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자 (미혹자)

모든 인간은 유혹자이다.

남자는 정치꾼으로써 평생을 발정난 짐승처럼 자기영역의 방어와 남의 영역의 공격을 통해서 신됨을 추구한다. (자기영역을 항상 살피고 자기발전의 유무를 늘 따지면서 자기 배설물로 영역표시를 함)

여자는 종교꾼으로써 평생을 발정난 짐승처럼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누구의 사랑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는 바로 저런 남녀에게서 태어난 유혹자로써 선악적인 자기만을 사랑해 주지 않으면 부모를 갈아치워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어쩌면 에덴동산의 뱀의 유혹을 보며는 지금의 남녀 보다 어린아이가 더 뱀의 유혹과 흡사하다.

오늘날 어린아이는 없다. 유혹자 뿐이다. 선악을 아는 유혹자 아이들.

물론 성경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수많은 지식정보를 습득하다 보니 어른 보다 더 뛰어난 시각으로써 사적인 판단으로써 신을 흉내내는 종교성이 가득하게 되었다. 즉 어른 보다 더 율법적이다.

(왕하 2:23, 개역)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왕하 2:24, 개역)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과연 대머리 라는 의미가 어떤 근거로 해서 저들에게 악이 되고 저주가 되었는가? 자신들의 처음모습이 대머리가 아닌가?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 다 대머리 이다.

결국 모양새가 좋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판단인데 그 판단은 어디서 왔는가?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온 것이다.

그 부모는 어디서? 레위기에 의하면 대머리는 부정하다는 취지로써 거룩과의 차이성을 드러내었다. 아이 조차도 태어날 때 부정한자로써 태어났고 그 어미도 아이를 출산함으로써 부정함을 제거하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율법을 왜곡해서 보았고 그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줌으로서 곰에 찢어서 죽이는 것이다. 즉 몸 그 자체가 부정하고 그 몸 그대로 부정한 몸을 물려받았기에 그 몸을 겨냥한 십자가라는 마음 판의 할례(세례)를 실행하시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참 지식이란 없고, 자기를 위한 지식은 결국 율법적이며 그런 율법적인 사고방식은 처음자리에 해당되는 무능자 어린아이에게 조차 유능자로 만들어버리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는 유혹자요 미혹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우상 숭배자는 즉사 시킴이 마땅하다.

인간의 유능은 결국 타인을 죽이는 짖 외에는 없다. 안다고 한 것이 남을 죽이는 것이고 남을 살리겠다고 하는 것이 어린아이 소자를 연자맷돌에 매달아 빠뜨려 수장시키는 짖 뿐이다.

오늘날 종교꾼들이 판치는 교회의 중고등부와 주일학교에서의 아이들을 보면 모두다 유혹자이다.

자신들이 어떤 선생이 좋고 수업방식은 어떻고 모든 판단 기준이 자기유익의 기준으로써 미혹자가 되어버렸다. 그것을 부모들은 나무래는 선지자로써 처음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자리 자체가 상실되어버렸고 지워졌고 없어져버렸기에 부모가 더더욱 모르기 때문에 처음자리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유혹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판단을 부채질하게 된다.
(집단 이스라엘은 그래서 20세부터 성인으로 인정하면서 피에 대한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 그 이전은 20세 이상으로부터 피에 대한 증거를 들어야만 한다. 그것이 제도 속에 묶임으로써 집단 이스라엘을 이끄는 부모교육이요 증거이다. 그러나 지금은 20살도 안되는 아이를 위해서 집단 교육이 이 아이의 사적인 지식 습득에 동원이 되는 주객이 뒤바뀐 전도된 입장이 되어버렸다. 세상 학원처럼 개인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 되었기에 지극히 개인을 위한 사교육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접어야 할 판국이다. 구약의 사적인 제사장이 된 사사기 때의 모습과 같다.)또 그런 아이들의 선생조차도 마찬가지이다. 무능자로써의 은사가 아닌 유능자로서의 은사를 소유했다고 유혹자로써 나서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부모나 선생을 부모라고 선생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유혹자 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내용이 유혹이 되는 지식이 아니면 그런 지식은 아예 발을 못 붙이도록 만들어 버리는 유혹자들의 세계의 우상지식만 난무할 뿐이다.
그러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될 수가 없게 된 시스템 구조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어른인 남자 여자 보다 더 불쌍한 존재들이 어린아이다.

자기 부모 즉 자기 기업을 자기 손으로 찾아나서는 고아들 뿐이기 때문이다.

믿을 구석은 자신의 취사선택 뿐이다.

딸랑 되도 않는 선악으로서 남을 미혹하는 그 판단 기준으로써 취사선택하고 있으니?
꼬래 백날 선택해 본들 자기 거울 속에 비쳐진 자기 자신만을 찾을 뿐이니
아무리 찾아본들 그 기업은 가짜임을 누구보다 자기 자신만이 더 잘 안다.
자신은 고아이기에 고아가 아무리 거울을 쳐다본들 고아 라는 우상만 챙길 뿐이다.
자기 투사, 자아 투시, 자기 반사, 자아 투영, 자아라는 우상 뿐인 거울 이다.
유일한 성경은 자기라는 성경이다. 거룩한 거울이다. 자기 내부의 선을 개발하는 짖을 어른들의 세계를 흉내내면서(엉터리인줄도 모르고) 그런 선악의 유혹의 짖을 흡수 빨아 당겨서 연기를 하는 연기자가 되어버렸다.
외부에서 비춰주는 빛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가 외부에서 오는 왜곡된 가짜 사랑이라고 판단되거나? 잘못된 사랑이라는 욕망이 들어오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고 자신을 스스로 챙기는 방어기재를 발휘하는 순간부터 그 결핍성을 채울려는 노력은 가히 폭력적이거나 아니면 자해적이다. 남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가해성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살이라는 자해성으로써 자기가 자기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끝까지 유혹자로써 남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딱 하나 외부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사랑이 없는 기업이 없기에

뭐든지 우상화 하는 작업을 어린아이 스스로 하는 유혹자가 되어야만 살아남는다는 모습을 갖추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약속이 떨어지고, 그 믿음의 사람이라는 조건을 자기 결핍 속에서 채울려고 하다 보니 가히 모든 유혹들이 자기 속에서 다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이 60세 이상의 어른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은 바로 저런 모습을 미래에 축약해서 압축되어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선취의 모습이라고 보면 될까?

그야말로 판박이 붕어빵 그대로 이다. 그 애비의 그 자식이기에 결국 부모의 반사 품, 투시 품,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거울로써 나타내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의 해결방안은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 라는 실질적인 부모를 개조 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개조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갈아 치워 버린다. 다른 부모를 제시 한다.

(창 15:6, 개역)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7, 개역)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 15:8, 개역)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 15:9, 개역)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개역)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개역)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창 15:12, 개역)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 15:13,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개역)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개역)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개역)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 15:17, 개역)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8, 개역)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개역)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개역)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개역)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기업 자체를 갈아치워 버린다.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이 무상으로 주시겠다는 자신의 기업되심을
아브라함은 약속에 맞는 조건을 갖추면 챙길수 있는 기업으로 착각한 것이다.
(쪼개진 양쪽 마주보는 그 사이로 횃불이 지나감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자신을 치셔서 아브라함을 유혹자의 세계에서 빼내겠다는 지독한 편애, 쿡 찍어서 찜해버렸다는 뜻이다. 편애란 다른말로 누구는 버림받았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자신이다. 이 기업을 무슨 수로 아브라함 본인 스스로가 추구할 수 있는가? 그 차이성을 아브라함의 엉터리 믿음과 대조시키는 것이다. 원치 않는 기업? 죄와 넉넉하게 싸우는 기업(여부스=음부=지옥의문)만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우상 단 하나도 못 이긴다. 유혹자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 마저도 못이긴다. 음부의 권세를 이겼다면 다 이긴 것이다. 용서를 받았다면 다 받은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속 속에서 특별한 존재로써의 여자들이 출현하는데 그 여자들의 특징이 바로 원수의 문을 여는 자들이다. 마리아는 한나의 기도처럼 두 세계의 전쟁을 보고 본 그것을 그냥 봤다 라고 표현하는 식의 두 세계의 싸움을 붙여버리고 자기는 정작 얍샵하게 빠져 버린다. 여자의 역할은 바로 두 세계를 싸움 붙이는 일이다. 두 아담의 전쟁이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묵시 전쟁)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니 누가 자기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놈이 어디있는가?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말이 되게 인간들 속에서 인간 서로 서로에게 유혹자로써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아들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유혹자의 세계 우상의 세계 미혹자의 세계에서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그 네트워크 연결망을 끊어버리고자 오신다.

아브라함 자신 내부 스스로의 판단 연결망조차도 하나 하나 일일이 끊어버리러 오신다.

상상도 못할 기업(부모=조상)임을 알려주신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기업이요, 믿음이라는 부모요, 믿음이라는 묵시의 세계의 하나님이다.

스스로 죽는 하나님, 스스로 제물이 되시는 하나님, 십자가에서 유혹자가 되어버린 인간의 손에 죽음으로써 그 유혹자를 빼내실려고 죽는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린아이라는 모습으로 온 약속의 씨앗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동안의 자신의 모든 유혹자의 모습을 손내려 놓고 오로지 장대 높이 달린 그 인자의 모습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그 인자는 아브라함을 반사 시킨 모습이다.

자기가 자기를 챙길려는 그 애처로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유혹자의 모습이다.

불뱀의 모습이다.

자신들의 엉터리 부모 모습을 엉터리 기업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기에 그대로 세뇌 시키고 오염시켜서 그 어린아이 하나 하나 마져도 유혹자로써 만들어 놓고만 그 모습을

그 자기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발견하라는 것이다.

성화론자들이 교리의 결핍성 신학 지식의 결핍성 성경공부의 필요성 성경지식의 결핍성을 통해서 서로 서로에게 유혹자로써 등장한다.

어떤 누구도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인 십자가의 죽음을 보라는 자는 없고

자신의 정보 결핍에 대한 채움을 서로 서로가 강조하면서 유혹자로써 나선다.

바로 이런 모습이 기업이 없는 모습이다.

그런 정보 백날 끌어 모아 본들 허깨비 허상이다. 안개를 잡는 것과 같다.

그래도 인간은 포기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몸이라는 하드디스크 자체를 고장내 버리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죽음의 끌어당김 속에서 하드디스크는 심심하면 퍽 하고 나가버린다. 다운현상. 인간으로 치면 정신줄 오락 가락 하는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만드신다.

부질 없는 하드채우기를 백날 해본들 묵시란 역사 속에 저장이 되질 않는다.

하염없이 다짜고자 하드 HDD 에 만땅 채워본들 그 하드 수명 단축 시켜버리고 메모리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그 삭제의 일과 차단의 일을 성령님이 전담반으로서 하신다.

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고 하신 것일까?

무능자이기 때문에 기업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처음자리에 놓였기데 첫사랑을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일한 것이 없이 무조건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다가온 그 첫사랑의 주체자만 외부에서 오신다면 내 쪽에서 아무리 유능자로 만들어도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런 유능은 그저 유혹자일 뿐이다.

어린아이 같은 처음자리에 있는 무능자

잃어버린 자

무능하기에 외부에서 찾아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겨자씨와 같은 아주 작은 소자

자기 부모 자기 기업 조차도 찾을 길이 없는 그 잃어버린 고아를 찾는 분으로써

예수님은 지금도 유혹자들 뿐인 어린아이 속에서 자신의 아이를 찾으신다.

왜 예수님은 어린양으로만 오셔야만 하는가? 어른 양으로 오시면 안되는가?

저들의 고아 됨의 기업을 대신 무르고자 고아된 수고하는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자 머리 둘곳 없는 천하의 고아로 모든 기업을 빼앗김 당한 목숨 바쳐질 분으로써 오신 흠없고 산한 무능하고 어리석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겨자씨만한 씨앗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이 겨자씨 만한 작은 씨앗이 모든 종말을 고하는 씨앗이다. 작고 어리고 나약하고 추하고 싫어버린 어리석은 모습이 결국 종말이라는 묵시성을 상대적인 역사 이미지와 차이나도록 하기 위함이였다. 해석 불가로써 어떤 가능성도 다 단절키 위한 것이였다.

(렘 11:19, 개역)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종말의 이미지야 말로 모든 가능하다는 이미지를 단절 시키는 어리석은 이미지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어린아이의 순한 이미지든 남자의 든든한 안전감있는 거성탑의 이미지든 여자의 아름답고 사랑 스런 이미지든 이 모든 것이 유혹의 이미지 아다 라는 것 앞에서 십자가의 이미지는 저런 이미지와 차이나는 단절의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이다.
Posted by 김 대식
,