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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여수 (고린도전서 ; 십자가 능력).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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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여름수련회 교재

 

[십자가 능력]

 

-고린도전서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자연이 있다

 

-진화론적 세계관의 입장-

 

1) 양자역학부터 출발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입자로 이루어져 있어 인간 몸속의 모든 양성자를 다른 양성자로 교체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즉 우리의 몸은 이 세상의 모든 ‘죽어 있는 사물’과 별달리 특별한 것이 없다.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 같은 아주 작은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들의 상태나 위치와 같은 속성들이 결정되어 있지 않고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중첩’되어 있으며 오직 다른 물체와 상호작용, 곧 관측의 순간에만 결정되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한편, 생명체의 몸은 아주 큰 물체이면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이 따뜻한 몸속에 진동하고 서로 부딪치면서 중첩 상태를 유지하기 힘든 환경이다.

 

2) 최초의 생물

 

처음 등장한 생물들은 가만히 바다를 부유하며 빛 알갱이나 삼키는 수동적인 존재들이었다. 이것들이 만들어낸 광합성 폐기물, 즉 산소 그 때문에 스스로 질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산소 호흡과 같은 것들을 먹고 사는 것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옆의 것을 먹는다는 옵션이 생기니 새로운 전략 두 개의 탄생한다. 하나는 희생물 오기를 기다리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물을 직접 만드는 전략이다.

 

이 중 희생물을 만들어 가는 것들에게 몇 가지 해결한 과제가 있다. 첫째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이고 둘째는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생물들이 좌우대칭을 가지고 있지만 옛날은 아니었다.

 

3)좌우대칭 생물의 출현

 

왜 좌우대칭인가를 생각해 보면 이러하다. 좌우대칭 형태는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유리하다. 전진, 혹은 방향 틀기, 이 두 가지만 구원하면 되는 것이다.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아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나쁜 선택을 하면 변사체가 될 수 있다. 좋은 것, 나쁜 것 구분할 능력이 필요하다. 이에 외부 자극은 평가하는 ‘감정(感情)’ 시스템과 그리고 이후 감정의 기원이 되는 시스템이 탄생한다.

 

오직 좌우 대칭 동물만이 뇌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뇌와 감정은 움직이기 위해 좌우 대칭 동물의 탄생과 함께 처음 탄생한 것이다. 뇌 있는 것들이 서로 배틀 로얄을 벌리다 보니까 점점 더 생존환경이 복잡해지게 되었다. 먹이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날 먹어 치울 포식자도 도처에 존재한다. 그래서 점점 더 복잡한 전략 개발이 필요했다. 단순히 뇌로는 종이 울리면 먹이가 나온다는 걸 학습할 정도 되지만 조건 반사로 자극에 반응하는 그 이상의 복잡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3) 발달한 기능의 동물 등장

 

그런데 인간의 조상 격인 척추동물과 어류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학습 방법이 나타난다. 뇌에 껍질이라는 부위가 생겨나면서 새로운 정신의 능력이 같이 탄생했다. 이제 스스로 이런저런 행동을 해보고 어떤 행동이 나에게 이득을 주는지 배워가면서 새로운 행동전략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곧바로 멋진 보상을 얻는 게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맛있는 옆 친구 덕에 바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에 비해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행동-보상 간 시간 간격이 길어진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라는 특성이 나타나는데, 이에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행위 자체가 보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척추동물들이 복잡한 행동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4) 여러 기능 동물의 발달

 

식물이 지구의 왕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식물들이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먹어서 스스로 지구에 빙하기와 대멸종을 불러일으켰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육지는 절지동물 같은 징그러운 생물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때다 싶어 어류들이 육상진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물 밖은 춥고 덥고, 난리였다. 물의 수온과 달리 기온은 변덕이 심했다.

 

여기서 운명을 가르는 두 전략이 탄생한다. 하나는 그냥 추워지면 그냥 쉬지, 뭐 하는 쪽(파충류의 조상)이고 다른 쪽은 생체 핫팩을 항상 달고 다니는 쪽이다. 포유류의 조상이며 수궁류라 불리는 온혈동물이 채택한 전략이다.

 

수궁류(獸弓類, Therapsida는 고생대 페름기부터 중생대 트라이아스기까지 번성했던 단궁류(Synapsida) 진화 계통의 한 분류군으로, 오늘날 포유류와 그 조상들이 속하는 주요 그룹이다. 수궁류는 파충류와 포유류의 중간적 특징을 가지며, 포유류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생물학적 특성(예: 복잡한 턱 구조, 다양한 이빨 형태, 몸통 아래로 뻗은 사지 등) 이 이 그룹에서 처음 나타났다. 초기 수궁류는 파충류와 유사한 변온 동물이었으나, 진화가 진행되면서 항온성(온혈) 특성을 일부 획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우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수궁류들 지천으로 널려 있다. 온통 수궁류의 세상이다. 그러다가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대멸종 때문에 수궁류는 짧은 전성기를 마치고 쪼그라들었다.

 

※페름기(페름기, Permian)는 지질학적 시간대 중 하나로, 대략 298.9백만 년 전부터 252.17백만 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고생대의 마지막 시기로, 대륙들이 하나로 모여 있던 판 구조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생물군의 발전과 멸종이 있었다. 특히 페름기의 끝에서는 페름-트라이아스기 대멸종이 발생했는데, 이는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대멸종 사건 중 하나로, 생물 종의 약 90%가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핫팩을 유지하려면 밥을 많이 먹어야 했기에 먹이가 부족했던 생태계적 IMF 시대에 절전 상태를 가지고 있던 파충류에게 허구한 날 양식을 빼앗겼다. 생쥐 같은 작은 몸체를 가진 것들이 덩치 큰 파충류가 영업 종료하는 밥에 활동하며 눈물을 흘리고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한다. 하도 파충류한테 눌려 살면서 질질 짜다 보니 초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연습 시도’를 시작한 것이다. 포유류의 겉질이 새겉질로 진화하고 머릿속으로 자기 행동을 미리 시뮬레이션(가상현실 구성) 할 수 있게 되면서 강화학습과 달리 행동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이 진화할 수 있었을까?

 

5) 시뮬레이션 기능의 발달

 

따뜻한 피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그것으로 추정된다. 따뜻한 피는 포유류가 밤에도 활동할 수 있게끔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한 도박이었다. 앞서 말했듯, 따뜻한 피를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 소모가 아주아주 크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일 크기의 보아뱀보다 30배 정도 더 많은 칼로리를 소비해야 한다. 한번 사냥에 성공하면 한동안은 안심할 수 있었던 파충류와 달리 포유류는 매일매일 생과 사의 기로였다.

 

그래서 조금 더 효과적인 인지적 능력으로 효율적인 사냥 방법을 고안해야 할 강한 선택압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능력이 있는 동물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이 세계를 닮은 시뮬레이션 세계를 지각하는데 그 덕분에 그 세계 안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게 된 동시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뇌신경 활동으로 재현해 내야 했기에 계산량과 에너지 소모가 상담했다.

 

이러한 막대한 계산량을 위해선 신경세포의 효율성이 중요한데 신경세포의 활동 속도는 특정 온도에 최대가 된다. 포유류의 체온인 37〬에서 변온 동물의 체온에서보다 이론상 두 배나 빨라진다.

 

한편, 시뮬레이션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짓수는 무한대나 다름없기에 영원히 계산이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뮬레이션 능력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자기가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자기 행동에 대한 의도를 창조해 내는 새로운 기능과 함께해야 한다.

 

이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자기 의도를 추구하는 능력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서서히 눈덩이를 굴리게 된다.

 

6) 정치의 시작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영장류들이 있다. 풀떼기나 먹던 영장류들은 하루 종일 풀을 씹고 소화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었는데 과일은 열량이 풍부하고 소화도 빨랐기에 과일을 주식으로 하는 영장류들은 동물들에겐 정말 흔치 않았던 자유시간을 많이 가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도 할 게 없으면 정신이 살짝 나가는데 이 과식하는 영장류들도 조금 살만해지니까 정치질하기 시작한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외부 환경의 위협과 외부의 적보다 내 옆 동료들과의 경쟁이 생존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쪽수와 동맹! 이것이 나를 담그려는 존재인지 나를 도와주려 한 존재인지 마음을 읽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어떻게?

 

일단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상대도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겠지, 하면서, 앞서 언급했던 내 의도를 읽어내는 시뮬레이션을 상대에게 투사해서 꿍꿍이를 파헤친다는 것이다. 이 능력을 위해 영장류에게만 존재하는 특수한 새겉질 영역인 과립이마옆앞겉질(gPFC General Prefrontal Cortex (일반 전전두피질)라는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물이 하는 역할은 이 세상에 대한 시뮬레이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서 내 행동의 의도뿐 아니라 내 사고와 사고의 의도까지도 만들어내는 역할인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면, ‘목표: 죽음을 무릅쓰고 먹이 구하기’로 정해졌으면 “이번에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며 적이 많지만 숨을 데가 많아 상대적으로 안정한 상황으로 판단됨”으로 스스로 정리하는 식이다. 이중 첩자인 셈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내가 어떤 시뮬레이션을 왜 돌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메타(초월)인지(認知)의 탄생인 것이다. 이 능력이 선행되어야 다른 경쟁하는 것들이 어떤 시뮬레이션을 왜 돌리고 있는지 추측해서 그 생각과 마음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모델, 그리고 그 모델에 대한 시뮬레이션 모델, 그리고 그 모델을 기반으로 한 타자의 마음 모델까지도 이 모든 게 갖추어지고 나서야 뇌 안에 언어와 논리가 들어설 수 있는 진화적 배경을 갖춰진 것이다.

 

7) 꿈과 시뮬레이션

 

그런데 시뮬레이션 능력은 포유물의 전유물은 아니다. 파충류의 친구의 친구인 조류들도 온혈성을 독립적으로 진화시킴으로써 시뮬레이션 능력까지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꿈을 꾼다는 증거가 명백히 드러난 두 부류도 포유류와 조류뿐이다. 많은 가설이 존재하지만 꿈 또한 생존과 관련된 중요 상황을 이루는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렘수면 상태(REM 수면, Rapid Eye Movement sleep은 수면의 한 단계로, 급속 안구 운동이 특징이며 뇌 활동이 활발해지고 꿈을 자주 꾸는 상태입니다. 렘수면은 전체 수면 주기의 약 20~25%를 차지하며, 깊은 수면 단계인 비(非)렘수면(NREM 수면) 과 번갈아 가며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에서는 전두엽 활동 저하로 정보처리 과정에 오류가 증가하기에 꿈이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은 뭔가 미완성인 부분이 많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깨어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하던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게 된다. 꿈이 시뮬레이션이고 시뮬레이션이 꿈이라면 우리는 꿈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꿈이 그토록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꿈이 현실을 닮아서가 아니라 현실이 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자면서 꾸는 꿈보다 더욱 정교하고 정확한 꿈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서로 비슷한 경험을 창조된 꿈을 고유하며 그 꿈을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삶의 과제를 이해한다. 꿈꾸고 상상하는 것, 그것이 뇌의 진화요 지능의 진화이다.

 

2. 인간이 있다.

 

-자기에게 몰두하는 자기 중심의 인간관-

 

성형외과 의사인 미국인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는 환자 중에서 외모가 바뀌었음에도 성격이나 행동이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외부 변화보다 내부의 자기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Cybernetics라는 말은 그리스어 큐버네테스Kubernetics에서 나온 단어로서 ‘조종하다, 통제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조절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장치다. 이게 인간 정신이 전부라는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은 ‘목표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목표가 주어지지 않으면 정신적 사이버네틱스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이버네틱스 시스템은 의외로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동원해서 이 시스템에 압박해서는 아니 된다. 목표 집착은 도리어 시스템에 변형을 일으켜 도리어 일을 망친다.

 

인간의 뇌는 구체적으로 목표만 생겨나면 그 목표대로 뇌가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이론을 1960년에 내어놓았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실제의 경험과 상상 속의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가 생생하게 상상하면 뇌는 그 목표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따라서 몰츠 박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토록 한다. 자기 이미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적 믿음과 다르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아무리 정직해지려고 해도 결국은 실패하는 이유는 의지로 극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미지 자체를 먼저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마저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원래 타고난 해결사로서 자체적으로 해결 능력이 있다. 아무리 자신이 무능하고, 부끄러운 점이 있고, 약점이 있더라도 그것마저 인정할 때 모든 요소가 도리어 장점으로 변한다.

 

이게 의식 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의 힘이다. 이 무의식이 세계가 나의 세계의 원형이다.

 

3. 성경이 있다.

 

자연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그것은 과학이 되고 지식은 축적된다. 과학의 영역은 측정의 영역이다. 과학은 정확해야 한다. 더는 의심할 게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의욕을 불태운다. 그런 식으로 법칙을 만든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증명한다. 자부심도 느끼지만, 법칙이 깨어질까 초조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늘 버거운 존재다.

 

과학 다음에는 예술이 있다. 예술이란 정확함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표현 못 하는 것을, 표현을 통해서 넘어서려고 한다. 표현 안 되는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느껴야 합니다. 정확성을 따질 대상이 아니다.

 

예술에는 모든 것이 근사치다. 근처에만 가고 멈춰야 한다. 그래야 보이는 것이 있단다. 예술은 따지면 안 된다. 따라서 예술은 극히 민주적이다. 내가 그냥 좋다는 그것을 타인이 비난할 권리는 없다. 예술은 매료되기를 원한다. 매력이 없는 예술은 도태된다.

 

예술은 생의 시름을 잠시 덮는다. 고민거리를 잊게 만든다. 자아를 향한 관심이 예술에게 뺏길 때, 상실됨이 도리어 행복이 된다는 역설을 배운다.

 

숨차게 살아온 경쟁 마당에서 나도 없고 타인도 없는 공간이 예술 세계다. 에너지 소비를 요구하지 않는 동네가 예술계다.

 

예술 다음에는 죽음이 있다. 화면 전체를 새까맣게 칠해도 그저 ‘죽음 이미지’이다. 죽음과 일치하지 아니한다. 죽음을 느끼려고 하니 살아 있음이 장애가 된다. 죽음마저 정복할 수는 없을까? 죽음 너머 세계로 진입할 수 없을까? 죽음 안에 뭐가 있는지, 뭐가 벌어지는지 궁금해진다.

 

죽음의 영속성과 자연의 영속성 중, 어느 것이 더 길까? 막상막하처럼 여겨진다. 모르겠다. 죽음 이후를 모르는 판에 지금껏 알아 온 것도 다 ‘모르겠다’에 삼켜진 것이 아닐까? 애초부터 무능했던 것은 아닐까?

 

성경, ‘모르겠다’의 집대성이다. ‘모르겠다’라는 인간의 숨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대신 발설해 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3-14)

 

인간의 본성은 산낙지 같다. 자꾸 답이 담긴 쟁반을 벗어난다. 성경에서 튀어 나간다. 이것이 성경의 기능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인간 세계에 쓸모 있다.

 

어릴 때부터 과학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예술에서 가끔 매력을 느끼고 잠시 휴식을 갖다가 결국 왜 죽는지도 모르고 육신이 사라진다. 끝마무리가 안 된다.

 

정확함, 그리고 그 너머의 신비로움마저 죽음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

 

과연 천국은 인간이 넘볼 곳이 아니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16)

 

Ⅱ 본론

 

(줄거리)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뒤 역사에 남겨진 교회가 현실 속에서 어떤 갈등과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그것과 교회 본질 사이의 상관관계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이다. “예수 안에서” 비로소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면 (1:2) 예수 안에서가 교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관권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아담 계통인 “우리 안에서”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일까? 왜 은혜가 계속해서 요구되며 왜 하나님의 평강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 것일까? (1:3,7) 그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소위 거룩한 자들이 “예수 안에서”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음 알 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4:4-6).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의 영광이 아닌 세상을 초월한 주의 주되심의 영광으로 덮어버리는 동원되기 위함이다. 그것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도에게 남긴 것으로 추진된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성도를 보고 교회를 잘 세워라 든 지 어디를 개척하라든지 그 방법은 이러하다든지 조직력을 강화하여 질서 안에서 교회가 자체적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라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단체로서의 교회가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늘의 것을 제대로 세상에 보이라는데 있다. 이것이 교회다움이다. 그 교회다움은 오직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의 은혜와 평강이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책망하고 훈계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이 은혜 됨과 평강의 훼손에 관한 것이었다. 은혜란 비소유를 의미하며 뭔가 이미 우리 쪽으로 확보한 것을 인정치 않고 몰수하고 들어간다. 그것이 고매한 품성을 지닌 사도라 할지라도 해당한다. (1:12-16/3:4-6,21-22).

 

바로 이 은혜의 출발이 십자가이며 (1:17-2:2) 그 뒤의 진행되는 모든 성령의 사역도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며 능력이 있으며 구원과 영광까지 좌우하고 있음을 소개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2:3-3:1). 그러면 이 은혜 됨이 무엇과 대조가 되어 교회 내에서 부각이 될까?

 

그것은 성도의 육신 됨이다. (3:3). 사도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선언 이후 (1:25) 그것이 왜 위대한가를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통해 보여준다. 첫째는 파당의 싸움이었다(3:4-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 누구도 구원의 기초에 개입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3:7,11-15).

 

성령께서 그 성도를 성전으로 삼아 일하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3:16-2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만물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종사하기 때문이다(3:21-23).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계속적인 신뢰(faithful)이다(4:2). 자신의 것에 관심 두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에서 볼 때는 만물의 찌끼같이 보이고 미련하게도 보이겠는지만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4:4,9-13).

 

사도의 이러한 세상관은 누구나 본받아야 한다(4:16). 그러나 사도의 이러한 철저한 신앙이 그들 눈에 띄지 않으니깐 마구 방탕의 길로 간 것이다(5:4-5). 그것을 사도는 ‘교만’이라고 한다(4:1/9).

 

그 방탕 중의 하나가 음행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이런 자를 용납 하는 것 자체를 사도는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 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 된다(5:7).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판단해야 할 정도인데 세상에 판단 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씻음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6:11).

 

성도의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성전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6:19-20). 이 몸이 내 그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값으로 산 팔린 것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6:20/7:23

).

 

인간이 자신의 욕정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혼인은 하는데 그러나 그 혼인 자체가 성도에게 궁극적인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세상 행적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7:29-32).

 

두 번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이다. 우상 제물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교회 내에 신앙 약한 자들이 볼 때 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듯한 인상을 받고 낙심해 있다는 그것이 문제였다(8:12). 그래서 기존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자들을 생각해서 절제 있는 행동을 취할 것을 당부한다.

 

사도 자신 같으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다(8:13). 그러면서 그런 양보가 바로 사도가 가지는 특권을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님은 자신이 아내나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자비량하고 결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 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자유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약한 자들을 망하게 하는 분별없는 자유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모든 절제가 생명으로 향하는 다른 목표가 있기에 생기는 것이다(9:25). 이 모든 이야기가 신앙인이 넘어. 또 넘어서야 할 시험들이다.

 

하지만 감당할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시험을 당할 때면 다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원망할 권리조차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다시 확인시킨다(10:13).

 

옛 습관으로 기독교를 이해한 자들에게 우상 제물 먹는 그것이 하나의 큰 도전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데 가치 기준이 있는 것이다(10:31).

 

세 번째 문제는 교회 내에서 남녀 간의 구별 문제와 무절제한 은사로 화평과 조화가 깨어진 것이다. 사도는 남녀의 문제를 창조 때의 원래 자기 자리에서 볼 것을 요구하면서 해결한다. 은사는 모든 것을 원래 제공하신 분 즉 같은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데서, 소유 개념 때문에 야기된 분쟁을 해결한다.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주신 분이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드러내라고 주셨나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에 봉사하고 또 그 봉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를 위한 것이다(12장-14장).

 

이상과 같이 사도가 전달하는 복은 진실 된 것 일수 밖에 모든 것이 ‘부활’이라고 하는 주님에게 일어난 주님으로 인해 제공된 내용이기 때문에 그러하다(15:8). 단순히 성도가 이 복음 받고 자기가 알아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된 분이 제공한 복음이기에 부활이 오히려 성도의 운명을 이기는 것이다(15:14,55-58).

 

이미 영광중에 계신 분이 준 내용이기에 영광이 우리의 흙에 속한 몸도 영광스럽게 한다(15:4,9). 복음 자체가 이미 부활의 내용을 지녔기에 동시에 죽음의 내용도 지녔는데 그 죽음의 능력은 아담 안에 있는 자 누구든지 적용되고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 적용이 된다(15:22-24).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만하여 연보도 하고 돕기도 해야 한다. (16:1-2,14). 이런 사랑의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가 가지는 또 다른 면 즉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 됨, 성도가 성도 됨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가능하다(16:24).

 

Ⅲ 결론

 

예수님에게 극단적으로 위험한 곳이 이 세상이며 현재 우리는 이곳에 태어나는 여태 살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도에게 이곳의 위험성에 대해서 쉬지 않고 알려주시고 체험케 하신다.

 

그 단서는 사도 서신을 통해서 보내오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쓰여졌다. 서신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성도는 피의 축축함에 젖어 든다. 이로써 성도는 목숨을 걸고 사수할 것이 생겼다. 할 일이 생긴 것이고 사명이 생긴 것이요 존재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말씀에 담긴 피의 가치에 대해 경멸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 위험한 세상의 경망스러움에 대해서 주저 없이 저항감을 가져야 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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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고린도전서: 자아의 위치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전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간들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상황인 것을 가면 갈수록 우리가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고린도교회에서 18개월 동안 사도 바울이 서기 50~52년에 설교를 했다는데 고린도교회에서 설교를 했다기보다는 설교를 하면서 교회가 생겼지요. 교회가 있고 설교를 한 것이 아니고 설교를 하게 되면 저절로 거기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만약에 끝난다면 교회도 같이 끝나는 거죠.

 

그래서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에베소에 가면서 고린도교회에서 설교했던 그 내용을 편지로 보내면서 말씀이 없으면 교회가 아닌데 편지 때문에 계속해서 교회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은 항상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오느냐 하면 없는데서 생기는 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말씀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있다’와 말씀이 결합이 되면(말씀+있다), 있다가 뭐로 빠지느냐 하면, 없음으로 빠지면서 말씀은 작동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있고 말씀을 지키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말씀이 주도를 갖느냐, 내가 주도를 갖느냐’에서 말씀이 주도를 가지려면 내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내가 있다’는 말은 ‘내게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말씀이 없으면 인간은 뭐냐? 항상 자기에게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없다’가 돼요. 말씀이 갖고 있는 의미가 나를 덮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도와 비성도가 구분되는데 비성도는 뭐냐 하면 콩고물, 성도는 유한락스, 이렇게 보면 돼요. 비성도는 콩고물이라서 여기 떡이 있잖아요. 찹쌀떡이 있으면 콩고물을 얹진 다고요. 얹으면 나중에 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콩고물이 중력에 의해서 다 떨어집니다. 밑에 말씀을 들었는데 말씀이 우두둑 다 떨어져요. 마치 가을의 낙엽처럼 다 떨어져서 맨송맨송 다시 나로 돌아오지요. 다시 돌아옵니다.

 

유한락스의 특징은 말씀이 성도를 유한락스가 그 흔적을 나를 때처럼 여겨서 없애버려요. 아주 세요. 세정력이 세서 나를 없애버린다고. 내가 만약에 있는데 말씀이 유한락스처럼, ‘유한’이란 우리나라 락스 만드는 회사 이름이에요. 유한락스가 내게 오게 되면 심하면 살점이 터져나가겠지요. 그런데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성도입니다.

 

그런데 비성도는 툭툭 털어버리면 ‘내가 언제 말씀을 봤어?’ 다 털어버리면 다시 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지요. 이게 콩고물 같은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집에 가서 다시 콩고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지만 소용없어요. 돌아서면 다 떨어져나가니까. 그래서 말씀은 세척 기능이 있어서 계속 우리에게 상처를 줘요. 우리 몸에 상처를 자꾸 주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계속해서 우리 몸에 침투해버리면, 이렇게 말씀이 나한테 덮치면, ‘나의 의미란 조금씩 삭제 당한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게 ‘내가 없다’입니다. 이것처럼 편한 게 없어, 내가 없다는 것. 내가 없다, 그러면 뭐도 없느냐?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없는데 걱정의 주체가 있을 리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 어떤 뜻에서 걱정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내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이러한 등식(=), 방정식이 성립이 되지요. 걱정을 해야 살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러면 절대 내가 없어지면 안 되고 내가 있어야 돼요. 당신의 취미는 뭡니까? 걱정하기. 제가 어릴 때 학교에서 설문지 보면, 너의 취미는 뭐냐? 고독, 외로움. 그걸 취미로 여기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걱정하기가 취미인 사람 같으면 내가 없어지면 안 되겠지요. 내가 더 공고하게 돼야 되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하기를 말씀은 유한락스다. 자꾸 우리의 의미를 항상 삭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사야 40장 말씀처럼 우리는 풀이고 꽃에 불과한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8절)는 그것을 그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첫째 시간부터 제가 나열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고린도교회에 아홉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①내부파벌, ②근친상간, ③결혼과 독신에 대한 혼란(독신이 좋으냐, 결혼하는 게 좋으냐는 이런 문제), ④우상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못 먹느냐? 먹는다, 못 먹는다. ⑤예수님의 살과 피, 이것이 과연 떡이나 포도주를 대체할 수 있느냐? ⑥여성의 교회 내 위치 문제(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냐는 그 문제), ⑦사랑의 결여(사랑이 없는 행동들), ⑧죽은 자의 부활을 굳이 믿어야 되는가? ⑨왜 신자들인데 세상 세속 재판에 의존하느냐? 이 아홉 가지 문제가 교회에서 발생되었어요. 사도 바울이 가고 난 뒤에.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보는 사람들의 해석이 이렇게 됩니다. 내부파벌이 있으니까 나는 베드로파, 바울파 이렇게 하니까 파벌하지 말자. 우리 교회는 파벌 없는 교회되자. 근친상간, 이런 추잡한 일은 하지 말자. 그다음에 결혼과 독신에 대해서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못한 사람을 흉보지 말자. 우상제물은 혼자서는 먹고 공개적으론 먹지 말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떡이고 포도주 맞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로 그렇게 간주하고 먹자.

 

여성의 교회 내 위치 문제는, 여성이 좀 나대지 말고 어떤 위계질서를 갖추어서 여성이 권위 앞에서 대중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고, 남편에게나 교회 내 남성 중직자를 거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 된다. 사랑의 결여, 이건 노력하면 되고. 죽은 자의 부활은 필수적이니까 이건 믿자. 그다음에 세상 재판, 세상 재판에 아예 의존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고린도전서를 지금까지 해석해왔습니다.

 

자,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게 교회입니까? 성경에서 이걸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는데 그 문제점을 수정하면 그게 교회에요? 이게 문제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를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뭔가 이런 게 문제가 된다고 확인이 된다면 우린 안 하면 되잖아, 이런 식이에요. 이런 경우의 해석이 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 일곱 교회 있잖아요. 설교하면서 일곱 교회가 이런, 이런 문제점이 있으니까 그런 문제를 우리 교회에선 하지 말고, 장점만 살리면 우리는 바른 교회가 된다는 거예요. 올바른 교회.

 

이건 잘못입니다. 이런 생각은 성경 자체가 일종에 우리를 시험하는 테스트하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가장 문제되는 것이 뭐냐 하면 고린도교회란 없습니다. 성경에는 어느 교회는 없고 교회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그게 바로 교회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을 믿어야지 교회를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는 믿음이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는 결과물이지 믿음의 대상이 안 됩니다.

 

교회가 만약에 상주해 있다면 그 교회를 지킴이 교회제도, 조직 이것이 정당한 것이 돼버려요. 인간에게 무슨 정당한 게 있습니까? 인간에겐 정당한 게 없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할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이 그리스도의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없는데 언제 있느냐 하면 기능적으로 나타날 때 교회가 여기 있다, 교회가 저기 있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있다가 그리스도의 기능이 사라지면 교회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라는 인식,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데요. 다시 말해서 성도가 아닌 불신자, 콩고물이라 했지요. 불신자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조직체로서 여기 버젓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 교회가 어디 있는데? 교회가 있다는 것이 전부 다 뭐냐 하면 부동산이에요. 교회가 아니고 그냥 부동산에 해당되는 겁니다.

 

부동산은 모아놓은 돈의 집결의 모습, 돈을 모아서 토지를 사고 건물을 짓고 하는 그 부동산을 사람들은 교회라고 규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부동산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으니까 교회 온다, 그다음에 교회 간다가 불신자 입장에서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의 개념은 콩고물 개념이에요. 유한락스가 아니고. 불신자 개념에 신자 개념이 따라 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불신자 개념이란 게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불신자가 주장하는 개념은 방금 이야기했지만 불신자는 ‘내가 여기 있다’로부터 노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게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되어서 무의식 입장에서 의식은 항상 뭐냐? 거짓말해야 돼요. 그럼 무의식은 진짜냐? 무의식은 진짜가 뭔지 몰라요. 무의식은 진짜가 뭔지 모르는데 의식은 모르지만 일단은 내질러보니까 이게 전부 다 거짓말로 의식이 나오는 겁니다. 이 의식 차원이 뭐냐 하면 이게 개념 차원이고 언어의 의미 차원이에요.

 

‘인간은 남을 속이면서 산다’ 할 때 이 문장이 잘못됐어요. 인간이 남을 속이는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겁니다. 왜? 내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상황 따라서 내질러보는 겁니다. ‘이게 나 일거야, 이게 나 일거야.’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말씀이 선재하고 그 말씀 활동으로 나의 무의식이 발생되고, 이 무의식을 받아서 거짓말하는 것이 바로 의식이라는.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의식적이기 때문에 전부 다 거짓말하기 때문에. 물론 남을 속이지요. 그러나 본의 아니게 아는 게 있어야 뭐 안 속이는데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그냥 말해보니까 ‘그것 아니네. 미안하다. 다음에 잘할게.’ 이럴 수밖에 없어요. 자체적인 한계밖에 있을 수 없어요. 남을 속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본인의 무의식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의식을 감추는 식으로 의식적 활동을 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인간에서 나오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전부 다 거짓말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 만났다. 거짓말쟁이 두 명이 만난 거죠. 백 명이 만났다. 백 명이 만나서 전부 다 나누는 언어와 개념이 거짓말이죠. “저기 교회 있네.” “어떤 교회?” “고딕식 건물의 교회 있다.” 그건 교회 아니지요. 본인도 상호 소통되는 날아다니는 개념 하나를 뽑아서 저걸 교회라 하자, 해서 저희끼리 통하는 교회라 했을 뿐이지 교회의 진실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모릅니다. 교회 진실은 모릅니다.

 

여러분 모른다는 말을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세상 편한 게 이거에요. 왜냐? 아무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까. 짧은 인생 살면서 자꾸 진실을 찾지 마세요. 본인이 힘들어요, 본인이. 남들이 진실을 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한테 진실을 원하지 않아요. ‘내게 좀 진실을 이야기하지 마!’ 이것 노래 가사 같다. 노래 제목 같기도. ‘너는 왜 자꾸 나한테 진실을 이야기 해? 차라리 나한테 거짓말을 해. 그게 내가 듣기 좋아.’

 

자꾸 진실을 이야기하니까 사람이 모든 정신적으로 긴장이 되어 거짓에다가 거짓이 아닌 것처럼 초를 치게 되니까 이중 삼중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려하니까 본인만 힘든 거예요. 어차피 인생은 몰라요. 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말씀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어지간하거든 말씀으로 미뤄버리세요, 책임을. 내 인생 이렇게 조진 것이 다 말씀 때문에 생긴 거지 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미뤄버리세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되게 되면 그거는 말씀 활동입니다. 말씀 활동이 뭐냐? 말씀은 진리거든요. 말씀만이 진리기 때문에 거짓들, 말씀에서 진리가 나오는 현장에서 발생되는 현상이, 진리 때문에 파급되어 폭발하는 이 거짓들이 대표적으로 고린도교회다. 고린도교회니까 사도 바울이 진리에 입각해서 고린도교회를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아홉 가지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린도교회는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 아니죠. 이 진리 아님이 어디서 나왔는가? 진리에서 나왔지요. 그게 바로 고린도교회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어느 것 하나 진리 된 게 없어요. 아까 아홉 가지 있지요. 아홉 가지 누가 지킵니까? 아홉 가질 무슨 수로 지켜요? 한 가지도 못 지키는데. 아홉 가지 지키려면 일단 여덟 가지 지키고 난 뒤에 한 가지 안 되는 부분을 열심히 매진해야 되거든요.

 

만약에 수능에 여러 가지 과목이 있다. 영어, 수학 다 되는데 과학이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된다고 치고 과학을 열중하게 되면 그 과학에 열중하는 순간 수학이 남보다 뒤떨어져요. 이걸 하나 메우려면 저게 터지고, 저걸 메우면 다른 게 터지고. 아홉 가질 언제 무슨 수로 다 지킵니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다 지켜요? ‘우리는 이런 고린도교회를 지적하는 말씀에 순종해서 바른 교회가 됩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해석을…. 그것으로 교인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요.

 

고린도전서 해석을 처음부터 뒤엎어야, 처음부터 해석을 다시 해야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주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죄를 지적하려준 게 아니고 진리가 나오려면 네가 필히 죄인이 돼야 돼. 너의 죄를 고발하는 방식으로 진리가 너한테 출현되는 거야.’ 이게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복음입니다.

 

나는 바르게 사는, 바르게 사는 그게 없어요. 없는데 무슨 바르게 살아요. 우린 바르게 살면 안 돼요. 말씀만 바르게 그 현장에 능력 있게 나타나면 우리 역할은 끝났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거짓으로 드러났으면 그거는 제 역할, 제 배역을 제대로 한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아홉 가지 이야기가 어디서 발생되는가? 그 이야기합니다. 진리는 모른다. 근데 진리를 전하게 되게 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진리 작용 때문에 겉으로 거짓과 거짓이 같이 등장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인간 대 인간에 있어서 이것은 사람들이 진리는 모르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세계 속에 살기 때문에 익히 잘 알고 있어요. 익히 잘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선 진리의 값어치와 그 능력을 들춰내주는 겁니다.

 

그럼 인간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지금부터 그걸 여러분들이 첫째 시간 아직 정신 좀 있을 때 이 어려운 걸 하겠습니다. ‘인간은 인간 때문에 (힘들어) 못 살겠다.’ 세상에 예수님 때문에 못 살겠다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인간이 힘든 것은 인간 대 인간 때문에 못 살겠다는 거예요. 못 살면 지리산에 박혀 살든지. 그것도 싫어요. 힘들지만 타인이, 또 남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의식으로서는 ‘잘해보자. 항상 잘해보자’에요. 그런데 의식은 거짓말이잖아요. 무의식은 잘해보자는 게 아니고 다른 말로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두 인간이 등장한다면 이쪽에는 표면적으로는 의식이지만 밑에서는 무의식이에요.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과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이 만납니다.

 

무의식이란 말이 어려우면 쉽게 말씀 드리면 이 사람의 내부는 정신병자거든요. (정신병자)와 (정신병자)의 만남. 정신병자와 정신병자의 만남이 뭘 이루느냐 하면 사회를 이룹니다. 둘 다 종잡을 수 없거든요. 둘 다 정신 나갔어요. 정신 나갔는데 둘 다 아닌 척하고 있어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인간 대 인간의 문제에서 나온 거예요. 파벌부터 시작해서 모든 부활도 마찬가지고.

 

다 문제 생기니까 이것을 정신병자와 정신병자의 만남에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구성돼 있는가를 이것을 밝힌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 1901~1981)이란 사람입니다. 라캉이 했던 것을 이 시간에 짧게 해보겠습니다. ‘나는 타인을 원한다.’ 말벗이 되던 뭐가 됐든 난 타인을 원한다. 그다음은 ‘게 섰거라’ 되겠지요. 있는 사람보고 게 섰거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타인을 원한다(나 → 타인). 그래서 왜 원하는가? 내가 되고 싶은, 타인을 만나서 내가 얻고자하는 것, 정신적 생산물이에요(타인 → 생산물).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한다. 이것도 정신병자에요. 둘 다 종잡을 수 없어요. 나는 타인을 원한다. 얻고자하는 것을 얻었다(나 → 타인 → 생산물). 얻고자 하는 것을 다시 나한테 돌아와야 되는데 여기서 라캉이란 사람이 그걸 발견했죠. 내가 얻고자하는 것은 나와 합치되지 않는다. 이게 정신병자를 더 심하게 만드는. 이 생산된 것이 진실, 나(주체, 행위자), 타인(타자), 생산, 진실 이게 막혀있는 거예요(생산 ↛ 진실).

 

나     →    타인

↑                   ↓

진실     ↚     생산

 

막혀있으니까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 또 찾아요. 또 찾아서 “게 섰거라. 이야기 좀 들어봐. 내가 이런 일이 있거든.” “아 그런 뜻이었어? 나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게 정답이었구나. 나 왜 몰랐지. 참 고맙다, 친구야.” 그런데 이게 합치가 되지 않아요. 이게 끊어져있어요. 왜 끊어졌느냐? 이미 ‘나’가 남과 만나서 얻고자하는 것은 26분 전에 나에요. 내가 이미 궁금했던 나였다는. 궁금한 것을 해소하고 난 뒤에는 이미 궁금한 것을 아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내가 아는 것은 내 욕망, 그것 말고 새로운 것 가져와야지. 그거는 이미 26분의 구닥다리야. 나 새로움 없으면 못 살아. 내 무의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이제는 시시하다고 차버린다고요.

 

이런 경우는 티비 예능프로그램에 있어요. <나는 solo>라는 여자 여섯 명, 남자 여섯 명 모여서 선보는 프로그램인데 여자들 힘들게 낑낑거리며 캐리어 몰고 오니까 남자들이 나서서 받아주고 하지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정숙입니다.” “나는 광수입니다.” 그때 첫 인상이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틀, 사흘 쯤 지나면 이제는 식상했어요. 뭐 새로운 것 없나? 역시 정숙이가 낫더라. 결국 여섯 명씩 끝날 때쯤 해서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끝나요.

 

그다음에 솔로는 계속된다 해서 다시 26기해서 또 나와요. 나중에 자기가 끊임없이 방송에 나옴으로써 현재 있는 후보자 여섯 명 말고 어느 다른 자리에서 나를 고지하고 어떤 사람을 원했어요, 하면 또 다른 미친 사람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걸 예상해서 연예인처럼 자꾸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무의식은 아무리 내가 무의식을 실체를 알려고 해도 접근이 안 됩니다. 욕망이 폭발하기 때문에.

 

정신과의사들은 그 욕망이 왜 폭발하는지를 이유도 몰라요. 그냥 현상만 다룰 뿐이에요.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고 지 욕망에 미쳐서 그저 남들과 계속 ‘게 섰거라’하고 나쁜 의미에서 남을 이용하는 거죠. 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가 얻고자한 것을 얻어놓고는 그것도 식상해다해서 프랑스 말로 클리셰cliché라 하죠. ‘아이고, 아무것도 아니었네.’ 시시하다 이러면서도 시간은 26분 지나고 며칠 지나서 자꾸 시간을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방금 한 이것을 ‘주인담론’ 담론이란 인간 대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적 소통채널, 이것을 담론이라 하는 거예요, 여론. 주인이 스스로 주인 되어서 이런 관계로 해서 주인이니까 타인을 뭐로 봅니까? 종으로 삼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담론에서 내가 그 사람을 붙들고 얻고자하는 건 뭐냐? ‘너는 나의 노예가 되어다오, 제발.’

 

여기 있는 것을 S₁(주인기표) 의미가 담긴 대표. 주인기표의 타인을 S₂, 나의 종의 후보감, a는 내가 원했던 그 무엇. 그런데 그걸 알고부터 나는 다시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고 다시 내가 분열돼 있다는 걸 깨닫는 것, 나는 정상이라 아니란 걸 깨닫는 것($). 이 관계 S₁에서 S₂, a 그다음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진리로서 치료될 수 없는 것 $, 달러란 뜻이 아니고요. S가 주체가 중간에 쪼개졌다는 뜻이에요. 쪼개졌으니까 이게 무의식이잖아요. 의식에서 다시 나는 안 쪼개진 것처럼 나는 나의 종으로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 또 이렇게 되는 거예요.

 

S₁     →      S₂

↑                 ↓

 $        ↚            a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기독교단체에서 전도할 때 이 회로가 작동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아는 성경지식에 뿅 가는 그러한 어떤 타인이 있으면 좋겠다. 여자 같으면 이왕이면 멋진 남자, 남자는 멋진 여자한테 전도하고 싶다. 시시한 것들 니들은 천국 가지 마라. 마음에 드는, 나는 니가 천국 가면 좋겠다. 이러한 주인의식은 뭡니까? 당연히 조작된 거죠. 그러면 이것만 있느냐?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첫 번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문제가 뭐냐 하는 것을 제가 압축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 S₁ 자리에 S₂가 나와요. S₂가 나오면서 미지의 지식을 요구합니다. 미지의 지식을 요구하면서 얻고자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분열된 것을 처리,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하는데 S₁에서 끊어집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학생이 대학교 갔어요. 대학교 가서 뭘 원하느냐? 지식을 원합니다. 지식을 원하면 나는 분열된 나를 해소할 것이라는 생각을 기대를 가지고 박사학위를 딴다든지 나는 대학교 졸업하면 지식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나는 비로소 내가 스스로 지식전문가로 독립할 수 있는 S₁된다 했는데 이 회로에서 뭐가 끊어졌습니까? 내가 아는 분열된 인식으로선 내가 어디 가서 주인 노릇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을 발견하지요.

 

(학생)S₂       →      a(지식)

↑                        ↓

S₁            ↚          $

 

그래서 이걸 ‘대학담론’이라 합니다. 대학교 내에서 학생들이 교수를 바라볼 때 나한테 새로운 지식을 줄 수 있는 교수를 찾아다니면서 내가 언젠가 네 자리 뺏고야 말리라. 나도 너처럼 전문가가 되고 말겠다는 그 의식을 여기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다음에 재미나는 게 뭐냐 하면 분열된 자아부터 출발하는 게 있어요. 히스테리환자입니다.

 

히스테리는 자기가 조절하지 않는 어떤 현상, 신체적인데 이건 아무 병도 없는데 신체가 이상하게 조절이 안 되고 멈출 줄 몰라요. 그만큼 그 사람 몸에서 정신이 더 강렬해서, 여러분 히스테리라 하는 것은 그냥 뭡니까? 발작하는 거죠. 그냥 팍 터져버리는, 발작하는 것. 이 히스테리가 누굴 만나느냐 하면 S₁, 다시 말해서 든든한 믿음직한 사람을 찾아요.

 

히스테리 환자가 내 병을 고쳐서 내가 남 보기 우사스러운 신체적인 불구의 모습을 안정시켜서 ‘저 사람 정상이야. 이제는 정신병 아니야’ 해줄 수 있는 멀쩡한 사람을 찾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요.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 가도 내가 독자적으로 문제없는 깨끗한 주인 같은 행세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하는데 그것이 어디서 막히느냐? S₂로 가는데 이게 차단되게 돼 있어요.

 

아까와 비슷해요. S₁이 되고자 했는데 나 혼자는 고쳤는데 남들이 나를, ‘너 똑같아. 너 안 고쳐졌어’ 이런 거예요. 병원에 가서 환자를 고쳤는데 친구들이 보니까 “너 똑같아.” “아니 나 똑같은 게 아니야. 분명히 그걸 감정을 느껴. 나 벌써 고침 받았어. 나는 정상이야.” “너 정상 아니야.” “진짜 정상이야.” “너 의사한테 속았어.” 이게 히스테리. 내가 진정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전문 의사를 찾아가고 고치려했는데 이것이 막혀있다. 이게 ‘히스테리담론’이에요. 정신병자가 병원을 찾는 심리의 순환구조.

 

(히스테리 환자) $       →        S₁

            발작       ↑                       ↓

                          a       ↚          S₂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분석가담론’이란 게 있어요. 분석가담론은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찾아다니는 거예요. 정신과 의사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난 도사입니다. 정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분석가 전문가가 정신병 걸린 분열된 자아를 찾습니다. 찾아서 얻고자하는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당한 주체 인간으로 되고자 원하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하나의 주체, 인간이 되질 못합니다. 주체로 심어져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 나가도 남들이 나를 원하는 타자다운 타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것은 실패합니다.

 

a      →       $

↑                 ↓

S₂       ↚       S₁

 

결국 이 네 가지 담론의 공통적 주제가 뭡니까? 실패다. 실패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실패한 이유는, 본인이 이렇고 남들이 이렇다는 것을 딱딱 지적이 돼야 이게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여부가 되는데 처음부터 돌아가는 모든 자료가 전부 다 거짓말로 돌아가는 사회기 때문에 성공한다는 자체도 뭐가 돼요? 이게 실패의 다른 모습에 불과한 거예요.

 

자,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에 적용을 해봅시다. 첫 번째, 내부 파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요. 아볼로파, 게바파 나옵니다. 여기 1장 12절에 보면,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럴 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치료합니까? 치료를 안 해요. 치료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남한테 타인이잖아요. 분석가담론 돼요. 사도님이 나를 치료하기를 바라는 이 자체는 교회가 아니고 정신병동이에요. 사도 바울은 절대로 치료를 안 해줘요. 사도 바울의 특징은 뭐냐? 남을 구원을 안 합니다. 자기 자신이 기능인이 남을 구원할 수가 없어요.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자기가 남을 구원해버리면 자기가 메시아 돼버려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장 13절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요. 오늘 오후 설교했던 것 보충 설명할 게 하나 있어요. 오후 설교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원탁에 마주 앉을 경우의 수는 몇 가지냐, 수학적으로?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걸 대칭성이 깨졌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한 가지밖에 없다는 말은, 인간이 신을 믿을 때 골라잡아 믿어요. 골라먹는 재미있잖아요. 다수가 돼요.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은 신들이 백만이 넘는다는데 인도에는 더 많고요. 그렇게 많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란 것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자만이 나의 백성이 된다는. 여호와가 골라잡을 신 중의 하나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와 마주할 수 있는 사람, 조건이 뭐냐? 마주하면 다 죽어요. 출애굽기 33장에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절)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자기 얼굴을 사람들이 봐도 안 죽을 수 있는 정도까지 자기 얼굴을 낮춰버렸어요. 빌립보서 2장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8절). 자기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을 감춰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감췄다는 말은, 이것은 뭐가 돼요? 주님이 자기 영광, 하늘의 영광을 감췄다. 이게 고린도전서에 계속 나오고 다른 데 골로새서도 나와요.

 

감췄다는 말은 뭐냐? 주님은 뭐다? 이것 아는 사람 있어요? 주님은 뭐다, 뒤에? 기대하는 제가 나빠요. 주님은 거짓말쟁이에요. 모조리 거짓말이니까 주님도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진짜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네가 구라 떠는 것보다 내 구라가 더 셀 걸’ 이거에요. 어디서 내 거짓말 앞에서 네 구라를 떨어, 이런 거예요.

 

신천지가 이단이라 하잖아요. 그것 어설픈 이단이에요. 진짜 이단은 주님뿐입니다. 아무도 그 구라를 따라올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그래서 누가 주님 앞에 다 엎어지느냐 하면 진리를 원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진실을 찾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자빠지게 만들었어요. 엎어지게 만들었어요. 진리를 어디 쨉도 못 되면서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거짓말쟁이가 무슨 진리를 그게 왜 필요합니까?

 

그거는 주인담론, 대학담론 그렇지요. 그걸 획득해서 내가 지금보다 발전하고 완전하게 된다는 그러한 노림수, 도대체 우리의 욕망이 완전이 그게 성에 안 찹니다. 이미 완전하다 하는 그것도 식상해요. 다 지나간 거예요. 이 세상에 진리를 말하는 자는 오직 사탄, 악마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자기가 진리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사탄을 뭐라고 합니까? 거짓말쟁이지. 이 땅에서 주님마저 거짓말을 이야기했는데 사탄은 이 땅에서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거짓말이냐 하면 땅의 의미는 말씀이 아니고 말이에요. 인간의 말은 소통에 목적이 있습니다. 소통하기 위해서. 소통이 될 때 인간은 단합이 되고 결합이 돼요. 결속이 됩니다. 이게 사회에요. 인간사회는 인간의 공동체는 의를 생산하는 것으로 단합된다. 샌델(Michael J. Sandel, 1953~ )이 지은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지요.

 

인간이 왕을 뒤엎고 근대국가가 되면서 모든 헌법에서 모든 단체에서 정부에서 외치는 게 뭐냐? 이 사회는 justice 정의로워야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런 거짓말이? 이런 사탄적인 것. 지금 1분 초과됐습니다. 10분 쉽시다. 중요한 대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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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고린도전서: 타인의 위치

(강의:이근호 목사)

 

 

‘설명되어지는 것과 그렇게 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설명하는 것과 그래서 그렇게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많은 인간들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해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설명을 하게 되면 여기서 반드시 이게 정의가 나와요. 의가 나온다고요.

 

그러면 의가 나온다면 의가 나오도록 실제로 세상을 그렇게 운영해 나가는 것, 미지의 것도 계속 만들고 생산하고 운영해 나가는 것은 이 정의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죄의 궁극적 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의라는 게, 정의롭다는 게. 정의를 외친다면 이건 백 프로 죄가 드디어 자기의 마지막 정체를 들춰낼 때 정의를 외치게 돼 있어요, 의를 외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성경은 뭘 이야기하느냐?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사랑과 의가 이게 일치가 되지 그 외는 일치가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한테만 사랑과 의가 일치가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천국은 지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은 없어요. 뭐만 있느냐? 지옥이 있는데, 보통 뭐라 합니까? 싸우다가 ‘지옥에나 가라’ 그러잖아요.

 

지옥은 갈 것도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에 어딜 가는 게 아니에요. 지옥은 이미 개시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옥이 충분하게 지옥다워야 돼요. 왜냐하면 이 지옥의 특징은 선악체계의 구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 도덕의 구현이에요. 윤리, 도덕에서 의가 나오기 때문에. 자기 의가. “너 어느 정도 분량의 정의를 갖고 있어?” “나 이 정도의 정의를 갖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너보다 더 착해.” 착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한 사람들끼리 집합돼 있는 곳이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착한 게 아니고 착하다고 여겼던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나는 얼추 이 정도하면 착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한 곳에 모인 그곳이 바로 지옥이에요. 난리도 아니에요. 자기가 더 착하다고. 양보 없습니다. 죽을 둥 살 둥 내가 더 착하다고 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가는 곳이 아니죠. 악마의 자식 바리새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인위적 공동체는 의를 생산하고 그 의로 소통하는 곳’이 바로 인위적 공동체에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어떤 하자가 있으면 나가고 더 건실한 사람을 뽑는 거예요. 이게 의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령의 공동체는 반대입니다. 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생산하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나는 너보다 낫다는 말을 못하는 것,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은 아름답지 못하게 보이는 것이 아름답다고 돼 있고, 고린도전서 1장 끝에 27절에 보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여러분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면 수능 몇 점 나와야 돼요? 도대체 아이큐가 얼마 돼야 돼요? 얼마나 고아원 방문, 봉사, 수해 날 때 봉사, 바다에 기름띠 있을 때 멀어도 찾아가서 천을 던지면서 기름을 닦아내는 그런 봉사, 그것도 성에 안 차서 우물 파러 아프리카까지 가고. ‘울지 마, 톤즈’ 해서 남수단에 가서 의사의 모든 소득을 버린 천주교 신부 있잖아요(이태석 신부, 1962~2010). 그런 사람처럼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돼요, 착한 일을.

 

착한 일의 문제가 계량화된다는 거예요. 수치로 나온다는. 계량이라는 것은 측정이 되는, 물량으로 계량이 된다는 게 문제에요. 애 네 명 키우는 것과 한 명 키우는 것, 어느 게 착합니까? 네 배에요, 네 배. 애 세 명보다 네 명이 더 착하지요. 왜? 더 힘드니까. 건강한 남편을 집에서 빨래해주고 잘 섬겼다. 이게 착합니까, 아니면 말기 암 환자 남편을 밑반찬 천 가지해서 갖다 바친 그 주부가 착해요?

 

인간에게 대차대조표, 선과 악 장부를 만들어놓고 선한 것을 여기다 기재하고 악한 것을 기재해서 단기순이익 계산하는 것, 이런 것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시스템, 프레임을 고집하느냐 하면 선악체계는 때려죽여도 포기 못한다는 거예요. 선악체계 안에 잠식돼 있는 자아, 선악체제의 노예가 돼 있는 자아. ‘선악체제대로 나는 그 안에 살리라 그 안에 영원히 살고 싶어’ 당연히 그건 지옥 가야 되지요.

 

그래서 이 정의를 이게 정의냐, 불의냐 따지는 것은 인간세계지만 주님께선 뭐냐 하면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냐로 따지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전서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그 사랑을 내가 획득해야 되겠다. 이게 대학담론이죠. 주인이 갖고 있는 사랑을 이제는 나는 주님의 학생으로서 내 것 만들어야 되겠다고 대학담론이 가동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 이름의 또 자기 의가 축적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자기 자신을 유한락스, 진짜 유한락스 확 뿌리고 싶다. 모든 경황들이 일어난 상황들이 너 쫌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는 그런 것을 알려주는 시그널들이에요.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착하다, 악하다는 그 개념 자체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사랑이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나는 선하냐, 악하냐 따질 때 사랑이 그것을 덮쳐버립니다. 덮치면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선도 악도 아니고 죄가 돼요. 죄의 값은 뭐라 돼 있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죠. 주님께서 우릴 친히 죽여주시는 고마움이 있을 때 우리를 죽여주시는 죽임에 뭐가 옆에 뒤에 붙어 있느냐 하면, 여기에 플러스 부활이 붙어 있어요.

 

주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 것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자리, 오늘 첫째 제목을 저는 ‘자아의 위치’라 했는데 이번에 두 번째 제목을 ‘타자의 위치’라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에요. 그런데 여기 아들이 자기 사랑의 관계에 독점적인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하면 아들에 비해서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줘요. 주게 되면 넓은 치마폭이 나를 감싸게 되면 그 사랑의 관계 안에 우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는 것은 뭐냐 하면 죄인으로서 반드시 들어와야 돼요. 죄인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어요. 죄인인 것은 우리의 선악체제로선 선악체제 자체가 죄기 때문에 안 되고요.

 

죄인인 것은 뭐냐 하면 말씀이 와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우리를 어디로 끌어당기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이해됩니까? 이해하지 마세요. 말씀은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아까 뭡니까? 설명되어지는 것과 만들어진 것은 별개라 했지요.

 

주께서 친히 만드는데 왜 우리가 설명을 해야 되죠? 설명해서 뭘 얻겠다고 설명을 하지요? 자기변명을 왜 합니까? 그냥 만들어진 자체가 이게 고린도전서 1장 봅시다. 그게 천하게 만들어지고 미련하게 만들어졌데요. 그러나 여기 MBC, KBS 기자 동원해서 물어봅시다.

 

여기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6~28절)

 

이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설명되어지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이것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미련하십니까? 당신 미련하지요?” 하면 그 기자가 묻는 질문에, “예. 나는 미련합니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똑똑합니다. 미련하지 않아요. 미련하다는 것은 내가 미련하다고 설명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미련하다는 말씀의 규정에 맞춰서 찍어낸 거예요. 미련한데 아이큐가 150이라, 미련한데 서울대학교 수석졸업이라. 그래도 이건 뭐냐?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사울대학 졸업해도 그건 뭡니까? 미련한 거예요.

 

세상이 약한 것들과 강한 것들, 자꾸 계량적으로 이걸 설명을 하려하니까 리스트가 짜여지는 거예요. 어느 선까지 소득 10% 안 되는 사람은 십만 원 더 추가적인 것 없어요. 지원금 이십오만 원으로 끝났어. 그걸 의료보험료로 하거든요. 모든 게 계량이 된다고요. 계량해서 법적체제에서 어긋난 걸 불의라 하고, 법 안에 들어오면 그걸 뭐라 하는 줄 알아요? 정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계량해봅시다. 어떻게 돼요? 주님을 계량하면 뭐 나옵니까? 나오지요. 죽어 마땅한 존재지요. 주님처럼 미련하고 천하고 약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미련하고 천하게 만들었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뭐라 합니까? 사람들이 처형할 때 예수님을 뭐라 합니까? 죄인이었지요. 죄인 되고 미련하고 천하고. 그런데 그것이 주님 안에서는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사랑이란 독특한 요소들 안에 이게 들어가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을 부러워할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구원은 나중 문제고, 천국은 나중 문제고 일단 예수님처럼 미련하고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이걸 부러워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일찍 사십도 못 넘기고 사형당하고 이런 걸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서른세 살에 죽었던 많은 사람들 있어요. 가수 김광석도 그렇고, 그리고 <하얀 나비> 부른 김정호도 서른세 살에 죽고 하잖아요. 죽으니까 사람들이 영웅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어떤 인간의 견해도 주님의 사랑에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성령의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의 깊숙한 곳,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이 아는 감추어진 것, 이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익히 아는 단어가 나옵니다. ‘비밀’이에요. 이게 비밀이라는 거예요.

 

2장 4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돼 있지요. 사람, 존재지요. 능력, 활동력이죠. 존재가 아니고 활동성, 기능이죠.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고린도전서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이 뭘 이야기하려고 전체적인 개략을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야. 어떤 프레임으로, 어떤 체제로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사람은 일체 믿지 말라. 너 자신도 믿지 말고 남도 믿지 말라. 다만 믿을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능력의 활동성을 믿어라, 이런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이. 그리고 활동성을 내 것으로 여기려고 하지 마라.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냥 활동에 사로잡힌 자만 그때그때 출몰하고 우연적으로 등장할 뿐이에요. 출몰되는 거예요. 필연이 아니고 우연적이에요.

 

왜 내가 내 잘남을 별로 원하지 않지? 그건 주님의 성령의 역사지요. 남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왜 관심이 없지? 그게 성령의 역사이에요.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거예요. 감추어져 있다는 건 2장 7절에 보면 나와요. 여기 비밀 나오네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 있습니까? 비밀이죠.

 

‘그것 어디 있는데?’ ‘비밀이야.’ 그냥 비밀이에요. 비밀은 캐낼 수 있는 게 아니고 비밀이 알아서 본인이 노출시킬 때 능력으로 나올 때만 캐치가 되는 포착이 되는 게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전서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 없어요. 천국도 없어요. 지옥도 없습니다.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없고요.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예수님도 지난 과거 인물로 없어요. 그냥 없어요.

 

있는 것은 뭐냐? 현재 내가 있다는 그 사실만 있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것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자꾸 교회 가면 천당 간다, 그런 소리 말고. 항상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고 나는 뭔가를 알아서 내가 안 것으로 하여금 내가 더 정의롭고, 내가 남들 보기에 우수한 존재로 전환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게 전부라니까요.

 

그러면 사람들은 교회 왜 다닙니까? 여가활동이죠. 배 좀 부르다 이 말이죠. 먹을 것, 입을 건 챙겼으니까 남는 시간, 교양 있잖아요. 마음적인 교양을 위해서 교회 다니고, 또는 호기심, 성경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어서 전 세계 십일 억 인구가 듣고 있는지, 성경에 뭐가 있는지 성경 모르고 내가 남과 대화가 안 되지. 성경을 뭔가 아는 체, 홍해가 어떠니, 출애굽이 어떠니, 십자가를 좀 알아야, 고린도전서를 좀 알아야 남들 이야기에 얼추 끼지 않겠나.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건데 그런 것들로 해서 교회 다니면 교회가 붙들어요. 돈 빼먹을 것, 무노동 할 것, 이런 것 빼먹고. ‘충성하십니다. 하늘나라 상급 받습니다.’ 빼먹고 일단 진급 막 시켜서 집사, 장로 막 시키면 이거는 교회 자체가 자기 자존심이 되어 빼도 박도 못해요. 돈 다 날리게 돼 있습니다. 지 돈은 부동산에 묶여있겠지요. 주식 샀으니까. 나중에 장로 되어 목사도 내 뜻대로 바꾸고 하는 그 재미있잖아요. 교주가 되는 재미.

 

아까 무슨 담론? 그게 주인담론. 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타인을 노예로 삼고, 너는 노예야. 나는 주인이고.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유명한 대사. 적어도 사람이 인생을 살았으면 그 정도 주인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 평생 사는 보람이 있지. 이런 욕망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런 욕망이 다 있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 동네입니다. 그런 활동하는 동네에요.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감추었다, 비밀이다, 안 알려줘, 네가 뭔데 알려줘.’ 그냥 나타난 것은 인간으로선 설명 불가, 설명되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만 말씀은 말씀으로 되지 인간으론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제가 <킹 오브 킹스>란 영화를 보고 평을 달았습니다. 근데 그 영화에 보면 익히 아는 예수님 스토리가 쭉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했다, 이런 일을 했다는. 그러면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 끝내야 됩니다. 이게 두껍지 않아야 돼요. 얇아야 돼요. 왜? 예수님 이야기로 끝나니까, 끝이니까. 끝나고 부활했다, 끝이어야 되니까. 근데 왜 신약성경이 두껍냐 말이냐? 27권이 왜 있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비밀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활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인간은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미카엘이 모세 시체를 놓고 논쟁한다는 그 대목을 몇 주 전에 설교에서 이야기했지요.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왜 원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세계에서 위대한 영웅은 오래오래 기념하면서 그 후속조치로서 모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단체가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아이템이 되기 때문에, 상징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이러한 성경이야기,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문제성 있는 이야기, 구원에 실패하고 하나님 뜻에 어긋나던 그 이야기, 그 기능들 그게 왜 그렇게 있느냐 하면 바로 그러한 자질, 그렇게 잘못되게 생각한 자질을 이미 아담의 자손들은 공통적으로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한테 들락날락하면서 어떤 때는 창세기로 지적하고 어떤 때는 사사기로 지적하고 고린도전서로 지적하면서 들락날락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성경말씀에서 확장된 하나의 말씀의 기능역할 하라고 우리를 마네킹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의 일의 마네킹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여러분들이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나한테 일절 책임이 없으니까.

 

자, 2장 4절 봅시다. 아까부터 2장 4절 하는데 2장 4절이 어떤 내용이냐 하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이렇게 돼 있어요.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세상을 속이는 말인지. 성경은 하여튼 악마에 속한 세상을 철저하게 속이는 말이에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지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이게 지혜가 아니다. 아니면 뭡니까? “다만 성령의 나타남”이라. 그러면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할 때 누구와 함께 있다는 말입니까? 성령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성령이 안 보이니까 인간세계에선 없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건 없는 겁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건 없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걸 있다고 하니까 이미 사도 바울은 세상을 뭐하고 있습니까? 철저하게 지금 속이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관점으로 봐서. 다시 이야기해요. 세상은 세상의 소통은 의미 소통이에요. 의미 소통은 서로 납득이 되는 그러한 컨셉, 개념들의 교환입니다. 이 개념들은 뭐냐? 있음에서 출발해요. 여기 사람이 있다. 있음에서 개념이 나오고, 그 개념들 소통하면서 있음을 더 공고히 하는데 이 세상은 그렇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근데 거기다가 사도 바울이 불쑥 뭐냐? 있지도 않은, 없는 성령, 있지도 않은 예수님 이 이야기를 섞어 이야기해버리면 이거는 뭡니까? 사람과 소통하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나는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해서, 쉽게 말해서 진리로 꽤서 너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 만드는 그런 의도는 나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거는 보이지 않는 나와 함께 계신 분이 할 일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계신 성령님이 하신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한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진리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성령이 사도 바울을 지금 갖고 노시는 거예요.

 

어떻게 노시는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말을 한 것처럼 이제는 네 차례야. 너도 세상 사람들에게 너는 말하는 족족 거짓말이란 말을 실컷 들어보라는. 네 말은 도무지 도대체 인간에 동원되는 모든 논리로서는 분석이 불가한 거예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설명이 안 되도 고린도전서 3장에서 봅시다. 21~23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돼 있잖아요.

 

여러분 지금까지 강의 들었으면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아시겠지요. 뭐가 깨졌습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가 깨져버린 거예요. ‘나, 너한테 속했는데’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진짜.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이 있는 것은, 네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봉사하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네 것이라고 해도 괜찮아. 근데 좋아하지 마. 너도 네 것은 누구냐? 그리스도의 거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고. 이런 연차로 연결돼 있는 겁니다.

 

이 말은 왜 여기서 하느냐? 인간들의 모든 불행은 내 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고, 네 것은 어디까지나 네 것이라는 그 구분이 인간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 걸 남한테 피해입지 않기 위해서 철저하게 지키는 것. 지키다, 지키다 안 되면 법에 호소하는 것. 법에 호소 안 되면 그때부터는 영화가 등장하지요. 나라 법이, 경찰이 못하는 것 허용된 킬러들이 그냥 나쁜 짓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죽이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지요. ‘그렇지. 역시 정의는 살아 있어.’

 

여러분,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하지 마세요.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해야지요. 마지막은 결국 나에요.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잘난 내가. 나부터 더 올라가자. 그럼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누가 살아 있다고 했어, 누가?” 하면 “저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살아 있잖아, 내가.”

 

오늘 낮에 한 후딱 지나간 말을 해볼게요. ‘세상은 주님의 자아다.’ 주일 낮 설교에. 0.5초 내에 지나갔어요. 세상은 주님의 자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의해서. 세상 모든 것은 그게 사탄이 됐든, 지옥이 됐든, 어떤 인간이든 피조물도 해와 달과 별들도 다 주님의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주님의 것이란 말은, 주님 잘났다고 비아냥거리라고 한 말이 아니고 나는 나의 위치, 또는 타인의 위치가 이미 확정돼 있다는 사실, 소속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사실이에요.

 

소속이 정해져있다면 주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할 때 가지가 가지 걱정하면 안 돼요. 포도나무가 걱정해야지 가지가 걱정하면 안 됩니다. 자기 걱정했던 사람 있어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제가 그냥 이야기해드릴게요. 아는 이야기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줬습니다.

 

이 말은 뭐냐? ‘베드로야, 네 것은 없어. 너는 내 거야.’ 이런 뜻으로 발 씻겨주니까 베드로가 알지 못하고, ‘주님 감히 스승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십니까? 스승은 스승이고 나는 납니다’ 그렇게 구획, 칸막이를 졌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 발 못 씻기도록 막는 거야? 내가 네 발 안 씻기면 너와 내가 상관없는 거야.” 세게 나왔지요. “발 씻기지 말까? 안 씻기고 그냥 가? 그럼 너는 끝났어” 이렇게 하니까 갑자기 또 베드로가 그렇다면 전신을 다 마사지 해달라는, 전신을 다 씻겨 달라 했어요.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결정은 네가 할 권리가 없고 내가 하는 거야. 어떻게? 발만 씻어도 전체야.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란 부분이 없는 거야. 사랑은 부분이 성립되지 않고 항상 작은 조각도 전체가 된다는 그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와 이야기한 그러한 내용, 그걸 영적으로 아주 더 확장을 시킨 책이 바로 사도 바울의 편지에요. <킹 오브 킹스> 영화 보고 나 예수님 다 알았다고 한다면 참 쉬워요. 풍랑이 일 때 그 영화 보면 파도치는 게 나와요. 파도칠 때 양탄자를 깔아놨는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가 팽팽하니 파도가 안 쳐요. 그 영화 보고 나는 그랬으면 싶어요.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넘치니까 풍랑을 보고 이러면 내가 못 걷는데, 하는 순간 빠져버렸거든요.

 

그처럼 그 영화에 나오는 일화, 에피소드들로 예수님을 묘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거짓된 예수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상세한 것은 그런 흔적이 드러난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거는 고린도전서나 사도 바울의 편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단은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나오는 그 내용들, 기본은 아셔야 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 구조를 이젠 우리의 구조와 일치시키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구조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확장된 것이 사도 바울의 구조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랑관계에 주저 없이 끼어들었다는 것. 끼어들고 난 뒤에 모든 것을 뭐로 설명한다? 사랑으로 설명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뭐냐? 고린도전서 8장 3절 보겠습니다. 야아 중요한 것 진짜, 첫째 시간하면서 제일 중요한 게 튀어나옵니다. 8장 3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그렇게 돼 있지요. 우리 인간 쪽에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는 자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여한다. 아까 제가 설명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초청하게 되면 그 사람은 뭘 안다? 사랑을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을 안다는 이 내용, 고린도전서를 한방으로 딱 정리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없습니까, 물으시면 없을 리가 있어요.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 나옵니다. 18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처음입니다. 자주 요구하신 않겠어요. 요한일서 5장 18절, 다 같이 합시다. 중요하니까. 시작.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스톱, 스톱!

 

죄가 뭐야? 죄라는 우리를 죄인으로 기능적으로 사용할 때 죄만 나와요. 죄만 나오기 때문에 죄 지을 수가 없어요. 이게 무슨 망나니 같은. 죄만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나오도록 조치하신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데 죄는 아니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아멘) 아멘 처음 나왔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게 와야 사랑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죄 지을 때 죄인이라 규정을 합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악체계, 윤리, 도덕체계에서는 죄 지을 때만 악한 사람이 돼요. 그리고 판사, 검사는 죄를 지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죄인을 응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죄 없는 자가 돼야 우리는 죄 있는 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의 정의로움입니다. 선악체제에 준한 정의로움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만이 이 죄를 완성하셨어요. 악마는 죄를 끌고 왔습니다. 그 죄의 규정은 선악체제,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와요. 누가 고소하는 자에요. 자꾸 고소를 해요. 우리 마음속에서 우릴 고발한다고요. 악마의 생각은 이겁니다. 죄가 있으면 이건 고발돼야 되고, 고발되면 죄인이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의 사람을 죄를 드러냄으로써 이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미 처리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짓게 만들어버려요.

 

죄를 짓는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가 나타나게 하시는 거예요. 왜? 이런저런 것들을 내가 처리했다는 거예요. 자기 아들 장가보내는데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 재벌 집 마나님 시어머니가 백화점을 데려갑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보통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꾸 백화점 옷의 가격표를 보는 거예요. “가격표 보지 말고 너 원하는 것 다 사. 계산은 내가 해.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네 돈으로 할 것 같으면 내가 널 데려오지 않아.”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죄가 있어요. 인간은 죄를 몰라요. 인간은 멍청하기 때문에 죄가 뭔지 몰라요. 인간은 아는 게 없어요, 하여튼 아는 게. 왜? 모든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지혜에서, 십자가의 지혜에서 알기 때문에 인간이 안다는 것은 자기 잘난 맛에 지식 쪼가리 주워 모아서 아는 것이지 인간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공부해도 다 몰라요. 백 년 동안 공부해도 몰라요. 안 까먹으면 다행이다. 아는 것도 다 까먹어요. 도대체 평소에 안다는 것은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치매 환자가 되어 있는 것도 누구세요, 이렇게 되어 일이 되질 않아요. 엉망이 돼요,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드러나게 하고, 그 죄 드러나는 것과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전부 다 사랑에 포함된 사랑의 내용이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하나님에 속한 자는, 이게 오늘 제목이에요. 위치. 첫째 시간, 나의 위치. 두 번째는 타인의 위치. 우리는 주님 앞에 타인이었어요. 타인의 위치가 비로소 아버지 앞에 나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과 합체가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걸 하게 되면, 나는 누구뿐이냐? 나는 예수님만 나에요. 누가 인간이냐? 예수님만인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을 뭐라 합니까?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으로 나타난 아들이다. 여자의 후손이다. 인자. 인자란 말을 쓴 이유가, 인자 안에 모든 구약 모형, 신약, 구약이 인자를 겨냥해서 인자가 완성할 책임자가 인자에요.

 

시편 8편에,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4절) 그 인자란 게 다윗 속에 있는 예수님이 미리 이야기한 거예요. 에스겔보고 인자라 한 것은 바로 에스겔 속에 있는 예수님 자신 자기가 자기 기능을 한 거예요. 에스겔, 다윗은 그냥 그 시대에 필요해서 다루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거죠.

 

그래서 이렇게 되게 되면 여러분들이 정리해야 될 것은 이런 걸 정리해야 돼요. ‘내가 말씀을 보니 나는 죄인이었다. 이 죄인을 내가 처리할 수 없어서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서 나는 이 죄에서 벗어났다.’ 이것 사탄의 구라입니다. 이거는 성립되지 않아요. 일단 이 나가 다른 나에요. 이건 마귀가 설정한 나고 진짜 나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보니(말씀이 뭔지도 모르지요) 죄인이다. 지가 죄를 지어봤어. 뭐 어떤 죄를 지었는데 죄인이에요? 기생 라합이 거짓말했잖아요. 그게 죄입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바쳤지요. 죄입니까? 심지어 제자들은 뭐 했습니까? 부모자식을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예수님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호로 자식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성경에 제자들이 하는 행동이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정의, 법이죠. 법의 테두리에서 볼 때는 전부 다 인간답지 못한 너무나 무책임한 행위들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게. 도대체 성경을 보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인간 같지도 않은 행동들이 나오는데 예수님 자신도 마찬가지고,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제자들이 국가 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지가 어디 인공지능을 개발했습니까? 로봇을 개발했어요? 전기차를 개발했습니까? 무슨 도움이 됐습니까, 제자들이 어떤 도움을 줬어요? 미국에 한 오천 억 투자했어요? 그거는 엘지나 삼성에서 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보고 죄를 깨달았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사 성경 속에 박혀있는 비밀, 감추어진 죄를 나를 통해서 들춰냈는데 그 일은 뭐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그 결과에 대해서 현상적으로 증명하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돼야지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제가 오늘 몇 번이나 이 본문을 들추는데 들출 때마다 내가 참 감격스러워요. 사도행전 19장, 벌써 눈치 빠른 사람은 그 본문이구나, 하는데 19장 15절, 도대체 사도 바울이 이 우주에서 어떤 식의 평가를 받는지 나와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여기 예수님도 알고, 이거는 우리가 예수님이 대단한 존재기 때문에 마귀가 예수님 당연히 알지,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 누가 끼어들어있습니까? 바울도 내가 알고. 마귀가 하는 말이에요. 바울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그 대목에 보면, 이제 지금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면 안 되겠지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지요.

 

고린도전서 7장 40절,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무슨 말이냐 하면 나도 또한 영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도 영을 받았다는 말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받은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없단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죠. 우리 영과 영 받은 사람끼리 대화하자, 그 이야기잖아요. 성령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뭔가 받은 사람끼리 대화하자.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귀신이 누굴 안다 했어요? 예수도 알고, 또 누구도 알고?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지요. 사도 바울도 성령 받았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도 성령 받았다는 말은, 내 말보다도 누가 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 그 있다는 것을 고린도 지역에서 나처럼 성령 받은 사람을 한 번 뽑아보자. 어떻게? 내가 편지 보낼게.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러다 안 될 때 편지 하나 더 보내요. 그 편지가 이번에 겨울수련회에 할 두 번째 편지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첫째 시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뭐냐? 이건 완전히 똥배짱이에요. 완전히 배짱장사에요. ‘사고 싶으면 사고, 안 사려면 저리 가. 복음 못 팔아서 환장한 사람 아니야. 이건 성령이 줘야 받는 거야’라는 이러한 대담성.

 

뭐 사도 바울보고 율법에 위반했느니, 어떤 사람은 너무 율법 말고 자유롭게 사니, 하는데 내가 율법 있는 사람한테는 율법대로, 율법 없는 사람한테는 없는 대로 한다. 왜? 내 자유다. 그게 바로 주님의 자유고 그게 성령 안에서 연결된 나의 자유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살 거죠?’ 이게 강요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을 그렇게 ‘여러분, 그렇게 살 거죠’로 묻는 것은 제가 어떤 뜻에서 묻느냐 하면, ‘여러분, 나만 붙들고 살 거죠’와 같은 뜻에서 묻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 없이 지독하게 치열하게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식으로 교회를 가든, 뭘 받든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비밀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내가 더 이상 내 자체가 유한락스, 제목을 유한락스로 하고 싶다. 자꾸 말씀이 순간순간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탈색시키는 거예요. 색깔을 없애는 나라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것을 계속해서 없애버리는 그 작용이 강의 마치고 주무실 때도 여러분을 탈색시키는 유한락스의 기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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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고린도전서: 평가자의 확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 19장을 언급하면서 악령이 등장했지요. 19장 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거는 평가 주체에서 평가 주체자가 확장되었다. ‘하나님+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걸로 해서 말씀이 주어졌는데 여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악령, 사탄이죠. 악귀가 평가기준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은 성령 받았다, 라고 평가 주체자에 악령이 합세하고 말았어요.

 

악령이 합세했다는 말은 평가기준에서 빠져야 할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자아와 그리고 타인/타자, 남이죠. 자아와 타자와 내 말씀에 대한 행위에 대한 평가기준에서 이 둘은 여기서 빠지는 겁니다. 평가 주체가 확장되면서 악령이 여기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시작될 때에 주님께서 인간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인간을 심판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악귀, 악마를 노리고 영원한 구렁텅이에 보내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죄가 유발된 그 최초의 원인자로서 아담은 여자한테 미뤘고, 여자는 누굴 겨냥하느냐 하면, 저 뱀이라고 최초의 유발자를 지목을 했어요. 그러면 아담과 여자, 그러니까 하와와 남자는 중도에 최초의 죄의 책임자로서는 빠져버리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최종적으로 토너먼트 최종 결승전이 돼버린 겁니다.

 

그중에 있는 남자와 여자라 하는 것은 둘의 튼 싸움에 말려드는, 그러니까 고급스런 용어로 쓰면 시다바리, 거기에 일 도와주는 예수님과 마귀 각자 최종적으로 한 판 붙는데 거기에 동원된 일꾼, 그런 역할밖에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3절에 이번 낮 설교에서 홍해 안에서 기다리는 자가 있었어요. 인간에게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일이 벌어져야 나타나는 분,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는 용사다. 격전지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는 전장에서 대장이죠. 전장의 대장이 홍해를 전쟁터로 삼아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고 애굽의 군대가 거기서 몰살합니다.

 

그러면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애굽 사람들의 특징은 내일이 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과거가 없습니다. 본격적인 주님의 마중 나온 미래의 시작이 되는 것. 이스라엘에 과거가 없다는 말은 이제부터 인수인계를 하는 거예요. 포로 교환할 때 인수인계.

 

마귀한테 잡혔던 이스라엘을 주님이 가서 이제부터 내가 용사니까 여호와가 용사니까 너희들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말 들을 필요 없이 내 말 듣고 내가 하는 일을 들춰내고 그걸 실시하는 그러한 동원된 일꾼으로써 이스라엘을 자기의 전리품으로 가져오는 것,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들에서 선물을 주는 것 이러한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하나의 전쟁터로 전환된 겁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잡아당긴 거예요.

 

그 한 가지 예가 욥기 1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욥을 미끼로 사용해서 하나님 옆에 있는 최고의 천사의 자리에 앉았던 그 사탄에 대해서 내가 왜 너를 영원한 지옥 구덩이에 가둬야 될 그 정당성을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욥이라는 한 남자를 미끼로 사용해서 빌미로 사용해서 시비를 거는 거예요. “저 욥 봤나? 믿음 너무 좋아.”

 

그렇게 할 때 사탄이 가만있으면 되는데 괜히 끼어들어요, 그 판에. 미끼에 걸려든 겁니다. “욥이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고 자식들 잘 되니까 하나님 믿는 거지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제가 이 땅에 대해서는 환합니다. 인간들이 어떤 종류의 존재인지를 나는 이미 바싹하니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들에 어떤 기대를 거시면 안 됩니다. 인간은 내가 알아요.” 왜? 모든 인간이 자기 손아귀에 있으니까요. “오케이. 해봐라.” “내기합시다.” 내기했지요.

 

그 내기의 담보가 어마어마합니다. 니가 지면 지옥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악마의 잔당들, 악마를 추종하는 자, 일찍 감치 누가 옆에서 빼내주지 않고 가던 길로 그냥 가는 사람, 살던 대로 그냥 사는 사람, 이미 선악체계 안에서 그것으로 자기의 인생관으로 확정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마귀가 가는 쪽으로 줄줄이 따라가면 그게 영원한 지옥 불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돼요. ‘인간은 들러리다.’ 이걸 어느 철학, 어느 과학에서 말하질 않아요. 인간은 들러리다. 이거는 성경에 여호와가 용사라는 그러한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한 거고,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놀랍게도 신학마저 인간은 들러리가 아니고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관찰자다.

 

나에 대한 행동 심사를 누가 한다? 내가 한다. 왜? 난 이미 자아가 있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이미 보장돼 있고 확고하기 때문에 이 선과 악의 지식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자아상은 내가 알아서 개척하고 그리고 그걸 증진시키고 강화시킨다. ‘그냥 밀어붙여!’ 어디로? 과학과 철학과 신학으로.

 

관찰해서 얻은 것에 가치론을 집어넣어요. 이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으로 구분해서 선한 것만 끌어 모으면 그것이 인간의 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걸 지금 어린이집부터 시작해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사회의 모든 교육에서 이것 가르칩니다. 티비 틀면 나오는 게 이거에요. 인간은 나는 나의 관찰자다. 내가 심사한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심사한다, 건들지 마.’ 이 논리거든요. 모든 심리학도 마찬가지고요.

 

사도행전 19장 15절에서 악마가 관찰자의 관점에서 확장해서 심사위원 추가되니까 여기서 누가 심사위원에서 빠지느냐 하면 나와 타자가 심사위원에서 빠지는 겁니다. 과연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 시험 한 번 쳐볼까요?

 

고린도전서 6장 9절, 제가 하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여기 리스트가 쭉 나와 있지요. 이 리스트에서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이라고 그 심사를 누가 합니까? 이 성경을 우리가 보게 되면 심사를 누가 하죠? 내가 하죠. 아니면 남들이 여기에 대해서 나보고 이런 짓했다고 평하더라. 걸려든 겁니다, 걸려든 겁니다. 성경을 백독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기가 심사위원에서 빠져야 되는데 본인이 자기 인생을 심사하고 있어요.

 

그래놓고 나온 결과가 뭐냐? ‘나 천국 가기 굴렀어. 나 끝났어. 하늘나라 유업은 이젠 끝난 거야. 안 돼.’ 여기 중간에 뭐 나왔어요? 10절에 술 취하는 자. 여기서 또 지가 분류를 해요. 술 한 잔은 되느냐? 그러면 자기가 경찰서에서 사용하는 음주측정기로 측정해서 알코올 농도가 0.2%냐, 0.3%냐? 술 취하지 않은 거면 천국 가고 술 취하면 이건 지옥 가고. 지금 나만 흥분하고 있는 거예요?

 

또 다시 예를 들겠습니다. 고린도전서 백독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계속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관찰자로 작용하는데. 하나님께선 악령을 집어넣었다고요. 예수도 알고 그다음에 바울도 안다는 그 심사의 심사위원은 마귀에요, 마귀. 인간이 아니고. 심사위원을 확장하고 거기서 인간은 빠지는 거예요. ‘이건 너의 싸움이 아닌데? 끼어들지 마. 이건 예수 내가 처리할 거야. 네가 마귀를 잡을 수 있어? 못 잡아.’

 

또 하나 예를 들면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①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형상 만들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③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다음에 ④안식일을 지켜라. ⑤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살인하지 말라. ⑦간음하지 말라. ⑧도적질하지 말라. ⑨거짓말하지 말라. ⑩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자, 제가 문제 낼 테니 알아 맞춰보세요. 우상 섬기는 나, 그다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나, 안식일을 어긴 나, 도적질한 나, 간음한 나, 그리고 거짓 증거한 나, 여러 가지 탐내는 자가 있다면 문제는 이거에요. 이 나가 동일인물입니까, 각기 다른 사람입니까? 10초 드리겠습니다. 첫째, 같은 나다. 두 번째, 다른 나다. 몇 번이겠습니까? 정답은 ‘다른 나’입니다.

 

왜냐? 나는 자아는 복합요소기 때문에. 자아가 복합요소가 되는 것은 말씀이 주어질 때 떠돌아다니는 자아들이 말씀 등장하면 마귀가 뒤에서 물어, 물어 해서 조각난 자아의 파편들이 말씀 있는 곳에 선악의 사고방식으로 달려들어서 나로 하여금 내가 추구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말씀을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서 성경공부 아닙니까, 큐티 아닙니까. 동일한 자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동일한 자아로 생각하니까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면 부활할 때 나와 부활 후의 나가 동일성이 있느냐? 이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신학자들에게 골치 아팠던 문제에요. 손가락 하나 날아갔을 때 부활할 때 손가락 붙이고 부활하느냐, 그 문제. 남자라고 했을 때 남자로 부활하느냐, 그 문제. 그런 문제가 초대교회를 아주 골치 아프게 만들었어요.

 

이 모든 문제를 지금껏 신학계에서 손을 놓고 있는 이유가, 첫 번째는,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있는 평가자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을 모르고요. 두 번째는, 말씀 평가에 대해서 주님 쪽에서의 평가단과 악마의 평가단과의 대치 속에서 자아의 평가를 빠져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고 할 때 계속해서 낄 자리도 모르고 그렇게 끼어드는 거예요.

 

말씀을 하나님께서 열 개나 계명에다가 공중에다 뿌린 것은 이 공중 자체가 복합자아로 되어, 이걸 제가 부사로 쓰겠어요. ‘뭉실뭉실’ 이건 하늘에 있는 구름들이 존재하는 방식이죠. 자아₁, 자아₂가 여기에 뭉실뭉실, 또는 몽실몽실 구름처럼 떠돌아다닙니다. 떠돌아다니다가 여기에 무슨 사건 하나 터지면 자아들이 그 떠돌아다니는 나들이 여기 모이게 돼요.

 

평소에 그냥 내가 있던 내 일에 열중하다가 윤석열 찍을 것인가, 이재명 찍을 것인가, 하면 여기에 매스컴이 집중해서 갑자기 좋은 친구 사이가 원수지간 되고 난리도 아닙니다. 이 자아가 갑자기 어디서 출현한 거예요? 자아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출몰하는 겁니다. 자기가 단독 자아는 없어요.

 

나는 별인 줄 알았는데 나는 반딧불이었어요. 반딧불의 특징이 뭡니까? 없는데서 출몰하는 거잖아요. 어두운데서 출몰하는 거죠. 별은 저 하늘에 반짝이고 빛나고 있잖아요. 나는 내가 별인 줄 알았어요. <나는 반딧불>(황가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한참 동안 찾았던 내 손톱

하늘로 올라가 초승달 돼 버렸지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너무 멀리 갔죠

누가 저기 걸어놨어 누가 저기 걸어놨어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란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반딧불은 어떤 특정 시대에 특정 분을 만나서 우연적 존재로 신체를 가지고 나타나다가 나중에 구십 넘으면 요양병원에서 그냥 사라지고 부조금 얼마 받았는지 그것 계산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적 존재입니다. 주께서 그 우연적 존재로 처리하는 이유는, 필연적 존재가 자아로서 이미 따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하게 인간, 두 번째 인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아담이고 우리는 육체적인 아담의 몸의 자손들이라면 천국 백성은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한 몸과 동일성에서 번성된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의 집단, 그게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방금 제가 아담, 두 번째 아담 이렇게 고린도전서, 로마서 이야기했지만 골로새서에서는 이걸 이렇게 이야기해요. 형상, 첫 번째 형상 아니고 진짜 형상은 숨어있는 형상이 가짜 형상 뒤에서 활동하다가 이제는 가짜 형상이 마귀 형상으로 드러난 이상 그걸 제치고 진짜 보이지 않는 형상이 진짜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계획에 유일하게 인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자아가 흩뿌려져 있으니까 지금 내가 어느 자아가 돌아다니는지 나는 몰라요. 어떤 사건 하나 일어나면 또 신경 확 쓴다고요. 지금 삼성 라이온즈가 지난 번엔 2등하다가 거의 바닥을 헤매거든요. 그걸 길 가는 아주머니 보고, “요새 삼성 라이온즈가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그게 뭔데요?” 본인 자아는 그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거는 당신 자아가 관심이 있지 내 자아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각자가 흩뿌려진 자아에요.

 

그런데 아무 관심 없는 아주머니께서 자기가 며느리를 맞이하는데 삼성구단의 이사장이라면 그다음부턴 삼성구단을 연구해야 돼. 프로야구의 구조가 어떻게 돼 있는지, 중요한 것은 한 달 수입이 얼만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에 맞춰야 혼사가 성공리에 성사되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오게 되면 관심 없던 자아가 관심을 쏟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악마는 이 세상을 자신의 자아지요. 그것을 흩뿌려서 기존의 존재 세계에 일을 벌여놓고 그것으로 완전히 이 세상을 굳히기에 들어갔지요. 거기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제가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은 어려워서 15초 드립니다. 15초짜리 질문 들어갑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일단 제가 이야기할게요. 불신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재림한다는 것도 불확실하고, 분명히 감람산에 내려온다는 것도 그거하고, 그리고 부활했다는 것도 모호하고. 더구나 지금 성령이 왔다는 그것도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 이게 보편적인 현상으로 믿기 곤란하고. 불신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아무리 봐도 믿을만한 구라만 떠는 그러한 과대망상증 같은 그런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불신자는 예수님께서 등 돌리고 안 믿어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빨리 답변해요. 크게 이야기해보세요. (신자니까) 땡. 예수님을 신자가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그래요. 똑같은 이유인데 예수님의 거짓말로 내 거짓이 폭로되게 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똑같은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으로 왔는데 그 죄 있는 육신의 몸과 자기가 캐내지 못하고 밝히지 못한 자기의 헛것, 그 죄인 된 것을 주님께서 저렇게 죄 있는 육신으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이제까지 안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을 비로소 나의 죄를 밝혀주는 분으로 이제는 더 이상 헤어질 수 없어요.

 

지난 시간에 한 걸 잠깐 다시 해보겠습니다. 사회구성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되는데 인간의 만남에서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행위자, ‘게 섰거라. 당신 좀 봅시다.’ 타인, 생산물, 그다음에 생산물은 어디에 도달하지 못한다?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은 그냥 종잡을 수 없다 했어요.

 

평생을 살아도 구십, 백세를 살아도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이유는 이 내부 욕망의 순환이 계속 아무리 바뀌어도 시간 따라 가도 끊임없이 내가 아는 것은 손쉽게 식상해서 그거는 조금 전까진 몰랐는데 이미 알아버린 이상은 나는 너에게, 또는 너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 네가 알려줘.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 마음의 내부에 이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 안다는 것이 뭐냐 하면 죄고, 안다는 것이 이게 창세기 2장 17절에 의하면, 또는 3장에 의하면 추잡스러운 거예요. 아니까 내가 말을 하는데, 내가 말한다는 이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나를 통해서 말이 나오지요. 말이 나를 갖고 노는 사회에요.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는 이미 확정된 개념과 그 의미들이 날아다니니까 조각난 자아가 아무거나 건져서 아무거나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문해력이라고 합니다. 어떤 문장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 많은 어휘를 사용하고 많이 알게 되면 유식하게 보이는 이유가 그게 세밀해져서 그래요. 세밀해진 거예요, 분류가. 분류를 하게 되면 분류된 하나하나에 뭐가 붙어요? 관찰자가 붙지요. 그 관찰자를 뭐라 했습니까? 자아라 했지요. 자아가 붙어서 전부 다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는.

 

너는 나를 통해서 무엇을 몰고 있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네가 나에게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사람 만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당신은 내가 힘든 걸 모르느냐?” “힘든 게 뭔데?” “그건 당신이 알아내야지.” 나도 나를 모르는 입장에서. “부부는 한 몸이잖아요. 한 몸의 입장에서 나 아픈 걸 당신이 알아내.” “뭔데? 말을 해.” 말을 하게 되면 이게 진실한 게 아니에요.

 

사회는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아까 했지만 다시 정돈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담론이라 하는 것은 여론, 어떤 누구와의 관계, 대화, 환경 이런 걸 담론이라 합니다. 주인담론, 어떤 관계냐? S₁ → S₂ → a, 그다음에 들어가고(↑) 접근 차단되고(↛) $. 이 자리 S₁(실행자), S₂(남 붙들고 ‘어이’ 부르는 타인), a(타인을 통해서 내가 얻고자하는 것), 그다음에 뭘 얻고자하느냐? 이게 진실인데 진실에 대해서 영 성이 안 차는 거예요.

S₁       →       S₂

↑                      ↓

$        ↚          a

 

그다음에 대학담론, 또는 지식담론. 꼭 대학에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모든 가르치는 자,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S₂       →        a

↑                     ↓

S₁       ↚        $

 

그다음에 히스테리담론. 발작하는 것. 걸핏하면 화내는 것, 이런 거죠. 분노 터트리는 것.

$           →             S₁

↑                             ↓

a                ↚          S₂

 

a라 하는 것은 생산, 분열된 $, 이거는 항상 진리를 배고파하지만 접근이 안 되는 나 자신의 모습이죠. 깨진 것. 끝으로 하나가 분석가담론. 히스테리는 환자가 의사한테 요구한다면 분석가담론은 의사가 환자에게 다가가는 거예요. 나 뭐 안다. 그다음에 분열된 자야 나한테 오라. 내가 당신을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 그런데 주인은 아니고 뭐냐 하면 일반사람으로 이렇게 되는 거예요.

a      →        $

↑                    ↓

S₂       ↚       S₁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자리에요. 이 자리, 이런 자리가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아까 행위자, 타자, 생산, 그다음에 진실. 주님은 그 진실의 자리를 없애버린 거예요. 행위자, 그다음에 타자, 그다음에 뭘 기대하는 거예요. 생산. 예상하고 기대하고 고대하는 희망, 목표, 생산. 그다음에 뭘 원하느냐? 진실.

 

정신분석학에선 인간은 진실을 접근하지 못한다 하는데 주님은 이 진실은 아예 없고 이 세상은 거짓뿐인. 진실은 없는데 있다고 치니까 모든 인간이 정신병자가 돼버린 거예요. 문제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이 세상은 거짓만 유통되는 겁니다. 본인이 거짓적인 존재가 싫어요. 싫으니까 항의를 누구한테 하느냐? 신에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조져놨다는 거예요. 이제 문제 나가야 되죠. 여러분들이 이 문제에 익숙해져야 됩니다. 적어보겠습니다.

 

조졌다는 말은 나쁜 말이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은 망쳐놓았다.’ 문제 나갑니다. 이게 불신자의 고백입니까, 신자의 고백입니까? 이건 둘 다 해당돼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 조져놨잖아, 분노하면 불신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천사 같이 구원해놨잖아요’ 기쁨, 이건 뭡니까? 신자의 고백이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조져놓지 않았으면 나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이런 고백이죠. 그러니까 언어라는 기표라는 자체에서 어떤 아무런 능력이 없고, 그 말씀을 성령께서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미 우리 운명은 확정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이야기하면 이 거짓된 것으로 인간은 진짜 보물인줄 알고 그것 차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라는 말을 제자들부터 모든 인간이 이 말을 뭐로 봤습니까? 구라로 본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자기를 믿지 않는 걸 알고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이 말을 던질 때 비로소 모든 인간은 안에 뭐가 있었다? 인간 말고 인간을 조종하는 말씀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하나의 처벌 대상되는 악마가 거기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서 가담함으로서 악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주받는 것은 빼도 박고 못하게 되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놀고 있네, 그따위 이야기 나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이 있고. 베드로 같고 제자들은, ‘주님 죄송합니다. 일단 제 몸은 살려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든 내 장모를 병에서 낫게 했든 물에 빠진 나를 건졌든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해 같이 빛났든 그때는 그때고 지금 내 사정은 인간 세상의 권력에서 나는 이겨낼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 제가 배신하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베드로는 도망쳤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주님이 알았어요. 내가 모든 걸 버릴지언정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문제 삼은 게 아니에요. 지금 사탄이 수제자인 너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용을 쓰는데 그 악마에게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기도했다. 따라서 너의 기도, 너의 믿음으로 네가 구원받는 건 아니다. 내 기도와 내 믿음으로 너는 내 관리 하에 구원받는 거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너는 네 자아에 대해서 절망하는 기회를 가져야 된다. 너는 닭보다도 못해. 닭 세 번 울 거야.

 

그때 그 순간, 그 타이밍에 바로 그 순간이 뭐냐?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되겠습니다. 나는 무능력한 자라는 사실을. 무능한 자가 말씀을 펴놓고 하늘나라 유업을 받기 위해서 나는 이런 짓도 안 하고, 이런 짓도 안 하고, 이런 짓도 안 하겠다는 그것이 흠뻑 악마한테 속아 넘어간 짓이에요. 이걸 안 하면 나는 진리를 획득하고 그 진리가 나를 구원한다고요? 인간에게는 진리가 감당되지 않습니다. 감당할 필요도 없고.

 

주께선 우리의 믿음을 일체 받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받지 않습니다.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우리를 고맙게도 죽여주시는 겁니다. 뭐로? 말씀으로 죽여주셔요. 말씀으로 죽이게 되면 흙에 속한 우리는 흙과 함께 운명을 다 끝내고 그다음부터는 주님의 십자가, 다 이루었던 주님의 죽음에서 어떤 능력이 나오는데 말씀과 동반해서 그 능력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합류가 되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또 이 말하면 예수님 구라…. ‘우리가 확인이 돼야 믿지 확인되지 않은 구호만 남발하면 누가 믿겠어?’ 주님께선 지금 아무도 안 믿는 이야기를 하셔요. 왜? 모두 다 내가 납득되는 진리 찾기, 진리 확보에 눈이 벌겋게 사는 그 세계에서 주님께서 그 자체를 전적으로 다른 체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주님은 거짓으로 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이 말은 주님이 거짓됐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나 자신 빼놓고 모조리 다 내 판단에 의해서 유보될 문제라는 그 사고방식이 주님 보시기에는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죄 짓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만 나오도록 기능화시키는 그 작업이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전체에 다 깔려있어요.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진실은 없습니다. 거짓밖에 없습니다. 그 거짓이 뭐라 합니까? 내 중심으로 내가 관찰자로 내가 평해서 나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이르겠다는 그러한 탐욕, 그게 바로 뒤에서 마귀가 부추겼지요.

 

간음 문제에요. 간음했다. 이거는 고린도전서 15장 봅시다. 이 문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닌 걸 알 수 있겠습니다. 15장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 보세요. 다양했던 여러 가지 죄 항목에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는 뭐로 딱 굳혀졌습니까? ‘혈과 육’으로 굳혀졌지요.

 

이걸 고린도전서 2장에선 딱 하나로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하면서 요한복음 3장의 말씀처럼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나눠버려요. 나누는 이유가 나눔을 당하는 인간에게 묻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외부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은혜가 오게 되면 반드시 그렇게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티 나게 돼 있다는 겁니다. 이 또한 우리가 감당할 진리 문제가 아니라고요. 진리에 대해서 손을 떼세요. 손을 떼야 돼요, 우리는. ‘낄낄빠빠’라 하죠.

 

주님 하는 일에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 마귀는 자꾸 끼어들라 하고 천국 가는 것은 네 손에 달렸다고 자꾸 끼어들고. 주님께선 좀 빠지라고 이야기하고.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거예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아예 선언을 해버렸지요.

 

그렇다면 이 혈과 육에 대해서 뭐가 오느냐 하면 아까 죄의 리스트, 십계명. 십계명, 죄의 리스트뿐이겠습니까? 성경 전체가 다 그런 거예요. 마태복음 5장이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는 뭐다? 이미 간음을 범했지요. 이걸 오자성어로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은 ‘간음대기자’에요. 문제는 대기만 하는 게 아니고 언젠가는 이게 폭발한다는 거예요. 산상설교에 이래요. 오른팔이 범죄하거든 그다음에 뭡니까? 잘라버려라. 그래서 항상 휴대할 게 뭐냐 하면 맥가이버칼, 이런 걸 항상 휴대해야 되고. 펜치 같은 것 준비해서 오른 눈이 범죄하면 빼버려라.

 

주님께서 이렇게 극한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인간은 간음도 마찬가지고 육에 대해서 육의 신비주의로 벗어나지 못하고 벽에서 되돌아옵니다. 육에서 어떻게 나를 처단하고 육에서 어떻게 나의 욕심을 끊어내면 그 깨끗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 간음을 이미 한 사람, 그리고 간음을 안 한 사람 차이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차이점이 없어요.

 

차이점이 없는 이유가, 항상 간음이다, 선 넘었다, 선 안 넘었다는 평가하는 평가자로 누가 계속 살아 있어요? 이 자아가 계속 살아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추잡하다. 간음하면 안 돼, 또는 간음하면 나쁜 거야, 간음 안 했으니까 잘한 거야, 라고 간음이란 단어를 자기가 생각하는 선악체제와 연결시키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죄를 죄라고 하니까 더러운 짓이에요. 아직도 나의 평가를 내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왜냐하면 간음은 나쁘다, 이게 아까 행위자, 타인, 그다음에 생산물, 진리, 아직도 이 진리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신부가 간음을 했어요. 자기가 그 죄책을 알고 남수단에 가서 어려운 고아들 돕고 자기의 의료기술로 수만 명을 살렸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수만 명의 병든 아이들 살린 것과 자기가 옛날에 간음한 것이 교환 가능합니까? 그게 상쇄가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요. 누가 박혀있기 때문에? 평가자, 내가 나를 평가해서 내 힘으로, 믿는다는 힘, 성령 받았다는 힘, 다 내 힘이에요. 축적된 나의 힘으로 하늘나라를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이제 십자가 나옵니다. 십자가란 딴 게 아니고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걸 어디다 짊어지고 있습니까? 자아가 짊어지고 있지요. 그 자아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물귀신 작전, 함께 죽어버려요. 껴안고 죽어버려요. 진주에 가면 뭐 있지요? 논개.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노래 나오지요. 함께 껴안고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강의인지 기억 안 나는데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십자가가 대신 죽음이 맞습니까, 아니면 함께 죽는 것이 맞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어요. 출발은 대신 죽음이죠. 마지막은 뭡니까? 대신 죽었다고 헤헤거리면서 남아 있으면 안 되지요. 대신 죽으심을 가지고 함께 죽으심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겁니다. 물냉면 시켰거든 어떻게 먹어야 돼요? 물까지 깔끔하게 다 마셔줘야 냉면 먹었다 할 수 있잖아요.

 

만약에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까? 육의 끝은 어디인가? 육의 끝은 십자가에요. 그러나 십자가를 인정 안 하잖아요. 그럼 육의 끝은 어딥니까? 나의 육의 신비는 어디까지 있느냐? 그것 본인이 본인을 연구하는 거예요. 끝까지. 육의 신비는. 육은 쓰레기인데 무슨 신비가 있어요. 육의 신비는 끝났어요. 흙이니까 어디로 돌아가야 됩니까? 흙으로 돌아간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못하는 것을 주님이 알아서 흙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니 도대체 이 친절하고 고마운 주님을 몇 분을 쉬고 또 다시 생각해야 되겠지요.

 

다시 정리한다면 모든 문제는 이거에요. 성경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평가자로 손을 떼면 그만인데 떼면 거룩이에요. 이걸 주제넘게 성경 해석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주님이 대신할 일을 자기가 한다는 자체가 추잡고 더러운 짓이란 말이죠. 이미 네 인생은 네 것이 아닌데 아직까지 자기 것이라고 고집부리면서 계속 관여하느냐? 흥분을 멈추시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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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4강-고린도전서: 아무것도 아님

 

- 이 근호 목사

 

4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연이어서 고린도전서 8장 3절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핵심 단어를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8장 3절을 뽑고 싶어요. 너무나 난해해요. 너무나 난해해서 기가 찰 정도의 말씀이 이겁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대목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구절입니다. 지금껏 공부한 걸 복습으로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누구든지’라는 인간은 배후에서 주께서 조성한 사람이죠. ‘없는 데서 새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무슨 능력에서 온다? 십자가의 능력. 이 능력은 어디서 온다? 악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증거물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뽑아낼 수 있는 TO를 확보했고, 그 TO에 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성되게 되면 그 생성된 자에 한해서는 ‘누구든지’(everybody)가 돼요.

 

여기서는 ‘없던 자’ 또는 ‘이미 죽은 자’라는 조건이 붙기 때문에 인간적인 조건은 ‘누구든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인격이 훌륭하다든지, 직업이 뭐라든지, 이런 것은 이 ‘누구든지’의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는 결과적 용어가 돼요. 결과적으로 생성되는, 드러나는 이게 바로 ‘누구든지’가 되죠. 이 ‘누구든지’가 되면 하나님이라는 주체…, 칠판에 문장을 길게 적어놓고 풀어가는 식으로 하니까 저 대치동의 영어 강사 같아요. 이거 수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기존의 하나님과 차별성을 띄죠. 내가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죠. 따라서 그 뒤에 나오는 종속절…, 또 뭐 굉장히 문법적으로 보이고 유식해 보이잖아요, 뒤에 나오는 이것은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누구든지’를 만들 권한을 제공하는, 그러한 권한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준비된 사랑이에요. 준비된 사랑, 이것만 거룩이 되는 겁니다. 왜? ‘거룩’이라는 말은 차별화된 다른 영역에 속한 그 속성을 두고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착함과 관계없이 인간은 모르고 하나님이 따로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준비한 속성을 ‘누구든지’에게 “쏘세요!” 하고 쏘면 이걸 가지고 ‘은사’ 또는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사’의 특징이 뭐냐? 이것은 단편적이 아니고 영원성, 영원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한 번 주면 취소가 안 되는 겁니다. 취소가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은사를 줘놓고 “네 힘으로 네가 범죄 해서 취소가 되는지 해 봐. 네가 죄지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취소되는지 한 번 버텨봐. 해 봐, 그게 되는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라는 이 말은 시편 23편 전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뭐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도 한 번 적어볼게요.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목자잖아요. 목자, 누가 전화해서 초청했습니까? 없어요. 아무도 초청한 사람이 없어요. 양들이 모여 회의해서 “괜찮은 목자 달라고 요청하자.” 한 적이 없습니다. 양들은 계속해서 목자의 기능을 위해 모집될 뿐이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래서 나머지 종속되는 뒤따라오는 모든 기능은 목자의 일방성입니다. 일방성, 일방적인 조치에요.

 

이 일방적인 조치에 양들은 반발합니다. 제 갈 길을 가면서 반발하죠. 반발하는데 결국엔 그 반발을 통해서 ‘내가 하는 것은 일체를 받지 않는다’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거룩은 안 받고, 내가 하는 기도도 안 받고, 내가 하는 헌금도 안 받고, 찬양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는다.’

 

왜? 이미 하늘나라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풀세트에요. TV 있죠, 냉장고 있죠, 가습기도 있고, 전자레인지도 있고, 세탁기도 있어요. 자기가 살림하려고 가져온 살림살이들은 다 갖다 버려야 되고 주의 살림살이에 맞춰서 사는 생활이 천국 생활입니다. 하기 싫어요?

 

하기 싫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나한테 익숙한 가구를 계속 갖고 가겠다고 버티는 것, 그런 사람은 문제가 돼요. 그런 사람은 도중에 주께서 다 가려내죠. 내가 목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일방적으로 목자가 양을 선택하는 겁니다. 주체가 바뀌죠.

 

이렇게 되면 어려운 게 없는데 어렵다는 게 뭐냐? ‘아신 바 되었다’라는 이 사실, 이 사실을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엡 1:4)까지 가져가요. 창세 전의 특징이 뭐냐? 누가 없다? 내가 없어요. 내가 없기 때문에 내 의견이 끼어들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는 데서 이미 구원은 확정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걸 실시하기 위해서 주께서 뭘 없앴습니까? 있는 나를 ‘없다’, ‘죽었다’로 전환 시켰죠. 주께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를 없는 존재로, 죽은 존재로 이렇게 바꾸는 이유는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고린도전서 8장 3절의 이 말씀이 계속 방해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의하는데 “카톡!” 하면 방해될 게 아니겠습니까? 끊임없이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위주로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주의 일에 계속 방해가 되는 겁니다.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고 말씀을 보내서 이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죠.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할 때 우리가 고분고분할까요, 아니면 저항할까요? 아니면 더 나아가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데 일은 잘 풀려요. 희한해요. 참 희한해요.

 

성경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데 일은 너무너무 잘 풀리고 있습니다. 사후적으로 그걸 발견해요. 그걸 저는 ‘인간은 늘 뒷북 친다’라고 말해요. 뒷북 치는 식으로 되돌아보게 되면 ‘합력하여 선을 이뤘고 또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다.’(롬 8:30) 합력하여 선과 선의 코스가 중지되지 않고 이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가면 갈수록 발견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이렇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의 코스, 인생길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기억이 축적된 인생길이 있다. 그런데 주께서 마중을 나와요. “네 인생길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잘 들으세요. “넌 인생길을 잘못 살아왔다.”가 아니라 “너는 없다.”가 돼요.

 

잘못 살아왔으면 자꾸 우리는 “이제 제대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건 마귀 짓이죠. “넌 애초부터 없고, 넌 죽어 있다.” 그런데 네가 1살 때, 2살 때, 3살 때, 4살 때 이렇게 살아온 것, 유치원 가서 눈병 나는 그런 것도 다 주께서 미리 조치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네 인생이 아니고 내가 목자 되기 위한 내 양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내 책임하에 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 관리하에 있었다’라는 겁니다. 만약에 42살이라면 42살에 이걸 알았다고 칩시다. ‘아,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이구나. 주께서 관여하고 주께서 자기를 위해서 우리를 이끌어 왔구나.’

 

이게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겁니다. “내가 포행자요, 살인자인데 창세 전부터 주께서 날 아신바 되어서 예정하사 나로 하여금 포행자 되는 코스, 살인자 되는 코스를 밟아서 영생에 이르도록 했습니다.”(딤전 1:13) 이런 대담한 고백을 합니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이 “좋겠다, 너는!” 비아냥거리면서 “그 말을 지금 우리보고 믿으란 말인가?”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하죠.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이걸 네가 네 힘으로 믿을 수 없어. 성령이 나타나면 믿는 거야.” 이렇게 하죠. 바울이 그렇게 논쟁하는데 자, 42살까지 주께서 이끌어 왔습니다.

 

만약에 42살, 생일이 7월이라고 합시다. 그럼 42살 7월! 여기부터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부터는 주를 위해 살 거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42년 6개월 동안 한 것이 주의 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주의 일에+개과천선한 1개월’ 이렇게 보탤 때 주의 일이라는 생각을 무슨 보자기에 담는가? 새로운 자아 보자기에 담아요.

 

이것은 또 문제에요, 또 문제! 회개하고 반성했는데 그게 괜찮은 자아로 전환되고 마는 겁니다. 분명히 정신 차렸는데 어느새 나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요소로서 이미 근거, 바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친절하신 주께서는 여기서 또 말씀으로 다가갑니다.

 

이걸 42년 6개월의 그것조차도 네 길은 전부 죄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 사태를 친절하신 주님이 마련해 주셨습니다. ‘회개하고 반성했는데 내 인생 꼬라지가 왜 이렇습니까? 그때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했는데!’ 집에 휴지가 많죠? ‘잘 풀리는 집’이라고 많이 있는데 내용은 전혀 안 풀리고 있어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생각을 하죠.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라는 그 말씀은 언제 가서 최종적으로 마감이 되어서 진짜 하나님이 아신 바 된 그 앎, 아신 바 되었다는 그 사실에 내가 동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죽고 난 뒤에 주님의 천국 갈 때 그걸 알게 돼요. ‘아, 이게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나를 재료로 해서 말씀이 살아있게 했구나. 주인공이 말씀이지 내가 아니구나.’ 그때 후다닥 자기 받은 면류관을, ‘이런 걸 왜 내가 갖고 있어?’ 후딱 벗어서 누구한테 줍니까? 주님의 일이니까 주님께 반납하는 그 쇼가 마지막 천국 입성할 때 있습니다.

 

천사들이 박수를, 선배들이 막 박수를 치면서 고생했다고 하죠. 무슨 고생을 했단 말입니까? 나의 자존심과 나의 의를 반납하는 그 순간 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는 것을 은혜 주신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그 이벤트, 그 축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라는 말씀,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이 이게 장난이 아니고 그게 곧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때 가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렵지 않은데 자꾸 어렵다,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고린도전서 이번 강의의 핵심인 이 대목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라는 이 대목을 왜 자꾸 의도적으로 거론하느냐 하면 이 사람의 소속이 ‘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생성된 새로운 사람이지 ‘이 사람’이 ‘나’라고 여기에 끼어들 수 없는 ‘이 사람’이에요. 분명히 ‘나’를 재료로 한 건 맞는데 날 재료로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나’라고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이 말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양배추라고 합시다. 내가 양배추인데 주께서 양배추 좀 찢어서 어떤 햄버거, 빅맥 햄버거를 만들었다면 그 햄버거 내 겁니까? 예가 좀 유치한데요, 내가 생각해요. 그 한 자리 끼웠다고 그 햄버거가 내 거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걸 고린도전서에서는 ‘주의 것’이라고 하고요, 그 주의 것에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패티로 들어온 다른 형제도 있어요. 어떤 이는 케첩…, 케첩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손자, 케첩에 막 밥 말아 먹어요. 하여튼 케첩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손, 어떤 사람은 발, 어떤 사람은 눈으로 해서 결국 어느 누가 뭘 했다고 말 못 하는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는 그걸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요.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옵니다.

 

3장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3장 5절 보기 전에 8장 4절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우상 언급하면서 그것과 연관을 시켜야 해요.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그다음에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며”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우상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상과 연관시킨 우리 자신을 보고 “네가 이 세상에 어떤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도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무효, 아무것도 아니고 네 착함에 내가 호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는 선합니다’라고 할 때 그 선함에 동조할 이유도 전혀 없다. 왜? 너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난주일 오후에 이야기했죠.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 형상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 우상, 그 대상체와 내 속에 보이지 않는 형상과 서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상을 섬길 때는 골라 먹는 재미로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듯이 내 마음에 맞는 우상 하나,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아니면 아무 종교도 갖지 않을까? 그건 내 마음대로다.’ 하는 식으로 자기 형상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결국 우상은 자기 안에 들어있고 그 우상을 ‘탐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탐심의 특징은 단일하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얼굴이 다 다르지만, 그 안에 있는 형상은 아담의 형상이기 때문에 모든 탐심은 단일하고 공통점이 있어서 이 사회는 협동이 가능한 겁니다. 다수가 원하는 것이 진리로 취급받는 이 더러운 세상, 각자 있는 탐심이 동일하게 작동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자가 영웅이 되는 이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1등과 2등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이 더러운 세상, 사실은 똑같은데 똑같이 뭡니까?

 

우수한 게 아니고 똑같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데 너와 나의 가치를 차별화시키는 이 세상, 그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가지고, 우상의 단일성을 가지고 집요하게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똑같은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너희는 무장되어 있다, 똑같은 의식. 다르다고 하지 마. 나는 전체를 ‘아담 안’, ‘죄 안’, ‘죽음 안’이라는 동일함으로 너를 다루겠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놓고, 다시 고린도전서 3장으로 와봅시다.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꿔주시든지 소리 안 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 휴대폰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메시지도 아무것도 아니고요.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죠. 그게 표면적으로 차이가 났죠? 각기 다른 일을 했죠. 그런데 7절에 보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그다음에 ( ), 그거 수능 나옵니다. 주관식으로 딱 빼놓고.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 ) ” (네모) 괄호 안에 뭐 들어가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요’ 아예 명찰을 달아버려야 해요. ‘이 아무것도 아니요, 박 아무것도 아니요’ “이 호실에 몇 명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네 명 있습니다.” “식구가 몇 명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자 6명입니다. 아이들 네 명하고 부부하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큰소리 내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잘 들어야 해요. 큰소리 내고 화내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큰소리 내고 바가지 긁어도 그 소리 듣는 남편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허허, 웃어야죠. 왜?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큰소리 내는 것이 현실에 반영이 안 되니까요. 현실은 말씀대로 되지 잔소리 많이 한다고 현실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훌륭한 남편은 어떤 남편입니까? 내가 아니면 퍼부을 데가 없으니까 마음대로 퍼부으라고 앰프의 볼륨을 막 올려주면서, 그렇게 모든 것을 용납하는 거죠.

 

고린도전서 3장 7절 계속 봅시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이는 오직…” ‘오직’ 뭡니까? 자라나게 하는 거죠. becoming, 존재가 아니고,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닌 것 + 생성, 부지런히 활동하시는 분’, 그런데 이 분은 안 보여요.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 의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뭡니까? 리얼리티, 실상이라고 하죠. 그다음에 리얼리티 말고 보이는 것은 뭡니까? 가상이죠. 그 가상을 심볼, 상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죠. ‘인간의 모든 행위 + 언어’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몸짓이 발달해서 인간의 행위와 언어가, 법이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넌 그냥 있을 때는 하나의 몸짓이었는데 내가 너를 꽃이라고 불러주고 언어가 투입될 때 넌 나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경북대학교 교수로서 시인이었던 김춘수(1922-2004)가 말한 거예요.

 

그 사람 벌써 옛날에 죽었어요. 하나의 제스쳐, 하나의 몸짓이에요. ‘몸짓’이라는 의미가 잘 안 다가오죠? 몸짓이라고 제가 점잖게 이야기했지만, 욕망을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데 현실은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내 욕망을 안 들어줘요.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가, 기도 응답을 하지 않는 그것이 사랑인 이유가, 기도하는 자 따로 있고 주님의 응답은 따로 펼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긋남, 안 맞다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도를 하셔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새삼 느끼게 돼요. 그걸 제스쳐라 하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몸부림치는 거예요. 자아를 버리기 싫은, 자아를 포기하기 싫은 몸부림, 아무나 붙들고 시비 걸고 다투고요. “내 말 좀 들어봐,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자기 속에 있는 폭발하는 욕망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는 훌륭한 상담이라고 이야기해요.

 

아까 ‘분석가 담론’ 있었죠? ‘히스테리 담론’도 있었죠? 그리고 ‘대학 담론’ 또 하나는 뭡니까? ‘주인 담론’. 내가 원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제스쳐, 몸부림치는 이 사회, 그런 인간관계가 곧 이 세상의 관계입니다. 인위적 관계, 자연적 관계가 아니고 ‘자연적 관계 + 인간의 몸부림’ 이렇게 더하면 그걸 문화라고 하고 문명이라고 합니다.

 

몸부림 쳐보는 거예요. 세상에 나오는 모든 뉴스가 몸부림입니다, ‘자연’은 서울 섭씨 38도, 그다음에 거리에 물 뿌리는 것은 ‘몸부림’. 몸부림과 몸부림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이 보여주는 이 몸부림을 이미 사도 바울도 알고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인간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몸부림이나 내 기도 응답도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억지를 부리는 그 시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말씀이 주어졌기에 그게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첫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한 것, 벌써 몇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째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말씀이 오게 되면 인간의 그 속살, 속내를 완전히 발각시켜서 ‘왜 말씀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차이 나는지’ 이야기를 하고, 말씀은 인간을 유한 락스처럼 탈색시키고 없애버리죠. 그런데 인간의 몸부림은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을 그냥 액세서리로 들고 있다가 돌아서면 다 털어버리고 다시 본래의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는데 ‘내가 어떠한 식으로 평소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그것을 우리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하겠죠? 그걸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이 많이 피곤하신데 할 수 없어요.

 

인간은 자신의 단일성을 증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단일성, ‘나는 나다.’ 어디서 많이 들었죠? 출애굽기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건데 이미 악마의 형상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금 모방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인간이 이미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나는 나다.” 에요. 이사야 47장 8절에, “나 외에 다른 이는 없다.” 이게 인간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철학과 신학과 과학으로 자기가 무장해도 연필 심지가 있잖아요. 찐빵의 앙꼬, 그 대목에서 자기를 표현하라면 “내가 나에게 All, 전부다.” 그게 타고났어요. 그뿐이에요.

 

윤리? 도덕? 나한테 유리하면 착하고, 나한테 해로우면 악하다고 누가 규정한다? 내가 규정하고 싶어요. 남들이 동의하든 관계없어요. ‘나만 옳으면 그만이야.’ 그걸 가지고 증명, ‘자기 존재 증명’이라고 해요. 여기에 성경 말씀을 합하면 그대로 들어가요.

 

“내가 믿는 예수가 참된 예수다.” 십자가 마을이 아니라 십자가 도시가 되든 십자가 교회가 되든, 혹은 십자가 식구가 되든 모든 인간에게 이게 다 들어있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걸 두고 뭐라고 하느냐?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로 대치해 주죠.

 

“내가 믿는 예수가 참된 예수다.” 주님이 불러요. 빵, 치면서 “누구 마음대로 내 이름을 꺼내느냐? ‘내가 믿는 것은 참된 예수’라고 자아를 굳힐 필요 없이 그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규정시킨 내가 바로 예수다.” 내가 너를 구원했지, 네가 나를 믿어서 네가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드러납니까?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의 탈을 쓴 것인지가 들통나요. 기독교, 불교 이런 것들의 속내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하나 이야기하고 계속 이야기를 끌어가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4-21절, 문제 하나 나갑니다.

 

역시 오전 끝이 다 되니까 지금 아무것도 아닌 게 서서히 드러나요. 요한계시록 9장 14-16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그렇게 되어 있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주장한다면 요한계시록 9장 14절 이 뒤에 나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해요. 압니까? ‘나팔 가진 여섯 천사’ 갑자기 ‘큰 강 유브라데’, 유브라데가 왜 나와요? ‘네 천사’는 왜 나오는 겁니까? ‘삼분의 일’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고, 또 ‘마병대의 수가 이만만이다’ 이건 뭐예요?

 

전부 다 요한계시록의 말이 이상한 단어들로 이렇게 꽉 차 있을 때 1번, 우리는 해석을 포기한다. 2번, 이 해석대로 현실이 지금 꾸려져 가고 있다. 몇 번입니까? ‘내가 해석한다’가 아니죠. 해석된 것은 실제 이뤄진 것과 별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결과적으로 이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 말씀에 대해서 해석 못 한다고 걱정할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너한테 준 은사를 받기나 해라.”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해석’과 반대에 위치한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방금 요한계시록 9장 14절은 뭘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해석을 강요하죠.

 

“너 해석 못 하면 지옥 가는 거야. 지금까지 믿은 거 소용없어.”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 맞은편에 뭡니까? 사랑이 나오죠. 이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에요. 그러면 해석은 누가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이 현실을 만들기도, 해석도 하시는 거예요. 해석하는 그 시간이 2시간? 3시간? 30분 안에 해석이 가능합니까? 이 해석이 며칠 걸립니까? 평생 가죠, 평생 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이죠. 해석해 보라고 하면 “저요, 저요!” 손 다 듭니다. 이거는 뭐 자신 있다, 이 말이거든요. 아니에요.

 

평생을 다 살고 면류관 반납할 때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해석은 누구 담당이냐? 바로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실시한 결과물로 내가 천국에 오게 된 거예요.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합격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을 뭐로 이해합니까? 주님이 해석하는 것을 뭐로 이해한다? 그걸 사랑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 앞에서는 해석하는 우리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은 성도한테 하는 것이고, 제가 계속 이야기를 해보면 자신의 단일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뭘 하느냐 하는 거예요.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제가 안타까워서 못 보겠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분류’합니다, 분류. 이건 아까 한 것과 관련이 있어요. 인간은 끊임없이 분류합니다. 분류 작업을 해요. 세밀하게 회 뜨듯이 ‘이것은 착한 일, 이건 나쁜 짓, 이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일, 이건 좀 두고 바르게 하면 이제는 괜찮아지는 것’ 이것을 계속해서 합니다.

 

그 예를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이 뭘까요? 여기에 눈동자 그리고, 이렇게 하면 아기 공룡 둘리 같기도 하고요. 여기 앞부분, 이게 뒷부분, 윗부분, 이게 옆부분,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 인간의 두뇌 이야기입니다(*강의 동영상과 파일 참고).

https://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3A%2F%2Ft1.daumcdn.net%2Fencyclop%2Fm144%2FlTYf83cqdWUANUwQSYtbpL2vxieQHZtxbFpv4XXf%3Ft%3D1504765672000




(출처 :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http://www.mhpark.or.kr)

 

인간이 어떻게 이걸 분류하느냐? 밑에서부터 이곳이 비주얼, 시각 담당입니다. 여기 접혀 있는 게 청각 담당입니다. 옆에 있는 이것은 사회성 담당, 이 앞부분은 장기 목표, 상상. 이 반을 쪼개서 이쪽에서는 감각 부분, 여기는 운동 부분, 이렇게 나눠요.

 

시각도 중간에서는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는 것, 여기 앞부분은 시각을 통해서 어떤 눈에 보이는 개념들을 분류하는, 하나의 사전을 마련하는 것. 여기는 대상과의 거리, 대상 구분하는것, 그리고 여기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리고 청각들의 모든 기능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제 감각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면 기다리는 것이 운동인데, 운동은 그냥 운동이 아니고 기억은 전두엽에서 해요. 해마라는 것은 장기 기억을 저장하고, 단기 기억 작업은 여기서 해요. 이렇게 영역을 나누고 자꾸 분류해요.

 

그래서 어떤 계획이 있으면 이 계획이 운동이니까 여기는 입술, 그다음에 손가락, 사지, 몸통, 모든 운동에 관한 것. 촉각과 시각과 청각이 만나는 입술에서 흘러 내려온다, 곧 브로카와 베르니케 영역에서 언어 영역이 이렇게 입술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입을 통해서 언어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베르니케 영역에 문제가 있으면 실어증에 걸린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입술을 통해서 말하니까. 이런 식으로 두뇌를 기능별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뭔데? 이게 뭐예요? 왜 분류해요? 분류를 왜 하느냐? 자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파헤치고, 또 파헤치고 그걸 환원주의라고 하는데 끊임없이 파헤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물리학자는 이런 수치를 계산해 냈습니다. ‘2.6×10⁻²²kg’

 

이게 놀랍게도 자아의 무게에요. 여러분, 무게를 재도 자아의 무게를 재본 적이 있어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학자들이 실험해서 자아의 무게가 ‘2.6×10⁻²²kg’라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알아냈느냐 하면 이 세상은 정보로 되어 있고 정보를 가지고 실험합니다.

 

1비트의 정보가 빠질 때 거기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측정해 보니 이렇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정신 영역이라고 했던 자아가 어느 영역으로 들어옵니까? 자아도 이미 물질 영역으로 들어 와버렸다는 거예요. 이런 연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말하는 건, 그래서 뭐? 이걸 연구했다. 나이 50에 이걸 연구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뭐가 째깍째깍, 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은 이렇게 연구하는 사람을 어디로 몰아세웁니까? “정녕 죽으리라.”(창 2:17) 자아 연구, 이거 몇 킬로그램, 이런 것 하지 말고, 두뇌 분석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이렇게 잘나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자기를 증명하는 나를 왜, 왜! 왜 나를 죽이느냐 하는 거예요.

 

“Why me?” 이렇게 훌륭하고, 연구 많이 하고, 남에게 기여를 많이 한, 사회적으로 긍정적 기여도가 많은 나를 주님께서 멱살 쥐고 명복 공원 화장터에…, 이름도 명복 공원이에요. 그 화장터 10시 반에 가면 순번 대기표 받아서 대기하고 있고, 목사는 앞에서 설교하고 있고요. 왜 죽이느냐는 거예요.

 

그때 찬송가 부르면서 아버지 보내드리겠다고 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워서 “그다음 차례는 네 차례야. 여기 내 자리 있잖아? 네가 곧 여기 들어와야 해.” 줄줄이 소시지처럼 떨어지지도 않고 왜 이렇게 자꾸 죽음 쪽으로, 한 방향으로 이미 죽는다는 것이 확정되어 있느냐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되는데?’ 정답은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날 때 죽는 것조차 누구의 일이냐 하면 죽음이, 죄송합니다만, 사실은 죄송할 일이 아니고 기뻐해야 할 일인데요, 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느 강의에서 그랬죠. 뭐가 기적이다?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리고 기뻐하라. 기뻐하고 감사하라.”

 

‘알아서 때 되면 죽겠지.’는 기적이 아니에요. 감사가 안 나와요. 그런데 적극적으로 주께서 죽여주시는 것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내 일에 개입을 해주니까 주께서 감히, 그냥 버려둬도 되는데 적극적으로 날 죽여주시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뇌 과학자가 이 일을 했습니다. 이거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자아 무게 재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과학자가 진짜 성령 받은 성도라면 이렇게 돼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우리가 죽어 마땅한 그 죽음…”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요, “…그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짜잔! 나 이런 연구 했지롱~! 나는 죽어 마땅한데 죄가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짜잔! 자아의 무게는 2.6×10⁻²²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직업을 자유인으로 바꾸지 마세요. 혼자서 가야산 같은 데로 들어오지 말고요. 가야산 들어오면 나방 같은 벌레가 많아서 못 살아요. 어젯밤에 문 열어놨다가 큰일 날 뻔했어요. 그냥 주께서 지정한 여러분의 그 위치, 현재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인 줄 알고 남 탓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그렇게 하시되 ‘죽는 것도 기적이지만 이 일에 꽂아준 것도 멋진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왔다’라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3장의 말씀이 이렇게 되죠.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이 말을 이렇게 봐요. ‘어떤 사람은 뇌 과학자로 일했고, 어떤 사람은 물리학자로 일했지만 그 둘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죽음에 참여했다가 살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구석도 말씀이 빠져있는 구석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두 시 되기 전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아까 한 이야기와 연결시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8장 3절에 보면 이 세상의 신은 한 분밖에 없고, 우상들, 또 종교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뭡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점심을, 아무것도 아닌 마음으로 주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고 드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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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5강-고린도전서: 집단 구원

 

- 이 근호 목사

 

5강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고 할 때 두 가지의 다른 종류의 십자가가 내포될 수 있어요.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십자가가 있었죠. 첫 번째는, 개인 자아를 위한 십자가. 두 번째는, 집단을 위한 십자가.

 

사도 바울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퇴출시키고 어느 것을 정당한 것으로 봤는가? 개인 자아를 위한 십자가는 퇴출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개인의 십자가를 다른 종교로 봐요. 다른 복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집단을 위한 십자가는 구약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구현하는 십자가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을 놓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구약을 완성했다고 보는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것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린 양이 개인을 위한 어린양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을 생산하게 하는 그러한 어린 양이죠.

 

그 하나의 어린 양 각자의 어린 양 앞에 종속되어 집단화하는 조건으로 히브리인 가정들에게 자기 집에 있는 양을 잡아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 취지가 신약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 언약의 일관성에 부합된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제가 개인 자아를 지난 시간에 ‘흩뿌려진 자아’라고 했죠. ‘흩뿌려진 자아’는 통합된 자아 형성에 실패합니다. 흩뿌려진 것을 내가 다시 끌어모을 수는 없어요. 왜 이렇게 흩뿌려지느냐 하면, 인간은 일어나는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이런 사건 터지면 거기에 몰두하고, 저기서 저런 사건이 터지면 또 거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자아 자체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라캉에서 S1, S2, 이것은 주체 1, 주체 2라고 하는데 사실 주체 1이라는 것은 없어요. 주체는 없어요. ‘완전한 자아’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데 주체 2는 뭐냐?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에서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는, 또는 가담되는, 또는 하나의 개인으로, 인격으로 인정받는 그렇고 그런 일반 인간’, 이것을 S2라고 이야기해요.

 

기존 상징 세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주체, 자아입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하나의 일원으로서 내가 보기에도, 남들이 보기에도 “넌 우리와 같은 사회인이 맞아.”하고 사회가 용납하고 인정하는, 거기에 같이 통용될 수 있는 S2, 이력서 작성할 때 쓸 수 있는 그런 자격이 되는 이런 인간, 이걸 ‘개별적 자아’라고 합니다.

 

S1은 상상의 자아인데 ‘완전한 나’를 말합니다. 이것은 어릴 때죠. 어릴 적 상상의 나, 내가 생각하는 어릴 적 상상의 ‘나’가 사회에 나가서 박살납니다. 그래서 입사 경쟁 뚫고 회사에 들어갔다가 못 버티고 한 달 만에 튀어나와요. “난 자영업 할래. 도저히 내 성격에 회사 근무 못 하겠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잔업까지 하고, 이건 내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하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S2지만 S1을 지향하는 것(S1←S2), ‘내 개인 사업을 하겠다.’ 어떤 걸 해도 이건 실패하죠. 왜냐하면 백날 S2가 S1을 지향하면서 관계해도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 이 사회는 진실을 찾는 데 결국 실패하는 사회, 진실은 없으니까 실체가 아닌데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완전한 사회를 구현하고 싶어서 서로가 노력하는 사회, 이걸 무슨 사회라고 하느냐? 이것을 상징계, 상징 사회라고 해요.

 

늘 새로운 이미지에 우르르 몰리고, 새로운 저 이미지에 우르르 몰리고. “공부 잘하면 의대에 가야 된다.” “아니야, 공대를 가야 돼.” 또 새로운 세계의 경제 트랜드에 의해서 “적어도 한국 사람 같으면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해야지. 한국에는 일자리가 없어.” 이런 것, 이 사회의 흐름, 현 사회에 구성되고 있는 이 discourse, 담화에 놀아나면서 거기서 필요한 나, 이 나는 사회에서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그게 흩뿌려진 자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지기에 자꾸 뭘 그리워하느냐? 옛날 백설 공주 시대 때의 나, 인어공주 시대 때의 나를 그리워하면서, 어떤 멋진 계획에 의해서 그 인생이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원하는 상상의 나로 접합할 수 있고 합치될 수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노리면 뭐 합니까? 나이 벌써 40이 넘고 50이 되었는데요. 외부에 있어서는 이렇게 완전을 추구해도 내부가 썩어 들어가는 거예요. 전립선 비대증, 이런 거 있잖아요. 온몸이 쑤시는 거, 허리가 아픈 거, 이건 내가 원치 않는데 중력의 무게에 의해 척추가 망가지는 거죠, 물리적 환경에 의해서.

 

그래서 이 흩뿌려진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S2인데 S2가 자꾸 S1을 원해요. 원하는데 어디까지 원하느냐? 상상할 때 이 땅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아, 정말 이 세상은 더럽다. 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데에 가겠다.’라는, 나의 영원한 영생과 구원을 성경에서 봤으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할 때 ‘아, 무슨 수가 없을까? 아, 여기 있네.’ 하겠지요.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서 “십자가 지혜가 너를 구원한다”라는 소식을 듣고 “저 십자가 내가 믿을래!” 이렇게 해버리면 그 십자가는 무엇과 결속되어 있습니까? 개인의 자아와 결속되어 있는 십자가, 이거 가짜 종교, 가짜 복음입니다.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복음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할 때 점검을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개인 절대성을 위해서 십자가를 믿는지, 아니면 자기를 포기하는지, 즉 자기 자신이 나올 수 없는 어떤 집단을 위한 십자가인지, 어느 쪽인지 그런 것을 검토해 보는 거죠.

 

그래서 기성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1번(자아 구원)을 거쳐서 2번(집단 구원)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백성이 되면 어떤 게 기다리느냐? 여러분들과 같은 형제가 기다리니까 십자가를 믿던 그 믿음으로 형제와 결속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완성이 되니까 그게 참된 하나님의 공동체고 신앙 공동체고 교회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 그건 뭐 신천지 되기 쉽죠. 굉장히 쉬운 거예요. 이런 기존의 집단, 대형 교회 이런 것이 거대한 집단을 통해서 개인으로 구원받는 사람에 결합되게 되면 ‘개인의 자질이 다 십자가를 안고 있으니까 십자가를 안고 있는 자질이 모이면 그 집단도 순수하고 하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개인은 이 십자가 안에서 죽어 있을까요, 살아 있을까요? 여전히 살아있어요. 꼭 발톱의 무좀 곰팡이 같아요. 발톱속으로 들어갔는데 안에서는 계속 발톱의 균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짜가 들어왔잖아요.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이걸 누룩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전 5:7). 너희 속의 누룩을 내어 쫓으라는 겁니다.

 

이 개인의, S2죠, 흩뿌려진 자아를 강화시켜서 그 자아를 더욱더 공고히 해서 통합된 자아로 만든 자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집단을 위한 십자가에 끼어들어 “나도 십자가 압니다.” 하고 같이 천국을 가고자 들어온 것, 이걸 누룩이라고 해요. 누룩이라는 좋지 않은 개념을 사용했어요. 저절로 퍼지니까, 개인적 사고방식을 안 놓치고 발휘하게 되니까.

 

남들 보기엔 속아 넘어가죠. “우리는 교회 소속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걸 족집게로 끄집어내죠. “개인이 없는 집단부터 시작해야 할 것을 너에게는 개인을 모아서 집단 만들겠다는 불순한 동기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개인이 없는데 어떻게 집단이 생기느냐 하는 그 점이에요. 개인이 있어서 집단이 됩니다. 1, 2, 3, 4가 모여야 다수가 성립되는 것이 우리네 상식인데 십자가는 그 상식을 다른 종교로 간주하는 거예요. 다른 종교, 이방 종교로 간주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수기 25장 9절에 보면 2만 4천 명이 죽어요. 죽은 자가 2만 4천 명, 다른 종교의 요소가 끼어든 겁니다. 흩뿌려진 개인이 개인을 충족시키는 그러한 이방 신에게 현혹되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래도 나는 여기 소속이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여길 때 그걸 족집게로 뽑아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3천 명 죽습니다. 아직 정신이 좀 멀쩡할 때 어려운 걸 빨리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해서 그날 백성 중에 3천명 가량이 죽습니다. 죽는 그 이유가 여호와의 뜻에 반대되는 요소가 여기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그걸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죠.

 

32장 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다 죽이는 거예요. 3천 명 정도가 아니고 ‘현재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있던 모세 너 빼놓고 지상에 있는 것들은 다 죽이겠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숫자가 모자란다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합당한 자만 들여보내겠다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 집단이 어떻게 신약의 교회라는 집단과 연관될 수 있느냐?’ 연관되는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간단해요. 시간이 이렇게 흐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흐르게 되면 이스라엘은 몽땅 다 망합니다. 몽땅 다 망한다. 다 망하면 ‘이스라엘은 있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없다.’가 돼요.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있었던 이스라엘이 아예 없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 언약의 원칙인 이거에요. 언약의 원칙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작용할 때의 능력이 ‘없는 데서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죽은 데서 살리는 거’예요. 이건 에스겔 37장에 나와요.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뼈 있는 골짜기에 갔죠.

 

“시몬 너는 아느냐? 인자가 뼈 밟는 소리를!” 이런 것. 부지직부지직 전부 다 뼈, 뼈를 밟으니까 갈비뼈 열두 대가 나가고, 엉치뼈도 나가고, 밟아도 밟아도 그 골짜기는 뼈들만 있는 골짜기에요. 그것을 시체라고 합니다. 거기에 한쪽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옆에 대동한 사람은 이름이 뭐냐?

 

‘인자’, 그 이름이 여기서는 에스겔이지만 ‘인자’라는 칭호, 장차 자기를 칭하는 그 칭호는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인자야, 네가 본 것은 인자라는 조건하에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는 인자잖아!” 인자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몽땅 다 죽입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 죽은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죽은 이스라엘밖에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알아서 이스라엘이 된다는 모든 가능성은 어떻게 됩니까? 이미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에스겔에게 물어요. “이게 어떻게 살겠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살겠느냐.

 

지금 다 죽어 있는 판에 ‘살겠느냐’를 물을 때 에스겔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답변을 했고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언약의 활동 주체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완성하기 위한 바탕은 하나님에 의해서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여기에 언약, 다시 말해서 말씀이 그냥 불어오죠. 말씀이 부니까 뼈와 뼈들이 조립됩니다. 조립이 될 때 여기서 궁금한 것은 ‘자기 뼈인지 남의 뼈인지, 뼈들이 어떻게 제대로 붙는지 안 붙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건 모르는데 어쨌든 간에 ‘그들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흩뿌리는 그 자아는 아무 소용 없어요. 흩뿌려지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흩뿌리는 자아가 하나의 개인 자아로서 통합돼도 그 숫자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개인의 자아를 수렴하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의 개입이 없이 이뤄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종교로 보는 거예요.

 

에스겔 37장 11-13절에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그다음에 뭡니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감격스러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은 이미 바짝 마른 뼈가 되어 죽었던 그들에게는 예상할 이유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상한 구원은 가짜입니다. 구원받았으면 “나 전에 바짝 마른 뼈였습니다.”라는 고백을 동반해야 하지요. ‘내가 죽었었다’라는 사실을 품을 때 그게 우리 안에 들어오는 십자가의 본 내용이에요.

 

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학부모님들 가운데서 어린 유치원생을 동생으로 가진 어머니들만 나오셔서 50m 달리기합니다. 단 그 어린이를 품에 안고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들 전부다 초등학생의 동생들 품에 안고 달리는데 1등으로 들어온 아줌마가 보니까 자기애를 안고 온 게 아니고 베개를 품고 일등으로 들어오면 그건 상품 없어요. 그것은 청군이고 백군이고 간에 점수 확 깎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것은 ‘내가 죽었다’라는 사실을 품고 달려야 이게 구원의 역동성, 주님의 언약만 살아나는 모습인 거예요. “나 교회 50년 다녔습니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그것은 베개입니다, 베개. 인형 품고 살고 있는 거예요.

 

에스겔이라는 구약의 언약과 연결되어야 해요. 연결되지 않고 끊어진 것은 이방 종교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죠. 영생, 천국 가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는 소문 듣고 그 십자가를 내가 받아들여서 ‘내가 십자가로 살았다’라는 것으로 천국 백성 속에 가만히, 슬그머니 끼어들려는 시도가 교회라는 종교 단체마다 범람하게 된 겁니다. 개인을 위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집단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보면 구원을 누가 받느냐 하면, ‘온 이스라엘’이 받아요, 개인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교인들에게 굉장히 큰 부담을 줍니다. 왜 부담을 주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 십자가 믿는 것은 굉장히 간단한 문제인데, 만약에 ‘집단구원’이 되어 버리면 내 구원도 챙겨야 하고 꼴 보기 싫은 남까지 챙기려고 하니까 이건 뭐 짐을 한 아름 안게 되어 버립니다. ‘그 이론 말고 나만 깔끔하게 천당 가는 이론은 없을까?’ 하고 찾기 마련이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성령께서 역사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없다.” 이렇게 ‘죽은 자’임을 확실히 한 이유는 ‘인자’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개인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창세 전에 아무 인간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구원하는데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예수님을 구원한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예수 안’을 구원해요.

 

예수님이 품을, 예수님이 품게 될…, 예수님이 왕이거든요. 백성이 없을 때, 백성이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품게 될 백성을 창세 전에 이미 정했어요. 정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명단이 발생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3천 명이 죽었죠? 3천 명이 죽고 난 뒤에 “다 멸절하고 나는 모세 너만 건지겠다.”(10절)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여기서 재편합시다.” 한 거예요.

 

재편 제안이 들어와요. 단계를 하나 주는 거예요. ‘애굽에서 건너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다 죽이겠다’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거기다가 모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거기다가 세밀하게 한 단계를 넣읍시다.’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모세 본인 “너는 구원한다”라고 했으니까 “구원받은 나부터 새로 개시되는 명단을 만듭시다.”

 

그 명단이 뭐냐? ‘누구든지 앞으로 모세 말을 듣지 않으면 멸절하든지 다 망하든지 그렇게 하고, 모세 말을 듣는다면 그들만은 모세 말을 들었다는 조건하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개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해요. 하나님은 OK, 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께 그 제안에 동의를 해줬어요.

 

모세의 의견을 들은 게 아닙니다. 이건 애초부터 창세 전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중간에 집어넣는 한 단계가 있는데 모세를 통해서 미리 앞당겨 샘플로 한 과정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출애굽기 32장 32절입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여기 책이 나와요. 명단들이 다 수록되어 있는 단권의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기 등장합니다. 모세는 이 책의 존재를 어떻게 아는가?

 

주님과 함께 40일 동안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이 있고 책의 명단은 창세 전부터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엔 변함이 없다’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벌통, 벌통을 열었을 때 판이 나와요. 꿀벌들이 수집해서 모아놨던 그 꿀이 뚝뚝 떨어지는, 꿀로 흠뻑 범벅이 된 판이 나온다고요. 그 판이 만약에 생명책이라면 그 명단에서 누가 빠지고 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최종 명단이 나올 때까지 ‘누가 빠지고 누가 들어오고’가 역사적 현장 속에서 되풀이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지금은 최종 명단이 누군지를 모르는데 후보감으로 들어갔다가 탈락했다가, 들어갔다가 탈락했다가 하면서 창세 전에 있던 그 최종 명단만 남는 조치에 주께서 어떤 하자나 실패가 없도록 하시는 거예요. 수천 사람이 들락날락하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건 그 시대의 벌통이에요.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시험 한번 없이 세월을 보내면 그걸로 졸업이 됩니까? 그렇게 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요?

 

수시로 뭘 합니까? 시험을 치잖아요. 내신 성적을 위한 시험, 그리고 모의고사 이런 시험을 치면서 “너는 이 대학 못 들어가. 넌 탈락이야.” 이런 식으로 계속 갱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이 대학에 들어갈 최종 명단이 초반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면 수많은 사람이 지원하고 여기 도전을 해도 이 명단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탈락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초반의 문제는 “2+3=?” 이거 대학 시험 문제입니까? 아니죠. 이건 변별력이 없어서 안 되죠. “2+3=5!” 유치원 단계에서는 이것이 되는데 어떤 아이가 이것도 모르고 “2+3=?” “2!” 이렇게 나온다면 그 유치원 아이는 그 꿀 판에서 탈락이에요. 그 꿀 판에서 탈락이기 때문에 “너는 영어유치원에는 못 들어가. 그냥 일반 유치원으로 가!” 이렇게 시험을 통해서 골라내는 작업이 이미 개시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개시된 이것이 어디까지 계속되는가? 이것이 신약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계속 시험을 치는데 그 시험을 주도하는 자가 등장해요. 그 사람이 ‘선’ 씨입니다, ‘선지자’. 모세부터도 선지자지요. 선지자가 계속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누구든지 그 당대에 말하는 선지자의 말을 안 하면 그 시험에서 너는 탈락한다.”

 

그것이 이미 확보된 아무도 알 수 없는 명단에 든 사람만 남기기 위한 거예요. 자, 이럴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겁니다. “목사님, 제 이름은 그 명단에 있습니까? 내 이름이 명단에 있는지 조사해서 미리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땡, 탈락이에요. 그런 것이 궁금한 사람은 땡! 탈락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내가…’라는 개인 자아의 구원, 애초부터 그런 구원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명단이 있다 하니까 갑자기 뭐가 궁금하냐? 그 명단, 생명책 리스트에 내 이름이 있는가가 궁금해 지면서 가만히 잠자고 있던 개인 자아의 욕구가 발동을 한 거예요.

 

누가복음 10장 17-20절을 보겠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자, 귀신을 쫓아내면 그 일을 한 그 사람의 명단이 최종적으로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도 개인적 자격으로 구원될 자아를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이들이 귀신을 쫓아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성령 받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없는 당시의 70명을 이용한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12제자를 이용한 거예요. 그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가룟유다, 귀신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모의고사를 치니까 뭐라고 성급하게 생각했느냐 하면, ‘귀신마저 떨어지니 귀신마저 떨어져 나간 그 집단에 내가 속해 있으니까 곧 나는 완전히 합격 된 자’라는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그 착각들을 본인이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집단구원’이 먼저라는 생각을 못 하고 ‘내 구원이 먼저고 내가 어느 집단에 소속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하는 개인구원에 입각한 논리를 나름대로 펼친 거예요. 여러분, ‘남은 자’는 유일하게 예수님이고 그 남은 자 예수님 외에는 모조리 다 탈락이에요, 모조리 탈락입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예수님도 구원받고 이 사람도 구원받으면 천국 갈 때 이 사람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따로 독자적으로 내 안에 ‘내가 구원받는다’가 되어버리면 예수 안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한 분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그 경로가 없어요.

 

그것은 베개 들고 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십자가, 나무에 달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에 대한 합당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저주의 표상인 나무에 달려 죽는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가 있어야 할 이유는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 저주라는 환경에서 빠져나갈 권한은 없다는 거예요. 일단은 저주받아야 해요. 저주를 안 받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아, 이 이야기를 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흩뿌려진 개인이든 예수님이든 이 환경, 하나님의 율법으로 조성된 환경은 저주 아래, 모든 입을 막아서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함(롬 3:19)입니다. 확실하게 저주로 조성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거기서 예수님만 먼저 빠져나와요. 나머지는 “시므온, 너는 아느냐? 뼈다귀 밟는 소리를!” 이렇게 인간은 전부 다 죽어 있다는 그 말이에요.

 

꼭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야 죽은 것이 아니고요. 교재에 나옵니다. 말씀에서 격리된 것, 떨어진 그것이 죽은 거예요. 교재 6쪽 끝에 있는 마태복음 13장 15-16절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여기에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인간도 그 인간의 마음이 구원받는 마음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구원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고 그것은 죽은 마음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있는 죽은 마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께 말씀을 던지니까 아는 거예요. 호텔에서 음식 나를 때 뚜껑 덮은 채로 끌고 가잖아요. 주님께서 그 저주의 뚜껑에서 유일하게 탈출했어요. 탈출했으니까 구원받은 자아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 예수만 구원했다는 것, 예수님만 구원하면서 그 ‘예수 안’이 퍼집니다. 그 공간이 확장이 돼요.

 

확장이 되면서 예수님 안에 모든 구약 율법이 다 완성이 된 채 있어요. 율법에 이런 것이 있어요. 이사야 42장, 43장에 죽 보면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나의 이스라엘을 반드시 건진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다 망해서 없고,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예언적으로 품고 있고, 예수님이 예언적으로 품고 있는 그 이스라엘을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그 공로를 주게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온 이스라엘’(롬 11:26) 되는 겁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데, 예수님만 구원받는데 ‘예수님 안’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반드시 구원한다는 그 조건이 그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 조건이 새로운 환경으로, 새로운 현실로 확장이 되면 그 ‘온 이스라엘’ 명단에 있는 자들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자기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럴 때 동원되는 것이 뭐냐? 성령이라는 환경이에요. 성령의 환경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구원될 자격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는 조건하에 개인 자격으로 구원되는 것은 전부 다 용납하지 않고 거절한다는 똑같은 조건이 유지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작용을 성령이라는 환경이 하는 겁니다. 그 성령의 환경을 영적 세계라고 하지요.

 

‘예수 안’의 세계, 영적 세계,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에서’ 혹은 ‘십자가 안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자랑을 할 건더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는데, 살리신 분의 공로만 왔을 뿐이지 자기가 뭘 했다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이미 개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용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구원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창세 전에 알았던 이스라엘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령이 왔다? 그러면 뭘 아느냐? 알려줬다는데 뭘 아는 것인가? 모든 말씀은 나 구원받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내게 대한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을 겨냥해서 말씀이 집중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판은 무슨 판이 되는가? 벌통의 꿀 판, 벌통 속에 납작한 판, 꿀로 덮인 판, 그 판은 ‘예수님 안’이 되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꿀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온 그 꿀로만 촉촉하게 이 모든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너 어디서 먹었어?” “주님이 주신 꿀 먹었어.” “너는?” “나도 그 꿀 먹었어.” “그러면 네가 할 것이 뭐가 있는데?” 그러면 꿀 먹은 벙어리가 돼요.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지요, 뭐. 주께서 죽었다가 부활한 그 성령에 대해서 로마서 8장 9-1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익히 알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이겁니다. 먼저 8절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로마서 8장 9-10절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리스도 안의 그 공간이 확장되었으니까요.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너희가 영을 받았다”가 아니라 앞에 뭐가 붙어요. 어디에 있지 않다? 육신에 있지 않아요.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육신에 있지 않다는 말을 제가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내가 나에 대해서 심사하거나 평가할 권리가 이미 나에게는 날아가 버렸어요. 왜? 누가 심사하든 나는 이미 죽은 자니까요. 죽은 자라는 말이지요. 죽은 자니까 나는 마땅히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 내세울 것은 없어요.

 

그런데 죽는 이유가 뭐냐? 죽는 이유가 조상부터 받아온 아담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범죄하지 않아요. 범죄하지 않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위해서 모든 일이 뭐로 나옵니까? 죄로 나오는 거예요. 신났지 뭐요. 죄로 나오는 이유가 방금 전에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여러분이 이제 제대로 아는지 고등학교 1학년 모의고사로 봐봅시다.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이것을 개인적으로, 개인 자아로 가져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한다면 시험 다시 치러야 해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에요. 나의 과제가 아니라고요. 이것은 누구의 과제냐? 예수님의 영의 과제에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과제를 하게 되면 ‘너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율법과 말씀을 대하게 하면서 그래서 우리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우리에게서 죄가 나오고, 그 죄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있던 그 죄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는 육신에 있을 때 나오는 그 죄기 때문에 영에 있을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 된다는 그 말이지요, 하나님 의로!

 

이것은 너무 기분 좋은 이야기라서 내가 지금 구라를 떨고 있는지 여러분이 의심스럽게 보일 정도지요. really? 이게 사실입니까, 이게? 나를 무시할 때는 기분이 좀 나빴는데 무시 정도가 아니고 철저하게 밟으면 밟을수록 그게 성령이 내 안에 살아있다는 증거로 작동한다면, 작용한다면 어떻게 십자가만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합니까?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계속돼요,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입니다. 십자가는 개인용도는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 구원’도 없습니다. ‘집단 구원’이에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너 성령 받았어?” “나 성령 안 받았어.” 이러한 비교는 성립이 안 됩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 명절 설이 오면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예쁜 옷들을 사줬어요. 그때는 할아버지가 왕초고 할아버지가 돈을 다 쥐고 있어서 아버지는 돈도 없어요.

 

그러면 먼저 새 옷을 받고,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았어요. 그런데 먼저 돈을 받은 삼촌들은 형들은 어린 조카나 동생들한테 자랑들을 해요. “너 세뱃돈 받았어?” 이런다고요. 그걸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이 “너 성령 받았어? 나 받았어. 너는 못 받았지롱~”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게 성립이 안 돼요. 그것은 개별적이라 성립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나이와 성별은 다 달라도 세뱃돈은 같고. 똑같이 줘요. 물론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삼촌에게 천 원 줬다면 우리에게는 5십 원 줬어요. 20분의 1, 그 정도 된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면서 포도원의 인부 뽑을 때 사람들이 상상도 못 했어요. 똑같이 줄지를 상상을 못 했어요. 어떻게 일하든 똑같이 줄지를 사전에 알았으면 삐져서 일하러 안 갔을 거예요. 왜? 그 포도원에서는 개인 자아가 돋보이지 않는 거예요. 개인의 노동력, 내가 한 노동력이 돋보이지 않는 세계 같으면 사람들은 원하지 않아요.

 

내가 돋보여야, 죽어도 내가 잘나야 그것을 천국이라고 간주하고 가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이라고 해놓고 놀고 있는 사람들 불러다 아침에 온 사람, 오후에 온 사람, 마지막에는 한 시간만 근무하고 퇴근하는 사람을 불러서 똑같이 줬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삐졌느냐? 처음부터 아침에 온 사람 불러서 조용히 한 데나리온 주면서, 누가 행여 볼까 싶어서 “빨리 가, 가! 네 집으로 가!” 이러면 그 사람은 “고맙습니다!” 하고 갔을 거예요. 삐짐이 없다는 그 말이에요. 생명책에서의 탈락이 없어요. “고맙습니다”하고 가면 되는데 제일 끝에 온 사람에게 일당을 줄 때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 다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 얼마 받았어?” 하고 보니까 이게 천국인지 뭔지 그다음부터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주인이 뭐라고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5절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즉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주는데 내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요 19:30). 이게 제가 이야기한 겁니다. 이 세상은 거짓이라는 그 거짓 자체를 들추지 아니하면 천국의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은 전부 다, 천국 가겠다는 그것도 거짓되고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개인적으로 발산할 뿐이지요.

 

이제 고린도전서 1장의 십자가를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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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6강-고린도전서: 성령과 십자가

 

- 이 근호 목사

 

 

6강 시작합니다. 이제 돌고 돌아서 고린도전서 1장에 왔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고린도전서 1장 2절 보면 비로소 내용이 확 와닿지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어떤 영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3차원 공간 속에 동그란 구형의 물체가 있어요. 현재 눈에 보이는 공간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서 그 안에서 격투를 벌이는 영화입니다.

 

다른 차원이 기존 차원의 장소를 점유하는 것, 이것이 ‘중첩’이지요, 차원의 중첩.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일반사람들이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 데 여기에 ‘예수 안’이라는 다른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 이것을 고린도전서 1장 2장에서는 ‘교회’라고 하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해요.

 

몸, 몸이라는 것은 기존의 육신을 바탕으로 해야 그것을 몸이라고 규정하는데 이 몸은 예수님의 부활체에 근거해서 확장되어 나온 몸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이 몸이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라는 말을 하면 안 되고요, 출발점을 ‘과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했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면 하늘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가 친히 부활시켰거든요. 석가모니나 다른 위대한 성자나 성인 이런 사람들은 부활시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창세 전에 계약된 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존재들 중심으로는 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죽었다가 부활해야 해요. 부활해서 중첩된 공간,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계를 기존의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다 엎어버렸지요. 엎어버리니까 편지는 누구한테 날아가는가? 기존의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날아갑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듣기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지요. 기존 개념은 이 세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기존 개념을 배척하는 개념들이에요. 그래서 신학들이 여기서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그다음의 단어가 중요해요. 뭡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들” 수동형이지요. “성도라고 해주세요”라고 요청한 적 없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조치로서 성도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란 구별된 다른 세계, 또는 다른 차원에 속한 자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게 구약에 있어서는 애굽과 차이 나는 이스라엘입니다. 언약이 있는 민족인 이스라엘과 언약이 없는 애굽과의 차이, 그 틈, 그 사이를 ‘거룩’이라 하는 겁니다. 그 거룩으로 인하여 구분되는 겁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거룩이 그 틈에서 나오는가 하면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둘 다 뭘 로 장착되어 있느냐 하면, 선악 사고, 선악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선악 체계를 피하면서 거룩은 거룩대로 챙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 선악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착하게 살면 어디에 간다고 했어요? 착하게 살겠다는 그 의식이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른다면 지옥 갈 수밖에 없지요. 착하게 사는 것은 자기 취미기 때문에, 성격이기 때문에 그대로 가는데 그 착함이 더 착함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려요. 자기 동네에서는 착한데 다른 동네에 가면 안착해요. 제주도에서는 “폭삭 속았수다!”가 되는데 다른 동네 가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아요.

 

새로운 환경에서는 모든 조건이 재편되듯이 예수 안에서 요구하는 조건 안에서 이들은 강제로 재편되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버린 겁니다. 어떻게? 개인적으로? 아니지요. 집단적으로, 집단적으로 성도라 했어요. 여기서 개인적으로 “나는 거룩하다”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그 집단에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자꾸 개인은 안 되고 집단인가? 이미 인간 환경 자체가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집단속에 있었습니다. 집단 속에서 지배를 받았는데 그 집단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는 “이 세대의 관원”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정치적 통제를 의식하는 것, 그게 인간세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되어 있어요.

 

권세라 하는 것은 power, 힘이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힘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참 신기한 일이에요. 너와 나 사이에 아무리 봐도 뭐가 없어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으면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요. 물리적으로 공간이 떨어져 있으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되는데 저쪽에서 “어이!”하고 부르니까 “예이!” 하고 달려가더라는 말이지요.

 

도대체 이 사이에 뭐가 있는데, 뭐가 있기에? 저쪽에서 부르면 내가 달려가야 하는 그 이유가 뭐지? 여러분이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힘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이미 물리학에서 밝혔어요. 필드(field), 어떤 장(場)이 형성되어 있어요.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말한 그 장(場)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역선(力線), 힘의 선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물리학에서는 이미 공간은 없어요. 공간은 없고 입자들의 관계, 그 관계망이 공간이 되는 거예요. 입자들의 관계망입니다. 입자들, 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입자를 분류할 때마다 거기에 뭐가 하나씩 끼어듭니까? 흩어져 있는 자아가 관찰자로 관계를 맺게 되지요.

 

이 관계, 보이지 않는 것, 여기서 ‘있다’가 둘로 나눠집니다. 1. 있다는 것은 장(場), 필드(field)가 있다, 영역이 있다. 2. 입자가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먼저냐? 장(場), 영역이 먼저입니다.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동생을 죽일 때 보이지 않는 힘이 덮쳤어요.

 

형이 평소처럼 동생과 대화하면 될 텐데 악한 기운이 덮치니까 갑자기 성질이 확 올라오면서 ‘죽여버려야 하겠다.’ 죽이는 그 이유가 “하나님하고 관련된 동생이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내 제사는 안 받았기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다.” “왜 참을 수 없는가?” “누가 뒤에서 시키더라” “누가?” “몰라.”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요. 이미 권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권세가 시키는 대로 그냥 그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이런 보이지 않는 권세가 히브리서 2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권세의 정체가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자,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혈육’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눈에 보이지요. 혈육은 눈에 보여요. 몸무게 재고 키도 재고 하잖아요. “얼마나 컸느냐?” 하면서. 눈에 보이지요. ‘사망’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사망의 세력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마귀’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기독교 성경 자체가 거짓말이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서 없는 데 왜 있다고 하느냐?’

 

그러면 히브리서 2장 15절을 봅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강도가 “돈 내놓을래, 나한테 죽어볼래?” 할 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뭔가 힘을 느끼지요. ‘아, 돈 안 내면 저 인간이 나를 죽이겠구나’ 느끼지요. 이게 뭐라고요? 이게 무서움이라고요, 무서움.

 

왜 무섭지요? 죽는 게 무섭지요, 죽는 게 무서워요. 철학에서 그리고 다른 종교, 불교에서는 이 죽는 것이 최고의 난제인 것을 알고 나름대로 대책을 내놓아요. “죽기 전에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괜찮고, 죽고 나서는 죽은 것을 모르기에 안 무섭다.” 이런 논리를 내놓는데 이것은 인간을 입자로 보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을 무섭게 하는 그 힘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죽음에 대한 무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뭡니까? 죽음이 힘이거든요. 죽음이 힘인데 죽기를 싫어하니까 더 큰 힘에 의존하면 되겠지요. 그 더 큰 힘이 뭐냐?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새 대통령입니다. 큰 정치적 힘 아닙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을 때 베드로에게 위협을 가한 것은 누구냐 하면, 같이 모닥불을 쬐던 소녀였어요. 그 소녀가 살짝 가서 조용히 “아저씨! 아저씨도 저 예수님과 한패인데.” 이 정도만 했어도 베드로가 피신 안 했습니다. 조용하게 다가가서 “아저씨, 아저씨도 한패지요?” 이렇게 했으면 겁을 안 냈어요.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 다 듣도록 “저 사람은 예수와 한패다!” “쉿! 너 그 입 안다물거야?” “맞는데요!” 하니까 베드로가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닭은 닭대로 또 울지요. 베드로가 울었던 이유가 이 세상 권세를 의식해서 주님을 배신할 정도로 어두움의 권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신세가 상당히 서글펐던 겁니다. 상당히 자조적인 거예요.

 

<나는 반딧불> (황가람, 2024)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얼마나 서글픈 노래입니까? 슬픈 노래 리스트에 포함될 거예요. 자기 처신이 서글픈 거예요. 나는 별이 되고 싶었는데 어떤 보이지 않는 권세 때문에 내가 반딧불밖에 안 되게 하는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어딜 봐도 규명하지를 못합니다. ‘그냥 나 하나 허무하게 살면 되지 뭐. 나 하나 죽었다 치고 살면 되지.’ 자꾸 자기 속으로, 내부로 응축이 되는 겁니다.

 

자, 인간은 작은 입자지만 그 위에 하나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전자, 원자핵이 다 입자에요. 입자지만 그 가운데 빈공간이 있음에도 칼이 잘 안 들어가는 이유가 에너지의 장(場)이 그 빈공간을 꽉 채우고 있어서 거기에 강력한 에너지가 있다고 설명하거든요. 에너지는 파동으로 물결치고 그 파동 속에서 입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연적으로, 확률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이야기들 해요.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증명사진 찍듯이 찰칵 찍어서 ‘나 저기 있다’라고 하면 안 되고 예를 들어 증명사진을 찍을 때 무엇도 같이 나와야 하는가? 만화에 보면 머리 위로 풀풀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시커먼 연기, “어머! 무서워라.” 시커먼 연기, 검은 기운이 같이 나와야지요. 여기서 파묘(破墓) 한번 할까요? 무덤을 파봐야 할까요?

 

인간의 세계는 참으로 공포스럽습니다. 그런데 공포를 못 느끼는 것은 뭐냐? 권세에 굴종하고 복종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세계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뒤따라서 감으로써 우리는 그 공포를 줄이고 있습니다. 힘이 있는 곳에서 공포를 줄일 수 있는 처세술로 버티면서 결국 남는 것은 ‘나만 살면 되잖아요.’ 그런 식이지요.

 

다시 고린도전서 2장으로 돌아와서 십자가가 뭐냐? 이제 십자가가 나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이 십자가는 어떤 개인적인 역량,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십자가를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개인은 용납하지 않아요. 집단적인 거예요. 그 집단을 구성하는 권세, 그동안 우리를 어두운 기운으로 압박했던 그 권세를 뚫는 데 성공하신 그 성령의, 죽은 자가 부활하는 그 부활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알려주기 때문에 십자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수동적입니다. 본인이 십자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지요. 어떤 결과에 의해서 이렇게 부르심을 받았느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이든 어떤 신이든 간에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코 앞에 있는 인간 대 인간들로 구성된 권세보다 더 센 권세가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싶고,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눈치 보면서 조심스럽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흩뿌려진 개인의, 자아의 처세술이었습니다.

 

개인의 자아가 그렇게 약하다면 집단으로 모여서 항거하면 되지 않느냐? 회사에 모여서 “일요일은 쉬게 하라! 일요일은 교회 가게 하라!” 이렇게 하면 그것은 집단입니까? 왜 그것은 안 되느냐, 그것은 왜 실패로 끝나는가 하면 그것은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부르심을 입은 자가 세상 권세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궁금해요? 궁금하면 알려드려야지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4장에 나옵니다. 9-13절에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쓰레기) 같이 되었도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제시한, 사도에게 주어진 사도의 처세술입니다. “좋은 것 다 해라. 우리는 남들이 기피하는 것 할게.” 왜? 주님이 이 모습으로 살아가셨기 때문에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왜 사도와 그 일행에게는 이런 비참한 삶이 허용되는가? 사도가 십자가에 더 근접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권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기능이 어떤 기능이냐, 십자가에 힘없이 맥없이 돌아가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의 그 기능에 근접한 자, 사도에 근접한 자들에게는 주님과 유사한 기능으로 다른 일반인들에게 다가서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공식 하나 만들면 이렇습니다. 시간이 구약 쪽에서 신약 쪽으로 흐른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예수님만 계시다. 예수님 안에 뭘 품고 있다? 이스라엘을 품고 있다. 이스라엘을 품고 있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했는가? 제자 몇 명? 열두 명이 나와요. 열두 명이 뭐가 되는가? 사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하나는 가룟 유다, 사탄이잖아요. 사탄은 빼고 가실 게요, 해서 빼버리고 맛디아를 집어넣고 12라는 숫자가 되고 난 뒤에 하늘에서 뭐가 오느냐? 예수님의 영, 성령이 와버려요. 예수님에게 있던 성령이 열 둘에게 임하고, 열 둘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다음부터는 또 많은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이 성령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지상에 있던 그 예수님에게서 성령이 나왔기 때문에 성령은 다시 전부 어디로 귀속합니까? 예수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함으로써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말씀을 줬다는 그 코스를 밟고 예수 안으로 귀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권세가 끝까지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고 ‘너 그러면 망한다’라고 자꾸 협박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그 권세가. 우리는 그 권세의 장(場)에 놓여 있고요.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믿음직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고생 없게 하면 되잖아요. 탄탄대로 가게 하면 되잖아요. 탄탄대로 가게 되면 예수님이 겪었던 것, 세상 권세가 확실히 존재하고 예수님이 갖고 있던 아버지의 권세가 기존의 권세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공동 체험이 되지를 않아요. 세상의 똑같은 어두운 권세 속에 있다면 주님의 권세가 어떻게 그 속에서 길을 내었는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길은 인간의 세상 권세에 의해서 늘 막혀 있어요. 세상 권세가 “자, 천국 가세요”라고 열어주지를 않습니다. 항상 막혀 있고 또 뒤따라오고 그래요.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미 예수 안에 있는데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바깥에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던 그 권세가 그리스도 몸인 성도한테 실제적인 현실로 경험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 자체가 뭐가 되는가? 천국 가는 길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성도가 구원의 환경을 몰고 다닌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홍해는 건너는 것이 아니라 ‘홍해를 짊어진다’라고 했지요. 홍해를 짊어지고 가야 해요. 홍해를 건너버리면 안 돼요. 홍해와 함께 가야 해요. 왜? 그 안에서 여호와가 용사가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도가 구원의 환경을 몰고 가는 거예요. 시험을 당할 때 빠져나온다. 그러면 빠져나왔는지 아니면 지금 시험 자체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15-16절에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주께서 어디로 인도합니까? 십자가 사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사건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이 지상의 시공간에서 해프닝이니까 있다가 없어졌어요. 남들에게는 있다가 없어졌는데 성도한테는 이것이 자꾸 사건화되면서 그 현장에 나타나요. 나타나면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유도하느냐? “이 난관을 네 신앙으로 이길래, 그냥 안 이길래?”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네 믿음과 소망과 기도발로 이겨볼래, 아니면 안 이길래?” “나 안 이길래” 그러면 거기서 길이 되는 거지요. 굉장히 쉽지요. 굉장히 쉬워요. 괜히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나대지 말라. 나서지 말라.

 

왜냐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어떤 난관이 왔을 때는 십자가에서 눈을 돌려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조성하려고 자기 능력을 동원하는 이것은 시험에 홀딱 빠진 거예요. 마귀 나라에서 좋~다고 춤을 출 겁니다. 또 하나 걸려들었다고.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이렇게 해서 그다음부터는 절기와 관련되어서 이스라엘의 연속성, 구약의 절기와 신약의 성만찬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여기에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귀신이 등장합니다. 아니 무당도 아니고 누가 귀신하고 교제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환경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주체, 귀신, 악마가 배후에서 부추기는 환경이라는 것을 성도가 시험받으면서 전체 윤곽이 그 순간에 파악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 봅시다. 24-26절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뭘 전한다고요? 주님의 죽으심, 특별한 분의 특별한 죽으심이 천국 가는 유일한 입구가 된다는 겁니다. 입구가 되면서 이 세상을 탈출하는 탈출구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출몰하는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 사건에 자력으로 접근이 안 됩니다. 사건은 없어요. 없지만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낯선 환경을 계속해서 일으킵니다.

 

일으키면서 다시 한번 묻는 것은 이겁니다. “네 힘으로 이 사태를 이겨볼래? 아니면 그냥 나 무능합니다, 하고 내팽개칠래? 어느 쪽 할래?” 할 때 “내 힘으로 해보겠습니다” 하면 그것은 시험을 이긴 것이 아니고 시험에 옴팍 빠진 것이 돼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9) 그 영화에 보면 마리아가 수도원을 떠나서 트랩 대령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기 전에 수도원장이 세상살이가 힘든 것에 대해서 당부하는 내용이 나와요.

 

마리아(Julie Andrews)가 하는 말이 “제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할 때 이 말씀을 줘요. “어디에 가든 네가 답답하고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창문을 열어서 탈출하게 한다.” 그래서 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탈출해서 미국 가서 합창단 이끌었습니까? 지금 그 이야기 아니에요. 그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지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어요. 무슨 생존에 관한 겁니까? 그게 아니고 이거예요. 개별 구원, 이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요구한 거지요. “개별 구원받아라. 죽어서 좋은 데 가야지.” 이런 ‘개별 구원이냐 아니면 예수 안의 구원이냐?’를 두고 시험이 올 때 그 개별 구원부터 벗어나서 주님이 나 개별자를 대체하고 있다는, 나 개인이 하고 있던 것을 주님이 지금 대신하고 있다는 그 공동 체험으로 나갈 때 이게 바로 피할 길을 주신 거예요.

 

십자가의 그 죽으심으로 더 이상 내가 할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새록새록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거예요. 참 아무것도 안 하기가 굉장히 힘이 들어요. 이제 남은 시간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저녁 먹으러 갑시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한 사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 데 있어요. 구약 역사에 나옵니다. 구약 모의고사 출제 문제가 있어요. 두 가지가 있는데 왕과 선지자. 왕은 뭔가 하는 자에요. 왕의 특징은 뭐냐? 권세자에요. 권세자는 백성을 자기 권세 아래 모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선지자는 어떻게 되느냐?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한다. “그래도 말씀을 외쳤잖아요.” 하는데 그것은 시키는 대로 했지요. 수동적이에요. 아무것도 안 해요. 약간 복잡하더라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1장 23-25절을 봅시다. 이 기쁜 소식을 우리가 그냥 모르고 지나갈 수는 없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장로 70명에게 뭐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했지요. 신이 임하니까 그 70명 외에 다른 사람이 삐졌어요. “모세만 선지자인데 왜 저들에게도 성신이 왔느냐?” 하고 삐지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민수기 11장 29절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즉 “아무것도 안 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게 백성이 조건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나와 같은 선지자’가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 설교의 핵심 부분으로 등장합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선지자를 너희에게 주겠다. 왜? 이스라엘 자체가 권세의 모임이 되어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된다고 하는 그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그렇게 죽이니까 주님께서 그를 살리시는데 뭔가 해야 된다고 여겼던 자들이 사도행전 7장에서 뭘 만들었느냐 하면 성전을 만들었어요.

 

사도행전 7장 48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손으로 지었다는 것은 뭔가 가 했다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한 곳에서 하나님이 피해버립니다. 뭔가 했다는 업적을 남기는 것,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 “…선지자의 말한바” 또 선지자의 말이 나와요. 선지자라 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고 뭔가 하는 것, 그런 것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받지를 않아요.

 

예레미야 23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그 당시의 선지자가 두 종류 있었습니다. 선지학교 출신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입니다. 물론 선지학교 출신 선지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도 있어요. 엘리사같은 경우처럼 있는데 어쨌든 하늘나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탈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위에서 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위에서 하나님의 성신이 안 오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들끼리 선지학교 만들어서 빡세게 기도해서 룰루랄라 방언하면서 응답받은 척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그들은 권세를 인정해요. 기존 국가의 안정적인 권세, 이스라엘의 권세가 안정적으로 있어야 할 이유가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뭔가를 하는 왕의 이야기고 그것을 완전히 두 동강 내는 선지자는 그들의 권세에 입각한 주장들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 빼놓고 다 멸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예레미야 23장 25-26절에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이게 오늘날 ‘진짜 성도냐, 가짜 성도냐?’ 하는 판정도 되는 데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 받은 자는 진짜 성도에요. 맞지요. 그런데 가짜 성도가 ‘진짜 성도는 성령 받은 성도’라고 우기면 그것은 가짜입니까? 그게 가짜일까요? 예레미야에 의하면 성령의 특징은 내 속에 있는 죄와 거짓된 것을 들춰내는 기능과 함께 성령이 임합니다.

 

무슨 뜻이냐? “내 깨끗한 마음에 성령이 왔기에 이제부터 깨끗한 마음만 나오고 유지된다.”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 이것은 백프로 가짜입니다. “성령이 왔을 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지저분한 일이 내 속에서 다 까발려지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이렇게 나올 때 그 사람은 절대로 성령 받음을 두고 자기 존재의 개인적 자아를 자랑할 수가 없지요. 자랑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까지 장담했는데도 이 소리 듣고 이렇게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가짜가 하는 말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안 나온다’라고 해서 또 성령 받은 척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문제에요. 예레미야 23장 32절을 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백성을 미혹하게 했다는 말은 힘을 모았다는 말입니다. 힘을 모으고 그 힘의 중심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간다? 세상으로부터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가요, 십자가의 공로.

 

이제 고린도전서로 가 봅시다. ‘죄만 나오는 것이 진짜 성령’이라고 이야기하는 가짜 선지자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마귀도 성경을 이용하는 것처럼 성경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AI 아나운서처럼 성경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이고 진짜 백성이라고 하는 것, 집단을 언급해야 할 것을 특정 개인에게 주목해서 언급하는 것은 수상합니다.

 

어느 목사는 진짜고 어느 선지자는 진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 때 일이고, 신약 때는 성령이 집단화되어 있어요. 오순절 날 집단화되어 있어요. 베드로도 성령 받았고 요한도 성령받았지요. 가짜 영을 받은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 중에 누가 더 셉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또 사도 바울과 견줘서 누가 더 셉니까 하는 거기에 사도바울이 화가 나 버린 거예요. “나 십자가 안 졌다”라는 거예요. “나 십자가 안 졌다.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없는데 그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이용한다면 이게 꼭 나에게만 국한되는 일이겠느냐? 나 말고라도 주께서 이용하는 형제들이 있다.”

 

공통점이 뭐냐? 그 공통점이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아까 7절 했지요? 9절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저는 고린도전서 2장 9절을 통해서 느낀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이단이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모든 신학자에요. 신학교 교수들이 이단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기존의 신학교에서는 자꾸 인간의 마음을 유사 성령 받은 사람으로 조작하는 그러한 수업을 하더라는 그 말이지요.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부추긴 거예요. 제가 총신 신학교 때 교수라는 사람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했느냐 하면 가나안 농군학교에 데려갔어요. 가나안 농군학교와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건 농사짓는 거예요. 약속의 땅을 일궜다는 그 김진홍 목사 따라가라는 그런 식인가요? 김진홍 목사가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지요. 저는 십자가 졌습니까? 진 적 없어요. 여러분은 십자가 졌습니까? 안 졌어요. 십자가 지신분은 오직 주님 하나로 끝났어요. 왜냐?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기 때문에.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뭐가 방해됩니까? “나도 얼추 신앙인이고 나도 얼추 성령 받은 티 난다고 좀 이야기해 줘.” 이게 바로 방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부터 쳐내는 일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그 쳐내는 일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 그게 왜 은혜냐 하면 인간의 마음으로는 접근이 불가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오직 성령으로 나타나는데 성령이 뭘 하느냐? 하나님의 깊은 곳에서 뽑아냅니다.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 안에 우물이 있는데 사람은 물을 못 길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으샤, 하면서 하나님의 제일 중앙, 제일 깊숙한 곳을 퍼내서 그것을 은혜로 명단에 있는 자기 백성이 될 사람에게만 성령을 줘버립니다.

 

그러면 그 성령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그 영이 무슨 영이냐 하면 십자가의 영이에요. 십자가의 영이고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약속한 것이 일점일획도 완전히 다 이룬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이 다 이뤘기 때문에 내가 할 게 없어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말을 하지 마시고 ‘내가 십자가 지지 않은 자로서 주님에게 쓰일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주여, 어떻게 저를 쓰실 겁니까?” 주께서 “입 다물어. 너는 그걸 요구할 자격도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수박 먹으라 하면 수박 먹고, 비빔밥 먹으라 하면 비빔밥 먹고, 저녁 식사로 뭐가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고, 내가 주는 대로 먹고 감사하면 돼. 쓸데없이 네가 나대지 마.” 그것은 교만이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12절 다시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세상의 영은 악령이지요.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데 그 아는 방법은 내가 행함으로 얻었다는 그것을 제끼고, 그걸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계시기에 주어지는 은혜만 오롯이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 과정속에서 내 행한 것이 작살나는 그것이 슬픔이 아니고 참으로 영광스럽고 기쁨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겠지요.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그 다음에 14절부터 골치 아픈 것이 나와요.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 때문에.

 

「삼분설」, 「영에 속한 사람」 이런 책들 얼마나 많이 팔렸습니까, 막 찍어내서. 「열두 광주리」 아이고~! 그의 제자 ‘위트니스 리’(Witness Lee, 1905-1997)까지. 지방교회죠, 워치만 니, 여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뭘 추구하느냐?

 

개별 자아가 부정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에서 성경 QT와 결합이 되니까 내가 지금은 미흡한 나지만 완전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지방교회 교인으로 끌어당겼고, 그 당긴 그것이 구원파 쪽으로 나오면서 이단이 새로운 이단을 낳은 겁니다. 이게 다 어설픈 이단인데요.

 

기존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이단들이 뭐 하나를 부정을 못하느냐 하면, ‘나 예수 믿고 천당 간다’ 이걸 부정을 못 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그런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집단 구원’이지 ‘개인 구원’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육에 속한 사람이 성경 말씀과 결합이 되면 개인을 계속 살리는 겁니다.

 

개인을 계속 살리면서 개인이 살아있다 보니 십자가의 능력이…, 십자가가 앞에 이렇게 보이지요. 그러면 십자가의 능력에서 나로부터 시작해서 뭘 뽑아낼 것인가, 그것을 계속 연구하는 겁니다. 이 전제가 어떤 전제냐? 절대로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여, 나를 지옥 보내지 마옵소서.” “딱 걸렸어, 너! 처음부터 너는 지옥 사람이었어.”

 

지옥 사람이니까 마귀의 본색을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주여, 어떤 경우라도 저를 지옥 보내지 마옵소서.” 그래서 “나는 목사 되기 전에 이렇게 구원받았으니까 여러분도 나와 같은 체험을 하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 하나 뚝딱 만들어졌지요. 그런 식으로 또 교회가 만들어진 거예요.

 

이제 시간이 되어서 강의를 끝내야 하는데 인상들이 좋지가 않아서 어떻게 이걸 마무리해야 할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어른에서 자아가 없는 어린아이로 바꾸시는데 그 바꾸는 방법이 십자가의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린아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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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7강-고린도전서: 여자와 남자

 

- 이 근호 목사

 

 

지금부터 일곱 번째 강의를 하겠습니다. 일곱 번째 강의는 고린도전서 11장부터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 나와 있습니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렇게 되어있죠.

 

그것을 보기 전에 먼저 전제가 있는데, 그 전제가 상당히 중요해요. 전제가 고린도전서 2장 2절입니다. 2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 대목이 나오죠.

 

그럼 이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면 2장 이후의 편지 내용은 없어야 마땅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그럼 그 뒤에 3장, 4장 내용은 알지 않기로 한 그 내용에 포함될 거냐, 말거냐가 관건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말은 ‘십자가 외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 이런 뜻이거든요. ‘십자가 외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 알면 너 다친다.’ 뭐 그런 거죠. 십자가 외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는 말은 만약에 십자가 외에 우리가 알아버리면 그 안 것이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과 고통을 제공합니다.

 

너희들이 살면서 내가 분명히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한다고 말했어, 안했어? 했잖아! 그런데 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려고 하느냐?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 너에게 걱정과 근심과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걱정과 근심은 십자가 외에 쓰잘데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에요. 애가 공부를 잘하니 못하니, 수입이 이것밖에 안되니,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상담하면, “하나님, 상담 좀 합시다. 이 걱정과 근심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하게 나무라면서 “너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분명히 뭐랬어? 네 살림살이, 가게문제, 애 걱정 그런 거 내가 알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예수님과 십자가 못 박힌 것 알면 끝나는데 알아서는 안 되는 걸 네가 끌고 왔으니까 너한테 그런 걱정과 근심과 고통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냐? 왜 말을 그렇게 지독하게 안 들어?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은 몰라야 된다고 얘기했어, 안했어? 했지? 이제 와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 가지고 상담하지 마! 네가 잘못해놓고 왜 나한테 그러느냐?”

 

십자가 외에 나의 장래는 어떻고 내가 취직하고 어떻게 생활하게 되고 그런 것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알지 않아야 될 것에 해당됩니다. 삭제하고 가위로 잘라버리고 몰라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는 1장, 2장 초반으로 끝나야 돼요. 편지에 3장, 4장이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나쁜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이, 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끝! 그런데 2장, 3장은 왜 있냐? 2장 2절로 끝나야 되는데 2장 3절, 4절 이게 왜 있냐 이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과 그 죽으심을 삽입하는 과정이에요. 삽입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계속 묻는 거예요. 삽입된 환경은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예수님과 그 십자가 죽으심 외에 어디에 발자국을 남기는지 주시하는 그것이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내용을 계속해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거죠. 십자가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보라는 거예요.

 

씨름이 한판 끝나고 난 뒤에 주최 측 관리요원이 밀대 비슷한 걸로 모래 미는 것 있잖아요. 모래 미는 것을 가지고 와서 방금 두 선수가 치열하게 싸워서 들어가고 나오고 엉망인 모래상태를 평탄하게 고르죠. 고르고 난 뒤에 “자, 다음 판!” 싹 고르게 해놓고 다음 판 한다고요, 고르게 해놓고.

 

그러니까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 능력으로 우리 인생판을 평평한 모래판처럼 쫙 밀어버린다는 거예요. 사적이고 개인적인 고민, 걱정 그런 것은 쫙 밀어버리고 다시 십자가 자국만 거기 박혀있기를. 그렇게 해서 인생 살아가면서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우리 인생을 통해 절로 나오도록 그런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2장 다음에 3장, 4장 있더라도 모순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 안에 어떻게 박히는가? 이번 제7강에서는 11장을 하겠습니다. 어떻게 박히는가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이렇게 적혀있단 말이죠.

 

여기 11장에서 파악할 것은 우리가 아까 본 고린도전서 2장 2절과 관련해서 파악하면 되겠죠. ‘이게 무슨 삽입된 십자가냐? 십자가가 무슨 이런 십자가가 다 있냐? 십자가인데, 남녀는 이렇게 서열화 되어 있고 여자는 이렇게 해야 되고. 남자가 여자처럼 여자가 남자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차별화시키는 것과 십자가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런 해석이 딱 튀어나와야 되는 거예요.

 

괜히 2장 2절 잊어버리고 ‘봐, 성경에 보면 남자가 머리를 길어서는 안 되고 여자가 머리를 기르라 했잖아.’ 그러면 교회 오면서 장발로 머리 펄펄 날리면서 가끔은 머리카락 제켜서 눈에 보이도록 넘기는 것, 그런 거 해놓고 나는 주의 말씀대로 고린도전서 11장대로 ‘나는 머리 안 깎았다’, 또는 ‘깎았다’, ‘여자가 왜 머리 깎으러 왔어? 이것은 11장에 어긋나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지금 십자가와 관련 없는 쓰잘데 없는 것으로 시비 걸고 있는 거예요.

 

“당신 여잔데 왜 머리를 이렇게 짧게 깎았어?”하면 그땐 이렇게 하세요. “고린도 전서 2장 2절,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그게 8절에 나옵니다. 7절부터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취지로 무슨 뜻에서 여기 남자가 나오고 여자가 나오고 그다음에 천사까지 동원하느냐 그 말이죠. 이제 그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사도 바울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느냐? 이것부터 해야 돼요. 창세기에 남자, 여자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적을게요. ‘남자, 여자를 누가 창조했습니까?’라는 질문이 창세기에 성립되죠? ‘남자, 여자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성립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창세기가 신약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버리면 이 질문이 아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 여자를 누가 낳았습니까?’ 누가 낳았냐? 남자, 여자를 누가 낳았습니까? 정답은 ‘복음이 남자, 여자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복음이 남자, 여자를 낳았습니다.

 

역사적으로서는 창세기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역사가 흘러서 신약이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한 계시는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 원천을 찾아가는 식이 되어버려요. 처음부터 감추었던 비밀이 나타났으니까 감추었던 비밀이 나타난 그 시점부터 창세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 원천과 창세기에 나타난 그 사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파악해야 된다는 겁니다. 감추었던 것이 나타난 것은 그건 나타나기 전부터 애초에 이미 선재해서 있었다는 이야기거든요. 선재한 것이. 뭔가 창세기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고 원래 있었는데 안 나타났을 뿐이었던 거예요.

 

남자가 뭐냐, 여자가 뭐냐. 창세기를 바라보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수학시간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 수학시간에 가면 ‘1톤은 몇 kg이냐?’, ‘1000kg×10은 몇 kg?’ 이게 초등학교 1학년한테는 상당히 어려워요. 어려운데 물론 선행학습하면 또 돼요. 강남에서 하면 되는데, 중학교 3학년 되면 그것은 시시한 문제인 거예요. 시시한 문제에요.

 

“아담과 하와는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 이스라엘 모의고사에서는 이건 문제도 아니에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라고 해서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왜? 원천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약의 이미 준비된 원천과 결합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냥 조금씩 아는 것에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지식을 쌓고 모으는데 그 모의고사 시험을 쳤던 자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들은 다 천국에 못 갔습니다. 전부다 실패했습니다. 열심히 시험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인간의 본성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차이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주님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다 탈락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 소속이 어딥니까? 어느 민족 소속입니까? 다윗 자손이죠. 다윗은 어느 소속이냐? 유다지파. 예수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속해요. 열두 지파가 왔는데 합격자는 달랑 한 명. 남은 자는 단 한 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의고사 치고 정시 다 쳐도 소용없이 탈락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건 아까 강의했어요. 원천되는 예수님부터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그것은 창조가 아니고 낳으면 돼요. 아담, 하와를 새롭게 낳으면 됩니다.

 

참고로 이야기해서 고린도전서 4장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으로 있던 것은 예수님 당시의 모의고사였습니다. “너희 제자들, 나를 따를 거냐, 안 따를 거냐?” “죽기까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탈락! 베드로 탈락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 거예요. 그 당시 모의고사에 의하면 제자는 스승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쳐야 되는 것이 당시 유대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속에서 펼쳤던 모의고사였어요. 원천이 아니었어요. 원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복음이 남자와 여자를 낳아요. 아들, 딸을 낳은 게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낳아요. 아들, 딸이 아닙니다. 아들, 딸을 낳는 것은 기존의 첫 아담, 남자와 여자가 자식, 아들과 딸을 낳는데 이건 모의고사에 지나지 않아요. 모의고사고 예수님이 낳는 것은 아들, 딸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낳아요.

 

이 차이점을 아셔야 돼요. 아들과 딸을 낳게 되면 그다음 결혼해서 얘들이 다른 남자, 여자 만나서 아들, 딸 낳잖아요. 이것은 자기 족보에 그냥 갇힌 꼴이 돼요. 그러나 남자, 여자를 낳아버리면 이것은 복음이 살아있는 한 원천에 의해서 계속해서 무엇이 반복되느냐? 창세기 사건이 반복돼요. 창세기 사건이 반복됩니다.

 

창세기 사건에 나왔던 그때 주연배우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 계셨고 뱀 있었고 그다음에 남자 있었고 여자 있었고. 끝이죠, 창세기 3장에? 가인이나 아벨은 그때 초반에 첫 번째 아담 중심의 사건에서 아직 등장할 때가 안 되었어요. 하나님, 그리고 남자, 그리고 여자, 그다음 뱀, 이 4인조 밴드. 이 4인조 밴드가 장차 신약에 등장하는 복음의 내용 구성요소로 꽉 차 있는 거예요. 모자람이 없이 꽉 차는 거예요. 이 네 배역에 의해서 남자, 여자, 뱀은 각각 신약시대가 되면 자기의 숨겨놓은 감춰진 비밀, 창세전 비밀에 있는 배역과 더불어서 신약에 공개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은.

 

여러분, 참고로 창조과학회가 있습니다. 창조과학회가 과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걸 증명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모의고사에요. 그거 통과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에요. 왜냐하면 창조과학회에서 제공하는 고고학적 증거물이나 화석, 이거 따진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증명됩니까? 고고학에 예수님이 피 흘린 게 나오고해서 그게 증명돼요? 안되죠.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 이것을 알라 했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알고, 그 외에는 알지 말라 한 것이 모든 핵심 비밀이 다 공개되었을 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 사건에 관여된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남자, 여자, 그리고 그땐 뱀이 아니고 뭐냐? 마귀. 그리고 당사자인 예수님. 이 4인방을 통해서 원천이 완전히 다시 한 번 공개되고 그 공개된 것이 신약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이 되면서 전에 창세기라는 모의고사가 지녔던 그 내용을 다 소환시켜서 남자, 여자, 그리고 뱀, 예수님이 있는 이상은 그때 창세기 사건을 되풀이하는 기능을 신약시대 고린도 교회가 떠맡아야 될 임무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실제로 고린도 교회도 그렇고 이제 11장을 할 거지만, 신약의 사도 바울은 원천이 다 공개되는 거니까요,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는 그 4인방의 내용이 없는가?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그래서 지금 여러분, 갈라디아서 4장부터 먼저 봅시다. 각자 남자, 여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자, 두 아들이 있죠. 두 아들은 남자 역할과 여자의 역할에서 원천이 드러나게 되면 실무자가 남자가 아니고 실무자가 여자에요.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범죄 한 사건의 실무자가 남자 우선이 아니고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창세기를 아무리 봐도 남자, 여자가 의논해서 따먹을까, 말까를 결정 안하고 왜 남자가 없을 때 여자 혼자 따먹었느냐?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여자 혼자 따먹어줘야 하나님의 언약, 주님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러니까 실무자 차원의 배역에서는 뭐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는 진두지휘하고 어머니는 그 배역에서 구원, 늘 새로운 자기 백성을 잉태하는 기능을 하나님 차원에서 했다는 거예요. 뭐가? 언약이.

 

지금 어머니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자유자’라 하는 것은 율법이 있고 자유가 없는, 곧 모의고사가 있던 세계와 대비하는 겁니다. 제가 모의고사라 하는 것은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 내내 인간들은 계속 업그레이드 된 모의고사를 치면서 처음에는 ‘하나님 믿습니다’ 하다가 나중에는 이방 종교로 다 빠지고 바알 섬기는 데로 다 빠졌잖아요. 모의고사를 다 실패한 거예요. 실패했다니까요.

 

실패했는데 모의고사의 기능 자체가 뭐냐? “인간이냐? 처음에 있던 아담과 하와 출신이야?” “예.” “단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게 모의고사의 출제 이유였습니다.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의 저주만 받아야 되지, 율법을 통과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아니다. 그러면 그 율법을 통과 못하니까 어느 인간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 실무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에요. 하와가 제일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한테 줘서 남자가 먹었기 때문에 실제 첫 저촉사건을 유발한 것은 여자 쪽입니다. 첫 번째 사건,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건이 여자 쪽에서 터져버렸을 때 그 사건을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원천의 차원에서는 그 여자 역할을 다시 반복하되 심화학습으로 반복하는 거예요. 그 내용을 까발릴 대로 다 까발려서 원천적 차원에서 최종적 차원에서 진짜 남자, 여자를 만든 원래 설계도의 원 취지가 뭐냐는 것을 다 까발린 입장에서 남자는 이런 역할, 여자는 이런 역할 했다는 것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어렵게 할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골라잡으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냐, 여자의 후손이냐?” 딱 묻는 거예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죠. 보세요. 남자는 빠지잖아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 했다면, 남자 쪽에서 태어난 건 뭡니까? 뱀이죠. 뱀이 태어나는 거예요.

 

창세기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왜? 그것은 초보 수준, 그 당시 계시가 발달하지 못한 수준에서 치는 모의고사에서 약간씩 약간씩 조금씩 풀어내듯이 알려주는 계시가 그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랬죠. 세례 요한이 선지자 중에서는 최고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보다 실력이 못하다는 거예요(마11:11, 눅 7:28). 천국의 어린아이는 성령에 의해 모든 걸 알았는데, 구약의 성도들은 천국의 어린아이보다 더 못해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것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4장을 계속 봅니다. 사라가 두 조각으로 나눠집니다. 사라가 있고 사라의 여종이 있어요. 여종이 하갈이죠. 여종과 사라가 중첩되어서 하나로 모아져 버리면 그냥 실무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돼요. 실제로 잉태 담당은 여자 쪽이니까요.

 

남자는 잉태를 못하니까 여자가 담당할 때, 그 여자 쪽에서 어떤 요소를 품느냐 하면 여자가 먼저 선악과 따먹었다는 부정적 요소가 여자를 통해서 그게 나타나는 겁니다. 여자를 통해서. 여자가 부정성인데 그 부정성을 내용으로 해서 비로소 천국에 합격되는 긍정적인 자식도 태어난다는 거예요. 실무자 선에서. 남자 말고 여자 쪽에서. 실무자 선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잉태 담당은 여자기 때문에.

 

아들, 딸 자식 낳고 가정을 이루고 뭐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하면 행복합니까?” 할 때는 고린도전서 2장 2절로 또 혼나야 돼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말라 했어, 안했어?” 괜히 가정 생각하면 가정 때문에 이 십자가만 알아야 될 것이 훼방 받는다고요. 훼방되니까 걱정, 근심, 염려가 물결처럼 덮치는 거예요. 철저히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되어야 되고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되어야 돼요.

 

이 점을 위해서 레위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레위기 12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2절, “…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게 아닙니다. 남자를 낳아요. 남자를.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잉태 담당자가 여자 쪽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낳는 그 사건을 이스라엘에서는 특수하게 창세기를 반복하려는 의도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 다음 다른 이야기가 없고 그냥 13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아, 남자를 낳거나 여자를 낳거나 전부다 칠 일 동안만 부정하고 그다음 팔 일째 제사 제물을 거기다 가동시키면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되어서 가는구나.’하고 넘어갈 텐데, 그게 아니고 여기 어떤 구별을 둬요. 남자를 낳으면 7일 동안, 여자를 낳으면 며칠 동안 부정하냐? 14일 동안 부정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도 곱빼기에요. 남자는 33일 지나면 산혈이 깨끗하지만 여자는 33×2=66일 지나야 이게 깨끗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실무선의 여자의 육신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창세기에 있었던 사건을 거기다 삽입시켜 버리는 겁니다. 삽입시킬 때 “거봐. 남자말고 여자 쪽에서 먼저 더러운 것, 부정한 것, 죄를 유발하고 촉발하는 그러한 배역을 그 당시 에덴동산에서 벌였잖아.”라는 것이 드러나게 돼요.

 

그런데 이것이 뭐냐? 모의고사란 말이죠. 사람들은 여기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어떤 불이익, 불평등, 페미니즘 사상 그런 것,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냐? 여자는 사람도 아니냐? 사회는 가부장제로 불평등해도 하나님께서는 좀 봐줘야지. 진짜 하나님마저 이러기에요?’ 이런 식으로 ‘여자를 무시합니까?’ 이렇게 하는데요.

 

사람이라는 것은 없어요.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이고 사람은 예수님만 사람이에요. 원천적으로 예수님만이 사람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와요. 마지막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이죠. 예수님만이 참된 아담이 되고. 예수님이 원천이거든요, 원천. 시원(始元)이고 기원(起源)이에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남자, 여자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기능이 여기에 미리 담기게 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 속에 담기게 돼요. 만약에 남자가 자궁이 있어서 아이를 낳는다면 바꿔서 하겠죠. 그러면 예수님도 누구의 아들? 남자의 아들. 남자의 후손이 될 거예요.

 

그러나 처음 사건은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되어 있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왜 남자가 먼저 따먹지 않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으로 온다면 인간은 잉태라는 조건, 잉태라는 환경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그 원리를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시연했고 계획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시간을 따라서 본래의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은 무엇이 끝이냐 하면 창세기가 끝이라 할 수 있어요. 창세기가 끝이에요. 끝부분부터 거꾸로 말아가는 거예요. 거꾸로.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것도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다만 남자 기능은 있고 여자 기능이 있습니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녀를 차별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자는 그게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종이 됐든 자유자가 됐든 전부다 한 몸이니라(갈 3:27-28). 한 몸이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여자 기능을 하라고 여자 육체를 만들어놓고 남자 기능을 하라고 남자 육체를 만들어놨으니까 남의 배역 탐내지 말기. 각자 각자 자기 기능하기.

 

무엇이 중요하냐? 내가 맡은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되는 그 지점에 있는 자는 여자가 돼요. 왜냐하면 죄와 더불어 있기 때문에 여자가 구원의 기표, 구원의 상징성이 더 깊이 나오는 겁니다. 여자는 여자를 낳으면 여자를 낳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만큼 하나님의 죄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여자한테는 곱빼기로 그냥 두 배로 주어지는 거예요. 두 배로.

 

철딱서니 없는 남자는 죄의 깊이를 몰라요. 그러나 여자는 아기를 해산함으로써 남자보다 훨씬 더 죄라는 것이 깊숙이 안에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아기 낳으면서 고통을 느끼면서 그것을 남자보다 더 깊이 느끼는 거예요. 그게 디모데전서에 나옵니다.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딤전 2:15). 구원의 체험을 해산을 통해서 느낀다. 그 기능이 여자의 기능이라는 거예요.

 

산부인과에서 애 낳을 때 남자는 뭐했습니까? 남자 뭐했어요? 복도에 앉아서 게임하면서 ‘아직 멀었나?’ 요새 남편은 또 안 그런대요. 요새 남편은 공동 체험한다고 자기도 옆에 붙어 있고 아주 유난을 떨고 있어요. 쓰잘데 없이. 네 마음이나 고쳐라, 그런 걱정하지 말고. 엉뚱한 짓하지 말고. 그런다고 위로받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런 이벤트를 벌여서 나머지 뭘 또 요구하려고… 수상해, 수상해.

 

사라는 잉태하지 못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데 뭘 잉태 못하는가? 사라는 사람을 잉태하지 못해요. 사람을 잉태하는 것은 바로 하갈, 종 쪽입니다. 그래서 그 종이 낳은 이스마엘은 율법이 가진 저주를 옴팍 쓰고 평생 동안 이게 저주라는 것을 드러내는 기능을 분배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 약속, 약속에서 배제된 자가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세상에 남자나 여자나 어떤 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각각의 맡은 배역대로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천국가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9장에 보면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저주의 그릇도 만들고 사랑을 담는 그릇도 만드는데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라. “만드는 자가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만들어진 네가 왜? 토기가 왜 나한테 시비 걸고 달려드느냐? 그게 토기의 자세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것은 누구를 의식하는 것이냐?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대적하는 자, 원수가 있어요. 바로 악마가 인간을 자기 마음으로 자기 심성으로 버려놨던 거예요. 인간을 버려놓은 겁니다. 창세기에서 선악과 따먹은 것은 잘한 짓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잘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은 참 잘했다.’ 그게 유포되어 있는 세상이 이 현실세계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세계에서 남자, 여자는 각자 사람이 되어버려요. 사람이 되어버리면 사람과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기능에 있어서 차별되는 것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기능은 내가 정하기 때문에 내가 남자 못지 않고 남자도 여자 못지 않다면 “남자가 여자 행세하든 여자가 남자가 되든 그건 내 마음대로다. 왜?”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동성애 문제 이런 문제가 다 그런 거란 말이죠. 뭔가 누구로부터 부여받는 게 없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1장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문제를 풀면서 해답이 의외로 간단히 풀려요. 여자가 왜 머리에 쓰거나 머리에 쓰기 싫거든 길러야 되는가? 그 이유가 여기 10절에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다.

 

여자가 있다면 여자는 뭘 하나 더 짊어지고 있어요. 권세의 자리가 점선 자리로 비어있는데 그 비어있음의 지배를 받는 기능을 여자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권세가 지배를 하고 있다. 그 권세에 지배받는 역할을 인간 수준에서는 여자가 그 일을 담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권세가 어떤 권세냐 하는 것은 여자가 긴 머리 들고 물에 빠지면 되겠죠. 그럼 여자 머리는 물미역이 되겠죠. 척!하고 얼굴에 붙어가지고 물미역이 돼서 축 늘어지면 여기에 권세가 흐르고 넘치죠. 그런 역할을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풀리느냐? 8절이 풀려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남자는 누구한테 났는데? 여자한테 난 것이 아니고 남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났다는 거예요. 3절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뭡니까?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안보이잖아요. 하나님도 안보이죠. 보이는 차원을 생각해보자. 위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서열을 수평적인 남자와 여자, 보이는 차원에 그대로 복사해서 그 둘 사이 관계를 걸어다니는 남자, 여자를 통해 이들이 보이지 않는 권세를 둘 다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기능을 담당하라는 겁니다.

 

담당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이 내용이 뭐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런 원천이 공개된 차원에서의 남자의 존재이유, 여자의 존재이유를 보여줌으로써, 이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 보이지 않는 구석에 뭐가 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창세기 모의고사가 신약에 와서 이제는 합격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너희들이 보여주라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라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여자가 머리 반드시 길러야 됩니까? 숏 커트하면 안 됩니까?” 그런 질문이 막 나오죠. “숏 컷트하고 있다가 교회 갈 때만 가발 뒤집어쓰고 물미역 쓰고 가야 됩니까?” 그렇게 묻는데, 그것은 지금 ‘하라, 하지 마라’는 우리 인간에게 해당이 안 되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하라, 하지 마라는 우리 인간에게 해당이 안돼요!

 

그럼 왜 이걸 하라 하느냐? 그 시대, 사도 바울 시대에 있었던 그 당시의 사회 문화 제도를 주님께서 모의고사의 하나의 전형으로 빌려온 거예요. 그 당시의 문화 속에서 십자가 다 이루었고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았는데 다만 기능은 남아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세기를 여기서 재현하고 창세기라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반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사용한다.

 

그 시대의 문화 자체가 여자는 머리에 안 쓰고 머리를 깎아버리면 이것은 그냥 창녀나 사회적으로 부정했던 여인으로 평가돼요. 헬라 뿐만 아니고 민수기 5장 18절이나 이사야 7장 20절에 보면 그 당시 모의고사 입장에서는 여자가 부정한 것을 들켰을 때는 머리를 깎아서 ‘나 이런 나쁜 여자입니다.’하는 호손의『주홍글씨』처럼 문자를 새기듯이 머리에 표시해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율법을 어긴 여자입니다.’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 당시 모의고사에서는.

 

그러면 지금의 문화는 뭐냐? 지금의 문화는 민주주의죠. 뭐 간단하죠.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은 뭐 간단합니다. ‘여자가 돈 번다고 남자 너무 구박하지 마라.’ 이런 거죠. “너 요새 돈 좀 번다고 막 기어오르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응? 세상 좋아졌어. 하늘같은 남편을 너 그렇게 생각하나?”라고 한다면 여자 쪽에서 가만있지 않아요. “하늘같은 남편 월급 좀 가져와라. 미치겠다, 정말. 살림살이 살고 돈 벌라고 하니 미치겠다.” 이렇게 나오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늘같은 남편은 돈 벌어준다고 남편이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의 권세,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점을 남편이 아내를 통해 그 관계를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보여주면 되겠죠. 이 이야기 듣고 여자들이 “그 쉬운 거 내가 할게. 당신이 돈 벌어. 쉬운 거 내가 할게.” 이런 통박이 막 돌아가요.

 

그런데 남자가 “나는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을 뭔가 누르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누르고 있다.”라는 이 말을 할 때, 여자는 뭐냐? “당신이 그런 기능이 있다면 내가 기꺼이 그 복음에 대해서 복종할 의사가 있다. 복음에 대해서.” 남편 더러운 성질 말고요. 땡깡 부리는 거 받아주는 게 아니고 “그 복음에 대해서 난 오케이! 나 동의한다.” 그러면 복음적으로 아주 사이좋은 부부입니다. 사이좋은 부부가 돼요.

 

힘이라는 것은 원천,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힘이 되어야지, 기존의 자본주의나 가부장제도에서 남자는 하늘같다는 그런 식으로 내미는 것이 고린도교회가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당시에 또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에 있어서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말하고 남자 가로막고 “김 권사, 나도 말 좀 합시다. 이 교회에 장로밖에 없나? 권사는 말 못하나?” 이렇게 제시하는데, 그 내용이 어떤 경우에 그러느냐 하면 그 당시 그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복음을 하나도 말 안할 때, 선지자적 입장에서 ‘이게 복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드보라 같은 그런 사람일 때에요.

 

그럴 때 교회 목사가 고린도전서 11장을 하면서 “여자들은 집에서 이야기하지, 여기서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복음을 이야기하려거든 순서대로 하세요. 먼저 남자부터 하고 여자가 하세요.” 이렇게 나오면 여자가 하는 말이 “남자 중에서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요?” 그럼 그 교회 권사 다섯 명 있으면 첫 번째 여자, 두 번째 여자, 전부 다 여자가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그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는 것이 오늘날 이 시대에 남자든 여자든 해야 될 마땅한 사명이고 성령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다음 7장 봅시다. 7장 내용이 8강까지 이어지겠는데 7강에서 남은 짧은 시간동안 이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고린도전서를 어른들보고 이야기하면 어른들이 이성적으로 따져서 ‘믿을까, 믿지 말까? 아, 이런 게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구속하심이구나.’ 아는데, 어린아이는 어떻게 구원받죠? 어린아이는? 고린도전서 이걸 어린아이한테 알려주게 되면 이건 뭐 <킹 오브 킹스>도 아니고 이걸 만화영화 만들어서 알려줄 수도 없고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이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나옵니다. 7장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뭡니까?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해서 그 기초단위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복음을 알게 되면 거기에 영향력이라든지 그 훈계 속에 반드시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는 그 기능이 성령을 통해서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애가 뭘 알겠습니까?”하지만 말씀은 그냥 알아지는 게 아니고 성령과 동반해서 알아진다면 애들 수준에서 “나는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애라도 그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는, 태어난 지 24시간 만에 죽어버린 애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하지, 그걸 죽기 직전에 태어난 지 24시간도 안된 애한테 “마지막 유언이 뭐냐? 마지막 유언을 남겨줄게.” 지금 젖도 못 먹는 애한테 “고린도전서 7장에 이런 내용이 있거든.” 해봐야 소용없죠.

 

그러니까 모든 자녀나 배우자나 이미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한 가정에 붙여준 피조물이죠. 내가 책임질 문제는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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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8강-고린도전서: 죽음, 그리고 부활

 

- 이 근호 목사

 

 

제 8강하겠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 십자가면 다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방해되는 요소가 있어요. 방해되는 요소가 뭐냐?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했단 말이죠. 이 말은 세상에서 말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는 그것이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재편성되는 겁니다. 권세가 재편성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이야기를 고린도전서에서 혼인 이야기로 이것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혼인 이야기를 언급한다는 말은 그 당시 혼인이 남자가 주인이고 여자가 종이 되는 것이 원칙인 것처럼 그것이 정의로운 것처럼 합법적인 것처럼 그렇게 여겨졌던 그 시대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 기존의 인간세계에서 말한 혼인제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고방식에서 나온 혼인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걸 무효화시키려는 거예요. 사람에게 종이 된다는 말은 사람이 만든 혼인제도에 꼼짝 마라는 식으로 묶여있는 것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적어볼게요. 공식이에요. ‘하나님의 종=어느 사람의 종이 아니다’ 이렇게 보라는 거예요.

 

“너 하나님의 종이야?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람의 종이 될 수 없어.” 이걸 왜 혼인제도로 언급하느냐 하면, 혼인제도를 언급한 이유가 그 당시 남편은 주인노릇하고 여자는 종노릇하는 이런 조건 하에 혼인이 성사됐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나 여자나 그 시대가 그러니까요. 그 시대의 모의고사가 그러니까요. 이게 혼인제도였습니다.

 

그럼 어떤 여자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면, 종이 되었다는 말은 본인이 종 되고 싶어 된 게 아니고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야, 너 그쪽이 아니고 이쪽 소속이야.” 부르심을 입어버리면 이것은 사람의 종이 아니죠. 사람의 종이 아니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만든 문화, 그 당시 문화인 혼인제도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인간들의 혼인제도의 종이 될 필요 없다는 거예요.

 

혼인제도의 종이 될 필요 없다면 그럼 여기서 두 가지 경우가 있죠. 같이 살던지 안 그러면 이혼하고 헤어지던지 이 두 가지 경우인데, 상대방 배우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지 않거나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거든 굳이 헤어질 필요 없고 같이 살아라. 하지만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상대방이 거기에 대해 강력하게 거부하거든 이것은 성령에 대한 악령의 횡포로 여기고 이것은 이혼해라.

 

아니,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짝지은 것은 두 몸으로 나누지 못한다고 했는데 예수님 때에는 그때의 모의고사고 복음이 전파된 이쪽에서는 이제 모의고사가 아니고 본고시죠, 본시험에서는 이처럼 헤어진다는 그러한 아주 괜찮은 조건 하에 부르심을 살리면 된다는 거예요. 괜찮은 조건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헤어질 때 나뉠 때, 부르심을 입어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조건 외에 다른 조건을 여기서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직 부르심을 입었다는 조건과 거기서 극렬하게 네가 부르심을 입은 것에 대해 나는 용납 못한다고 나올 때는 굳이 하나님의 종이 사람의 종 제도에 매일 필요 없고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말씀을 우리가 실시해서는 돼요, 안돼요? 안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개별 자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본인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의도가 싸악 올라오거든요. 싹 올라온다고요. 저쪽하고 살기 싫은데 어떻게 하면 저쪽에서 구차 없이 헤어지게 만드는가? 방귀를 막 뀐다든지 해놓고는 핑계대기를 “네가 나의 종 됨을 거부했기 때문에 성경에 따라 이혼하자.” 이거는 NO. 이거는 안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이혼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15절에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16절,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그러니까 모든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 원칙에만 입각해서 그것을 적용하는 기능으로서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만나 혼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라는 거예요.

 

네가 누구를 만나든지 나는 행복한 결혼을 위해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 의미를 부여해서 혼인에 개인 행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성도는 그렇게 되어버리면 사람의 종, 다시 말해서 나의 종이 되어버려요. 내가 나의 종이 되어버린다고요. 자꾸 하나님 핑계대지 말고. 나 편한 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 가정을 통해 구현될 것인가.’ 그 기준 외에는 어떤 다른 기준도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뒤의 말은 일단은 결혼한 대상을 향하여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이고요. 지금 어떤 아가씨가 결혼하기 전에 부름을 받았어요. 이게 불행인지 행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결혼하기 전에 사람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때는 사도 바울이 아주 진중하게 이야기합니다. “하지 마! 결혼하지 마!”

 

결혼 안하게 되면 국가 출산율이 0.75명으로 뚝 떨어졌는데요?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후세가 없는데요? 어떻게 하면 되죠? 그럼 나라에서 애 낳는다고 주는 보상금도 못 받고. 사도 바울은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결혼하지 마.” 그래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28절에 나온 그 뉘앙스를 보세요. 말하는 뉘앙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지금 총각, 처녀가 결혼하고 싶어 환장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의 뉘앙스는 정반대죠. “억지로 장가갈 필요 없고 처녀가 억지로 시집갈 필요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뭐냐? 억지로라도 가고 싶어, 장가. 우연을 빙자해서 억지로라도 재벌 만나 시집가고 싶어요. 재산은 얼마 안 되도 괜찮아요. 기본재산 한 240억 정도, 집은 한 60평 되는 아파트 그 정도. 아주 겸손하게 그 정도만 되면 시집 갈 용의가 되어 있다. 지금 만반의 마음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너 부름 받았어?” “예, 부름 받았어요.” “가지 마! 혼자 살아.” 그러니 이게 얼마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현실에서 인간들의 기본적인 육적 욕구가 ‘너 행복해? 나도 너만큼 행복할 자격 있어.’ 자격을 남에게 보여서 ‘나도 이렇게 가정 꾸리고 행복하단 말이야. 나는 너 안 부러워.’ 경쟁에서 남한테 지지 않으려는 본성이 남아 있는데 거기다 대고 “꼭 시집갈 필요 없고 억지로 장가가지 마라.” 그다음에 나온 이유가 뭐냐 하면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여러분, 육신에 고난 있다고 장가 안갑니까? 장가 안가도 고난 있고요, 시집 안가도 고난이 더 심해요. 주위에서 집적대서 더 심하다니까요.

 

자, 그 이유가 뭐냐? 이유가 이제 등장합니다. 환경이에요, 환경. 복음으로 인하여 유발된 환경은? 공식이 뭐냐? ‘존재가 등장하면 존재를 지시하고 존재를 부각시키고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환경도 같이 등장한다.’ 이게 공식입니다. 어떤 특정 언약적 존재가 등장하면 환경도 같이 등장한다.

 

그럼 마지막 때에 예수님 등장했죠. 그럼 예수님이 등장한 환경은 어떤 환경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느냐? 7장 2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이렇게 쭉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환경 자체를 건너뛰자. 어차피 세상 떠날 거 굳이 세상에 깊숙이 관여해서 내 인생 책임지라느니 어떻게 싸우고 그런 거 다 생략하고 그냥 건너뛰는 것이 고난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에 동의하려면 여러분 뭐를 동의해야 돼요? 과연 종말이 가까우냐 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가 되어야 되겠죠. 종말이 몇 년 남았느냐 그걸 사전에 정보입수 해야 되겠죠. 누구한테 물을까요? chat GPT한테 물을까요, 몇 년 남았는지?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남은 시간, 남은 세월은 그 사람의 복음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복음의 깊이에 비례해요. 세상을 진짜 떠나고 싶을 때는 얼마 남지 않았고, ‘언젠가 재림하겠지. 그러나 난 더 있고 싶어.’ 하면 남은 세월의 길이가 그만큼 길어지는 겁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에 나오는 거죠. 속도를 늦추면 그만큼 보이는 게 많고 속도를 빨리 하게 되면 생략되는 요소가 많은 거예요. 주님께서 어서 나를 데려가고자 하는데, 부동산 재벌이고 한 달 수입이 수 억 되는 남자가 와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가씨 없으면 자살하겠습니다. 당신 없으면 못 살겠습니다.” 할 때 여러분 어떻게 하겠어요? “잠깐만요! 계산 좀 해볼게요. 주님 몇 년 남았습니까?”

 

그러한 환경이 찾아오게 되면 이 세상 떠나서 주님께 가겠다는 자신의 복음의 깊이, 속도가 늦추어지겠죠. 그때 결혼하면 되죠. 결혼하고 이제 고생 실컷 하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그냥 사세요, 그냥! 누굴 만나거든 그냥 살고, 안 만나거든 그냥 떠나고. 결혼이 뭐냐, 혼인이 뭐냐 하는 것은 일체 알 필요가 없어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죽으심 그것만 알면 되니까. 괜히 다른 것 신경 쓰다가 근심 걱정만 덤터기로 뒤집어쓸 문제란 말이죠.

 

11장 끝났어요. 간단해요. 자기가 갖고 있는 복음의 역량, 깊이에 따라서 주께서 그걸 조절해서 성경 말씀대로 결혼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고난 받기 위해 결혼하는 게 아니고, 고난이 있다는 그 말씀의 기능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는 것도 주의 뜻으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 너 만나서 고생만 실컷 한다.’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고린도전서 7장에 결혼해서 고생했다는 그 말씀의 성취 아닙니까. 신나지 않습니까? 고생은 내가 하지만 말씀 성취했다는 그 마음이 기쁘죠. 혼자 기쁜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기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다음 15장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에서 초반부터 난제가 등장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등장해요. 15장 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절이 어렵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다음 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이 말이, 말이 안돼요. 지금 사도 바울이 원인과 결과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버렸습니다. “아저씨, 파출소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 “파출소 옆에.” 이게 무슨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거예요? 부활이 없다 하니까 사도 바울이 부활이 있다는 거예요. 부활이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다시 사는 게 있다. 그럼 예수님을 왜 부활시키는가? 다시 사는 게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말이에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는 것이 전혀 담겨있지 않고 동어반복, 같은 말을 지금 반복하고 있습니다.

 

방금 사도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제가 질문에 두 문항을 제시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답변을 골라보길 제가 권하는 겁니다. 부활에 관해서 부활의 의미가 1.죽은 다음에 다시 산다는 말인가? 2.계속 산다는 말인가? 이거에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이건 5초 드리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게 아니라서. 이게 무슨 말이에요? 부활의 의미가 뭡니까? 인간은 계속 산다는 말입니까, 죽은 다음에 산다는 말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사도 바울은 어느 쪽이에요? 1번이에요. 맨날 2번만 정답 아니에요. 가끔은 1번도 정답이에요. 죽은 다음에 산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부활이 없다는 사람이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는 계속 산다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말이 있지만 죽음은 별 게 아니고 ‘죽음’, 시력 1.5 아니면 안 보이게 더 작게. (죽음은 작게 하고) 우리는 계속 산다는 말이에요. 1번은 ‘죽음’ 시력 0.3도 보이도록 크게. 죽음 다음에 산다는 말이다.

 

그럼 이걸 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이 계속 사는 세계가 부활의 세계. 따라서 죽음이 없으면 뭐가 없습니까? 부활이 없죠. 죽음이 없으면 이 세계 말고 다른 곳에서 계속 산다는 말이에요. 부활이 없다는 사람은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계속 산다는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부활 이야기하니까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는 내가 이 동네에 사는데, 내가 만일 이 동네에서 죽는다면 죽고 난 뒤에도 계속 산다.’ 그런 뜻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그런 증거를 찾아보자. 말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증거를 찾아보니까 죽고 난 뒤에 자기 동네에서 계속 귀신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부활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쪽으로 사도 바울에게 반박을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뭐를 놓쳤느냐? 죽은 자들의 세계가 계속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죽음의 의미가 누락된 채 계속 산다는 사람은 이 부활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가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인의 죽음은 2번이 맞죠. 다시 사는 증거가 없으니까. 그런데 일반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다음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만이 예수님만이 그걸 보여줬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일반인들의 죽음이 재편된다는 거예요. ‘일반인의 인식 자체가 재편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확장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죽음’을 크게 쓴 이유를 몰라요. 왜 일반인들이 죽고 사는 게 안 되느냐? 그게 왜 첫 번째 모델이 아니냐?

 

일반인들이 죽고 살아도 “그래. 죽고 난 뒤에 다른 세계가 있고 거기서 산다.” 이럴 수 있잖아요. 에녹 같이. 또 엘리야 같이. 에녹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도 아니고, 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야 그게 부활이 되고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왜 부활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그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충분히 질문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일반인이 죽는 죽음은 남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죽음이에요. 본인이 죽었다가 본인이 뭐 소생할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개인 문제에요. 개인 문제는 개인의 동일성에 갇혀있고 멈춰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본질이 기존 모든 인간들의 본질을 무효화시키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본질의 바꿔치기가 되는 겁니다. 바꿔치기가.

 

만약에 바꿔치기가 안 된다면 4살 때 죽었다가 부활할 때 몇 살로 태어나겠어요? 일반인의 죽음이라면 몇 살로 부활되겠습니까? 4살 때 죽었으니까 4살로 태어나겠죠. 95살에 죽었다가 부활해서 다시 산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서 뭐가 되겠어요? 노인네 얼굴이 되겠죠. 전립선 비대증 있고 부활의 세계에서 병원 찾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초대 교회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얼마나 이 사람들이 성경을 안 봤는지… 신학자들은 신자가 아니에요. 언제로 부활하느냐 하면 인간의 가장 절정기로 태어난다고 이야기했어요, 어거스틴이. 절정기가 언젠데? 32살로 봤어요. 남자도 32살, 여자도 32살 쯤으로 다시 태어난답니다. 그다음부터는 늙지도 않고 쭉 간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참. 같잖은 것도 아니고 이것 참.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그분이 뭘 빠뜨렸느냐 하면 우리가 아담에 속했다는 걸 빠뜨렸어요. 기존의 아담에 속했는데 아담에 속한 몸은 무슨 몸이냐? 15장 4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썩을 것으로 심었어요.

 

그러니 썩을 것에 미련을 두면 돼요, 안돼요? 안되죠. 죽을 때 손가락이 없거나 죽을 때 다리를 절거나 죽을 때 위암이 있거나. 어쨌든 위암이 있든 말짱하게 건강하든 전부다 퇴비에요, 퇴비. 썩을 것으로 이 땅에게 돌려주는 겁니다. 이게 하관예배 아닙니까. 그냥 자연에게 땅에게 돌려줘요. “네 거니까 네가 가져가. 흙에서 났으니 흙아, 이거 다시 소환해, 전부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가져가. 흙 주제에 잠시 인간같이 됐다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흙이니 흙으로 끝나는구먼.”하고 썩을 것이 썩을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일반적인 부활은 전체를 다 대체할 수 있는 부활의 몸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는 에녹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도 아니에요. 죽었다 살아난 ‘달리다 굼’ 그 회당장 딸도 아니에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인 이유는 예수님이 죽을 때 예수님만 죽은 게 아니고 모든 자가 다 죽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고린도후서, 다음 편지 5장에 나옵니다. 그분이 죽을 때 저주받아 죽었잖아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의 죽음은 저주받는 죽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저주받아 마땅한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표로 보여주신 게 됩니다. 대표로. 그래서 인간은 어떤 자기의 연속성, 동질성을 부활을 거론하며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연세 많을 때 치매 걸렸었는데, 치매 걸렸을 때 길을 잃어서 경찰관이 밤중에 우리 집까지 찾아다 준 적이 있었어요. 제가 은혜를 받았는데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 하면, 어머니가 치매 걸렸기 때문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요. 그런데 단 하나만 기억했어요. 뭐냐 하면 아버지(남편) 이름만 기억했어요. 남편 이름만 기억해서 경찰관이 그 이름을 치니까 주소가 나와서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우리 어머니지만 어머니가 자기 남편에게 종속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 당시 모의고사에서는. 까짓 거 본인 이름은 모른다니까요. 본인 이름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남편의 이름이듯이 이미 남편이 갔다면 자기가 따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삼국시대에 순장(旬葬) 제도 있죠. 왕 죽는데 멀쩡한 산 사람, 하인들까지 100일치 양식 주고 다 무덤에 집어넣었죠. 거기서 뭐 유격 훈련합니까? 우리는 몰래 삽 들고 가서 파헤치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에 그것이 영광이고 그 사회의 권세였어요.

 

권세가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권세는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그 공동체에서 인정해주고 그 공동체에서 살아남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담의 세계, 첫 아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세계가 결국 썩게 만드는 동력이었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썩을 것이 썩을 것끼리 모여서 썩는 짓만 하고 결국 썩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 새로운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어디서 부활했다고 했느냐 하면 자기 죽음에서 부활한 게 아니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죽은 자들’이 되어버리면 뭐가 드러나느냐? 모든 인간을 죽게 한 원인, 악마의 권세가 함유된 의미가 ‘죽은 자들 가운데’에 있어요. 어느 누구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알아서 부활된 자는 단 한명도 없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악마의 권세가 센 거예요. 또 그걸 겨냥한 율법의 권세도 그만큼 세고. 죄의 권세도 세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저주로부터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잖아요. 탈출인데 그것을 우리가 언급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걸 알아서 나는 구원되었다.’ 이러면 안돼요. 우리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알고 내 이름을 어떻게 구원하겠다고 나서면 안돼요. 우리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부터 아버지 앞에서 자기 이름을 포기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장기기억 속에 뭐만 남아있어요? “할머니 이름 뭡니까?” 몰라요. 왜? 그걸 굳이 알 필요가 없으니까요. 남편 있음이 곧 나의 있음이니까. 멋지시지 않습니까? 그대 있음에 내가 있다. 그게 그 당시 문화였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새로운 문화를 제공합니다. “죽은 자가 너의 이름이었다. 너의 이름들 가운데서 나의 이름을 끄집어내었다. 다시 네 이름 기억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과 죽은 것 외에 기억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렇게 묻는 겁니다. 십자가 알고 따로 부활 알고 이런 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에 있을 수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 할 때는 알지 않아야 될 것 중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부활이 포함되어 있어요.

 

십자가만 알면 구원 안 되고 부활도 알아야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럼 거기에 계속 항목이 붙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알아야 되지, 부활 알아야 되지, 예수님의 재림 알아야 되지. 이 말은 뭐냐?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그다음에 재림 모르면 구원에 탈락된다는 거예요. 그럼 그것만 알면 됩니까? 성령의 열매 외워보라고 할 때 성령의 열매 외워야 되지. 그다음에 주기도문 못 외워서 더듬거리면 또 탈락이죠. 사도신경 다 외워야 되죠, 십계명 외워야 되죠. 도대체 이게 구원을 받는 건지, 지금 시험 치다 볼일보고 끝나는 건지.

 

나의 신앙의 자질과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죽은 자 안에서 죽음으로 이미 끝났다는 사실이에요. 그냥 죽어줘, 그냥. 자꾸 나불대지 말고 그냥 죽어줘. 네 역할은 그냥 죽는 거야. 그 죽는 죽음 속에서 우리 말고 예수님이 먼저 와서 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했기 때문에 그 죽은 자를 누가 건질 거냐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일방적으로 누구한테 있어요? 주님한테만 있는 겁니다. 주님한테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부활 이야기하면서 누구를 설득할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없고, 모든 사람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는데 그분이 모든 걸 대표해서 첫 번째 아담을 완전히 다 무효로 돌렸다는 거예요. 여기 나옵니다.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아, 얼마나 급진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너 어디서 태어났어?” “아담 안에서.” “그럼 죽었네.” 이 얼마나 급진적인 거예요. 파격적인 거예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 말은 ‘아무리 잘나고 노력해도 네가 아담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너의 진수, 너의 본질은 그냥 죽음이 너를 말해준다.’ 이 뜻이에요. 죽는 존재가 뭘 까불어, 이런 거죠.

 

20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에녹 아닙니다. 엘리야 아닙니다. 자꾸 에녹 아니고 엘리야 아니라고 언급하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죽어서 살아나는 경우를 자기 동일성을 포기 못한 채, 쟤들도 사는데 우리도 예수 믿으면 산다고 그렇게 연관시켜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에요.

 

에녹이 하나님께 갔지만 그것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입니까, 아닙니까? 첫 열매가 아니에요. 첫 열매도 아닌 걸 왜 모델로 삼습니까? 엘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엘리야도 불마차타고 올라갔잖아요. 뜨거우냐, 안 뜨거우냐 하는 것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 땅에 시체 남기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걸 부러워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젠 나를 잊어도 되는 게 부럽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거 15초 드립니다. 중요한 문제라서. 내가 죽었다가 내가 부활되는 게 좋습니까, 아예 나를 삭제시키고 나 여기 없다~ 영구 없다~ 하는 것처럼 나 여기 없다~하는 이게 낫습니까? 내가 없으면 걱정도 없는 거예요.

 

우리의 기능은 이겁니다. 21절, “사망이” 그다음에 뭡니까?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이 기능에 충실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는데 뭐냐 하면, “나 사람이다. 따라서 필히 죽어야 돼. 이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한 명령이야.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돼.” 그 사명에 충실하면 돼요. 그리고 ‘죽었으면 내가 부활한다.’가 아니에요. 죽으면 내가 부활할 필요가 없고 흙으로 된 내 인생은 그걸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마감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교회에서 불만이 대단해요. ‘그동안 주님 복음 믿고 충성했는데 본전도 못 건지고. 투자는 했는데 이익이 하나도 없잖아요. 나 살리기 위해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다 했는데 주께서 나를 부활에서 배제한다? 나는 닭 쫓던 개꼴이 됐네.’

 

그런 생각이 든다면 또 주님께서 종용히 불러요. “봉사하지 말고 이참에 날 버려. 그따위 사고방식 가지고 더 갈 것도 없어. 지금 나를 버려. ‘이익이 없는데 예수 왜 믿어?’ 하거든 그냥 날 버리는 게 좋아.” 개별적 자아가 계속해서 살아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지금 나 잘되기 위해서 끌어오는 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끌어와요.

 

그러니까 이 성경을 봐도 전혀 좋아지지 않고 반갑지도 않고 감사도 없어요. 맨날 하는 게 ‘그럼 내게 돌아올 이익은? 수익금은 얼만데?’ 맨날 이거 따지는 거예요. “나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뭔가 보상 없는 착함은 착한 일할 동기부여가 안 되잖아요. 뭔가 보상이 있어야 내가 열심히 힘을 낼 건데…” “네가 아무리 봉사해도 그건 무효가 되고 네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는 네가 어떤 기여한 바 없고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다.” “그러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결정 안 해주면 나 뭐하는데?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26절이 답변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뭡니까? “사망이니라” 너는 하나님의 원수와 더불어 사망을 품고 살았잖아. 사망의 기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는 일을 모독하고 있었잖아. 그 일에 너 가담하고 있었잖아. ‘하나님, 저 죽여도 영원히 지옥 보내지 말고 천국에서 살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배후에서 사망이 “물어! 물어!” 하면서 시킨 일이에요.

 

모든 자가 죽은 자가 되어야 되는데 죽은 척을 하면서 빼꼼히 한 눈 뜨는 거예요. 주님께서 재림하나, 안하나? 언제쯤 기름 준비할까? 기름 준비할 타이밍을 자기가 잡아. 스케줄을요. 주께서 오려고 하다가 눈뜨고 있으면 “안 가. 아, 취소. 취소. 천사님들, 지금 타이밍 안 되었습니다. 저거 저거 한 눈 뜬 거봐. 죽은 척하는 거구나. 나 안 가요.”

 

모든 인간이 자기의 의지와 바람과 기대가 완전히 죽음 속에서, 죽음이 사망이니까, 철저하게 마귀에게 매인 자 되어야 부활은 그때 찾아오는 거예요. 어떤 내 일말의 희망의 빛이라든지 이런 게 남아있으면 이건 제대로 죽은 자가 아니에요. 수련회 와서 8강까지 듣는데 갑자기 수련회 들은 것 취소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이거 뭐 헛다리 짚었네. 결국 그 이야기 들으려고 왔나. 수련회 온 보상이 있어야지, 아무 대가도 없고 건진 것도 없이 뭐야? 차라리 7강 듣고 갈 걸.’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주의 뜻은 이겁니다. 얼마나 평소에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 앞에서 잘난 체하고 있었는지,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주입되게 되면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그럼 내가 얻을 보상은?’ 이런 식으로 토 달고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본인의 일이 자기의 존재 잘남을 증명해서는 안돼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된다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척하면서 ‘증인으로 살면 내게 돌아올 콩고물은 무엇입니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유사 성령을 받은 거예요. 유사 성령. 성령 이야기하면서 자기 천당 가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똑같은 거예요.

 

여기 29절에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이 이야기가 복음을 곡해했던 자들이 세례 받으면 부활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어드밴티지(이익)를 준다는 그 당시 분위기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35절부터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47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했다고 되어 있죠. 소속이 어딥니까? 소속은 흙입니다, 흙. 소속은 흙이에요. 소속대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을 간다는 것은 흙에 속한 자에게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 믿고 어떤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다’에서 이 십자가가 뭐냐 하면 원래 흙에 속한 것을 흙으로 돌리는 작업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해주시는 겁니다. 흙에서 난 것이 자꾸 하늘 흉내 내지 말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런데 흙으로 돌리는 그 작업의 연장선에서, 흙으로 돌리는 작업은 주님이 하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분이 주님이라면 그 사람은 100%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뭘 알기 때문에? 내가 가만있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적극적으로 나를 죽이는 그 일을 말씀에 입각해서 나에게 실시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없어지고 자아 자리에 뭐가 옵니까? 요한복음 5장 24절부터 해서 이 고린도전서 15장이 자리 잡겠죠. 그러면 요한복음 5장 24-28절을 봅시다. 결정적이니까 마지막 힘냅시다. 요한복음 5장 28절, 이게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인지 아예 단서를 붙여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러니까 “애들아, 제발 무덤으로 가줘. 제발!” 내 음성으로 너희들 부를 테니까 가라는 거예요. 그럴 때 음성을 들려줬는데 안 불러주면 어떻게 합니까? 무덤 속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것이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나 피조물에게 일방적으로 적용시키는 주의 일의 연장 속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에요.

 

내 안에 말씀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이 작동하는데 우리는 자아가 작동해가지고 ‘이 말씀대로 하면 내게 돌아올 콩고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대적하는 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사망이 자꾸 뒤에서 부추긴 게 돼요.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제가 어느 강의에서 얼마 전에 했잖아요.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을 이야기했어요. 죽음 충동을 이야기했는데 죽음 충동이 뭐냐 하면, 나는 기필코 살아남아야 돼. 이 사람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내가 기필코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무슨 충동입니까? 생존 충동처럼 느껴지죠. 그게 아니고 뒤에서 쫓아오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어느 한 순간도 죽음에 안 쫓긴 적이 없는데 프로이트는 누가 죽음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죠. 몰라요. 다만 ‘내가 어떻게 해서 어떤 결과를 낳는다.’ 거기에만 충실하지, 인간을 초월한 다른 외부의 세력이 인간을 지금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없어 그렇죠.

 

그러니까 요한복음 5장 28절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데, 이게 참 놓치기 쉬워요.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요. 선한 일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움직였던 것이 선한 일이고 그것이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언약이에요.

 

언약이 있는 사람은 지금 죽기 전에 이 말에 동의를 해요. 이 말에 동의한다고요. 왜? 예수님이 구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에 대해서 오케이, 동의가 돼요. 동의가 된다는 말은 자기 미래의 걱정을 본인이 이제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럼 주의 일에 의하면 하나님 일이 자기에게 어떻게 작용합니까? 제발 좀 죽어줘. 무덤에 좀 가줘. 내가 죽게 된 것에 대해 무한한 영광과 감사를 드리죠. ‘생일 축하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 아니고, 장례식에 가야 우리의 본질이 드러나죠. 모든 인간이 이와 같으니까요. 나에게 죽는 날이 있다는 것은,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부터 끝까지 주께서 말씀대로 착착 진행 중이라는 거기에 대한 신뢰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자, 이 시간 끝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주께서 이렇게 일을 한다면 우리의 육은? 우리를 왜 만들어놨는가? 어차피 살아있으면서 천국 만드는 능력이 왜 없느냐? 살아있을 때 천국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게 뭡니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천국 만드니까 이게 개판되어버렸어요. 안 되는 거예요. 잠시 되는 듯했지만 오래 안 가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 원인을 보니까 인간 안에 사망이라는 원수가 들어있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누가 그 원수의 세력을 뚫고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이제 사망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자기 백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신 겁니다. 이게 원천이에요. 모의고사 말고 본고사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5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게 고린도전서 2장 2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육과 우리의 육이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질이 달라졌다. 질이 다른 거예요.

 

주께서 하는 것은 천국과 연속성을 갖고 있지만, 아담에 속한 자는 흙에서 난 인생으로 끝입니다.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영이 온 사람은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죽은 자도 살린 영이 너희 속에 임하면 네가 있는 육신은 그냥 혈과 육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물 처리가 돼요. “이것은 고물이니까 내가 안 가져간다.” “그러면 뭘 주시렵니까?”

 

주님이 부활할 때 예수님의 부활이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전에 옛 아담에 속해서 육체를 고스란히 DNA 받은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예수님의 부활체로 너희가 변형될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습니까? 뭐 담보가 있어야지. 담보를 제시해보세요.”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그건 안 믿는데요?” “그럼 내가 죽은 것을 믿느냐?” “예수님 죽은 것은 일반인 죽은 것과 별다를 것 없죠. 사형 당했으니까.” “그렇다면 너는 나의 죽음,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 말씀에 너는 탈락이다.”

 

탈락하고 끝내면 안 되는데…. “탈락이다.” 할 때 “그 ‘탈락’이라는 요소가 내가 지니고 있는 썩을 혈과 육의 한계입니다.”를 말씀을 통해 영접하면 바로 그것이 천국 백성입니다. 내 혈과 육이 바로 그런 한계, 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들추어내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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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9강-고린도전서: 마지막 사랑

 

- 이 근호 목사

 

 

이제 9강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하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 에너지, 힘이 사랑에서 나오면서 사랑이 뭐를 뽑아내느냐 하면, 방언과 천사의 말과 그리고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사랑이 내 속에서 다 뜯어내감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만 남아있죠.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한 나, 그 자아는 사랑이 오지 아니하면 뜯겨나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오게 되면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는 것, 순교하는 것, 산을 옮길만한 믿음까지라도 그것은 사랑을 대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계속 유지가 되게 하는 그 힘은 오직 사랑에서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쭉쭉 나오면서 13장 5절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다. 왜? 사랑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나타나죠. 사랑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왜 우리를 이렇게 들뜨게 만드느냐?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나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겠지.’라는 이런 선입감, 말도 안 되는 그런 착각을 왜 자꾸 유도하시는가? 그것은 창세기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거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디서 드러내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서 ‘~을 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고, 너는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선악과 나무와 아담과 하와의 인간관계죠, 선악과와 아담과 하와 인간 둘을 창조해놓고 나무와 인간 그 둘 사이에 ‘하지 말라’를 설정해버린 겁니다.

 

이 말은 너희 인간들은 ‘하지 말라’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감히 피조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그냥 나도 한번 끼워주세요.’ 요청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단서를 미리 붙여놔요. 하지 말라는 이 조건, 이 조건에 인간이 들어오면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죠. 하나님의 사람. ‘하지 말라’를 늘 품고 사는 사람. 그러면 여기 인간이 중요하냐, ‘하지 말라’는 비중이 더 크냐? ‘하지 말라’가 비중이 더 큰 거예요. 하지 말라는 것을 했을 때는 나는 너를 이 땅, 에덴동산, 최고의 낙원동산에서 추방시키겠다는 겁니다.

 

자, 그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에덴이라는 극락의 기쁨이죠, 최고의 기쁨의 공간. ‘에덴이라는 최고의 기쁨의 장소에서 인간 내쫓고 그 자리에 자기 아들을 박아 넣는 것’ 이게 하나님 계획이에요. 인간을 내어 쫓고. 인간을 내쫓고 인간세상을 다녀갔던 하나님 자기 아들을 거기다 박아 넣습니다.

 

박아 넣으면서 나온 결과가 뭐냐? 골로새서 1장 13절, 사랑의 나라에요, 사랑의 나라. 인간을 내쫓지 않으면 뭐가 구성이 안 되겠습니까? 아들의 사랑의 나라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구성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 뜻은 일관성이 있어요. 나 너 내쫓고 싶다는 일관성. 너는 내 사랑의 방해물이 된다는 그 일관성.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아들 예수님께만 집착하고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인간에 대해서 하지 말라는 조건, 선악과 따먹으면 너는 죽는다는 뭔가 따먹지 말라는 조건까지 걸어가면서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그 사랑하는 아들이 지배하는 사랑의 나라만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계획하신 겁니다. 계획하신 거예요.

 

이번 강의를 통해서 몇 번 강조했지만 그냥 슬쩍 지나치고 놓치기 쉬운 게 뭐냐 하면,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왜 창세기가 마지막이냐는 질문을 했어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죠. 왜 창세기가 마지막이냐? 창세기를 보면 천지창조,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불꽃놀이의 불쏘시개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불꽃이 터질 때 친히 만든 것을 불로 싸질러 다 태우면서 팡, 팡, 팡, 팡, 여의도 불꽃축제처럼 화려하게 쇼를 하는 마지막 불쏘시개기 때문에 창세기는 마지막이 돼요.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뭐냐?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아들, 예수님 재림에 어떤 식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가설 수 있느냐? 재림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하지 말라’는 조건이 철저히 작렬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십자가 믿어도 안 되고 예수 믿어도 안 되고. 산을 옮겨볼까요? 그것도 안 돼요. 그럼 예언의 능을 과시할까요? 안 돼. 그럼 내 몸을 불사르기까지 구제할까요? 안 돼. 뭐든지 안 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되는 걸 무엇 때문에 굳이 성경까지 동원해서 주께서 일부러 찾아오시는 친절을 베푸시고,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걸 왜 먼저 사람이 착각하게 혼동하게 만드느냐 이 말이죠.

 

되지도 않고 사랑의 아들 나라에 가지도 못할 것을 마치 들어가는 것처럼 분위기 팍 띄워놓고 나중에는 “구원 받는 것은 네 뜻이 아니고 내 뜻이다.” 이렇게 입 싹 닦아버리면 실컷 투자했는데 투자비용부터 해서 그 정성부터 해서 본전 뽑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은 불공정 계약 아니에요?

 

실컷 했는데 은근히 기대를 팍 올려놓고 기대하지 마. 그럼 애초부터 찾아오지를 말든지, 애초부터 지옥을 보내시든지 해야지, 왜 간만 보시고 분위기 들뜨게 해놓고 이제 와서 “천국, 지옥은 내 일방적인 결정이다. 왜? 할 말 있나?”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느 말씀을 지키고 어느 말씀을 깊이 새기면 됩니까?”라고 한다면,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말씀을 지켜서 들어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럼 뭐냐? 말씀이 우리 속에 찾아오죠. 찾아온다고요.

 

‘재림’이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재림이라는 말씀이 있으면 ‘재림을 믿습니다’ 해서는 안 되고 재림이라는 말씀의 조건 자체가 우리 안에 장착되면 돼요.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나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질문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 어떻게 차근차근 말씀대로 순차적으로 자기 성취성을 드러냅니까?”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알아서 드러낸다면 우린 그냥 딸려가면 되잖아요. 딸려가는 조건이 뭐냐? “너,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것은 사랑이 안돼요.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랑이 자체적으로 자기의 코스를 밟아나가면 사랑이 가는대로 끌려가다 보니까 나중에 사랑이 완성을 보는 그 지점에 우리가 같이 끌려온 겁니다. 그것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게 골로새서에 나오는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할 때 우리 인간을 아무것도 아니라하는 것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사랑을 우리 안에다 다 담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 제목을 이렇게 정해봤어요, 미리. ‘마지막 사랑’. 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마가복음 12장 6절에 나옵니다.

 

마가복음 12장 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거기 ‘최후로’ 되어 있죠.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보내요. 마지막으로 보낸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이 세상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끝을 이야기하고 에덴동산에 따먹지 말라는 것은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끝과 시작 사이에 일관되게 추진되어온 하나님의 뜻은 오직 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사랑의 아들로 모든 것이 꽉 채워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사랑을 투입하면서 마지막 사랑까지 줬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 마지막 사랑을 위해서 마지막 질투, 최고의 질투와 더불어서 마지막 사랑을 투입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에요. 너무 사랑해서 질투하는 겁니다. 그 마지막 사랑에 대한 집념, 온 열정을 마지막 사랑에 다 쏟아 부었기 때문에 “이 사랑 건드리고 이 사랑 모독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라고 해서 발생된 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심, 질투, 진노, 그리고 지옥입니다.

 

지옥은 사랑의 아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이 사랑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를 지옥을 통해 반영해주시는 겁니다. 신명기 6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4절부터 보면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 온 정열을 다하여 오직 자기 아들을 위한 사랑의 아들을 만드는 데 있어서 방해되거나 그걸 모독하거나 하는 것에 있어서는 사랑과 더불어 따르는 질투심의 강도가 모든 것을 진노하사 진멸해버리는 겁니다. 이 땅에서 멸절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이 지옥 만드시는 그 열정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감을 잡고 그걸 이해하고 그걸 수긍하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가 같이 겸해서 느껴져야지, 사랑만 날름 챙기는 그런 경우는 없어요. 하나님의 질투심이 이 사랑에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것을 투자하고 맡겼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랑 만드는 그 열정 하나에 주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어요. 모든 걸 건 결과가 바로 사랑의 아들, 천국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느껴지는 게 아니니까 이 비슷한 노래 가사를 제가 하나 적어왔습니다. 진시몬이 불렀던 <애원>이라는 노래입니다. 그 가사를 한번 보세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병원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애원

 

나에게 남아있는 사랑을

이제는 다 줄 수밖에

이 사랑일 거라고 이 사랑 뿐이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단 한 번도 나에게 사랑은

기회를 주지를 않아

내 앞에 누워 있는데 이 사람만은 안 돼

차라리 나를 데려가

 

십자가 아닙니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의 사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를 살리고 내가 대신 죽는 것으로 마지막, 가사에서 한 번 더 강조해요,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이 사람에게 퍼붓겠다는 거예요. 흥분 그만하고 다음 가사를 보면

 

사랑한다고 행복하라고

이렇게라도 볼 수만 있다면

(자기 사랑이 너무 아파서)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의 사랑, 절절한 그 사랑을 위해서 ‘사랑의 대상자를 네가 임의로 한번 뽑아봐라.’ 내가 그런 선택과 권리를 너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선택한 것이 아들의 선택으로 넘어오는 것,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나와요. 어떤 학자는 그걸 ‘이중선택’이라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누구누구를 구원한다는 그 조건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조건이 나 예수님께 넘어왔다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임의로 뽑을 수 있는 권한, 선택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넘겨줬다. 왜?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이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그럼 아들의 사랑이 집약되어 있고 넘쳐나는 그 사랑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가 이미 창세전에 약조한 것이고 계획한 바였습니다.

 

안 돼요 이번만은 나 어떻게 살라고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어떻게 하면 돼요

나 뭐든지 다 할게요

한 번만 사랑하게 해줘요

 

뭐든지 다 할게요. 뭐든지 다 하는 것이 이 우주와 해와 달과 별을 불살라버리는 겁니다. 사랑 빼놓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진멸하는 거예요. 질투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아들 사랑 뿐이기 때문에, 이 사랑이 이 세상에 찾아왔는데 이 사랑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은 전부다 지옥불에 집어넣어요. 마귀부터 모든 인간들도 불에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나 뭐든지 하겠습니다. 세상을 다 불 지른다 할지라도 나는 이 사랑을 관철하고 말겠다. 이게 무슨 사랑? 마지막 사랑입니다. 마지막 사랑인지 마지막 스토컨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독한 스토커에요.

 

2절 가사를 보면 진짜 애원해요. 이 노래 제목이 <애원>인데 숙제입니다. 한번 꼭 들어보세요. 사랑으로,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절절한 안타까움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요.

 

고개를 저어 봐도 울어 봐도

변한 건 하나도 없어 (십자가 지시기 전 겟세마네 바위 붙들고 기도하면서)

왜 하필 나에게만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아픔을 주는지

 

사랑한다고 행복하다고

이렇게라도 볼 수만 있다면

안돼요 이번만은 나 어떻게 살라고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어떻게 하면 되요

나 뭐든지 다 할게요

 

한번만 사랑하게 해줘요

한번만 사랑하게 해줘요

 

지독한 사랑이 우주의 설계도면이었던 겁니다.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어요. 성령이 내려와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는 네 할 일을 다 해라. 창세전에 약속한 네 할 일. 사랑하는 아들아, 이 창조를 네게 선물로 줄게. 그리고 백성들도 너한테 선물로 줄게. 그런데 그 백성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었어. 죽었는데 죄로 죽었는데 네 백성을 사랑한다면 네 목숨 바쳐서 살려내라.”

 

이것이 아버지가 나(예수님)한테 허락한 마지막 사랑입니다. 마지막 사랑. 이렇게 사랑에 미쳐있으니까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질투도 너무나 합당하고 정당한 조치가 되는 거예요. 이 우주 전체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추진 계획 프로젝트에요.

 

지옥을 만드는 것도 오직 사랑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죠. 그것이 아가서 끝부분에 나옵니다. 아가 8장 6절에 보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 사랑이 너에게 하나의 문신처럼 네 속을 파고들어갈 것이다.

 

유한 락스. 락스를 몸에 바르면 피부가 상해요. 상하든 말든 주님의 사랑이 집요하게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말씀을 지킬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가 계산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이용해서 천당 가려고. 그런 것은 네 사랑이지. 퇴출대상이에요. 가만있어. 내가 찾아갈 테니까.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꽂아주게 되면 그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 사랑인지 어떻게 되느냐?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새겨지게 되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야, 죽음가지고 협박하는 마귀 너 나와!”

 

욥 있잖아요. 욥기 보면 “마귀 네가 욥에게 죽음으로 협박, 공갈해봐라. 내가 욥을 사랑하는 사랑이 센지, 네가 욥을 꼼짝달짝 못하게 하고 발발 떨게 만드는 그 죽음의 공포가 더 센지 내기 한 번 해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바둑을 보면 정식 대국은 아닌데 대국 방식 중에 ‘연기 바둑(2~3명의 선수가 팀을 이뤄 페어 방식으로 대국하는 것)’이라는 게 있어요. 3인조가 한 팀을 이룬다면 양쪽에 3명씩 있는데 한 사람 두고 나가면 이어서 두 번째 middle man이 두고 그다음 마지막 사람이 두고 이렇게 경기하는 거예요. 팀워크(teamwork)를 이루어서 하나의 대국을 이어지게 하는 거거든요.

 

성부, 성자, 성령이 팀워크를 이루었어요. 그 안에는 사랑, 하나님이 계획한 원래 사랑만 집요하게 작동함으로써 사탄의 세계와 대결하는 겁니다. 그런데 승부는 이미 끝났죠. 아주 독하게 사랑하는데 그 독한 사랑의 대상은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 때문에 벌벌 떨고 있어요. 죽으면 안 된다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온갖 몸에 좋은 것은 다 신경 쓰면서 듣고 이러죠. 그냥 안 죽고 살아남으면 남는 장사다,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사회에서 완전히 뒤집어썼어요. 그러니까 사랑은 “이렇게 하시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가오면 그건 가짜 사랑입니다.

 

“나 너 죽이겠다.” 사랑이에요. 그리고 네가 무서워하는 것을 내가 더 심하게 조정해서 그걸 의도적으로 몰아세워서 비로소 그 자리에 죽음보다 더 강한 게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우리를 자기 백성 만드는 지독한 집착이 우리의 죽음마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해내는 겁니다.

 

누가 우리의 사랑을 끊으리요. 오라 해, 오라 해! 이 대국에서 어떤 상대자도 다 오라 해! 환란? 곤고? 핍박? 웃기네. 더 센 거 없어, 더 센 거? 마귀? 마귀 떼로 다 와! 일곱 마리 말고 다 오라 해!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박혀있는 주님의 사랑을 끝내 끊어낼 수가 없느니라.

 

일방적 사랑이니까요! 지독한 사랑이니까. 주님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 어떤 사랑? 마지막, 마지막 사랑. 마지막 사랑을 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퍼부은 거예요. 질투심과 함께. 지독한 질투심과 함께.

 

그러니까 우리는 “주여, 제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제가 몸을 불살라 구제를 했습니다. 제가 예언과 방언을 하고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웃기지 마.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 기억해서 네가 또 무슨 계산을 챙기려고. 십일조 해서 뭐 또 얻겠다고. 그 나라 천국이 네 사랑의 나라야, 내 사랑의 나라야? 우리 확실히 하자. 내가 분명히 했지? 따먹지 말라고. 지금껏 했던 따먹었던 행세를 또 하고 있어. ‘내가 구제를 했습니다. 전도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거는 아무것도 아님을 방해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게 불속에 한번 들어가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래서 아가서 8장 6절을 계속 보면 “질투는 음부 같이 잔혹하고” 주님의 사랑은 너무 잔인해요. 너무 잔인해. 나에게 어떤 의미, 나의 가치가 약간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걸 잔인하게 파괴하고 파쇄해 버립니다.

 

상조 회사나 장례 회사들이 문제점이 있어요. 불교 미신 믿는 사람들에게, 극락 가는데 뇌물 좀 넣으라고 죽은 자에게 금반지를 그냥 끼우고 화장터 소각하는 데에 집어넣게 하거든요. 상조 회사나 아니면 화장터 직원들이 아주 잔혹해요. 재를 다 뒤져서 금반지 다 뽑아내는 거예요. 금이빨, 금반지를 다 뽑아냅니다. 싹 자기 것 하죠, 짜고.

 

그런데 그걸 누가 하느냐? 성부, 성자, 성령 3인조가 해요. 팀을 이루어서. 왜냐하면 예수님 사랑 빼놓고는 일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동네가. 그 사람의 자기 존재 의미,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안돼요. 그걸 미리 보여주는 것이 고린도전서 3장입니다. 3장에 보면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는 그 취지가 그 뒤에 계속해서 연속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예수님의 공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 지독한 마지막 마지막 사랑, 그 사랑 외에 다른 게 섞여버리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천사와 성령을 동원해 다 제거해버려요.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물 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처리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오직 사랑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7절).

 

그래서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 <사랑밖엔 난 몰라>. 숙제 하나 더 늘었습니다. 진시몬의 <애원>에다가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지금 가시면서 들을 게 두 개 생겼어요. 복음 찬송가입니다. 세상에 뭐든지 감사하면 되죠. 주의 일을 위해서 감사하면 못 먹을 게 없다고, 노래도 감사하면 안 들을 게 없어요. 송재원 노래도 가끔 들어주시고. 사랑밖에 난 몰라. 심수봉씨가 젊을 때 뭘 그렇게 알아서 노래를 불렀는지.

 

그 사랑의 위력은 교회 편안히 다닐 때는 어느 정도 얼추 수입되고 죽고 난 뒤에도 계산을 해야 되니까 돈은 돈대로 받아놓고 노후대책 됐다면 이제는 자기 영혼을 생각해서 교회 다녀볼까, 이렇게 이용할 생각하는 것. 그게 인간의 한계 아닙니까.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천국까지 자기능력으로 인간 승리해보겠다는 거예요. 마이웨이. 내 방식대로 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천국 가서도 자랑질하려는 그 의도.

 

그 의도가 ‘하지 말라’는 조건을 계산하지 않은 조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사전조치를 합니다. 그 조치는 바로 사랑의 성령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3인조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성령은 바둑 연기 대국에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역할이죠. 바둑에서는 그걸 ‘끝내기’라 합니다. 끝내기. 명칭이 아주 복음적 아닙니까. 끝내기. 포석(초반 돌 배치)-중간 전략-마지막에는 끝내기. 반집 승부. 끝내기를 성령께서 하십니다.

 

끝내기를 하는데 그 끝내기 기준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에요. 그 기준을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손에 있는 금반지 다 빼는 거예요. 기도한 반지 빼고 구제한 반지 빼고 성경 강의한 것 빼고 설교한 것 빼고 목회한 것 빼고 다 빼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하고 오롯이 사랑만 남는 걸로 성령께서 그렇게 친절하게 관리를 해주시니 이 마무리 사랑까지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실 제가 보기에 제일 난해구절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게 무슨 뜻이냐? 믿음, 소망, 이것이 온전한 데에서 나오는 부분적인 요소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니까 ‘내가 믿습니다.’, ‘내가 소망합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마저 없어버리면 이 사랑을 가릴 수 있는 마지막 방해물이 날아가죠. 내게 있던 믿음, 내가 했던 소망은 믿음, 소망으로 나에게 왔다가 나는 날아가고 내 속에 있던 믿음, 소망은 후닥닥 그 원천을 찾아가는데 그 마지막 도착지점은 마지막 사랑.

 

믿음, 소망이 선재해서 주어졌지만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믿음, 소망이 사랑으로 가죠. 사랑으로. 사랑에서 나온 소망이었고 사랑에서 나오는 믿음이었기에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뭘 툴툴 털어내느냐? ‘내가 예수 믿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를 다 털어내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일서 4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10절) ‘아마 신앙 초반에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기에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의 실현인 것으로 바꾸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그 말씀이 내 안에 말씀으로 유한 락스처럼 새겨들어오게 된 이 실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참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사랑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가끔 우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 요한일서 4장을 봅시다. 요한일서 4장 17절을 볼 것인데 그전에 13절을 볼게요. 아까 3인조가 하는 바둑에서 성령의 역할이 끝내기라 했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사랑의 아들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마무리 짓는, 끝내기 하시는 분이 3인조 중에 한 분으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남아있는 나의 의, 내가 뭔가 했다는 것을 다 처리하고 내게 사랑만 남게 하는 그 마무리작업을 친절하신 3인조 중에 한 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17절,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재림 날에 담대한 것은 이미 재림한다는 말씀이 이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재림하게 된 것을 압니다’가 아니라 재림도 주님의 사랑에서 남아있는 마지막 절차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재림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자꾸 내가 살기 위해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자기 남편 이름만 알고 재림도 몰라요. 예수님 이름도 몰라요. 다 잊어버려요. 이게 콩고물 돼서 흘러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안에 새겨져야 되는데.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씀과 더불어서 이미 우리는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었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가 작동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조치인 것을 받아들여야 될 텐데, “정녕 죽으리라” 하는데 “아니요.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나에겐 배 열두 척이 남아있습니다.”

 

열두 척이고 한 척이고 그거 소용없는 거예요. 어쨌든 악을 발휘해서 나를 천국 보내려고 시도하는 이 모든 시도가 말씀이 안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종교생활인 거예요, 종교생활. 그게 종교생활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담대함이 아니고 발발 떠는 거예요.

 

재력가인 엄마가 선생님하고 짜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문제를 다 빼냈잖아요. 다 빼내서 딸애는 집에서 미리 시험을 치면 되는 거예요. 시험지 있고 정답 있고 그 시험 치면 자기 반 1등인 거예요. 그런데 돌발사태가 벌어져서 시험지 빼내기 전 수학 시험을 쳤는데 40점 나왔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분이 이천 만원 주고 몇 년 동안 시험지를 빼낸 일이 있었어요. 아주 지독한 어머님의 사랑이에요. 그 딸 나중에 어머니한테 효도 많이 해야 돼요.

 

그거보다 더 독한 사랑이 있어요. 미리 시험지 다 빼내서 다 준 거예요. “유월절 양 있지?” “예.”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왜요?” “너만 내 백성이니까. 그 양 잡아.” “어떻게 할까요?” “그 문지방하고 문설주 있지? 거기에 피 발라라.” “이유가 뭔데요?” “묻지 말고. 지금 너는 이유를 몰라. 그냥 한번 발라 봐. 발라보고 일단 오늘 밤 어떻게 되는지 지나가보자.”

 

지나가보니까 옆집에서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아닌데 유월절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자기들끼리 “야, 이 집 이거(문설주에 양의 피) 있다. 넘어가자.” 넘어간다고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이에요. 천사가 죽이려고 왔다가 피보고 넘어간 날. 이게 유월절이고 그 유월절 양이 모의고사에서는 양이었지만 실제로는 연기 바둑에서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이 먼저 양 던져놓고 예수님이 자기가 던진 양이라는 기표, 문자를 자기가 집는 겁니다.

 

이게 <오징어 게임>에 나와요.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제가 은혜 받은 게 딱 한구석 있어요. 영희. 목에 담 걸린 영희 있잖아요. 담이 걸려서 눈동자만 굴리고 움직이지도 못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면서 쳐다보기만 한다고요. 움직이면 그게 여자든 남자든 노인이든 관계없이 기관총이 날아와서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영희가 보는 것은, 내 사랑의 대상이 누구냐. 지독한 마지막 사랑을 받을 사람이 누구냐만 살피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진멸해버리는 그 게임. 오징어 게임, 최고에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조건 자체가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는 순간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봐야 돼요. 복음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너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냥 괴물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괴물한테는 인정도 동정도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계속 보게 되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뭐가 없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제가 수십 번 이야기해도 이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이제는 결심했어. 예수 믿고 복음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또 이렇게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지 마세요. 정말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줍니다. “너 무섭지?” “아니.” “두렵지?” “아니.” “왜 안 두려운데?” “주의 사랑이 그렇게 했나보지, 뭐.”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너 그 소리 들으니까 약 오르지?” “아니.” “네가 막 성질나지?” “아니.” “왜 그 이야기 듣고 성질이 안 나지?” “주께서 그렇게 했나보지, 뭐.” 이렇게.

 

주의 사랑, 그 지독한 사랑이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위해서 이런 불에도 집어넣고 이런 골짜기에도 집어넣고 온갖 모욕과 온갖 비난과, 특히 제일 힘든 게 억울함이잖아요,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당하는 그 억울함, 그 모든 곳에 다 집어넣어놓고 과연 이 인간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는 자라면 어떤 경우라도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본전 좀 챙겨주면 안됩니까?’라는 소리를 안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있는 본전도 다 뽑아내는 겁니다.

 

자, 고린도전서 16장 봅시다. 마지막 사랑이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 사랑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진정 복음대로 표현했어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주 당당하게. “내가 늘 이야기했지?” 이런 식으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누구한테 억하심정이 있습니까? 감정적으로 나오는 겁니까? 이게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미운 게 아니에요. 그냥 현실 자체가 이래요. 주께서 ‘사랑밖엔 난 몰라’ 그 쪽으로 이미 추진을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 본인이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죠.

 

끼어든다면 어떻게 끼어드는가? 16장 1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라. 아, 담대함, 두려움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구를 멸시하지 않는 거예요.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게 저 사람은 이렇다, 이 사람은 이렇다 할 자격도 없으니까요. 그런 자격도 없어요.

 

누구누구 신앙은 뭐 이렇고 누구누구 신앙은 우수하고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내부적으로 무서움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자기 무서움이 탄로 난 거죠. 두려움이 드러난 겁니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을 때, 누구에게 접근하고 접촉되고 닮고 싶은 모델을 상정하고요, 그 모델과 가까이 있나 멀어졌나를 통해서 내 신앙이 어느 수준인가를 측정하는 자체가 두려움이에요.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사람하고는 상대할 가치가 없지요. 가치가 없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사람이 오든 내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받은 사랑뿐입니다. 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네가 형제를 미워하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이야기는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못 지킨다. 내 개별적 자아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그런 말씀으로 다가오시면서, 다시 한 번 네가 밟을 때마다 지뢰 터지듯이 잘난 네가 늘 팡팡 터져버려라.

 

그러면 남는 것은 오직, 사랑밖엔 난 몰라. 깨어지지 않는 내가 깨어지도록,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사랑을 날마다 지뢰처럼 맞닥뜨리게 하는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스케줄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사랑과 환경을 몰아세우신 거예요.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같이 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이제 여러분들은 성경 전체 뜻을 다 알았죠?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모든 깊은 뜻을 다 알게 하셨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은 다 알아요. 다 안다는 것은 성경구절을 다 안다는 것이 아니고, 전체 프레임을 다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스케줄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아는 거예요. 아는 상태에서 비로소 이 말씀이 이해가 돼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뭡니까? ‘하나님은 자기들의 팀워크를 자랑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밖에 모르는구나.’ 그렇게 이해가 되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성부, 성자, 성령 3인조가 드디어 자기들끼리의 사랑관계를 개시했구나. “비둘기 같이 내려” 또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끝!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만의 만족스러운 세계 건설에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예수님의 자기 공로를 담는 사랑의 그릇으로 지독한 질투에서 나온 사랑을 일방적으로 담아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공간에다 백성으로 영원한 영생이라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추방된 땅에 있었던 영생나무의 영생을 맛보도록 조치를 해놓고 잠가버려요.

 

쥐나 개나 오지마라. 올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올 이유가 없어요, 주님의 영이. 딱 걸어놓고 이 사랑을 모독한 자에 대해서는 질투심으로 “지옥이나 가라”고 마귀한테 명령하는 것.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나타나 있고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알 필요도 없고 관심 없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이것이 내가 스스로 방해물이 되어서 몰랐던 진짜 현실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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