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글
수련회 교재 나타난 천국 고린도후서
[ 2026년 겨울 수련회 교재 ]
나타난 천국
- 고린도후서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1. 가짜 인간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가짜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일반 사무실에서 ‘바빠 보이는 책상 꾸미기’ 같은 것이다. 최대한 바쁘게 보여야 한다. 서류도 책상 위에 잔뜩 쌓아둔다. 겉보기엔 중요해 보이는 종이지만 실은 그의 바쁜 삶을 연출하는 단순한 소품으로, 수 주간 그냥 놓여만 있는 것들이다. 또한 보여주기를 위해 컴퓨터 모니터 2개와 노트북이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기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무척 중요해 보이는 샛노란 포스트잇으로 더욱 심도 있게 꾸민다.
모니터 한쪽 화면에는 진짜 복잡한 코딩 화면을 띄워놓고 다른 화면에서는 상사에게 온 이메일을 띄워놓으면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모두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모두가 언제나 끊임없이 뭔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그렇다면 진짜 인간은 어떤 식으로 이 사회에서 규정 받나? 진짜 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은 자본시장에서 결정한다. 시장은 상품들이 출하되고 거래되는 현장이다. 인간마저 상품화되는 것이다. 괜찮은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다면 그 여부로 ‘진짜’라는 판정을 받는다. 자본시장에서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서 구매자가 되고 또 전시된 상품이 되어 팔려나가기를 고대한다.
인간이 품고 있는 노동 가치로 인해 자본시장에서 인기 있는 상품이 된다면 내어놓는 노동의 질로서 질 좋은 인간이 된다.
자본주의는 오직 수익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수익을 남기게 하는 노동은 단연 사람 대우받는 ‘참된 인간’의 범주에 해당한다. 이것이 ‘계급’이다. 자본시장에는 별의별 노동들이 출시된다. 양계업, 세탁업, 가수, 원양어업, 원예가, 버스 운전사, 대장장이, 무당, 양봉업, 영양사, 광고대행사, 변호사 등의 직업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서도 노동 업무는 정밀하게 세분된다. 인사, 홍보, 마케팅, 영업, 경영 전략, 감사, 정보 기술, 혁신, 연구 개발, 물류, 회계 관리, 자금 조달, 직원 교육, 품질 관리, 브랜딩, 서비스 담당, 고객 관리, 프로젝트 관리, 이동성 사업 개발, 고용과 구인에 대한 컨설팅, 환경 조사, 인가 처리 등등 일자리가 그득하다.
수직 구조로도 구분된다. 실무 생산직, 사무직, 중간관리직, 임원, 고용주 등등.
하지만, 세상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으로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두 개의 계급, 즉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명하게 구역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대립에 포함되지 않는 층이 늘 존재하는데 괜찮은 인간 상품으로 알려지기 위해 쉴 새 없는 투쟁의 요동으로 찌꺼기가 계속 양산된다.
계급투쟁에서 일단 튕겨 나와 유보적이고 모호한 위치에서 어슬렁거린다. 구매자도 아니고 판매자도 아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아니다. 존재할 이유와 의미도 없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계급투쟁 여파로 등장하는 잔존세력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다수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민(人民)이 아니면서 인민(人民)에 편입되기를 고대하는 자이다. 인간 사회의 잉여로 남는 어떤 것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트랜스-주체이다.
그들은 그저 이 사회 속에서 ‘흐름’에 불과하다. 제자리가 없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전체 인간 사회는 온전히 정립되지 못한다. 자체적으로 장애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어두움이요 강제로 억압된 공허다.
이들로 인해 인간, 인민들 전체가 모두 진짜인척하는 가짜로 드러난다. 가짜들이 참된 인간인 척하려면 그들의 상상들이 현실 자체인 양 우겨야 한다. 그래서 국가란 허위적 망상체로 등장한다.
2. 가짜 사회에서의 자유
어느 영화에서 웨이터는 손님에게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넨다. 그는 크림 뺀 커피를 요구하는 손님에게 “죄송합니다만, 크림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크림 뺀 커피 대신 우유 뺀 커피만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물론 친밀의 표현이다.
그런데 손님은 진지하다. 이 농담에 대해서 손님은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크림을 뺀 커피이지 우유를 뺀 커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손님은 크림에 유혹을 느끼고 있으며, 강박적인 희생의 제스처로서 정확히 크림을 빼고 싶어 하는 것일 뿐, 우유를 빼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욕망하는 대상은 크림을 뺀 커피다. 즉 커피 자체보다 ‘크림이 없는 커피’를 원한다. 그래서 크림 뺀 커피 대신 우유를 뺀 커피를 받는다고 해도, 그가 원하는 것은 크림이 아니라 ‘크림이 없는’ 상태일 것이다.
이 사회는 주체는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고대하고 그리워하는 주체이다. 마치 엄마가 갖다준 과자보다 아빠가 가져다준 과거를 원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즉 인간 사회에서 주체는 지배받고 있고 상품으로 자기 노동의 질에 대한 구매자에게 호명되기를 바라면서도 나름대로 자유를 행세하고 싶어 한다.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무언가를 하려는 자발적인 결정이 아니라 자발적인 요구를 알아서 통제하는 형태의 자유다. 즉 자신이 정말 원하는 그것조차도 포기할 줄 아는 데서 진정한 자유를 맛본다. 비록 자본시장에 팔리고 또한 팔리기를 원하는 노예 신세이지만 이 자유만큼은 간직하고 싶어 한다.
개인이 주체로 호명 당하는 것은 단순히 구매자에게 개별적으로 팔려나가는 구매 계약에 머무는 그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인간 사회 전체를 덮는 이념을 장식하는 타일 한 조각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조각은 단일 사회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단일화될 수 없는 다양한 이념들로 겹친 색깔을 보이게 된다.
가족과 직장, 친족, 친구, 동료와 친밀한 관계로 연결된 지역사회 정신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시대가 아닌 과거 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전통이 자기 삶의 시대에 재해석되어 생산된다. 그 결과 주체는 단지 자기 노동을 구매하려는 자의 세계에 일방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호명 공간을 넓히는 일이 된다.
따라서 개인은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운신의 여지’를 갖게 된다. 나름대로 사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현재 자신의 행보를 통해서 내일은 더 괜찮은 노동 실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점점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진짜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매 순간 비록 개인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지는 이미 구성된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주체의 자유란 아직 자신에게 있어 덜 호명된 요소를 품고 있음을 스스로 용납하는 것이다. 그 누구로부터도 온전히 자신의 자율성이 다 빼앗기지 않는 절대적 정체성을 여전히 간신히 지니고 있을 때만, 인간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느낀다. 겉으로는 자유는 늘 타인에게 넘어가지만,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게 있기에 자신을 짐승도 노예도 아닌 진정한 자유를 지닌 인간이라고 여긴다.
3. 국가라는 이름의 망상
국가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인위적인’ 형성물이었다. 상품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지상과제인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생성된 개념이다. 그저 혈육적인 인간 대 인간의 정(情)으로 묶여서 친근한 맛으로 살아가던 친족 공동체가 말살된 후 체계적으로 튼튼하고 오래가는 공동체로 유령처럼 행세하는 것이 국가다.
즉 국가란, 가족의 품을 떠나 개인이 홀로서기 하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잡아주는 ‘궁극적인 큰 어른 상’이 국가다. 의젓하고 안정적인 ‘아버지 같은 권위물’이다. 개인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내는 명분을 은근히 제공한다. 모든 개인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국가대표’다. 마음속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확실한 소속감이 ‘주민등록증’ 발급을 통해 실제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곧 국가이지만 ‘자본’이라는 종교를 대신할 수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자본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실질적 아버지를 위해서 국가기관은 행동대장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제대로 일 못하면 ‘자본의 자식’으로부터 미움받고 배격당한다. 현대 인간에게 있어 믿음의 대상은 자본, 곧 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본인들부터 자본에 충성하고 자본을 믿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면서 마치 ‘진심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라고 합리화한다.
국가를 믿지 않고 돈과 자본을 탐하면서 왜 인간은 국가를 요구하게 되는가? 그것은 정치적 허상이 자아의 허상을 덮어주어 국가도 실상을 자기로부터 인정받는 동시에 자신도 덩달아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다.
민주주의 안에서 국민은 국가가 만든 법으로 실상의 범주로 간주한다. 마치 가두리 양식장 안에서 펄떡이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국민은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것이 ‘국민 주권’의 실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나 국민이나 돈 없이는 못 산다. 그리고 대의적 민주 절차(국회의원 선출)는 일종의 사기 행각이다. 질적으로 아무런 추가적인 것 없는 단지 형식과 절차 만들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고 원자화된 다수 의견의 주권으로서의 진정한 정치적 주체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오늘의 국가가 갖는 실제는 투표가 아니라 자본의 확보이다. 이를 부정하는 경향으로 정치가 작동한다면 이는 점점 뻔뻔스러운 일이요 공공연한 사기다. ‘민주적인’ 정부가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의 실체성을 감추기 위한 허위의식이다.
군중은 함께 말할 때마저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발언에 보조를 맞춰야 하고, 리듬과 조화를 충분히 이뤄야 한다. 의미 있는 행동이나 말하는 행위는 청각을 통해서 신체적으로 관계 맺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이다’라고 말하면서 지금 멈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움직이기 시작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주어진 시간 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멈추려고 하지만 일부는 계속 움직이고 일부는 각자의 보조에 따라 움직이고 휴식한다. 시간적인 연속성과 협력, 신체적인 근접성, 청각적인 범위, 결집한 발언 등, 이 모든 요소는 집회와 시위에서 근본적인 차원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인민’이라고 말하는 발화 행위에 전제된 것이며 언술의 계기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들이다.
오늘날 다들 살기에 바빠서 이런 모임이 안 된다. 이처럼 정치적 의견 수립을 단일화하고 있다는 명분을 걸고 정치가가 설치는 것은 ‘정치’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가짜 노동 생산 현장이다. 적은 일을 하면서 바빠 보이는 수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국민에는 가상 현실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개념은 부정성과 무능함의 통일이다. 자본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는 얻어진 권력 재현을 스스로 환호하고 싶어 초월적인 법 체제를 동원해서 정당화하고 싶은 것이다. 즉 국민은 스스로를 법으로 꾸며서 그 형상화된 자기를 자랑스럽게 고정화되기를 원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내가 원하는 상징물 앞에서 자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의 고백이다. 즉 내가 만든 환상에만 나는 진심을 다한다. 인간은 돈 이외에 모든 것은 환영(幻影)이다.
4. 가짜 인간의 세계
인간이 세계상을 만들기에 그렇게 구성된 세계 안에서 진정한 객체가 될 수 없다. 주체적으로 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만든 틀을 보면서 자신을 객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주체는 현실 전체를 초월적으로 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초월론적’이라는 말은 세계에 접근하는 인간의 방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우리는 세계 속의 수많은 객체 중 하나이기 때문에 현실을(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 즉 우리의 현실 접근 방식은 우리 자신의 특정 관점에 국한된다.
이런 의미에서 매트릭스 symbolic Matrix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주체)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없으며,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자신이 보는 그것을 따로 만들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초월성’이란 주체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계속 세상과 국가와 현실을 객체로 바라보는 이유는 자신을 ‘가짜 인간’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짜 세상에서 삶은 어쩔 수 없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미를 적극적으로 모으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의미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5.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
인간은 인간 바깥에서 규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다. 만약에 인간이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배제된다면 더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흙일 뿐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즉 ‘너는 흙이다’라고 교정받는다. 이는 처음 인간을 만들 때 근원이 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창 1:26) 생명나무의 존재로부터 새로이 관련지어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그렇다면 가짜 인간인 오늘날 사람들은 ‘상실된 존재’다. 생명, 곧 하늘의 형상이 상실된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맞는 새로운 인간을 썩는 몸이 아니라 썩지 않는 몸을 기반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신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가짜 인간들은 자신의 결핍과 상실을 ‘선악 지식’으로 채웠다. 악마의 마음이 그들 속에 들어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자식에게 예수님의 목숨을 맡겼고, 십자가 살해 사건으로 인하여 악마는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선악 지식만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를 원하심이 드러났다(요 6:53-55).
이 살과 피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Ⅱ 본론
(줄거리)
고린도후서는 교회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광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위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주 예수님을 인도하셨던 그 방식대로 주의 환난에 동참된 교회도 그렇게 인도 하신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1:3-7).
이 일을 증거하고 알려 주기 위하여 사도가 있으며, 또 그 사도의 고생도 그것을 겨냥한 일이다(1:8,15-19).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시고 한 일이 어떻게 중도에 포기될 수가 있겠는가? 어지간하거든 용납하는 것이 옳은 것은 그리스도의 용서가 진가를 발휘하기 위함이다(2:1-17).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주목적이지 세상일로 만족을 갖는 것이 아니다(3:5-11). 그 예로 모세 때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주의 말씀을 들고 온 모세를 그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주목하지 못했을 정도여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만 대화가 된 것을 볼 때, 그 영광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고 사라질 정도라면 주의 영이 갖다주는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는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찬란한 영광이 이제는 주의 영의 자유함 때문에 그러하다(3:12-4:6). 따라서 그 영광의 모습이 이제 사도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그야말로 세상도 감당 못 하는 사역으로 나타난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4:8-9).”
사도는 자신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날마다 죽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결국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쏟게 하고(4:15) 보이는 영광보다 보이지 않는 영광에 후패한 몸의 소망으로 삼게 한다(4:16-5:7).
이러한 영광으로의 귀의는 우선 자기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만을 위하여 죽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을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여 성취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해방의 유일한 동기이기 때문입니다(5:14-17).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는데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있을 수 없다고 사도는 보고 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화목의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않고(5:19) 다른 데(지옥)로 이동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그들과는 화평하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5:21).
이것을 가지고 사도는 의(義)라고 표현하고 있다(5:21). 즉 화목 당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사역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화목 의지가 사도의 생활과 일생 가운데 드러나는데 세상이 보는 안목과 실제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곧 죽은 것 같으면서도 살아나는 능력의 의의 병기로 사용되기 때문이다(6:7). 따라서 화목의 결과로 나타난 의와 세상과 비화목된 상태에서의 불의가 어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삼았으니 빼앗길 수가 있겠는가?
사도가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 이를 때까지 있었던 근심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는 복된 근심인 것이다(7:10).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면 그것이 실생활에서 번져 나와야 한다.
기도나 연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기반을 두고 나타나야 한다(8:7/9:8).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사도됨을 통해서도 외모에 집착해 있는 교회에(10:7) 외견상 보잘것없는 것으로 진리의 파수꾼을 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11:15).
예를 들면 몸이 약하다든지(10:10) 말하는 것이 신통치 않다든지(11:6) 대가 없이 진리를 전하는 이것이(11:7) 사실은 오히려 진리는 외모와 상관없다는 증거와 교회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갖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자신이 받은 고생과 그리고 신비 이런 것이 자기의 사도됨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약한 그것이 나에게 능력이다(12:10). 이 약함은 곧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심을 보여주는데도 나타난다(13:4-5). 그리스도가 약함으로 십자가에 달렸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분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런 자세와 믿음이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려진 자이다(13:5). 믿음의 세계에서의 온전이란 곧 우리가 약할 때이다(13:9/12:9).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이 자신을 파견하신 것은 교회에 대한 위로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 과정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로지 은혜와 진리의 본질을 알려 주시는 데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는 역사 속에서의 교회는 주님이 역사 속을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여정에서 비로소 참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것이 곧 영광이 가지는 역사 속에서의 진면목임을 알게 된다.
Ⅲ 결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인간들이 몰랐던 점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 것을!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5)” 그들은 자신을 위해 울 날이 올 줄은 고려하지 못했다(눅 23:28).
과연 예수님의 피의 효과가 그들에게는 저주로 퍼부어졌다. 영원한 지옥의 근거가 십자가 피에 있었다. 내가 천국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감히 인간이 할 질문이 아니다. 태어난 공간 자체가 이미 저주로 꽉 찬 공간임을 비로소 알게 된 자가 십자가 속으로 옮겨진 천국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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