보면, 그날이 무슨 밤입니까? “여호와의 밤”이에요.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에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 여기에 새로운 시간의 의미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밤중에 천사를 얍복 강에서 만났거든요. 그 밤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야곱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일을 그걸 집단화시킵니다. 이스라엘 전체로 질적으로 계단을 통해서 흘려보내지요. 밤을 몰고 다녀요.
밤을 몰고 다니면 이스라엘은 뭐가 되느냐? 이스라엘은 유령성을 띠게 됩니다.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야? 인간이야, 인간 아니야? 새로운 유령성을 띠게 되는 거예요. 유령성이라는 것은 어느 존재와 존재에 박혀서 어느 존재에도 속하지 않는 새롭게 출현된 이 사이에서 나온 것이 뭐냐? 유령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 만날 때 자기와 같은 수적 일의성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본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봤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여 없앴던 겁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뭐가 메시아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뭘 보여주느냐?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그냥 걸어왔어요. 지금은 마법사들이 그걸 속임수로 해내지만.
밤에 걸어올 때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 게 있습니다. 저거는 유령이다, 유령. 유령인 거예요. 주의 이름은 유령에 붙어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만 유령입니까? 그래선 안 되지요. 우리 모든 백성도 이 세상에서 유령 같은 대우, 유령 같은 인식, 유령 같은 의미를 부여받는 작업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은 어디서 생기는가? 다시 이야기하면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율법이 생깁니다. 존재라 하는 것은 기존에 애굽에 있던 사람들, 애굽에 있던 국가란 집합체, 단일체의 하나, 개인으로 있어요. 숫자가 몇 명이냐 의미 없어요. 전부 다 옆 사람도 나와 숫자가 하나, 하나기 때문에 7이라는 것은, 1+1+1+1+1+1+1이 모여서 7이라는 또 하나의 1을 만드는 거예요. 7 속에 7이 없어요. 1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7과 1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7이 말하기를 너는 내 소속이다. 내 말 들으라. 이건 안 돼요. 1은 나의 말을 들어요. 국가를 이용할 뿐이지 국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끝까지 1로 가는 거예요. 이게 존재입니다. 존재는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의미는 존재 하나를 1로 간주하기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살아온 자기 동영상이 있는 겁니다.
자식이라고 부모 시킨 대로 하는 것은 자식이 크면 그걸 못해요. 세 식구다. 1+1+1은 세 식구다. 그런데 1+1로 이해하지 않고 아빠, 엄마는 이걸 3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3 속에 1이 포함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 자식은 절대로 3 속에 포함되지 않았어요. 그냥 내 속에 3이라는 환경이 있을 뿐이죠. 이용하면 되지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내가 희생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겁니다. 이건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누가 부부를 한 몸이라 했습니까? 그런 것은 수적 일의체에선 없습니다. 결혼이란 동업이지 결혼생활은 아니에요.
이것이 애굽에 살던 식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개별적 주입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해서 있지 절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위한 하나님, 출애굽기 32장 8절에 나오는 거예요. 나를 위한 신을 하나님은 뭐로 규정했느냐 하면 이걸 우상으로 규정한 거예요.
하나님은 질적 일의성이 따로 있는데 아무런 질도 없으면서 내가 나한테 스스로 나는 하나라고 존재 규정을 한 그걸 위해서 신을 거기다가 강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짜 신으로 하나님은 간주해버려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결국 우리 모습이라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는 우리의 모습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저 남들 그렇게 사는데 나로 사는 게 뭐가 나쁘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끊임없는 전쟁이죠. 왜 전쟁을 합니까? 내가 얼마나 선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것을 전쟁이라는 현실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이 현실과 기존의 현실 이것이 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현실이 하나님의 복 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 확인에 나서는 것이 전쟁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전쟁이 많이 일어나요. 의도적으로. 현실과 현실. 기수가 짜여지면 조직이 되거든요. 기존의 이방민족은 조직 안에 왕이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조직은 안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직에 아무것도 없게 하느냐? 인간의 나르시시즘, 인간의 자기 찬양은 끝까지 내가 아무리 지식을 얻었다 할지라도 끝까지 자기를 중도에 떨쳐버릴 용의가 돼 있지 않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개입하고 싶어요.
그래서 인간의 최고의 쾌감은 뭐냐? 인간에게는 두뇌에 쾌감 중추신경이 있는데 어떤 때 쾌감이 높으냐 하면 모든 일에 나 이야기할 때 가장 쾌감이 높아요. 나한테 주도권 가질 때 가장 쾌감이 높습니다. 남과 이야기할 때 그런데 말이야 좀 끼어들게, 할 때 내가 지금 대화의 주도권을 쥐어야 쾌감이 높아져요. 그러면 이 시간이 허비되는 시간이 아니고 자기에게 보람 있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라는 게 얼마나 좋겠어요. ‘조용하세요. 입 다무세요. 휴대폰 끄고.’ 이런 식으로. 이거는 내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에 여러분 듣기나 하세요, 이래 되거든요. 눈이 밝아져서 이게 싫었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나만 언제까지 끌려가는 인생은 싫다. “선악과, 생명나무에 종속되는 것이 네가 싫지, 그지?” 하고 마귀가 온 거예요. “나는 벌써 탈출했거든요. 탈출해보니 신나. 너도 같이 탈출해. 방법은 선악과 따먹어.”
그럼 선악과 따먹기 이전은 뭐냐? 듣기만 했던 존재가 인간이었습니다. 그게 원형인데 광야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여지를 다 없애버렸어요. 그냥 너는 듣기만 해라. 듣기만 하는 그것은 율례와 법도를 지킨 것이 돼요. 율례와 법도를 너를 지배하도록 네가 허락하란 말이죠. 안 하지? 안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요소를 다 빼버릴 거야. 네가 할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들 거야.
6일 동안 네가 할 것 해봐. 7일 되면 안식일 날 모든 것을 멈춰야 되고 안식의 의미에다 그걸 포기해야 돼. 안식의 의미는 뭐냐 하면 바로 양을 잡는 날이에요. 제삿날이에요. 질적으로 종속될 때만 일의, 하나밖에 없는 의미의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지금 유령이 된다고 했는데 나라는 애굽의 존재, 이 존재가 뭐냐? 존재가 말은 들리는데 못 보는 존재, 그러니까 뭐와 같은 존재냐 하면 유령 같은 존재가 광야에서 이상하게 낯선 현실을 유발하고 있다는 이 점, 자꾸 없는데 들어요. 우리 인간들이 하는 말을 없는데 들어요. 들으면서 그것이 어떤 현실을 자아내요.
모세 인간이잖아요. 백성들 인간입니다. 인간들이 모세한테 이야기했어요. “모세야, 이렇게 끄집어내놓고 책임질 거야, 안 질 거야. 양식 없는 것 너 알지? 물 없는 것 알지?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제 대장질 그만하고. 미지의 세계 그딴 것 하지 말고 현실로 따져보자. 우리는 애굽에 살던 그러한 동영상, 그런 체험밖에 없는 이 광야에서는 나는 죽는다. 그러니까 어떻게 양식 낼 재주도 없는 것 같고 물 낼 재주도 없는 것 같으니까 여기서 플랜B, 두 번째 계획은 뭐냐? 애굽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그 이야기를 그대로 전합니다. 전하니까 없는 존재가 만나라는 현실을 자아냈어요. 그 만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말씀의 공격입니다. 그게 신명기 8장에 나와요. 너희들 보기에 그게 떡으로 보이느냐? 나는 너희에게 말씀을 주었다. 신명기 잠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보면서 제 나름대로 제일 충격적인 것이 신명기 1장 28절이었습니다. 적어볼게요. 크게 써보겠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이런 특징을 있어야 유령성을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나, 이거에요. 이게 지금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성도의 특징은 내가 결정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의존적이에요. 유령한테 묻는 거예요. 없는 신에게 물으면서 없던 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이미 내가 신이거든요. 내가 신인데 신은 스스로 사는 거예요. 신은 스스로 있는 거거든요. 결국 나는 내 존재가 잘되는 쪽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때로는 국가에 굽실거리면서 그냥 직장 상사에 굽실거리면서 위계질서 지키면서, 궁극적으로 목적은 내가 사는 거니까.
내가 살 때는 이 질문이 안 나와요. ‘어디로 가나?’ 그걸 왜 남한테 물어. 니가 너한테 물어. 내가 공무원시험 준비할 것인가, 직장 생활할 것인가, 뭐 할 것인가? 그거는 니가 너한테 물으면 되는 거지. 모든 미래는 네가 판단하기 나름이고,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개척한다. 그거잖아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금강경에 나오는 대사 한 대목입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알아서 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인간다운 태도, 인간의 존엄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토대, 이걸 학교에서 배운다 이 말이죠. 그것 모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 적응이 안 된다는.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어디로 가나’ 하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어요. 본인이 알아서 가면 될 텐데.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퇴로가 차단된 곳에 와버렸다는 거예요. 오도 가도 못하는 일종의 포로 신세가 된 거예요.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포로가 된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사회에선 간단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당’ 이순신 장군 귀신, 단군 귀신에 빠져있는. 무당인데 신약성경에서 무당에 빠진 상태를 물론 예수님도 이런 비난을 받았지요.
요한복음에 보면 너는 지금 귀신 들렸다고 하는데 이걸 주님은 뭐로 바꾸느냐? 일단은 천국 가려면 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자리에서 어디로 가지, 라고 물을 수 있는 존재로 바뀌면서 내 존재가 누구에게 의존적이고 예속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그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는 코스를 밟아가게 돼 있어요.
나는 무당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성령으로 거듭나버렸어요. 이것은 바로 환경이 그렇게 조성해 가는 겁니다. 왜 그것이 가능하냐 하면 왜 이런 법칙을 하느냐? 신명기 7장 15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애굽의 요소를 철수했습니까, 철수 안 했습니까? 철수를 안 하고 따라 죽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존재 변화를 광야라는 환경에서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10분 쉬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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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4강 - 신명기 : 율법의 경로
(강의:이근호 목사)
유연성을 지니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하게 만드는 상황을 유발하시고요, 그리고 거기다가 주께서 광야에서 전쟁을 일으켜요. 전쟁을 일으키면서, 누가 신명기 7장 7절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 적다라는 것은 기존에 수의 좌표에서 0에, 제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요.
신명기 7장 7절. 가장 가까이 가는 거에요. 가까이 가게 되면 뭐가 줄어드느냐? 존재가 줄어들어요. “내가 없어지네. 나의 집합체가 점점 더 숫자가 없어지네. 없어지네.” 이렇게 돼요. 0에 접근하는 겁니다. 0에 접근하는데 0에 접근하면서 곧 이것은 뭐냐 하면, 이 광야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없는 존재만이 또는 없음에 근접한, 근접된 민족만이 광야라는 이 죽음의 세계에서 버틸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거에요. 아무도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도 나서지도 않는 이 광야에서 그 광야를 통과해서 약속의 땅에 있다면, 약속의 땅은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는 땅이에요.
어디에만 있느냐? 광야와 연결된 파이프 안에서만 약속의 땅이 있는 거에요. 광야 없는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광야에서 무엇이 부각 되느냐? 윤리와 법도가 있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어느 것도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절실하게 느끼죠. 그래서 율법과 규례가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숫자를 줄여버리는 효과를 주게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로 만드는 거에요. 근데 없는 존재로 만들면서 유령이 유령성이라는 것은 존재, 존재인데. 앞에 있는 것은 존재1 뒤는 존재 2라면 이 사이에서 유령성이 등장하는데, 존재 1이 내려가면서 존재 2가 올라가는 거죠.
존재 2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과 함께 있다면 숫자가 뭐 그리 대수겠어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주님이 함께 있다면. 누가복음에 그런 말씀 나오죠.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니라. 그래서 그 나라 의를 구하면 구할수록 내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요. 그 나라 의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하나의 집합체가 된다는 말은 기존의 나한테 달라붙었던 숫자 많은 세상의 집합체가 여기서 균열이 일어나고 그게 빠져나가는 현상을 유발시키는거에요.
세상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집합을 이뤘다면, 그중에서 그 나라 의를 구한다면 그 나라 의 쪽에서 집합체에 붙게 되면 이제부터는 그 사람한테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무얼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아야 해요. 그거는 이방 민족들이 원하는 거기 때문에 그래요. 그 나라 의와 단절된 민족들이나 하는 짓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이방 민족에게 맡기고 너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필요한 대로 주께서 그것을 채워줄 것이다. 그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 밤을 잘 넘겨야 돼요.
밤이라는 것은 낮의 끝을 의미하잖아요. 낮의 존재는 밤 되면 사라져야 되고 밤의 존재가 나타나야 되죠. 성자는 어두워야 나타나죠. 밤이 되어야 나타나는 게 별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별처럼 할 때는 이게 보여야 돼요. 이게 밤이 되어야 됩니다. 밤은 모든 인간의 활동이 소용없는 시기에요. 밤은. 인간은 낮에 활동하거든요. 그래서 여호와의 밤을 몰고 가요. 끌고 다니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러면 공간을 또 새롭게 형성하는데 그 공간은 신명기 6장 16절.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여기 ‘맛사’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맛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시험했다 또는 원망했다, 다퉜다” 그런 내용인 거에요. 그러면 맛사라는 공간은 없는 공간인데 무슨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맛사라는 공간이 주어졌습니다. 이 맛사라는 공간을 설명하기 전에 사사기 15장 19절을 먼저 우리가 한번 볼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 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이 엔학고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 공간의 등장은 사건이 있어야 되고 그 사건은 여기 삼손이 목마르다, 이 일이 “삼손이 목마르다.” 그럼 삼손 니가 뭔데 니 목 마른 것 하고 내 공간의 지명이 새롭게 돌출 되어야 되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삼손은 성신 받은 하나님의 그 당시의 사사입니다. 나실인이에요.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사람이 삼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이라는 개인적인 사건 안에 하나님의 특수한 일이 그 안에 담겼다는 이야기고요. 하나님의 특수한 일이 거기서 새로운 공간이라는 흔적을 남겨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공간을 통해서 공간에 들어있는 새로운 현실을 이 지상에 새기면서 자신의 현실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미싱을 가지고 재봉틀 운용할 때 그 평평한 섬유 아닙니까? 천에다가 전기 넣어서 두두두 이렇게 하니까 그쪽에 무슨 자국이 박힙니까? 공룡 발자국은 아니고 바늘 발자국이 찍히죠. 그 공간을 의미하는거에요. 그 공간의 연속이 뭐냐? 하나님의 이스라엘 속에 있는 언약의 경로에요. 보이지 않는 언약. 보이지 않는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과 상대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언약에 대들었다는 그 발자국들을 남기면서 그게 특수한 공간의 이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신명기 1장 20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43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함부로)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이게 뭐냐 하면 산지는 이미 기존에 민족들이 거주지로 삼고 있어요. 거주지로 삼고 있다는 말은 거기가 오아시스처럼 그렇게 된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광야가 아니에요. 애굽에 살던 식으로 살면 얼추 살 수 있는 장소에요. 자연히 허기진 이스라엘 백성은 뭘 탐을 내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거주지에 들어가서 인테리어나 바꾸고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라.” 하고 명령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이스라엘 나라하고 다른 이방 민족이 군데군데 공간에 붙어있다는 것은 일본 게임의 빠친코 같아서 구슬이 내려와서 그걸 충돌하고 빈자리로 빠지기 위해서 하나의 막대기 역할을 하는 것이 이방 민족이에요.
철저하게 광야로 가서 광야는 뭐가 없느냐 하면 살 땅이 없죠. 살 땅. 살 땅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머물 곳이 없다가 돼요. 광야를 통해서 다시 이제는 약속의 땅에 가면 산지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은 뭐냐? 머무른다. 약속의 땅은 탈취해야 얻을 수 있는 땅이다. 뺏어 버려야, 탈취하는 거에요. 전쟁에서. 그러면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의 땅이 없는데 약속의 땅이 없는 대신 뭐가 있느냐? 약속의 땅에 적용될 원칙은 있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원칙을 갖추게 되면, 그 원칙이 뭐냐? 뺏는 거죠. 그 뺏는 일은 여기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해주는거에요. 이 차이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이걸 가지고 레위기, 민수기, 출애굽기, 신명기에 나오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룩이란 이스라엘이란 존재와 여타의 언약이 없는 이방 민족의 존재. 그 차이가 거룩이에요. 거룩이 성립되려면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 없이 살아가는 것과의 그 대립, 비교를 비교하는 환경 속에서만 거룩이 나와요.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그 차이가 거룩인데 신약에서는 이방 민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불신자로 바뀌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불신자라는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엔 불신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다 신앙인이에요. 누굴 믿을까요? 자기 자신에 자기 종교의 자기가 신도입니다. 어떤 경우도 배신하지 않는 유일한 충실한 충성하는 순종. “충성”. 이것 누구한테 경례합니까? 아침에 거울 보고 자기 자신한테 경례하죠. 자기가 자기를 믿는 충실한 신앙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것은 개종 차원이에요. 종교를 바꾸는 거에요. 나 믿다가 나 안 믿는 것. 그게 신앙이거든요.
그러면 교회 가면 주로 누가 많아요? 자기한테 신앙 가진 사람들이 교회 다 모여있어요. 희한해요. 목사들은 거기다가 입맛 맞춰서 박수 쳐주고. “하면 됩니다.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지 마세요. 주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뭐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 귀절 다 동원 시키죠. 그러니까 굳이 신앙 바꿔가면서 교회 다녀야 할 이유가 없어요. 있는 교회에 그냥 옷만 바꿔입고 그냥 소스만 바꿔서, 양념치킨에 소스만 이렇게 다른 소스만 바르면 돼요. 칠리소스로 바꾸면 돼요. 그것만 바꾸면 교회에서 그걸 신자라고 해줘요. 본인이 신앙이거든요. 본인이 수 적 일의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곳에 가서 “어떻게 하면 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거기는 신자 되는 곳이 아닙니다. 신자 되는 것은 탈취해야 돼요. 탈취. 어떻게? 이질성을 가지고. 이질성을 확인하게 되면 신자 됩니다. 굉장히 쉽죠? 굉장히 쉬운거에요. 교회 나가서 교인 안되면 신자 되는 겁니다. 교회 나와서 교회를 안 믿으면 신자 되는거에요. 교회 믿으면 불신자 되고. 왜냐하면 교회는 부동산이고요. 부동산은 자기가 과거에 뒷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돈이.
교회에 예배당 없으면 굉장히 괜찮은데 문제는 자꾸 이게 집합이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예배당을 만들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의 임무는 뭐냐? 부동산의 가격을 유지하는 게 모든 목회자의 주 임무가 그거에요. 어떻게 하면 부동산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가? 뭐 데모를 하든지 400억 뽑아내든지 하여튼 있잖아요. 교회는 오직 부동산이에요. 부동산 건물들이에요.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야, 돈 안 내도 되겠다.” 왔다가, 어디 뭐 교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입 니까? 교회 유지비용은 누가 내는데요? “그거 뭐 장로님이 대겠지” 장로들이 화를 내죠. “내가 옛날에 많이 했는데 이제 너희 차례인데? 나 70대 때 집 바쳤어. 지금 50대 뭐해?”
“애들 교육을 강남에 맡길 거야 아니면 교회에 맡길 거야? 다 불신자 만들려고? 불신자 만들어서 지옥 안 보내려면 교회 교육 기관에 투자해.” 이렇게 나오죠. 그 투자가 뭡니까? 역시 부동산 구입이에요. 부동산 구입입니다. 부목사 들이면 부목사 사택 둬야 되죠. 부동산 아닙니까? 교회를 부동산으로 보게 되면 이해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모든 광고 시간이 부동산이에요. 그러면 다 이해가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냥 조용하게 보내지 않고 다툼이 일어나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먼저 그 다툼은 여기에 공간을 마련해요.
어떤 공간이냐?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속삭임도 다 들으시는 식으로 계시다. 또는 인도하신다는 것. 이 점을 그들은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그것을 파악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이제 남은 인생 동안에 할 일이 여기서 이미 확정되었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뭐하면 돼요? 답 다 가르쳐 줬어요. 여기. 하나님께 뭐하면 됩니까? 그걸 제 입으로 이야기 해야 돼요? 불신자 말고 성도의 남은 일이 할게 뭡니까? 앉으나 서나 하나님께 원망하면 돼요.
원망을 안 하면 사람이 점잖은 사람이 되어서 음흉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원망하라고 지금 우리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거에요. 원망하라고. 뭐 기쁨 감사? 진짜 웃을 일입니다, 그거. 점잖은 양반, 또는 숙녀. 점잖은 양반을 주께서는 원망이 나오도록 유도하지요. 처음에는 너무 점잖기 때문에 원망 안 해요. 그 대신 감사 헌금으로 보답해서 내가 스스로 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한답시고 극복을 시도해보지만 다 헛짓입니다. 결국은 “이렇게요? 이렇게요?” “너무 심하게 조지신 것 아닌지... 하나님 이거는 그쪽에 돈 좀 드렸잖아요 근데 이렇게 심하게 나올 줄 몰랐습니다. 수련회까지 참석하는데 이렇게 심하게 나오면 저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해가지고 이제 원망이 나와요. 원망이 나오면서 나의 삶의 터전을 맛사로 만들어요.
하나님께 원망했다, 하나님께 시험했다는 공간으로 만들 때 나는 뭐다? “나는 광야다”가 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유령같이 다루어지니까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의 삶에서 맛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데 이 맛사가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므리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는 나를 늘 시험하면서 살아간다.” 이게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한시도 시험하지 않을 때가 없어요. 늘 시험합니다. 맛사, “하나님을 시험한다.” 므리바, 또는 다투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이 말은 내 쪽에는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관리 소홀이 아닌가 하는 생각. 나의 가치를 영 무시하고 나를 하나님이 나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
다시 말해 내가 어느 정도까지 내 존재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위치에 있는가를 수시로 우리는 시험하는 그 현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 현실이 우선 있고 난 뒤에 거기서 뽑아져 나가는 하나님이 계신 현실과 내가 나의 현실과 어떠한 존재와 공간과 공간의 그 차이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의 거룩이죠. 거룩이라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때 그때 우리는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이 생깁니다. “아, 이용하고 있구나.” 그 이용당하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즐거움. 하나님의 자기 즐거움에 말려 들어가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해야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걸 계속 만드는거에요. 그걸 가지고 그리스 신화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걸 에코라고 합니다. 에코는 메아리. 다른 말로 하면 반복성. 나르시시즘에서 자기만 쳐다보다가 공간의 들려오는 그 소리, 공간의 소리로 말미암아 나르시시즘에서 잊어버리는 것. 그러면 이쯤 했으면 여러분들이 “아, 신명기가 어떻게 진척되는가”가 여러분들이 감을 잡을거에요.
이것이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이 그들이 굳이 광야를 통과해야 될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까 질문을 제가 답변을 안 했어요. 뭐냐하면,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로 가는 그 목적지를 하나님이 어디에다가 그걸 감추어 놓았느냐 하면 율례와 법도 속에 감추어 놓았어요. 율례와 법도 속에 “어디로 가십니까?” 목적지가 있어요. 목적지. 이 목적지는 바로 제사드리는 장소에요. 이게 신명기 12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12장에 보면, 그걸 먼저 선점해서 백성을 기다리는 식으로 거기에 계신 분이 있어요. 12장에 보면, 12장의 핵심은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이 계신 곳이 바로 뭐냐? 공백이에요. 빈자리. 하나님의 자리는 빈자리입니다. 이 공백을 확대해 나간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에요. 성전.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없어요. 성전 안에 없어야 돼요. 없다. “성전에 법궤 있잖아” 법궤 안에 없어요. “법궤 안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 다음에 만나, 그리고 깨진 돌판을 대신하는 돌판. 그 돌판 있잖아요.”하는데 그 돌판의 있음은 그 언약궤 뚜껑에 있는 그 피, 피 흘린 분의 없음과 대비하기 위해서 인간의 반항심과 인간의 배신과 인간의 대한 반발의 있음이 언약궤 안에 담긴 거에요. 언약궤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있는 것은 뭐냐? 그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 대들었던 증거물이 바로 이 언약궤 안에 있습니다. 그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언약궤는 그 안에 있음으로서 이게 최종 도착지점이기 때문에 이거는 그 언약궤는 자체적으로 목적이 종결되었어요. 종결되었는데 이 언약궤가 자꾸 옮겨져요. 약속의 땅으로.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율법과 언약이 완성되는 그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언약궤가 종결되면서 이거는 무슨 스타 마술 쇼도 아니고 분명히 언약궤가 있었는데 갑자기 뭐 검은 천 하나 딱 해가지고 해놓고 “자, 보세요.”하고 천을 확 거두니까 거기에 언약궤가 없어졌어요. 언약궤가 없어지고 성전도 없고. 없어요. 그냥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과 제사가 있었는데 그 현장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뭐냐? 약속의 땅이 지상에 없고 이게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지상에 분명히 있었는데 없어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그 경로가 이 구약 역사거든요 이스라엘 역사.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역사가 이렇게 펼쳐지잖아요. 출애굽 해서 이렇게 온다 이 말이죠. 이 모든 역사가 여기 전봇대 하나 있어요. 커다란 전봇대. 전봇댄데 십자가 비슷하게 생겼죠.
전봇대의 긴긴 그림자였던 겁니다. 그림자고, 전봇대, 십자가가 실체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었는데 있던 예수님이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은 보이지 않죠? 없죠. 보이지 않고, 없고 주어진 것은 보이스, 음성. 우리 내면의 음성으로 주어집니다. 말씀에 담겨서 음성으로 주어지는거에요. 그래서 구원은 들음으로 구원을 받아요. 보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들음으로써 구원받아요. 그것도 마음의 소리로 들음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참, 이게 보고 믿었으면 참 좋겠는데 들음으로 올 때 답답하죠. 근데 이 답답함을 누구도 경험했는가? 바로 예수님도 이 땅에 아버지의 명을 받고 이 땅을 살면서 예수님도 똑같이 그런 경험 했어요.
주님의 지시와 음성을 듣고 성령 안에서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가야 될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갔습니다. 옮겨갈 때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말씀만 살아있다면 저는 그 말씀 속에 제가 죽겠나이다.” 그쪽으로 끌려간 거에요. 신명기에 나타났던 이 실제적인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 이거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림자에 속하죠. 보통 그림자는 어떻습니까? 색깔이 검은 그림자죠. 왜냐하면 고유의 사물의 색채가 없어지니까 검게 보여지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검은 그림자를 생각하지 않고 이걸 하얀 그림자로 바꿔도 괜찮다고 봐요. 하얀 그림자. 역시 색깔 없는 건 마찬가진데, 빛으로 오신 분의 긴 그림자기 때문에 하얀 그림자라서, 비록 우리가 내 실체가 없고 그림자로 다뤄진다 할찌라도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하면 된다는 그런 차원에서 그렇게 표현해 봤습니다.
자, 어디로 갑니까? 해답이 신명기 1장 30절에 있습니다. 신명기 1장 30절에, “어디로 가십니까?” 자, 이런 것들은 보지 마시고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답변해야겠습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1번 약속의 땅으로.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답변이 30절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앞서가신다고 되어 있는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돼요? 하나님께로 가면 되죠? 내가 어디로 갈까를 내가 알 이유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뜻은.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냐?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해요. 그러면서도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우리가 미리 확보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이끄실 겁니다.
그러면 따박따박 따라가면 되지 않겠는가? 중간에 다 샙니다. 아무도 안 따라가요. 아무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지금 따라가면서, 아까 수식 도표에서 이게 없어지면서 점점 내 존재감이 없어져서 이게 제로가 되어야 되거든요. 삼손 같은 경우에 따라가면서 결국은 못 따라갔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삼손이 따라가야 할 때는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삼손을 눈 빼죠. 눈 빼고 머리카락 잘라서 다시 말해서 삼손이라는 것은 더는 없게 만들면서 삼손이게 하신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삼손은 자기가 점점 더 소실되고 소멸하는 그러한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게 바로 나실인이에요. 나실인이라는 것은 다 바친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삼손을 자기 쪽으로 그림자니까, 삼손은 예수님이 실체니까 실체답게 그림자를 자기 속으로 빨아 당긴거에요.
갈 바를 알지 못한다. 네가 알 필요 없죠. 주께서 빨려 들어가게 할 거에요. 어느 장소로? 죽음의 장소로. 빨려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이러한 말씀 믿고 하나님 따르겠다고 다짐을 하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탐꾼을 보내요. 신명기 1장 23절 24절, 정탐꾼 보낸 것에 대해서 모세가 동의했기 때문에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아, 이거는 신명기에서 정말 반전이에요. 분명히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살아본 사람이 누구는 못 들어가도 약속의 땅은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라고 생각하겠죠. 근데 못 갑니다. 한국 선수단 기수가 되어서 기순데 못가요. 한국 선수의 감독인데 감독 못 오게 만들고 인도로... 인도 양궁 대표 선수는 참석도 못 하고 소환되어버렸어요. 왜 그러느냐? 빈자리가 있어야 하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이끄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 살아있기 때문에 언약을 가리웠다는 그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삼손을 최후의 진격 조에서 빼버리죠. 그러면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여호수아? 아닙니다. 언약이 들어갑니다. 여호수아가 뭐 대장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호수아가 아니라고 하느냐? 이게 여호수아 5장에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5장 13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이렇게 했죠. 그러니까 15절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땅이 네 땅이냐 내 땅이냐” 이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지금 언약을 하나님이 있어야 할 땅.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야 할 땅, 그 땅이 약속의 땅인데 지금 여호수아는 과거의 인물이 과거의 체험으로 다져진 인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미래에선 몰라요.
그냥 우리가 들어가서 생존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냥 천사가 와서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하나님한테 이야기했으니까 우리 협조합시다.” 이런 것이 아니고 칼을 빼 들고 막아서고 있습니다. 막아서니까 적인 줄 알고 우리 편이냐 적이냐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이 대화가 왜 필요하냐 이 말이죠. 이 대화가. 그것은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 인간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를 드러내는 공간이 약속의 땅이에요. 따라서 속된 것만 있으면 안 되고 거룩한 것도 같이 있어야 하는데 거룩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거룩은 누군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천군 천사가 함께 있는 이 땅, 이 땅에 우리 성도로서 우리는 지금 발생 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인간만 보지만, 우리는 성령이 접수한 이 세상에서 주님의 활동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언약이, 이 모세 언약, 신명기 언약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면 새 언약이 와서 이 율법은 여기서 스톱이 되어버립니다. 율법도 불타버려요. 율법도 불타버립니다. 율법이 불탄다는 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을 폐한다고 되어있어요. 폐한다. 율법을 없애버린거에요.
더 이상 율법의 지도를 따를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 거에요. 신약에서는. 율법이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의 잔재였어요. 율법으로. 율법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율법 안에 복과 저주가 있죠. 그러니까 새 언약이 있는 사람은 무엇의 대상이 안된다? 율법의 복과 저주의 그 지배에서 벗어난거에요. 그러면 새 언약 안에는 저주가 없고 뭐가 있습니까? 복이 없죠.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서 멸망하고 율법에 의해서 멸망당한 그들이 이스라엘이 남은 자가 전 세계로, 주변 나라이지만, 전 세계로 다 퍼져버렸어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언약 적용이 이스라엘 경계선을 넘어서 전 세계에 다 퍼지게 되면 율법이 있는 곳에 필히 뭐가 있습니까? 저주가 있지요? 그러니까 세상 전체가 에브리원 윌 번(Everyone will burn.) 전체가 저주받는 세상으로 달라집니다. 그 속에 누가 뛰어드는가? 예수님도 끼어들죠.
예수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지상에 왔죠. 지상은 무슨 나라? 저주가 확정된 나라. 저주가 확정된 세계이기 때문에 이 안에 뛰어든 것만으로 예수님은 뭘 받습니까? 십자가에서 저주받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예외가 없어요. 우리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저주를 받아야 됩니다. 저주에서 통과해서 복 되는 것은 이것은 바로 새 언약의 개입으로만 이것이 복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어디에 저촉을 받느냐? 새 언약의 저촉을 받습니다. 성도는 오직 복의 대상이에요. 복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낌없이 뭘 받아도 돼요? 아낌없이 죽어야 합니다. 아낌없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협박 거리가 안 되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죽이는 그것이 복의 하나의 양상이고 복의 하나의 형식이다.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게.
지난 주일 낮 설교 때 제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이왕 죽는 것 트럭에 받혀 죽는 것을 원합니까 외제차에 받쳐 죽는 것을 원합니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우리 교인들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줬어요. “외제차요.” 그런 생각을 가지니까 죽어 마땅한 거에요. 아까 몇 가지 나왔죠. 앞으로 우리의 할 일은 뭐 밖에 없다? 원망. 죽어 마땅하니까. 죽어 마땅함이 얼마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지 몰라요. 죽어 마땅함이. 이왕 죽는 것 실컷 원망하고 죽읍시다. 실컷 원망하고. 원망하라고 주께서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십자가, 예수 언약 안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통합된 그 모든 사건이 우리에게 육신에게 주어지는 우리는 육신이 주님의 말씀의 돌판이 되는거에요.
모세가 들고 왔던 그 돌판에 주님의 율법이 있는 것처럼 그 율법이 현실화된 한 조각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언약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어요. 내가 태어나고 죽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말씀이 말씀 되게 살아나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있다는 이게 바로 우리의 존재의 원인이었던 겁니다. 마땅히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고 그런 권리도 없어요.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질적 일의성. 말이 어려워서... 질적인 하나밖에 없는 일, 의미, 의미성. 질적 의미성이 계단을 타고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 넘친 이상은 수적 일의성. 내가 분명히 여기 있다는 수적 의미성에 이 질적 의미성의 현실과 수적 의미성의 현실에서 질적 의미성의 현실이 우세하고 승리할 때 이게 의고 이게 거룩이에요. 이게 선함이고, 이게 생명 나무고 그런거에요.
신명기 한번 봅시다. 참 이런 개명을 줘 놓고 이걸 지키라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잔인하죠. 정말 하나님은 봐주는 것 없습니다. 7장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될 하나밖에 없는 반항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강의에서 제가 여러번 했습니다만,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어야 정답입니까? 원망이에요. 원망입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라.
유니세프도 가입하지 말고 아프리카에 물 판다고 돈 보내지 말고. 이웃이 죽든 말든 불신자란 이유 때문에 죽든 말든 거기에 동냥도 하지 말고 동냥 자체가 뭐고 아예 불쌍히 여기지 말라에요. 불쌍히 여기지 않으려면 누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야 돼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야 돼요. 그 말씀이 그렇게 도달할 때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이거는 뭐 순간적으로 확 튀어나오는 건 뭐냐? “너무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아직도 유령이 아니고 인간이구나... 인간적 요소가 있구나. 이렇게 되는거죠.
원망이라는 것을 경유하고 거쳐야 비로소 그 때에 나로 막혀있던 주님의 본심이 그 질투하는 본심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신명기 4장 33절 보겠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묻는 겁니다. 하나님께 답변해야죠. 정답은, 없더냐. 그러면 너희들은 왜 살아있지? 모르죠. 몰라요. 그 이유를 알려줄게. 이제 이번 시간 끝으로 제가 이 문제를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질적 일의성에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짐승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투입되어버리면 어린 양이 제일 이렇게 구심력을 갖추고 마지막 단계에 어린양이란 짐승이 투입되어 버리면, 이 취지가 순서를 거꾸로 밟아서 거꾸로 흘러가게 되어있죠. 흘러가게 되면, 이 전부가 뭐가 되느냐 하면, 양과 동일한 운명의 강요당하게 되는 단체가 됩니다. 왜? 질적 의미니까. 수적 의미로 있던 그 의미에 질적 의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투입됨으로써 이것이 흘러가게 되죠.
흘러가게 된다고요. 근데 짐승이 피를 흘릴 때면 짐승이 자살합니까? 짐승이 스스로 자살해요? 그런 짐승이 있을 순 있는데, 누가 잡아요? 인간이 짐승을 잡아야 짐승은 피가 나오게 되어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누굴 잡아요? 내가 주님께 원망해야 그 사이에서 뭐가 출현 됩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출현 되는 겁니다. 짐승이라 하는 것은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인간 세계의 바깥에 있는 천시 받는 대상이 짐승이잖아요. 그러면 짐승을 천시한다는 말은 누굴 존대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끼리 세계가 자기가 스스로 존경하기로 합의를 봤잖아요. 거기에서 짐승같이 오신 분이 투입되어서 스스로 귀족으로 여기고 점잖게 여기고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는 그 코스에, 회로에 이제 이스라엘이 거기에 말려들게 될 겁니다. 계속해서.
그래서 그렇게 해서 주께서 얻고자 하는 건 뭐냐? 이득은 뭐냐? 그게 바로 율법의 완성을 보는 회로를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않죠. 끝까지 그들을 갋을 거에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할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우리 내부로 유일한 질적 의미로 오게 되면 우리는 나의 존재 의미와 마주치면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죠. 맛사죠. 므리바. 다투다, 또는 시험하다. 그 의미가 구약 때 출애굽기 신명기에 있었던 그 행위가 그대로 우리한테 복제판으로 에고처럼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씀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있는 말씀 판이 되어요. 돌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래서는 여러분들은 “그럼 어째? 나는 지옥가냐?” 이렇게 초조하거나 할 필요 없죠.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 안에 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율법이 모든 것이 폐기된 상태에서, 그림자로 전환된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는 입장에서 느긋하게 우리 속에 작동하고 있는 주의 말씀의 현실을 우리는 맛보면 되죠. 그것은 우리가 나서서 뭐 설칠 필요가 없어요. 그냥 하는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니는 내 둥지에 그냥 참여하면 되죠. 둥지란 주님의 회로의 최종 구심점이 바로 둥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 모든 존재를 심판하는 그 자리에 오늘도 여러분이 참여하신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면서 식사하러 가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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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5강 - 신명기 : 어린양과 동행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1페이지 위에서 14번째 줄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나는 늘 비 본래적이기에 스스로 극복할 대상조차 의미 없다, 대상조차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지금의 나는 원래 있는 나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나는 나의 편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고통과 죽음에 취약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잘되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고통이 특히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이게 창세기 3장 19절에 보게 되면, “너는 필경은 흙으로 실컷 고생하다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리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네가 그 속에서 취함을 입었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네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 여기에 대해서 불신자, 성경을 안 믿는 사람에게 제가 대꾸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대안이 있느냐? 대안을 제시해봐. 성경은 엉터리고 안 봐도 되고 밀어붙이는데 그러면 인간인 네가 흙으로 돌아가는데 있어서의 네가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대안이 뭐 있느냐?” 그럼 그쪽에서 하는 말이 “죽고 난 뒤에는 모르겠다. 그거는 죽으면 그만이지, 끝이지. 내가 거기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나?” 이렇게 나올 거에요. 그러면 그 소세지는 어떻게 할 거에요?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의 현실성.
지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나오니까 이게 성경이라는 소설책에 가상 민족으로 이스라엘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나 실제로 지금 이스라엘이 파리 올림픽에 선수단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토대. 그것 취소,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요? “네 나라는 없는 나라야. 네 나라는 없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뿌리를 우리가 못 본 채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하고 달라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만들어낸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은 하나님과의 언약 없이 만들어진 민족이에요. 따라서 단순히 성경이 성경책 안에서만 맴도는 픽션이 아니고, 가상 만들어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고 이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 창세기 3장 19절에 준해서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안은 없습니다. 지금 좀 있다가는 사람도 있고, 이 자리에. 조금 살다 갈 것 같은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한 방향으로 가고 있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20절에 “아담은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여기 갑자기 하와라는 뜻은 생명이에요. 분명히 남편 아담한테는 “흙으로 돌아간다.”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여자에 대해서는 “생명으로 돌아간다”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생명과 관련되어져서 너에게 내가 조치를 하겠다. 그 조치가 바로 가죽옷을 입히는 거에요. 가죽옷을 입히는 것은 남자의 기능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 여자의 기능은 같이 흙으로 돌아가기는 가는데 여자의 속에서 생명의 징후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가죽옷과 결합시켜서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러면 여기 창세기 3장 19절에 남자가, 아담이 모든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저주. 여자에게 특별히 어떤 징후가 등장하는 것은 생명. 그러면 여기서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는 것, 생명 나무 때문에 생명이 주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으로 이미 창세기에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계통,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 여러분도 분명한 사실인데 여자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생명 되시는 메시아가 오는 것도 동일하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이에요. 교회 생각하지 말고 현실을 생각해야 돼요. 교회는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없어지고 그게 교횐데 지금 교회 어떻게 다니고 교회 어떻게 섬기고 이거 하려고 성경 보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교회가 가로막은 현실을 교회를 치우고 바로 현실 속을 바로 볼 수 있느냐. 그것은 저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문제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신명기 12장에 그 여자의 후손, 언약을 주신 가죽옷과 더불어 이어지는 생명이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었다는 이야기했습니다. 했는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과 동행해서 가게 했는데 신명기 1장에서 보았듯이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어디로 갑니까?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야됩니까?
신명기 1장에 30절 31절에서 주께서 앞서서 이끄실 것이다. 그곳이 어딘데요? 그곳이 신명기 1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제 멈추는 곳.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끌고 이끌다가 멈추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뭐냐?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가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파 중에서, 열두지파죠. 지파 중에서 다가 아니고 한 지파를 통해서 주님의 자신의 이름을 거할 곳을 지정하게 됩니다. 그게 유다 지파를 통해서 지정된 곳,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솔로몬은 열두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세 지파는 레위 지파인데 레위 지파가 그 유다 지파의 주의 이름이 도착할 때까지의 백성들을 이끄는 중간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바르게 했다는 뜻은 아니고 충실히 했습니다. 레위 지파가 했던 그 일을 이제 다윗이 나와서 레위 지파의 허점과 한계를 넘어서서 그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됩니다. 그럼 성전을 계획하신 것은 다윗이고 실제로 현실적으로 성전이 등장한 것은 솔로몬인데 그 현실적으로 등장한 그 솔로몬 성전, 그것 나중에 불타버립니다. 없어지죠.
그것은 아직도 율법이 솔로몬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게 또 있는 거에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 이름에 두시는 그 성전을 둠으로써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주님께서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그 지정된 이름으로. 그 장소, 그 장소가 이렇게 있는데 그 장소에 모든 율법이 여기다가 다 집결됩니다. 여기다 집결되면서 완성이 돼요. 집결. 집결되고 성전에서 완성이 되면서 성전이 불타게 되게 되면 이 모든 율법도 같이 뿅 하고 다 불타고 사라지게 됩니다. 율법이 사라지게 되면, 율법이 사라지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제 인간하고 상대 안 한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이 이제 인간하고 상대 안 하는거에요. 상대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저주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들추어졌을 때 하나님은 이제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네 자로 이렇게 그걸 ‘기쁜 소식’이라고 해요. 상당히 역설적이에요. 하나님이 나 같은 것하고 상대해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상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요소와 내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연결되어있는 곳으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붙잡으려고 하는 거에요. “뭐 어떻게 하면 돼요? 뭐 어떻게 해 드리게 되면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이게 계속 남아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계속 상대해서 “상대한 나는 구원하고 상대 안 한 저 불신자들은 그만 지옥으로 가든 말든 난 모르겠고 저는 꼭 챙겨주셔야 됩니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강하게 갖고 있어요. 근데 일절 모든 인간하고 상대하지 아니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 쪽에서 애 쓸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없습니다. 막혀있습니다.
이 성전의 장소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서 오직 한 지파가 대표, 유다 지파가 대표로 주어져서 성전 만들었어요. 이 유다 지파가 대표해서 열두지파를 대표해서 나서는 이 언약을 가지고 무슨 언약이냐?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나는 다윗하고만 이야기한다.” 전에는 “나는 열두지파 모두하고 이야기할게. 율법으로.” 이다음에는, “난 다윗하고 언약한다.” 그다음에 다윗 언약 성전 불타고, “나는 누구하고도 이야기 안 한다.” 나는 누구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전에 율법을 준 취지는 어떻게 되고 다윗에게 이야기한다는 이 취지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괜한 말을 하신 건가? 이 취지는 어디서 살릴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다윗의 자손하고만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 그것도 인간이니까 인간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과 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대화상대가 되는 다윗의 자손은 인간의 육의 혈통 계통으로 오는 게 아니에요.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임신해서 인간인데 전혀 인간이 있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잉태시키고 잉태된 자만 이야기하면서 새 언약을 이루어 버려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로마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기쁜 소식. 이걸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하고 상대하지 않아 주셔서 너무 기쁩니다.”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하고는 상대 안 했는데 예수님하고 상대한 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 무슨 상관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나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바로 하나님은 너하고는 상대하지 않고 따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에게 잉태한 그분과 상대하는 것을 믿어라.” 이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거에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제 조건이 뭐냐? 하나님은 나하고 상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되죠.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짐이 되거든요. 이 덩어리.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61kg 나간다는데. 61kg 나가는 덩어리.
저는 72kg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만... 이 덩어리. 맨날 몸무게 저울질 해가지고 불었는지 줄었는지, 불어도 걱정 줄어도 걱정. 이 짐을 계속 지고 가는거에요. 언제 이 짐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을겁니까? 복음 안에서 그것이 이미 해소되었다는 사실을 후차적으로,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차후적으로 우리는 수용되게 됩니다. 이거는 우리가 믿는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안에서 선물로 온 믿음 안에서 다했네, 다했어. 그렇게 되죠. 그 선물이 오면서 왜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고 왜 다윗에게 언약도 성전 하나 예배당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해야 되느냐는 것을 한꺼번에 우리는 성경 구약성경 신약성경 다 같이 밀려옵니다. 주께서 다 하셨다는 그 토대 위에 다 밀려와요.
그래서 이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점을 여러분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두시려는 이 자리는 결국 다윗에게도 실패하고 다윗의 자손, 다윗에서 나온 다윗의 자손에게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게 영원한 성전이고 생명이라는 사실. 그게 하와,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완성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신명기에서부터 그 흔적을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버텨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는데 어떻게 버텨야 되는가? 그러면 구약 성전은 모조리 다 지옥가는구나.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 신명기에서 한번 뽑아봤어요. 뭘 뽑아봤느냐 하면, “죽여”를 뽑았습니다. 이런 짓 한 자는 아예 죽여버려라. 그 대목을 쭉 한번 뽑아 봤습니다.
그 근거가 모세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 찾으면 팔 아프니까 제가 알아서 대표로 찾고 여러분 듣기만 하세요. 출애굽기 21장 14절,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 15절,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16절, “사람을 후린(유괴)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17절,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그다음에 32절, 이건 소에 관한 거고요.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
이것 죽이고 저것 다 죽이고... 뭐 남는 사람이 없겠네요. 다 죽이고요. 레위기 24장, 출애굽기 다음 레위기죠. 24장 16절,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레위기 27장 29절,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찌니라”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팔거나 한 사람들은 속함도 사함도 받지 못하고 반드시 죽일찌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민수기 3장 38절, “장막 앞 동편 곧 회막 앞 해 돋는 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찌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근거해서 드디어 신명기가 쭉 됩니다. 신명기 13장부터, 그러니까 신명기 12장에 택한 여호와께서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하는 그 택한 경로에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제거 대상자들을 이렇게 반드시 죽이리라고 되어있어요. 신명기 13장 5절, 여기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찌니라” 13장 9절, “다른 신을 섬기자 한 자는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리고 10절,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 죽이라” 돌로 쳐죽이는 것은 상당히 현실성, 실감나게 만드는거에요. 사람이 돌을 쥐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거기에 아주 절실하게 관여하고 있다는거죠.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 사람들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할 때 사람들은 돌을 들고 왔어요. 여인 있고 돌을 갖고, 그다음에 남은 것은 돌로 치게 되면 바로 신명기 율법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명기 13장 15절, 어떤 집단 마을 전체가 하나님의 신을 섬기자고 같이 편승하거나 동조되어있다면 그 성읍 자체의 모든 거주민들을 다 죽여버려라. 17장 5절, “어떤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거든, 그다음에, 성문에서 끌어내어 돌로 그 남자와 여자를 쳐 죽이라.” 성문이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한 그 자리죠. 성문에서 죽이라.
그다음에 17장 12절, “사람이 만일 천자히(함부로)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완전히 제사장과 재판장은 007 살인면허를 갖고 있습니다. 신명기 19장 16절~19절,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거든 이런 자들은 악을 제하여 버려라.” 이게 죽인다는 이야기에요. 그다음에 신명기 21장 21절, “자식이 집에서 말을 안 듣거든 동네에 끌어다가 동네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돌로 쳐 죽이라.” 자식 그동안 1억 들여서 잘 키워놨는데 19살 돼 가지고 말을 안 듣는다. 돌로 쳐 죽이라. 신명기 22장 21절, “누구든지 처녀가 아닌데도 처녀라고 속이고 결혼하거든 그 처녀를 돌에 쳐 죽여라.” 가뜩이나 애기 못 낳아서 지금 인구수 줄 판인데, 이래 죽이고 저래 다 죽이고 좀 남는 사람이, 살아 남는게 희한해요.
아까 우리 십자가 마을 전문 사진가가 사진 찍었잖아요. “서로 웃으세요”하고 찍었는데 과연 누가 살아 남을지... 아, 이거 신명기 들이대면 참담합니다. 22절,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하는 것 보면 쳐 죽어라.” 신명기 24장 7절,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유괴)다가 그를 부리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찌니” 신명기 18장 20절, “만일 어떤 선지자도 아닌게 선지자 흉내를 내거든 돌로 쳐 죽이라.” 19장 12절, 이제는 목사가 쳐죽을 판이에요. 교인이 목사 고소하고 교회 분위기 참... 겁나서 설교를 못하겠어요. “쳐 죽여버려라”. 19장 12절,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을 상하게 하고 죽게 하거든 그 사람은 아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쳐 죽여버려라.” 신명기 20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여라.” 신명기 25장 12절 “만약에 자기 부부가 만났는데 남편이 남편끼리 싸우는데 여자가 아내가 자기 남편의 편을 들기 위해서 힘을 보태기 위해서 상대방의 남자의 음낭을 잡거든 그는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너는 죽여버려라.”
자, 이제 질문 나갑니다. 이렇게 신명기에서 이것 죽이고 저것 쳐 죽이고 다 쳐죽이고 이렇게 할 때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사람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뭡니까? 뭐가 되겠어요? 반항이죠. 반항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겁니다. 신명기 13장 6절에 보게 되면,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찌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네가 먼저 손을 얹고 난 뒤에 죽여라” 그러니까 “여보 어디 같이 좀 가자. 당신 어제 이 여호와보다 괜찮은 신이 있던데 당신 한번 믿어볼래? 네 어젯밤에 새벽 2시 46분에 이야기했잖아. 어디 갈래?” 가가지고 마을광장에서 안수하고 쳐 죽여버려라. 아내. 아내하고 헤어지는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에요. 아예 율법을 동원해서 사적인 소망을 이룰 수도 있는 문제죠.
왜 이렇게 하시는가?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가? 심지어 가족인데요. 참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어려운 용어를 했습니다. 수적 일의성, 이 구조에 질적인 일의성 구조. 구조라는 말은 현실. 현실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계속해서 어린양의 피가 넘어오면서 이스라엘 전체까지 확산이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은 이 율법이 사적인 일까지, 사사로운 일까지 개인적인 일까지 가정의 일까지 모두 이스라엘 전체 일에 속속들이 들어왔을 때 여기에 모든 관계성을 율법을 집어넣어서 절단시키는거에요. 죽여버려. 죽여버려. 죽여버려. 하는 식으로 절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수적 일의성, 수적으로 내 존재를 지키려는 의미에서 어린양의 피의 의미로 넘어오는 그러한 새로운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신명기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걸 생각해야 돼요. 창세기 3장 19절에서 어차피 우리는 흙으로 와서 흙으로 죽는 거에요.
죽는데 그러면 생명은 어떻게 되는가? 생명은 저주 받은자 + 언약, 모세율법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 생명이 나오는 공식. 이 방정식을 하나님께서는 성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은 인간을, 어차피 죽을 인간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의 생명 나무의 현실성을 구현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는거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너희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기서 반드시 내가 언약을 준 너희와 언약이 없는 다른 민족과 극단적으로 차별화시킨 것이다.” 그 차별화시킨 것을 신명기 4장 5장 계속 보면,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이게 출애굽기 십계명에도 나와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준 사랑의 대상체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사랑 is 뭔들. 사랑을 위해서 내가 뭔들 못하리. 질투하면서 제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를 알리기 위해서.
제거될 자는 제발 좀 죽여줘. 죽어 나가 제발. 어차피 너는 죽잖아. 저주받아 죽잖아.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지금까지는 뭐냐? 제거 대상이죠. 그럼 제거 대상만 있느냐? 제거 대상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챙기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런 이런 자를 챙기라는 겁니다. 그 챙기는 대상자가 누구냐? 바로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의 특징은 뭐냐? 땅이 없어요. 땅이 없다. 따라서 레위 지파의 같은 류. 같은 부류에 속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땅 없는 자, 땅 없는 자가 누구죠? 나그네. 그다음에 고아. 그다음에 과부. 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이거는 외국 이주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 취직하려고 캄보디아에서 오고 이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글로벌한 세계에서 자기 나라 네팔에서 버는 돈보다 한국에서 버는 돈이 한 달만 해도 일년치 다 버니까 그걸 노리고 오는 것은 그건 이주민이에요. 그건 난민이고. 여기서 말하는 이거는 이스라엘 내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내. 직통하는 하나님이니까 언약을 주신 자기 이스라엘 동포와 동족에 관한 문제에요. 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이들이 레위 지파는 원래 하나님께서 땅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부동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부동산 허락한 예외는 있어요. 뭐냐? 지방 제사장들. 지방 근무하는 제사장들은 특별히 그들에게 중앙 성소, 서울에서 근무하는 것과 지방, 대구에서 근무하는 것 하고 달리 처리해줬어요. 역시 중앙에서 해야 먹을게 많이 나오죠.
왜 그러냐 하면 십일조가 중앙에 다 모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땅은 없는 대신 여기 뭐냐? 다른 열두 지파에서 짬짬이 냈던 그 십일조를 레위 지파와 거의 같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원래 레위 지파가 아니고 이거는 다른 지파의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거든요. 근데 원래 뭐가 있습니까? 땅이 없었던 게 아니고 땅이 있는 자들이에요. 땅이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땅을 빼앗든지 아니면 땅을 개간해서 생산물을 낼 수 있는 가장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버려요. 그러니까 가장이 남자잖아요. 남자를 죽여버려요. 여기서. 과부, 아빠 엄마 다 죽이죠. 나그네는 땅을 빼앗기게 되죠. 땅을 빼앗기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빚을 졌을 경우입니다.
이들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걸 만들어내요. 의도적으로. 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느냐 하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이들이 출애굽에 취지를 계속 실어나르는 화물 객차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물 객차. 출애굽 때에 “이젠 출애굽 끝났어. 끝났어. 우리는 홍해 건너왔어. 이제는 약속의 땅에서 우리끼리 살면 돼.”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인간들은. 이게 뭐냐? 인간의 기억이에요. 인간의 기억은 시간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늘 누구하고 대화하느냐? 과거의 나랑 대화해요. 인간은 늘 과거의 자신과 대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 중얼중얼하든지 아니면 누굴 친구를 만나도 그 친구하고 대화하기 싫어요. 친구니까. 친구와 전에 좋았던 그 시절을 친구에게서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옛날 잘했던 것 있잖아. 축구 한번 할까?” 이렇게. “우리 옛날 전에 만났던 그 우리가 연애할 때 갔던 그 앞산에 가볼까?” 이런 것. 과거를 기억을 유지함으로써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한결같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고, 동질성 자기 스토리를 이야기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이 평소에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가? 여러분 꿈에 보세요.
제대한지 40년 돼도 군대이야기 나옵니다. 꿈은 속일 수가 없어요. 의식적으로 못 숨깁니다. 왜 군대 생활이 남자한테 그렇게 계속되느냐 하면, 꿈에는 군대 생활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한거에요. 얼마 전에 군에 제대한 사람도 있지만... 자칫하면 나를 잃어버릴 뻔한 시기에요. 그래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된다는 말이 그거에요. 방위 출신은 넣어주지 않습니다. 나를 잃을 뻔 했을 경우에 그 잃을 뻔했던 아픈 상처를 지금의 나를 긍정하는 재료로서 꼭 필요한 거에요. “아, 그때 군에가서 갈뻔했다.”라는 그것으로서 열심히 살자 우리야. 우리 열심히 살자. 과거의 기억을 계속 유지해나가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영화감독입니다.
하나하나가 지난 모든 것이 자기가 만든 작품이에요. 그 동질성을 모아서 타인에게 대화하면서 다른 사람의 동질성을 연결하는 거에요. 근데 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뭐 없어요 없어. 누가 없앴느냐? 전쟁을 일으켜서 고아와 과부, 아빠 엄마. 전부 다 전쟁 나가서 전사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졸지에 뭐냐? 자식들은 고아가 되니까. 땅이 있어도 친척들이 다 가져갈 수 밖에 없고 못 먹고 사니까 땅을 담보로 해서 빚을 냈는데 빚에 이자가 있으니까 결국은 이거는 자기 있는 땅까지 자기 자본까지 다 날리는 거죠. 과부도 마찬가지고 나그네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십일조 거둬서 3년 만에 있는 십일조를 이들 제사장도 먹지만 이들도 다 줘버려라. 그리고 땅 가진 자가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어라. 땅 가질 때에 야무지게 쌀 한 톨까지 청소기 가지고 윙 하고 딱 뽑아내지 말고 대충하고 나머지는 땅에 이렇게 주워가세요. 가져가세요”하고 시혜를 베푸는 일을 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어려운 사람일 때 네가 손을 놓치 말고 구제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점을 꼭 아셔야 돼요. 어떤 점이냐 하면 인간에게 인간이 평소에 가장 큰 부채. 빚이 뭔 줄 알겠어요?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부채. 부채라 하는 것은 짐입니다. 부채 도사 이것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큰 짐은 뭐냐 하면 구제당함이에요. 거저 얻어먹는 것.
인간이 구제 대상 될 때 인간은 드디어 자존감 다 날아갔습니다. 내가 가난하다는 그 자체가 구제 대상이 되고 구제 대상을 통해서 나는 영원히 잃어버립니다. 더 이상 나라는 게 없어요. 그리고 이 구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갈 때 우리가 갚을 길이 없는 부채를 짊어지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거 뭐 예수 안에 들어갔을 때는 나에 대해서 주장할 수가 없어요. “뭐 제가 어떻게 십자가 은혜받았고 구원받았는데 어떻게 보답해 드릴까요?” 하면, “너 십자가 피를 네 돈으로 네가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너는 원래 죽을 목숨이야. 그러나 생명의 목숨을 너를 위해서 구제하듯이 그냥 너를 구제죠. 구원이죠. 너를 구원해줬는데 그걸 네가 갚는단 말이야?” “일부라도.” “일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걸 갚아? 차라리 못 갚는 사랑을 받았다고 증거 해버려.” 그게 바로 성도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게 신약성경에 쭉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갚을 부채에 내가 완전히 덮혀버린 거에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가두어두고 15년 동안 군만두 먹인다면, 여러분 복수할 거에요? “아, 군만두 너무 질렸는데... 다른 걸로 바꿔주면 안 됩니까?”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 얻어먹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앞으로 너는 입이 있고 코가 있고 눈이 있더라도 “저는요, 저는요, 나는요, 나는요.” 그 입 다물어라.” 네가 너를 키우거나 너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자격이 애초부터 구제로 인하여 거저줌으로 인하여 박탈당한 상태에요. “우리가 예수님과 죽고” 할 때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죽고 할 때에 그 의미입니다.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규정해버린 겁니다. 그게 왜냐? 출애굽. 그게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은 없어요. “내 살과 내 피의 가치를 너가 너를 구제했는데 너가 내 살과 내 피를 무슨 수로 그걸 비등하게 갚을 길이 있어?”에요. 없어요.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갚아도 됩니까?” 안 갚아도 되죠. “그러면 안 갚으면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기다려봐 내 죽여 줄게.” 처음에는, 지금은 머리 부분이 날아갔어요. 우리가. 왜? 우리 머리를 대신 예수님의 머리가 대신했기 때문에. 그다음은 우리 가슴, 몸통, 꼬리까지 홀라당 사라질 겁니다. 이 땅에서. 미꾸라지 사라지듯 사라지죠. 자,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을 생명의 노선으로 주께서 집어넣는다는 말은 이 생명의 노선의 취지하고 맞지 않는, 다른 말로 하면 출애굽 했던 그때 그 사건 시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은 전부 다 제거를 하게 되는데 그 제거하는 방식이 뭐냐?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아까 본 것 처럼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악을 제하죠. 악을 제하는 이유가 너는 왜 출애굽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취지를 잃어버리느냐? 그걸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과 함께 갈 수 없는 자로 분류시켜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바로 이 신명기에 나오는 이런 말씀이에요.
처음에 우리가 신명기 이 시간 볼 때에 “너무하시다. 너무 잔인하십니다. 뭐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럴 줄 알고 하나님께서 신명기 9장 4절 한번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악한 자를 앞장세워서 악한 자를 처벌함으로써 악한 자에게 “나도 동일하게 악한 자였는데 왜 저들은 사랑을 받았습니까?”하는 고백이 터져 나오도록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 현실 속에 계속 이끌어 가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만약 일기를 쓴다면 오늘 7월 29일이죠. 날씨 맑음. 왜 주님을 나를 지옥으로 안 보내고 있는가? 그 다음날. 오늘은 흐림. 오늘은 소나기 온다는 소식이 있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옥으로 안 보내는가. 그다음 8월 1일... 그러니까 질문을 반대로 해야되는거에요.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미국 가수가 불렀던 그 노래. Why me? 왜 하필이면 저를 이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제목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데 가사를 보게 되면 왜 다른 사람은 안 건드리고 왜 저는 건드리십니까. 제가 무슨 장이수가 되는겁니다. 왜 자꾸 찾아와서 괴롭힙니까? 그 괴롭히는 것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고 그게 사랑이에요. 계속 하나님께서 대화를 시도하고 말을 건내는 겁니다. ‘네쇠마.’ “내 말을 들으라. 너는 나의 포로야. 같이 가야 돼.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가야 돼. 어린양과 더불어서 같이 가야 돼.” “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면 주님께서,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짐승은 무슨 죄가 있어서 너 대신 피를 흘렸느냐?” 이걸 이제 묻는 겁니다. 그 짐승을 인간이 잡는다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 인간이 낯선 인물을 잡아요. 근데 낯선 인물이 스스로 뭐냐 하면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짐승과 예수님을 자기를 일치시켰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하늘로부터 계시받았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양이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사람이 양이 되는가? 거기에는 바로 율법이라는 다리. 브릿지. 다리를 통해서 이것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여지를 신명기에서 이미 하나님께선 보여줬습니다. 이 이야기하고 이번 시간 마치겠습니다. 어떻게 신명기에 개입하느냐.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 레위 지파는 어떤 지파냐 하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이미 자기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 땅이 있든 없든 자식, 가족이 있든 자기 아내가 있든 자식이 둘이 있든 관계없어요. 이미 자기는 죽은 자로 들어가는거에요. 죽은 자로 들어가다가 다시 일 마치면 산자로 나오는데 거기에 누가 했느냐? 바로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내 대신 죽음으로써 진작에 죽어야 될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작동되는 조건 하에 내가 계속 살고있는 거에요. 그래서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뭐냐? 모터, 엔진입니다.
모터와 엔진이에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 레위 지파가 이 제사가 나중에 형식으로 실패하죠. 그럼 레위 지파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시키는데 다윗이었고 다윗도 그 후손들이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윗의 자손이 되어서 이 모든 인간의 실패를 홀로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서 뭐라고 외쳤냐? “다 이루었다.”하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 이 다 이루었다의 의미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가 그것만 이미 계속 십자가 성령을 통해서 살아 있다면 너는 그 안에서 너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채로 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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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6강 - 신명기 :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5페이지 밑에서 3번째 줄에,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이 말씀을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의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8장 19절에서. 자, 이 말을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하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반발을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반발을 한번 뭔지 생각해보세요. 반발을 생각해야 될 이유가요, “예수님 말씀은 그냥 믿으면 되지 왜 반발을 해?”하는데 우리는 말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세계가 말의 세계고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는 그런 인간에게 자기 의미를 붙들고 있는 인간에게 맞아 죽은 분의 세계에요. 그게 말씀의 세계에요. 이미 틀어졌어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게 확정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어리석다는 것이 이게 구원의 능력이에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리석다는 인간의 지혜보다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지혜요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이걸 뭐냐? 말로 구성되는 현실과 말씀이 구성되는 현실이 대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이 했을 때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기관들은 이렇게 반발하는 거에요. “내가,”인간입니다. “안다, 모른다에 기준을 왜 예수 당신이 정하냐?” 이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왜 남에 대해서 함부로 평하냐 이 말입니다. 나는 나름대로의 심사숙고해서 안다, 모른다를 냈는데 그러면 예수 당신이 너는 알아도 안게 아니고 너는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어떤 기준을 당신 쪽에서 먼저 제시하고 그 제시된 기준, “아, 이것 보니까 모르는 게 맞네.”라고 이야기해 줘야 그다음에 나는 예수님 당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에요. 인간의 논리가.
지금 기준 문제거든요.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서로 일방적인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거에요.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너희가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정당하다면 이게 정당한 기준을 제시 해야돼요. 이 기준은 어떤 기준이냐 하면, 모든 역사를 끝까지 지적할 수 있는 기준이어야 돼요. 모든 역사를 끝까지 지적할 수 있어야 돼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5년 전에 은혜받아서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은혜받아서 나는 십자가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십자가 이후의 십자가 알게 된 나의 동질성, 십자가로 인하여 완전히 달라진 나는 이제는 구원받은 나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말을, 기준을 해도 그 기준은 나한테 유효하기 때문에 앞으로 지금부터 하는 내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거는 뭐를 지금 놓친 게 되느냐 하면 그 기준이 끝까지 역사 끝날 때까지 내 육신이 죽을 때까지 지적한다는 사실을 놓친거에요.
5년 전에 은혜받은 것이 지금까지 유효합니까? 유효 안 하죠.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남은 것은 성화다.” 그렇게 밀어 부칠려고 나가는 거에요? 처음에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이 너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얼마나 고마웠습니까? 근데 구원받고 난 뒤에 이제는 주님과 마음 놓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겠습니다. 뭔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가 캥기는 게 있는 거에요. 찝찝하잖아요. 그때 갖다 붙이는 말이 ‘성령으로’. “성령으로 하겠습니다.” 그것 갖다 붙이면 그게 성령으로 하는 일이 돼요? 더 나아가서 어떻게 내가 구원받는 것 조차도 죄가 되느냐? 그렇게 반문하는데 ‘너’가 개입되기 때문에 죄가 되는거에요. 구원에서 뭘 빼야 되느냐 하면, 너를 빼고 주께서 마련한 새로운 피조물을 니가 있던 자리에 그걸 교체해서 들어가야 그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교체해서 들어가는 그 나는 지금의 너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너에요.
이름이 바뀐거에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거에요. 바뀐 이름은 주도권은 누가 있느냐? 바뀐 내가, 야곱이 쥐고 있는 이스라엘은 없어요. 주님이 쥐고 있는 이스라엘로 바뀌는 겁니다. 바뀌다 보면 내 안에서 로마서 7장이 맨날 투쟁이 벌어지는 거에요. 내가 원하는 것은 악마가 원하는데 그 내가 원하는 악과 더불어서 그로 인하여 주님이 준비한 구원의 나를 그때마다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이해가 될 것 같으면 제가 말을 안 하죠.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8장에서 5페이지에 제목이 뭐냐? 예수님의 부재 증명이에요. 예수님은 여기 없음을 증명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나에게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나라는 육신이 아직도 유효하게 내가 느껴야 되고 감지해야 되고 이 육신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왜? 육신은 철저하게 육신적이어야 하니까. 나는 이기주의, 나 밖에 몰라야 하니까. 어떤 인생에 대해서 나는 반항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없어야 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줘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늘 부루퉁하고 입 튀어나오고 대들고, 삐짐. 맨날 삐지고 반항하고 변명하고, 궁시렁 궁시렁 불만을 토로하고 그런 육신을 주께서 계속해서 견지하시는 이유가 너의 구원이 아니고 네 속에 말씀이 완성되었음을 주께서는 계속해서 건지시는거에요. 못난 너를 통해서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못난 너를 통해서야 그게 드러나는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예수님 십자가 이전에 모든 제자들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초보라 했습니다. 어떤 행실이 안 좋다는 여인이 눈물 흘리면서 예수님께 향수 뿌리면서 발을 이렇게 씻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질문은 그거에요. 그 여자가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뭐든지 온전함이 없으면 구원이 아닙니다. 온전함.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함이 아니면 구원이 아니고 온전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들어가야 그것만이 보탤 필요 없이 온전해 지는거에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 그 여자는 “참 훌륭하다, 착하다, 겸손하다. 어떻게 자기를 낮출수가 있느냐? 자기를 비웠구나.” 이런 것 다 끌어 모아봐야 그게 구원의 토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백부장도 마찬가지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야, 너 같은 믿음. 네가 바로 천국에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한테는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엘리야는 여러분들이 죽지 않고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고, 모세는 아예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잠시 왔다가 도로 갔던 사람이에요. 두 사람의 특징이 뭐냐? 두 사람 다 시체를 지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보면 누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맞아요.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데 왜 그들 입에서 “예수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본인 구원 챙겼으면 됐잖아요. 자기가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으니까 “더 이상 뭐 예수님이 어떻게 하든 뭐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든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됐지.”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그 둘 하고 예수님하고 세분이 “예수님 언제 우리 위해서 별세 하셔야 돼요. 언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합니까?” 그 이야기를 그 변화산 위에서 하늘나라 식탁에서 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냅니까?
내 구원이 내 존재의 최종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어떤 기준 때문에 나를 이용했는가를 그 최종 기준과 연계해서 파악을 해줘야 돼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부활의 세계를 형성할 권한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만이 예수 안이라는 천국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입니다. 우리는 내 구원 안에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게 아니에요. 예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철저하게 우리는 내 주위의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예수님의 공로로 둘러싸야 되고 예수님의 공로가 드러나려면 내가 구원받고 난 뒤에 일어난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는 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는거에요. 논리가. 그래서 내가 만약에 의식되게 되면 자연적으로 주님의 존재함이 가리워지고 주님이 의식되고 주님의 활동성이 강하게 되면 나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이 되는거에요. 그러한 육신 안에서, 아래 위로 아래 위로,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사이클을 형성해요. 사이클을. 은혜받았다가 삐지고, 삐졌는데 십자가 생각하니까 다시 감사하고. 감사하는데 그것 3분 가서 또 삐지고 그다음에 하고 난 뒤에 1분 50초 가서 또 삐지고, 이 계속해서 육신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을 뺑뺑이 돌리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십자가의 공로라는 뻥튀기가 뻥, 뻥. 장날이에요 장날. 계속 육신 집어넣었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계속 살아나니까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밑천은 우리가 천하의 죄인 가지고. 죄인을 가지고 예수의 증인되는 것. 얼마나 그게 맛있게요?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주여, 언제 데려가실 거에요?” “너에게 남은 죄는 아직도 있느니라. 좀 재촉 하지마. 좀 기다려라. 치매 걸려서 데려갈테니까 좀 기다려봐. 치매 걸릴 때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좀 기다려봐.” “믿습니다.” 그걸 우리는 주께서 이 육신은 내 것 아니니까 알아서 죄를 유발하고 생산하실 거에요. 그런 주님이 하는 일에 감격하면서 의지하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방금 신약을 언급했잖아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신명기와 신약은 어떤 해석으로 연결되는가? 달리 말해서 신약성경에서 신명기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이걸 보게 되면 신명기가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알 수 있겠죠.
미리 정답을 말씀드리면 아까도,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통한다. 모든 율법은, 신명기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통한다 했어요. 그런데 이 율법은 뭘 전달하냐면 복과 저주가 주어지지요. 전에 설교 시간에 한 이야긴데 여러분들이 꼭 다시 알아야 될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시편 2편 7절, 이게 히브리서 할 때 히브리서 본문에 나온 대목인데 시편 2편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니, 사람들이 없어서 또 애 하나 아들 하나 더 낳게 합니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과 끊어져 있기 때문에 선악과로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생명 나무의 연장선에서 아들 안에 생명 나무가 담긴채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께서 계획에 의해서 이렇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하실 일은 뭐냐? 율법을 이룰 수 없는 그것을 이 아드님이 자기 몸으로 그걸 다 이뤄버려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예수님 몸 안에 신, 구약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구약의 율법적 인식, 우리가 지켜야 된다는 인식에서 구약을 율법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의해서 죄가 되는 육신을 우리가 갖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에 의해서. 그러면 율법에서 죄가 되게 되면 우리는 변명의 소지가 있어요. “남을 구제하는 것, 하나님 이것은 착한 일 맞죠? 십일조하는 것, 착한 일 맞죠? 금식하는 것 착한 일 맞죠?” 이거는 “율법적 차원에서 이게 죄다, 이건 죄가 아니고 의다”하는데, 십자가 사건에서는 뭐냐? 구제도 죄고 구원받는 것도 죄고 설교하는 것도 죄고 앉아서 자버리고 있는 것도 죄고 모든게 죄 아닌 게 없는 거에요. 죄 아닌 게.
이 점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둔다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 그 사도바울이 얼마나 신나게 당당하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세전의 은혜로 인하여 이 괴수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됐냐? 됐어?” 사도의 취지가 뭐냐 하면 내가 나인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보조자로 나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해서 일 시켰다. 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도, 뭐 사도바울이 육신이 있으니까 자기한테 병이 있으니까, “하나님 이 병을 어떻게 좀 건강하게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병 낫게 되면 주의 일 더 할텐데.” 이렇게 하니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탄의 가시를 내가 집어 넣었는데, 됐네 이 사람아.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것을 품어야 은혜가 은혜답게 나온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가시가 없었으면 몰랐던 은혜를 사탄의 가시가 옴으로써 추가적인 은혜를 사도바울이 뿜어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마저 주께서도 활용하고 계신거에요. 자, 여기서 이제 신약에 나오는 구약의 신명기를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를 보겠습니다. 첫째. 로마서 10장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믿음은 인간 믿음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자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주실 때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자, 이제 신명기를 볼 텐데 신명기 30장 12절, 14절을 볼 텐데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마는 여기에 말씀 자체가, 우리는 육신이니까, 우리는 죄인이니까 별 쓸모도 없어요. 근데 쓸모없는 우리 안에 신명기 말씀 자체가 펄펄 살았어요. 신명기 말씀, 율법은 있는데 그걸 인간들은 지킬 재주는 없고.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께서 신명기 말씀을 지킬 재주가 없는 우리 안에서 이미 다 지켰음, 그래서 펄펄 정력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식으로 너희의 육신을 장소로 활용한다는 거에요.
이게 바로 신명기와 로마서의 만남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내 안에 말씀 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다. 말씀이 살아있기에 내가 매일같이 살려냄을 당한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다면 주께서 오늘이라도 날 죽일거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킨 존재로서 계속 확인 될 수 있겠죠. 그럼 결국 뭐냐 하면 “너는 요즘 어떻게 살아야 돼?” “나는 말씀 못 지키는 재미로 살아.” “말씀 네가 매일같이 보는데 어느 대목에서 내가 오늘도 말씀을 못 지키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 보는거야.” 그렇게 되는 거에요. 자유입니다.
마귀와 사탄과 율법에서의 자유가 이런 모습이에요. 이런 관계에요. 그럼 신명기 한번 봅시다. 신명기 30장 12절에서 14절, 이게 왜 충격적이냐 하면요, “하나님을 보면 믿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12절부터 보면 뭐 “이르기를 누가 하늘로 올라가자.” 이렇게 하잖아요. 보겠다는거에요. 우리의 시선을 살리는 쪽으로 보겠다는거에요. 왜? 우리의 시선은 내 육신에 속했고 육신은 보면서 판단할 수 있고 그걸 평가 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첫째 시간에 했죠? 그거는 한계가 있다고요. 죄짓고 난 뒤에 우리는 우리의 평가 기준은 한계 안에 우리가 스스로 갇혀있는 꼴이 돼요.
그러할 때 주께서 율법으로 그 한계 넘어서 있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여기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14절에,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다면 복 받을 가능성이 이 육신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굳이 시편 2장 7절에서 한 아들을 이 땅에 마리아를 통해서 보낼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니까 배후에 악마가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이 신명기 이 말씀 가지고 예수님이 하는 일을 못 알아먹는거에요. 내가 있는 이 말의 의미의 세계에서는 율법까지 철저히 챙겼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으로 “우리는 믿습니다. 믿고 이 신명기를, 쉐마. 들으라 들으라 하면서 이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는 쪽으로 그냥 밀어붙이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이게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 거에요. 뭐냐 하면 “전에 우리는 육신의 죄가 많아서 우리는 신명기 율법을 못 지켰는데 이제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우리에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신명기의 이 30장 14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열심히 성화하고 행하면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라는 논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나오겠죠. 아직도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성령을 빙자한 악령의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척을 하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온갖 은혜로운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요.
마음을 낮추고 마음을 비우고... 어디서 많이 들었겠죠, 해가지고 다 이야기해서 “주께 영광 돌릴수 있도록 육신을 줬기 때문에 영광 돌리자.” 어떻게? “이제 구원받았으니 싸가지 같이 굴지 말고 제대로 은혜받은 사람 티를 내어서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 해가지고 사도바울의 편지에 봐라. 하라, 하라, 명령이 있잖아. 하라던 명령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처럼 본받아서 우리 거룩하게 되었다. 밀어붙이자.”라고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설득하고 협박을 하는 겁니다. 그 모든 말은 딱 이 세 마디로 요약이 돼요. 돈 내라. 이거 뭐 단순한 이야기를 왜 둘러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돈 내라는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빙빙 둘러서 이야기해요.
딱 본심은 이건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죠. 교회가 형광등 전기 값도 돈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다 없어요. 교회는 없어지라고 있는 겁니다. 그 방식은 바로 이 오늘날의 악령이 천사의 탈을 쓰고 성령의 탈을 써가지고 다른복음 다른 성령 다른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결국은 자기 존재 의미가 성령에 의해서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티를 내는거에요. 우리가, 우리의 자아는 꼭 필요해요. 왜? 뭐하기 위해서? 남은 죄를 짓기 위해서. 아까 했죠? 백부장이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고요. 백부장 은혜받고 바르게 산다고 구원되는게 아닙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해서 구원 되는게 아니에요. 모세가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게 아닙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열두 제자는, 베드로 같은 사람은 끝까지 그 사람은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만 증거 하기 위해서 본인이 원치 않는 그 길을 주님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가면서 살다가 십자가 죽었습니다. 베드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그 죽음 그것을 순교로 근거로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왜? 순교 자체도 인간이 이미 우리가 죽은 자가 되면 뭐도 죽냐? 그동안 나를 살려내던 그 기억의 구성요건까지 같이 부정당하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죄인이 되는 거에요. 나를 그동안 나를 어떻든 이렇게 붙잡아 보려는 내 지혜과 기억으로 조작된 그 나만의 사적인 구성요소까지 우리는 말살당해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종교계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세상과 격리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남자나 특히 여자도 머리를 홀라당 깎아요. 깎는 이유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깎는 이유가 뭐냐? 절에서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나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주세요.”라는 뜻이에요. 머리 깎고 어디 갑니까? 자기들끼리의 의미 단체에 가죠. 수학에서 말하는 집합. 자기들끼리의 의기투합이 된 단체에 갑니다. 그게 뭐냐? 절이죠. 절에 가게 되면 그다음부터 영화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아내가 출가해서 절에 갈 때 남편이 애 다 키워가지고 절에 찾아가서 “여보, 이제 돌아와.” 이래야 드라마가 되는거에요. “자식을 생각해서 돌아와.” 그러면, “당신 나 알잖아.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있다는 것을.” 해놓고 남편 보내고 난 뒤에 그 사람은 어디 가느냐? 바로 새벽 제단 서고 거기서 웁니다.
거기서 나온 노래 가사가 성불사의 여성입니다. 참 옛날 노래다, 옛날 노래. 벌써 몇십년이... 성불사의 여성. 도피입니다. 자아는 자기 집합을 자기 의미체계를 붙들고 피신하고 도망치고있는거에요 인간은. 하다 안되면 자살이고... 돈, 교회, 부동산 여기에 인간의 돈, 헌금하고 돈 냈던 그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부정한다’라는 것은 내 기억조차도 주님 앞에서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되는 거에요. 인간은 뭘 기억하느냐? 자기가 행했다는 것만 기억해요. 기억하세요.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행위로서 주님의 의미를 실어서 우리가 간직하면 되는거에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나는 이 배설물, 제습기에 쌓아놓은 물을 게워내듯이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게워낼 때 그 시원함에 대해서 우리는 또다시 주께 감사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
몇 분 안 갑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의 육신은, 육신은 시간의 적용을 받습니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에서 미래로 가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이걸 중간을 끊어줘요. 순간. 탁 탁 끊어집니다. 이게 뭐냐? 희년이고 이게 바로 안식년이에요. 과거의 기억을 끊음으로써 “나는 너를 종으로 부리지 않았다. 해방이다. 나는 너를 돈 없다고 담보로 너를 노예로 삼았는데 주께서 그걸, 그 관계를 그 기억을 끊어버렸다. 이제는 너나 나나 동등한 자유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이 신명기에서 희년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그 간에 끊어주는거에요. 그 제도에 신명기 제도가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내가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사야 펴놓고.
그러니 예수님도 신명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거죠. 여기서 니가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로마서에 보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주께서 행하고 있음을 니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거에요. 이 말씀을 성취자가 따로 있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에요. 왜? 자기는 하도 못났으니까. 예수님이 왜 따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이유를 이제 아는거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가 뭐냐? 낮 설교 초반에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개입했다 했잖아요. 그 개입한 이유가 뭐겠어요? “난 너하고 상대 안 한다.” 그게 너가 못난 인간이라는 뜻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개입을 했다는 거에요. 주님의 개입을 잊어버리면 곧장 누가 잘나요? 내가 잘난 사람 돼요. 어떻게 압니까? 타인하고 비교하면서 파악하는 거에요. “하, 그거밖에 못 하나.”
“나라도 금메달 쏘겠다.” 그렇게 신명기에 보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9장 9절,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이렇게 하면서 뭐냐 하면 “제단을 나누는 사람과 함께 하라.” 그 뜻으로 넘어가는 거에요. 그게 9장 6절에 보면,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앞에 그게 배치되어있죠. 이게 뭐냐 하면 영적 일을 하는 사람, 영적 일을 하는 사람을 계속 일이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재정적인 것을 여러분 도와주도록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놀라운 사실은 그 이야기만 사도바울이 하고 그다음에 뭐라 했느냐 하면, “여러분 알았죠? 여러분만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여러분에게 영적인 소식을 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잘 알았죠?” 해놓고는 “나는 그러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리를 여러분에게 이 권리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게 16절에 나와요.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러한 나한테 재정적인 기대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냐? “부득불 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과 만나고 관계하기 이전에 나는 먼저 주님과의 늘 만나고 지시받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영적인 실체라면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 도와줘야 돼.”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주께서 시키거든 도와주세요라는 그걸로 정리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 대 인간의, 교인과 목사의 만남이 성사가 안 되기 때문에. 주님을 경유해서 주님의 지시가 되거든 주세요. 하세요. “목사님 어젯밤에 주의 계시가 왔는데 주님 앞에 20억짜리 아파트 한 대 사주려고 했습니다. 받아주세요.” “형제는 지금 저한테 그렇게 압박을 가하는데 가만있어보세요. 주님한테 제가 지시를 받겠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받을까요, 말까요?” 부채 도사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받을까, 말까?” 고민할 때, 옆에서 확정을 지은 분이 등장하죠. 아내. “줄 때 받아. 아이 생각해봐. 뭘 고민해? 내 전화할게. 주의 계시에 도달했답니다. 점괘 나왔습니다. 받으래요.” 그래서 모든 일이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라는 것은 타인을 보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먼저 정립해 있는 거에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저 사람에게 주게 되면 나한테 어떻게 해줄 것인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주는 거에요. 또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목사님, 주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목사님한테 한 푼도 주지 말라는 계시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깐 기다려보세요.” 또 묻죠. 그러면 누가 또 확답을 가진 분이, 가까운 분이 있죠. “그 사람 교회 나가라 해.” 깔끔하게 정리되죠. 아내를 붙여준 이유를 아시겠죠? 내 속에 있는 육신의 발현체에요. 아내는 믿음이 없고 있다가 아니라, 내 속의 믿음 없음을 보여 주는거에요. 20억 받고 어떻게 되겠어요? 그날 밤에 죽었겠습니까? 한 10년간 잘 살았겠습니까? 10년간 잘 살았죠. 어디서? 지옥에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앞으로 지옥에서 살 마음이 있거든, 줄 때 챙기세요. 사도바울의 소망은 빨리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협박도 아니고 뭐에요 도대체?
그다음에 신명기 24장 3절, 항상 성경 해설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해석이 되어야 돼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처녀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되어 있죠. 이 구약적 시대에 있어서의 율법의 특징은 뭐냐? 사람이 얼추 행하면 행할 수 있는 내용처럼 다가온다는 거에요. 이혼 증서 써주는 것, 팔이 약간 아프지만 써주면 되잖아요. 나가라 할 때는 세 자 “나가라” 이러면 되잖아요.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는 걸로 뭘 이뤘다? 주님의 율법을 이루었다가 되는 그런 환경이 구약 환경처럼, ‘처럼’이란 말은 그게 아닌데 마치 인간들의 말의 세계에 있다 보니까 그렇게 가능한 것처럼 as if죠. 그렇게 되는 것처럼.
마치 그게 맞는 것처럼 건전한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에요. 인간들은.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한번 봅시다. 여러분 잘 아는거죠.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 여기 31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이혼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결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에 보면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이게 한 몸이 되어야 돼요. 근데 인간치고 한 몸이 된 자가 없어요. 그래서 신약에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교회의 신부가 유일하게 한 몸이에요. 그렇게 새로운 부부가 성립되면서 세상적인 육신적인 결혼은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 원인이 뭐냐? 인간이 마음에 할례를 못 행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의 터널을 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있는 자리를 내가 긁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긁어 낼 수 없는 내가 건재한 입장에서 어떤 율법을 지켜버리면 인간의 두뇌 자체의 세포의 기능이 어떻게 두뇌에서 세포가 움직이느냐 하면 들어가는 비용과 소득을 균형 맞추면서 뉴런, 두뇌 세포가 활동한다는 거에요. 자동적으로, 두뇌가 자동적으로 에너지를 제일 적게 사용하는 것, 에너지 효율성을 가지고 인간의 신체를 움직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물리적으로 뭡니까? 세포 덩어리잖아요. 세포는 뭘로 되어있어요? 원자핵과 전자, 양자 이런 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양자, 전자는 뭐로 구성되어있느냐? 에너지 파동이죠. 에너지 파동이 뭉쳐지면 입자가 되죠. 그 입자 되는 에너지 파동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에너지의 효율의 법칙에 의해서,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에너지를 적게 하는 것. 그게 자연이고 그 자연의 일부가 인간이고 인간의 두뇌가 인간의 일부입니다.
세포는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따르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여기서 방금 이야기한 뭐가 빠져있죠? 마음이 빠져있죠. 마음. 마음은 어디서 온 거냐 이 말이죠. 과학자들의 한계가 그거에요. 분석하고 다 하는데 그 분석하고 측정할 때 뭐를 빼놓느냐 하면 내가 측정하고 분석하겠다는 이 마음이 측정 결과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인간은 그걸 빼질 못해요. 빼질 못하니까 진리가 아니고 그냥 나를, 나라는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상자를 이용할 뿐이에요. 자연법칙, 과학 법칙은 전부 다 인간을 인간이 유리하도록 이용하는 거에요. 진리가 아닙니다. 지식이에요 그냥. 결국 남는 것은 인간에게 의미가 주어질 뿐이에요. 지구가 몇 억년이고... 그것도 다 마찬가지, 다 측정해서 나오는데 이 측정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우주 전체에 에너지 파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걸 어느 과학자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여다보는 이것이 진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창조 과학회는 창조 과학회가 맨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자연현상에서 찾아내겠다는데, 찾아내겠다는 그 행위 자체가 창조했다는 것을 마치 한 것처럼 찾아내지만, 십자가가 빠져있어요. 십자가가 빠져있다는 말은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말의 세계가 감히 도전장을 낸 것 밖에 안돼요. 이게 창조 과학회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 남는 것은 “이 연구해서 뭐할껀데?” “나 천당 가려고.” 이게 계속 남아 있는거에요. 자기 자신을, “천당 가서 왜 이익인데?” “그게 내 에너지 덩어리의, 나의 소득이야. 내가 평생 고생한 이 상급이고 보람이야.”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에요.
주께선 뭐냐? “할례를 행하라.” 할례 하죠뭐. 생식기 끝을 잘라내면 되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어떻게? 안 돼요. 안되는 이야기를 한거에요. 이게 첫 시간에 이야기한 인간의 한계 그 바깥으로 밀어내 버리는거에요. 인간을 한계 안에 가두게 하고 주님은 말씀 줘놓고 인간의 한계 바깥으로 나가버려요. 따라 올 수가 없습니다. “주여 어디로 갑니까?” “니가 못 따라가는곳에 간다. 됐냐?” 그래서 산상설교 5장에서 뭐냐 하면, 증서 써주고, 아내보고 “집 나가. 보따리 싸고 나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는데 뭐가 안 되느냐? 마음이죠. 5장 27절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간음치 말라 ~ 들었으나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내가 이 말씀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미 간음 했다는거에요. 이 말은 간음 함이 들었는데 여자에 의해서 그것이 자극 받아서 간음이 내 모든 행동으로 두뇌 작용으로 이게 표현이 되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여자라 하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뭐냐? 이쁘고 잘빠져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죠. 그럼 그동안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했을까요?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눈앞에 띈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속에 이미 간음죄가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낸 기회를 찾지를 못한 겁니다. 그러면 이슬람에서 어떻게 하느냐? 남자에게 간음죄가 들어있는 줄 모르고 책임을 여자한테 지어가지고 여자보고 “얼굴 가려. 옷 다 발끝까지 안 보이게 다해. 운동선수도 다 마후라 다 해.”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슬람 남자들의 문제점은 가리니깐 거기에 숨겨진 것에 자기 마음속에 더 상상력이 발휘되는 더욱더 간음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베일에 쌓인 여자, 키 162cm의 베일에 쌓인 여자가 나타났다면 그 여자가 베일을 가리고 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내 마음에 작동할 수 있는 자극이 더 심하게 된다 이 말이죠.
저 안에 있는 여자는 전도연, 아, 전도연은 요새 나이가 많아서... 젊은 여자 있잖아요. “그처럼 아마 그럴 거야. 아니 그래야 돼. 이뻐야 돼.” 이런 식으로. “그러면 이거 얼굴을 한번 보여드릴까요?”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율법에 나는 간음죄 짓기를 싫었습니다.” 정말 이거는 얼마나 인간이 말의 세계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서 타인을 모질게 정죄하는지, 이게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자기 의롭다고 상대방보고 “옷 제대로 입어.” 이게 돼요 말이? 따라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유혹될 모든 인간들은 죽어야 됩니다. 죽어야 돼요. 이 율법에 걸린 사람이 사울왕이었잖아요. 막상 죽이려 하는데 아말렉 가운데서 젊은 여자고 괜찮은 사람 있으니까 “내가 살려줘. 살려줘. 너가 인간미가 없어. 그러면 안돼. 인간미가 있어야 인간다운거야. 살려줘, 살려줘.”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요? 에너지의 효용 법칙에 의해서 자기가 소비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소득을 얻고자 하는 거에요. 거기에서 인간이 누가 자유롭습니까? 자유롭지 못하죠. “뭐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거에요?” 그냥 사세요. 땡기는 대로. 주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현장이에요. 내한테, 그러니까 내한테 이익이 되냐 손해냐 하는 것은 우리 말의 세계에서는 이거는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본심이지만 주께서, 아까 교재 1페이지에서 나온 것 처럼요. 1페이지 나왔죠. 우리가 어떤 식으로 나를 옹호 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나를 옹호하고 싶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이 고통과 죽음에 우리 자신이 극히 취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사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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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7강 - 신명기 : 복과 저주
(강의:이근호 목사)
유월절의 어린 양의 취지를 하나님의 시간, 이스라엘 시간이죠, 하나님의 시간 속에 확장함으로써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유월절의 어린 양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미 죽었잖아요. 유월절 출애굽 때 죽었습니다. 죽은 것을 확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죽었는데, 죽은 것이 죽음 자체가 살아있는 양상이 되어버렸으니까 이것이 바로 ‘유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령성이 되어버리면 하나님 하신 일을 시리즈1, 시리즈2로 나눌 수 있어요.
인간을 상대로 해서 저주가 주어지고 이 저주에 대해서 유월절 양의 취지가 동반해서 올라가버리면 인간 이스라엘은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죠. 죽지 못하는 존재란, 인간은 분명히 죽었는데 인간의 죽음에 섞여있는 율법의 취지는 네가 죽었다고 네가 네 마음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힘들면 죽으면 돼요. 힘들면. 정 힘들면 자살하면 그만이라고요. 그러나 그것이 율법과 같이 만나면서, 누구 마음대로? 그건 네 마음대로 안돼요. 너는 죽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로 인간이 탈바꿈됩니다, 율법 안에서.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의 차이점이에요.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네가 무덤 속에서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8)”라고 되어 있어요. 아, 끈질기다. 끈질겨요. 죽으면 죽은 걸로 그만 우리 관계 좀 끝내주면 되는데… 누구 마음대로? 유월절 양이 죽음으로써 끝나는 게 아니고 유령성을 지니는 것처럼 그 양태를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시키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서.
그 대목을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상 못한 개념으로 성경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도 이걸 알아요. 하나님도 이게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를 아시고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와!
‘그냥 우리 관계 여기서 끝냅시다.’라는 것은 인간적 생각이고, 그건 네 마음대로 끝나질 않아. 왜냐하면, 이건 중요해서 빨간색으로 쓰겠어요, ‘하나님의 율법 해석의 적용에 해당되기 때문’. 하나님의 율법 해석의 적용에 해당이 되어버려요. 이게 뭐냐? 시리즈2에요. 죽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여기 유월절 양에 입각한 율법이 추가되게 되면 여기서 복과 저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아무리 복이 좋아도 저주가 들어있는 건 우리가 싫어요. 싫습니다. 저주가 있을 바에는 차라리 복도 없고 저주도 없는 그걸로 족해요. 그리고 더한 우리의 소원은 인생 힘들지만 살다가 여기서 끝났을 때, 하나님하고도 바이바이하고 싶어요, 인간은. 인간의 본심입니다. 저의 본심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본심이니까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나요. 옛날에 부교역자로 교회에 있으면서 담임 목사님이 자꾸 심방을 부탁했는데, 저는 담임 목사가 심방할 때 어떤 본문을 하는지 봤다고요. 특히 대심방할 때. 4월과 선선한 9월에 대심방을 가요. 이유는 단 하나, 선선하기 때문인데요. 돌아다니기 힘드니까요. 수행원으로 권사님들 쭉 데리고 갔습니다. 이게 옛날 이야기에요. 요새 권사님들은 직장 생활하기 때문에 그게 안 되는데 옛날에는 할 짓이 없어서 교회에 몸담아야 구원이 된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갑니다. 대심방할 때 목사님이 각 가정마다 거의 동일한 말씀가지고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대목이 신명기 28장이에요.
그런데 이상스럽게 신명기 28장 13절에서 멈추고 14절로 넘어가질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신명기 28장이 14절부터 68절까지 갑니다. 이렇게 가는데 이상하게 13절까지만 해요. 13절까지 내용이 뭐냐? 네가 내가 전하는 이 말씀을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28:6) 특히 자식들 있는 사람들은 이런 대목에서 아주 결정적이죠. 네 새끼(자식)가 복을 받는데, 네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안 된다.(28:13) 야, 이거…. 서수에서 기수가 되면서 그다음에 뭐가 나온다 했어요? 위계질서가 성립되죠. 계급.
그다음에 6절에 보면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복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건. 롯데 백화점 가면 롯데 백화점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고. 복을 끌고 다녀요. 아파트 청약하면 거기 가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놀러가도 복을 받을 것이고, 대한항공 타도 항상 비상구 좋은 자리, 복을 받을 것이고. 만약에 자녀가 군 입대 했다? 복을 받을 것이다. 전방에 가지 않고 후방으로 빠지고. 그것도 훈련하는 부대가 아니고 병과를 좋은 거 받아서, 병원 있잖아요, 마산통합병원 이런 데.
여기 13절에 보면,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걸 길게 할 수도 있어요. 어떤 집에서는 길게 하고 어떤 집에서는 짧게 하면서 이렇게 한 일곱 집을 돌아다녀요. 뭐 이제 끝나고 나면 봉투 들어오죠. 왜냐하면 주의 사자가 복을 빌고 갔는데 입 닦는다는 게(실컷 이득을 취하고 나 몰라라 함)…. 대범한 용기 아니면 입을 못 닦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각하는 것이, 처음에 유월절 양으로 죽었는데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유령성이 이스라엘 사람과 동행을 할 때 이 저주성을 그들은 몰랐죠.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복이 된다고 생각했죠. 설마 복과 저주가 동반한다는 생각을 못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명기 28장을 보고 여러분들이 지금 그런 심방을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1번-좋다, 2번-싫다, 몇 번이겠어요? 항상 항목이 두 개인데도 불구하고….
출애굽기 17장 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광야에 갔을 때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이 거기서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17장 7절에 보면 “맛사”는 시험이란 뜻이고, “므리바”는 다툼이란 뜻이거든요.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는지 적어볼게요.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복과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1번-계시다, 2번-아니 계시다, 여기에 인간의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겁니다. 복을 주고 저주를 준다는 것은 하나님 쪽의 이야기고,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부터 먼저 대화 주제를 삼고 회의합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하나님이 계신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다음에 기정사실인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한테 의논도 없이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두 개 다 제시했다.’라는 것이 하나님 생각이라면, 인간세상은 ‘아, 그건 하나님 너무 성급한 문제고요. 먼저 이 문제부터 따집시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넘겨주세요.’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다 알지만 그냥 ‘왜?’라고 물으면,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용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 없이 살 용의가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 주는 것도 귀찮아요. 우리는 스스로 살고 싶어요. 스스로.
‘물론 계시다면 마다하진 않겠습니다만, 먼저 확인 작업부터 우리 쪽에서 실시하고 싶습니다.’라는 거예요. 확인 작업부터. 그 확인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 인간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되면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 않으면 복과 저주를 제시한다는 하나님의 제안 자체를 원천적으로, 내 쪽에서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강력하게 밀어내겠습니다.’라는 것이 우리의 본심이에요. 우리의 본심. 그럼 여기서 의견충돌 났죠?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 의견충돌 났죠.
그러면 다시 신명기 28장을 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한테 심방을 갑니다. 저는 심방을 할 때 15절부터 봅니다. 16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는 본문을 심방 가서 전하면서 “오케이? 콜?” 묻습니다. ‘저주받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묻는 거예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에 곰팡이 피는 거예요. “네 몸의 소생(자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자식이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자식이 집구석 나가도 저주를 받고. 낮에는 50살 먹은 아줌마고, 밤에는 미진이라는 애가 되고. 고양이한테 저주받았거든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다음부터 온갖 동네 전염병은 다 동원해서 들어오죠. 22절에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傷寒)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그다음에 네가 꼬리가 될지언정 머리가 되지 못한다. 공기소총 본선 올라갔는데 1등은 따로 있고 자기는 8등 했어요. 뭘 해도 항상 꼴찌. 떨어지는 거. “이거 받아들이겠는가?” 인간 쪽에서 그러겠죠. “왜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방식이 복 주는 방식으로 살아계시면 좋겠다는 건 인간의 생각이고, 내가 생각지도 않는 저주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주든 뭘 주든 하나님이 나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라고 네가 받아들일 용의가 되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봉투 안 나옵니다. 심방 이렇게 했는데 무슨 봉투가 나와요. 심방을 이렇게 했는데.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나님께 복 받는 것, 그게 우선이 아니고요. 인간의 심보상 인간의 마음상 인간은 항상 인간들만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인간 외에 다른 존재가 없다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교회 5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그런 우리에게 항상 의문점으로 다가오는 것은, 과연 있다는데, 어떤 사람은 간증했다는데, 어떤 사람은 간암 말기 나았다는데, 그래도 여전히 찜찜하게 남는 것은 ‘과연 계실까’하는 문제에요. 내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내가 있는 존재만큼이나 분명하게 하나님이 계실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내(하나님)가 있는지 없는지 네가 시험하기 전에 벌써 그 자체가 나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너희 인간들이 나를 시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동행하는 시험을 인간에게 이미 실시해오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서 시리즈1을 마감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리즈1에서 하나님은 저주를 언급했지만 그건 하나님 계획이고, 우리는 계신지 아니 계신지로 시리즈1 끝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리고 유월절 양에 대해서는 ‘제사는 형식적으로 정기적으로 드리겠습니다만, 유월절 양의 의미는 이미 출애굽으로 끝났고 유월절 양이 고마운 건 알겠는데 우리는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 그건 분명하니까 우린 그것만 알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유월절 양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에게 내가 원치 않는 저주를 줬다는 말에 우리는 삐쳐서, “저주 주려면 복도 가져가세요.” 그게 우리 취향에 맞아요. 뭐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그 정도는 내 손으로 내가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우리가 하나님까지 기대가면서 복 받으려고 애쓸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찌질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져가세요. 가져가. 복 가져가세요. 아예 저주도 가져가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하면서 마지막에 신명기 30장, 31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결국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서. 그래서 너희는 죽고 싶어도 유월절 양의 유령성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우리가.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해요. 빼도 박도.
이거는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에게도 공히 해당돼요. 그들이 뭐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수목장을 하든. 수목장해서 아버지의 모든 뼛가루를 나무 밑에 비료로 뿌려서 나무가 자라남으로써 아버지는 죽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후손들의 심리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죽은 고인 가족의 바람이고 업자 입장에서는 나무 뽑아버립니다. 그거 몰랐죠? 토지가 제한돼서 그걸 뽑아서 또 다른 걸 받아야 계속 이 일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우리 아버지 나무 없어요. 있으려고 하면 돈 더 주고 새로 뿌리던지 뭘 해야 돼요. 업자들끼리의 비밀입니다. 토지가 제한됐는데 수목장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뽑아버리죠.
그래서 아까 저주 보셨잖아요. 세상에 있는 온갖 저주는 다 받아요. 모든 저주는 다 받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유월절 양이 없으면 너희들은 창세기 3장이 되어버려요. 창세기 3장이 되면 생명나무와 단절된 존재로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미 저주 받는 것이 운명입니다. 저주가 새삼스럽지 않아요. 마땅한 우리의 팔자이고 운명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양이 너희들 이스라엘에게 들어왔다는 말은 결국, 의외의 것이에요. 이것은 여분의 것이에요. 뭔가 없어야 마땅한데 뭐가 등장합니까? 복이 등장하죠. 시리즈1에서 죽지 못하는 존재가 되지만, 복이 등장하면서 시리즈2에 가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유월절 양에게 하나님의 율법 해석이 추가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 복과 저주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떼는 입장에 있어요. 아, 이거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내 식대로 살고 싶다는 그것으로 죽은 상태로 마감 되고, 죽은 상태가 유월절 양이라는 것과 같이 동반하면서 죽지 못하는 존재인데 그러면서 이 존재에 주님의 율법 해석이 작용해서 일방적으로 천국 갈 자는 천국 가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는 어떤 여분의 혜택이 주어지는 거예요. 여분의 혜택이.
그래서 지옥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건 섭섭해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천국 가거든 “야호!”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이걸 기뻐하라 이 말이에요. 손을 뗀다는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럼 손을 뗄 때 어떻게 떼느냐 하면 인간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손을 떼게 하는 거죠.
신명기 후반 29장, 30장, 31장, 32장, 33장까지, 특히 31장, 32장에 보면, 네가 경험하지 않은 네 미래의 모습, 종말의 모습을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에게 너는 이런 인간이 된다고 그 미래의 모습을 단정 짓고 미리 확정적으로 예언해버렸어요. 그것은 뭐냐? 너는 나를 버릴 것이라는 거예요.
이제 신명기 구조가 이렇게 짜여진 내막을 알겠죠? 너는 어떻게 해도 나를 버릴 것이다. 너는 귀신을 섬길 것이며, 아무리 내가 너희에게 해줘도 너희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며, 너희는 이방신을 따라갈 것이다. 이것은 확정된 것으로 네가 모르는 너의 미래 모습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손 떼라. 네 인생, 네 미래에 대해서 손을 떼버려라.
그러면 ‘손 못 떼겠습니다’ 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내 미래에 대해서 율법 해석에 대해서 내가 적용해보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시리즈2에서는 적용을 못하도록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렸다’는 시나리오, 각본을 주께서 미리 작성해버립니다. 내가 아무리 너희에게 사랑을 외치고 말씀을 외쳐도 너희들은 나를 버리게 되어 있고 이방신들을 음란히 섬길 것이다. 신명기 31장 16절. 바로 이런 걸 심방 구절로 뽑아야 돼요, 이런 걸.
“아이고, 권사님 잘 계십니까? 찾아왔습니다. 오늘 심방하는 거 미리 광고해서 아시죠?” “아이고, 목사님 오신다고 미숫가루 해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예배드리고 아이들은 잘 있는지 건강 어떠신지 물어보겠습니다. 자, 본문은 신명기 31장 16절, 찾겠습니다. 우리 권사님 같이 한번 봅시다. ‘결국은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너희들이 내 약속을 어길 것이다.’ 믿습니까?
권사님이 교회 나와도 언제까지 나올지 장담 못합니다. 교회 나오는 거 손을 떼시기 바랍니다. 떼시고 지금까지 나온 것은 권사님의 의지나 결심이 아니었고, 그것은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했던 겁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언제까지? 권사님의 속에 있는 우상적 본심,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계속 측정해보겠다는 본심이 발각될 때까지요. 결국 발각될 것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면 권사님도 가만 안 있고 화내겠죠. “아이고, 뭐 교회 가나 안 가나 죽으면 그만이지.” “죄송합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못 죽습니다.” 이게 더 절망이에요.
그래서 이런 실망할 때는 시편 73편을 같이 거론하는 게 좋죠. 그 대신 심방 설교시간은 약간 더 길어지겠죠. 자, 신명기 28장에는 저주받는 모습을 다 이야기해줬어요. 저주받는 모습을 다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어떤 태도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행여나 저주 올까 싶어서 믿는 척을 하게 되는 자기 행위의 조작, 연출을 해버려요. ‘그래. 나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싶고, 우리 자식이 꼬리 되는 건 싫어. 우리 자식이 머리가 됐으면 좋겠어. 꼬리가 되면 안 되지. 그러면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CCTV 다 깔려있으니까 열심히 믿는… (믿는 척이라는 말을 차마 못하고 사실은 믿는 척하지만)… 믿어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 저주를 피하려고 하는데 그 저주는 피했지만 시편 73편에 나온 저주는 피할 길이 없어요. 시편 73편의 저주. 그 저주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무슨 이런 저주가 다 있어요. 이게 저주입니까?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저주하고 이게 내용이 안 맞죠. 신명기 28장은 작살난다는 내용인데 여기 시편 73편에 나오는 이 내용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자는 잠에 그냥 돌아가셔요. 식사 다하고 부축하는데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까지 힘이 건강하고 고통도 없고 가정에 우환도 없고.
그들이 뭐라고 하냐면 11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12절에, 이건 다 같이 읽어봅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20억이 더해요, 20억이. 와, 이거 참. ‘나 이렇게 되고 싶어. 하나님 빼놓고 다 이렇게 되고 싶어. 하나님 없이도 나 이렇게 되고 싶어.’ 이게 우리 속마음의 소원 아닙니까. 아니, 하나님 없이도 재물이 늘어나고 가정이 화평하고 고통이 없고 평안하다면 하나님을 굳이 찾을 이유가 없죠.
그런데, 14절 이것도 읽어봐야 돼요. 다 같이,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이게 뭡니까, 이게. 하나님 믿는 내가!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이게 뭐에요. 맨날 얻어맞고 꾸중당하고 지적당하고. 이게 뭡니까. 이래가지고 하나님 믿을만한 그러한 동기부여가 되겠어요?
여기에 대해서 반전이 있어야 되겠죠. 반전 없으면 안 됩니다. 악인들 생각이 저주고 내가 복이라는 것을 어디 가서 알게 되었느냐 하면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비로소 그들의 끝을 알게 되었다. 성소에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들어있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직거래 했던 게 문제였던 겁니다. 직거래하면 자칫 위메프 사태가 벌어져요. 직거래하는 게 문제가 된 거예요. 직거래하는 것. 당근마켓? 직거래해서 ‘저 사람은 하나님 안 믿어도 이렇게 잘 사는데, 나는 하나님 믿어도 못 산다.’ 했는데, 중간에 성소에 가니까 이것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거치고 주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취지가 있음이 복이고, 이 언약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아도 저주라는 그것으로 모든 언약 개념이 확연하게 다 드러나죠.
내가 행복하고 고난 없는 게 복이 아니라, 복은 이미 유월절 어린 양에 일임되어 있다는 거예요. 나 대신 거기에 다 맡겨져 있다는 거예요. 이게 대리인이죠. 그걸 신약에 오면 성령의 보혜사라 합니다. 성령은 변호사라는 거예요. ‘저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변호사와 이야기하세요.’ 이런 말이에요.
첫 번째 보혜사는 예수님이고 두 번째 보혜사는 성령입니다. 세 번째 보혜사는 이만희 아니에요. 없어요. 보혜사는 성령으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변호사가 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고 벌써 끝났다는 거예요. 우리를 어디다 집어넣는가? 유월절 어린 양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저주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이미 주어진 저주가 유월절 어린 양에게 갔기 때문에 그 저주-네가 경험한 저주 말고, 경험한 게 저주가 되면 나중에 잘 먹고 잘 살 때는 그걸 복이라고 착각해요- 진짜 저주, 진또배기(진짜배기) 저주는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고자 하는 게 그거에요. 너의 현 입장의 말로(末路)는 십자가에서 보여줬다. 그게 뭐냐? 나무에 달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신명기 21장에 보면 죽이는 데에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돌로 쳐 죽이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21:21-23) 여러분, 어느 방법을 좋아하십니까? 돌에 맞을 거예요, 나무에 매달릴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이 생각할 때 돌에 맞아서 죽는 게 편해요. 나무는 하나의 시범조로 본보기 보이듯이 시체를 매달아놓기 때문에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이렇게 한 거예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처형방법이 나무에 매달리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나와요. 보통 다른 데서는 십자가라 하지만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십자가라 하지 않고 나무라고 되어 있어요.(“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저주 받았습니다. 율법과 관련되어 죽지 못하게 된 존재가 마지막 가야 될 길이 이러한 극악무도한 저주입니다.
율법이 그곳까지 이끌죠. 율법이 그곳까지 이뤄야 율법은 바통을 넘깁니다. 이제 자기 할 일 다 했어요. 너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무에 매달려 전시되듯이 남한테 다 우사스럽게 극치의 수치를 보여주면서 죽어도 마땅한 죄가 율법을 통해서 이미 너에게 통보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어? 나무? 나는 전봇대도 무서워서 안 올라가는데 무슨. 나무에 올라간 적도 없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최후의 모습을 주께서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혜택을 받느냐 하면 십자가를 이해하고 해석했던 하나님의 해석에 우리가 포함되어버려요. 해당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에 찬, 자신만만한 외침입니까. “마귀야, 오라. 내가 붙어줄게.” 하는 이런 식이에요. 나? 죽었어. 또 뭐 붙어볼래?
율법은 유월절 어린 양이 저주받게 함으로써 이미 우리의 출발점을 저주부터 출발하게 하는 거예요. 출발을 저주부터 하는 증거가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 27장 1-2절,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세우느냐?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을 만날 것인데 내가 명하는 이 율법의 돌을 어디에 세우느냐 하면 그리심 산에 세우는 게 아니고 에발 산에 세워요. (27:3-4,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그리심 산은 축복을 선언하는 축복 산이고 에발 산은 저주를 선포하는 저주 산이에요. 축복 산, 저주 산. 우리는 이 축복과 저주를 둘로 나누어서 다루는 그 자체가 싫어요. 그 자체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네가 원치 않는 축복과 저주의 분리된 그 기준에 의해 네가 어느 쪽이든 속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율법에서 나오는 축복과 율법에서 나오는 저주가 너희를 통해 완성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에발 산이 저주 산이죠. 저주 산에 하나님이 제단을 쌓아버려요. 그러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저주 산에서 같이 제단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27장에 보면 열두 지파를 둘로 나눕니다. 나누어서 여섯 지파는 축복 산에, 또 여섯 지파는 저주 산에 딱 마주보게 하는 겁니다. 마주보게 해요. 일종의 테니스장 스탠드가 양쪽에 있는 것과 비슷하죠. 딱 마주보게 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외치게 합니다. 외친 내용에 대해서 거기 27장에 쭉 나옵니다. 자, 문자로 된 율법이 열두 지파를 경유해서 외쳐 나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현실입니다. 새로운 현실, 낯선 현실이죠. 율법이 말씀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은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의 현실이 침입해버리면 내가 소박하게 내가 따로 생각했던 현실은 계속 부정당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말씀에 의해서. 에덴동산은 인간 중심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은 인간 중심이 아니고 나무 중심이거든요. 에덴동산을 살리는 물이 나오는 그 중앙에 두 개의 나무가 있어요. 한 개의 나무가 아니라 두 개의 나무에요. 그럼 나무의 중심이 둘로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둘에서 나왔을 때, 하나는 하라. 따먹어라. 또 하나는 따먹지 말라는 나무가 있어요. 그게 선악과 나무입니다. 악마는 이게 싫었던 거예요.
자꾸 싫다 싫다 하는데, 인간이 왜 하나님을 싫어하느냐 하면 누구로부터 간섭받는 게 싫어요. 잔소리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로부터 간섭받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척을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받아들였지만 이 말씀에 밀려서 ‘나 하나님 간섭 받는 거 싫어.’라는 그 본심은 마음 깊숙한 곳에 따로 점점 더 깊숙한 곳에 누적돼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누적돼서. 용수철은 눌리면 나중에 반발심이 더 크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이건 우리 인간들의 해석이거든요.
주님의 율법 해석에 의하면, 아무리 하나님 싫어하는 마음도 결국은 들통 내게 만드는 그런 미래를 내가 친절하게 준비해놨다는 겁니다. 신명기 31장 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어길 것이다’라고 확정하죠.
32장 5절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그다음 32장 15절에 보면, “그러한데 여수룬(이스라엘의 별칭)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반석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맛사, 므리바’ 그 반석이에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멀쩡한 반석을 깼던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쳐서 깬 거예요. 그 해석은 바로 고린도전서에 사도 바울의 해석입니다.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0:4)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동일한 물을 마시기 위해서 반석은 깨져야 돼요. 반석이 깨지는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석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질투심을 유발했다.
신명기 32장 27절에 보면 노골적인 게 나옵니다. 27절 보기 전에 20절부터 먼저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이미 종말에 대해서 알고 계셔요. 27절에 보면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가 이만큼 인생 살아온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행했기 때문에 살아왔다’라는 본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이미 확정된 저주의 상황을 계속해서 32장 끝까지 보여줍니다.
보여주면서 아까 얘기한 것처럼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너도 잘려라.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약속의 땅에 못 가는데, 그것도 사소하게, 인간 보기에 너무나 잘해왔는데 잘했다, 잘했다, 잘했다, 하나 땡. 그럼 몇 점입니까? 99점이에요. 99점인데 못 들어가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죽은 자는 지옥 갑니까?’라는 질문이에요. ‘광야에서 죽었던, 멸망당한 그들은 지옥 갑니까?’라는 질문. 답변은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광야에서 죽을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천국.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다고 하면 지옥이에요.
왜냐하면 내 속에 말씀이 없으니까. 말씀은 내 편리를 위해서, 혹시 내게 복 주나 싶어서 믿어본 거지, 실제로는 뭐냐? 내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는 이것이 내 인생을 주도해왔던 거예요. 장악해왔던 겁니다. 계속해서 내 기도에 응답하면 하나님을 계속 믿을 용의가 되어 있고, 어느 날부터 기도 응답이 시들해지게 되면 ‘누가 뭐 답답한 거 있나? 내 힘으로 살지 뭐.’하고 버릴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이 우리들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미 나를 필히 버리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50년 다니든 60년 다니든 버리게 되어 있을 때, 그 버림이 하나님의 율법 해석에 의해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내가 버림받음에 대해서 내가 손 쓸 수 없음을 믿으면 그 사람은 모든 율법을 이룬 사람이 돼요.
제가 지난 시간에 로마서 10장하고 신명기 30장 말씀을 연관시키는 이야기했죠. 그때 신명기에서는 말씀이 가까이 있으니까 네가 ‘지킬 수 있다’고 했잖아요.(“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30:14) 그런데 로마서 10장에서는 뭐냐? 말씀이 가까이 있으니 ‘믿을 수 있다’가 되는 거예요.(롬 10:16-18)
행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믿을 수 있다. 왜? 그 말씀이 압축된 것이 십자가고 십자가는, 너의 미래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대리해서 이미 결정지었다는 그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이런 꼼수를 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일은 주께서 시켜서 했기 때문에 뭐 천국 가는 것도 주의 뜻이고 지옥 가는 것도 주의 뜻이니까 주의 뜻이 지옥 가는 거라면 지옥 가지 뭐. 왜? 난 쿨한 남자니까.’ 이거 뭐 개기는 것도 아니고 객기도 아니고. 소매 걷고 주님하고 한번 해보자는 이야긴가.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주께서 제대로 일하는지 안하는지 평가는 누가 하겠다?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평가의 한계를 말씀이 뚫어주는 거예요. 평가의 한계를. ‘주께서 결정했습니다. 천국이고 지옥이고 주께서 결정했습니다.’라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예상 못한 의외의 그 소식에 대해서 너무나 고맙고 그걸 기뻐하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주도권이 ‘내가 한번 측정해볼게.’ 측정하는 내가 아니고, 주도권이 어디로 넘어갔습니까? 분명히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이 말씀에 넘어가 있는 사람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도권이 있는 사람은 신명기 28장에 그 저주 부분, 신명기 30장, 31장에 나오는 우리의 종말은 결국 나(하나님)를 버릴 것이라는 그 말씀도 신나게 성도 안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하고 있어요.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께 뭐 늘 감사하지도 못하는데, 감사 시간으로 해서 24시간 중에 1분 내지 1분 50초 정도, 좀 짧은 사람은 한 2.5초 정도 감사하고 대부분은 ‘아, 오늘 참 일 안 풀리네.’ 이렇게 불만이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 일 안 풀린다. 그 사람이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사람을 누가 움직였습니까? 주님이 움직였잖아요. 주님에 대한 불만을 불만 아닌 걸로 감추면서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는 거죠.
그게 교재에 나와요. 교재 p.7 제일 위에【‘말씀의 세계 완성’을 이룬 해석은 ‘설명에 의한 안심’이 아니라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로 실행된다.】반복적 충격에 의한 동요. 반복적 동요로 현실화되고 실행됩니다.
안정적인 나, 그 나를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나의 동요할 여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불신해야 돼요. 더 심하게 말해서, 나는 나랑 헤어져야 돼요. 자꾸 나한테 신뢰 보내고 실망으로 돌아온다면,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한테 실망할 때, ‘나 왜 믿음이 이것밖에 안돼?’ 실망할 때,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10분 쉬시면서 내가 늘 동요하는가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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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8강 - 신명기 : 복의 다면체
(강의:이근호 목사)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비록 못 가지만 모세는, 약속의 땅에 열두 지파가 들어갔을 때에 열두 지파가 약속의 땅에서 어떤 식으로 복을 받아야 하는지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신명기 33장에서 그들에게 복을 이야기합니다. 이 복이라 하는 것은 완전에서 나왔어요. 완전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열심히 제대로 한번 해봐라. 기회 줬는데 실패했지만 삼세판이니까 다시 한 번 제대로 해라.’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백 번 기회를 줘도 백 번 실패한다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인간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샘플로 해서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복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시는 복이에요, 그냥. 그냥 주시는 복인데 이 복을 주시는 주체는 바로 환경을 통해서 줘요. 환경. 아, 이거 어려운 문제죠. 환경이라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거예요. 환경에서 인간은 변화하는데 환경에 온전함, 완전함이 주어지게 되면 어설픈 인간도 온전함이 되고 완전함이 되는 그러한 시스템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신 겁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냐’가 아니라 ‘무엇이 지금 은혜로 퍼부어지는 그 공간 안에 놓여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주신 축복의 구조가 돼요. 바깥에 햇빛이 따사로울 때, 그냥 햇빛 받으면 돼요. 비타민D도 생성되고 그냥 받으면 되는데, ‘어이, 해 온도 좀 낮춰. 해 좀 저리 가.’ 우리가 환경에 지시하거나 명령할 수 없어요. 그냥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있어서 환경의 온전함이 생산하는 자식이 되면 되니까요. 환경의 열매가 되면 되니까요.
그게 바로 33장 축복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아까 32장에서 처참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말의 마지막 모습이 불신자의 모습이라고 그렇게 확정적으로 해놓고 여기 와서 갑자기 복을 줘버리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체의 단절을 생성하고 그 단절을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하는 그러한 시스템이 하나님 율법 안에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단절돼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주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가 있어야 돼요. 이것은 끊어진 거예요. 버림받은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들을 내어주셨다. 죄인을 위해서. 그것도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고요.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없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죄인+내어줌이 결합되면 온전함이 되는 거예요.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게 온전함이 아니고, 죄인은 돌이킬 수 없는 죄인 됨을 파악할 수 있는 온전함, 그 온전함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온전함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죄 사함의 온전한 효력, 온전한 권능이 마귀를 이기고 모든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오는 그 온전함이 결합되면서 자체적인 원칙, 법칙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수립하실 계획에 있어요.
그래서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그냥 주시는 축복, 이 축복을 위해서 우리는 열두 지파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그 축복을 봐야 돼요. 축복을 보면서 하나가 12가 되는 그 축복의 경우를 다시 한 번 찾아가봐야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 그런데 천하의 죄인인 우리는 구원받았다.” “어떻게?” “아이, 그건 뭐 몰라도 되지. 그냥 믿으면 돼.” 이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야곱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아닌 야곱의 열두 지파가 야곱의 복을 그대로 인수받는가? 여기에 무슨 원리가 있을 거예요. 그 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십자가에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남이거든요. 남. 남인데 남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로 ‘질적 일의성의 다양성’이에요. 그걸 좀 더 어려운 표현으로 하면, 다면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다이아몬드. 하나의 다이아몬드가 삭도가 형성한 각에 의해서 옆의 면하고 나하고 차이 나게 되어 있죠. 달라요.
주님에 의해서 각자 다 다른 이유는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믿음을 전수할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이아몬드의 A라는 면이 B라는 면에게 다이아몬드가 어떤 영향력을 안에서 행사할 수 없어요. 다이아몬드 자체에서 파생된 면이기 때문에 A면과 B면, C면과 D면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중보기도, 없습니다. 중보기도는 없어요. 중보기도는 이미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식구라고 해서 같은 가족이라고 해서 기도는 되는데 여기 ‘중보’라는 이름으로 기도할 권한은 없습니다. 기도는 돼요. 기도는 되지만,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사람들은 많이 섭섭해 해요. 섭섭해 하면서 ‘그럴 거 같으면 불교가 낫다’ 뭐 이렇게 나오죠. 천주교가 낫네. 천주교는 인간의 심성이죠. 불교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닙니까. 이미 나는 신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네가 부처인데 무슨 부처를 믿느냐. 믿지 말고 네가 부처가 되면 된다는 게 불교 교리란 말이죠. 누구나 부처의 본성을 다 내장하고 있는데 욕심으로 인해 가리워졌기 때문에 가리는 욕심을 치워버리면 누구나 부처가 될 자질이 잠재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거예요.
불교의 모습이 인간 곧 마귀의 본성이니까, 천주교에서는 껍데긴 성경인데 안쪽에는 불교가 들어있어요. 그게 연도(煉禱,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하여 하는 기도)라는 거예요. 죽은 조상이 지옥 갔다 싶으면 신심이 있는 후손들이 연도를 넣어요, 성당에.
성당에 연도를 넣는다는 말은 돈 준다는 말입니다. 말을 뭐 빙빙 돌릴 필요 없어요. 뭔가 이야기만 꺼내면 전부다 돈이에요. 돈. 수녀들 용돈 줘야 될 거 아닙니까. 수녀들 월급은 얼마 안 되니까 용돈 주고 또 신부들 골프 좀 쳐야죠, 신세대. 술도 좀 마셔야 되고. 다 필요하다고요. 그걸 해야 능력 있는 신부가 돼서 중앙지로 전근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저 촌으로 인사이동 발령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이거에요. 등록만 하세요. 나머지 문제는 우리가 보람상조에서 책임지고 가시는 길 고이 보내드리겠다는 겁니다. 등록만 하세요. 등록만. 영세만 받으면 나머지는 우리가 책임지겠다. 돈만 넣으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도 대신 기도를 해주는데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돈을 좀 많이 넣어야 속도가 빨라져요. 연옥에 간 자기 조상들을 위쪽으로 빨리 퇴직할 수 있도록, 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천주교의 시작은 전 국민의 신자화에서 시작돼요. 전 국민의 신자화. 로마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전 국민이 신자화 되게 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어떤 특정 문구와 문장을 전 국민에게 외우도록 하고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면 돼요. 그 문장이 뭐냐? 삼위일체와 관련된 문장을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삼위일체 못 외운다든지 이해 못하면 이건 이단이고. 삼위일체가 정통이니까 정통되는 문구를 외우는 거예요. 그게 무슨 세계? 말의 세계에요, 말의 세계.
말의 세계의 특징은 뭐냐? 자기 부정이 있을 수 없어요. 현재 있는 것이 모자랄 뿐이고 무식했을 뿐이고 결핍될 뿐이지, 보충만 하게 되면 언제든지 새 사람으로 탈피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 천주교에서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고요. 불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죽은 조상, 연옥에 간 조상도 어떻게 빼내서 빽 써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마리아를 준비했어요. 마리아. 마리아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엄마에요. 천주교에서는 한 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가 돼요.
그런데 마리아하고 예수님은 엄마, 자식 사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모성애가 작동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엄마가 자식을 낳기 때문에 저절로 모성애가 생겨요. 물론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여럿 있어요. 나는 모성애 없습니다, 하고 아주 마음을 낮춰서 말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는데 난 믿지 않습니다.
모성애가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모성애가 이미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 한 거 맞고 타락한 거 맞는데 모성애는 건들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모성애가 있느냐? 아무리 타락해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모성애를 자극하게 되면 아무리 지옥 갈 인간이라도 그 모성애를 통해서 하늘의 모성애와 접촉이 되면 그 사람은 마리아 빽으로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설득력 있고 납득 되지요? 아, 하나님은 결국 인간을 버린 게 아니구나. 인간을 버린 게 아니구나, 이렇게 돼요.
방금 제가 무슨 종교 이야기했어요? 천주교 이야기했죠. 기독교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학생들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신학 배우면 나오는 게 있어요. 공유적 속성. 공유적 속성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 있다는 거예요.
비-공유적 속성도 있는데 인간이 연약해서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볼 때, 인간은 타락해도 아주 타락한 것은 아니다. 그 공유적 속성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나면서 그 사람은 구원될 수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매력적이죠.
오래된 엔틱 가구, 창고에 넣어뒀던 가구를 사용하려면 뭐부터 털어야 되죠? 먼지부터 털죠. 먼지 털 때, 기도와 헌신과 구제와 봉사로 먼지를 털어나가면 그때, 나한테 이렇게 착한 면이? 세상에, 깜놀! 내 자신이 이렇게 훌륭할 수가. 깜놀! 그걸 찾아내면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범죄 해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이 범죄 하지만 인간 속에 희미하나마 남아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고 ‘믿습니다’는 말만 하면 돼요. 손들고 나오면 돼요.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재 p.6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제가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준비해두세요. 교재 p.6 밑에 나오는 말씀을 읽고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요. 질문은 두 문항밖에 안돼요. 둘 중에 아무거나 찍어도 돼요.【“저희가 능히 믿지 못하는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38-40)”】
자, 질문 들어갑니다. 인간은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겁니까, 거부합니까? 몇 번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간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 배후에 악마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못 알아보는 게 아니에요. 알고서 거부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인간은 몰라도 귀신은 예수님이 왔을 때 알아봤어요. “예수여, 우리가 지금 멸망할 때가 안 되었는데 왜 미리 와서 멸망합니까? 그럼 우리가 어디로 들어갈까요?” “돼지” “네. 가겠습니다.” 이런 대화가 있어요. 어느 인간도 예수를 못 알아봤지만 악마는 알아봤어요.
그래서 불신자들이 지식이 모자라고 공부를 못해서 못 알아본 게 아니고, 성경쓰기를 게을리 해서 못 알아본 게 아니고, 불신자 속에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하는 본능이 작동합니다. 거부하는 본능이 작동하면, 또 문제 나갑니다. 1-예수를 안 믿는다, 2-예수를 만들어낸다. 몇 번입니까? 만들어내죠.
내가 믿고 싶은 예수와 성령과 복음을 내가 만들어내요. 내가 만들어낸다고요. 그러니까 그 만들어진 복음에는 뭐가 없어요? 나는 어떤 식으로든 주님과의 접촉이 가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부정적 요소가 거기 빠져있어요.
그걸 두 자로 ‘신학’이라 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게 신학이에요. 신학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진리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조직신학, 성경신학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거 배우기 위해서 신학생들이 3년 내지 긴 사람은 7년. 대학 졸업하면 3년, 강도사 떨어지면 1년 꿇어서 한 번 더 공부. 그거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 전혀 몰라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알지만 거부해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들이 이 말을 거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거부를 못하는데 왜 속으로는 거부하고 싶고, 안 들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러면 교회가 안돼요.
예를 들면, 내가 이 복음을 전해서 어느 동네에 개척교회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자기 동네에 진짜 성령 오셔서 이 말을 기뻐하는 사람이 한 열 명 있으면 교인 10명이 되겠는데, 만약인데요, 이게 하나님이 시험하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10명이 아니 계시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10명도 없고 단 한 명도 없다면 뭐를 접어야 돼요? 교회를 접어야 되죠. 교회를 접으면 자기가 살아온 모든 존재 의미가 사망이죠. 삭제되는 겁니다. 자기 희망이라든지 모든 게 꺾여버리죠. 그러면 자기가 부정당하겠죠.
결국은 뭐냐? 나는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러지 않는 목사 있어요, 없어요? 다 그래요. 그러니까 바른 복음을 전하면 바른 목사가 아니라, 진짜 목사는 이 말씀에 대해서 나부터 부정당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걸 강대상에서 전하는 자가 진짜 복음 설교자입니다. 바른 목사, 바른 복음 전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수백 명이 넘어요. 유튜브에 쫙 깔렸습니다. 자랑질한다고.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이단이라는 말을 못해요. 우리는 충분히 이단이 되어야 돼요, 충분히. 왜? 이단이기 때문에. 그게 무슨 깊은 논리가 필요합니까? 이단의 다면체. 다이아몬드 안에는 중심이 있고 이단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중심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중심의 단일적인 의미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그 다면체는 모두 이단으로 장식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단의 개념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이단과 주님의 십자가가 빠져버린 자기를 긍정하는 이단이 등장하겠죠. 이러나 저러나 전부 다 이단이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 원칙에는 부합되는 겁니다.
이렇게 뭔가 딴소리하는 것처럼 길게 했는데 왜 길게 했는가? 바로 야곱과 열두 지파의 관계에서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용되었던 거예요. 그것이 바로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시편 105편 15절부터 보게 되면 야곱의 축복이 열두 아들 앞에 다양하게 다면체로 분산되어 전달됩니다.
그냥 전달되느냐? 여기에 장애요소가 발생됩니다. 그 장애요소가 야곱의 장애요소에요. 이런 것은 정말 중요한 건데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보기엔 ‘야곱은 이제 좋겠다. 하나님께 복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야곱이 예수님은 아니거든요. 야곱의 언약 원칙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 돼요.
야곱에겐 자식 열두 명이 있습니다. 열둘이 있으면 열두 명 안에 뭐가 전수되느냐? 로마서 5장에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미치는 것처럼 야곱의 육신의 혈통에 의해서 야곱 내부의 그 죄성이 열두 아들에게 파급이 돼요. 유명한 디나 사건부터 해서. 그야말로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 누이동생 강간당했다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마을 남자들 전부 다 죽여 버렸어요. 다 죽였다고요. 얼마나 잔인합니까. 아주 잔인하게 해버린 거예요. 잔인하게.
이게 누구 본성이냐? 야곱의 본성이에요. 야곱의 본성은 죽으면 죽었지,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 본성을 천사가 이용해서 야곱에게 지는 척하면서 결정적으로 야곱에게서 나왔던 힘의 원천을 박살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김대중처럼 지팡이를 의지하죠.
그러니까 야곱이 아무리 구원 받았더라도, 야곱의 본성은 망가지는 겁니다.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요소가 열두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된 거예요. 열두 아들에게 전수되었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장애요소는 되지만 언약의 장애요소는 아니고, 언약은 그것을 도리어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겁니다. 야곱은 아들 중에서 오직 한 아들만 사랑했어요. 요셉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 놔두고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 했죠.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를 주께서 건드려버려요. 그다음에 이삭은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야곱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취향에 안 맞아요. 에서를 사랑해요. 에서는 남성답고 사나이처럼 밖에 돌아다니는데, 조용하게 음흉하게 있는 자가 야곱이다. 호시탐탐 뭘 노리는. 그런데 에서가 저주가 됐어요.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기꺼이 축복을 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식에게 저주를 기꺼이 줘버립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요. 그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으로서 내가 살아있었는데 주께서 장애요소를 유발시킴으로서 하나님이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어진 사태대로 그냥 가버립니다.
열두 아들, 야곱 다 움직이죠. 움직입니다. 움직이는데 야곱은 자기 본성대로 요셉을 되게 사랑했어요. 요셉에겐 특별히 사제 옷을 입히고 고급 디자인 옷, 채색 옷을 입혔어요. 비싼 옷을 입히면서 노골적으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왜 야곱이 이런 일을 합니까? 왜 요셉만 특별히 사랑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해요. 그냥 좋아서. 그냥 좋은 거예요. 너무나 인간적이에요. 그냥 좋은 거예요. 좋아서, 귀해서 하는 거예요.
그 귀한 것에 꿈이 주어지고 나머지 열 아들, 동생은 놔두고 열 아들이 여기에 달려듭니다. 달려들어서 꿈꾼 자를 죽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죽입니다. 아버지는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어요. 죽은 줄로 알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한번 봅시다. 하나님은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항상 하나님의 말씀 해석이 인간의 말의 해석을 능가해요.
시편 105편 17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우리 보기에는 요셉이 종으로 팔렸죠. 그런데 요셉이 종으로 팔린 그 자체가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이 저를 연단했다는 거예요.(“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연단하였도다”) 요셉이 살아있는 모습이지만 보이지 않는 말씀이 요셉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 언약이 언약 자체적으로 언약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런데 그 바깥에 드러나는 모습은 희생자에요. 희생자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요셉이 형제들을 다 용서하고. 요셉이 뭐 용서할 것도 없어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내가 이렇게 팔린 것은 형들이 나를 미워했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장차 다가올 종말을 미리 아시고 나를 통해서 우리 형들을 야곱의 하나님 언약대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앞서 보냈습니다.”라는 말을 해요.
그러니까 형들은 거기에 휘말린 것이고, 인간의 본성, 우리 인간의 죄성은 휘말린 것이고 인간이 죄를 어떻게 짓든 어떻게 방해하든 상관없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칙을 따라서 미리 그 과정에 전달되었고 실시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중에 눈치 빠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 30장 3절부터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어떻게 됩니까? “(끌어)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절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6절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그다음에 뭡니까? “얻게 하실 것이며”
전에는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라”가 되잖아요. 그런데 쫓겨나고 난 뒤에는 내(하나님)가 준 말씀을 친히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을 이루고 그 성과를 너희에게 적용시켜서 너는 말씀의 생성물이 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뭐가 됐습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뭐가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된 게 아니에요.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인간은 없고 모조리 다 죄 짓는 육신만 있기 때문에. 그 죄 속까지 주의 말씀이 침투해서 들어오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초반의 원리를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하죠. 초반에. 산상설교에서 “똑바로 살아.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 뜻이야.” 해놓고 제자들이 “열심히 할게요. 할게요.” 해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너희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끝까지 사랑한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면 너희가 나를 버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내가 버린 너를 찾아가 구하는 것도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사람 가룟 유다는 배제되고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너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말씀을 버린 그 경로를 따라오다 보면 그게 이웃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신하고 죄인이고 나밖에 모르는 경로를 계속 들어가다 보면 순환 루트, 사이클을 돌다 보면 중간에 뭐를 만나게 되겠어요? 단절을 만나고 그다음에 그 단절 자체가 바로 새로운 영생의 길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겠죠. 죄인인데 주께서 값없이 구원한 것을 만나게 되겠죠. 그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라 하잖아요.
만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이 세상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자꾸 주저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는 의가 있기 때문에 주저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 지키려고. 그러나 죄인이라면 여러분들이 어떤 짓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짓도.
남한테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하는 전화, 여러분들이 그거 하기 힘들어요. 주의 성령의 기적 아니면 못합니다. ‘지가 뭔데 내가 사과해. 내가 지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이게 인간이거든요.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말도 안 듣는 게 인간 말 들을까요? 안 듣습니다. 아이고, 셉니다. 그야말로 강성이에요. 강성.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강성 노조에요.
하나님께서 신명기 30장에서 미래의 스케줄까지, 미래 계획까지 다 준비하셨어요. 이제 충분히 아셨다 치고 33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33장 딱 오게 되면 여기에 대한 축복은 뭐를 경유한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작동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룬 상태에서 그냥 배당해주는 축복이죠. 그냥 배당해줘요. 그것도 똑같은 걸 주는 게 아닙니다. 다면체니까. 다양체 또는 다면체니까요.
이것은 좀 많이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제가 표현을 해보겠습니다. 흑인하고 흑인 되기가 달라요. 흑인은 때려죽여도 흑인 되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흑인은 목표가 백인처럼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안돼요. 여자는 여자 되기가 안돼요.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가 인식하는 그 여자 되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흑인과 흑인 되기, 여자와 여자 되기는 단절되어 있어요. 흑인?흑인 되기. 여자?여자 되기.
아이는 아이 되기를 못합니다. 아이?아이 되기. 아이들이 주로 보는 게 뭐죠? 만화죠. 만화가 아이들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 만화의 주테마가 뭐냐 하면 어른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에요. 지구를 누가 지킵니까? 지구는 독수리5형제가 지키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키는 거예요. 지혜로운 아이들이 지키는 거예요. 가제트 형사 범죄 해결 누가 합니까? 가제트 형사가 해요, 안 그러면 조카 어린애가 합니까? 어린애가 하는 거예요.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을 지정해서 속에 들었던 조급한 어른 되기를 그때 국가적으로 잠시 행사해주는 거예요. 그때는 나무랄 것도 안 나무라고 성격 나쁜 것도 잔소리 안하고 그저 놀이동산 가서 실컷 고생만 하고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적용해보겠습니다. 성도 또는 주의 백성 되기는 성도가 못합니다. 성도?성도 되기. 단절을 성도가 이끌어낼 수 없고, 흑인은 진짜로 흑인 되기를 못하고요. 여자가 진짜 나 같은 여자가 못돼요.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는 내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남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시선과 그들의 요구사항에 따라주기 바쁘지, 진정한 나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내가 몰라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남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환상입니다. 나라는 게. 그래서 나는 그때그때 달라요. 나라는 것은 주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요. 그들에 비위맞추고 그들에게 아부하고. 말은 그렇게 나쁘게 했지만 좋게 말하면 그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 평화롭게 사는 것, 거기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진정한 나는 없습니다. 없으니까 찾을 수가 없는 거죠.
진정한 나는 내 이름을 가져간 그분이 제2의 진정한 나로 등장하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절을 거치고 자기가 모든 성도의 모범이에요. 모범이고 표준이니까 그것을 맏아들이라 해요.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맏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8:29-30)
우리는 뭘 닮아야 되는가? 첫 번째 아담 닮는 것은 끝났고 이제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부활하신 아담을 본받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형상은 내 형상이 아니고, 아담의 형상이 아니고,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무르익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약속의 땅에서 축복할 때, 여기 나온 열두 지파는 어떻게 되는가? 다양성으로 주어집니다. 이 다양성이 뭔지 본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33장 8절에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아니, 레위를 보고 경건하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기서 과연 그런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끝에 49장 야곱이 아들들보고 축복한 거 있죠. 거기 49장 5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그러니까 야곱의 뜻은 그들과 합치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KBS에서 어떤 동영상 하나 찍고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이 프로그램의 취지는 우리 KBS 취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거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럼 틀지 말지, 틀기는 왜 트는지.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잔혹하니”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저주를 받을 것이요”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축복을 이야기하면서 저주를 왜 거기다가 섞어버려요? 이랬던 레위지파가 신명기 33장의 레위지파는 갑자기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뭐를 경유했습니까?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한 결과입니다. 언약을 경유하다보니까 언약의 희생의 혜택을 입은 자로서 레위 지파가, 자기가 한 죄된 행동과 거기다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이 결합되니까 개성 있는 자기만의 독특하지만 축복받는 대상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죠. 왜? 하는 짓들이 다 달라서 그래요. 하는 짓들이 다 달라서 그래요. 인간들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은 각자 속해있는 환경이 개성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환경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거예요. 살아온 환경이.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타고난 DNA요소도 반반 정도 섞여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죠.
그다음에 그들이 경건한 이유가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다투셨도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갑자기 토정비결이 좋게 나와 버린 거예요. 10월에 목성을 가진 귀인을 만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점괘가 이상하게 자꾸 좋게 나와요.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해버리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제 제가 질문을 해야 될 차례입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가 되는데 다른 지파 가운데 요셉 지파를 보겠습니다. 13절, “원컨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뭐 보물이 연발이네요. “옛산의 상품물과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과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아, 이거는 뭐 레위지파 점괘 듣고 요셉지파 점괘 들으면 레위지파가 화 날만 하네요. 너무 차별되게 하잖아요. 자, 질문은 뭐냐? 이 요셉지파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약속의 땅에서? 홀라당 망했어요. 홀라당 망했는데 여러분들이 이제 지금까지 배웠으니까 복습하는 의미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법칙에 대해서 깊이를 가졌는지 보겠습니다.
망했어요. 망했단 말이죠.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전체 열두 지파가 망했어요. 약속의 땅과 더불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나오죠. 그런데 이게 왜 축복일까요? 이게 왜 축복이냐? 현실적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말씀 속의 이스라엘은 망함을 토대로 해서 영원하게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중성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중성. 이스라엘이, 구약적 이스라엘과 신약적 예수님 십자가 안에 품어낸 숨어있는 이스라엘이 함께 거기에 스며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교재 p.6에 보면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고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을 한 것은, 종말 이후의 그 모든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체적인 해석과 적용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개입되는 식으로 천국백성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방해받지 말아야 되겠죠. 그러면 인간 쪽은 배제당하고 망해야 돼요. 망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 누가? 하나님 쪽에서.
이걸 새삼스럽게 우리의 본질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 정말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았어요. 행여나 행여나 내 행함으로 천국 갔다 할까 싶어서,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미리 아시고 나서서 그걸 차단시킨 겁니다. 못 알아듣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던 겁니다. 못 알아듣는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생각한 숨어있는 그 이스라엘을 생각 못하고, 내가 이스라엘 속에 합류할 그런 의도를 가지고 교회 다니는 거예요. 의도를 가지고. 말씀 연구하면서.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가 손에 쥔 이 모든 말씀은 내가 아무리 공부해도 못 알아듣는 말씀만 주신 거예요.
그런데 못 알아듣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 것은, 뒤에 알아듣는 그 대목은 내 노력이 아니고 내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 몽땅 해태종합선물로 우리에게 던져준 거죠. 그러면 뭐가 바뀌느냐?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중첩된 유령 같은 유령성을 지닌 희한한 존재가 살아가게 된 겁니다. 오늘 저녁에 끝나고 가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성질이 급해서 지금 결론 부분까지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신명기 33장에 나오는 열두 지파가 복 받는 대목을 보면서 뭐를 여러분들이 발견해야 되느냐 하면, 축복을 어떤 특정 지파에 몰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몰아주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에서 나왔던 열두 개가 반드시 하나로 집결되면서 비로소 복의 본질을 발견하도록 하게 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우리 같은 성도니까 사랑하고 바르게 삽시다.’ 이거는 안돼요. 이거는 교회 아닙니다. 이건 친목단체에요. 이거는 멤버쉽이에요. 교회가 아니라 멤버쉽이고, 반드시 뭐로 가야 돼요? 우리 여럿이 하나의 질적 일의성 구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현실의 전개죠, 여기 이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하는 겁니다. 타인도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게 될 때 그렇다면 제가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이웃사랑이란 뭐냐? 그 이웃은 바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한다 했을 때 그 하나님은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간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7장 보고 마치겠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주도면밀하게 일해 왔는지를. 요한복음 17장 21절, 이건 기념해서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 이거… 진정성 있게 고백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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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9강 - 신명기 : 유령성
(강의:이근호 목사)
마지막 시간 하겠습니다. 신명기 34장 5절에 모세가 죽게 되는데,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부한 게 있습니다.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한다. 건너가지 못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바라보기만 하게 했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 모든 지평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첫째 시간에 언급한 ‘한계’입니다.
모세라는 몸이 있는데 이 몸은 죽는 몸입니다. 죽는 몸인데 이 죽는 몸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유령성을 갖고 있어요. 유령성. both and neither-nor. 서로 반대되는 것같이 함께 있는 것.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몸에 같이 있는 것. 이것이 인간세계에 없는 순수사건인데 흐르지 않는, 역사와 함께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 남는 그런 순수사건이에요.
이것은 안에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 한계를 볼 줄 아는 몸으로 달라지는 거예요. 인간의 육신이 갖고 있는 그 한계, 그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맞아, 그게 한계야.’ 라고 볼 줄 아는 그러한 몸은 이 안에 순수사건을 지니고 있는 몸, 유령성을 지닌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시려면 출애굽기 33장을 보셔야 돼요.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왜 모세 다음에 차기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여호수아가 되느냐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왜 갈렙은 안되고 왜 여호수아가 되느냐? 그 이유가 출애굽기 33장 11절에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갈렙과 여호수아에서 왜 갈렙은 탈락하고 여호수아가 되느냐? 그게 모세가 지닌 유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렇게 쭉 이야기하면서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하는데, 이것이 마치 하나님이 친구한테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화를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그게 있을 수 없죠. 왜? 죽으니까.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18절에,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목격할 수 있는 자가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천사나 가능하죠. 천사나 죄가 없는 상태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모세는 죄인이에요. 죄인인데 죄인의 반대말이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몸에 같이(both) 있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몸에 공존하고 있고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모세의 진척과정, 인생의 진척과정을 통해서 두 가지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가지 현실.
두 가지의 현실이 이제 펼쳐집니다. 한 가지 현실은 언약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현실이에요. 또 다른 한 가지는 뭐냐? 전쟁을 하면서 언약의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데 새로운 현실중 하나는 외부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현실, 이 지상에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유령성을 지니는 집단의 등장.
유령성을 지니는 집단의 등장이에요. 모세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같은 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새로운 신체들이 등장하게 되는 현실이에요. 이 새로운 신체들의 등장에 대해서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구체적인 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나오는데, 첫째 사망-둘째 사망 이렇게 짝을 지우던 것이 언약에 의한 현실 속에 투입됨으로써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이 조합을 이루고 일치를 이루면서 유령성을 지닌 모세 같은 새로운 몸이 등장하는데 이 몸이 뭐냐? 안에 언약이 만들어낸 현실이 삽입되어 있는 성도에요, 성도.
성도의 자기 정체성, 주체성 자체가 이중성을 띄고 있는 겁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윤선도의 시조 있죠. 나무야, 풀이야? 정체를 밝혀라. 아니,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뭐야? 너 죽은 거야, 산 거야? 바이러스 같아요. 가만있으면 단백질 덩어리인데 RNA, DNA 들어가면 이게 움직여요. 생명이 아니고 유기물질 같은데 뭔가 숙주를 만나면 이게 살아나고 숙주가 없으면 다시 유기물질, 그냥 생명 없는 물질로 변하는 그 경계선. 이것을 달리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유령 같은 존재죠.
이것이 기존의 현실, 인간의 눈에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현실 속에 언약의 현실을 가진 성도가 같이 섞여서 살게 하는 이 환경. 바로 천국은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천국은. 유령성을 지니고. 그것의 시초, 스타트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성령으로 잉태된 몸인데 어떻게 육신과 만납니까? 죄 있는 육신이 어떻게 거룩한 성령과 만나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현실인지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단독으로 죽었고 부활할 때 사흘 만에 단독으로 본인만 부활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언약 안에서 이걸 어떻게 확장시키느냐 하면, 예수님 죽을 때 너도 죽었고 예수님 부활할 때 너도 부활했다는 거예요. 언제? 우리가 언제 부활했는데요? 부활한 꼬라지하고는. 이게 부활한 몸이에요? 이게 부활한 몸입니까? 맨날 병원에 가고 아프고 아토피 있는데, 이게 부활한 몸이에요?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웃는 거야 우는 거야, 도대체? 성도의 특징은 본인이 본인을 종잡을 수 없다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종잡을 수 없어요. 본인의 앞길도 종잡을 수가 없고.
다만 both and neither-nor, 뭔가 이질적인 것이 한 육체에 있으면서 같이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본인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하고요. 언약으로 설명하는데 자기에 대해서 언약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뭐냐?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언약의 완성된 레벨에서 자기를 다시 한 번 파악하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너는 착하냐?”고 물으시면 답변은 뭐냐? 나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그 한계를 유일하게 아는 자가 성도기 때문에 “나는 뭘 해도 죄가 됩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뭘 해도.
한계. 선악을 먹어서 선과 악 중에서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이 한계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생명나무가 같이 동반하니까, 생명나무 입장에서는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나빠요. 윤리, 도덕을 따지는 그 자체가 죄에요. 바르게 살면 안 되냐. 착하게 살면 안 되냐. 이 자체가 악이에요. 그게 선악 마인드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래서 유령화 된 몸에서 이 한계와 더불어서 한계를 벗어난 시선을 같이 이야기해줘야 복음이 전파되는 거예요. 언약의 완성이 전파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킬과 하이드처럼 로마서 7장에 보면 그 두 가지 다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나는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악이 선수 쳐서 그걸 하지 못하게 하고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하고 있다. 그게 바로 나다. 그런데 이 나의 한계 아래 놓여있는 나, 선악과를 따먹어서 항상 선하게 하고 싶어도 악 쪽으로 치우치는 이상한 시스템이 내 안에서 가동되고 있다.
내가 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그것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기 때문에 선악 조절에 대해서 내가 감당이 안 되고 내 안의 선악 자체가 내 스스로 통제 안 되는 그것이 바로 나의 한계라는 겁니다. 한계.
세상의 모든 윤리, 도덕과 철학과 종교가 맨날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바르게 사세요. 바르게 살아야 당신도 살고 이웃도 살고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맨날 하는 이야기가 이거에요. 정의롭게 살고 남을 해코지하지 말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고 공중도덕과 질서를 지키고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내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서 남한테 혹시나 피해가 가지 않을까를 늘 생각하세요.
문 앞에 신발 벗고 갈 때는 신발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서 신발 사이를 좁혀놔야 다른 손님들이 그 식당에 신발 벗고 들어올 때 다른 손님이 신발 놓을 자리가 있으니까 이게 교양 있는 현대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들어오면서 신발 휙 벗어서 세 바퀴 돌고 던져지면 주인이 짜증내면서, ‘이거 보면 가정교육 다 드러난다니까.’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그리고 끝나고 난 뒤에 다시 평가하라. 이 3항이 한 조가 되어 있잖아요. 사람이 돈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평생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나로 인하여 남이 피해입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 아니에요? 인간의 인간 됨,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 아닙니까?
그런데, 그래서? 그래서 뭐?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게 뭔데? 그래서 뭘 기대하는 거야?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뭘 기대하는 거야?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평생을 살았다. 끝에 마지막 부를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던 'My Way'. 인생의 마지막 커튼이 내려오고 나는 지금껏 my way, 내 방식대로 나는 내 삶에 충실했다. 욕하지 마라. 갑자기 트롯트 쪽으로 막 나가는데… 누가 나를 욕해?
그런데 그 선악과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인 시선으로, 생명나무에 이미 들어온 새로운 자아 정체성으로 그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교재 제일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p.9【Ⅲ 결론】밑에서 5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삐-삐- 주의하라. 주의하라. 삐-삐- 정신 차려.”하는 경고. 선악지식을 아는 한계 안에 있는 경고죠.【“주의하라.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말씀을 대하라.】건성입니다. 진성이 아니고 건성으로.【진리라고 여기는 경솔한 짓은 하지 말라. 다 지나간 에피소드에 불과하다.】성경의 모든 내용이.【심심하거든 보라. 굳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다.”】이게 우리가 우리한테 계속해서 설득시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아주 손쉽게 이 설득에 넘어갑니다.
【그렇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한번 적어볼게요. ‘그렇다.’ 성경, 이 신명기는 나랑 상관없어요. 그렇다. 오케이.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 하면 ‘아멘’이죠. 할렐루야, 아멘. 그렇다. 성경은 다 지나간 이야기다. 선택과목은 될 수 있어도 필수는 되지 않는다.
‘나랑 상관없다.’ 여기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한계 안에 있는 ‘나’가 등장합니다. 한계 안에 있는 나의 특징은 나의 의미가 다치지 않으면서 한계 너머에 새로운 지식을 확보하여 후닥닥 다시 내 쪽으로 그것을 가져옴으로써 나의 질적인 발전과 도모를 시도하는 게 기존의 나에요.
인간의 능력은 결국 측정하는 게 나라는 현실, 기존의 현실, 하나밖에 없는 단일 현실이에요. 언약의 현실을 느끼지 못하고 단일 현실에 있으면 단일 현실은 항상 지평선을 바라보는 시선을 내 쪽에서 ‘쏘세요’ 하면서 쏘는 거예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한 발짝 다가서면 두 발짝 멀어지는 거예요. 뭔가 측정하고 관찰하고 상대를 장악해서 내 소유화시키고 파악하려면 저쪽 지평선, 저쪽 대상은 또 달아나고 있어요.
도대체 어디까지 공부해야 되고 어디까지 연구를 해야 내가 진리로 인하여 내 심적인 동요가 멈추겠는가? 그 이야기를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쌓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탐구했고 많은 여성을 만났고 집의 정원을 꾸몄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됨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솔로몬만 그렇게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시편 90편 한 번 보겠습니다. 여기 시편 90편에 보면 본격적으로 내용 들어가기 전에 앞에 표제, 제목이 있죠. 제목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모세의 기도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4절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천 년이 하루 같다 이 말이죠. 모세는 유령성을 갖고 있거든요.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그땐 신났죠. 한창 꽃이 필 때 나이가 얼마냐 하면 30대에요. 30대를 정점으로 해서 그다음부터 포물선 그리면서 이제 꼴아 박습니다. 그래서 30 지나고 난 뒤에 어떤 노래를 불러야 돼요? ‘서른 즈음에’ 이런 거.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래서 가수 김광석이 예수님 나이에 돌아가셨잖아요. 점점 더 멀어져간다. 도대체 정점으로부터 포물선 곡선이 점점 더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꿈을 꾸게 되면 거기 나오는 여러분들의 모습은 30대에요. 전혀 아픈 것이 없는 30대. 또는 20대의 군대생활. 이게 꿈에 막 나타나요.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저녁이 되니까 아침에 꽃 핀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한계 있죠.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 손을 타지 않은 생명나무 입장에서 한계의 진솔한 면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왜 죄냐가 이 앞에서 다 드러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것이 왜 죄입니까? 그냥 죄라고 하니 죄에요. 선악과 따먹을 때 뭐 경솔하게 따먹었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죄니까 죄인 거예요.
인간은 그냥 죄를 말하기 위해서 인간 앞에 선악과를 두었고 따먹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죄를 바리새인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죄가 뭐냐? 죄는 바로 자기 의에요. 자기 의. 자기 의입니다.
시편 90편 조금 이따 다시 보고요. 신명기 31장입니다. 신명기 31장 26절에,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너희가 목이 곧고 패역하다는 사실을,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동할 때 그 언약궤 옆에 같이, 너는 이러한 이러한 반항과 반발을 심하게 했다는 사실을 적어서 그 책을 언약궤와 함께 이동시켜라. 이동시킬 때 도착하는 곳, 그 나라가 천국이고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그곳이 천국이에요. 내 모든 죄가 그대로 가야 그 천국이 수치스러운 나의 과거를 인정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수치스러움을 우리 주님이 어떻게 해결했는가 주님만 영광을 받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남은 생애는 죄만 지으라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걸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직시하라.’ 내면의 소리를 늘 들어야 돼요. ‘성경 공부했냐? 그거 다 소설이야.’ 이런 소리를 늘 들어야 돼요. 이런 소리를. 다른 사람 봐. 성경 보는 사람 없잖아. 네가 왜 유별나? 너 안 해도 되는 짓을 왜 하는 거야? 그냥 조용하니 살아. 조용하게 살다 죽어, 그냥. 아무도 몰라. 천국? 성경에 나오지, 아무도 천국 있는 걸 본 사람도 없어.
그냥 possible, 어떤 가능성? 일단 보험 들어놓으면 없어도 보험금 그다지 손해 안 보고. 그래서 요즘 교인들은 헌금 안 해요. 그다지 손해 안 보려고. 몰빵하다가 돈 다 날리는 수가 있어요. 어차피 있는지 없는지 긴가 민가 하는데 거기다가 무슨 자기 목숨을 바칩니까. 간이나 보죠. 발만 살짝 담갔다가 언제든지 뺄 준비를 하는 거예요. 큰 교회 다니면서 뒷자리에 앉아가지고 점심값만 천 원씩 내고 점심 먹고 가다가 나중에 교회에서 시설이 노후 돼서 교육관 새로 짓는다고 하면 후딱 빼고 다른 교회 가면 되잖아요. 어차피 몰빵할 거 아닌데 뭐요.
그래서 교재 제일 끝에 뭡니까?【그렇다.】아멘이죠.【그렇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지금 수련회하는 모든 게 나와 상관없어요. 그냥 지식나부랭이 이거 듣는 거죠. 그런데 그다음 보세요. 마지막 결론까지 봐야 돼요.【내가 나에 대해서 남이 되는 자들에게만 진리다.】내가 나에 대해서 남이 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도 하나의 취미고 성경은 그냥 봐도 되고 안 봐도 된다고 여겼던 그 나. 그 나가, 생명나무 시선에서 ‘누구세요?’. 두 개의 나, 생명나무 속에 있는 나와 선악과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나, 이 두 개의 나가 로마서 7장에서는 함께 있는 겁니다. both and neither-nor. 서로가 다른, 서로 다른 정도가 아니죠, 서로 반대되는 것이 내 몸 안에 하나로 두신 이유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한 성령의 기막힌 작전이고 전략인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이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노릇하라고 성령이 오신 거예요.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용당한 거예요, 하나님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편인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지롱?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피조물을 영원히 피조물 자기 자리로 고정시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 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이고요. 우리는 피조물인데 주님만 증거하는 피조물입니다.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나오잖아요. 천국 가서 면류관도 집어던져요. 집어던져도 괜찮아요. 미쳤어. 내가 이걸 왜 써? 이 면류관을 내가 왜 써. 뭐했다고 써? 주께서 성령께서 다 하셨는데. 이걸 주님 발 앞에 던지죠.
예수님 발 앞에 향수 던지고 눈물로써 주여, 드디어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군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뭐에요? 내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잖아요. 내 지평선밖에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이, 지평선 너머까지 오신 그 유령성에 의해서 언약의 세계라는 새로운 현실에 접합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 여인은 뭐 행실 나쁘다고? 뭐 수군수군 소문 나쁘다고? 이야기하라 해. 나 소문 나쁘다 해. 너는 단일 현실밖에 모르지?
언약에 두 개의 현실이 있는 거예요. 그 단일 현실에서는 제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인간의 자기 의를 지키는 것에 모든 걸 다 바쳤어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욕 얻어먹지 않는 인생, 이만하면 선방한 인생, 완벽하진 않지만 선방한 인생. 이 유령성이 어디서 생산되는가? 바로 광야와 약속의 땅 그 사이에서 유령성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서 친구처럼 지내고 하나님의 영광까지 봤어요. 봤으면 굳이 이 땅에 다시 올 이유 없습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자기는 이미 구원에 온전하게 되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니 아니야. 그게 온전한 게 아니야. 네가 백성들 속에 가서 장차 예수님이 얻어먹을 욕을 네가 다 얻어먹는 그것이 너의 온전함이야.”
그게 너의 온전함이에요. 질적인 일의(一意), 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의미가 내 속까지 파고들어서 나를 완전히 덮쳐버릴 때 모세는 오늘 신명기 33장의 말씀처럼 내(여호와) 종이에요. 나와 연관성이 있는 종이 되는 겁니다.
이 유령성을 곁에서 누가 봤는가? 여호수아가 봤습니다. 여호수아야, 많이 기다렸지? 너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래? 하나님께서는 아주 사소한 것을 빌미잡아 나로 약속의 땅에 못 가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이 유령성이 작동하는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에 너를 집어넣게 해서 너도 나처럼 유령성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께서 너에게 맡겼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서 제일 먼저 만난 존재가 누구입니까? 사람을 만났어요, 누구를 만났어요? 군대 장관, 천사를 만났어요. 너 언제까지 인간일래? 언제까지 네가 인간일래? 너는 유령이 되어야 되지, 언제까지 인간일래.
네가 아는 현실, 그 현실 바깥에 인간이 측정해서 아는 현실, 일상생활에서 눈으로 늘 목격하고 있는 해. 그런데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그 해가 한계 바깥에 있는 언약에 의해서 멈췄어요. 중지했어요.(10:12-13) 놀랐어요. 놀랐어요. 따라서 해가 멈췄다는 것은, 해라는 장막 뚫고 저쪽 한계 바깥에서 안에 있는 언약적 백성에게 유령성을 제공하기 위해서 해까지 주께서는 다루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해 멈춘 것 가지고요. 또 과학자들은 그때 천체의 캘린더를 찾아서 그때 천체 배열이 어떻게 돼서 해가 멈췄는가? 동방박사가 별의 움직임 따라갔다는데, 그 별은 무슨 별인가? 그것은 또 도망치는, 지평선을 따라가겠다는, 자기 의를 포기 못하는 행동이에요.
성경 전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기도하기를 오직 하나만 기도했어요. 하나님이여, 저 성도들이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3:18-19) 인간이 기존에 아는 사랑, 나를 지켜주는 사랑 말고 주님을 증거하는 데에 필요한 그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인간 사랑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백지영 가수가 잘 이야기해줬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는 거예요. 결혼해서 내 거라고 여겼는데 결혼하니까 남이었어요. 발 빼려 했는데 애가 생겼네. “네가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애는 책임져야지.” “그래!” 자기 의가 있으니까 “그거 책임진다. 나도 인간이거든.”
육에서 난 자가 육의 한계를 못 벗어나서 나이 많아지고 나중에 요양병원에 갈 때 기껏 하는 소리가 “그래도 나는 자식 네 명 낳고 내가 다 대학 보내고, 어? 결혼시키고 시집보내고 다 했어! 뭐 나 자식들한테 부끄러울 것 없어.” 전화해서 “돈 보내라. 이번에 언제 내려올 건데?”
이것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전화 안 할 거예요, 자식한테? 마찬가지인데 성도의 그 자기 의, 목이 곧은 것, 교만한 것, 그게 놀랍게도 성도는 언약궤 옆에 나란히 같이 비치되어 있다는 거예요. 못난 자, 자기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 자기에 미쳐 사는 인간, 그것을 천국까지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언약궤가 그것을 이끄십니다.
그때 그 언약궤는 서슴없이 요단강을 건너가요. 보통 요단강은 강물이 무릎까지 와서 바지 올리고 건너가면 되는데, 딱 건너갈 타이밍에 갑자기 장마가 일어나서 한 시간당 100mm 내려서 물이 위쪽에서 밀려오고 있었던 겁니다. 들어가면 죽어요.
그런데 여기 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여호수아의 지시를 받고 “언약궤 앞장세워라! 이 홍수 오는 타이밍과 언약궤 메고 우리가 들어가는 타이밍이 하나님에 의해 언약적으로 일치했다.” 왜? 모세 때 약속에 의하면 언약궤가 앞장서고 백성은 언약궤 따라 뒤따라가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여리고성 갈 때도 뭐를 앞장세웠는가? 언약궤를 앞장세웠어요. 아니, 언약궤 안에 뭐가 있는데? 언약궤 안에는 우리가 범죄한 증거들만 있어요. 범죄한 증거들이 있는데 어떻게 여리고성이 무너집니까? 보이지 않는 유령성에 의해서 우리 죄인을, 먼저 용서받은 쪽이 하나님의 언약의 죄 사함의 혜택이 없는 자를 전쟁이라는 현실을 새로운 현실로서 언약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기 부재(不在)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재 증명. 이 말 한번 보세요. 예수님의 부재 증명이니까 예수님은 여기 없죠. 영구 없~다. 영구 없다고 발언하는 그 영구는 있어요, 없어요? 내가 있으니까 내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왜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가? 인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한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과 죄인인 주님과의 차이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불신자들이 성도들보고 “예수님 어디 있나? 있으면 내가 믿을게.” “예수님 없어.” “넌 예수님 봤어?” “안 봤어. 없어.” “없는데 그 없는 하나님, 없는 예수를 네가 왜 믿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다는 존재로서 계십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뭐냐? 주의 이름이 계시죠. 주의 이름은 없어요. 안 보여요. 다만 주의 이름은 자기 백성이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하고 잘난 체하는 그것만 증거로 수집할 뿐이에요.
그 주의 이름이 신약에 오면 뭐가 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드디어 주의 이름이 하나의 보통 사람으로 출현하게 되죠. 그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도 그 언약성의 혜택을 입고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여기서 다시 시편 90편으로 돌아옵시다.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다른 사람하고 죄 논하지 마세요.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자꾸 멀어지는 또 하나의 지평선 논쟁밖에 안돼요. 시대가 변하면서 기준점이 자꾸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대 철학에서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윤리 도덕이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 아나운서가 반바지입고 아나운서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요새는 아나운서가 반바지입고 하고 이런다고요. 카메라는 위에 비추니까. 신입사원들이 뭐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끼리 비교하는 것은… 자꾸 세대차이 난다, 기성세대하고 MZ세대하고 차이나는 겁니다. 자꾸 차이의 핑계를 대는데 둘다 절대적인 게 없어요. ‘나 때는…’, 맨날 나 때 이야기하거든요.
누가 주의 얼굴빛 앞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보이는 예수님이, 예수님 자기 육신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기준점이 뭐냐? 아버지가 어떻게 되는 기준점을 고수했어요. 그게 예수님이 갖고 있는 유령성입니다. 두 개의 현실이 다 공존하고 있어요.
그 상황이 오늘날 성도가 처한 똑같은 상황이 되는 거예요. 성도가 죄를 지어도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이미 처리하고 청산한 십자가 앞에서 죄 아닌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3장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이 끌려가고 있다, 또는 빨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세탁기 안에 집어넣으면 통 안에 빨려가잖아요. 지금 언약의 중력에 사도 바울이 끌려가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도록 끌어가는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도 바울은 지금 만끽하고 있어요.
주여, 제 육체 언제 거두어 가실 건데요? 그게 사도 바울의 자기 개인적인 마지막 욕망 아닙니까. 자기 개인적인 마지막 욕망은 이 땅에서 빨리 죽는 겁니다. 그 배출구에 욕실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빨려 들어가는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그 끝에 뭐가 있느냐? 영생이 있는 거예요. 좁은 길이고 그 끝에 생명이 여기 있다는 겁니다.
다시 시편 90편에 와서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뭐 아주 우린 즐겁죠. 주의 분노를 우리가 알다니. 한계 밖을 알다니.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70, 80 평생을 손바닥에 길게 그려보지만 손바닥을 좁히면 이게 제로가 돼요. 순간이 되죠. 없죠.
그래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아예 “날아가나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을 디뎠다, 이 땅에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는 말조차 할 자격과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날아가는 거예요. 주님을 향하여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누구의 기도라고요? 이게 바로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의 기도.
이제 남은 시간을 아까 남겨둔 이야기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0장 한번 봅시다. 이게 정말 신기해요. 첫째 사망과 짝을 이뤄 한 조를 이루는 것이 첫째 부활이에요.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이 함께 있다는 것, 사람 안 믿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지. 네 안에 뭐 별난 게 있다고 첫째 부활이 있어?
이걸 증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도의 목을 날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죠. 목 베인 영혼들(“…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 20:4). 짐승과 결별하면서 그 짐승에 의해서 목 베인 영혼들. 이게 첫째 부활이에요.
자, 여기가 공산주의 사회 북한이다. 여러분들이 몰래 성경공부 하다가 걸렸다. 그래서 목 베인다 합시다. 시범조로 김정은이 총살하듯이 대포로 쏘듯이 “너는 시범조로 당해야 돼. 그래야 예수를 안 믿지.”하고 당했다. 목을 쳤다.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목을 칠 때, 1번-간지럽다, 2번-아프다, 몇 번입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초대교회에 전설에 의하면 사자가 있는 경기장에 가둬놓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일 때,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난리 났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먼저 먹잇감이 되겠다고. 번호표 뽑아라. 줄 서라. 뭐 난리 났어요. 아, 물론 전설이겠습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생각이에요. ‘내가 죽는 것은 주를 만나서 말씀대로 너무 기쁘긴 기쁜데, 아직 딸내미가 시집을 안 갔네. 아직까지 애가 어려. 손자가 아직 유치원 다니고 있어요.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데.’ 꼬리가 길어요. 우리의 기억의 꼬리가 길어요.
딸 결혼할 때 아빠 없이 멀뚱한 것보다도 아빠 손잡고 들어가면 “저 집 자식들 참 잘 키웠다. 부모도 멀쩡하네.” 다들 멀쩡해요, 하여튼. ‘멀쩡하네.’ 하고 오만 오천 원짜리 식사 또 맛있게 하고 “아, 결혼식 괜찮다. 부럽더라.” 집에 가서 그런 소리하기를 기대하는 것, 이게 뭡니까? 자기 의죠. 자기 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은 주께서 아예 목을 그냥 날리는 거죠.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상황(첫째 부활)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그래서 짐승의 밥 되기를 먼저 다투었다는 그것은 신앙에 하등 도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앙을 막아요. 왜냐하면 평소에 그런 일이 없더라도 이미 우리는 유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20억? 쳇,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이 지옥에서 20억 가지고 더 살란 말인가, 크루즈 여행하면서? 그런데 가고는 싶네? 아빠, 나 변호사 됐어. 변호사? 그게 뭐가 중요하냐? 예수 믿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데 촌 동네에 누구 둘째 아들 변호사 됐다 하면, 기분은 좋네? 내가 키운 보람 있다.
이건 일상이에요. 일상. 우리가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 안하나 주께서 그렇게 언약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이룸의 한 요소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일어난 어떤 사건 같은 것은 내 안에 있는 순수사건, 인간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예상할 수 없는 순수사건을 위해서 일상의 많은 사건들이 순수사건과 연관해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쯤 내 목숨 갑니까? 뭐 순교할까요? 그것도 욕심이에요. 탐욕이에요. 시험 드는 이야기에요. 괜히 죽을 때 외제차 받쳐 죽으려고. 그냥 트럭에 받쳐 죽으면 되지. 자기가 폼 나려고. 이거 자기 의입니다.
첫째 부활, 이것은 한 몸이 부활됨으로써 상관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있는 일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고 어떤 특검법이 통과되고 그런 것들은 성도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런 것들과는 격리가 되고요. 이 몸은 이미 유령성으로 예수 안에 합세되었기 때문에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에 관계없는데요.
그다음 둘째 부활과 둘째 사망. 서로의 다른 현실성이 노골적으로 다 정리정돈, 마감되는 거예요. 둘째 부활, 천국의 영광 속에 둘째 부활. 주님이 마련한 둘째 부활이죠. 여기 둘째 사망은 지옥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라 할 때,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끝으로 이겁니다. 첫째 부활-첫째 사망이 한 몸으로 같이 있다면, 그것이 확정됨으로써 동시에 무엇도 확정되느냐? 천국과 지옥도 확정됩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보고 “천국 있으면 보여줘. 있으면 내가 믿을게.” 할 때,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나를 봐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거든.” 끝. 끝이에요. “나는 죄밖에 지을 게 없거든.” 끝.
나에게 일어난 그 언약적 고정성이 결국은 모든 인간이 죽어도 천국과 부활로 다시 살아나서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으로 갈라짐을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유령적인 시간성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이미 마음껏 시간의 끝, 역사의 끝까지 여러분의 작은 몸으로 다 표현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세기 때문에 모세는 구경만 하고 다시 도로 주님 품으로 갑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시체 찾는 것은 인간의 단일 현실에서 찾지, 모세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고 신명기 18장에 보면 같은 말이 나오는데 그것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같이 적용되어 있는데 신명기 18장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선지자 되었고 오실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 이후에 우리가 오늘날 이 시대,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로서 모세 같은 유령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마음껏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허락하신 대로 두 개의 현실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말씀의 세계, 한계 밖의 세계를 성령님의 은혜로서 알게 되니 감사합니다. 이 주님의 참빛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하나님의 의가 없게 된 것을 이제사 발견한 그 기쁨으로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 남은 생애를 다 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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